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물쭈물의 대가 여행책 고민 장바구니

 

밤 사이 짐도 다 쌌고 책도 정했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를 제일 가져가고 싶었으나 무게 때문에 도저히... 그러다 보니 집에서 편안히 이 책 저 책 내 맘대로 맘껏 읽을 수 있는 여유 시간에 왜 반겨줄 이도 없고 먹는 것 자는 것 다 불편한 데를 굳이 기를 쓰고 가려는가 자문에 또 자문하다가 김연수 여행산문집  『언젠가, 아마도』 를 밤새 다 읽었다=_= 아, 졸려... 이러니 또 발목이 묶인다. 여행도 책으로 하려는 이 버릇을 어쩐다. 아무튼 내일은 정말 가긴 가겠지. 믿기지 않는군. 이곳이 아닌 다른 데서 외로워질 뿐일 텐데!

☆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리아나』

- 명문을 감상하며 내 생각도 정리해 볼까 했으나 명언 모음집이다 보니 문장들이 너무 짧아 흐름에 맡기는 여행엔 맞지 않다고 판정.

☆ 조르주 페렉  『생각하기/분류하기』
- 생각의 단초들을 하나하나 제공해줘서 아이디어는 좋은데 페렉 글 스타일이 피곤을 부르는 터라 여행보다 생각하다 심각해질 조짐 때문에 포기.

☆ 카를로 로벨리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 빨리 완독하고 끝내고 싶으나 여행에서까지 물리학 책을....참아줘.

☆ 가스통 바슐라르  『꿈꿀 권리』
- 여행길에 단골 친구, 바슐라르.

☆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아, 허수경.... 이젠 이 시인의 시를 정녕 못 본다니!

☆ 장 보드리야르  『무관심의 절정』
- 시니컬하지만 치열하게!

☆ 필립 로스  『사실들』
- 시니컬하지만 자신도 봐주지 않는!

☆ W. G. 제발트  『공중전과 문학』 , 『캄포 산토』
- 초대 1순위

☆ 레몽 드파르동  『방랑』
- 펼치는 순간 그래, 이거다!


 

 

 

 

 

 

 

 

 

 

 

 

 

 

 

 

 

방랑 비스므리 시작~

 

 

 

 

부산 첫인상 부산역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으나 나머지는 다 좋았다.
컨디션 불량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를 몇 편 못 봤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 데미언 샤젤 <퍼스트 맨>  먼저 본 것만으로도 만족. 개봉하면 또 보러! 강추!!! 3d나 4d 개봉이면 더욱 좋을 듯하지만 안 그러는 듯. 하긴 드라마가 더 강하긴 해서...
괜찮은 영화제 기프트 상품은 거의 조기 품절;





구석구석 아기자기한 카페, 인디 서점, 맛집... 바다....발길이 안 떨어지던 곳 가득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찍었던 걸 생각하며 내 발자국도 꾸욱.

 

 

 


번쩍거리는 거대한 빌딩 숲 아래 구조 튜브는 조난 상태

 

 

 

 

 

 

 

 

 

 

 

 

다시 돌아온 서울은 추웠다.

 

 

 

 

오늘의 책(10/12~13) -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여행 다녀온 허한 마음에 이 책을 읽은 건 더 좋은 일이었을까 더 아픈 일이었을까. 이틀에 걸쳐 내리 두 번 읽었다. 심정적으로는 별 다섯 개 만점 ★★★★★ 객관적 작품성으로는 ★★★★ 아, 참 절절했다. 최근 읽었던 플로베르 『감정 교육』, 김봉곤  『여름, 스피드』보다 더! 사랑의 파문과 지리멸렬함은 아무리 말해도 화수분. 줄리언 반스는 후벼 파더군ㅠㅠ

 

"나는 그녀 안에 공황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추측이나 했을까? 나는 그것이 내 안에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뒤늦게, 그게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우리의 필멸성의 한 조건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가라앉히고 최소화하는 예의 규약, 농담과 일상, 수많은 기분전환과 오락의 형식이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내부에는 터지기를 기다리는 공황과 지옥이 있다, 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그것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인간 조건과 그 만성적 슬픔에 대한 마지막 항의로서. 하지만 그것은 우리 가운데 가장 균형이 잡히고 합리적인 사람 안에도 있다. 그저 적당한 환경이 필요할 뿐이고, 그러면 반드시 나타난다. 그럴 때면 그것에 휘둘리고 만다. 이 공황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신에게 가고, 저런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고, 이런 사람들은 자선사업을 하고, 저런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이런 사람들은 감정적 망각에 빠지고, 저런 사람들은 다시는 심각한 일이 자신을 성가시게 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삶으로 간다."


 

 

 

 

오늘의 책(10/14) - 앤디 위어 『마션』

 

D-4
데미언 샤젤 <퍼스트맨> 전국 개봉을 앞두고 <퍼스트 맨> 원작인 James R. Hansen 『 First Man: The Life of Neil A. Armstrong 』을 읽고 싶었다. 데미언 샤젤 <퍼스트 맨> 영화에서 암스트롱의 딸 이야기가 강력한 펀치로 작용하는데 이게 실화인지 플롯 상의 각색인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국내 번역이 예약판매 상태! 야호!! 하지만 당장 읽을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앤디 위어 『마션』을 읽는다. <퍼스트 맨>을 본 뒤라 이야기에 더 몰입된다. 닐 암스트롱, 아폴로 11호 얘기도 나오고, 그간의 우주 개발 계획과 우주선 발사에 대한 전반적인 진행 상황 등을 대략 파악할 수 있게 해줘 재밌었다.

📎

"우린 달 착륙선을 아무 준비 없이 7년 만에 만들어냈습니다.”

