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 말 - 우주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한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칼 세이건 지음, 김명남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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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디 위어 『마션』에 이어 데미언 샤젤 <퍼스트 맨> 재관람을 앞두고 예비 독서 2
<퍼스트 맨> 개봉관이 점점 줄고 있다;; 우리 동네 상영관은 조조 아니면 한밤에 상영해서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ㅜㅜ; 이런 작품이 푸대접을 받다니!

"우리는 우주가 스스로를 아는 방법"이며 "우리는 모두 별 물질로 이뤄진 존재들"이란 명언을 남긴 칼 세이건. 우리 몸의 무거운 원자인 탄소와 산소 원자는 폭발하는 별의 내부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기에 그 말은 단지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한 23년간 인터뷰를 모았는데, 『코스모스』에서는 잘 알 수 없는 그를 볼 수 있다. 그 시대 속 경향과 문제 속에서 그의 치열하고 다양한 활동을 생생히 전달한다.

달은 정복되었고 당시 우주에서 초 관심 행성이었던 화성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소설 『콘택트』를 쓸 정도로 우주에 지구인 외 지적 생명체가 있으리라 확신하던 칼은 화성에 생명체가 있으리라 추측했다. 지금은 화성 정착 프로젝트 "Mars one"까지 추진하고 있으니 지구인의 화성 관심은 여전하다. 앤디 위어 『마션』은 그 전초전의 그림을 그려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진화 생물학까지 공부한 건 외계 생명에 대한 확신을 점검하기 위한 작업이었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생명」 항목을 작성하기도 했는데, 그의 그런 지대한 관심 연유에 대해 질문까지 받을 정도였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살아 있는 걸 좋아하고, 가령 몰리브데넘 원자와 공명하기보다는 뭔가 살아 있는 것과 감정적으로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왜 다른 동물에게 흥미를 느낄까요? 왜 아르마딜로의 생활사에 흥미를 느낄까요? 왜 남극까지 가서 황제펭귄들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볼까요? 그게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에 근본적으로 끌리기 때문입니다.”
ㅡ 「살아 있는 것과의 공명」(1976년 인터뷰, 1979년『화성의 생명을 찾아서 The Search for Life on Mars』(헨리 홀트 앤드 컴퍼니)에 수록)■

그의 엉뚱한 상상력과 폭넓은 식견, 유명세 때문에 학계에서는 폄하와 질투를 받았지만 칼은 사실 철저한 과학적 회의주의자였다. 신의 존재와 부재 둘 다 의혹과 불확실성이 가득하기 때문에 "둘 다 자신만만한 양극단"이라며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정도였다. 종교에 대해서도 종교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만 문제시했다.


"회의적이고, 의문하고, 권위자의 말을 무턱대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과학의 태도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요구하는 정신적 태도와 거의 같습니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서로 공명하는 가치와 접근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 우리가 어느 한쪽 없이 다른 한쪽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ㅡ「사이비 과학에 대처하는 법」(1996년 5월 3일 라디오 프로그램 <토크 오브 더 네이션> 녹취에서)■

그는 과학 문해력이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데만 유용한 게 아니라 열린 사회에서 꼭 필요한 비판적 사고 기술을 함양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과학이 일상과 동떨어진 전문 분야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된다.


"과학이 늘 철저히 연역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학의 최첨단은 늘 무모한 직감을 좇고 단서를 추적하는 방식의 활동입니다. 과학이 예술과 다른 점은 현실을 다른 형태로 직면한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물론 과학 이론에 대해서는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별하게 해주는 시험 방법이 있죠. 그것은 곧 해당 이론이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모든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하느냐 마느냐 하는 잣대입니다. 하지만 과학자에게 연구 동기가 되어주는 내면의 열정은 아주 예술적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질서와 의미를 찾으려는 마음,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탐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ㅡ「아주 미미한 지구」(1973년 6월 7일 자 <롤링스톤> 인터뷰에서)■

우주적으로 보는 관점이라 지구에 대한 그의 걱정도 국지적이지 않다. 『창백한 푸른 점』이 지구적 윤리와 도덕적 전망을  다뤘다면, 마지막 저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사이비 과학이 판치는 세계에 과학적 이성을 촉구하는 책이었다.
그는 이 세계가 성숙한 민주주의 시민 사회가 되기를 꿈꾸며 사람들이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평생 노력했다. <코스모스> tv 시리즈 출연과 책 출판도 그런 노력이었다. 깊이보다 폭넓은 대중화를 선택할 때 돌아올 손해를 알면서도 그는 그러했다. 전문 용어가 아닌 쉬운 언어로 전달하는 것에 주력했고, 호감 가는 외모와 말솜씨와 함께 이것이 그의 인기 비결이기도 했다. 아래와 같이 외계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위트 있게 비꼬며 사실에 초점을 돌리는 언술은 정말 매력적이다.


