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같은 소리 하네 - 과학의 탈을 쓴 정치인들의 헛소리와 거짓말
데이브 레비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비보를 들었다. 헛소리와는 정반대인 촌철살인 발언을 하던 한국 정치인 한 분이 돌아가셨다. 그런 분들의 뜻을 이어가고 싶고, 믿을 만한 사람도 정보도 가리기 어려운 세상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경계 지침들을 잘 챙겨 이 글을 써야겠다 생각하니 마음 부담이 컸다.
  
이 책은 2016년 11월에 탈고되었고 2017년에 나왔다.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되기 전에 이 책을 내 그를 언급하지 못한 걸 매우 애석해하며 머리말에서 첨언했다. 트럼프의 발언은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하고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주장이라 분석할 가치조차 못 느껴 주로 웃고 말게 된다. 그러나 그의 터무니없는 말 대포는 해도 해도 너무 많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부정적 영향은 무시 못 할 게 된다. 게다가 그는 세계 최강국 중 하나인 미국의 지도자이지 않은가!
 
이 책 원제 『Not a Scientist - How Politicians Mistake, Misrepresent, and Utterly Mangle Science』이기도 한 내가 과학자는 아니지만은 미국 정치인들 특히 공화당 정치인들이 처음 썼고 즐겨 쓰는 수사인데, 자료와 분석을 언급하며 전문가는 아니지만 전문가인 척하는 그 겸양 뒤에는 숨은 의도와 오류가 가득하다. 저자는 과학적인 걸 내세우며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그들의 사례를 여러 항목으로 분류해 지적했다.

  
1. 지나친 단순화 : 과학적 실수, 왜곡, 훼손 중 가장 기본적인 형태. 임신 20주 이후 낙태금지법 통과를 위해 태아가 언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느냐를 두고 설왕설래되는 상황과 마리화나가 입문용 약물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문제가 소개되었다. 한국에서도 마리화나에 대한 관심이 계속 제기되어 조금 덧붙이면, 니코틴과 알코올 같은 다른 합법적인 약물들도 비슷하거나 훨씬 더 심한 입문 효과가 있다. 더 중요한 요인은 ‘특정 약물을 얼마나 쉽게 구할 수 있느냐이고, 그에 따라 입문 효과의 강도가 달라진다. 술을 구하기도 마시기도 쉬운 한국에서 주취폭력 문제가 심하고 사건 발생 시 감형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2. 체리피킹(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 골라서 취하고 더 큰 증거를 무시해버리는 것) :
저자는 기후변화 문제성에 특히 관심이 많아 그와 관련된 사례를 많이 가져왔다. 2009년 연구 발표에서 최고·최저 기온 비율은 2:1이었지만 21세기 중반 즈음이면 그 비율은 20:1로 예상된다. “2100년이 되면 최저 기온이 한 번 경신될 때마다 최고 기온이 50번 경신될 것이다.” 지금도 더워 죽을 맛인데 장차 살아가게 될 인류의 여름이 더 걱정되는 소리다.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행동에 제동을 걸려고 체리피킹 하는 정치인들이 인면수심이라 생각되는 대목이다.
알래스카주 빙하에 관한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얼음이 해마다 75기가톤씩 사라지고 있다. 1기가톤이라고 하면 대수롭지 않게 들릴지 몰라도 이는 10억 메트릭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고 싶다면, 아프리카 코끼리 1억 마리나 흰고래수염 600만 마리 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3천 채를 상상하면 된다.”
 
3.
아첨과 깎아내리기 : 어느 나라든 예산 배분은 늘 골치 아픈 문제다. 미국의 한 정치인은 예산안을 깎을 생각에 나사(NASA)의 우주 개발을 칭찬하면서 지구와 대기권을 연구하는 허튼짓 말고 우주 탐사라는 진짜 목표에 전념하라는 헛소리를 했다. 지구 과학이 기본 중에 기본이며 나사(NASA) 창립에 그 뜻도 있다는 걸 모르는 소리다. 부시 행정부 때 미국 국립보건원 예산도 줄이기 위해 이런 전략을 썼는데, 긍정적인 걸 거론하며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고의성이 짙다.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오류와 수사적 장치 중에서도 악질이라고 강조한다.
 