"기분이 참 묘하다. 어디를 가든 내가 최초가 아닌가. 로버 밖으로 나가면? 그곳에 발을 디딘 최초의 인간이 된다! 언덕을 오르면? 그 언덕을 오른 최초의 인간이 된다! 암석을 걷어차면? 그 암석은 백만 년 만에 처음 움직인 것이다!
나는 최초로 화성에서 장거리 운전을 했다. 최초로 화성에서 31화성일을 넘겼다. 최초로 화성에서 농작물을 재배했다. 최초로, 최초로, 최초로 말이다!
내가 무엇에서든 최초가 될 줄은 몰랐다. 이곳에 착륙할 때는 MDV에서 다섯 번째로 내렸고 그로써 화성에 열일곱 번째로 발을 디딘 인간이 되었다."

"나의 모교인 시카고 대학에서 온 메일도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어디서든 농작물을 재배하면 공식적으로 그곳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나는 화성을 점령했다. 

보고 있나, 닐 암스트롱!?

하지만 제일 반가운 것은 우리 어머니의 메일이었다. 빤한 내용이었다. 네가 살아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마음 굳게 먹어라, 죽으면 안 된다, 네 아버지가 안부 전해달라고 하신다 등등."

 

데미언 샤젤 <퍼스트 맨>이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인, 앤디 위어『마션』이  '인류 최초' 의 화성인 소재가 이야기의 큰 축이긴 하지만 그들은 더 넓은 틀을 제시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 그 사이의 수많은 도전과 실패들을... 이 역사 속에서 보면 인간은 한 개인이 아니라 종으로서 살아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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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10-14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산 다녀오셨네요. ^^
<퍼스트 맨> 기대됩니다. ^^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10-14 20:59   좋아요 1 | URL
근데, 어쩜 이렇게 부지런하세요? 부럽...^^

AgalmA 2018-10-16 16:18   좋아요 1 | URL
책 읽는 걸로 따지면 북다이제스터님도 만만치 않은 분이시잖아요. 이번에 저는 책도 돈도 조금 포기하고 부산행을; 그런 걸 포기하고 돌아다니면 대체로 부지런해 보인다고 하시니 할 말이;;;
북다이제스터님은 <퍼스트 맨> 어찌 감상하실지 궁금하니 영화보시면 꼭 후기 남겨 주세요!

카알벨루치 2018-10-14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스트가 영화 같아요! 와우~

AgalmA 2018-10-16 16:18   좋아요 1 | URL
날 더 춥기 전에 님도 여행으로 영화 같은 순간을 잡아 보심은? 물론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요 ;)

북프리쿠키 2018-10-14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행과 책, 잘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책도, 여행도 온전히 집중 못하게 하는
상극의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이런 줄 알면서도 여행가방에 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권이라도 더 쑤셔넣습니다만 ㅎㅎ
전자책이 여행중에는 그 몫을 톡톡히 한답니다~~아갈마님 편안한 밤 되세요!

AgalmA 2018-10-16 16:2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말씀처럼 상극이죠. 책을 보고 있으면 풍경을 놓치고, 풍경에 취해 있다 보면 책은 눈에 안 들어오고ㅎ;
전자책도 많았는데 아무래도 물성이 있어야 책 읽기 행동을 취하기에 더 좋은 거 같아 늘 종이책을 챙기는데 점점 얇은 책을 챙기게 되네요^^;

북프리쿠키님도 잘 지내시지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뷰리풀말미잘 2018-10-17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색 아름다워요!

AgalmA 2018-10-17 18:44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처음엔 보라->라벤다->지금은 물이 많이 빠져서 브라운 애쉬....머리색 바뀌는 게 흥미로워서 염색이 재밌지만 재정적으로 힘드네요ㅜㅜ;
 

 

 

 

20189월 독서기록

 

📙역사

유시민 역사의 역사(2, 재독)

- E.H. 역사란 무엇인가』를 유시민이 10번 넘게 읽었다고 한 만큼 영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카처럼 원문 번역 비교 대조하며 꼼꼼히 설명하고, 여러 역사서의 맥락 비교력이 역사가 저리 가랄 정도로 냉철했다.

E.H. 역사란 무엇인가(재독)

- 3번째 읽어야 리뷰 쓸 엄두가 날 듯하다 ㅋㅜ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주 읽으니 정들겠다ㅎ♥

 

 

📙인문학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

곽재식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글 안 풀릴 때 머리 배선 조정한다는 생각으로ㅎ 한 번 읽어볼 만한 책

 

 

 

📙경제 경영

대도서관 유튜브의 신

-엄청난 노하우가 담긴 건 아니지만 유튜브 크리에이터 시장에 대해 대략 파악할 수 있었던 책. 
대도서관 인생사에 눈물 시큰. 집안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영화와 게임 같은 취미에 몰두했던 덕력 과정이 재능과 만나 지금의 '유튜브의 신'이 될 수 있었던!

 

 

 

📙사회과학/페미니즘

정희진 외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 민주화를 위해 싸웠으나 ‘실용주의적 신자유주의 노선’에 영합한 40대 남성(권김현영), 많은 이들이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멸시, 모욕, 혐오, 편견 조장, 증오 선동 표현을 무차별적으로 드러낸다. 저임금, 고용불안, 불안한 노후는 전 세계적인 고민거리인데, “강자와 기득권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소수자를 차별, 배제, 혐오하는 문제로 해결될 수 있다”는 듯이 인식하는 문제(홍성수), 정치와 종교 유착의 심화(한채윤), 같은 남성으로서 심리를 파악하고 맹점을 공격하는 서민과 손아람의 논의들이 특히 흥미로웠다.

 

김은실 외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 최근 유엔개발계획(UNDP)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성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에서 한국이 아시아 최고 수준인 1위와 세계 10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성불평등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인 ‘생식 건강/여성 권한/노동 참여’ 수치는 많은 것ㅡ저출산과 양육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환경, 여성 고용과 임금 차별, 정치 경제적 활동의 제약과 불평등, 여성을 대상화로 보는 내재적 문화가 촉발하는 많은 문제 등등ㅡ은 반영되지 않은 결과다. 이 책에서 다루는 쟁점이 바로 그런 걸 다룬다. “성폭력과 성매매, 군대 이슈, 소비 산업 시대에 상품화되고 착취와 공격에 취약한 여성들, 저출산 담론, 다문화 시대 이주 여성”이 그것이다.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재독)

- 2번째 읽었는데 역시 좋았다. 주관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성 견지와 통합적 통찰은 페미니즘 글쓰기에서도 대단한 힘이라는 걸 보여 준다! 남성 연대를 강조하는 서술에서 수전 팔루디 『백래시』가 여성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지적이 이해되는 듯도. 벨 훅스가 그걸 고려한 게 느껴진다.

