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의미 아닌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레이트 헝거로 세팅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 단편에 없는 이야기를 더 추가해 메타포를 더욱 부각했다. 세상의 끝 이를테면 아프리카까지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해미는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을 만나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얘기를 듣는다. 단순히 배가 고픈 자를 리틀 헝거,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를 그레이트 헝거라 칭한다. 앞으로 팔을 뻗어 춤추는 리틀 헝거는 무아지경 (삶의) 춤 속에 점점 팔을 위로 쳐드는 그레이트 헝거로 변모한다. 그레이트 헝거가 리틀 헝거가 되는 역방향도 분명 있겠지. 그러나 그것을 참을 수 있을까.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종수의 아버지는 그 역방향의 말로 중 하나다. 아내가 아이들을 두고 도망가게 만들고,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한다. 급기야 그는 감옥까지 가고 만다. 그에게 늘 의미는 자존심이었고 이제 금고에 꼭꼭 숨겨둔 수집 칼 정도로 남아있다. 
해미가 배우는 팬터마임도 하나의 의미 게임이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고 말하며 그녀는 허공에서 귤을 깐다. 하지만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는 차마 없다고 생각할 수 없기에 거기 무엇이 있다고 지독히 생각한다. 공상허언증자들은 자신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쉽게 믿도록 만든다. 종수는 해미로부터 전혀 모르는 기억들을 전해 듣는다. 학교 다닐 때 그가 해미에게 못생겼다고 한 게 유일한 말이었다는 것, 어렸을 때 해미가 우물에 빠진 걸 발견한 자신이 그녀를 구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는 소릴 듣고 어느 틈엔가 믿는다. 그녀의 말은 교묘했다. 죄책감을 유발하거나 구원자의 이미지를 씌워 상대를 옭아매는 강력한 언술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언어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자다. 문창과를 나오고도 어떤 소설을 써야 될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짓이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그 속에 조금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해미는 아프리카 사막의 노을을 보며 죽는 건 무섭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종수는 그 말과 의미를 깊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의미는 그렇게 쉽게 종결되지 않는다. 성냥불을 긋듯 냉정한 한 마디가 날아온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은 그녀의 눈물을 보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벤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위대한 개츠비가 그러했듯 비밀스럽게 살며 다른 사람의 의미를 하품하며 감상하는 자, 요리를 스스로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하며 즐기는 자,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2달에 한 번씩 의식처럼 태우는 자.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벗어난 그는 있다 와 없다 사이의 의미망과 다른 의미망이 있다. 

 

 

*

“그게 불필요한 건지 어떤지는 자네가 판단하는 거군.”
“저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곳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비와 같은 거죠. 비가 온다. 강이 넘친다. 무언가가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합니까? 보세요. 저는 절대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전 저 나름대로 도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도덕은 인간 존재에 무척 중요한 힘이죠. 도덕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 도덕이라는 것은 동시 존재의 균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시 존재?”
“즉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나는 도쿄에도 있고, 동시에 튀니스에도 있다. 야단치는 것도 저고, 용서하는 것도 접니다. 이를테면 그런 겁니다. 그런 균형이 있는 거죠. 그런 균형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물림쇠 같은 겁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스르르 풀어져서 말 그대로 조각조각 날 겁니다.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 존재가 가능해지죠.”

ㅡ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중 

 

 

도덕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벤의 행동은 해미의 귤 까기 팬터마임과 같은 행위다. 벤과 해미의 차이는 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반면 해미는 극단으로 치우치며 균형을 전혀 잡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종수는?
벤과 해미는 가벼운 나들이 삼아 종수가 소똥을 치우고 있는 파주로 찾아온다. 노을 속에 대마초에 취해 옷을 벗고 그레이트 헝거처럼 팔을 들어 올려 춤을 추던 해미의 맘을 종수는 이해하지 못한다. 창녀나 그렇게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춘다고 그녀 뒤에서 지근거리며 쏘아붙인다. 이후 해미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해미를 사랑하게 된 종수는 그녀의 실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 번 생긴 의미는 쉽게 떨쳐 낼 수 없다. 의미의 야누스 같은 의심도 마찬가지다. 종수는 그의 집 근처 비닐하우스를 태웠다는 벤의 말을 의심한다. 그가 매일 새벽 서둘러 동네를 둘러봤기 때문이다. 종수는 벤에 대한 의심이 점점 더 커진다. 그녀 집이 낯설게 정리된 모습, 해미가 아프리카를 갔던 동안 종수가 밥과 화장실 청소를 맡았으나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고양이를 벤이 데리고 있는 듯한 느낌, 벤의 집 화장실에 여자들이 남기고 간 소지품 중에 종수가 해미에게 줬던 시계가 있는 것 등등 종수는 그녀의 실종을 벤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해미의 집에서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종수는 이와 다른 '동시 존재'가 되고자 한다. 벤도 사라지게 만드는 것.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무수한 대상 영역들이 의미장 속에 무한히 맞물려 있어 우리가 그것을 동시에 다루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의미장 안에 나타난다. 우리의 인식을 현실로 끌어낼 때 그것은 행위로 나타난다. 
최초의 뿌리는 종수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벤에 대한 시기와 좌절감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자신은 그녀의 집에서 몰래 수음을 하는 처지인데 벤은 원한다면 해미는 물론 어떤 여자도 유혹할 수 있는 능력과 여유를 가지고 있어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를 응징하는 처벌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벤을 죽이고 그의 페라리 속에 자신의 모든 옷을 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자신의 트럭으로 걸어간 종수는 다시 태어난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의미와 의심 속에서 재가 된 자. 스스로 빈 집이 되고 빈 우물에 들어가기를 선택한 자. 거기에 어떤 빛이 어떤 의미가 들어올까.  그 결말이 그가 쓰게 된 소설이나 상상일 뿐이라고 해도 그가 선택한 의미는 남는다.  
해미의 집은 남산 타워를 향해 있는 북향이었으나 낮 한순간 남산 타워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잠시 들어온다. 그곳에 머무른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희망의 빛으로 어떤 이는 너무도 부족한 빛으로 여겼을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후자이지 않을까. 그레이트 헝거. 지금 당신은 어떤가. 어떤 빛을 보는가. 어떤 의미를 꿈꾸는가. 당신의 의미가 당신의 삶이며 죽음이다.   