4.
악마 만들기 : 공공의 적을 만든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아주 무시무시하다.
여기서는 2015년 초반 디즈니랜드에서 홍역이 발생하자 그 원인을 영세한 나라의 밀입국자, 불법체류자들에게 돌린 정치인들의 사례가 나온다. 실상 개발도상국들의 홍역 예방접종률이 최고 선진국 미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다.
백신에 대한 신뢰 부족과 공포가 백신과 자폐증을 연결하는 소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장 중 하나인 상관관계가 반드시 인과관계는 아니다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5.
블로거에게 떠넘기기 :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므로 기후변화 얘기는 계속된다.
국립아카데미 산하 국립연구회의NRC 1979년 보고서에서 이미 세계의 온난화를 엄중히 경고했다. 기상 이변을 매해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안이하고 어리석게 그냥 두고 보자는 정책으로실수를 오랫동안 되풀이하고 있다. 데이터를 제멋대로 고치고 꼬아서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사람이 거의 없을뿐더러 잘못되어도 책임을 떠넘기기도 쉬우니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싶은 정치인에게 인터넷은 솔깃한 헛소리들이 모여 있는 완벽한 노다지다.” 지구냉각화 미신이 끈덕지게 지속되는 이유는 수십 년 전에 나온 특정 기사들 때문이라기보다 오늘날 인터넷상에서 사람들이 그 내용을 반복적으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로거들이여, 제발 업데이트와 교차 체크 좀 하고 살자!
태아조직 기증의 적법성도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태아 세포는 홍역·풍진 백신 개발에 사용됐고 소아마비 백신 배양에도 일조했다.” 의학진보센터의 영상들을 잘못 해석하고 생명 존중과 윤리를 외치며 격앙된 분위기 속에 한 남자가 가족계획연맹 진료소에 침입해 여러 사람을 살인하는 사건도 있었다.
비슷하게 한국에서는 ‘지라시’ 운운하며 인용을 가볍게 여기는 정치인들이 많다. 공직자라면 그런 행동은 비난받을 만하다.
“‘블로거에게 떠넘기기는 어떤 면에서 정치인들에게 거짓말을 허용해주는 무임승차권과 같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비난해야 한다. 보통의 블로거들과 달리 공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만큼 정치인들에게는 과학에 관한 한 더 높은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어리석고 터무니없고 몹시 위험한 헛소리를 그대로 옮기는 행태를 제대로 지적하면 다방면에서 유익한 결과를 볼 수 있다. 낙태와 관련된 잘못된 정보가 퍼지는 것을 막으면 극단주의적인 폭력사태를 줄일 수 있고, 기후학에 대한 신뢰를 쌓아올리면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해 말 그대로 세계를 구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6. 이 외에도 복잡한 과학적 쟁점을 유치한 얘기로 둔갑시켜 사람들이 그저 고개를 저으며 웃게 만들어버리는
조롱과 묵살, 논점을 호도하는 문자주의적 논리, 불확실성을 강조하며 핵심을 흐리게 만드는 확실한 불확실성, 주장에 맞추기 위해 철 지난 정보 들먹이기, 아무 말 대잔치로 만들어버리는 정보의 와전,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기 쉬운 순수한 날조 등의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미국 사례이었지만 한국 정치인들 행태와 비슷해서 다른 분들도 공감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저자는 어떤 유형이든 과학적 발언을 평가하는 데 가장 좋은 요령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말 희한한 소리처럼 들리면 실제로 헛소리일 확률이 높다!(주의: 양자물리학 법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기이함이야말로 양자물리학의 특징이니까.)"
 
끝으로 한국 뉴스계의 지각변동을 보여준 사례인 JTBC 뉴스룸 칭찬을 한 마디 하고 싶다. 이 뉴스에서 내가 좋아하는 코너는 팩트체크비하인드 뉴스. 그들도 사람이라 간혹 실수도 하고 내가 동조하기 어려운 논점일 때도 있지만, 시청자들이 놓쳤을 수도 있는 정치인 발언들과 그 사실 관계를 따져줘서 긍정적인 역할이 크다. 일반인이 기자들처럼 이런 세세한 걸 다 살펴가며 생각하긴 어렵다. 그러나 어느 하나만이 옳을 수 없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가 생각을 게을리하는 순간 잘못되고 삐뚤고 기울어지는 풍조에 일조하는 결과가 된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일독할 만한 책이다.
 
아직 논란이 많은 유전자 변형(GMO) 식품에 대해 저자가 과학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불확실성에 바탕을 둔 확실성’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 별점은 높게 주지 않았다. 
  
※ 사진에 나온 요거트는 간접 광고는 아니고 요즘 제가 맛들인 간식;; 알라딘 7월 굿즈 책 라디오 넘 이쁨♥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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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책(7/21) - 찰스 스펜스 『왜 맛있을까』

주말에 골치 아픈 책 읽긴 싫고ㅎ 쉬어가는 타이밍으로 고른 책. 그런데 메모해두고 외울 게 넘 많아😂
먹는 걸 그닥 즐기지 않지만 관련 이야기들에는 관심이 많다. 먹는 고단함보다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게 더 편해서ㅎ;
기대 안 했는데 유용한 정보도 많고, 뇌과학과 음식의 접목을 보며 연신 놀라고 있다.
우리가 혀가 아니라 뇌로 먹는다는 게 아주 잘 느껴짐. 수업 시간에 배우고 외웠던 혀 지도도 잘못된 정보였다니! 충격😣; 정보 업데이트 없이 그냥 살면 그대로 믿고 죽 살 거 아닌가ㅎㄷㄷ
이 복잡한 세상, 무슨 정보를 믿어야 하나;
현재 동향뿐 아니라 미래 음식 산업의 추이도 살펴볼 수 있다.
추천 도서/

<밑줄 긋기>

📎
˝경쾌한 음악은 단맛을, 고음의 음악은 신맛을, 신나는 음악은 짠맛을, 부드러운 음악은 쓴맛을 더 잘 느끼게 합니다. 반면 시끄러운 소리는 단맛을 덜 느끼게 만들죠.”
📎
“자꾸 손이 가 원망스러운 간식은 빨간 그릇에 담아두세요. 빨간색에 대한 회피 본능이 있어 손이 덜 갈 겁니다.”
📎
˝12시 방향(정확히는 12시에서 시계방향으로 약 3도 기울어진 방향)일 때 사람들이 음식을 가장 맛있게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식기의 무게가 음식을 더 맛있게 느껴지게 한다˝




● 오늘의 책(7/22) -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괜찮아』

나는 조제처럼 엎드려 다다미는 아니고 대자리에서 소설을 읽고 있었다. 책 읽는 사람들의 무심하지만 집중하는 모습을 좋아한다. 애석하게도 내 그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지. 그래서 사람들이 찍은 내 무방비한 모습은 짜릿한 쾌감과 수치심을 준다. 당신이 뭘 안다고 이런 걸 찍어서 보여 주는 거야 공격하고 싶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런 사진을 찍고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표현하는 사람. 그러니까 화를 내고 싶다면 자신이 더 많이 그런 사람이 아닌지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그래서 성급하게 화내는 걸 싫어한다. 제 얼굴에 침 뱉기 될 거 같아서.

