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는 친구의 어머니가 상을 당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일본에 있는 친구는 23시 비행기로 귀국을 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다음날 저녁에 문상을
하기로 했다.
가끔 모임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큰일을 당하면오랫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을 볼 수 있게 된다. 평상시에는 잘 연락도 안되지만 언제 만나도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는 지금 생활에 대한 안부를 묻고, 각자 가정의 평안함에 대해 말을 나누고
예전의 그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로 거슬러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심히 이기적이어서 같은 사건을 추억해도 거기에 실린 의미들이 틀리고
그 속에서 보지 못했던 의외의 일들이 밝혀지곤 한다. 그건 사건만이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
여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어떤 사람에 대한 발견(?)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난 이전에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그녀'를 만났다.
초등학교 때 발육이 틀려 누나처럼 보였던 그녀.... 중학교 2학년 정도 되자 난 그녀와 자연
스럽게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누나같이 보이던 그녀가 조금씩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 겨울 난 그녀에게 친구가 되자고 했다. 소꿉놀이 같던 1년 후 정말
아무 이유없이 공식적으로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많은 남자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언제나 서글서글한 그녀의 모습은 그런 인기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었다.
고등학교...대학교...그냥 친한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그녀에게 청혼까지 한
내 절친도 있었고, 같이 어울려 자란 친구들 사이에서는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했으니...
그녀가 우리 친구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때... 아쉬워하던 남자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결혼 후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로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
졌던 것이다.
오랜만에 옛친구들이 자리했을 때 많은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그녀를 간간히 술자리
에서 추억하는 일은 자연스러웠고, 그 추억은 항상 그녀의 상냥함과 친절함으로, 그리고
그녀를 두고 연적관계에 있던 사람들의 웃지 못할 추억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를 알고 있는 여자친구들은 그녀를 남자들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난 여자친구들이 한 번도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웃으면서 한 여자친구의 얘기 나의 환상을 깨주기 싫어
서 모른척 했다나...)
그녀는 여자친구들의 남자친구들을 가로채는데 명수였고, 그 때문에 속상했던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 그녀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남자도 아는 친구가 관심을 가지는 순간 그녀의
영향권안으로 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계를 파탄시킨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뺏은 남자와 오래 사귀지도 않았단다....그랬던가? 사실 난 모르겠다.
중학교 이후 그녀와 조금만 이야기 해도 주변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냐고 묻는 친구놈들이
많아서 사실 본의 아니게 데면데면하게 지내야 했었다. 그럼에도 사춘기를 지나 지금까지
여자들이 알고 있는 세계와 남자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분명하게 나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와 같은 날에 결혼을 했다. 물론 각기 다른 사람과....친구들은 웃으면서 그것도
인연이라 했지만... 시간차가 얼마 나지 않는 그녀의 결혼식에 많은 여자친구들이 가지 않고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이유는 분명하게 있었던 것이다. . 지금까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을 못했는데....그녀는 여자들의 공적이었던 모양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그걸 확인할 수도 없다. 언젠가 지하철역에서 그녀를
우연하게나마 만난다면 몰라도.... 설사 만난다 하더라도 그녀의 안부와 일상외에 내가 무엇
을 더 물어볼 수 있을까.... 많은 세월이 지나서 그녀를 알아볼 수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