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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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란 과연 무엇인가. 저자는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자 자신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우울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나타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목처럼(이 책의 원제는 한낮의 악마이다.) 거리낌없이, 당당하고 버젓하게, 뻔뻔스럽게 찾아오는 불가해한 불청객이다. 우울증의 원인을 밝히는 데에는 모든 가능성이 고려되며 사소한 영역에까지 이르는 모든 문제들이 그 촉매가 될 수 있다. 모든 이유에 모든 결과라니, 이토록 광막한 해석만이 가능한 우울증의 씨앗은 그래서 모호한 안개 속에 제 몸을 숨기고 있는 짐승이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한 무책임하다 싶을 정도의 추정은 차치하고라도 우울증이라는 재난에 가까운 현상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한사람의 우울증 환자로써 세번째 우울증 삽화를 겪어내면서 이 책을 완성한 저자는 우울증을 낱낱히 파헤쳐서 그 썩을 것을 지구상에서 박멸해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로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무의식적인 터부의 영역이자 은밀하게 광범위한 재앙의 제국을 구축해놓은 현상을 인문학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이 특유의 감수성으로 역사에서부터 생물학에까지 이르는 가능한한 전분야에 걸친 관련 증거들과 사례, 이론들을 통해 차분하게 직시하게끔 만든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자신의 말마따나 스스로 프라이버시를 완전히 버려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우울증이라는 이 기괴하면서도 설명하기 힘든 현상에 대해서 더없이 진솔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자신이 겪었던 우울증과 일탈에 대한 기억을 담담하게 털어놓는 저자의 태도엔 조용하지만 결연한 무언가가 있다. 그 담담함과 일탈의 강도가 주는 충격의 상반된 조화는 다시 한 번 '왜'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도대체 왜, 멀쩡하게 살아가던 사람에게 이런 일까지 가능하게 만드는 우울증이 찾아온 걸까. 하지만 부질없는 동어반복처럼 그 정확한 이유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그 이유를 알아보려 하는 작업은 책에서 꾸준하게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해와 (해결이 아닌)완화이다.

개인적으로 우울증이란 현상과 연이 있는 본인으로써는 이런 책의 존재는 축복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전혀 어렵지 않은 표현과 서술로 진실을 간파해내는 멋진 재주를 보여준다. 그것은 저자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비전문가라는 것과 그 자신이 우울증 환자라는 것, 그리고 이 책의 방향성이 이해와 동감을 기조로 하는 심리치료의 그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세가지 장점에 근거한 바다. 그래서 부분부분 흥미롭고 논쟁적인 소재를 제시하는 저자의 견해에는 체험에 근거한 진실성이 있다. 막바지에 이르러 우울증이 만드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저자의 태도엔 이런 류의 책들에서 자주 봐왔던 관습성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키에르케고르가 아닌 바에야 그런 결과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닌가. 우울증이란 놈이 옛날보다 훨씬 복잡하고도 치명적인 괴물이 된 현대는 베르테르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 시대다. 그렇기에 이 책이 현실성을 갖춘 항우울증제가 된다는 건 가식이 아니라 미덕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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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한번 읽고 싶은 책이에요.^^
 
찰스 덱스터워드의 비밀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변용란 옮김 / 영언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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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은 안타깝게도 별로 무섭지가 않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작품 내내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말그대로 '절어서' 살아가고 있건만 그걸 접하는 독자인 나에겐 그 공포가 직접적으로, 마치 내가 겪는 공포인양 와닿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공포를 전달하는 작가의 시선이 더없이 냉정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러브크래프트는 공포 속으로 독자를 몰아부치려고 자세하고 해부학적인 묘사를 동원하거나 격정적인 인물들의 감정을 이용해서 닦달하질 않는다. 그는 공포가 일상적인 삶 속에 내재화된 사람처럼, 그래서 그가 곧잘 표현하는 신화적이라 할 법한 거대한 공포와 부딪혔을 때 두려움만큼이나 찬탄의 마음 또한 느낄 수 있을만치로 무척이나 차분하다. 

<광기의 산맥>도 그랬고 몇 편 접한 그의 단편들도 그랬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서술은 1인칭 화자의 입장에서조차 지극히 냉정하다. 여기서 냉정하다는 것은 공포와 마주한 인물들의 폭발할 듯한 감정선은 가급적 배제된 채 설명조차 하기 힘든 장대한 공포의 광경들에 대한 '매혹'을 지근지근 밟아가듯 정성스럽게 묘사하는 착실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그 서술 태도에 대해서다. 정작 독자는 볼 수 없는 실체와 맞닿은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간접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실체를 볼 수 없어서 느낄 수밖에 없는 '압도된 감정'과 모호하면서도 절대적인 대상에 대한 노골적인 작가의 매혹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커다란 안개로 묘사하기도 했다.

