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
로널드 롤하이저 지음, 이선정 옮김, 허찬욱 감수 / 생활성서사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년 4월, 아빠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일반 병동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보낸 아빠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는데 독한 진통제에 의존하던 아빠는 선망 증세까지 보이며 혼수상태에 빠져들던 시간이 많아졌다. 더는 해줄 것이 없으니 차라리 고통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던 의사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지만 현실을 수용하는 것밖엔 다른 도리는 없었다. 넋을 잃고 배회하듯 병동을 떠돌다가 점점 의식이 꺼져가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참담해졌다. 아빠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자비의 희년' 기도문을 만지작거리다 체념하듯 짧은 한숨을 뱉으며 나는 속삭였다. '하느님, 어디에 계시나요? 왜 이런 순간에 침묵하고 계신 건가요?'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오랜 냉담을 깨고 다시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내 마음 한편에 세워진 불신의 벽은 쉽사리 허물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장막으로 겹겹이 쌓인 세상 속에 나 혼자 고립된 느낌. 가까운 친척들과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며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웠던 시간들,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은 세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시기와도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 로널드 롤하이저의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은 신앙의 어두운 밤과 인간의 한계를 다루며 즉각적인 응답을 바라는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도 신뢰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를 강조한다. 성 테레사, 성 요한 등이 경험한 신앙의 침묵과 갈망, 그들이 간직한 영적인 신비와 깊이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통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하느님 사랑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지 않는 듯 암흑 속 고통을 느끼게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참신앙도 우리가 상상하는 신앙 너머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중략) 신앙도 가슴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감정이나 마음속의 확신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을 넘어 영혼에 찍힌 낙인처럼 존재한다는 걸, 하느님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p.56

십자가 수난을 앞둔 밤, 고뇌에 싸여 간절히 기도했던 예수님 또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피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예수님을 추종하며 따랐던 군중들은 비난과 야유를 서슴지 않았으며 제자들은 스승을 부인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거부 속에서 홀로 묵묵히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가슴에 새겨진 하느님의 침묵이 사랑으로 드러나고 모든 굴욕의 순간마다 흘렸던 핏방울과 눈물들이 숨겨진 은총으로 가슴을 두드릴 때 고통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때 내가 바쳤던 기도와 전혀 다른 응답을 주시는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결핍 앞에서 하느님의 위로와 사랑을 갈구했던 시절, 그럴수록 상처는 깊어져갔다. 바닥조차 가늠되지 않는 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하느님을 불렀던 나의 외침은 '구원'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즉각적인 응답을 달라 떼쓰는 '구조' 요청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하느님은 '구조'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숨겨진 핵심적인 계시입니다. p.95

신앙을 가지면 항상 위로받고 보호받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현실에서는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많다. 십자가는 삶의 고통을 면제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거룩한 표징이다.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어, 그곳으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p.194

구원이란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오류와 죄악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스며드는 하느님, 세상을 정화하는 그분의 침묵을 사랑으로 깨닫기 위해 나는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에 밴 어린시절
W. 휴 미실다인 지음, 이석규 외 옮김 / 일므디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방 침대 위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한 아이가 있다. 차마 듣기 힘든 욕설로 언성을 높이던 남자가 폭력을 휘두르자 여자는 울부짖으며 매달리고, 아이는 두려움에 벌벌 떤다. 어쩌면 다음 순서는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이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손길을 느끼며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엄마...아빠 잠들었어?"
매일 밤 술에 취해 들어와 곤히 잠든 엄마를 깨우고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괴롭히던 아빠, 겁에 질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식의 존재 따윈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주사를 부리며 바닥을 드러내던 아빠는 평소의 자상한 모습과 한참 동떨어진 전형적인 폭군에 지나지 않았다. 극단적인 양면성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던 아빠는 가끔 분노 조절 장애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며 가족들의 마음을 헤집어 놓곤 했는데, 가장 사랑받는 딸이였던 나역시 예외는 아니였다. 변화무쌍한 감정기복의 소유자였던 아빠에게 나는 늘 주눅들어 있었고, 어쩌다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하루종일 침울한 얼굴로 방 안에 틀어박혀 혼자 우는 날이 많았기에 표정은 어두웠고 자연히 학교에서도 겉돌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았던 상처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내 삶을 지배했고, 특히 인간관계에서 항상 반복됐던 악순환은 고립과 단절로 이어져 타인과 소통하는 일은 항상 내겐 버겁게 여겨졌다. 카인의 표식처럼 영혼에 새겨진 상처,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W.휴 미실다인의 <몸에 밴 어린 시절>은 내재과거아(Inner Child)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언급하며 어린 시절의 경험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유년기 트라우마와 밀접하게 연결된 내재과거아는 쉽게 잊혀지지 않으며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반복적인 부정적인 패턴을 보이는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성격 장애의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내 안에 숨겨진 어린아이, 내재과거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것