갑자기 생각길이 끊겼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어머니가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이 지점에서 포기하면 글은 끝난다.

삶은 이러한 무수한 비연속, 비균질 속에서 연결됐다가 끊기길 반복하는데 하나의 연속성과 영속성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이들에게 나는......그렇게 사람 사이에는 ‘관점의 차이‘라는 묘비석만 무수히 늘어간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괜찮아』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1권 )

이 소설은 빠르고 명쾌한 스토리 전개를 선호하는 이들에겐 좋은 반응이 나오기 어렵겠다. 윌리엄 포크너의 나른하고 잔인한 묘사와 심리 관찰을 따라가는 걸 즐기는 이들에게 적합하다.
묘사와 비유 구경만 해도 즐거운! 너무나 치밀해. 정말.




캠핑의자까지 꺼내 설쳐봐도 더운 건 어쩔 수 없군.
나 :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요/
나 : 네. (응기적 응기적)

타들어간 잎들과 그 기세처럼 피어오르는 꽃들의 대비를 보며...
올해 치자꽃은 두 개만 피고 말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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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7-22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인줄 알았는데, 아이패드인 거군요.
오늘이 어제보다 더 더운 것 같은데, 더위 잘 피하세요.
a님, 더운 여름 건강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AgalmA 2018-07-26 15:18   좋아요 1 | URL
종이책도 요즘은 더운 소품처럼 느껴져요ㅎㅎ; 전자책이 밤에 불 꺼놓고 읽고 듣기 좋더군요^^ 책이든 전자책이든 더워서 집중이 잘 안 되는 어려움이ㅜㅜ
감기 걸리신 건 좀 나으셨나 모르겠네요. 저도 아뮤래도 더위로 인한 알레르기 증상 땜에 병원 다니고 있어요.
다들 여름 건강히 나야 할 텐데 말이죠...

겨울호랑이 2018-07-22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단것을 너무 좋아하니 앞으로는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해야겠군요... Megadeth, Judas Priest를 들으며 밥 먹으면 소화가 잘 될지 모르겠어요 ㅋㅋ

AgalmA 2018-07-26 15:16   좋아요 1 | URL
좀 복잡한 사안인데요ㅎ;
선곡한 헤비메탈 음악이 좋아하는 곡이 아닐 때 쓴맛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으니 적절하긴 한데요. 좋아하는 곡일 땐 단맛이 강화돼요ㅋ
또 헤비메탈처럼 시끄럽고 빠른 음악은 맛을 잘 못 느끼게도 하지만 음식을 빨리 먹게 만들죠. 그러니 많이 먹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는ㅎㅎ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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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불만을 품고 신학자들만큼 독학을 많이 한 무신론자라면 도킨스의 이 저서가 신기할 것도 없겠지만 도킨스가 신이 없다고 철저히 논박 해나가는 이 과정을 보는 나는 정말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렇다고 도킨스 교가 되지는 않을 거다. 독고다이 무신론자들은 이래서 잘 뭉치는 종교인들에게 계속 밀린다고 도킨스가 개탄ㅋ;

 
신의 반증 불가능성 때문에 종교가 더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우리가 무언가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와 비존재가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우저와 싱어는 무신론자와 종교인의 판단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고 했다. 현실 속 많은 부분에서는 과학적 검증 과정을 거치고 신뢰하면서 신에 대한 과학적 검증 과정은 단호히 막는다면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런 사람의 말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지? 증거보다는 사적인 계시를 통해 지역별로 다양한 전통으로 뿌리내린 신 가설은 신빙성보다 이야기성이 더 강하다. “종교사가들은 원시 부족의 애니미즘에서 그리스, 로마, 북구의 신들 같은 다신교를 거쳐 유대교와 그 파생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로 진행되는 흐름이 있다고 본다.” 도킨스 말대로 종교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기에 그런 특권을 누리는 걸 당연시할까. 삶을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나약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나는 보는데 의지할 데가 정녕 종교밖에는 없는가. 일단 당신이 신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자가 체크해보자.

 

“확률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을 통해 신의 존재에 관한 인간의 판단들을 확실성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스펙트럼 상에 나열해보자. 그 스펙트럼은 연속적이지만, 다음의 7가지 이정표를 이용하여 구별할 수 있다.
   1. 강한 유신론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100퍼센트 확신함. 카를 융(Carl Jung)의 말을 빌리면, “나는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2. 확률이 아주 높지만 100퍼센트는 아님. 사실상 유신론자. “나는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신을 굳게 믿으며 신이 있다는 가정하에 산다.”
   3. 50퍼센트보다 높지만 아주 높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 자지만 유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신이 있다고 믿고 싶다.”
   4. 정확히 50퍼센트.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불가지론자. “신의 존재와 비존재는 확률상 똑같다.”
   5. 50퍼센트보다 낮지만 그리 낮지는 않음. 기술적으로는 불가지론자지만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존재에 회의적인 쪽이다.”
   6.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0은 아님. 사실상 무신론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신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신이 없다는 가정하에 산다.”
   7. 강한 무신론자. “융이 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확신한 것만큼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안다.”

리처드 도킨스는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증 가능성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서인지 6번이라고 했다. 나도 6번이다.


책 초입에서 도킨스는 과학자들조차 혼동해 쓰고 있는 현재 혼재된 ‘신’ 개념을 정리하고 들어간다. 

