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잉 아이 - Dying Ey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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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고는 참 애증이 교차하는 작가다. 무언가 부족한 듯 하다고 느끼면서도 계속 읽어 나가는 걸 보면 애정이 좀 더 많다고 해야 하나?  일단 다른 작가들에 비해 망설임없이 책을 집어드는 걸 보면 그래도 많이 애정을 가지는 작가라고 해야겠다.  

그런 작가가 "다시는 이렇게 쓸 수 없을 것 같다" 고 고백했다는 작품이고, 문예지 연재 후 8년 만에 '해금'되어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는 작품이라고 하니 어찌 솔깃하지 않을까?
아직까지 읽어야 할 게이고의 소설들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이 작품을 손에 들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들이 겹겹이 둘러싼 셈이니 우선적으로 읽어내려 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게이고가 "다시느 이렇게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고백한 것은 과장된 표현이라고 느껴지며, 도대체 이 책이 왜 해금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 과도한 성애적 표현이 있지만, 요즘 추세로 보면 그 정도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이 작품이 범작이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좀 과장된 상찬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일 뿐이다. 여타의 추리 소설에서 보이듯 이중적 플롯은 정교하게 짜여져 있으며, 죽음을 앞에둔 사람의 절박한 마음과 원한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몇 푼의 보상금만 주어지면 양심의 가책따위는 사라져도 상관없는 현실적 냉정함도 잘 그려지고 있다. 우리가 흔하게 이용하는 교통수단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일상의 재난으로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일련의 심리적 통찰도 음미 할만하다.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사건이 갖는 의외성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그리고 그러한 의외성은 오히려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느끼지 못한 일들이 끔찍한 경험으로 재생될 때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 재생이 되지 않으면 무감각하게 그냥 묻혀지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대규모의 인간이 군집하는 도시에서 그런 무감각은 일상적인 일이고, 이러한 일상이 정상적으로 여겨진다. 

정상적 사회에서 일탈하겨 생명에 대해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마주쳤을때, 그 공포를 느꼈을 때 오히려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일까? 가해자들의 행태는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가장 인간적인 행태는 가장 광기에 찬 행태임을 이 작품은 드러내는 듯하다.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없는 이 사회의 행태 속에서 진정한 애도는 그 희생자의 삶의 의지와 공포를 그대로 인정하고 감싸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공포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게이고는 나에게는 2% 부족하다. 닥치는대로 읽다보면 그 2%를 채워줄 작품을 만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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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4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머큐리 2010-10-15 14:04   좋아요 0 | URL
정말이요????^^

다락방 2010-10-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2프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걸까요? 저 역시 그렇거든요. 게다가 [붉은 손가락]같은건 좀 찜찜하기도 하더라구요. [회랑정 살인사건] 이랑 [11문자 살인사건]은 재미도 없었고.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그래도 게이고라면 또 그냥 부담없이 읽게 돼요. 그런데 이 소설이 게이고가 "다시는 이렇게 쓸 수 없을 것 같다" 라고 한 책이로군요! 이제 게이고 읽지말까, 하던 참이었는데 또 이 리뷰를 읽고보니 이것만 읽을까 싶어지네요. 흐음.

머큐리 2010-10-15 14:06   좋아요 0 | URL
오히려 다락방님이 페이퍼를 쓰신 모든 책들이 저를 유혹하고 있어요..꾹 참고 있는 중이죠..^^ 락방님 따라가가단 가랑이가..ㅎㅎ

뭐 읽으셔도 무난하실 겁니다. 나름 에로틱하기도 하구요..^^;

다락방 2010-10-15 15:12   좋아요 0 | URL
에로틱.....강한 한방이군요!

다락방 2010-10-19 16:06   좋아요 0 | URL
이거 땡스투 들어온거...저에요, 머큐리님. ㅎㅎ

머큐리 2010-10-19 22:31   좋아요 0 | URL
땡스투에요..^^
 
인문학, 세상을 읽다 - 인문으로 읽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박민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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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에게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을 것이다.
관점은 창과 같이서 테두리가 한정되어 있는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할 망정 관점이 가진 효용성을 알기에 그대로 진화했나 보다.  