 

 

 

 

 

 

 

 

 

 

 

 

윌리엄 포크너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를 읽고...

짐작대로 이창동 《버닝》의 아버지(분노 조절 장애, 남부의 가난한 소작농, 군인 전력, 폭력적인 남성성)는 포크너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중요한 건 이 시대 기성세대 한국 남성과 왜 이다지도 비슷한가 하는 점이다. 그 원인을 본성이냐 쉽게 변하지 않는 가부장제 환경이냐 분리해서 보기보다 차라리 그 다일 것이다. 이창동이 포크너의 큰 테두리에서 디테일에서는 하루키를 가져오고 마지막에 자신의 화룡점정을 찍었듯이.

불은 다 타오르면 사라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혹은 무심히 타오르고 있는가. 그 심지가 우리 욕망이라는 게 가장 어려운 문제겠지. 자신마저 제어할 수 없는 고통. 일그러지며 타오르는 불길. 죽음조차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의 손아귀에서 굴려지는 주사위라는 게 끔찍하긴 하지. 불로불사에 대한 염원, 살인, 사형, 자살의 선택권을 생각해보라. 즉 착각하지 말자. 자연스러운 건 없다. 현상, 현상의 종합은 결론이 아니다. 결론은 우리 머릿속에나 있다. 꿈이나 환상, 이야기로 덮어버릴 수 없는 본질적인 의문이 항상 남는 재 속을 우리는 들여다본다. 우리는 불길이 아니라 재 위를 걷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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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22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를 들으니, <요한 복음>에 나오는 내가 주는 물은 생명의 물이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 석가탄신일에 <불경>의 말씀을 떠올렸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불경> 중에는 아는 말씀이 별로 없네요... ^^:)

AgalmA 2018-05-22 22:21   좋아요 1 | URL
성수는 안 먹어 보았고 저는 삼다수가 제일 좋더라는(딴소리쟁이)
어렸을 때는 석가탄신일에 절에 가서 촛농 떨어지는 거 맞으며 공짜밥 먹는 재미도 있었는데 어른되니 그런 재미난 게 없네요(여전히 딴소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유종의 미)...

겨울호랑이 2018-05-22 22:29   좋아요 1 | URL
AgalmA님께서는 불자셨군요. 성불하세요!^^:) 참, 수돗물은 역시 아리수지요 ㅋㅋ

2018-05-22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5-22 22:20   좋아요 1 | URL
영화 보셨나 봅니다^^...간만에 영화관 나들이였는데 이창동 감독 역시 실망시키지 않더라는^^b
그 놈의 의미로 죽기살기로 사는 거 이제 많이 내려놓았나 싶으면 또 뒤통수 맞고 하는 터라 제가 뭐 대단한 소린 못 하겠습니다ㅎㅎ;;;

2018-05-22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2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8-05-23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저도 나름 괜찮게 봤어요. 여러가지 다층적이고 확장적인 의미망을 그답게 잘 설계해두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 그것이 환상이라면 종수의 (불완전한) 성장이겠고, 현실이라면 종수의 파멸이겠습니다만..그 마지막의 미장센은..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에는..일단 지금 너무 배가 고프군요. 사무실에서 월급도둑질을 하며 배고픔을 달래야...

잘 지내시지요? AgalmA님이 아무래도 <버닝>리뷰를 쓰실 듯 하여 불쑥 들러봤더니 있네요. 좋은 봄날 되시기를..봄은 이미 많이 갔지만요.

AgalmA 2018-05-23 10:03   좋아요 1 | URL
와와~ 맥거핀님이닷!
역시 예리하신 맥거핀님!
박찬욱 감독처럼 원작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리는 걸 눈여겨 봐야겠죠.
마지막 미장센은 종수가 쓰기 시작한 소설의 스토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다층을 살리는 이창동 감독의 역량을 봐야지 스토리만 좇는 독법으로는 영화가 뻔해지기 쉽죠. 제 리뷰도 다층을 풍부히 살려내지 못했다는 생각이ㅠㅠ....
우리는 동시존재 아닙니까. 배도 고프고 의미도 고프고ㅎㅎ
맥거핀님도 분명 <버닝> 보시고 글을 쓰셨을 거 같은데 안 보여주시고ㅜㅜ....

레삭매냐 2018-05-2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버닝>에서는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는지 궁금하네요.

우리나라 감독들은 깐느하고는 연이 닿지
않나 싶습니다. 왠지 동양의 대표선수는
일본/듕귁 감독들이 죄다 쓸어간 느낌...

AgalmA 2018-05-25 21:31   좋아요 0 | URL
영화는 여성 캐릭터 스토리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요. 결말 처리가 이창동스러웠다고 할까요. 레샥매냐님이 하루키 단편에서 느끼셨던 맥아리없음이 아니거든요. 어찌 보면 결말의 미장센은 김기덕 감독과 유사하기도. <나쁜 남자>나 <피에타>류.

