광장의 주인은 누구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부터 경찰이 서울광장을 전경 버스로 폐쇄하고 시민들의 출입을 통제하면서 광장의 ‘소유권’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이 문을 열었던 2004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문화행사와 축제를 열기 위한 장소로 광장을 조성했다. 2002년 시청 앞에서 월드컵 거리응원전을 치른 이후 광장을 만들자는 시민사회의 요구가 드높았던 때였다. 발빠르게 여론을 수렴해 일사천리로 완공한 서울광장은 서울시의 치적을 자랑하는 전시행정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서울시가 정해 놓은 규범 내부에 머물지 않았다. 일단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장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됐다. 시민들은 서울시가 조성한 광장에서 서울시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특히 2008년 촛불집회는 서울광장의 성격을 권력의 공간에서 저항의 공간으로 변모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촛불집회를 경험하며 서울광장은 정치적 상징을 부여받았다. 민주 시민들이 모여 공론을 형성하는 공간이 ‘광장’이라면 우리는 드디어 진정한 의미의 광장, 오프라인의 ‘아고라’를 갖게 된 것이다. 서울광장은 ‘거리응원의 메카’에서 ‘거리정치 1번지’로 도약했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불거진 서울광장 논란은 이 같은 서울광장의 상징을 놓고 정치권력과 시민사회가 벌이는 싸움이기도 하다. 정부는 광장을 순응의 장소로 묶어두려 하고 시민들은 민주정치의 성지로 끌어올리려 한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라는 대형 사건을 계기로 서울광장은 이명박 정권과 시민들의 불화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 되고 있다.

잔디를 위한, 잔디에 의한 광장

30여개 시민단체와 4대 종단이 모여 만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추모위원회’는 지난달 26일 “노 전 대통령 시민추모제를 27일 서울광장에서 열겠다”며 서울광장 사용허가 신청서를 서울시에 냈다. 추모위원회 대표단은 이튿날인 27일 오전 11시 오세훈 서울시장, 오후 5시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을 면담했으나 정부는 광장 사용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용 신청서를 제출했던 오광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팀장은 “오 시장과 이 장관에게 추모제 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평화적으로 행사를 치르겠다고 거듭 약속했는데도 허가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시민추모제는 많은 추모객들을 수용하기엔 협소한 덕수궁 돌담길에서 열렸다.

민주당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 추모행사를 열기 위해 추모위원회보다 먼저 서울시에 광장 사용 신청서를 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다. “광장 조성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게 불허 이유였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수많은 국민들이 놀라고 슬퍼한 사건이다. 이처럼 전 국민적인 중대사에조차 쓸 수 없는 광장이라면, 이 광장은 대체 언제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정답은 ‘서울시가 빌려주고 싶을 때’다. 서울광장은 서울시민의 광장이 아니라 사실상 서울시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였다. 월드컵 기간 동안 붉은 티셔츠의 물결은 자동차가 질주하던 도심 한복판을 축제의 난장으로 변화시켰다. 광장에 모여 서로 뜨겁게 소통했던 경험은 쉽게 잊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해 서울광장 조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2004년 5월1일,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시장 취임 1년10개월 만에 서울광장을 개장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서울광장은 시민사회가 꿈꾸던 자유로운 ‘아고라’가 아니었다. 서울시는 개장과 함께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광장 사용을 통제했다 

 

조례에 따르면 광장을 사용하려는 사람은 적어도 7일 전까지 사용허가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서울시는 신청서를 심사해 ‘시민의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활동 등을 지원한다’는 조성 목적에 위배되면 광장 사용을 불허할 수 있다. 사용 허가를 얻어도 바늘방석이 따로 없다. 잔디를 훼손할 경우 서울시가 손해배상을 청구해 올 수 있어서다.

당초 공모제를 거쳐 선정된 ‘빛의 광장’ 설계안을 보면 서울광장 바닥에는 잔디가 아니라 돌을 깔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울시가 설계 공모안을 폐기하고 잔디광장을 만들었다. 서울시는 잔디 보호를 이유로 광장 통행을 수시로 금지했는데 개장 후 첫 1년 동안은 무려 210일간 출입을 막았다. 시청 앞을 시민들이 아니라 잔디에 내준 꼴이다. 서울광장은 그 출발부터 사람의 보행을 언제든지 차단할 수 있는 반쪽짜리 광장이었던 셈이다.

