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님 서재에서 퍼온다.

 

작년부터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은 정치철학자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다. 그의 주저 <불화>도 소개될 예정이기에 (일부 불만에도 불구하고) '랑시에르 붐'은 한동안 더 이어질 듯하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소개/해명하는 글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와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을 우리말로 옮긴 양창렬씨다.  

 

고대신문(09. 05. 10) 민주주의는 모든 정체의 아나키적 원리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원상 ‘인민의 지배’를 뜻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단어는 아무데나 쓰이고, 그만큼 의미 없는 단어가 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앞에 붙는 수식어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킨다. 다양한 수식어만큼이나 민주주의는 닳아빠진 개념이 된 듯하다. 이처럼 모호한 개념을 유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랑시에르에 의하면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 관념들의 고유함은 그것이 다의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차이가 불화를 가능하게 한다. 정치적 투쟁은 바로 그 단어를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되찾기 위해 랑시에르는 그 단어의 희랍적 어원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분절을 되짚어 본다. 특히 플라톤이 범례적으로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주목하면서 말이다.  

『국가』, VIII권에서 플라톤은 여러 정체들을 검토하면서 민주정을 과두정에 대한 빈자들의 전복으로 간주한다. 이 아카데미아의 철학자는 민주주의적 인간형을 서술하는 데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정체란 정부 형태만이 아니라 그 체제 하에서 공통으로 살아가는 존재 방식과 습속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적 인간은 노예와 구별되는 신분상의 자유, 의회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플라톤은 561c-e에서 이소노미아를 누리는 사람의 삶을 묘사하는 데, 이 민주주의적 인간형은 오늘날 공화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소비사회의 탈근대적 개인을 예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제멋대로 하는 자유는 민주정 자체가 정체들의 잡화점과 비슷한, 무정부 상태의 다채로운 정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플라톤은 이소노미아에 가장 분개하는데, 그것은 법 앞의 평등만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비롯한 공적 사안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평등을 가리킨다. 그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바로 추첨이었다. 추첨은 통치를 ‘아무나’에게 ‘우연’하게 맡길 뿐, 통치자의 어떤 자질이나 지식도 따지지 않는 제도다. 지식과 정치적 탁월함을 가진 자에게 기하학적 평등에 따라 통치의 특권이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던 플라톤에게 추첨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는 정치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가 있는가라는 랑시에르의 주요한 화두와 연결된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320d-324d)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신화에 주목하자. 에피메테우스는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기술을 나눠주면서 정작 인간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성질들을 부여하는 것을 잊는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과 기술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흩어져 살 뿐, 도시국가에 모여 살지 못한다. 결국 제우스는 멸종할 위기에 처한 인간에게 정치적 덕(염치와 정의)을 주기로 작정한다. 헤르메스가 그 덕을 기술을 나눠주듯 분배해야 하느냐고 묻자, 제우스는 모두가 그 몫을 가질 수 있도록 분배하라고 답한다. 소수만이 그 몫을 갖는다면 도시국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와 관련해서 전문가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평등한 능력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이 평등이 모든 정치 질서, 모든 정치 공동체를 정초하는 전제가 된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평등 전제’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한 추첨 그리고 프로타고라스가 들려준 신화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누가 누구를 정치적으로 지배해야할 자연적 원리(archē)는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부 형태는 이 원리의 부재, 정당성의 부재에 토대를 둔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여러 정체들 중 하나의 정체가 아니라, 모든 정체의 아나키적 원리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 평등전제를 입증하고 활성화시키는 정치를 뜻하기도 하며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 주체화를 거친다. 이 점에서 데모스라는 단어가 내포한 이중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인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빈자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인민은 본디 정치적 주체인 동시에 배제된 자라는 이중적 신체를 가진 분열된 주체인 것이다. 정치적 주체화는 항상 말과 사물 사이의 틈에서 생겨난다. 가령 헌법에 기록되어 있는 인민의 권력을 몫 없는 자들이 실제로 행사하려할 때 그것은 정치 질서 자체에 분리와 불일치를 가져오는 사건이 됨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빈자들, 노동자들, 여성들도 인민인가?’, ‘우리는 이 나라를 통치할 주인의 범주에 셈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언제나 말과 사물, 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폭로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내는 역량과 행위야말로 정치요 민주주의다.  



랑시에르에게 가장 많이 쏟아지는 비판 중 하나는 그가 정치를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것, 다시 말해 드문 사건으로 묘사하며, 선거나 투표와 같은 제도를 치안의 장치로 보는 등 제도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고로 정치를 어떻게 이어갈지, 민주주의 또는 평등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에 대해 그가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한 몇 가지 답변들로 결론을 대신하자.