인문학은 어쩌면 고답적인 학문이다. 그때 그때의 시류도 중요하지만, 뭔가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탐구가 우선이기에 정체되어 보이기도 한다. 최근의 인문학 위기 담론과 더불어 인문학을 실용과 결합시키려는 경향성이 눈에 많이 띄인다. 광고를 통해 인문학과 창조성의 문제를 연관시킨 책도 있고, 인간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풀어내려는 경영과 인문학과 접합시키려는 시도도 보인다. 결국 인문학이 무용한 학문이 아니고 적용하기에 따라서 무궁한 쓰임새(?)가 있다고 주장하는 폼새인데 글쎄다... 난 무용한 인문학이 더 맘에 와 닿는다.  

그럼에도 인문학이 아무런 용도가 없음은 아닐 것이다. 근원을 파헤쳐 무엇인가를 궁리한다는 것은 무용해 보임에도 그 속의 유용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실용적으로 판명되지 않을 지라도 인간과 인간이 섞여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이 시대를 읽어나가는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일 테다. 그렇지 않다면, 인문학이야 말로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이 책의 부체가 '인문학으로 읽는 정치,경제,사회,문화'다. 인문학적 소양을 기반으로 이 사회의 전반을 두루 살펴보겠다는 의도이고 시도이다. 그건 고답적인 학문이지만 현실에 대한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인문학을 통해 깊이있는 통찰을 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타의 실용을 강조하는 인문학 서적과는 그 의도가 틀린 이 책의 장점은 역시 사람을 소외시키는 제반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주시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환경의 동물이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태도와 생활은 변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을 통찰해 내기는 쉽지 않다. 환경에 적응하다보면 환경자체를 당연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힘은 그 당연함을 낯설게 보게 하는 힘일 것이다. 그럴때 자신의 인식의 틀 너머에 있는 새로운 것을 알게된다. 이 책의 역할은 결국 그러한 새로움으로의 초대인다.  

경제가 만능인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묻는다. 경제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일어나는 모순된 현상들에 대한 고찰은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세상을 보는 관점은 욕망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경제에 관한 시선도 참신하다. 특히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주도하며 성장한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자유무역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 땅에 대한 부동산 문제도 그렇고... 그런데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인 문제를 경제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경제도 결국 인간의 활동이라서 그렇다.  

가장 참신했던 시선은 노마디즘에 대한 비판이라 하겠다. 내가 즐겨 읽는 많은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에게 보기 힘든 들뢰즈에 대한 비판은 신선하기 까지 하다. 노마드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결국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회귀하게 된다는 분석은 참고할 만 하다. 예전에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고 주장한 어느 책이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다는 점에서 아직 들뢰즈는 이 땅에서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완벽한 이론과 사상은 없는 법! 들뢰즈의 소수자에 대한 애정과는 별도로 한 번 따져볼 건 따져봐야 할 듯하다.  

총체적인 난맥상으로 병든 사회를 진단하는 글들도 탁월하다. 전문화의 환상과 노동의 소외를 다룬 글들도 그렇고 디지털 시대의 인간의 문제, 광고와 언론에 대한 분석도 좋다. 결국 이러한 문화적 환경이 현대인들을 얼마나 병리적으로 몰아가고 있는지... 결국 개인의 병리적 현상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설정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이고 이건 결국 인문학이 영원이 풀어내야 할 숙제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시류적인 글 속에서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부단한 탐구가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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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14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책들을 읽으면서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사람의 위치 설정에 대해서 입니다.
관심가는 책이고 관심가는 리뷰입니다~^^

머큐리 2010-10-14 18:25   좋아요 0 | URL
아마 평생토록 고민해야 할 부분이 사람의 위치 설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양철댁님 힘 내세요..^^

호우 2011-12-08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문학으로 보는`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글들이 참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저도 하나 의뢰받았는데.. 한참써놓고 보니 인문학으로 보는 글이라는게 어떤건지.. 먼저 알아야겠더군요. 물론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데 의뢰받은 주제라 그렇습니다. 아무튼 이런 숙제를 해결해 나가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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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생각하면 구역질과 안쓰러움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자신은 구원받았고 이 세상은 죄지은 자들로 득실거리며,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하는 행동은 어떤 거리낌도 없다는 독선에는 구역질이 나고, 철없던 어린시절 교회에서 성장한 나 자신의 이력으로 본 정말 독실하고 윤리적이던 신도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다. 세상에서의 교회는 권력기구였으며, 지금도 권력기구에 불과하다고 본다.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신앙인으로서의 김두식은 아니어야 한다고 하는 것 같다. 현상적으로 교회가 권력기구가 된 것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다시 예전 초대교회의 이상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요지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의 질서를 받아들여 썩어들어가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할 지 몰라도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책이다. 김두식교수와 같은 신자들을 보면 도킨스가 아무리 기독교를 비판하고 무신론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종교는 쉽게 사멸하지 않을 듯하다.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 책은 오히려 강력한 신앙간증처럼 느껴진다. 속세에 맞선 교회공동체로 복귀의 주장은 이상적인 만큼 혁명적이다. 