이창동 감독은 상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하지 않은 레벨로 이미 오르신~
 

나는 돌아왔다. 계속해서. 서울, 통영, 타인, 바다, 빈 숲, 돌무더기에서부터 에서까지. 나는 더듬어야 했다. 계속해서. 주소를, 언어를, 기억을, 감각을, 환영을. 아직은 돌아오기 위해.

 

  

*

남은 것들만 남은 자리 그 옛날 거기에 하나의 잔해가 있어 검은 어둠 속에서 때때로 빛을 발했다.

**

침묵을 다시 데려오는 것, 그것이 사물들의 역할이다.

사뮈엘 베케트

 

빗속을 뚫고 내려갈 때 그것이 나타났다. 빛이 사방에서 덮쳐 3차원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베케트는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정신의 맛 같은 것이배어 있다고 했지만 세상의 모든 것도 그러하다. 나는 눈길을 끄는 형상에 빠르게 집중했다. 다리는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주지만 전혀 구원의 인상이 아니었다. 다리를 놓은 인간도 그 정도까지 바란 게 아니듯이. , 신이여. 빛으로 인한 이 풍요, 더불어 모든 것들이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어떤 개념에도 묶이지 않은 채 그저 내게, 내내 펼쳐져 있었다. 어째서. 내 머리 위의 공허를 위험을 부질없이 떠올렸다. 아주 멀리서 궤도를 그리지만 내 머리 위로 정확히 떨어져 내리지 않는 암석이 있었고, 두려움과 불안을 이미 신호로 보내고 있는 형체 없는 암석은 쉼 없이 굴러오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까스로 혹은 힘들게 피하거나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지긋지긋해 하리라. 계속해서. 대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떤 이는 어떤 순간이 와도 글을 쓴다. 중력의 탈출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를 때 그러하듯 돌들은 그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거기엔 여전히 쓰는 인간만 남는다. 계속해서. 구름이 바람이나 산을 만나 흩어질 때 인식하거나 슬퍼하지 않듯이 그것은 보통’, ‘일상처럼 일어난다. 계속해서. 곧 밤이 덮쳐 이 세계를 수평으로 연결해 주는 걸 또 목격할 것이다. 인간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기이해 하면서. 나는 다시 빗속의 궁륭으로 들어갔다. 무엇이든 오고 간다. 계속해서.

 

 

  

 

*

새어나가는 몸과 마음을 이끌고 런던을 헤매 다니거나 마음과 두 발의 고통을 겪으며 독일을 누빈다. 또다시 더블린에 되돌아온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어머니와 그녀의 독설과 지탄에 맞선다. 다시 떠난다. 하지만 또 되돌아온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아프거나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불행에 몸을 맡기고, 아버지의 죽음과 사랑하는 젊은 여인의 죽음을 반복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제 나는 더없이 빠른 속도로 피폐해지고 있다.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 중독으로 뭉쳐진 무감각한 더미.

아무 목적 없는 한 무더기의 내장일 따름이다.”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통영에 도착했을 때 비는 공기에게 그러하듯 자신에게도 그러하라는 듯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빗속의 통영 경찰서, 빗속의 통영 우체국, 빗속의 서호시장, 빗속의 항구, 빗속의 너, 빗속의 나, 빗속의 죽은 미키. 계속해서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했고, 각종 음식과 술과 커피와 풍경은 내가 잠시 담고 다시 내보내야 할 통과물로 왔다. 시식용 통영 꿀빵을 오가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권하는 점원이 하루에 몇 번이나 그러한지 세고 있을까. 1952년 이상한 입방체 모양의 집을 짓고 틀어박혀 집필에 몰두한 베케트처럼 또 다른 나도 그저 틀어박혀 있고 싶었다. 그의 여행이 그러했듯 내 여행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그 점을 알고 있었듯이, 이 여행이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기 위해서 도모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했으므로. 나는 그저 따랐다. 촛불이 자신만의 언어로 타오르는 어두운 방안, 비와 대적하듯 음악이 흐르고, 많은 구멍과 무더기들 속에서 나는 무언가 나타나길 바라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은 뚫어줄 구멍이 아니라 많고 많은 구멍 중 하나처럼 남루한 결과로 남았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으로 침묵하고 말하길 바라는 나의 기도는 아주 가볍게 뭉개졌다. 베케트는 그 자체가 기도인 (회화) 예술은 기도를 이끌어낸다. 그것은 바라보는 사람으로부터 갇혀 있던 기도를 풀어낸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영감을 제공한 데생들이 형편없기 짝이 없다고 수첩에 기록했듯이, 내 그림도 내 수첩에 형편없기 짝이 없게 남았다. 나는 망연히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창밖을 봤다. 비는 어느 한 곳 모자람 없이 근사했다. 형태도 소리도 분위기도. 내 기억 속에 더더욱 완벽하게.

 

 

  

    

비가 그치면 사람들은 바깥으로 몰려나왔다. 갈 거면서 머물고, 머물고 싶어 하면서 떠났다. 나도 같았다. 우리는 정녕 무엇을 보기 위해. 동피랑 초입 길에 적힌 문구 세상이 다 보인다"는 매우 평범한 문장이지만, 미륵산 정상에서 박경리 선생 묘소를 내려다보며 그의 글 속 문장으로 보면 인상은 사뭇 달라진다.

 

 

마음

 

마음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

빨아서 풀먹인 모시 적삼같이 사물이 싱그럽다.