첫째, 우리는 앞에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란 하나의 정체나 통치 형태가 아니라 정치 자체의 전제이자 원리임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다. 둘째, 랑시에르는 바디우처럼 모든 투표에 기권하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지난 2005년에 있었던 유럽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지배자들의 합의에 맞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투표 속에서 인민주권을 연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작년에 쇠고기 재협상과 대통령 재신임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던 주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사실 그것은 인민으로 바꿔 읽을 수 있으며, ‘아무나’에게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으로부터 나온다’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정치 무대에 올리는 한 실험이 될 수도 있었다.  

셋째,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짧은 임기로 연임할 수 없게 의회의 대표를 뽑고, 국가의 공무원이 인민의 대표를 중임할 수 없게 만드는 등 고대 그리스의 ‘추첨’을 연상시키는 주장들을 한다. 물론 이것들은 대의제를 ‘민주적’으로 이끄는 최소치이지 그러한 제도 변화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넷째, 랑시에르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무너지며, 촛불에 불이 붙고 사그라지는 짧은 봉기의 순간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최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는 ‘사건과 돌발’의 사상가가 아니라 ‘해방’의 사상가다. 역사는 국가 형태에서 벗어나는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을 발명하려는 다양한 노력과 실천들의 망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그가 간헐적인 사건들의 불연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공존하는 여러 시간성들의 집합을 통해 역사를 사유하기 때문이다.(양창렬_파리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09.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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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남미 하위주체 연구’ 권위 美 존 베벌리 교수

“지금 세계가 직면한 신자유주의적 모델의 위기를 남미는 이미 10년 전에 경험했습니다. 남미의 좌파 정부들은 그 같은 경험의 산물이며 새로운 변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존 베벌리 미 피츠버그대 교수(65)는 14일 “지금 남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모델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역적인 협력을 돈독히 하는 등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베벌리 교수는 남미 하위주체(subaltern·서발턴)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최근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지난 13일 ‘라틴아메리카니즘이라는 ‘사건’-인식지도 그리기’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그는 1992년 결성된 ‘라틴아메리카 하위주체 연구그룹’의 핵심 멤버다. 이들은 하층민이나 소외 계층의 구체적 삶에 주목하는 인도의 하위주체 연구를 수용, 90년대 남미 좌파의 실패 원인을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이들의 이론은 볼리비아 좌파 운동 등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계급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국가, 인종, 민족, 젠더 등 다양한 범주에서 지배·종속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촛불시위와 관련해선 “남미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소개했다.

“92년 베네수엘라에서는 누가 조직한 것도 아닌데 빈곤층이 들고 일어난 ‘카라카소’가 있었고, 94년 멕시코에서는 사파티스타 봉기가 일어나는 등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이는 기존 틀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베벌리 교수는 최근 10년간 남미에 좌파 정권이 잇달아 들어선 현상을 두고 ‘분홍색 물결’ 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이 ‘붉은색’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혁명적 좌파와 다르다는 의미다.

“이들 정권은 극단적인 계급투쟁이나 이념투쟁이 아닌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원동력이 되어 탄생했습니다. 좀더 다원적이고 다문화적인 걸 허용한다는 점에서 이전 좌파들과 달라요.”