 

📙과학

마이클 브룩스 우연의 설계

- 무작위성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에 붙이는 임의적 판단일 뿐이라는 것을 수많은 예로 보여준다. 꽤 좋은 책인데 호응이 별로 없는 게 의아.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스완』읽었을 때도 느꼈듯이 확률 통계 잡는 게 대단한 변수.

    

📙문학

조지 오웰 1984

- 여기저기서 '빅브라더'를 하도 많이 들어 안 읽거나 읽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책.
역시 말이 필요 없이 훌륭했다👍
매력적인 캐릭터, 묘사, 플롯, 문장력의 승부가 아니라 사상적 힘,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토록 훌륭하게 쓸 수 있는 작가는 정말 손에 꼽을 듯. 많은 소설과 영화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도 직감할 수 있었다. 읽는 내내 여러 영화 장면들이 무수히 지나감ㅎ

이승우 만든 눈물 참은 눈물

찬호께이 망내인

유진목 식물원

 

📙그림책

잔니 로다리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추석에 많이 읽을 줄 알았는데ㅜㅜ 꿈과 현실의 괴리

 

읽고 있는 중

 

📖미셸푸코 말과 사물(1/3)

- 이 달은 푸코의 달이라고 했는데ʖ̫・`);

 

📖터리스 휴스턴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1/2)

 

📖유발 하라리 극한의 경험(1/5)

 

📖Axt 2018.9.10 no.020(1/10)

- 정영문 인터뷰만 쏠랑 읽음ㅋㅋ

 

📖제프리 웨스트 스케일 : 생물.도시.기업의 성장과 죽음에 관한 보편 법칙(1/5)

 

📖맷 업슨 / C. 마이클 홀 / 케빈 커넌

어메이징 인포메이션 (만화로 배우는 정보와 검색의 모든 것) (1/2)

 

📖존 버거 벤투의 스케치북(1/5)

 

📖카를로 로벨리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1/7)

 

📖헨리 제임스 헨리 제임스(1/10)

    

 

...... 읽다가 죽을 이름이여;;

 

 

 

 

 

 

● 도서관 일지

책에 책이 꼬리를 물듯이 책 반납하러 가면 또 책을 안 빌릴 수가 없다.

ʕʔ

    

 ◇  역사 & 과학 : 유시민 추천서

유시민 작가 책에는 늘 추천서가 가득한데 이번 신간 역사의 역사에서도 역시나 왕창 있었다ㅎㅎ;

 

앤 커소이스 · 존 도커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 (작가정신)2013년에 나왔는데도 절판이라 도서관에서 빌렸다. 나머지 추천서도 차차 읽어볼 생각이다. 이 외에도 유시민은

📎

"사회생물학의 연구 결과를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적용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그 논쟁에 임하는 생물학자들의 입장을 보여 주는 책으로는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존 올콕 지음, 김산하·최재천 옮김, 동아시아출판사, 2013)를 추천한다."

📎

"국내에 소개된 인류사 책이 둘뿐인 것은 아니다. 읽을 만한 다른 책도 여럿 있다. 예를 들어 빅히스토리(신시아 브라운 지음, 이근영 옮김, 바다출판사, 2017)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패멀라 D. 톨러 지음, 안희정 옮김, 다른출판사, 2014), , 사피엔스못지않은 과학적인 태도로 인류사에 대해 풍성한 정보를 전해 준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서사의 매력이 충분하지 않은 탓에 기대만큼 대중적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 사진

사울 레이터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계속 읽고 싶었는데 여유가 없어 못 보고 있었다. 마침 도서관에 있길래 좋아라 하고 빌렸다💕 역시 멋지다! 내가 나에게 선물해야 할 거 같은😅

 

    

 

 

● 또 유발 하라리야 : 유발 하라리 『대담한 작전』
국군의 날 10월 첫 책 제목으로 딱이얌!

ㅎㅎ 예상대로 일반 독자 대상 책이라고 하기엔 진입 장벽 있다. 그럼 책 포복 전진 잘 하는 특수 독자 대상-_-? 일반 독자를 생각해 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놨지만
대단한 스토리텔러인 유발 하라리라도 전쟁사 얘기는 역시 지루한 감이 있다ʕ-ᴥ-ʔ 먼 나라, 그것도 1050년 대까지 내려가니 더 그렇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 전공이라니까 봐 줘야징~

중세 하면 군사적으로는 명예로운 기사도를 떠올리지만 터널 효과처럼 그걸 집중해 보기 때문이다. 실상은 속임수, 배신, 뇌물, 암살, 기습 특수작전이 난무했다는 게 이 책이 주로 다루는 것. 그때는 특수작전이란 개념이나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전쟁술로 묶여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고, 남아 있는 당시 기록이 한정되어 재구성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하라리는 그런 공백을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공주를 구하는 용맹하고 의리 넘치는 기사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퍼트린다.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진다. 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더 이어지지 않았을 테고 지금의 역사와 아주 판이했을 거다. 이런 가정은 이미 소용없는 거지만.
내가 움베르토 에코 『중세 1, 2, 3, 4』를 다 읽는 날이 올까....