당신의 내재과거아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남아 지속된다.
p.11

가끔 어린 시절의 꿈을 꿀 때가 있다.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고막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가족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던 아빠,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려있던 나는 아직 덜 자란 어린이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지금도 악몽은 계속되고 꿈 속에서 여전히 나는 무기력한 아이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다. 유년기 시절 내가 경험했던 폭력은 내재과거아라는 이름으로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평생 지켜보고 다독여야할 존재라는 인식이 차즘 자리잡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공간에 웅크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연약한 아이, 내 상처의 기원이 되어 끊임없이 존재감을 알리던 내재과거.
휴 미실다인은 우리가 내재 과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부드럽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객관적 성찰을 할 수 있으며 삶을 재정립할 수 있다고 피력한다.

부모도 결국 불완전한 인간일 뿐

어쨌든 이제 우리는 성장했으며, 어렸을 때처럼 부모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중략)부모를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나름의 문제를 지니고 사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게 된 것이다. p.55

한때 나는 아빠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아빠의 사회적 성취와 상관없이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빠가 부끄러웠고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에 반발심을 드러내며 대든 적도 있었다. 별 것 아닌 일에 역정을 내며 가족들을 통제하는 모습이 싫어 일부러 아빠의 연락을 피하면서 차갑게 대한 적도 있었다. 아빠도 나와 같은 내재과거를 간직한 인간이라는 걸 알지 못했기에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정서적 거리를 느끼며 살아가야 했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학교를 다니며 동급생들의 구타와 따돌림을 겪어야 했고, 부모의 천대까지 감수해야 했던 유년기 시절 아빠에 대한 이해가 나에겐 없었다. 아빠 역시 나처럼 유년기의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받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통찰이 없었기에 뒤늦은 깨달음은 늘 아프기만 하다. 부모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재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휘청대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다.

내재과거는 과거의 습관으로 축척된 기억이며 영혼에 새겨진 표식과도 같기에 그 흔적을 지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내재과거의 현명한 보호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현재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으며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유년기 트라우마에 갇혀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던 어리석음을 버리고 내재과거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을 때, 우리를 지배했던 폭력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갈피를 잃고 방황할 때마다 내 안에 새겨진 표식, 내재과거의 흔적을 더듬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분별없는 욕망과 쾌락에 눈이 멀었던 과거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때로는 부드럽게 타이르고 달래며 그동안 숱하게 반복했던 오류를 바로잡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히 머물 것처럼 곧 떠날 것처럼 -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전기
카미유 뷰르동클 지음, 연숙진 옮김 / 생활성서사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 수난을 감수하셨던 그리스도, 끝없는 성심의 불꽃으로 타올랐던 그분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간직했던 한 성직자가 있다. 남다른 총명함과 깊은 영성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탄탄대로 인생을 보장받았으나 세속의 안락함 대신 조선을 향한 험난한 여정을 선택한 브뤼기에르 주교. <영원히 머물 것처럼 곧 떠날 것처럼>은 예수 성심으로 타올랐던 그의 삶과 신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서양 문물에 대한 거부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천주교를 박해했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던 주교의 삶은 다소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생김새는 물론 언어와 풍습, 가치관까지 모든 면에서 이질적인 조선이란 낯선 나라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 예수 성심