이들 소위 ‘좌파’ 정권들이 스스로 ‘사회주의 정권’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남미의 좌파 정권들을 ‘좋은 좌파’와 ‘나쁜 좌파’로 나누는 시각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했다. 남미 각국들의 상황이 다르기도 하거니와 이들 국가가 미국이나 우파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이들을 둘로 나누는 시각은 남미 좌파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로 “남미 내부가 아니라 미국 측 시각”이라는 설명이다. 베벌리 교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 같은 이분법에 빠지기보다는 남미를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남미 좌파의 ‘신보수주의적 전환’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60년대 급진적이었던 미국의 자유주의적 좌파가 80년대를 지나면서 보수주의자가 된 것과 비슷한 일이 남미 좌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는 “80년대 남미에서 좌파 혁명을 꿈꾸었던 지식인들은 지금처럼 새로운 형태의 정치상황이나 다문화주의, 하위주체 등에 대해서는 못마땅해 한다”고 설명했다. 베벌리 교수는 남미의 상황이 고정된 틀로는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계속 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구좌파들은 자신들의 틀로 해석하려다보니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베벌리 교수는 “새로운 후기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아시아와 남미는 새로운 연결 고리를 가질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와 남미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글 김진우·사진 정지윤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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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연대 박종태지부장의 죽음과 이에 대한 전반적 노동권에 대한 고찰이 고작 사회갈등과 불법시위정도로 축소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무엇보다, 노동은 생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노동에 대한 합리적 보상은 상식이다. 때때로 상식이 뒤집혀서 회사의 이윤자체가 노동의 유지가 되는 현실에서 약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약자의 반발이 거세지면 불법의 이름으로 탄압을 자행하는 지배자의 현실논리는 사실 타당하지 않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강자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법이 그렇게 시행된다면, 이런 사태자체가 벌어지지 않았겟지만.... 뉴스에서는 민주노충의 집회는 원천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며, 집회결사의 자유를 저렇게 무시하는 경찰들의 행태를 보면서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는 어려워도 무시하기는 정말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걱정되는건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실제로 위력을 가지고 진행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이 정권이 진보세력을 절멸시킬 또 다른 기회를 주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탄압은 교묘해지고 강도는 점점 세지는데, 내부의 역량은 아직까지도...아직까지도라고 해야 할 만큼 튼튼하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내부 사정을 모르는 내 기우기길 바란다. 민주노총 역시 이번을 기회로 삼아 임시직, 특수직 노동자에 대한 실질적 대변자로 거듭나지 못하면 다시 한 번 생존의 기로에서 허덕이게 될 것 같다.

 

“떠나는 차량 덮쳐 전원연행”
“새벽까지 물 한모금도 안줘”  

 

» 16일 대전 서구 둔산동 정부대전청사 남문광장에서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총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국 1만5천여명의 화물차주로 구성된 화물연대는 이날 집회를 하고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전/연합뉴스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부 지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특수고용직 노동권 보장 문제를 두고 정부와 노동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화물연대가 총파업을 결정한 가운데 16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시민 457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연행된 것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대규모 연행 사태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이자 일방통행식 노조 탄압을 감추기 위한 의도된 폭력”이라며 총파업 일정을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 무더기 연행 사태 민주노총과 화물연대는 16일 오후 4시30분께 전국노동자대회를 마치고 대전 중리동 네거리를 거쳐 박 지회장의 주검이 안치된 대전중앙병원까지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위대가 저녁 6시30분께 대한통운 대전지사까지 진출하려다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고, 일부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를 뚫은 뒤 대한통운 앞에서 집회를 벌이고 저녁 8시20분께 해산했다.

그러나 해산 과정에서 경찰이 곧바로 진압작전을 펴 시위대가 대거 연행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날 서울에서 내려온 임영기(39)씨는 “대한통운 앞 집회를 마치고 가려는데, 전경 한 명이 대나무(만장 깃발)를 들고 쫓아와 전경버스에 몰아세운 뒤 얼굴과 오른쪽 팔다리를 수십 차례 때렸다”고 주장했다.

박혜영 민주노총 법률원 차장은 “비에 젖은 연행자 80명을 대전 서부경찰서 강당 안에 남녀 구분 없이 수용하는 등 경찰이 인권을 보호하지 않았다”며 “새벽 3시까지 모포와 물 한 모금 주지 않아 연행자 대부분이 감기 몸살 증상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17일 성명을 내어 “집회장을 먼저 떠난 차량의 탑승자 전원을 연행하고,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우비나 조끼를 입은 사람을 잡아들이는 등 경찰이 ‘함정 연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대나무를 이용한 불법집회가 이어지면서 경찰 부상자가 속출했고, 경찰버스·진압장비 등을 부수거나 빼앗는 등 집회가 도를 넘어서 검거자가 많아졌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밤까지 대전 동부경찰서 등 5곳에서 연행자를 조사했으며, 사진 채증 자료 등으로 가담 정도를 따져 사법 처리 수위를 가릴 예정이다.