 

📎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특수작전을 연구하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전쟁에서 사람들이 바라던 일과 실제로 해낼 수 있었던 일의 한계를 일부 알아볼 수 있다.
특수작전은 특히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기사도와 군사적 현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이상적인 소재다. 이 주제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전쟁사 연구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위징아와 킬고어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기사도 문화가 당시의 군사적 현실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사작전 수행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했다고 주장한다. 군주들과 기사들은 입으로만 기사도라는 이상을 주워섬기며 전쟁의 끔찍함을 그럴싸하게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데 이용했다. 전쟁과 기독교 사이의 틈을 메우는 수단, 가신들에게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수단으로 기사도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이상이 승리에 방해가 될 때마다 기사도의 제약은 옆으로 밀려나버렸다.
반면 최근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사도 문화의 지속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기사도가 전쟁의 적절한 가치관과 규범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전투원들은 여의치 않을 때에도 이런 규범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가 많았으며, 기사도에 따라 ‘반칙’으로 규정된 행위를 자제하려고 했다. 비록 승리가 가져올 엄청난 이득 때문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규범을 악용하거나 어기는 전투원들이 종종 있었지만, 규범을 떠받치는 가치관 자체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드물었다. 특히 기사도의 이상인 명예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통틀어 귀족 남성들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자 중요한 군사적 가치라는 자리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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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04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군의 날 ...<대담한 작전>! 이런 재치는 어디서 획득합니까? 존경합니다~

AgalmA 2018-10-04 00:36   좋아요 1 | URL
유발 하라리 책을 짬짬이 읽고 있어서 마침 10/1이 국군의 날이라 <대담한 작전>을 더 담대하게 읽어보기로 했죠^ㅅ^);
존경은 저한테 올 것이 아닌 거 같으니 자진반납할게요ㅎㅎ;;

blanca 2018-10-04 0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일목요연하게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셨네요. 저는 독서기록 앱 쓰다 다이어리에 적다 중구난방이라 결국 이도저도 아닌 상태랍니다. 엄지척 이모티콘 너무 귀여워요^^

AgalmA 2018-10-04 16:13   좋아요 0 | URL
저도 다이어리랑 저 달력 앱이랑 같이 쓰는데요. 저도 나름 디지털쟁이가 되어서 그런가 쉽게 이미지를 첨가할 수 있다 보니 종이 기록보다 앱 기록이 더 편하네요^^;;
이모티콘도 그렇고 귀여운 건 다 좋아요ㅋㅋ

단발머리 2018-10-04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발 하라리~~ 자주 읽으니 정들겠다 ㅎ

너무 부러운 문장이예요~~
전 아직 시작도 못 했...
AgalmA님 페이퍼는 언제 봐도 근사해요. 달력앱도 사진도요~~~^^

AgalmA 2018-10-05 20:0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도 열심히 읽는 분야, 작가 있으시잖아요~ 전 필립 로스에 언제 푹 빠질지ㅎㅎ;;
매일 기록을 남기려고 하다 보니 사진이 늘 한가득입니다; 글만 보는 건 제가 먼저 좀 지루해서^^;;
 
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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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질서가 참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어떤 이는 글을 쓰고 어떤 이는 음악을 듣고 어떤 이는 총을 쏜다. 나는 소심하면서도 완강하게 연도와 날짜를 적지 않고 일기를 써나간 적 있다. 계절 얘기나 특정 사건 때문에 대략의 시간은 추정할 수 있어 완벽한 미스터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2018년인데 2008년이라고 찍힌 다이어리에 쓰고 있었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 한 300년 뒤 이 다이어리를 누군가 발견한다면 이 기록을 2008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용 표시 같은 걸 하지 않고 책의 여러 문장들을 내 꿈과 생각과 합쳐 적어 놓았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10년 뒤 글을 쓴 당사자인 내가 봐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앞뒤 인과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 또는 '사실'은 우리 기대설정에 지나지 않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생각과 상상을 쏟아내고 실현하는 이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을 떠올린 순간부터 인간은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더라도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그들을 생각한다. 성 정체성도 평생의 족쇄로 따라다닌다. 이런저런 구분의 질서 속에 있는 한 내가 라는 인식은 늘 불만스러운 좌표 위에 있다. 반문도 따라 나온다.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가.

 

배수아는 근간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도 질서가 아니라 시간과 자아의 철저한 망각을 실험한다. “바늘 없는 시계의 세계에서, 사라지고 죽는 일은 너무 흔해서 지워지지도 않아 한 번도 없었던 일처럼 일어나고, 꿈과 과거-현실-미래와 이야기가 트럭이나 문, 교수대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계 없는 시공간이 펼쳐진다. 당연히 주인공도 특정한 사건도 없다. 같은 이름의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겪는 일들로 가득해 AB여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살면서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난 적 있다. 흔한 이름이라면 좀 더 씁쓸해 하면서.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일도, 누군가가 죽는 일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다들 겪는다. 그것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내가 겪는 특별함이자 기억이기 때문이다. 배수아는 여기서 다시 비튼다. 이해할 수 없이 공유되는 특별함을.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여자는 오래전에 떠났던 할머니의 양철 가방을 벼룩시장에서 발견해 그 가방과 함께 자신도 여행 중이다. 어느 날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이해할 수 없는 반두어로 적힌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그녀대로 이 편지를 이해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반두어를 들었을 뿐인 잭도 편지 낭독을 듣고 그 나름대로 이 편지를 이해한다. ‘낭독은 배수아 작가가 여러 소설에서 쓴 소재인데, 언어와 음악의 결합 같은 이 방식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인류의 소통 방식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 당신이 소리 내어 읽은 그 언어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어요. 어쩌면 내게는 선험적 말이고, 말 이전의 말이었는데! 제안을 하긴 했지만, 크게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꾸며대서 당신을 웃겨볼 생각이었던 거예요. 정말로 내가 온전히 이해하리라고는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이해를 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도저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요. 그건, 그건 당신의, 아니, 당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어쩌면 당신 할머니일 수도 있는 소녀의,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매우, 아아 답답해 미치겠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언유주얼한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더욱 놀랍습니다.”