권력과 시민이 대립하는 저항의 공간

명분은 시민을 위한 광장이었지만 수도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광장은 기실 정치권력과 자본이 지배하는 곳이다. 서울시청과 서울시의회가 코앞에 있고 청와대도 멀지 않다. 조례에서 드러나듯이 서울시는 광장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겠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시민들이 광장을 점유할 때만큼은 광장은 시민의 것이 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점유의 성격이다. 누가 어떻게 광장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따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민들은 서울광장에서 잔디를 감상하고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정부 정책에 항의하고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규범에서 일탈하는 언어와 행동이 터져나오는 순간, 권력의 공간이었던 서울광장은 저항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광장 터는 유구한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19년 3월 독립 만세의 함성이 거리를 메웠고, 87년 6월엔 독재 타도를 외치는 민주시민 140여만명이 이 자리에 운집했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2명의 1주기를 추모하는 집회도 2003년 시청 앞에서 열렸다. 무엇보다 2008년 촛불집회는 서울광장이 정치적 상징을 오롯이 획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100일이 넘도록 촛불을 밝히며 서울광장을 민주정치의 공론장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면 권력의 견제도 함께 시작된다.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일은 경찰의 보호를 받지만 촛불을 켜면 경찰의 물대포를 맞는 식이다. 시민과 권력 간의 힘겨루기 양상은 특히 ‘누가 공간을 점유할 것인가’의 문제로 가시화된다. 시민들은 광장을 장악하려 하고 정부는 이를 막아선다.

일례로 개장 초기 서울광장을 둘러싼 비판 여론 중 한 가지는 서울시가 보수단체에만 사용 허가를 내준다는 것이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들의 출입은 금하고, 입맛에 맞는 단체들에만 광장 사용을 허가한다는 지적이었다. 개장 첫 해인 2004년 6월 민주화기념사업회가 광장에서 전시회를 열겠다고 했을 때 서울시는 잔디가 상한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불허 통지가 반복되면서 진보단체들은 광장 사용을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물색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반면 보수단체들은 집회 허가를 쉽게 받아냈다. 같은해 10월 서울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던 우익단체의 경우, 참가자가 10만여명에 달하고 인공기를 불태우는 등 폭력 시위를 했는데도 서울시는 잔디 피해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이서울 페스티벌’처럼 서울시가 주최하는 행사도 잔디가 많이 훼손되지만 이와 관계없이 매년 개최된다. 광장 사용의 허가 여부를 심사할 때 잔디 보호는 핑계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광화문 광장도 전경 버스로 막을까

지난해 촛불집회를 겪으면서 정부는 서울광장을 시민들한테 섣불리 내줬을 때 어떤 ‘봉변’을 당할 수 있는지 배웠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난달 23일 경찰은 전경 버스를 동원해 서울광장 둘레에 ‘차벽’부터 세웠다. 시민 분향소가 마련된 덕수궁 대한문 앞도 버스로 에워쌌다. 명색이 경찰력을 보유한 정부가 시민들을 겁낸다는 게 다소 ‘스타일 구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추모객들이 서울광장을 점거하고 정부에 저항할 여지를 차단하는 일이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는 이 정부엔 더욱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상의 지리학> 저자인 박승규 춘천교육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서울광장의 용도를 ‘전경 전용 주차장’으로 변경해도 좋을 듯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며 “광장은 본래 열려 있는 곳이지만 이명박 정권에서의 광장은 ‘닫힌 공간’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닫힌 광장이 ‘광장’일 수 있을까. 그리스의 아고라, 로마의 포럼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광장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시설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광장은 시민들이 모여 공론을 형성하고 이를 정치에 반영하는 공간으로,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였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광장은 국가의 것도 개인의 것도 아닌, 공민적 권리를 가지고 더불어 사는 주체인 ‘시민’의 것”이라며 “민주주의를 위해 정치의 민주화가 필요하듯이 광장과 같은 ‘공간의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선행돼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또 “정부나 서울시가 서울광장을 제도권력의 공간으로 착각하고 독점·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현 집권세력이 그만큼 반민주적이라는 사실을 공간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서울광장 폐쇄는 현 정부의 부도덕성과 정치적 비겁함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시민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속좁은’ 정부를 비판하든 말든, 정부는 노제가 열린 지난달 29일을 제외하고는 장례기간 내내 서울광장을 성공리에 사수했다. 시민사회는 현재 공사 중인 광화문 광장도 서울광장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도 정부에 위협이 되지 않는 축제만 허가하고 집회·시위는 불허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광화문 광장이 진정한 광장으로 조성되려면 시작부터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난해 촛불집회 때 광화문 네거리에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만들었던 ‘명박산성’의 재림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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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5 1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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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1] 클림트와 성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구스타프 클림트 전이 비싼 관람료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황금빛 유혹’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그의 예술은 이처럼 어디서나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 ‘치명적인 관능’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클림트의 걸작 <금붕어>를 보자. <금붕어>는 깊은 심연에서 벌거벗은 세 여인이 부유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두 여인은 관객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으나, 그 자태가 앞을 바라보는 여인 못지않게 유혹적이다. 특히 살짝 뒤를 돌아보며 빨간 머리를 휘날리는 맨 아래쪽 여인은 노골적인 도발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은 그의 예술을 폄훼한 당시 사회 지도층의 위선과 몰이해를 비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그 무렵 클림트는 교육부의 요청으로 빈 대학에 설치할 ‘학부 회화’를 그리고 있었다. <철학>, <의학>, <법학>의 세 주제로 구성된 대작 ‘학부 회화’는, 이 세 학부를 ‘어둠을 극복한 빛’의 상징으로 나타내 이성의 위대함을 표현하도록 되어 있었다 