■ “총파업 앞당긴다” 화물연대는 노동자대회에 앞서 조합원 총회를 열어 △택배기사 전원 복직 △노동3권 보장 △운송료 삭감 중단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결의했다. 정호희 운수노조 정책실장은 “정부와 대한통운 등 사쪽과 대화한 뒤 추이를 지켜볼 방침”이라며 “파업을 계획 중인 건설노조 등과의 연대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도 이날 노동자대회 대회사에서 “6월로 예정된 민주노총 총파업을 가급적 앞당기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혀, 화물연대 파업을 필두로 노동계의 전면적인 투쟁이 예상된다. 이승철 민주노총 대변인은 “산별노조의 임단협이 6월에 집중된 만큼 연대파업의 형식을 띨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는 화물연대 조합원은 노동자가 아니어서 파업권이 없다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국토해양부는 17일 “2003년 이후 7차례 집단행동으로 경제에 피해를 입혔음에도 화물연대가 또다시 불법 집단 운송거부를 하려 한다”며, 집단행동에 참여한 화물차주에 대해 △유가보조금 지급 중단 △차량 시위 때 운전면허 정지 △화물운송자격 취소 등의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통운도 이날 보도자료를 내어 “광주지사의 택배 수수료(920원)는 다른 곳보다 높은 수준”이라며 “하지만 택배사업자 개인과의 협의는 문을 열어놓겠다”고 말했다. 대전/오윤주 기자,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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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님 서재에서 퍼온다. 

 

이번주에 나온 가장 중요한 번역서는 물론 칸트의 <판단력 비판>(아카넷, 2009)이다. 3대 비판서를 백종현 교수가 혼자 힘으로 완역한 셈인데, 이로써 최재희(이석윤)판 3대 비판서가 수십 년만에 완전히 세대교체되었다. 기념비적인 업적이며 역자가 '한국의 칸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겠다. 여하튼 덕분에 한국어로 칸트를 읽어볼 생각을 품을 수 있게 됐다(나는 대학 2학년 때인가 최재희판 <순수이성비판>을 읽다가 그만 둔 기억이 있다). 물론 온전한 세대교체 및 한국어 번역의 정착은 일반 독자들뿐 아니라 철학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읽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가령 학술논문에서도 백종현판 칸트가 인용된다면 비로소 '한국어본'의 소임을 완수하게 되는 것). 한국어로서 칸트는 아직 '젊은' 철학자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5. 16) 근대 정신세계 혁신, 그 파괴와 건설의 완결편 

“그의 철학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었고 많은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의 사상은 근대 의식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노르베르트 힌스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


이 문장의 주인공이 바로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다. 근대 철학의 혁신자이자 계몽 정신의 산마루였던 칸트는 파괴자였던 것만큼이나 건설자였다. 그는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고 정신의 새 건축물을 세웠다. 이 파괴와 건설의 논리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그의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이 세 비판서 가운데 마지막 저작 <판단력비판>이 칸트 전문 연구자 백종현 서울대 교수의 번역과 주해를 거쳐 새롭게 나왔다. 앞서 백 교수는 <실천이성비판>(2002)과 <순수이성비판>(2006) 번역·주해본을 펴낸 바 있다. 이로써 칸트 3대 비판서가 백종현판으로 완역됐다. 40년에 걸친 칸트 연구의 결실이다.  



우리에게 각인된 칸트의 이미지는 파괴자라는 말이 주는 격정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는 단조롭고 엄격하고 규칙적인 삶을 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걸어다니는 시계가 그의 이미지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후년의 칸트를 칸트 생애 전체로 확대한 모습이다. 젊은 시절 칸트는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내기 당구를 즐기고 살롱과 클럽을 드나들고 흥겨운 대화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교계의 총아, 멋쟁이 신사가 칸트였다. 그랬던 그는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 정교수 취임을 전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칸트는 사교계에 발을 끊고 은둔자가 됐다. 그 무렵 하나의 거대한 문제가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철학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적 의무감이었다. 골방에 틀어박힌 칸트는 고투에 고투를 거듭한 끝에 10여 년 뒤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이 바로 <순수이성비판>(1781)이다. 칸트는 이 책에 이어 7년 뒤 <실천이성비판>(1788)을 완성했고, 다시 2년 뒤 <판단력비판>(1790)을 세상에 내보냈다. 3대 비판서를 완성한 후의 칸트는 젊은 날의 습성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노인이 돼 있었다.

칸트가 세 주저에 ‘비판’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그가 계몽정신의 아들임을 보여준다. <순수이성비판>의 초판 머리말에서 그는 자신의 시대를 “모든 것이 비판에 부쳐져야 하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라고 규정한 뒤 이렇게 말한다. “이성은 오직, 그 자신의 자유롭고 공명정대한 검토를 견뎌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존경을 승인한다.” 이성이 모든 것을 비판에 부친다면, 이성 자신도 그 비판의 법정에 서야 할 것이다. 이성이 이성 자신을 소환해 심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칸트 비판철학의 놀라운 전환이다. 인간 이성이 이성 자신을 규명함으로써,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과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간해 내는 것이 이성 비판의 제1과제라고 칸트는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비판이란 이성 자신의 기능과 능력을 밝히고 그 한계를 찾아내는 일이다. 여기서 그 한계를 모르는 이성은 가차 없이 탄핵당한다.  