 

마음이 욕망으로 일그러졌을 때 진실은 눈멀고

해와 달이 없는 벙판 세상은 캄캄해 질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욕망 무간지옥이 따로 있는가

권세와 명리와 재물을 좇는 자 세상은 그래서 피비린내가 난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

맹세컨대 죽기 전에 반드시 J.J.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 그럴 것입니다.” 이 시기 내내 그는 자기 말들의, 자기 말이라는 질료의 불행을 찾아서, 혹은 불가능한 언어, 박탈당한 자의 언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서 더블린에서 파리로, 또 런던에서 함부르크로 떠돌아다닌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말 그대로 병자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드디어 자신의 불행을 발견하기에 이를 때, 그때 그는 고요한 원동력을 발휘하며 그 안에 정착하리라.

**

어떤 이들은 단테를 따라 모국어만이 언제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유일무이한 언어, 언제나 본질적인 언어라고들 말한다. 혹은 파울 첼란을 좇아 사람은 오직 자신의 모국어 안에서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들은 모두 낯선 언어 속에서 시인은 거짓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배신만이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방식임을 안다. 그렇다면 진실은 배반자라고 보아야 하리라. 오욕을 명예로운 자격의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들 중 하나가 그것이다. 193710월에 친구인 토머스 맥그리비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베케트 자신이다. 자기 조국에 대해, 자신의 언어에 대해, 요컨대 자기 어머니에 대해 배신자가 되는 것. 저것, 저 차갑고 푸른 눈 때문에, 그 치명적인 불투명성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면, 그 자신의 과잉에 치여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마땅히 배반자가 되어야 한다.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베케트는 제임스 조이스, 어머니, 아일랜드의 모든 것에서 탈출하고자 한 반면 단테 신곡을 아껴 읽었다. 나는 걷고 또 걸으며 그러한 암석을 계속해서 만났다. 인적 드문 바닷가에서 느닷없이 돌 깨는 소리. 길 건너 황량한 평지에서 굴착기 하나가 끊임없이 돌을 옮기고 깨고 있었다. 그 행위자는 반드시 인간이었다. 하나의 연극이자 하나의 삶. 그리고 구경하는 자. 발가락 고통을 이따금씩 느끼며 한참 바라보다가 내 자리(?)를 찾아 떠났다. 박경리 선생 기념관 근처까지 갔으나 초입에 있던 근사한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가지 않았다. 내가 좇는 것은 거기 있지 않았다. 버스는 오지 않았고 왔어도 놓쳤고 나는 계속해서 내게 걷는 형벌을 내렸다. 만날 땐 수줍어하며 반가워하던 개가 내가 돌아서자마자 사납게 혹은 서럽게 짖었고, 서로 일면식도 없던 소년 소녀들을 2시간 뒤 다시 보기도 했고, 반가움도 섭섭함도 없이 늙은 여인들과 잠시 말을 나누기도 했으나 우리는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 곳곳에서 찾아온 이들과 갑자기 섞이게 되는 절경의 장소에서 배회하는 까마귀보다 나는 품위 있지도 자유롭지도 못했다. 빛도 비도 숨은 아주 흐린 날, 너는 그러했다. 너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고 풍경이 쉼 없이 속삭였다.

 

 

 

  

 

 

 

  

*

그는 어머니의 방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며 번개가 친다. 그것이 지나고 나니, 그는 안다. 사물들에 관한 일반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얻은 그것은 자기 자신에 관한 아주 비좁은 지식이다. 이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자꾸 곱씹는 일(조이스처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않는다……)이 끝난다. 대신, 죽어가는 어머니의 방에서 둥글고도 단단한, 마치 한 개의 돌멩이 같은 말이 떠오른다. 받아들이다(consentir). 자신의 취약함을, 어리석음을, 한계를 받아들이자. 찰나의 계시. 언제 왔었던가 싶게 지나가는 빛.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길디긴 어둠에의 순명(順命).

**

이제 그는 이리저리 헤매 다니는 것을 멈추고 자기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다. 파리 파보리트 가에 위치한 작은 스튜디오. 1938년 이후로 그는 그곳에서 거주해왔으며 1961년 그곳을 뜨지 않을 것이다. 8층 방에서는 몽파르나스 역으로 이르는 철도가 보인다. 모든 작가들은 저마다 하나의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다. 때때로 그 방은 카페의 형태를 띠거나 여객선, 또는 강가 오솔길의 형태를 지닌다. 그곳을 작업실이라거나 집필실이라고, 하다못해 확성기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 어쨌든 그것은 언제나 방이다. 베케트는 방에 처박힌다. 그는 다시 한 번 쥘 로맹을 읽어본다. “나는 들어서야만 하리 / 내 생각 아래의 피신처로 / 혼자 머무르는 나의 방으로.” 자기 생각 아래의 피신처에서 베케트는 1947년에 몰로이, 1948말론 죽다, 1949년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그리고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 엘레우테리아고도를 기다리며를 연달아 쓴다. 뿐만 아니라 그 외 여러 편의 단편과 시,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Textes pour rien」도 쓴다.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기어이 돌아왔다. 내 방에. 지금 창밖에서 나는 바람 소리, 새 소리, 차 소리는 그곳과 다르지 않다. 지극히 정신의 문제일까. 우리는 계속해서 삶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해 듣고 보고 배운다. 그러나 체감은 다르다. 스스로의 삶을 통해 절실히 느끼게 될 때 우리는 그 방향으로 키를 맞춘다. 날씨의 변화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과 그것들에 목적성이나 상관성이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행위가 정말 의미가 없거나 기어코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날씨의 동굴 속에서 바깥을 보며, 나의 동굴 속에서 세계를 보며 나는. 계속해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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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5-20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휴에 먼 길 다녀 오셨습니다. ㅎㅎ

AgalmA 2018-05-22 22:22   좋아요 1 | URL
이번 연휴 길어서 띵가띵가 하기 좋던데 북다님은 재미나게 즐기셨는지? 또 일에 치여 책에 치여...ㅎ?