압도적인 공포에 대한 '매혹'에 중점이 맞춰진 이야기의 흐름은 예상과는 달리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극단적으로 인물과 독자와의 접점이 이루기 위해 자극적이며 가히 포르노적이라 할 묘사로 버티는 허접한 공포소설들에 비해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절제의 정신과 엄격한 품위가 있다. 그것은 분명 초월적인 형태의 공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신선하고 유효하다. 러브크래프트는 우리에게 너무 무시무시해서 아름답기까지 한 지옥을 꿈꾸게끔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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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부녀 - 단편
모치즈키 미네타로 지음 / 세주문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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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후 드래곤 헤드에서 보여줄 신경증적인 상황이 안겨주는 공포를 여기서 먼저 시험했다고 봐야 할텐데...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좌부녀는 조또 꿈나라를 날아다니는 스토리에 기껏해야 꽝꽝 울리는 효과음으로 관객을 겁주려는 근자의 한국 공포영화들에 비해 만화라고 하는 영화보다 한정된 감각을 빌리는 매체를 통해서 공포의 미덕이란 걸 잘 드러낸 작품이다..

여기선 소위 공포의 기본 조건으로 제시되는 신체 훼손이나 왜곡이 거의 안 드러난다. 그런 이미지적인 효과들은 철저하게 억제되어 나가다가 마지막, 두 번의 클라이막스에서 침착하게 사용된다. 오히려 초중반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은 기괴하지만 있을 법한 이미지를 가진 존재에 의한 스토킹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들이다. 그것은 분명 지하철이 난데 없이 무너진 터널 속에 갇혀버리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부조리하지만 동시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그러니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별의별 해괴한 소식을 다 보고 듣게 된 미디어 시대의 대중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밖에 없는 겁살나게 재수 없을지도 모를 그 누군가가 될지도 모르는 자신이라는 공포의 밑바닥을 설득력 있게 눌러주고 있다. (욕구의 대상이었던 존재가 공포의 대상이 되는 형상인 좌부녀가 직시하고 있는 공포의 해당자는 남성이다. 그를 뒷받침해주듯 좌부녀의 디자인은 비틀어진 여성상을 확실하게 지향한다. 남자보다도 큰 키에 고통에 대한 감각의 결여와 그로 인한 맹목성, 그리고 여성성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바바리 코트!)

그러나 스토킹이란 소재, 어디 한 두번 봤나. 그래서 작가는 재밌는 시도를, 맥거핀이라 할만 한 장치를 설정한다. 그것은 중간 즈음에, 좌부녀에게 습격을 받은 두 남정네가 자신들의 불행의 근거를 찾아내려고 초등학교 시절로까지 거슬러 내려가는 작업을 통해서 발현된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불행의 근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지금의 불행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좌부녀에서의 공포가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현실적-인과적 측면에서의 설명은 사라진다. 그런데 이 부분이 이 작품에서 보여주려하는 공포의 진정한 출발점이 된다. 즉, 이 시점에서부터 좌부녀는 어떤 현실적 근거도 찾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 공포스러워진다. 주인공은 친구의 연락이 오기 전까지 좌부녀와 자신이 어렸을 적의 치부였던 죄를 동일시하면서 그녀가 자신을 괴롭히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할지 모른다고, 자신은 일종의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주인공은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다. 속죄조차도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 상태. 설명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존재. 여기서 좌부녀-공포는 완전히 불가해한 상태에서의 압박으로, 헤어날 수 없는 미궁으로 자리잡는다.

실재했던 악몽이 괴담이 되어 또다른 누군가를 잡아먹으러 거리를 돌아다니게 되는 마지막은 공포물의 통속성, '나'까지 포함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위협과 그로 인한 감정이입을 노리고 있다는 점에서 뻔한데다 귀엽기까지 하지만 9.11 이후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동반할지도 모르는 피해에 대한 불안과 게시물 하나 잘못 누르면 시체 사진이 쏟아지는 세상, 그 실제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이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세상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이다. 비록 범아시아적 귀신이 되버린 사다코의 재현이라는 것이 좀 식상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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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음산한 만화였습니다.
집착, 이상성격 이런 것이 귀신보다 더 무서워요.
잘 읽었습니다.^^

jenny-come-lately 2004-08-3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dafuck님의 만화 리뷰 별점 4개와 5개짜리는 꼭 읽고 싶어지도록 만든다 이겁니다.(걔 중에 몇 권만 구매를 하게되더라도 말이죠.)
 
꿈의 사도 6 - 완결
우에시바 리이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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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시바 리이치는 전작, 가면 속의 수수께끼에서부터 자신의 취향이 전세계에 걸친 신화와 종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천명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온갖가지 신화적 상징들로 가득차 있고 그 아이콘들이 가리키고 있는 메타포들의 연쇄 반응이 일으키는 쾌감도 즐거운 수준의 것들이었다. 또한 그 의도는 자신의 독자층을 일반 독자들과 확연히 나누는 구분의 방법론이기도 했다.