잭은 충격과 감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서 이어서 말했다.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p265~266)

 

작가가 문학작품을 쓰고 독자가 그 책을 읽는 과정도 위와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을 누군가 글로 보여줬을 때의 쾌감과 공감, 강렬했지만 구체적으로 복기하지 못하던 꿈을 실제로 만났을 때의 기시감 같은 것 말이다. 현실에서는 기억을 못해 실수를 하거나 꾸지람을 듣거나 봉변을 당하기 일쑤지만 꿈을 기억하지 못해 그런 일을 당하는 일은 없다. 꿈에서 나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이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오직 나 하나다. 사실과 환상을 모으고 설치하는 문학은 현실에 틈을 비집고 공유할 자리를 만든다. 많은 작가들처럼 배수아가 제시하는 잔상들은 그로테스크한 악몽의 이미지들이다. 아이들이 극히 비극의 대상인데 누군가 쉽게 훔칠 수도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존재이다. 여왕에게 잡혀가지 않게 소녀들은 남자아이로 살거나 검은 아네모네즙 때문에 눈이 멀고 야만인 흉노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급기야 처형당하기도 한다. 질서의 대행자 남성들은 위로는 사령관, 경찰, 의사, 아래로는 교사, 역장, 눈표범 조련사, 돼지 장수, 살인자 등 타인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역할을 하다 사라진다. 얼이에 대해서의 얼이처럼 빨리 죽거나 1979의 남교사의 히키코모리 남동생처럼 편지를 쓰면서 눈에 띄지 않게 살지 않는 이상 그들은 대체로 그레이하운드 사냥개처럼 당당하다. 반면 여성들은 적당한 자리가 없다. 의탁할 곳 없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꼭 아버지에게 물어보려 하고 버림받아도 아버지를 찾아가고 아버지가 사령관이길 바라는 여자아이, 미친 자, 아이 낳는 자, 아이를 잃는 자(남성이라면 부하를 잃는 자, 노인 울라에서), 강간당하는 자, 죽임을 당하는 자, 여승, 갈 곳 없이 떠도는 자, 사라지는 마술을 하며 살다가 정말 사라지는 자로 부유한다. 유일하게 분명한 역할이 있었던 뱀과 물에 나오는 여교사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삶을 산 끝에 죽음을 꿈꾸는 파괴적인 몽상을 하면서 그렇다면 어디로를 되뇌며 사직서를 쓰고 있다.

 

배수아가 펼쳐놓는 이 이미지들의 나열과 중첩에서 여성으로 산 시대적 감수성을 제거하고 읽기란 힘든 것 같다.

우선 이 단편들 속에는 이국적인 것도 조금 끼어 있지만 대체로 작가가 자라온 시대, 정서적 매개물을 보여주는 사물들과 호칭으로 가득하다. 이 단편들이 어린 시절을 다루기에 더욱 그렇다. 작가가 상상하고 재구성한 어린 시절이면서 작가가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이기도 하다. ‘우물, 두레박, 서커스, 고아원, 철봉, 전신주, 담배가게, 모래를 실은 손수레, 바구니를 이고 등에는 아기를 업은 아낙네들, 함지박을 옆구리에 낀 식모아이들, 돼지 장수, 등받이가 높고 따르릉 소리나는 화물용 자전거, 굵은 설탕을 뿌린 달콤한 도넛, 달걀 행상 노파, 무당, 초가집, 보건소, 기찻길, 주름진 함석지붕을 얹은 길가의 오두막등등. 이것들은 이제 많이 사라져서 오래된 동화 같은 분위기로 이 소설의 독특한 정서를 만든다.

여성 작가라는 관점에서는 어떤가. 여왕이 일곱 살이 넘은 여자아이는 잡아가지 않기 때문에 일곱 살 이후로는 여자아이라는 정체성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아버지를 찾아가는 눈 아이 이야기는 여러 단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깔려 있다. 얼이에 대해서에서 아이는 동급생 얼이, 여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누나가 주는 흰색 원피스를 받으며 여왕 얘기는 더 이상 믿지 말라는 훈계를 듣는다. 도둑 자매에서 아이는 가짜 언니에게 납치당한 뒤 가짜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낡고 검은 광목 원피스 차림에 가방을 들고 어린 시절과 작별하며 집을 떠난다. 1979에는 분홍 원피스를 입은 키 큰 소녀를 어려워하는 동급생 남학생들과 달리 성적으로 끌리는 성인 남성이 여럿 나온다. 작가는 이 시기에 아이들의 정체성이 갈리는 풍경 묘사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정전기를 일으키는 비슷비슷하게 거칠고 건조한 천에 싸인 채 흐릿한 몸 냄새를 풍기는 여든한 개의 작은 육신이 두 종류의 무의식을 주장하며 교사를 사이에 두고 마치 길처럼, 두 갈래로 나뉘었다.”(p85)

남교사의 남동생은 성 정체성의 갈래만이 아니라 아이와 성인의 갈래도 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p94)

남동생의 말처럼 이 소설 속의 아이들은 실제 시간 속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기억 속 아이들이고, 여러 시공간을 넘나드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며, 작가가 형상화한 아이들이다. 자의식 이후 어린 시절을 포획물로 남겨둔 자들에 대해서는 뱀과 물에서 언급하고 있다.

 

어린 시절도 일생 동안 지속될 너울거림을 불현듯 멈추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p223)

일기나 글쓰기는 기억을 구체화함으로써 성장과 치유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아직 를 내세우지 못하고 기어 다니고 세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절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이렇게 아직도 한참 쓰고 읽고 말하고 있다. 가방도 매일 지니고 다닌다. 대관람차가 허공의 같은 자리로 돌아오듯이 내 방에 매번 돌아오면서도 여행자 같다. 바늘 없는 시간인데도 빠르다, 느리다, 늙었다 하면서 우리는 삶을 더 사는 망상, 죽음을 더 늦추려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망상을 돌리는 윤활유는 대체로 욕망 아닐까.

내가 라는 감각을 가장 극도로 느낄 때는 삶 속에서가 아니라 죽음에 다다를 때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듯 이 책의 여러 단편에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은 다양한 겹으로 펼쳐진다. 이 경향은 작가가 내비치는 세계관과 연관된다. 도둑 자매의 끝 문장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뱀과 물에서 이어지는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라는 문장은 대조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간을 비순차적으로 여기는 인식 속에서 상상과 실재는 서로의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힘과 신비에서 동등하며 동시적인 가능성을 지닌다.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다. 명확한 서사를 강조하는 질서의 세계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바로 무너지지만 배수아가 그려내는 동시성의 세계는 끊임없으면서 불쑥불쑥 이어지는 세계다. 폭력과 불협조차도 이 세계에 있어야 할 조건이다.

