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집회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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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이 만든 '크림슨 리버'를 돈내고 봤던 관객으로써 한마디 하자면 그 영화는 그 좋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데이빗 핀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템포가 축 늘어졌던 스릴러물이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원작이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설명은 프랑스 상업 소설이 가진 오락성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돌의 집회'를 읽어보기로 결정하는 데에 특별한 기대감 같은 건 없었다.

공산주의가 붕괴된지 어언 십여년이 훌쩍 넘었지만 한 때 존재했던 그 폐쇄적인 세계가 가진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각국 문서고에 박혀있을 1급 기밀 서류의 양만큼이나 많다. 유럽 각 지역마다 유령처럼 남아있는 공산주의 시절의 소문들, 철저한 통제 아래에서 행해졌던 과격한 실험들, 소수민족에 대한 잔인한 폭압과 착취, 폐쇄사회였기에 가능했던 정보통제와 사회적 동의를 무시한 비인격적인 실험의 은밀한 시행 등등. 근래에 이러한 키워드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버무려져서 탄생한 작품이라면 역시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돌의 집회' 또한 그 어둠의 영역을 소재로 삼는다.

다양한 정보가 수용된 전직 저널리스트다운 깔끔한 문장이라는 장점이 뿌리까지 오락소설답게 도식화된 구성이라는 단점과 함께 어울리는 이 소설은 중후반에서 결말부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어디서 본 것 같은 이미지들'의 연속 제시와 당사자들에 의한 전반적인 사건의 설명부가 전체적인 면에서 소설구조상 상대적으로 편중된 과밀한 정보량과 도식성을 보여줌으로 인해 작품의 신선함을 떨어뜨리고 있음이다. 특히 인물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문어체 대화라는 것도 눈에 띄는 문제였다(이것은 번역상의 난제일려나). 그러나 적어도 작품이 보여주는 속도만큼은 영화판 '크림슨 리버'보다 나았다는 점에서 그 영화를 볼 때 지불했던 값보다는 훨씬 위안이 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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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 지각의 병참학, 패러다임 총서
폴 비릴리오 지음, 권혜원 옮김 / 한나래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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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인간이란 서로를 죽이는 일에 너무도 열심히 몰입하는 존재라 문명의 역사는 곧 전쟁과 살인의 역사임에 다름 없었어라. 기술의 발전은 곧 얼마나 많이, 혹은 효율적인 죽음을 수행해낼 수 있는지 연구한 끝에 얻어진 부수적인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현대 영화에서의 조명과 카메라의 개념이 전쟁으로 인해 태어났다고 설명하는 것에 대해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 지금 편의점으로 가보면 KGB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숙취해소제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니 한 번 확인해보시라.

이미 이미지는 우리의 삶에 진하게 침식해 들어와 있다. 그래서 이 책의 화두들 대부분이 영화와 이미지의 진화가 전쟁의 양상과 결합되어 있는 세기초에 머무르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자면 당나귀만 타면 패리스 힐튼 본인조차도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도 안 날 미공개 포르노 비디오를 볼 수 있는 이 시대의 시점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고고학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충실하게 저자는 차분하게 영화, 정확히는 이미지라는 괴물과 전쟁의 근친관계를 해부해나간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시선과 이미지의 전쟁이었던 1차 세계 대전과 이미지의 폭격장이었던 2차 세계대전, 이후 존재했던 수많은 전쟁들과 전시에 이뤄졌던 영화산업의 '참전 양상'을 보게된다.