꿈의 사도에서 그의 잡다한 취향은 작화로나 이야기에 있어서나 보다 정교해져서 드러난다. 그런데 이 꿈의 사도가 독특한 것은 작가가 자신의 방대한 취향 속에 한가 지 더, 일본 대중 문화의 키치적 아이콘들을 섞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의 사도는 스토리적 측면은 이야기의 원형인 신화적 은유들로 가득한 반면 그것을 작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녀 전대가 구사하는 작가 개인의 취향이 다분한 잡동사니들의 전례라는 것이다. 잠깐 들여다봐도 알겠지만 꿈의 사도의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위 오타쿠 취향의 키치 아이콘들은 거의 숨은 그림 찾기에 필적하는 즐거움을 준다. 여기선 울트라맨과 가면 라이더와 네로 선장과 자이언트 로보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히 오타쿠 아이콘 사전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이다.

전작인 가면 속의 수수께끼는 신화적 은유들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야기 자체의 재미, 플룻의 즐거움은 상대적으로 소홀하지 않았느냐 하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로리타 컴플렉스로 가득 채워진 전대물인 이 꿈의 사도는 정말 화끈한 재미를 추구한다. 사건이 있고 그 뒤엔 신화적-신비주의적으로 비비 꼬인 설정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는 정의의 사도들이 존재하고 그 와중에서 액션과 노출은 원없이 넘쳐난다. 작가는 진정 매니악한 오락물을 만들어내길 바랬던 것이고 그 의도는 거의 맞아 떨어졌다. 카니발리즘과 근친상간의 제의들이 미성숙한 여자 아이의 몸뚱아리를 제물로 펼쳐지는 전대물의 활극 속에서 현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그 광경이 주는 황망함과 경이감, 혹은 경멸감에도 불구하고 우에시바 리이치라는 작가에게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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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산업 - 홀로코스트를 초대형 돈벌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노르만 핀켈슈타인 지음, 신현승 옮김 / 한겨레출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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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지저분한 추태에 대한 세밀한 보고서에 가까운 이 책은 우리를 속여왔던 거대한 거짓을 폭로하는 진실, 부당함에 맞서는 용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문제들이 아직도 죽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다방면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동시에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더없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러준다.

유태인인 저자가 유태인 집단에 보이는 분노는 별 다른 게 아니다. '민족'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민족'의 이득을 대변한다고 하는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벌이는 전세계적인 사기극과 그 횡포가 낳는 악순환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뻔뻔스럽다. 그들은 역사를 모른다. 안다 해도 외면한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하던 그 행동, 그 획책은 언제나 거대한 민중만의 손해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민족과 민중을 들먹거린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있어 민족과 민중의 개념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좁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그들은 그 모든 상처 바깥에 서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지나가자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큰 피해자인 척, 상상과 환상의 궁전을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착실하게 구축한다. 그들은 증거를 없애고 스스로를 궤변으로 정당화하며 모든 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의 의도를 광범위한 대중의 통일된 의식 상태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그래서 그 허깨비는 차차 그들에게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라는 선물을 주고 그 결과 그들의 궁전은 더욱 튼튼해져 간다. 아울러 (적어도 스위스 은행은 아닐) 은행에 있는 그들의 비밀 계좌 또한 디룩디룩 살찌워져 간다. 돈과 권력, 협잡과 아집, 음모와 욕망의 이 역겨운 앙상블.

심지어 그들은 그렇게까지 살찌운 결과를 그 모든 비극의 중심에 섰던 동포에게조차 조금이라도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달래는 건 간단한 일이다. 살아남은 이는 어차피 얼마 되지 않고 그들은 가식된 영광과 비극의 역사로 빚어진 향기 나는 사탕을 몇 번 흔들어주면 될 일이었다. 저자의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가 결국은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일하게 됐다는 걸 얘기하면서 씁쓸해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민중 개인들의 변절과 좌절을 의미하고 있는가.

과연 내셔널리즘이란 괴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책은 내셔널리즘이란 괴기스러운 의식이 가장 최악의 모양으로 증식되었을 때를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은 극도로 정치적인 판단이었고 더할 나위 없이 가차 없었으며 지독하게 영악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주제에 그 의도는 계속해서 모든 민중의 의식을 겨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직도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 나라에도 같은 의문을 던져주게 만든다. 과연 일제 시대 때, 후대의 '기록'들에서 밝히듯 그리 고통과 핍박의 연속만 있었는가. 그 고통의 당사자들은 과연 누구였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그 모든 기억들의 생성 주체는 누구였으며, 무슨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인가.

과연, 이 나라의 기득권층이 가지는 도덕이란 어떤 것인가. 명백한 얘기지만, 우리는 잊어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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