어릴 때부터 남다른 신심과 덕행으로 비범한 자질을 드러냈던 주교는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을 선택한다. 사랑했던 고향과 가족을 떠나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던 주교. 사랑하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둔 채 나자렛을 떠나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문득 떠올리게 한다. 이별의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끊임없이 영혼을 정화하며 하느님께 나아갔던 거룩한 예수 성심. 삶의 동력이며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 조선 선교의 길로 주교를 인도했던 예수 성심. 식사와 수면, 의복조차 제대로 정비할 수 없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인내했던 주교의 삶은 <이름 없는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
타인의 모욕과 손가락질, 목숨조차 연명할 수 없던 비참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 기도를 바쳤던 순례자의 여정은 예수 성심으로 불타올랐던 주교의 삶과 중첩된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됐지만 기쁨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주교의 체력도 문제였지만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경비와 주변의 만류는 조선 선교를 향한 주교의 꿈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혹독한 내핍의 생활을 감내하며 오직 하느님께 의탁했던 브뤼기에르 주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뜻을 관철하며 주교는 앞으로 나아갔다.

여느 사람이라면, 담금질이 덜된 영혼이었다면 낙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그는 그러한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략)그는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분의 도우심을 고대했다. 그분이 없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204
현실적 한계와 체력의 고갈, 악화된 건강으로 주교는 조선 땅을 밟기 직전, 만리장성 근처 마가자에서 선종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순종했던 충직한 목자 브뤼기에르 주교. 고국을 떠나 아시아를 가로질러 조선으로 향했던 그의 여정은 비록 미완으로 끝났지만, 매 순간 뜨겁게 타올랐던 예수 성심은 신앙의 불꽃이 되어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비록 조선 선교의 열망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의 숭고한 삶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할 것이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분의 지시와 그분의 허락이 없다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분 은총의 도움으로 그분의 계획에 순명하는 것이 곧 저의 의무입니다. p.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손희송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마음을 아리게 하던 겨울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워낙 술을 좋아하셨던 아빠였기에 가끔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오곤 하셨는데, 그때 아빠 목소리는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내 귓가에 닿았다. 정민아, 잘 지내지… 오늘 태형이랑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 나눴는데, 태형이가 네 걱정 많이 하더라. 핸드폰을 든 채 힘없이 대꾸하던 내게 아빠는 잠시 뜸을 들이다 한 마디 말을 남기셨다.
"정민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마라.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바닥까지 추락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자존감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시선이 흐려지고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시고 벌써 9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 아빠의 목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따뜻한 체온으로 남아 있다.

익숙한 온기, 사랑으로 닿는 말들

경륜과 영성 가득한 손희송 주교님의 책들 가운데 유독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에 마음이 쏠렸던 이유는 단순하다. 아빠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좋았다. 표지에 인쇄된 활자를 조용히 읊조리기만 해도 가슴 깊은 곳부터 퍼지는 익숙한 온기가 좋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타인에게 가벼운 호의는커녕 나 자신조차 따뜻하게 바라볼 수 없던 내게 이 책은 돌아가신 아빠가 건넨 위로와 사랑의 말들로 다가왔다.

예수님은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베드로가 당신을 배신할 것으로 내다보시면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p.7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즉흥적이고 과격한 언행, 십자가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는 커녕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스승을 부인했던 베드로. 인간적 한계가 명확한 베드로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지만 예수님은 제자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구세주였던 그리스도, 불멸의 존재가 건넨 사랑의 온기로 위태롭게 흔들리던 인간은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더없이 완전한 피조물로 거듭난다. 불멸과 필멸의 찬란한 빛이 지상을 밝히는 순간, 부서진 틈 사이로 햇살처럼 스며드는 온기를 느낀다. 오직 사랑으로 존재하시는 분, 그리스도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나약한 의지와 게으른 천성, 시기와 질투만 가득해 모든 것이 늘 불만스러웠던 딸을 그저 측은하게 바라보셨던 아빠의 눈빛이 닿는 것 같아 아프기도 하다.