칸트의 비판 작업은 정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냈다. 이성의 자기비판 작업을 통해 칸트는 우리 정신이 세계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으며, 그 인식을 통해서 사물 자체의 존재가 확실해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인간 이성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상세계의 창조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신이 담당하던 창조자 구실이 인간의 이성 안으로 옮겨졌다. 세계 존재의 근거가 신에게서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의식의 규정을 받는다는 이 발상, 신의 업무를 인간의 업무로 바꿔놓은 이 발상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그렇게 의식이 창조자 노릇을 한다고 해도 제멋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엄격한 법칙을 따른다. 이렇게 의식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연의 법칙’의 근거를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라면, 그런 자연의 법칙 안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유의지로써 세계를 바꾸고 도덕적 이상을 구현해 가는 정신 능력의 근거를 규명하는 것이 <실천이성비판>이다. 물론 이때도 정신은 엄격한 내적 법칙 곧 도덕법칙을 따른다. <판단력비판>은 이 두 저서 사이 가교 노릇을 하는 책이다. 판단력은 자연과 자유 사이,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다. 행위하고 실천하려면 먼저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하는 마음의 능력의 원천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칸트가 먼저 탐구하는 것이 ‘미적(미감적) 판단력’이다. 이 미적 판단력 규명이 이후 철학적 미학의 진정한 출발점을 이룬다. 나아가 칸트의 미적 판단력은 현대의 정치철학에도 자양분을 제공하는데, 한나 아렌트의 ‘정치 판단 이론’은 칸트의 이 판단력비판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명섭 기자)     

 

세계일보(09. 05. 13) 칸트 3대 저작물 완역 마침표 찍다

서양의 세 문화기둥인 그리스·로마 문화와 과학, 기독교 사상은 칸트에 이르러서야 최초로 통합됐다. 그는 이 세 문화기둥을 동시에 한 시야에 두고 반성하며 설명했다. 한국 철학사와 정신사에 칸트 철학이 미친 영향도 지대했다. 한국에 칸트 사상이 유입된 것은 20세기 초. 우리 사회가 19세기 말부터 서양전통에 합류한 게 계기가 됐다. 우리 사회 저변에는 유교적인 가치 체제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서양의 가치가 사회 유지의 잣대가 되고 있다. ‘사회 정의’라는 문제만 하더라도 ‘서양 법사상’이 사회 유지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흐름의 핵심에 ‘칸트’가 있다. 칸트 철학은 우리보다 앞서 서양철학을 받아들였던 일본을 통해서였다. 한국 철학박사들 중 ‘칸트’를 주제로 학위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훨씬 넘는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를 주제로 학위를 받은 사람들보다 많은 수치다. 

이처럼 철학사에서 칸트의 비중이 컸으나, 그간 그의 사상이 ‘동일 학자의 일관된 설명’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칸트의 3대 저작물인 ‘순수이성비판’(1781년)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은 그의 인식론을 잘 담아냈으나, 한 학자가 풀어낸 경우는 없었다. 각기 지식(眞)과 행위(善)의 영역을 논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더해 감정 영역인 ‘미(美)’의 문제를 다룬 ‘판단력 비판’을 한 사람이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백종현(59)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성과는 눈에 띈다. 백 교수는 최근 ‘판단력 비판’(아카넷)을 내놓으며 칸트의 3대 저작물 완역에 이정표를 찍었다. 일본 저작물을 답습하던 관행을 벗어나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칸트의 3대 저작물을 한 학자가 완역한 경우는 외국에서도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게 책을 출간한 아카넷 오창남 편집장의 설명이다. 



칸트가 10년에 걸쳐 3대 저작물을 내놓았듯 백 교수도 3대 저작물 번역에 10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했다. 2002년 ‘실천이성비판’에서 시작해, 2006년 ‘순수이성비판’를 거쳐 올해 ‘판단력비판’을 번역하며 작업을 마무리했다. 백 교수는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 저수지’에 모이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이 저수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며 “칸트 철학이 우리 사회에 주는 뜻은 각별하다”고 설명한다.

“사람의 여러 가치를 논했던 칸트 철학은 ‘인간 소외’가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는 현실에서 더 유용성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치’가 있는데, 이 가치를 가치있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칸트는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어요. 사람이란 결함이 있는 존재인데, 이를 극복하는 가치있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나오지요.”