기독교의 타락은 세속의 권력과 결탁하면서 이루어졌다. 로마의 기독교화는 교회의 세속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런의미에서 권력과 동행하는 기독교의 성장은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신앙공동체가 그저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공동체로 변해버렸으니 그 안의 옥석을 구분하기는 힘들다. 진정한 신앙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식민지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권력과 야합하면서 성장했다. 권력과 함께 자본과 외적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물적 은총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속에는 차가운 권력관계와 서열관계만 존재하고 있지 신앙을 중심으로한 평등한 공동체는 내부적으로 압살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공동체의 복귀가 혁명적인 것은 프로테스탄티즘 본래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신앙과 양심에 따른 하나님과의 일대일 교통을 요구했던 신교의 전통은 소교황으로서의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나 신과 함께 소통하고 서로의 신앙을 나누는 공동체에서 신권주의적 목사는 장애물일 것이다. 더불어 신도들은 공동체적 보살핌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정서적 어려움들도 공동체 내부에서 풀어나가야지 국가에 기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의 잘못된 방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이 개인의 양심에 따른 행위에 대한 지원은 말할 것도 없으며, 성소수자등 소외받는 자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마치 건강한 시민사회를 보는 듯한 주장이지만, 그 근원은 다른곳에 있다. 단순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닌, 이미 2천년전에 그렇게 사시고 가르침을 준 예수의 생애가 밑바탕에 있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천국을 외치지 않는다. 예수를 본받음으로 해서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주체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어는 정치조직에서 외치는 것보다 더 반국가적인 혁명적 조직이 연상된다. 신앙이라는 관념만 빼버리면 원형적인 소비에트나 노동자 자주관리 등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차이는 그저 신앙일 뿐이고 실천은 보편적인 인류애의 달성과 새롭게 거듭나는 인간일 것이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무신론자이면서 기독교를 욕하지만 정말 물적, 이기적, 도구적 이성의 사람이 정신적, 이타적, 종합적 이성의 사람으로 변화하는데 신앙이 도움이 된다면... 글쎄...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내 무신론적 신념에 매서운 일타를 날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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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13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두식을 연속으로 읽으셨군요.
'교회 속의 세상'은 '불편해도 괜찮아'랑은 또 다르다고 하던데요~
급 호기심인걸요~^^

머큐리 2010-10-13 18:59   좋아요 0 | URL
이 분 글은 읽어서 손해날 일이 절대 없다고 봐요..현재까지는..^^

양철나무꾼 2010-10-14 00:43   좋아요 0 | URL
'불편해도 괜찮아'도 님의 페이퍼를 보고 혹해서 읽었던 기억이~~~^^
 
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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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논리도 중요하다. 하지만 감수성 역시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김두식교수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설명은 조근조근하다. 그러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내용은 힘차다. 너무 힘차기 때문에 가끔은 숨이 가빠지곤 한다. 항상 자신을 낮추면서도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힘있게 설득하는 모습은 김교수가 가지는 힘이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불편해도 괜찮다니... 조금만 불편해도 사람들은 짜증내고 화내고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못견디는 이 시대에 불편해도 괜찮다니... 편의성이 가장 우선시 되는 시절에 불편을 강조할 수 밖에 없는 사연은 간단하다. 모두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은 허상이고 정말 편한 세상을 위해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인권을 이야기 하는 책이다. 더불어 영화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다행스럽게 이러저러한 영화를 많이 본 덕분에 책의 맥락을 따라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가 본 영화와 이 책에서 설명하는 영화는 정말 같은 영화일 수 있는가 할 정도의 느낌이 틀릴 뿐이다. 그 차이가 바로 감수성의 차이고 감수성의 차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던 것은 '인권'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다수자에게 소수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책이다. 주류이고 다수자인 나는 이 책의 고민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내가 가지는 시각을 전면적으로 교정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소수자와 다수자는 숫자를 가지고 나누는 것은 아니다. 숫자가 크다해도 이 사회의 약자들이라면 소수자일 수 밖에 없다.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문제를 다루고, 더불어 사회를 어둡게 하는 사전검열과 인종차별, 제노사이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변에서 많이 보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는 이 소수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처지에 있는지 결국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은 영화를 매개로 설명하고 있다. 영화만으로도 인권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영상교재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경구들도 많다. 이를테면...