관능의 순수한 가치 부각 ‘가부장적 도덕률’ 파괴
근원적 존재로서의 여성 복권…남성성과 화해도
  

 

하지만 중도에 공개된 ‘학부 회화’는 대학 당국과 사회 지도층을 경악하게 했다. 이성의 승리는커녕 관능적인 누드 이미지들이 욕망과 무질서의 곤죽을 빚어내는 듯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87명의 빈 대학 교수가 교육부에 작품 설치 계획의 철회를 요구했고, 이에 격분한 클림트는 앞에서 말한 <금붕어>를 그려 그들의 태도를 비난했다.

<금붕어>에서 우리가 인상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에로티시즘의 승리에 대한 화가의 확신이다. 심연을 떠도는 여인들은 그들의 관능으로 어떤 명철한 지성이라도 다 녹여버릴 태세다. 클림트는 세상의 그 어떤 학문도 이 생명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는 모든 지식과 문명이 다 이 힘의 자식이었다.

작품을 좀 더 분석해 보자. <금붕어>뿐 아니라 <물뱀> 등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곧잘 심연이 등장한다. 이 물은 한마디로 태초의 양수다. 모든 생명활동, 나아가 이성도, 학문도, 문명도 이 태초의 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작동원리가 에로티시즘이다. 이 원리를 그리지 않고 어떻게 이성과 학문의 진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고, 존재의 시작은 성에서 비롯되며, 성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이성이든 문명이든 호르몬을 전제하지 않고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에로티시즘의 진실을 클림트는 부단히 조형으로 표현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클림트가 활동할 당시 빈은 파리 못지않은 예술과 사상의 중심지였다. 부르주아지의 문화적 열정은 빈의 살롱과 카페, 극장을 풍요롭게 했다. 하지만 곧(1918년) 무너져 내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빈은 구체제의 모순이 압축된 곳이었다. 핵심 정치세력인 자유주의 세력은 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궁정귀족, 관료 등 보수적인 구세력과 타협하면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회주의,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등 제반 세력의 도전을 받아 1900년경 의회권력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무기력하고 분열된 사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거부는 자유주의가 내세운 ‘합리적 인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고, 이는 무의식과 본능의 세계로 대변되는 ‘심리적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일종의 오이디푸스적 반항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지적 반항이 있었기에 프로이트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적 업적과 클림트의 우상 파괴적인 에로티시즘의 미학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 해체를 앞둔 사회였기에 가능한 문화의 묵시록적 발효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클림트 발효된 에로티시즘 안에는 나름의 페미니즘적 성격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로티시즘은 곧잘 성 상품화의 수단으로 지탄 받는다. 하지만 클림트의 전시에 유독 여성 관객이 많이 몰리는 데서 알 수 있듯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은 그런 부정적인 미학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퇴폐적이고 퇴영적인 요부들로 가득한 것 같으나, 그들은 한낱 유혹자라기보다는 생성과 창조의 여신인 대모(大母, Great Mother)에 가깝다.
 