“와인버그는 신이라는 단어가 무용지물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즉, ‘우리가 숭배하기에 적합한’ 초자연적 창조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분명 이 말은 옳다.
   훨씬 더 불행한 혼란은 아인슈타인식의 종교와 초자연적인 종교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종종 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그런 무신론자 과학자가 그만은 아니다), 그런 유명한 과학자가 자신들의 편이기를 너무나 바라는 초자연주의자들의 오해를 자초하곤 했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는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극적인(혹은 장난기 어린?) 말로 끝을 맺음으로써 대단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그 구절을 읽고서, 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호킹이 종교인이라고 믿게 된다.”
유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는다. 그 지성은 우선 우주를 창조하는 큰일을 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주위를 맴돌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유신론적 신앙 체계 내에서 신은 인간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기도자에게 응답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며, 기적을 이룸으로써 세계에 개입하고 선행과 악행에 시시콜콜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언제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지(더 나아가 그런 행위를 할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한편 이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지만, 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설정하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범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신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초자연적 동의어로 사용한다. 이신론자는 신이 기도자에게 응답하지 않고 죄나 고백에 관심이 없으며, 우리 생각을 읽지 않고 변덕스러운 기적을 부리지 않는다고 본다는 점에서 유신론자와 다르다. 이신론자는 신이 일종의 우주적 지성이라고 보는 반면 범신론자는 신을 우주 법칙의 비유적 또는 시적 동의어라고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이신론은 물을 타서 약하게 만든 유신론이다.” 

 

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칭송되는 세계 창조를 생각해 보자. 신의 ‘지적 설계’는 

“우연의 적절한 대안이 아니다. 자연선택은 경제적이고 설득력 있고 우아한 해답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제시된 것들 중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지적 설계는 우연과 똑같은 반론에 시달린다. 그것은 통계적 비개연성이라는 수수께끼의, 설득력 있는 해답이 아니다. 그리고 비개연성이 높아질수록 지적 설계는 더욱 설득력이 없어진다. 잘 보면 지적 설계는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설계자 자신(그/그녀)의 기원이라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인정한다면 “무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한 것이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신은 망상이다. 그리고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그것은 유해한 망상이다.” 과학적 실증주의 접근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는 신을 곧장 불가지론 영역으로 모셔 가는데, 도킨스는 재빨리 막아선다.

“1835년 저명한 프랑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별에 관해 이렇게 썼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별의 화학적 조성이나 광물 구조를 연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콩트가 이 말을 하기 이전에 이미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Joseph von Fraunhofer)는 분광기를 이용하여 태양의 화학적 조성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한 상태였다. 현재 분광학자들은 아주 먼 별의 화학적 조성까지 정확히 분석함으로써 콩트의 불가지론을 반박하고 있다.[13] 콩트의 천문학적 불가지론이 정확히 어떤 입장이었든, 이 교훈적인 이야기는 적어도 우리가 불가지론이 영구적인 진리라고 아주 큰 소리로 선언하기에 앞서 시간을 두고 좀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무신론자에게 ‘없음’을 증명해보라는 유신론자들의 생떼에 대해서도 공격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앰브로즈 비어스는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 리처드 도킨스는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로 과학 원리들에 위반되는 ‘기적’을 든다. 아서 클라크의 명언처럼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신 아니면 외계인과 곧장 연결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 
    


도킨스는 성서 오류들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는데 이건 신앙인들이 더 봐야 한다. 창조론자들은 “현재의 지식이나 이해에 나 있는 틈새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신의 이름을 박고 있다. “이렇게 놀랍도록 맹목적인 태도를 보이는 심리적인 이유는 생물학자들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자연선택과 비개연성을 통한 의식 각성을 겪지 않아서일 것이다. 앤더슨 톰슨은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또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우리 모두가 무생물을 행위자로 인격화하는 심리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톰슨에 따르면, 우리는 강도를 그림자로 착각하기보다는 그림자를 강도로 착각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 잘못된 긍정은 시간 낭비일 수 있다.” 신에 대해서는 더. 
    

 

인간사에 시시콜콜히 개입하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에게는 재앙과 무관심으로 대하는 신의 모습보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오히려 세계의 움직임을 더 잘 설명한다. “자연선택은 모든 변이, 가장 사소한 변이까지 찾아내기 위해 매일 매시간 세계를 샅샅이 훑는다.”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보존하고 추가하며, 언제 어디에서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없이 눈에 띄지 않게 유기적 존재의 개선에 힘쓴다.” “어떤 야생동물이 습관적으로 어떤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면, 자연선택은 시간과 에너지를 생존과 번식에 투자하는,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자연은 경박하고 기발한 착상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설령 늘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도, 냉혹한 실용주의가 이긴다.” 신의 이해하기 어려운 뜻 운운하며 읊조리거나 이상하게 해석하는 거보다 더 명쾌하다!


우리가 왜 종교와 신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지(이러한 해석도 사실 우리의 착각이다)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나방은 빛이라는 나침반에 의해 움직이는 생물이다. 도시 불빛에 날아드는 나방을 보고서 우리는 잘못된 질문을 던진다. “왜 나방들은 자살을 하는 것일까?” 그 질문 대신에 우리는 왜 우리의 신경계가 그들이 빛줄기에 대해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례만 바라보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게 자살같이 보이는 나방의 죽음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유용했던 나침반이 만들어낸 빗나간 부산물”이다. 이  나방의 ‘자기희생 행동’과 신앙인들이 확신을 가지고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며 죽고 죽이는 행위를 하는 것은 너무도 닮았다. 
    