우리 사회의 좌우갈등과 빈부격차 등 문제점도 칸트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법률적 평등과 시민적 자유에서 조화를 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하면 갈등의 강도가 낮아진다고 백 교수는 설명한다. 사회의 소외층 혹은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중요하다. 백 교수는 “소외층들이 스스로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라며 “약자가 감사하다고 여기는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그의 3대 저작물 완역은 일본 영향을 받았던 선배 학자들의 한계를 건너뛰었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또 통일되지 않았던 철학 언어가 자리를 잡게 된다는 점도 의미 있다. 일례로 그간 국내 저작물에서 ‘오성’(깨닫는 능력)으로 번역됐던 독일어 ‘VerStand’(아는 능력)는 본래의 뜻인 ‘지성’으로 풀이했다. 백 교수는 칸트의 3대 저작물 완역에서 더 나아가 4대 저작물의 하나로 그의 종교 철학을 다룬 ‘순절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번역하고 있다. 2∼3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번역이 끝나면 칸트 사상의 ‘진선미성’(眞善美聖)이 완결되는 셈이다.(박종현 기자) 

09. 05. 15.  



P.S.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로는 백종현 교수의 <존재와 진리>(철학과현실사, 2008)가 있지만 입문서도 겸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저자가 옮긴 카울바하의 <칸트 비판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서광사, 1992)가 예전엔 입문서 역할을 했었다. 김상봉 교수의 <자기의식과 존재사유>(한길사, 1998)는 짐작에 우리말로 씌어진 가장 쉬운 칸트 소개서가 아닐까 싶다('쉽다'는 건 어디까지나 다른 책들과의 비교에서만 의미를 갖지만). 칸트 전공자인 김상봉 교수는 언젠가 <판단력 비판>을 옮기겠다고 한 적이 있어서 나는 김상본판이 백종현판보다 먼저 나올 줄 알았다.  

개인적인 바람을 적자면, 승계호 교수의 입문서 <칸트>가 꼭 좀 번역/소개됐으면 싶다. 영어권의 칸트 입문서로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이 읽힌다는 건 자랑할 만한 일 아닐까. 정작 이런 책을 번역하는 데에는 국내 학자들이 왜 인색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바람을 더 적자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번역 이후에 백종현 교수가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마저 번역해주면 좋겠다. 한국의 헤겔 전공자나 헤겔학자들은 임석진판을 넘어서는 <정신현상학> 번역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므로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건 '부지런한' 칸트 전공자가 아닐까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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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 민주노동당도 진보신당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보수정당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심정적으로 진보정당들이 약진하여 이 사회를 좀 더 약자들이 숨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아직까지 진보정당들은 이념도 실천도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분단된 폭압적 구조하에서 진보정당이라도 수립했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도 이들에게 한없이 욕심을 부리게 된다. 정작 참여하진 못하면서... 진보의 길을 묻는 기사가 있어서 퍼온다. 우리가 소망하는 진보는 결국 약자가 인격적으로 대접받고 살 수있는 사회가 아닐까? 그 실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를 참고하자.

일본판 88만원세대·비정규직 그들이 공산당원이 된 까닭 

[한겨레 창간 21돌 특집]
제조업까지 파견직 허용 ‘평생직장 실종’
연봉 2백만엔 이하 ‘워킹 푸어’ 1천만명
공산당, 풀뿌리 조직개편·거리노동상담
 

진보의 길찾기 / 일본 공산당의 부활


전직 자위대원 사야마 가쓰노부(60·가명)는 지난해 10월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선거 때마다 집권 자민당에 투표하던 그가 자민당과 대척점에 있는 정당에 입당한 것은 실직이 계기가 됐다. 1969년부터 1980년까지 11년간 자위대에서 일한 그는 지난해 주방 및 가구 재활용 업체에서 2개월간 파트타임으로 청소일을 하다가 해고됐다. 자위대 퇴직 이후 인쇄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각종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던 그에게 실직 뒤 수중에 남은 것은 3만엔뿐이었다. 하루 생활비를 500엔으로 줄이고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일자리를 찾으려 했으나, 예순살의 그가 파트타임 일자리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때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적기)를 구독하는 이웃이 공산당과 한번 상의해보라고 귀띔했다.

사야마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일본공산당 지바현 나가레야마시 의원인 도쿠마스 기요코(58)는 당장 사야마와 함께 시의회에 가서 생활보호를 신청했다. 44살 때 세번이나 생활보호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한 경험이 있던 그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곧 다달이 7만엔의 생활보호 자금을 받게 된 그는 ‘이상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여겼던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를 싹 바꾸게 됐다.