읽고 쓰고 말하며 매일 경험 속에 있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비친 것만 더 심하게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잘 보고 있는 것일까. 정면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자신의 뒤통수를 평생 상상으로만 채우는 우리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내리는 비와 눈과 빛과 어둠 속에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가. 어디에도 보낼 수 없는 신비한 말들을 이렇게 묶으며 배수아는 자신의 갈래 길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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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03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뱀과 물」을 못 읽었지만, AgalmA님 글을 읽어보니 언어, 시간, 보편성, 특수성, 경계라는 단어들이 떠오르네요. ^^:) 제겐어려운 작품임을 확인하고 가볍게 패스~.

AgalmA 2018-10-03 23:41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읽는 책 보면 제가 더 어려워할 책이 많던데요-,.-)...어려운 건 둘째고요. 두꺼워서 저 같은 싫증쟁이가 참기 버거운ㅎㅋㅎ;

2018-10-14 2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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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4 2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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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6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7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8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7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 1일 1사진 - 2018 추석의 기억할 만한 지나침

 

언제나처럼 미적거리다 늦게 타는 바람에 예매 좌석도 아닌 데 앉아서 참 불편하게 책을 읽어야 했는데ㅜㅜ
미셸 푸코 『말과 사물』 (나남출판)
푸코 책은 펼칠 때마다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의 주요 저서는 꼭 소장해야 할.


배수아 『뱀과 물』 (문학동네)
한밤에 갑자기 응급실 갈 일이 있어서 챙겨 갔다. 한밤 소설로 good
타인의 고통엔 늘 속수무책이지. 비까지 오는 터라 책이 눈에 잘 안 들어와 의자에 앉아 휴대폰으로 소설을 썼다. 완성해보고픈 단편이다.

 

 

올라올 때
김은실 외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휴머니스트) 읽고 있었는데 대각선에 책 보는 사람을 발견!
어떻게든 책 제목을 알아내려고 틈틈이 엿봤는데ㅋㅋ 이종헌 『우리가 미처 몰랐던 터키 역사 기행』을 주무시느라 많이 읽진 못하셨지만 밑줄 치며 읽고 계신 모습에 흐뭇.  나는 반 정도 읽었는데ㅎㅎ

작년 추석에는 옆자리 사람이 최은영 『쇼코의 미소』를 읽는 거 보고 경쟁심이 발동했었는데ㅋㅋ 



 


명절엔 어딜 가든 북새통에 떠밀리다시피 걸어야 하는 게 너무 싫지만 가자시니 가야 한다ㅜㅜ 이런 와중에도 재밌는 걸 찾아야 돼! 하며 걷다가 바닷가 불상 옆에 비둘기들이 갈매기처럼 나는 걸 보고 빙긋~

 

 

나는 가족사진 몰래 찍는 걸 좋아하는데 이번에 괜찮은 사진이 생겼다. 식사하는 내내 내리쬐던 빛을 잊지 못할 거야. 누룽지 해물탕은 별로였어.

 

 

 

● 책으로 노는 장난

 

지난 번에 산 Penguin book collection 'Virginia Woolf ㅡ A Room of One's Own Book Bag'도 그렇고 나 요즘 보라 몰입 중ㅎㅎ;

날이 갈수록 보라 염색물 빠지는 게 너무 아쉽다.
최대한 안 감으려고 노력하는데 안 감는 것도 스트레스;
보이는 것이 실재가 아닌 걸 알면서도 사로잡혀 있는 존재. 하이데거는 동물을 세상에 얼이 빠진 존재라 하여 '동물은 '세계 빈곤'으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다른가.
하이데거는 인간이 대상을 대상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세계 형성'으로 존재한다고도 했지만 자기 논리에 더 빠져 있어 더 심각한 건 아닐까.

카를로 로벨리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 내가 산 책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
세계질서 재편의 핵심 변수는 무엇인가』
ㅡ 유시민 『역사의 역사』 읽으면 책 굴비가 주렁주렁 걸리는데 종이책이 있어도 완독을 못 해서 전자책 구매.
매달 김영사 책 2~3권은 사는 듯ㅎ 딱 내 취향 출판사ㅋ

☆  애덤 아다토 샌델 『편견이란 무엇인가 :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가다머로 이어진 편견에 관한 철학 논쟁을 다시 시작한다』
ㅡ 어느 해 추석 때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구매한 종이책으로 읽다가 다른 책에 밀려 완독을 못 해서 전자책으로 다시 도전!
와이즈베리 출판사 책도 자주 보는군. 이렇게 열심히 사는 데 안 걸리면... 그냥 내 취향 탓을 하자;

☆  김민영 『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인플루엔셜)
ㅡ 복잡한 수식이 없다길래 냉큼ㅋ. 수학은 알고 싶고 어려운 건 싫고ㅎㅎ)

 

☆  알라딘 9월 굿즈 - 본투리드 만년필 HEXA 차콜 블랙 E / 버건디 EF 비교
이 달 내 목표는 본투리드 만년필 두 개를 다 가지는 것!
비교해보니 음, 역시 색깔은 차콜 블랙이 좋고 필기감은 EF가 좋은 것으로 내 나름 판정✒

 

 



필사 아니다! 미셸 푸코와 이승우 문장이 비슷한 사유를 보여줘서 만년필 테스트를 위해 못생긴 필체로 적어봤다; 이승우 작가 책 제목을 엉뚱하게 적어서 다시 쓸까 하다가 귀찮아서 걍~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는 …(중략) …이 경이로운 분류에서 누구에게나 난데없이 다가오는 것, 교훈적인 우화의 형식 덕분으로 우리에게 또다른 사유의 이국적인 매력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갖는 한계, 즉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적나라한 사실이다."