"좀 다른 종류의 편집증적 몽상에 대해서라면─즉, 외계인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발견하고는 우리가 맛있기 때문이든 다른 이유 때문이든 우리를 잡아먹으러 찾아올 거라는 몽상은─실현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운송 비용이 너무 비쌀 테니까요. 정말로 인간의 단백질 아미노산 서열이 그들에게 유달리 맛이 좋게 느껴진다면, 그들은 인간 한 명만 자기네 고향으로 데려가서 그 단백질을 합성한 뒤에 인공적으로 대량생산을 하면 됩니다. 다른 행성의 미식가들은 그 방식으로 자기네 행성에서 생산한 물질을 먹으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아뇨, 전 그런 생각은 충분히 세심하게 끝까지 따져보지 않은 결과라고 봅니다. 전 누군가 우리에게 그런 위협을 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가할지 모르는 위협도 별들 사이의 방대한 거리 때문에 제약된 상태라고 봅니다. 게다가 인류는 아무리 그래도 점차 나아지고 있잖아요."
ㅡ 「아주 미미한 지구」(1973년 6월 7일 자 <롤링스톤> 인터뷰에서)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멋질 겁니다……. 설령 그들이 땅딸막하고, 뚱하고, 부루퉁하고, 섹스에 집착하는 존재일지라도요. 설령 그럴지라도 그들이 발전된 문명의 전령으로서 이곳을 찾아왔다면 아무쪼록 꼭 그들을 발견해야겠죠. 하지만 문제는 증거가 부실하다는 겁니다. 숱한 경험담 중에서, 우주선 선장의 항해일지 한 쪽을 찢어 왔다거나 지구에 없는 동위원소 조성의 기이한 합금을 살짝 긁어서 가지고 왔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납치 이야기에 곧잘 등장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상황은 외계인이 작은 감시 기기를 자기 콧구멍 속에 심었다고 말하는 경우인데요, 잘된 일이죠! 그 기기를 하나 구하면 문제가 해결될 테니까요. 그런데 납치 애호가들이 하는 얘기란 게, 그 이식물이 톡 떨어져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사람들은 그걸 내던져버린다는 겁니다. 납치된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들 호기심이 없는 걸까요. 그 물건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줄 결정적인 증거란 사실도 깨닫지 못하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또 자신이 외계인의 정자로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수 천자 검사를 해보면 안 될까요? 초음파검사는? 아기가 태어나거나 유산된 경우는 어떨까요? 그런 경우는 어떻게 됐다고 생각해야 좋을까요? 산과 인턴이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외계인인 아기가 태어..."
ㅡ「과학이 세상에 착륙하다」 (<헤미스피어Hemispheres> 유나이티드항공의 기내지, 1994년 10월 호 인터뷰에서)■

우주 탐사가 현실을 외면한 예산 낭비라는 비난이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논했다. 우주 탐사 예산은 국방비보다 투자가 적었다. 우주 탐사가 냉전 체제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된 건 맞지만, 인류의 발전과 미래를 위한 모색에서는 대단한 성취를 이뤘다. 칼의 의견처럼 전 세계가 공조해 이 프로젝트를 활성화한다면 예산이 그리 문제시될까. 여전히 이 문제는 국가적 대항과 경쟁으로 남아 있다.