전통사회는 물론 근대사회도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남성 중심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이분법의 사회다. 이성, 문명, 진보는 남성의 세계에 속하고, 광기, 자연, 정체는 여성의 영역에 속한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아래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곧잘 요부로 매도됐다. 클림트의 시대의 유럽 여성운동은 1884년 프랑스와 1894년 독일에서 본격적인 여성교육기관을 탄생시켰고, 핀란드(1906), 노르웨이(1913), 러시아(1917) 등지에서 참정권을 획득했다. 이런 진보적인 여성운동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제재는 그 선구자들에게 요부의 탈을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클림트의 ‘요부상’은 얼핏 이런 가부장문화의 ‘네거티브 전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디트> 등 관능의 절정을 보여주는 그의 ‘요부’들은 오히려 에로티시즘이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주의 순환과 생성의 원리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관능의 순수한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가부장사회의 도덕률을 깨고 그럼으로써 대모, 곧 근원적 존재로서 여성을 인정하게 하는 힘이 그의 예술에는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에로티시즘의 미학으로 여성을 복권시킨 그의 그림은 나아가 남성과 여성,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도 시도한다. 그 대표적인 걸작이 유명한 <키스>다. 그림의 구성은 단순하다. 꽃이 핀 벼랑 위에서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고 남자는 여자의 뺨에 키스를 한다. 둘 다 금빛 옷을 입었는데, 금장식은 남녀의 옷에 그치지 않고 여자의 뒤꿈치에서 남자의 어깨 부분까지 일종의 광배 같은 것을 형성한다. 옷과 광배를 한데 이어 보면 남성의 성기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남성 성기 모양의 광채 안에서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진한 화해의 키스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남성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의 화해를 의미한다. 
 

가부장사회에서는 성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기 때문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주어진 성역할을 철저히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은 시종일관 억압을 당한다.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이기도 한 것은 그것이 남성 안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녀 화해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넘어 이렇듯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이 그 반대의 정체성과도 화해를 하는 것이다. 남자도 사람들 앞에서 울 수 있고 여자도 ‘사내다운’ 호걸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할 때 남성과 여성은 서로 동등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동료가 될 수 있다. 클림트의 <키스>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30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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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사회참여가 다른 세대에 비해서 많이 부족해 보여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는데, 10대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부터 현재까지 여학생들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다. 이제 우리는 20대를 건너뛰어 10대에게 그것도 여성에게 기대를 걸어야 하는걸까? 

10대 여학생, 정치에 눈뜨다 

노 전대통령 분향소 찾아 자원봉사
정부 정책 토론도 남학생보다 많아
“촛불 경험공유가 정치 성숙도 높여”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의 초반을 이끌었던 10대 여학생들이,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와 영결식 뒤 집회에도 대거 나타났다. 이들은 교복을 입고 분향소를 찾기도 했고, 조문을 마친 뒤 촛불을 들고 가려는 걸 막는 경찰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영결식이 열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양초를 나눠주는 등 자원봉사 활동도 했다. 남학생에 견줘 여학생의 모습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박찬욱 영화감독도 “분향소에 갔을 때 새벽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등굣길 여고생들이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왔다. 우리나라는 여고생들이 짊어지고 갈 나라가 아닌가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 청소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진 지난달 29일 밤 서울광장에 있던 송상현(18·고3)양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단순히 불쌍하다는 얘기보다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얘기를 친구들과 많이 한다”고 했다. 김하나(15·중3)양은 “중3도 사회 시간에 민주주의를 배우는데, 정치가들이 여기에 나와서 민주주의가 뭔지, 여론이 어떤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양은 영결식 뒤 떨어진 쓰레기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 시간째 줍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단지 슬퍼서가 아니라, 뭔가 구체적인 이유를 지니고 나온 셈이다. 지난해 촛불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을 연구한 이창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학생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며 “지난해 촛불 집회 때만 해도 먹거리라는 이슈의 특성 때문에 나오지 않았나 할 수 있었는데, 올해도 나오는 것을 보니 이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해 가는 거 아닌가 생각된다”고 진단했다.