지난달 26일 공산당 지바현 나가레야마시 동부지부의 일요모임에서 <한겨레>와 만난 사야마는 “사회 저변의 약자들을 돕기 위해 공산당에 들어왔다. 들어와 보니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하고 모르는 것도 여러 가지 가르쳐준다”며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일정한 수입이 없어 결혼도 못했고, 오랜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가벼운 우울증까지 있다는 그는 이날 회의 동안 시종 활기를 보이며 간혹 유머까지 던지는 등 편안한 모습이었다. 이날 회의에는 종교단체 창가학회를 모체로 한 집권 여당 파트너인 공명당의 당원이었던 60대 여성, 70살에 입당한 홀몸노인 등 다른 신입 입당자들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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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공산당과 산하 청년조직인 민주청년동맹이 지난달 29일 도쿄 신주쿠에서 개최한 ‘거리 노동생활상담’. 단순한 당 홍보활동이 아니라, 비정규직 등 해고의 광풍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한 활동을 표방했다 

쉰다섯살 우스이
 
 

해고됐다 당 도움으로 취직
“비정규직 노동조건 바꾸자”
공산당 입당하며 각오다져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로 발달한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에서 최근 1~2년 사이에 사야마처럼 공산당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2007년 9월 이후 매달 약 1천명씩 신규 당원이 늘어나 1만8천명이 새로 입당했다. 당원 증가 속도가 이전의 두 배가 됐다. 특히 20대~30대 전반의 젊은 입당자들이 이전에는 10% 정도였지만, 지금은 20~30%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시이 가즈오 공산당 위원장이 지난해 중의원 대정부 질의를 통해 파견노동자의 마구잡이 해고를 질타하는 동영상을 보거나, 인터넷을 통해 당 강령을 보고 자발적으로 입당하는 전례 없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만 52명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입당했다. 젊은 공산당원 증가의 배경에는 평생직장을 자랑하던 일본 사회가 어느덧 ‘고용 불안과 숨겨진 빈곤 대국’으로 전락한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공산당원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가 70년 전에 발표한 프롤레타리아 소설 <게공선>이 지난해 50만권 이상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한 것도 공산당 붐에 불을 지폈다. 비정규 노동자들에겐 70년 전 소설 속 가혹한 노동환경이 현대 일본의 자기 이야기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2002년 자민당 정권이 노동자파견법을 개정해 제조업까지 파견직을 허용하는 등 신자유주의식 구조개혁을 단행한 결과 비정규직이 35%로 늘어나 주요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젊은이 둘 중 하나는 비정규직으로 전전하고 있다. ‘일본판 88만원 세대’인 비정규직의 양산은 빈곤의 확산이라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 급여의 50~60%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연간 수입 200만엔 이하인 1천만 일본 ‘워킹 푸어’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몰아친 세계 금융위기와 경기 불황은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도요타 등 일본 대기업 제조업체들이 지난 5~6년간의 호황 때 사내 유보금을 수조~12조엔씩 두 배 가까이 늘려놓고도, 불황을 빌미로 기다렸다는 듯이 파견사원 등 비정규직을 마구잡이로 해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고용보험에도 들지 못해 실직과 동시에 빈곤계층으로 전락했다. 해고와 함께 회사 기숙사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나앉은 경우도 많았다. 올해 6월까지 비정규직 해고의 광풍에 무방비로 노출된 20만~40만명이 해고될 것이라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허술해진 사회안전망에서 퉁겨져 나간 그들에게 일본 공산당은 현대판 ‘가케고미데라’(에도시대 사회적 약자의 도피처 구실을 했던 절)였다.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시급 1천엔의 파견직으로 일하다 지난해 1월 해고된 우스이 도코미(55·가명)는 두 달치 생활비밖에 없는 막막한 상태였다. 해고 뒤 집 안에 틀어박혀 생활했던 그는 올 1월 사장이 공산당원이고 직원 상당수도 공산당원인 병원 청소회사에 취직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난 3월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2년 창당 이후 오랜 명맥을 유지해왔지만 당원 40여만명의 대부분이 50~70대 중장년층이었던 일본공산당으로서는 최근 ‘젊은 피’ 수혈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데 고무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스물두살 아사노

자동차 부품공장 쫓겨나
당과 상담 해고철회투쟁
“나같은 약자편이라 입당”