(인터뷰어 플래토)
"NASA의 우주 예산이 국방 예산만큼 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5퍼센트밖에 안 되죠."
(세이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만일 수많은 시급한 사회문제, 환경문제, 그 밖의 문제들을 처리할 돈을 어디에서 구할지가 걱정이라면 냉전이 끝난 지금도─간접비를 포함하여─연간 3000억 달러 이상을 지출하는 국방부야말로 꼼꼼히 살펴보기에 가장 알맞은 지점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폴로 프로그램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가 1961년에 그 역사적 연설을 하면서 아직 설계되지도 않은 추진 로켓, 아직 발명되지도 않은 합금, 아직 구상되지도 않은 랑데부와 도킹 기술을 써서 아직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달에 가겠다고 선언했고, 더구나 그걸 1960년대 말까지 해내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선언 시점에는 미국이 미처 지구궤도에도 못 올라간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일정은 정치적으로 도달 가능한 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정말 그 일정대로 해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기술적·인간적 성취였습니다."
"로봇 우주탐사를 열렬히 지지하고, 지난 35년 동안 로봇 탐사에 관여해왔습니다. 우리가 과학을 하고 싶다면 그게 최선입니다. 그편이 더 싸고, 인간의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고, 더 위험한 곳에도 갈 수 있고, 기타 등등 장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폴로 프로그램처럼, 현실에서 유인 우주 비행을 지지하는 정당한 근거는 그보다 훨씬 더 폭넓은 정치적·역사적 의제여야만 할 겁니다. 그리고 전 그런 근거가 세 가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감정적인 것인데─많은 사람이 이 감정을 느끼지만 느끼지 않는 사람도 많이 압니다─바로 우리가 방랑자에서, 수렵 채집인에서 유래했다는 점입니다. 인류는 지구에서 거주한 기간의 99.9퍼센트 동안 고정된 주거지가 없는 상태로 살았습니다. 아주 오래 그렇게 지내다가 최근에야 마을과 도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구에 대한 탐험은 모두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일시적으로 정주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다른 탐험을 갈망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상현실이 있으니까요. 몇 명만 탐험하더라도 그 경험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의 아이가 굶주리는 형편이라면 이 논증이 그다지 호소력 있게 와 닿지 않겠지요."
ㅡ「콜라 전쟁이 아니다」 (1994년 12월 16일  방송된 <토크 오브 더 네이션 Talk of the Nation>을 녹취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학자들에게 아폴로 프로그램에 270억 달러나 썼다며 꾸짖습니다. ‘대체 얼마나 더 바라는 거야?’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쓴 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정치적인 이유에서 쓰인 돈이었습니다.” 세이건은 이렇게 단언하고, 이어서 설명한다.
  “아폴로 프로그램은 피그만 침공 사건 1961년 4월 16일 쿠바의 카스트로 혁명정권이 사회주의국가 선언을 하자 미국 CIA가 이를 교란하려고 쿠바 망명자들로 침공대를 조직, 익일 쿠바에 상륙시킨 사건과 유리 가가린의 지구궤도 비행 성공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목표는 1960년대 말까지 달의 기원을 밝히겠다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인간을 달에 보냈다가 돌아오게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해냈죠.”
ㅡ 「외계 생명을 소망하다」(<사이언스다이제스트Science Digest> 1979년 6월 호 인터뷰에서)


"우주 유인 탐사가 중단된 이유는 용기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정적, 정치적, 심지어 천체물리학적 현실도 후퇴를 거들었다. 이제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아폴로 프로그램은 냉전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소련이 붕괴한 오늘날에는 화성이나 다른 먼 세상으로 가는 데 1000억 달러를 쓰는 걸 정당화할 단기적인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유가 없다."
ㅡ「또 다른 행성에서」(1996년 5월 30일 자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골수형성 이상에 의한 폐렴으로 사망하기까지 그가 한 사람의 지구인으로서 지구와 우주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사랑했는지 절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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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은 책 사는 게 싫증 나서 가지고 있는 책 읽는 데 주력했는데
곧 있을 내 생일 자축선물(또 책이냐! 그렇다!!)

필요가 아니라 순전히 내 욕구대로 사는 기쁨을 누려보다!
근데 내 생일 축하인지 페소아 축하인지 모르겠네ㅋㅋㅋ;


 