인간은 오랫동안 너무도 발달한 시각 덕분에 허상의 궁전에 많은 것을 바쳐왔고 바칠 것이다. 나는 본다, 그래서 존재한다 라는 화두는 옛현자들에 의해 깨어진지가 어언 수 천년 전이건만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이미지는 인간을 잡아먹어간다. 우리는 이미 가상의 이미지를 진짜처럼 여기는 것이 습관화되었고([블레어 윗치]와 [알포인트]의 성공을 보라) 동시에 엄청 잘 까먹어버리게 되었다(쫄딱 망한 [블레어윗치]의 속편을 보라). 그것은 마치 더 새롭고 강렬한 이미지를 받아들이기 위한 뇌용량 확보로 보인다. 테크놀로지는 이제 표현 못할 것이 없어보이고(우리는 중간계라는 완전한 가상의 동네에서 정체불명의 종족들이 펼치는 모험담을 봤다) 그 정점을 추구하는 헐리우드는 과거의 유산-신화를 표현하는 대서사극의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경이적인 광경들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점점 무디어간다. 그 기술적-이미지적인 상호간의 경쟁은 마치 전쟁 같다.

그러나 그보다도 네트는 우리의 일상 속에 쉽사리 스펙타클이 펼쳐지게 만들었다. 우리들 중에서는 닉 버그와 김선일이 참수 당하는 동영상을 자신의 의지와는 별 상관 없이 봐야했던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하룻밤동안 전지현의 결혼의 배경(정작 문제의 기사에서조차 결혼이 취소됐다고 써 있었다)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열띤 토론(과 욕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몇 개나 되는지 샐 수도 없는 게시판에 박힌 순진한 제목을 재수없게 누르게 되면 로튼닷컴에서 갓 퍼 온 시에라리온 내전 중에 죽은 이의 입 속에서 기어다니고 있는 구더기 사진을 볼 수도 있다. 정보는 전쟁이 되었다. 이미 정보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는 2차적인 것이 되어간다. 정보는 속도인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멸망을 우리가 죽기 전에 네이버 게시판에서 더 먼저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순간, 혹은 그 순간에야 우리는 죽은 것이다.

이 책이 발간된 것이 1991년이라는 걸 생각해보자. 그 때 우리는 날마다 미국의 미사일이 되어 이라크 건물들을 하나씩 부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저자가 지적한 먼저 보는 시선의 승리의 예가 CNN에 완벽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폭탄은 목표에 닿아 폭발해버리는 순간 제 시선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나도 같이 실명해버리는 거다. 지지지직. 난 그 기분나쁜 동영상을 매일마다 봐야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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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4
토우메 케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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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가 주목할 가치가 있었던 것은 이것이 20대 중반에 다다른, 프리터를 가장한 사회적 루저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가 된다는 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오즈미라는 남자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게도 삶에의 치열함에 대한 문제제기이고 그것은 그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자각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양의 노래'에서 토우메 케이의 화풍이 그 숨막힐 듯한 삭막한 무드를 조성하는데 일조했던 것은 그녀만의 독특한 펜터치가 아니었다. 되려 그녀의 거칠면서도 정감있는 펜터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그나마 살아있는 인간이란 걸 짐작케 해주었다. 회빛이라는 느낌이 날 정도로 독특한 펜터치를 가진 그녀의 만화들에서 드러나는 공간이, 그리고 그에 따른 인물들이 그토록 건조해보일 수 있는 것은 공간을 표현하는 그녀의 스타일 때문이다. 거의 초지일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작품 속 공간들은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공간적인 측면에서 비어있음을 극대화시키는, 즉 회빛의 연장으로써 기능하는 그녀의 펜터치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단순히 크로키적인 묘사로 일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사무라 히로아키가 '이사'에서 보여줬던 일상공간 표현에서의 오밀조밀함과 비교해보자면 그녀의 작품 속 공간은 시대극인 '흑철'에서조차도 황량할 정도로 텅 비어 있다. 이런 성향은 이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며 준백수 프리터의 일상적인 황량함을 구현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도 나왔다. 3권 초판을 찍은 게 2002년 3월 15일인데 이건 2004년에, 그것도 9월이 되서야 나왔으니 근 2년을 잡아먹은 셈이다. 이번 4권에서 토우메 케이는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한다. 충격적인 부록인 하루 옷 갈아입히기 같은 것이 왜 들어갔는지는 정말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바이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전작에선 볼 수 없었던 데포르메의 적극적인 활용과 그에 따른 개그적인 연출의 전반적 강화다. 이것은 초반부에선 상당히 어색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자연스러움을 체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적이라 할만 하겠다. 작화상의 변화도 눈에 띈다. 이전 3권이 나왔을 즈음의 토우메 케이는 모종의 슬럼프를 겪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양의 노래, 흑철)에서 가끔씩 보여지는 엉성하게 일그러진 인물들을 통해 작화상의 난조를 보이고 있었다. 이번 4권에서는 그러한 난조는 제법 가라앉은 모양으로 전처럼 심하게 눈에 보여지는 엉성함은 없지만 전체적인 인물 작화에서의 연령 하향평준화가 시도됐다.(덕분에 시나코 선생은 아주 고등학생 수준으로 회춘해버렸다.)