2018-05-2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5-22 22:23   좋아요 1 | URL
구형 스마트폰으로 무슨 대단한 걸 찍었겠어요ㅎ 비도 오고 해서 똑딱이 카메라도 짐이 될 거 같아 안 들고 가서 휴대폰으로 찔끔찔끔 제 기록용으로 조금 찍었을 뿐^^;;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겨울호랑이 2018-05-23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께서는 통영으로 순례를 다녀오셨군요. 통영의 모습 속에서 옛 추억을 발견하게 되네요.^^:)

AgalmA 2018-05-23 21:25   좋아요 1 | URL
순례보다는 방황에 더 가까웠다는 게...이 나이에도...엉엉))
통영에서 좋은 추억 좀 만드셨는지^^? 어릴 때 저곳에서 무지개를 처음 보기도 했고 연도 처음 날려 봤고 눈사람도 처음 만들어봤고 처음이 참 많았던 곳이라 제겐 늘 애틋한 곳이랍니다.

겨울호랑이 2018-05-23 21:39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설명이 짧았네요. 통영에는 가 본적이 없지만, 예전 시골의 모습이 많이 보여서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통영은 AgalmA님께 마음의 고향이군요. 아니면 실제 고향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도시에서만 살아서, 시골에 갔을 때는 항상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역설적으로 예전 사진을 보면 더 아련함을 느끼게 되네요^^:)

AgalmA 2018-05-23 21:42   좋아요 1 | URL
4시간 넘게 걸으면서 아, 혼자여서 다행이다. 동행이 있음 얼마나 꾸사리를 들었을까 안심하는 한편 혼자 고생해서 서러웠던ㅋㅋ;
연의에게도 ‘첫‘의 기억 많이 남겨 주시길...엄마 몰래 하는 ‘첫‘ 목록으로 혼나지 마시고ㅋㅋㅋ

겨울호랑이 2018-05-23 21:48   좋아요 1 | URL
이런... 그렇지 않아도 연의의 ‘첫‘ 목록으로 아내에게 눈치를 받고 있습니다..ㅜㅜ 연의가 오늘 먹은 첫 사탕, 첫 치토스, 첫 초콜렛 등등.... 주로 ‘첫‘ 군것질로 유지되는 부녀 동맹은 언제나 꾸지람을 동반한답니다..ㅋㅋ
 

 

책 박스 자주 나르게 만들어 죄송해 택배 기사님께 시원한 망고 주스 한 캔 건네고 떳떳이 받다-ㅅ-!
바뀐 도서정가제에 맘 상해 두고 두고 읽고 소장할 책만 살 작심으로 고르고 골라서.

○ 소설
제임스 조이스 《복원된 피네간의 경야》 (어문학사)
1260 페이지 벽돌책. 주석이 책의 반을 차지ㅎㄷㄷ 김종건 교수의 최종판일까. 그동안 안 사고 벼르고 있던 보람 있네ㅎ! 가격은 살인적;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마무리되면 조이스 파야징!
한자가 엄청 많아서 박상륭 작자의 외국 버전을 보는 기분이다;;;

《율리시즈》에서 이어지는 《피네간의 경야》를 보면 조이스는 서양에서 문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호머의 신화를 더블린에서 재창조해 언어적 성서로 만들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야심이 가득한...

 

"조이스는 그의 《율리시즈》에 대하여 진작 초기에 당당히 말했다. "나는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그 속에 담았기에 수 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논하면서 바쁠 것이요, 그것이 인간의 불멸을 보증하는 유일한 길이다."

(중략)

그간 역자에게 《경야》의 번역은 40여 년간(1973~2017)의 粉骨의 작업이었다."

ㅡ이종건 교수 서문

 

이쯤 되면 제임스 조이스는 작가 악마^^;;;;


 

○ 시집
김남주 번역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푸른숲)
편집 시집 안 좋아하는데 이 시집은 다른 의미도 있으니...
사은품 ☆누드 제본 노트는 사진에서 보는 거보다 더 멋있다. 때 탈까 봐 아직 비닐 못 벗기겠다ㅎ;;
무지 노트라서 그림 그릴 때 쓸 생각^^


 

○ 기다리던 중고도서
알림 신청해 둔 게 뜨길래 이때닷! 싶어 늘 대기 중인 장바구니로 쏙~
내 언어 추적에 필요한 자료 중 하나.
솔 크립키 《이름과 필연》(필로소픽)


 

가장 기대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알라딘 굿즈 ♥5월 알라딘 굿즈 ㅋㅋ
☆린넨 책 쿠션 드디어 가졌당! ㅋㅋㅋ
알라딘 메모리폼 베개는 등받이용으로 책상에서 쓰는데 침대나 소파에 있을 땐 린넨 책 쿠션 생각이 간절해서 지름ㅎㅎ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쿠션이 웹 페이지에서는 밝은 베이지로 보였는데 실제 보니 카키 베이지에 광택 천 재질. 내 소파 색깔과 확연히 대비되는 거 보이시죠? 내 사진이 실제에 더 가까움. 이게 더 나을 수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각 크로스백
후후~ 앨리스 아이템을 놓칠 수 없징!
통영 갈 때 가져갈까 말까 고민이넹!

