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빅토리아 시대 어머니의 이타적이고 이상화된 형상이 여전히 많은 현대인의 상상을 사로잡고 있기에 제일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반복하는 듯한 형상과 그렇게 함께 한다.
가사를 돌보는 1950년대의 가정주부, 반짝이는 냉장고와 말끔한 얼굴의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복잡하지 않은 미소와 함께한. 이 이미지들의 짝은 종종 ‘집에 있는‘ 엄마들에게 던져지는 다음의 질문뒤에 있다. 그녀들은 어떻게 저렇게 하지? 아니면 그들은 전통적이거나 일상적인 것, 안정적이거나 ‘좋은‘ 것을 대표한다. ‘어머니‘라는 명사를 말해보라. 그러면 이 역사적 인물들이 자동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현대 문화에서 과도하게 드러나는 듯하고, 사람들을 여전히 통제하고 있다. - P175

 "나는 이해할 수 [・・・] 없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우리가 "빅토리아 시대의 유한부인, 집안의 천사라는 역할과 빅토리아 시대의 요리사, 부엌데기, 세탁부, 가정교사, 간호사 역할까지 모두 완수하도록 기대되었다"는 것을. 리치는 집안에 길들여진 도덕적인 어머니도, 형편없는 시급을 받는 단순노동자도 되길 원하지 않았다. 리치는 "나만의 인생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썼다. 그리고 "세탁일의 반복 순환‘으로부터, "아이의복지"와 "남편의 경력"에만 몰두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는 사실도,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다움은 명명될 필요가 있었다. 대대적으로 급파되기 위해. - P176

프랜시스 머리는 빅토리아 시대 런던교외의 친구를 방문하고 집주인의 가정적 삶의 ‘관습적 둔감함‘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아기 상태 Babydom‘로 불렀다. 사실 그보다 더 신랄하게 표현했다. ‘아기 상태의 신격화‘라고. 더 심각한 것은, 이상이라는 것이 점차 치명적으로 작용하거나 이루기가 불가능했다는것, 혹은 그럴 만한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좋은‘ 어머니가 존재하는 곳에는 실제 삶의 ‘나쁜‘ 어머니들의 행렬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어머니들 자신의 눈으로든, 제도-국가, 법, 의사, 사회복지사-의 시선으로든 ‘나쁜‘ 어머니들이. - P176

샌디 라이트는 비서였는데, 지금은 "언제나 생각해요. 집안일을 좀 하려는 참에도, 아기가 깨기 전에 이 일을 할 시간이 될지 생각하죠. [...] 아시잖아요, 만일 애가 울게 되면 가서 봐줄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하던 일을 멈춰야죠." - P183

방해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경험의 평범한 조건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방해는 돌봄의 조건이다. 방해받는다는 것은, 자기만의 것이 아닌 시간에, 직접적인 방식으로 다른 누군가를 주로 돌보는 이라면 누구나 겪는 평범한 경험이다. 가부장적인 시간과 장소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돌볼 것이다. 근대 초에는 견습공이 장인을. 가내 노예는 노예주를. 가정부는 고용주를. 간호사는 의사와 환자를. 비서들은 상사를.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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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소리에 신경을 써라. -p263
당신이 쓰는 것은 듣기에도 즐거워야 한다. -p264
호기심을 품어라. 가능한 한 많은 호기심을 품어라.-p266

독창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독창적이려고 애쓰지 마라. 그보다는 당신 자신에, 당신의 정신에 공을 들이고, 그런 다음 당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라.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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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당신 자신의 관심사에서부터 작업하라. 절대 당신이 메모하거나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마라. 자신의 관심사를 믿어라.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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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으로 메모하라. 그러면 관찰력과 표현력 둘 다 날카로워질 것이다.ᆢ 즉, 당신은 메모하는 습관을 통해 필연적으로 더 많은 것을 관찰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것을 관찰하면서 메모할 것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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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와 늙음에 따라오는 간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보험사 TV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간병보험에 대한 이야기.

광고 내용을 보면 아버지 간병에 지친 딸, 시어머니 간병으로 힘들어하는 며느리가 나온다.

늙은 남자는 아내, 딸의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 간병보험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간병이 대부분 배우자(아내), 딸, 며느리 차지임을 감안하더라도 맘이 불편한 광고다.

광고의 목적은 상품판매이고 미래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은 판매에 도움이 된다.

광고에 가치나 윤리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 부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늙은 남자의 간병인이 (당연하게도) 아내, 딸, 며느리라는 건 부당하다. 

그리고 그게 개인이 (사보험으로) 부담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노화, 질병, 장애에 따른 자기 통제력의 상실이 불안을 넘어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건 보험광고의 호들갑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혐오, 배제, 차별과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은교'에서 노老작가의 말처럼 젊음이 상이 아니듯 늙음은 벌이 아니다.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늙음은 벌이 아니다. 

돌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므로 돌봄을 받는 것이, 또 돌보는 것이 형벌처럼 느껴지지 않게 제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에겐 오면 안 되는 일이라는 위치를 벗어나 협력과 연대로서의 돌봄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 등을 톡톡 두드리며 여기 좀 돌아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돌봄에 관한 모순된 심리 기제를 깨고 공론화로 나아갈 수 있다. -돌봄과 인권,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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