스토리 상으로는 정리의 느낌이 강했다. 일단 스토리상의 갈등 요소 두 가지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작가적 의지의 관철인 것인지 이야기를 끌어가기에 귀찮아서인지 현재로선 구분을 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캐릭터의 존재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측면에서 물어보자면 별 활약도 하지 못하고 나온 두 사람 덕에 작품적으로는 갈등 구조가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긴 힘들다. 그것을 심심쩝쩝한 현실을 충실히 구현한 것이라 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그런 돌발성이 미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기엔 납득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정한 변화 속에서 은근한 러브코메디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짐 싸고 있는 느낌이 강했던 4권이었고 주변의 라이벌적 문제거리들도 어지간히 정리가 되버렸기 때문에 5권에서 완결이 나지 않을까 기대를 해볼 수 있겠다. 다만 1권서부터 똑같은 질문을 해대면서 똑같이 고민을 하는 발전 없는 캐릭터들 덕에 확신은 금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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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eh 2007-11-30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흑철 경우엔 5권 이후엔 아예 나오지도 않더군요.. 최근에 나온 모르모트의 시간은 스토리나 작화나 그닥 맘에 안들어서 실망을..

개인적으로는 초기 단편(ZERO와 우리들의 변박자)이상의 완성도를 지닌 장편은 만들지 못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더군요..

hallonin 2007-12-0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우메 케이의 요즘 행보는 많이 실망스럽죠.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가 그나마 좀 희망적이지만, 아직 5권을 못 본 상태라.

dameh 2007-12-0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스터데이-는 글쎄요, 토우메 케이 특유의 '배경적 환상'이 없어서 그런지 -흑철, ZERO등에서 보여줬던- 제겐 크게 끌리지 않더군요.. 모르모트의 경우엔 작위적인 면이 크고..
 
SF부족들의 새로운 문학 혁명, SF의 탄생과 비상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3
임종기 지음 / 책세상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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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이 문학 주류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은 SF팬덤에 있는 이들이라면 오래 전부터 느껴오던 바였다. 이 책은 SF문학의 역사를 정립함으로써 단순한 장르문학을 뛰어넘는 SF문학의 가치를 재점검해 봄과 동시에 그런 SF팬덤의 피해의식적 인식을 역으로 드러내보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초보 SF팬들을 대상으로 맞춰 쓰여진 이 책은 그래서 대략적인 개론서로서의 방향성을 갖고 있고 그에 충실하게 SF문학의 역사를 나누고 분류하며 간략한 스토리 해설을 함께 곁들이는 정석적인 모양을 띄고 있다.