 

도킨스는 종교 기원의 인류학적 추론들도 꼼꼼히 가져왔는데 ‘화물 숭배 의식’, ‘지역 숭배 의식’ 등등 자세한 건 책에서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에서 거론된 추천서 중 하나인 마이클 셔머 『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국내 번역 제목)에서는 내게 특히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시각적 종교 경험이 측두엽 간질과 관련이 있다는 마이클 퍼싱어의 주장”이라는 문장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외치고 말았다. 이 외에도 도킨스가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는가」 챕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직접 언급했다.

“우리 모두가 친절함도, 자비도, 관용도, 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도 전혀 없는 무정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려면 자긍심이 지극히 낮아야 할 듯하다. 일반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가 그런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 그가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빌려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인 듯하다.”
“설령 우리가 도덕적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존재를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성서 교리에 대한 비판도 아주 시원시원하다.

“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속죄가 악의적이고 가학피학적이고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그것을 개가 짖는 소리로 치부해야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객관성이 무뎌져 있다. 신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다면, 스스로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용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그렇게 함으로써 먼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살해자’라고 박해받고 학살당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 그 유전되는 죄는 정액에 담겨 전달되었을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은 원래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다른 유대인을 사랑하라”는 뜻이었다.”
“미국의 의사이자 진화인류학자인 존 하텅은 그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내집단 도덕의 역사와 진화를 다룬 놀라운 논문을 썼는데, 그 이면에는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이 깔려 있었음을 강조한다.” 


도킨스는 종교의 규범적인 배타성보다 증오와 폭력과 분열을 조장하는 그 논리에 더 놀라워한다. 특히 성서에서 동성애, 여성이 얼마나 비천하게 다뤄지는지를 보면 신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낙태에 대한 종교의 입장을 구구절절 동감되는 의견으로 반박한다.

 

 

종교주의자와 과학이 공리로서 대결해도 어떤 것이 더 논리적인지 자명하다. ‘믿음’의 개념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논리적 회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자는 ‘신성한 책’에서 진리를 읽고 자신의 믿음을 뒤흔들 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안다. 신성한 책의 진리는 추론 과정의 최종 산물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다. 그 책은 옳으며, 만일 증거가 그것과 모순되는 듯하면 버려야 할 것은 그 책이 아니라 증거여야 한다. 대조적으로 과학자인 내가 믿는 것(예를 들어 진화)은 신성한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를 연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전혀 다른 문제다. 진화에 관한 책들은 신성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증거를 압도적일 정도로 많이 제시하기 때문에 믿는다.”  

 

종교를 뿌리까지 들어내야 한다는 그의 의지가 특히 돋보이는 대목은 나도 중요하다 싶었다. “부드럽고 온건한 종교도 극단주의가 자연스럽게 번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데 일조한다.” 스스로 선택할 기회도 주지 않고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는 세뇌와 다름없다. 조국애와 민족애가 만난 극단주의가 어떻게 됐는지 우리는 ‘일본의 자살특공대, 스리랑카의 타밀타이거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교가 인간 삶에서 ‘설명, 훈계, 위로, 영감’으로 주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신이 채우는 틈새를 우리는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리처드 도킨스는 권유한다. “미국인의 약 95퍼센트가 죽은 뒤에도 삶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이 처음 건국될 때는 종교의 다양성을 수용했는데 점점 극단에 치우치고 있다. 무신론자에게는 선거에서 가장 표를 주지 않는 실정이다.
도킨스는 반문한다. “우리가 신 없이 살면 우울해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그는 초자연적 종교 없이 행복하고 충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어쩐지 그게 인간의 진짜 삶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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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7-21 03: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신앙인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삼단 논법이 아닌 자신의 삶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좋은 것은 무엇이든 빨리 받아들이는 시기에, 종교를 가진 이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신앙인들의 삶과 비신앙인들의 삶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다른 이들에게 선교하기에 앞서 화목한 가정을 만들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고백보다 먼저라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2번! ㅋ

AgalmA 2018-07-21 08:46   좋아요 3 | URL
범신론에 저는 평소 우호적이었는데요. 무신론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ㅋ 그런데 무신론이 강력해지면서 범신론이 유신론 범주가 돼 상황이 묘하게 되어 버렸어요ㅎ;
낼 휴일이라 늦게까지 또 책씨름하시나부다😋 난 낼 출근인데!

겨울호랑이 2018-07-21 03:39   좋아요 4 | URL
^^:) 그렇군요. 사실 유신론 무신론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입으론 신을 말하면서 지옥갈 일을 태연하게 저지리는 이들을 보면... 지금껏 자다가 더워 잠시 깼어요. ㅋ 잠은 충분히 자는 주의라 ㅋㅋ

2018-07-21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7-22 14:01   좋아요 0 | URL
말씀에 동감합니다. 신을 너무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게 그래서겠죠ㅎ

북다이제스터 2018-07-21 1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학자인 도킨스가 반증가능성으로 신 유무를 판단한 점에 실망했습니다. 과학은 반증론이 아닌 패러다임일 뿐인데요. ㅠ
더구나 신의 여부는 확률로 접근하면 위험하다고 보입니다. 확률은 5:5 등 단순한 확률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을 반영한 기대값을 고려해야 하기에 존재 확률이 극히 낮아도 혜택 혹은 불행이 무한대에 가깝게 되어, 전 확률에 의한 분류에 반대합니다. ㅎㅎ