 

 

 

● 오늘의 밑줄긋기

 

 

 

 

 

 

 

 

 

 

나는 압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어찌 보면 희생은 압도적인 전이로 보인다.
사람은 보통 적당한 중심, 적당한 거리 속에서 자신을 유지한다
이 상태를 벗어났을 때 우리는 "괴짜다", "자기 중심적이다", 정도가 심하면 "제정신이 아니다", "미쳤다"라고 말한다.
맹렬하고자 할 때 얄팍한 자신은 물론 세계도 파괴되므로.
그럼에도
자아에 대한 압도적 신뢰는 종교, 믿음, 사랑과 퍽 닮았다.
이 문제에서 진실이나 진심 같은 건 사실 필요 없다.  이데올로기보다 더 징글징글한 늘 갈구하는 者라는 우리 특성 때문에. 외로움은 압도적인 내 필요를 추구하는 데 따른 부산물이다. 실존적인 운명이나 굴레라고 표현하는 것은 대책 없는 자기 연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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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5-12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 피네간의 경야,는 일생 도전작들 중의 하나죠. 새로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은데,
Agalma님 방에서 그 어마어마한 두께를 확인하게 되네요. 긴 여정 아무쪼록 완독하시길용~~

린넨 책 쿠션 너무너무 이뻐요. 저도 빨강이로 하나하고 싶은데.... ㅠㅠ
참, 앨리스 크로스백은 첨 봤어요. 그것도 예쁘당 .... 엉엉.....

AgalmA 2018-05-13 00:35   좋아요 1 | URL
죄송합니다. 제가 맞춤법이 틀렸는데 린넨이 아니고 리넨이 맞다고 하네요ㅜㅜ...입에 붙은 대로 쓰다보니...흑흑;
암튼 메모리폼보다는 책쿠션이 아무래도 뽀대나죠ㅋ! 전 블랙 이방인을 하나 더 들이고 싶은데 흐규...그냥 아무거나 사면 안 되나. 꼭 이벤트 신간 하나를 끼워야 하니 여간 고민이 아녜요;_;) 사놓고 묵혀두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니라서.
<피네간의 경야>는 언젠가 꼭 읽어야지 하던 책이니까 눈 질끈 감고 샀습니다^ㄱ^;;;
앨리스크로스백 이거 실제로 보면 더 이쁘답니다😍

syo 2018-05-12 17: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놈의 굿즈, 이 지갑 도둑놈의 굿즈들아......

AgalmA 2018-05-13 00:37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_;)...사는 입장에서는 그런 말할 처지가 아니라서ㅜㅜ

필리아 2018-05-12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창 <피네간의 경야>읽기를 위해 위밍업을 하고 있어요. 동지를 발견한 기쁨^^

AgalmA 2018-05-13 00:38   좋아요 0 | URL
전 계획해둔 도선생 읽고 가야 해서 한참 늦을 거 같은데 응원합니다^^!

보슬비 2018-05-12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쿠션과 앨리스 크로스백 탐나네요. 옛날의 저였더라면 책이 탐난다고 했을텐데...ㅋㅋ

AgalmA 2018-05-13 00:41   좋아요 0 | URL
보슬비님도 앨리스 아이템 엄청 모으시잖아요ㅎㅎ 문학류 좀 멀어지려고 조절 중인데 문학 대상 굿즈라 고르느라 애먹었어요ㅜㅜ 도저히 이 가방은 그냥 놓칠 수 없겠더라고용😣😭

겨울호랑이 2018-05-13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께서는 제임스 조이스로 넘어가시는군요.^^:) 마치 태양계 탐사를 마치고, 영원한 별들의 바다로 사라져가는 ‘보이저 2호‘를 바라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ㅋ

AgalmA 2018-05-13 01:02   좋아요 1 | URL
저 우주 미아되는 거에요;ㅋ;);;;? 그..그렇긴 하죠.
갑자기 ˝나 이제 제임스 조이스 읽기로 했어˝하면
돌아오는 건
˝....😶....˝
or
˝@&#~&÷&#....what?˝
or
˝........힘내˝
이기 십상. 이해합니다. 저도 어제 초반 읽어 보며 안드로메다를 잠시 영접하고 책장을 덮고 심호흡*,,*)

겨울호랑이 2018-05-13 01:13   좋아요 1 | URL
앨리스를 좋아하시는 AgalmA님이라면 블랙홀에 빠져도 화이트홀로 나오실 분이니 좋은 결과 있으리라 믿어요. 저는 ‘시저‘보다는 ‘카이사르‘, 「율리시즈」보다는 「오디세우스」가 좋아요 ㅋ

AgalmA 2018-05-13 01:11   좋아요 1 | URL
화이트홀로 나와도 결코 같은 곳으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하니 그게 그거잖아요😭;; 어디든 이보다는 나을라나ㅎㅎ;;
겨울호랑이님 자기 주역 너무 잘 보신당! 제가 생각해도 님은 율리시즈보다 오디세우스 파😋
말 한다는 걸 계속 깜빡했는데 연의 프사 넘 귀여워용😍💕

겨울호랑이 2018-05-13 01:13   좋아요 1 | URL
^^:)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편인지라... 「율리시즈」는 너무 어려워요... 같은 이유로 앨리스보다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더 편하게 느껴지네요 ㅋㅋ

AgalmA 2018-05-13 01:18   좋아요 1 | URL
연의 도로시, 양철나무꾼, 허수아비(알라딘에 이 닉넴은 본 적이 없군...), 겁많은 겨울호랑이 캐스팅으로? ㅎㅎ
그리고 단순한 거 좋아하신다고용? 저기...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 댓글 보이스피싱하시면 곤란합니다-_-....우주-역사-전쟁-경제 돌아가며 페이퍼 롤러코스터 태우고 계시면서....