SF문학의 탁월한 점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인간 상상력의 극한이란 점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시대를 품고 과거와 소통하며 미래를 이야기하는 SF문학은 이야기의 근원을 꿰뚫고 있음과 동시에 탁월한 이야기꾼들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장르문학으로써 끊임없이 전문화된 SF문학은 스스로 게토를 만들어냈고 그 안에서만 소통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SF는 그 전문화된 경향으로 인해 쉽사리 건드리기 힘든 영역으로 자리잡은 측면이 있다. 이미 SF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장르 안에서만 순환되는 것이 아니게 된 것처럼 저자가 지적했듯이 발라드를 비롯한 일군의 작가들에 의해서 게토 바깥의 세계와의 교류는 쉬지 않고 이어졌지만 그에 뒤따르는 반대급부적인 결과로 SF문학이라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 또한 강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미 장르문학으로 자리잡기로 맘먹은 이상 그것이 굳이 주류문학이 되어야 할 필요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이 순간, 주류문학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음인가. 밀란 쿤데라와 네이폴의 소설들을 주류문학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지만 네이폴의 소설은 닐 스티븐슨의 신작보다 덜 팔린다.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 정치연애 소설만큼이나 사이버 스페이스의 공간적-철학적 개념을 확립한 '뉴로맨서'는 위대하다. 그렇다면 불만의 근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문학의 쓰레기 분포율은 이미 시어도어 스터전이 SF팬뿐만 아니라 현학적인 말놀음에 지친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수긍할 정도로 간파해내지 않았는가.

카이사르의 몫은 카이사르에게로. 이것은 SF요, 하는 순간 그 자리엔 자연스럽게 결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장르문학으로서의 자부심으로 봐야지 소통 안 된다고 억울해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SF문학의 영향력과 파급력은 피해의식을 느껴야 할 정도로 약하지 않다. 머리 굳은 주류 평론가들도 사이버 스페이스 상의 주관화된 객체를 표현하는 전자 그래픽 덩어리를 지칭할 땐 아바타라는 말을 써야한다. 그러니 너무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전파된 덕에 이젠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이 된 영역들을 아직도 인정 못하는 이들은 멍청해서 불쌍해 보인다라고 해야 마땅한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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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Heaven 6 - 완결
사사키 노리코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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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노리코의 작품군이 어딘지 비범한 인물들을 매개로 한 개그물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이 [헤븐?] 또한 그녀의 작품이라는 인장이 꽉하고 박혀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강한 캐릭터성을 자랑하는 그녀의 성향에 한가지가 더 붙여진 게 있다면 바로 장소. 이름 한 번 거창한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차려진 곳은 공동묘지인 것으로 시추에이션 코미디를 지향했던 전작들(수의대, 병원)에 비해서도 설정의 아이러니가 주는 강도가 세다. 전채 요리가 이정도 영역에까지 이르면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치는 일이다.

하지만 6권으로 완결이 난 지금 그런 우려는 기우였다고 보는 게 좋을 듯 하다. 이미 중견작가의 반열에 오른 사사키 노리코는 자신의 페르소나들을 이용해서 보기 좋은 것만 아니라 맛까지 있는 메인 디쉬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 모든 이야기의 공식들이 그녀의 전작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면 지적할 수 있는 바겠다. 하지만 작가에게서 어떤 굉장한 영역으로의 도약을 바란다면 사사키 노리코가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나 [파타리로] 같은 물건들을 만들어내길 바래야 하는 걸까. [헤븐?]은 작가 자신이 가진 틀 안에서 조용한 실험을 해보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실험은 충분히 유쾌했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결말의 빈약함이다. 연재중단의 압박이 들어왔는지 의심케 할 정도로 이 작품의 라스트는 즐겁고 떠들썩했던 본편의 진행과정에 비해 볼품이 없다.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한데다 불성실한 후일담식 엔딩이 자리잡은 어이없는 마지막은 작품 배경에서 느껴지는 강한 아이러니 성향이 도입된 이유를 가늠케 함과 동시에 소재부족에 대한 의심과 그녀 자신이 만든 매너리즘이 지겨워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만든다.

과연 세상의 끝에서 그녀는 무엇을 본 것일까(...라지만 이렇게 심각할 뻔한 내용은 없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바이다.

솔직히 사사키 노리코가 '파타리로'를 그리면 어떨까 상상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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