   
  모든 사회문제는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그쪽 논리를 따라가면 오히려 속이 편하지만, 양쪽 이야기를 듣고 나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 헷갈리는 상황에서 기억할 만한 원칙이 바로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똥파리에 나오는 대사도 인상적이다 

   
  아, 이나라, 씨발. 애비들은 아주 좆같애. 이게 븅신들 같은데 지 가족들한테는 아주 김일성같이 굴라 그래. 이 씨발놈들이. 니가 김일성이야. 이 씨발새끼야. 김일성이야. 이씨발놈아  
   

가부장제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김두식 교수는 인권을 아주 쉽게 정리한다면 결국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율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역지사지라고 남의 처지가 되어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하기 힘들 것이다. 위치를 바꿔보는 것.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이 위치의 전환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하면서 끊임없이 위치의 전환을 시도할 것이다. 다만 그 위치를 위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일까?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보다는 패배자로 규정하고 연대하기 보다는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고 끊임없이 위로 가려고만 한다. 자신의 미래상에는 아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아래를 생각해도 그건 어느 정도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 후에야 가능하다. 사람들도 낮은 위치에서 부르짖는 외침은 불평, 불만의 소리라고 치부하고 어느정도 기득권자가 주장하면 개혁적이라 평가한다. 웃기는 일이지만 현실이다.  

김두식교수자체도 기득권자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는 이 땅에서 최고로 여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합격에 지금은 대학교수다. 현판으로만 따지면 어디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말하는 인권의 가치를 보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만 하다. 그러나 이 사람의 글 속에는 그런 오만함이 없다. 계몽적이지 않고 그저 현실의 부당함을 잔잔하게 끄집어 낸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도 그대로 투영시켜 낸다. 그래서 설득력이 더 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는 김두식이나 기획은 국가인권위원회다. 인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인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결국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어떠해야 할 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런 관계에 대한 질문을 영화를 통해 풀고 있는 이 책은 어떤 인권 교과서 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건 아마 김두식이란 사람이 품고 있는 진정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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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껏 살아라! - 생의 끝자락에 선 아버지가 아들에게
티찌아노 테르짜니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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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기 전에 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테찌아노 테르짜니는 1938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1972년에서 1997년까지 독일의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특파원으로 홍콩, 베이징, 도쿄, 방콕, 뉴델리에서 주재하면서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내전, 문화혁명 후의 중국 등 아시아의 격동적인 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기자였다.  

저자가 태어나고 자라난 시대는 2차대전 이후의 경제 성장기였고, 젊은 시절 68혁명을 경험하고 제3세계에서 식민지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며, 정체되기 시작한 서구 운동에 아시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주던 시대였다. 특파원으로서 기자로서 그리고 마오와 간디에게 많은 영감을 얻었던 저자는 아시아 특파원 생활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문제, 정치와 개혁의 문제 등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특히 서방기자였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당파적인 입장에서 미국이 침략전쟁을 반대했고,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지지를 보냈지만, 혁명 후 경직되어가는 사회를 보고 많은 절망을 한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길 혁명은 사회개혁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은 사람의 문제이다. 사람이 변하지 않고 또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혁명은 그 자체로 재앙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정치가들은 그들이 미쳐서가 아니다. 그들은 일관된 자신이 계획과 논리로 무장하고 있었고 흔들림없는 신념이 있었다. 그리고 외적 강제로 사람들이 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었으며,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그는 정치의 무용성을 발견하고 인간 존재 그 바닥까지 떠나는 여정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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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09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조선일보'문제에 엄격한 이유는 '조선일보'문제를 대단한 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기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야.만 명의 사람에겐 만 개의 생각이 있을 수 있어.그러나 사람에겐 사람임을 증명하는 기본이라는 게 있고 '조선일보'와 상종하지 않는 건 그 가운데 하나야.'조선일보'에 글 쓰는 놈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야.

김규항의 한구절이 생각나서 옮겨봤어요.
리뷰가 '작성중'이었군요.이런 방법도 있네요.
'혁명은 사회개혁의 문제가 아니라,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이 구절에 밑줄 쫘악 그어 데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