아사노 기쿠코(22·가명·여)도 공산당이 최근 확보한 ‘젊은 피’의 한 사람이다. 고교 졸업 뒤 4년 가까이 일하던 자동차 정밀부품 공장에서 지난 3월25일 일방적으로 해고됐다. 지난 1월 공산당이 주최한 거리노동상담에서 알게 된 아베 마코토 도쿄도의원의 도움을 받고 회사를 상대로 해고철회 투쟁을 하고 있다. 다른 곳에 취직하기 어려운 불황 속에서 13만엔이라는 터무니없이 적은 퇴직금을 가지고는 버티기 힘든 상황이다. 그는 지난 2월 “공산당은 나 같은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응원해준다”고 느껴 입당했다.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준 점”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애초 정치에 관심도 없고 선거 때는 투표 현장에서 적당히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 냈다는 그는 입당 이후 “우리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며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지난달 29일 도쿄 신주쿠에서 일본공산당과 계열 청년조직인 ‘민주청년동맹’(민청)이 공동 주최한 ‘거리 노동생활상담’ 캠페인은 사회적 약자와의 접점을 확대하려는 공산당의 전형적인 활동이다. 지난해 11월 건축회사에서 쫓겨나 공원에서 노숙생활을 하던 쉰다섯살 남성은 이날 상담을 받고, 공산당 도의회 의원의 도움을 받아 다음날 생활보호 신청을 했다.

열아홉살 때 결혼하고 스물두살 때 이혼해 두 자녀를 둔 싱글맘 스마노 요코(41)에게 일본공산당은 “곤란한 사람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정당”이다. 또한 “국가의 정당보조금이나 기업체 정치헌금도 전혀 받지 않고 오로지 당비로만 운영하는 깨끗한 정당”이라고 생각해 최근 자연스럽게 입당했다.

일본공산당은 지역조직 강화에 역점을 기울여 풀뿌리 정당의 이미지를 강화한 것도 당세 확장으로 이어졌다고 자체 평가하고 있다. 일본공산당은 2007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압승에 밀려 의석수가 9석에서 7석으로 줄어든 데 충격을 받고 지역 밀착 활동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전국 2만2천여 지부와 3천여명의 지방의원들이 지역 주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공산당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있다. 이 결과 지난 4월 지방선거에서 일본공산당은 의석을 9석이나 늘리고 2007년 참의원 선거에 비해 득표수도 50% 가까이 확대하는 등 약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에키 도시오 공산당 홍보부장은 “공산주의를 목표로 한다고 해서 한꺼번에 공산주의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있는 자본주의, 즉 규칙이 있는 경제사회를 실현하자는 것이 우리 목표”라며 “이것이 국민들이 공산당에 편안함을 느끼고 공감대를 넓히는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일본공산당은 2004년 1월 제23차 당대회에서 당강령을 대대적으로 개정해, 혁명정부 수립 목표를 포기하고 민주연합정부를 통한 의회주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 공산주의 혁명이나 일당독재가 연상되기 쉬운 공산당 이미지를 탈피해,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거에는 ‘민주집중제’라는 이름으로 각 지부에 현지 실정을 무시한 상의하달식의 지시를 내려보내기도 했지만, 현재는 각 지역의 자치권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당 당원 증가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약진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일본공산당은 올 9월 이전에 실시되는 중의원 선거에서 650만표 이상을 얻어 현재 9석인 중의원 의석을 크게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재 공산당 지지율은 4~5% 정도에 그치고 있다. 소련 붕괴 등 사회주의 체제 몰락 이후 혁명노선을 포기한 뒤에도 일본 국민 전반의 공산당에 대한 거리감 또는 거부감은 여전히 강하다. 최전성기였던 1979년 중·참의원을 합쳐 40석을 확보했던 때에 비하면 현재 중·참의원의 16석은 초라하다. 정권교체의 바람이 거세질 경우 차기 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 대 민주당의 구도가 강해져 부동표가 민주당에 쏠릴 수도 있다. 지방선거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산당의 득표력이 떨어지는 점도 고민거리다. 지역 당 관계자는 “우리 지역의 경우 지방선거에선 유권자들이 공산당의 정당명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투표를 하기 때문에 1만표 정도 나오는데, 총선에서는 아무래도 공산당이라는 간판이 부담스러운지 표가 적게 나온다”고 털어놓았다.

우에키 홍보부장은 “공산당은 일당독재 이미지가 있으니까 당명을 바꾸자는 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렇지만 우리는 공산주의의 본질은 일당독재가 아니라고 여긴다. 자본주의 체제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산당이 다수파로 다른 정당과 함께 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사진 황자혜 <한겨레21>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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