AgalmA 2018-07-22 16:19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쓴 전체 맥락을 더 보셔야 해요. 도킨스는 유신론의 모든 논점을 반박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죠. 안 건드리면 모르거나 자신없어서 그런다는 소리 들을까봐 그들의 프레임도 기꺼이 받아 줍니다. 당신들 틀에서도 이건 틀렸다를 보여주는 게 가장 직접적이기도 하고요ㅎㅎ 도킨스가 확률을 끌어 들인 건 틈새를 더 넓히기 위함입니다.
˝설령 신의 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확실하게 증명되거나 반증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가용 증거와 추론을 통해 50퍼센트에서 먼 확률 추정값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북프리쿠키 2018-07-21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힘들었어요ㅎ
도킨스 이 사람~그래도 멘탈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 전 굳이 고르라면
4번을 ㅎㅎ

AgalmA 2018-07-22 16:20   좋아요 1 | URL
책 사놓고 꽤 묵히고 있다가 도선생 뽐뿌에 이번에 제대로 읽어서 좋습니다^^ 맞아요. 도킨스 멘탈 탐나요ㅋㅋ

저는 무신론이라고 하긴 좀 애매하게 선불교 같은 기타 종교 가치는 좋아하는 편이긴 해요. 이쪽도 사상적인 면에서 좋아하는 거지 신 존재에 대한 믿음 같은 건 아니고요. 그러니 기독교, 일신교, 다신교에 비한다면 강한 무신론이라고 해야 할.

페크pek0501 2018-07-21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 사려다 말았어요. 제가 읽은 책에서 많이 나오는 책 중 하나라서 꼭 제가 읽은 듯한 느낌이라서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게 중요한데요,) 빨리 읽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ㅋ

AgalmA 2018-07-22 16:21   좋아요 1 | URL
역사서나 인문서에서 본 내용들이 제법 나오는데 종교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볼 수 있어서 좋더군요.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나가는 이 투지와 집요함은 읽는 이에게 용기를 주는ㅎ!
빨리 못 읽으실 거 같음 이북 권장합니다. 이 책 저는 이북이랑 번갈아 봐서 더 빨리 읽은 거거든요^^
 
[eBook]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9
박민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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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2018 제9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모두를 ‘윤리’라는 스펙트럼에 모을 수 있다. 그래서 전체가 비슷비슷하게 느껴졌고 각각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음에도 기존에 비슷한 소재와 접근법이 있었던 게 겹쳐져서 신선도가 떨어졌다. 심사평은 9회를 맞은 이 상에 대단히 자부심을 내보였지만 이 7편의 선정이 심사 위원의 취향과 역량 탓인지 2017년 발표된 한국 단편의 역량의 바로미터인지 나는 의심만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피터 싱어는 『더 나은 세상』에서 2011년 철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데렉 파피트 《중요한 것에 관하여》(국내 미출간)를 언급하며, “이 책은 윤리적 객관주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궁금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적인 위협을”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말해주며, 우리의 내재적 욕망과 기호는 이성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파피트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1+1=2’가 참(진실)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그런 동기나 욕망을 갖고 있고, 미래에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는 무관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동기도 갖고 있다(비록 그게 항상 결정적인 동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자명한 규범적 진실이야말로 윤리학에서 파피트가 주장하는 객관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윤리적 객관주의를 반대하는 주요한 반론 중 하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지와 미혹으로 비난할 수 없는 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약 임마뉴엘 칸트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조차 우리가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행동에 이견을 보인다면, 과연 객관적 진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반론에 대한 대응으로, 파피트는 객관적 윤리에 대한 자신의 변론보다 훨씬 더 과감한 주장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이론인 칸트의 도덕 이론,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존 로크(John Locke),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및 현대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 스캔론(T. M. Scanlon)의 사회계약론, 그리고 벤담의 공리주의 이론을 살펴보면서 칸트의 이론과 사회계약론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수정된 이론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공리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의 한 가지 형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민정 「세실, 주희」는 ‘J-세실-주희’ 라는 세 여성이 민족주의와 젠더 사이에서 어떤 삶과 선택을 했는지, 그 속에서 상대가 원한 바 없는 어떤 곤경을 주는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성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유비적이고 주요 사건도 상동(相同)한다. 사대주의적이며 서구 문화의 향유자인 J를 동경하고 따르던 주희는 그녀와 함께 뉴올리언스 축제에 갔다가 어쩐지 J의 의도로 혼자가 되고 마는데, 마초적인 남성들에게 성 모욕을 당한다. 더 점입가경은 그때 자신의 영상이 ‘쌍년’이란 꼬리표로 포르노 사이트에 올라가 그녀는 이 해결을 위해 전전긍긍한다. J와 주희의 관계처럼 한류 아이돌 문화를 동경해 한국으로 온 세실과 직장 동료인 주희는 언어적 문화적 우위에 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해 왜곡해 받아들이며 살아온 세실을 주희는 우연찮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집회에 섞이게 만들면서 앞서 J-주희의 상황을 재현하고 만다. 뒷날 세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건 누구의 잘못이 될까. 옳고 그름의 경계를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진실의 본질은 뭘까. 파피트와 싱어의 고찰에서 보듯 우리는 각자가 가진 ‘윤리적 객관주의의 모호성’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킬 정답을 도출하기 어렵다. 이 단편의 해설을 맡은 이은지도 이 어려움을 잘 정리해 말했다.

 

“세실이 소녀상의 의미를 모르듯이 그 순간의 의미를 주희는 ‘모른다’. 이 무지한 투사의 이미지에 우리는 열광하는 동시에 곤혹스러워해야만 할 것이다. 주희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가 이데올로기에 대적하는 순간을 영원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세실, 주희」는 언제 어떻게 무엇을 향해 투쟁해야 하는지 안다고 착각하는 이 시대의 주체들이 처한 곤경을 가리켜 보이는 서사로서 값한다. 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우리를 비참하게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를 더욱 직면해야 할 것이다. 주희가 그러했듯이.”

본심 심사위원이었던 이장욱의 평도 귀담아 둘 만하다.
     