ㅡ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중

 

"그들이 이해하게 된 그것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ㅡ 이승우『만든 눈물 참은 눈물』 중

 

이승우『만든 눈물 참은 눈물』책은 서재민 그림이 인상적이다. 최근 본 삽화 중 가장 맘에 든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 느낌도 나고. 소설은 평이하지만 그림 때문에 소장 욕심이 난다. 선물책으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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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9-29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향 잘 다녀오셨어요?^^

AgalmA 2018-10-03 22:38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도 잘 보내셨나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연휴가 생각보다 짧더군요;

목나무 2018-09-29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이 빠진 연보라빛 머리카락도 이쁩니다. ^^
그 와중에 무민 마그네틱 자석보드를 봤네요. 나는 하나뿐인데.. 하면서.. 부러워를 외칩니다. ㅋㅋ

AgalmA 2018-10-03 22:40   좋아요 0 | URL
후후... 무민 메모보드 2개나 뭐 하러 하면서 절 탓하면서 사긴 했는데 사무실이랑 집에 나눠서 쓰면서 생각보다 유용하네요ㅎ;
머리 색깔이 특이하면 눈에 더 잘 띄기 때문에 더 모범적으로 살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_-); 머리만 일탈)))

책읽는나무 2018-09-29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머리색 맘에 드네요!!!
헤어스톼일도~~~^^
갑자기 머리 확 자르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저는 흰머리 염색을 또 하러 가야하는뎅~~ㅜ
참,
저도 이승우 작가의 ‘만든 눈물 참은 눈물‘꽤 흥미롭게 읽었어요.
삽화에 꽤 눈길이 머물렀었구요^^

AgalmA 2018-10-03 22:41   좋아요 0 | URL
컷 한 번 하기 시작하면 기르기가 쉽지 않아서 이젠 슬슬 기르고 싶어도 어렵네요ㅎ; 그러니 참으세요ㅎㅎ))

이승우 작가 책은 저는 이 책이 처음인데 음... 기대했던 거보다 별로였어요;

보슬비 2018-09-29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라색 머리~~ 전 머리결이 얇고, 두피 민감해 염색을 하지 못해요. ㅠ.ㅠ;;
제 인생에 염색은 딱 한번 해봤는데, 이제 곧 새치 염색은 할것 같아요. OTL

AgalmA 2018-10-03 22:43   좋아요 1 | URL
흰머리 신경쓰여서 과감히 염색을 하니 더 어려보인다고 하던데요ㅎㅎ
두피가 민감하고 머리카락 얇으면 힘들긴 하죠^^; 제 머리털이 염색을 견뎌 주는 머리카락인 것도 복이네요ㅎ;

페크pek0501 2018-09-30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작가는 <생의 이면>이 좋았습니다. <사랑의 생애>는 그것에 못 미친다고 봤어요.
잘 지내시나요?

AgalmA 2018-10-03 22:44   좋아요 0 | URL
오, 안 그래도 이승우 작가 책 뭐 하나는 더 봐야 할텐데 했는데 <생의 이면> 기억해 둘게요. 감사요.
특별히 하는 거 없다 해도 하루가 늘 짧네요ㅡㅜ;

겨울호랑이 2018-10-03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라돌이 뚜비 라나 뽀~라는 전설의 노래가 생각나네요♪♬ ^^:)

AgalmA 2018-10-03 22:44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보라돌이 소리 안 들을라고 코디 신경 쓰다 보니 흰머리 더 생길라고 그래요ㅎㄱㅎ;;
 
식물원 아침달 시집 2
유진목 지음 / 아침달 / 201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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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흑백사진이 49페이지에 걸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사람의 일생 혹은 여러 사람의 인생이 겹쳐 있다. 마지막 두 장은 종려나무 사진이다. 그리고 시가 이어진다.

 

 

 

 

21

종려나무가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고, 그중에 어떤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는 자주 고개를 숙였고, 남몰래 주먹을 쥐었고, 그러다 하품을 하였고, 이대로 끝이 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지루함을 견디며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다른 것이 아닌 그는 종려나무인 것이 좋았다. 길고 가느다란 잎과 뾰족한 끝이. 찌르기 전에 꺾이는 무력함이. 천천히 말라가는 목숨이. 때로 휩쓸리는 삶이. 여럿이 모여 있으면 징그럽기도 한 것이 좋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도 그는 어깨를 움직여 그것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바람이 부는 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속이며 계속해서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어떤 사람은 종려나무 아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떤 사람은 휘파람을 불었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그는 불면에 시달렸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가까스로 잎사귀를 모으고 잠이 들었다. 그럴 때 함께 밤을 지샌 바다도 그랬다. 뒤척이다 뒤척이다 나중에는 돌아누울 힘도 없어 보였다. 그는 바다에 있을 때보다 산에 있을 때 자신을 건강하게 여겼다. 다시 한번 떠나기에 앞서 깊은 숨을 쉬었다. 그는 잠자코 서서 바다의 종려나무에서 산의 종려나무로, 낮의 종려나무와 밤의 종려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시 전문)


   
이 시집을 읽으며 다른 종려나무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졌다.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1991).

어렵게 찾아갔는데도 친어머니가 만나는 걸 거부해 돌아가던 아비. 아비는 종려나무숲을 한참 걸으면서 친어머니가 궁금해할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이 애증의 시퀀스와 묘하게 어울리는 시가 이 시집에도 있다.
   
   

24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는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어머니는 베란다에서 벤자민에 물을 주고 있다. 나는 어항의 물이 줄어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어머니, 물이 줄어든 것 같아요. 어머니는 벤자민에 주고 남은 물을 어항에 따랐다. 어항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손자국이 남잖니.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의 벤자민은 길고 두껍고 무성했다. 어쩜 이렇게 잘 자랐을까요?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래요. 어떨 땐 좀 징그럽더라구요. 그래요? 어떨 땐 그래요. 마냥 좋지만은 않아요. 나는 벌써 얼마나 죽였는지 몰라요. 벤자민을 죽인 사람은 나뿐일 걸요. 나도 처음엔 여러 번 죽였어요. 자꾸 죽으니까 싫더라구요.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나 싶고 왜 그렇잖아요. 어머니는 벤자민 바구니를 천장에 매달 때 발꿈치를 들어 키를 높였다. 어머니, 제가 걸어 드릴까요? 어머니는 괜찮다고 말한다. 나중에, 나중에 해주렴.