겨울호랑이 2018-05-13 13:08   좋아요 1 | URL
^^:) 제가 오즈 마법사역을 ㅋㅋ 제가 진득하게 하지를 못해서 페이퍼도 아주 얇게 돌려짓기를 합니다... 모처럼 AgalmA님께서 음악을 들으시며 독서중이신데 너무 시간을 빼앗았네요... 죄송. 그럼 전 지구에 남을테니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즐거운 우주 여행 즐기세요! ㅋ

AgalmA 2018-05-13 01:27   좋아요 1 | URL
저는 지금 조선 시대에...
피자와 맥주 먹으며 추사 김정희를...이런 하이브리드 조합에 조상님께 죄송하네요;;;

겨울호랑이 2018-05-13 0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항상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친 김에 분위기 바꿔봅니다. AgalmA님 편한 밤 되세요!^^:) 저런 피자상으로 독서 제사를 지내고 계셨군요 ㅋㅋ

페크pek0501 2018-05-1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다고들 하지만~> 355쪽을 봐야겠군요. 아직 거기까지 못 읽었어요. 여러 책을 읽다 보니...
저자의 사랑에 대해, 그리고 믿음에 대해 파고드는 솜씨, 읽을 만하군요.
무엇에 대해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때 좋은 글이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AgalmA 2018-05-16 00:16   좋아요 1 | URL
저 인용은 월리스 문장이 아니라 조지프 프랭크의 글 인용입니다. 에세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월리스는 소설로 읽어도 좋을 내용과 구성이라 재밌었습니다^^

blanca 2018-05-18 0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구즈와 책 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저는 이사 오기 전 택배 기사님이 저희 아버지 연배셨는데 제 이름을 불러주셨던 기억이 나요.-- 너무 알라딘에서 책이 많이 와서 ㅋㅋ 갑자기 뵙고 싶네요. 등록한 중고도서 입고알림이 뜨면 심장이 막 뛰지요. 김남주 번역시집 어떤가요? 지금 심히 갈등중이라 AgalmA님 말씀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AgalmA 2018-05-20 16:41   좋아요 0 | URL
굿즈 칭찬 알라딘이 무척 좋아하겠습니다ㅎ 저도 택배기사님 중 알라딘 택배기사님을 제일 많이 만나요^^; 어느 날은 이렇게 책 주문이 많은 고객이 누구신가 궁금했었다며 얼굴 확인을 하고 가던 분도-,-;;; 요즘 책을 워낙 많이 사서 중고도서 어지간하면 알림만 보고 말 때도 많아요. 넘 피곤해서ㅡㅜ;
아직 김남주 번역시집 안 사셨다면 소장하실 만하다고 추천드립니다. 정치성과 철학성이 많지만 언어의 힘이 생생한 시들이라 쉽게 읽고 치울 시들은 아니라서요. 사은품으로 주는 노트 말고 시집을 양장본으로 할 것이지! 그게 좀 아쉽지만^^;; 같이 주는 굿즈가 넘 예뻐서 참기로ㅎ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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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토록 ㅋㅋㅋㅋ 한 책은 없고 올해가 끝나기 전에도 없을 듯. 그의 수많은 각주처럼 속으로 무슨 소릴 하고 있을지 싶어 친구가 되고 싶진 않지만; 정말 공감 가는 인간이다. 카프카, 도스토옙스키처럼 그도 희비극의 악몽을 함께 가지고 있고 쓰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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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등이 날개 속에 유폐되어 있듯 인간의 영혼은 언어 속에 유폐되어 있습니다"

           

내 그림이랑 딱 맞는 문장! 역시 우리는 통해!

 


샹탈 : 음악이 문학적 창작의 일부분이라는 건가요?

파스칼 : 그건 모르겠습니다. 둘이 나뉘는 게 아니에요. 방금 표현하신 창작자 혹은 창조자는 이 창작이라는 의미를 의식하면 안 돼요. 오히려 허튼소리, 어리석은 말, 스스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착란 들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그런 창조가 내 눈 밑에 어떤 매개체처럼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으니까요. 창조요? 전 그걸 한 번도 못 봤어요.

샹탈: 『음악의 증오』에서 "음악의 비밀스러운 기능은 소환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음악은 죽음 속으로 끌어들이는 미끼"라고도 하셨어요. 그러나 그건 또 『음악 수업La Leçon de musique』에서 옹호하신 것처럼 일종의 본국 송환, 복구, 수리 같은 거 아닙니까?

파스칼: 맞습니다! 두 책은 은근히 모순적이에요. 음악이 쉴 깊은 침대를 파다 보니 써진 책입니다. 음악과 언어의 상류에서, 그러니까 두 가지가 분화되기 이전에, 운문으로 쓰인 신화에 대한 기억이 탄생하기 이전에, 신들린 상태와 희생제 의식을 구분하는 춤이 탄생하기 이전에 언어는 순수 상태로 유인하는 미끼였죠. 음악-노래-언어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무엇을 위한 미끼입니다.

샹탈: 당신에게 음악과 침묵은 어떤 관계인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파스칼: 침묵은 음악보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언어보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은 그것들에 드리워진 그림자입니다. 하나의 음계를 만드는 데 있어 고유한 음이 없듯이, 알파벳을 만드는 데에도 고유한 자음과 모음은 없습니다. 그것들에 선행하는 침묵 없이는요. 이 침묵이 반양립적인, 융합적인 매개물을 침묵하게 만듭니다. 옛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카오스라 불렀습니다. 신플라톤주의자와 조르주 바타유는 그것을 연속성이라 불렀습니다. 중세 서양의 기보 음악은 실레테silete를 동시에 고안해냈습니다. 실레테란 '침묵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시되면서 연속선이 끊어집니다. 홍해가 둘로 갈라집니다. 그러면서 심장 한복판에서 (음악가들이 흔히 빈 마디라고 하는) 엇박자를 내듯 시간이 빠지고, 그러면서 숭고한 아타카를 던집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숭고한 늘임표 같은 피날레가 옵니다. 죽음이 성의 분화에 거의 맞닿아 있듯이, 침묵은 음악과 맞닿아 있습니다.