“박민정의 「세실, 주희」를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오늘날 소설이라는 장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공인된 사실을 재확인하고 알리는 일보다는, 그 올바름의 위태로움 속으로 들어가 더 예각화된 고통과 갈등을 마주하는 쪽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나는 이 단편이 그런 소설적 사유의 사례라고 느꼈다.”

 


『2017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대상 「고두」에서도 그랬지만 임현에게 ‘윤리’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의식이다. 이번 수상작 「그들의 이해관계」도 그랬다. 정의와 윤리 문제에서 꼭 거론되는 ‘한 사람과 다수의 죽음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게 옳은가’ 같은 문제가 등장한다. 한 여자(해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살아남게 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수해를 받은 이들은 안도에 그치고 만다. 한순간에 사라진 이 존재에 대해 유독 죄책감에 시달리는 두 사람이 있다. 여자를 고속버스 휴게소에 두고 떠나버린 운전기사와 해주의 남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운전기사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이전 선택도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주의 남편은 해주와 성격 차이로 인해 끝없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조목조목 거론하고, 해주가 여행을 떠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음을 이유로 밝히며 「고두」의 윤리교사처럼 기만적인 면을 드러낸다. 해주가 죽은 이유를 파헤치는 것조차 자기 위안을 위해서다. 물론 이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아버지 표도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피한 이반보다 윤리적 죄책감은 덜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해관계」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라서 우연이라고도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요소가 달랐다면 한 가지만이라도 달랐다면 그녀는 살았을까. 그래서 임현은 결정론적 물리법칙보다 확률적 양자역학 속 인간을 더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했다가 그중 가장 낮은 확률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되지 못한 무수한 또 다른 나를 떠올리다 보면 그들도 어딘가에서 지금의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나로부터 한참 떨어진 뒤에도 내가 되지 못한 것을 두고 후회하고 그것으로 소설도 쓰고 그러는 걸까. 진짜 그렇다면 거기도 뭐, 별거 없네. 그 별것 아닌 것으로 나를 너무 낭비했다.

   그럼에도 만약, 내가 나를 미리 알고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때도 나는 여전히 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의 나에게 조금 미안해진다.

   대신 미래의 나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늙어가면서 앓는 질병과 처방받은 약품의 성분으로 나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수도꼭지의 온도를 조절하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할 것이고, 매번 왼쪽부터 먼저 닳는 신발이라든지, 길 한가운데 버려진 양말 같은 것을 발견하며 이건 또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나 궁금해할 것이다. 어딘가 서로 닮은 것들을 바라보며 ‘너무 나 같네’ 하고 적적해하겠지. 아니더라도 내게 없던 장면들을 상상하고 나랑 비슷한 누군가를 등장시키며 무언가를 써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쓴 거의 대부분의 것들도 이미 그렇게 쓰인 셈이다.”
ㅡ 임현, 작가노트

우리는 이런 소설을 읽을 때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기 힘들어졌다. 이 사건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우리는 국민적 미궁 속에 빠져 버렸다. 누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어서 언제까지라고 할 수 없이 고민 속에 숙연해진다. 다수가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 너무 윤리 강요적일까.   
    


김세희 「가만한 나날」은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시뮬라크르(가상)에 함몰된 인간의 한 예를 보여준다. 경진은 블로그 마케터로 가짜 블로그를 만들어 첫 직장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자기 전공을 살린 만족감에 도취한다. 그런데 자신이 광고한 ‘뿌리는 살균제(옥시 사건)’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속은 줄도 모르고 외려 경진의 안부를 걱정하는 피해 이웃의 쪽지에 경진은 자기방어부터 생각한다. 혹시나 책임 소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 자신의 실수를 고민하고 상관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아무런 죄책감을 받지 않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행동도 상관과 다르지 않다. 속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정들었지만 자신의 과오가 남아 있는 블로그를 지워 버린다. 책임을 전가하기 쉬운 이런 사회 구조에서 현실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이런 선택을 자주 한다. 그러나 알고리즘으로 복잡하게 얽힌 콘텐츠 생태계처럼 아무리 지운들 우리는 살아오며 남긴 자신의 수치를 확실히 피할 수는 없다. 적성 갈등과 업무 무능력으로 퇴사했던 직장 동료를 우연히 만난 경진은 진실을 살펴볼 생각도 없이 가짜 블로그가 자기 적성에 맞는다며 우월성을 과시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깨닫는다. 정정하고 싶지만 동료는 이미 떠났다. 우리는 어디까지 부인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사과해야 하며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한계와 미진할망정 잠정 결론이라도 그을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매우 다른 윤리의 지형에서 헤맨다.
선정적인 작품으로 논란이 많았던 D. 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제목을 따와 경진이 만든 채털리 부인 블로그 얘기를 잠깐 짚고 가자. 이 작품은 숱한 에로물의 전범이 되기도 했고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지배 계급의 성적 억압과 위선을 잘 다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채털리 부인’은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경진에게 ‘채털리 부인’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 테지만 그걸 쉽게 가져왔고 쉽게 소비한다. 우리의 성과 욕심과 고민 없음이 의미를 지워버리는 결과만 남는다. 누구라도 이런 게 없을 리 있나. 이런 공통점은 서로에게 고백할 수도 없다. 세상은 그래서 가만-기만한 나날, 가만-기만한 사람들로 넘쳐나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생기면 외면하거나 도망치면서 홀로 삭이면서.
   