그때는 집에 어항이 있었다. 다른 집에도 어항이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물고기는 한 마리만 남아서 구석에 가라앉아 있었다. 모서리를 두드리면 조그만 입을 뻐금였다. 언제부터 이랬니? 모르겠어요. 이제 곧 죽겠구나.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는 다시 떠나고 싶었다.

(시 전문)



아비와 친어머니’가 끊을 수 없는 에토스(이 글에서는 ‘어느 사회 집단의 특유한 관습’이라는 뜻으로 씀)적 관계라면, 함께 시계를 보며 1분을 공유한 뒤 짧은 기간 연인이 된 ‘아비와 소려진’은 파토스로 묶인다. 아비에게 버림받고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복도에서 거리에서 서성이던 소려진. 그리고 아비는 그녀에게서도 이 지상에서도 영영 사라진다. 소려진을 사랑했던 경관이 우연히 아비의 임종에 있었던 광경까지 이 시집에도 《아비정전》의 첫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다른 버전 같은 시들이 있다.   
   
   
   

28

형광등의 불이 두어 차례 깜빡인다.

제가 고쳐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들어 형광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런 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제 돌아가 달라고 말했습니다. 돌아가요. 다시는 오지 말아요. 그때는 왜 그랬을까요? 그는 싸구려 볼펜의 머리를 딸깍이고 있다.

방은 이따금 어두워졌다가 밝아졌어요.

여자의 인중은 깊고 노여웠습니다.

그런 건 절대로 잊을 수가 없더군요. 갈라진 모양이 불길했어요. 어떻게 하면 자신을 전부 맡길 수 있을까요? 이제 나는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그는 손이 가는 대로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 그런 뒤 비가 왔을 겁니다. 여잔ㄴ 노랗게 질린 얼굴로 울면서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지나쳐 갔어요.

(시 전문)



25

그해 여름에 그는 옆 방에 사는 남자가 궁금했다. 랜드로바 봉투에 든 와이셔츠를 보고 이런 건 이제 필요 없다며 돌려 보내는 걸 본 뒤로

여자는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서 있었다. 한참을 그러더니 영수는 잘 있어요 하고 울먹였다.

그는 여자가 랜드로바 봉투를 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도 보았다. 플라타너스 아래로 버스가 오고 버스가 가고 여자는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그는 방에 누워 영수는 잘 있어요 하고 말해보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옆 방이 비어 있었다. 그는 그가 영수에게 갔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영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하고 방문을 닫았다.

어쩌다 미친 연놈을 들여가지고. 씨팔. 문에 귀를 대고 서 있었다.

여름이 끝나면 죽을 것이다.
매미처럼 울다 잠이 들었다.

(시 전문)


 
《아비정전》은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아 외로움을 겪었음에도 타인에게 같은 아픔을 주며 모두가 징그럽게 모여 있으면서도 무력하고 뾰족한 자신의 잎을 감출 수 없이 종려나무처럼 존재하던 영화였다. 한 시대의 독특한 감수성, 청춘에서 전체 삶으로 확장되는 삶의 고통과 구도적 고행을 보여줬던 왕가위와 또 겹치는 종려나무가 있다. 헤르만 헤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발표했다. 유명한 작가인 그가 굳이 익명으로 책을 발표한 이유는 자신의 명성과 위치를 내세워 말하기보다 동년배가 말하듯 젊은이들의 정신적 방황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싶어서 였다고 했다.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명문장과, 《아비정전》에서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곤 한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라는 명대사는 어떤 흐름을 짐작게 한다. 헤세의 작품은 고독과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지만 1900년부터 죽음에 이른 1962년까지 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과 에세이에서 젊은이의 정신적 방황을 공감하고 위로하고자 한 작가 의도도 고려해야 하고, 고행 속 종교적 해탈을 자주 그렸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으려는 희망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저 대사는 초극 의지가 느껴진다. 20세기의 헤세와 달리 21세기로 넘어가는 즈음의 왕가위 작품은 그런 초극성을 꿈꾸지 않는다. “발 없는 새” 대사를 한 뒤 장국영이 그 유명한 맘보춤을 추듯이 꿈과 희망은 저 먼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 《아비정전》의 또 다른 명대사처럼 말이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됐으니.”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서 무수히 변조되지만 바로 그렇기에 가장 기억하려는 것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영원의 속성을 지닌다. 기억 작용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27

잘못 기억하는 거예요. 나는 그런 적이 없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자꾸만 나보고 그러는 거예요. 정신을 차리라고. 천벌을 받는다고. 보세요. 내 손을 가져다가 자기 목을 이렇게 해요. 차라리 죽이라는 거예요.
(중략)
여자는 간다고 말하고 싶었다.
기다리지 말라며 문을 닫고 싶었다.

(시 부분 인용)


  
이 시집을 여는 문장은 이렇다.
“이른 아침 그는 식물원으로 들어갔다. // 해 질 녘 그가 식물원에서 나왔을 때는 / 전 생애가 지나버린 뒤였다.”
  
식물은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꼴을 나타내는 프랙털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생명력의 강인함과 순환을 보여주지만, “발 없는 새”가 있을 수 없듯이 물과 대기와 빛 없이 살 수 있는 식물도 없다. 식물은 식물로서 슬픔을 표현할 테지만 인간은 슬픔을 소설로 시로 영화로 모든 수를 동원해 가장 강력하게 인간으로서 표현하며 사라진다.       


32

살면서 가장 슬펐을 때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사람은 왜 그런 걸 궁금해하냐고 해요. 나는 몇 번 째냐니까 몇 가지 떠오르는 일이 있나 봅니다.

무슨 생각해?

그는 가지 끝을 떨구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너처럼 고운 빗을 가지고 있었어. 그걸로 내 머리를 빗겨 주었거든. 널 보면 그때 생각이 나.

그건 마치 바람이 불어서 네가 흩어지는 것과 비슷한 거야.

그는 좋았던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무 아래 서 있었습니다.


   
ps)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려는 건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서 왕가위 감독이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찍은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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