 

ㅡ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파스칼 키냐르의 말

 

키냐르의 말은 부유하는 듯하지만 언제나 악기들의 팽팽한 활 같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로 소환적이고 늘 복귀를 향하며 독자에게 던지는 미끼이다. 나는 환희에 차서 언제나 덥석 문다.
요 며칠 읽고 읽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사고의 본질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에서 논하던 언어의 속성을 떠올리며 이 불협에 심란해진다.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지속적인 범주화 덕분에 인지가 이루어지며, 모든 인지의 토대에는 (모든 것을 고정되고 엄격한 정신적 상자 안에 넣으려는) 분류와 달리 놀라운 유연성으로 사고를 가능케 하는 유추 작용을 통한 범주화라는 현상이 있다.

우리는 유추 작용을 통한 범주화 덕분에 유사성을 포착하고 새롭고 낯선 것에 대응하기 위해 그 유사성을 활용하는 능력을 얻는다. 또한 새롭게 접한 상황을 오래전에 접했으며 부호화되어 있고 기억 속에 저장된 다른 상황에 접목함으로써, 이전 경험을 활용하여 현재 속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유추 작용은 두뇌가 지닌 이런 능력의 초석으로서, 무작위로 예를 들자면 개, 고양이, 기쁨, 체념, 모순처럼 라벨이 붙은 개념뿐만 아니라 그때 나는 뜻하지 않게 문이 꽝 닫히면서 살을 에는 듯한 날씨 속에 집 밖에 남겨지게 되었다처럼 라벨이 붙지 않은 개념까지, 과거에 뿌리를 둔 풍부한 지혜의 창고를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간에 이런 개념은 매 순간 선택적으로, 거의 언제나 자각 없이 동원되며, 이 쉼 없는 활동이 우리가 처한 상황의 정신적 표상을 구축하여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고차원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어떤 사고도 과거의 정보 없이 형성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오직 현재와 과거를 잇는 유추 덕분에 생각할 수 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사고의 본질


호프스태터 & 상데, 월리스는 기본적으로 언어 문법이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촘스키 보편 문법을 따른다. 그들은 규칙과 질서로 세계를 재구성한다. 키냐르는 좀 다르다. 그가 언어와 음악의 중추라고 생각하고 강조하는 것은 카오스적인 침묵이다. 앞선 이들처럼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키냐르가 인터뷰에서  말하는 것은 유추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그렇듯 비밀로 감싼다. 어찌 보면 그가 어릴 때 음식을 거부했듯 극도의 거부 반응처럼 느껴진다.

 


상탈: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할 때, 화가가 어떤 것을 말할 때, 음악가가 어떤 것을 말할 때, 그것을 알지 못한다. 베르크하임 같은 도시가 쾰른이라 불리는 또 다른 도시와 지척임을 알고 나서, 당신의 아이를 키운 여인이 바로 거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순간 대단히 이례적이게도, 극히 사적인 어떤 영역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 순간은 언어에 선행했던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비로소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이며 그때 이뤄져서는 안 될 어떤 것이 내게 이뤄진 것 같아 보인다"라고 당신은 로익 주르댕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파스칼: 글쎄요, 직접적으로는…… 자기 고유의 광기에 대해서는 기만할 수밖에 없지요.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요…….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살았습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울부짖습니다. 다른 자들의 입술 위에 있던 국어를 배우기 이전의 외침, 누더기 같은 목소리 조각들이랄까요? 다른 자들의 입술 위에 있던 그 언어에 압도당해 무너지면서 이른바 언어의 습득이 시작됩니다. 서서히 안에서 모음을 발성하게 되고, 그게 군群을 이루면서 말을 하게 됩니다. 간헐적인 메아리 현상처럼요. 우린 그걸 의식이라고 부르지만 타자의 소리가 반향되는 겁니다. 획득 언어, 사회 언어는 우리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이어 그다음은 해선 안 됩니다. 이건 세상에 있는 그 누구와도 상관없습니다. 선행했던 야만성과 세계의 재판정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길들이기는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약, 코나투스conatus, 오렉Orexis 같은 것이 그 자체로 역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명명되어서는 안 됩니다.

 

ㅡ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파스칼 키냐르의 말

 

키냐르의 단호함. “의식은 획득 언어의 메아리 방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언어적으로 구축된 가공물이자 언어를 통한 재번역에 따라 완전히 변하는 오열이자 징후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감동적인 수사이지만 단순하게 보면 행동주의 심리학처럼 냉정하다. 그래서 그의 사유를 내가 더 좋아한 건지도 모르지만, 종국의 관점에 대해서 지금의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 같다. 나는 계속 언어를 좇는다. 이번 생에서만 하고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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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5-10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 대한 접근태도를 정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화권마다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언어의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언어(또는 문화)의 우생학쪽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AgalmA 2018-05-10 17:58   좋아요 1 | URL
늘 두 가지 이상의 상이한 대립이 있어서 항상 양쪽을 살펴야 해 진짜 골치 아파요. 키냐르는 또 다른 변수로 등장했다고 봐야겠죠. 침묵이라니! 항상 하던 소리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래서 촘스키가 생물학적 결정론자라며 우생학적이라고 비난을 듣기도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