“그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볼 마음이 일지 않는 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ㅡ 김세희 「가만한 나날」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과 윤리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오는 현대 작가로 나는 필립 로스와 미셸 우엘벡을 바로 떠올린다. 이 수상 작품집을 읽으며 미셸 우엘벡을 자주 생각했다. 예술이 작품의 뼈대 모티프가 된 최정나 「한밤의 손님들」, 임성순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의 풍자성도 그렇고, 최정나의 ‘가족 해체’는 미셸 우엘벡 『소립자들』, 뉴에이지를 끌어들여 기괴하게 빠지는 『어느 섬의 가능성』의 시도가, 임성순이 보여준 ‘자본주의와 중심 없는 해체에 빠져든 예술’은 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가 떠올랐다. 특히 『지도와 영토』는 스위스에서 상업화된 안락사 소재가 나오는데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미 이런 접근과 고민들은 있어왔다. 없는 게 이상하겠지만. 최정나, 임성순, 정영수가 한국적으로 잘 요리했고 문체와 스타일이 다른 게 칭찬받을 점이라고 해도 예상되는 결말과 정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내 인상이다.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자기 과잉과 자기 함몰적인 기존의 퀴어물과 크게 차별성이 있지는 않다. 질주하는 욕망, 현실 부적응, 일탈 속에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로 끝나는 엔딩은 42년 전 나온 퀴어 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1976)에 비해 청출어람이 되지도 못했다. 박상영도 류를 의식했던지 작가 노트의 제목을 “한없이 평범한 날들”이라고 붙였던 게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타개점이 잘 보이지 않는 성소수자 처지, 한국적 상황, 현재 시대 반영 등을 감안해야 하는 것일까. 동시대적이라는 면에서 재미와 공감할 부분이 많지만 나는 이 작품의 ‘문학적 평범성’에 아쉬움이 많은데 신형철 평론가는 “‘실패를 반복하는’ 패기 넘치는 찬가”라고 격찬하니 생각의 온도차만 느낄 뿐이다.
또 짚고 싶은 게 심사 총평에서 신수정 평론가가 박상영과 김봉곤을 비교하며 박상영을 우위에 둔 너무나 주관적인 평가에 불만스럽다.

 

"나는 박상영의 내레이션에 푹 빠져 그가 풀어내는 기나긴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버렸지만 이 소설의 과잉에 질려버린 것도 사실이다. 이토록 많은 디테일들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소설도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일기나 페이스북 낙서처럼 휘갈기는 김봉곤의 스타일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두 사람 다 자전성이 많이 반영된 퀴어 문학을 보여주는 작가다. 퀴어 성향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 두 사람은 영화와 음악에 대한 관심도 많아 작품에 적극 활용하는 것도 비슷하고 둘의 등단 시기도 2016년이라 비교가 많이 되는 듯하다. 그러나 신수정 평론가가 김봉곤을 ‘일기나 페이스북 낙서처럼 휘갈기는 스타일’이라 폄하하며 박상영을 추어올리는 건 부당하게 보인다. (김봉곤이 신춘문예, 박상영이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 등단자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니길 바라며...) 김봉곤의 소설을 여러 편 읽어보며 김봉곤의 문체와 스타일이 그가 관심 가진 작가들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질의 비교는 제쳐두고 롤랑 바르트, 이인성 같은 작가들처럼 그의 소설에서 파편적이면서 단상적인 자조와, 스토리보다는 의식의 흐름처럼 가고자 하는 면을 자주 발견한다. 그런 작중 인물들을 통해 이성만이 아닌 심리와 정서를 자극하는 내밀하고 강렬한 문장들을 만나 한 방 맞고는 한다.

 

 


박상영과 김봉곤이 주류 문학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퀴어 파라 그런 거 같은데, 라이벌 구도로 만들지 않았으면 싶지만 인간 특징이 또 비교라...... 주목할 것은 해설을 맡은 노태훈의 말처럼 퀴어 문학은 자신만의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고, 다시 그 작가를 자연인으로서의 개인과 분리하여 예술가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층위를 나누어 예술을 분석하는 태도를 객관적이며 또 진보적인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비롯한 ‘미투 운동’의 폭발적인 전개 양상을 감안한다면 예술을 작품 그 자체로서만 평가하는 관점에는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럴 때 퀴어적이라는 것은 삶과 예술이 구별될 수 없다는 감각에서 특별해진다. ‘가짜’ 정체성으로는 ‘진짜’ 예술의 영역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가장 첨예하게 인식하는 집단이 퀴어이고, 그들은 그 진정성(authenticity)을 무기로 기존의 예술에 균열을 가한다.”

요즘 철학, 과학, 문학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두되는 경향이라든가 전 세계적인 화두라 할 수 있는 공동체의식과 분배, 성차별과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 ‘윤리’는 인류가 끝까지 고민하게 되는 문제의식 같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머무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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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7-20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은 작가상이라 현재 우리 주변의 과제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에 낯설지 않은 주제가 흥미롭습니다.^^:) 우리의 현재 이슈가 문학 작품에 녹여 들어가는 맛이 있을 것 같네요!

AgalmA 2018-07-21 03:06   좋아요 1 | URL
낯설지 않아서 좀 식상하기도^^; 제가 문학을 읽는 건 현실적인 걸 보려는 목적은 낮거든요. 그런 건 뉴스나 다른 책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라서...
 
울지도 못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3
김중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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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가 살아 있었다면 두 번째 순위였겠지만, 두 번째 시집을 기다린 시인 중 하나! <황금빛 모서리> 시집 읽은 사람치고 안 그런 사람 있었을까! 정말 기다렸어요. 오, 제발 맘에 들길! 책 산 지 얼마 안 되어서; 조만간 꼭 살게요! 맘에 들면 선물도 할 테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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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도 울지도 못하겠다😥 이 모습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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