부질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데에 시간과 신경을 쏟지 말고 먼저 하느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좋은 점이 무엇인지, 나의 특성과 재능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계발해야 한다.
p.157

과거의 나는 항상 타인과 나를 비교하기에 바빴다. 인형처럼 예쁜 친구 앞에서 곧잘 위축됐고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비싼 옷과 가방을 사들였고,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들이 외모 지적을 하면 오랫동안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아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비하했고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다.
"정민이 넌 화려한 미인은 아니지만 지성미 넘치는 얼굴이야. 내 딸이라 그런 게 아니라 너는 그 자체로 충분히 분위기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란다." 온종일 외모에 대한 생각뿐이었던 나에게 아빠는 진심을 담아 조언하셨지만 철없던 난 아빠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세상 물정도 몰랐지만 나 자신의 본질은 더더욱 몰랐기에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반복했던 딸을 바라보셨던 아빠의 눈빛, 주교님의 글에서 지난 세월의 회한과 아픔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며 가슴에 닿는다. 뒤늦은 깨달음은 항상 아픔으로 다가온다.

하느님은 인간처럼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초월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p.172

인간의 지성과 생각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오감으로 그분의 신비를 헤아릴 수 없기에 우리는 매 순간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그분의 인내와 자비, 항구하심을 깨닫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침묵으로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봉헌할 수 있기를, 그분께 순명하지 못했던 과거를 끊임없이 참회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항상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그분의 사랑을 믿기에 고독과 침묵 속에서도 내 영혼은 평온하리라.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해 두 손 모으고 계실 아빠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기 쉬운 사도신경
크리스토프 뒤포르 지음, 이재정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나갔을 때, 어른들이 암송하는 길고 어려운 기도문이 낯설어 두 손만 마주잡고 뻘쭘한 자세로 서있던 기억이 난다. 미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인쇄된 얇은 종이 책자를 내밀며 엄마는 말했다. "이걸 다 외워야 미사를 드릴 수 있다. 사도신경과 주모경은 다음 주일까지 외우도록 해라!" 책자의 한 면을 차지할만큼 긴 분량에 난해한 용어들만 가득했던 기도문, 나는 그렇게 사도신경을 처음 알게 됐다.
크리스토포 뒤포르의<알기 쉬운 사도신경>은 낯설고 어려운 용어들 때문에 기도문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계적 암송만을 반복하는 신자들(나 같은)을 위한 입문서이며 가톨릭 신앙의 정수가 함축된 사도신경에 대한 깊은 해석이 담겨있는 책이다.

사도신경은 전례에서 반복적으로 고백하는 문구가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모든 존재를 걸고 고백해야 하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교회의 신앙은 사실 사도신경에 다 담겨 있습니다. p.5

예수의 생애를 묵상하고 죽음을 넘어 부활로 이어지는 영생에 동참하는 것, 가톨릭 신앙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영적 고백이며 믿음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는 기도문이다. 모든 한계를 초월해 매 순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닿고자 하는 영적 열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기도문은 육체적 한계에 갇힌 인간이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한 분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다는 하나의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통교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며 동시에 세 분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 Trinitas라고 말합니다. p.120

스스로 인간의 육신을 취하셨던 그리스도는 타고난 신성으로 피조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고 그들의 불완전함과 나약함을 오직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 수난의 길을 자처하셨다. 작고 연약한 인간의 육신이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영원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하느님의 침묵과 부재로 숱한 방황과 번민을 거듭했던 인간이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 앞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찬란한 순간, 그저 사랑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p.161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신자들과 어울리기 싫어 미사만 겨우 참례하는 나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너 자신을 떠나 나에게 오너라.' 에고에 갇힌 신앙은 자기 기만으로 이어져 나 자신을 붕괴하고 결국 하느님 사랑을 부정하는 길이기에 그분의 말씀은 너무나 자명한 울림으로 내게 닿는다.
"삶이 공허하고 신앙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천천히 사도신경을 암송해보세요. '저는 믿나이다' 이 한 마디 속에 응축된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느끼게 될 날이 올거예요."
오래전 신부님께 들었던 강론을 되새기며 나직한 목소리로 사도신경을 암송해본다. 내가 바치는 사도신경이 오직 한 분이신 그분께 향할 수 있기를. 나의 고백과 사랑이 그분에게 닿아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길 기도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내 존재를 지워가며 그분의 사랑을 채워갈 수 있기를.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