여학생들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는 <한겨레>에 보낸 전자우편에서 “한국은 아직도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사회인데, 아들, 특히 장자에게는 ‘좋은 학벌’을 따고 사회에서 ‘성공’하라는 가족의 압력은 훨씬 더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기에 남학생에게는 심적인 여유가 대단히 부족한 데 비해, 여학생들은 ‘학습기계’가 되라는 강요에 반기를 들 만한 여지가 더 크다”고 했다. 남녀 공학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윤은진 교사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과 얘기를 해 보면 성별 차이가 조금 있다”며 “남학생들은 ‘정치는 뻔하다’며 자신을 더 경쟁력있게 만들려는 면이 강한 데 반해, 여학생들은 비판의식을 더 발전시키는 편”이라고 말했다. 영결식 뒤 서울광장에서 열린 추모제에 나온 이윤경(18·고3)양은 “남자애들은 노무현 대통령 얘기를 해도 반응이 없다. 스포츠나 게임 얘기를 더 좋아한다. 여학생들은 점심시간 때 텔레비전을 켜 놓고 영결식 보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10대 여학생들이 정치적으로 급진화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배은경 서울대 교수(여성학 협동과정)는 “10대와 20대 초반 여성들은 ‘미선이 효순이 촛불 집회’ 때부터 집합적 경험을 나눠 가졌다. 또 이미 사무직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의 현실을 보고 있기 때문에 정치의식이 더 급진화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지난해 청소년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역사적 경험’을 묻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가장 많이 꼽은 것은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는 “이들이 이번에 ‘평생 투표하겠다’는 실천을 얘기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의식의 급진화보다 몸의 생활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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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6-05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은 수욜날 못오세요??ㅋ

머큐리 2009-06-05 09:44   좋아요 0 | URL
수욜날 무슨 모임있나요? 업무 끝나고 잔디밟으러 가긴 갈건데요...ㅎㅎ

쟈니 2009-06-0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대 여학생들을 보면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 그의 지지자는 물론 그에 어지간히 비판적이던 사람들도 결국 그의 장례식 날엔 굵은 눈물을 함께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슬퍼할 줄 알기에 아직 우리가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우리가 함부로 생략해선 안 될 또다른 슬픈 죽음들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죽어간 사람들, 23명의 노동자 민중 열사들이다.

그 23명이 모두 애당초부터 노무현을 반대하거나 적대한 사람들은 아니다. 오히려 노무현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신들의 편일 거라고,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도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믿고 기대했던 ‘고졸 출신 서민 대통령’에 의해 삶의 벼랑으로 내몰렸으며 배신감과 절망감에 몸을 떨며 죽어갔다.

오늘 추모의 열기 속에서 끝없이 나열되는 대통령 노무현의 업적들은 대개 그르지 않다. 정치 개혁, 권위주의 탈피와 소통 강화, 지역갈등 해소 등등. 그는 정말 정치적 민주주의 발전에 그 어느 대통령보다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서민 대중의 실제 삶과 관련한 부분, 즉 사회 경제적인 민주주의에서 대통령 노무현은 모자람이 많았다. 특히 지난 30여년 동안 지구상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갈 만큼’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든 마지막 노무현은 더 이상 고집스런 신자유주의자 대통령이 아니라 “삶과 죽음도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무상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잘못과 한계를 들춰내며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조차 냉소하는 일도, 감상에 젖어 혹은 그를 죽게 한 미안함과 자책감에 젖어 그가 아무런 잘못이나 한계도 없었던 양 무작정 그를 찬미하는 일도 정중히 삼가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제 삶의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정화하고 떠난 사람 앞에서, 감상이나 냉소가 아니라 그의 삶의 공과를 분명히 기억하되 그가 품었던 뜻을 정갈하게 되새기고 그가 남긴 꿈을 우리 삶에 잇는 게 옳겠다. 그의 꿈을 잇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고집스러운 신자유주의자 대통령 노무현을 잇는 게 아니라 그의 본디 꿈, 그가 아직 순수한 이상주의자이던 시절의, ‘바보 노무현’의 꿈을 잇는 것이다.

그 꿈은 누가 이을 수 있을까? 오늘 노무현의 후계자라 지목되는 사람들, 그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파병을 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밀어붙이고 ‘삼성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만큼 반민중적인 정치를 펼쳐 23명의 한 맺힌 죽음을 낳도록 내내 보좌한 사람들일까? 그들이 노무현의 꿈을 이을 수 있을까? 천만에. 여전히 자신들이 ‘이명박보다는 백번 나으니’ 아무런 반성할 것도 성찰할 것도 없다는 얼굴을 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무현의 꿈이 아니라 노무현의 잘못과 한계를 다시 되살리는 일뿐이다.

노무현의 꿈은 오히려 대통령 노무현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배신했음을 지적한 사람들, 끊임없이 노무현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그가 잃어버린 제 본디 꿈을 회복하길 소망했던 사람들, 23명의 열사의 편에 섰으며 오늘 여전히 그들의 편에서 싸우는 사람들에게서 이어질 것이다. 바로 그들이 소년 노무현이 봉화산의 호미 든 관음상 앞에서 맹세한 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이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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