●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Pessoa) 대잔치
『불안의 책』번역본이 두 개나 있어서 배수아 번역본은 안 샀는데 좀 아쉽나ʕ·ᴥ·ʔa
페소아 마니아라도 오래전 페소아의 이명 알베르또 까에이로로 『양치는 목동』(1994)이 국내에 출판됐었다는 걸 잘 모른다. 이 시집 엄청 좋아해서 진가를 알만한 사람에게 선물도 종종 했는데 절판되어 안타까웠다. 이번에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 수록되었는데 나는 이전 번역이 더 맘에 드는 거 같다^^;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은 가졌는지』(시가집)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시집)
『페소아와 페소아들』(산문선)
나는 도시 속 고독한 무정부주의자 정체성의 페소아보다 자연 속 고독한 자연주의자이자 시인인 까에이로 정체성을 더 좋아한다. 페소아가 까에이로를 가장 이상향으로 생각한 게 이해가 된다.
모르긴 몰라도 페소아 때문에 타부키 읽은 사람이 많을 거 같은데(내가 그렇다ㅎ)

페소아 마니아 1인자는 누구도 부정 못하는 안토니오 타부키『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

● 헤르타 뮐러도 오랜만~ 노벨문학상 받았을 즈음 그녀의 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저지대』읽었나 안 읽었나 가물가물해서(이래서 리뷰를 써야 함!) 걍 사버림ㅋㅋㅋ;
본투리드 리커버 특별판 알라딘 매듭에코백(Herta Miiller) 갖고 싶어서ㅋ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에코백도 갖고 싶었지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책이 이미 있어서ㅜㅜ 완독 좀 해라! 올해 안에 꼭 다 읽을 테닷!!!

● 워크룸프레스 책 좋아하는데 정영문 책도 여기서 나오다니! 아, 씐나~ <제안들 시리즈>는 손에 촥촥 안기는 종이 질감이라 좋긴 한데 쉽게 낡는 게 늘 안타까웠다. <입장들 시리즈>는 반짝반짝 비닐 커버로 가는가 봄? 깜찍깜찍˵¯͒ꇴ¯͒˵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 알라딘 10월 굿즈
이번 구매로 와인 텀블러, 그림자 램프, 스누피 에코백 등등 추가 구매할 굿즈가 많았지만 꼭 받고 싶은 굿즈만 선택.
알라딘 콜드브루가 아이스 팩에 담겨 도착~ 정가로는 12000원이라 ㅎㄷㄷ 구매 사은품 굿즈로 받는 게 이득! 생각보다 훨씬 좋다. 진하면서 향이 특히 좋다! 알라딘, 칭찬한다. 이번에도 성공했네👍

책읽는 사람들의 생활용품 연구소
알라딘의 야심찬 프로젝트인 책읽는 사람들의 생활용품 연구소 상품 중 이번에 스티키 북마크를 사봤다. 포스트잇 플래그만 쓰다가 이거 보니 무척 귀엽다! 특히나 내가 선호하는 무채색 계열이 있어 더 좋은.
양말도 얼릉 사 봐야징!

 

 

 

 

 


● 그리고 신해철... 4주기
또... 벌써...
내 생일 즈음 신해철 사망으로 그때 정말 비통하게 지낸 기억이 있다. 내 생일에 신해철 발인에 갔지. 만우절에 자살한 장국영처럼 할로윈 데이에 장례식이라니... 우연은 가끔 우릴 더 비참하게 해.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게 새로울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게 달라질거야
ㅡ「일상으로의 초대」

신해철 오르골 끊어짐은 매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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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10-27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드립니다^^
페페 대잔치 보기 좋으네요~
문동 저 책이 눈에 박혀 계속 설레입니다ㅎㅎ

AgalmA 2018-10-27 11:58   좋아요 1 | URL
페소아 읽으면 마음이 스산하고 붕 떠오르면서 가을같은 기분이 돼요💕

우끼 2018-10-27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드려요!! 재미있는 책을 많이 고르신 것 같아요 ㅎㅎ 읽으신 후의 아갈마님 말씀이 기다려져요~!

AgalmA 2018-10-27 13:27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우끼님이 페소아를 읽으면 어떤 글로 생각을 풀어 가실까 저도 궁금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0-27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안의 책>이랑 <불안의 서>가 다른 책인가요? 궁금합니다 전<불안의 서>구매했는뎅~다른 책이면 또....포스팅의 변혁을 불어오는 아갈마님의 글 잘 봤습니당!ㅋ

AgalmA 2018-10-27 22:15   좋아요 1 | URL
<불안의 책>이 페소아가 소아르스 정체성을 중심으로 파편적으로 쓴 글이고 미완성이라 여러 판본의 편집본이 있어서 상황이 이리 된 듯. 분량이 워낙 많다보니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 책을 처음부터 완역으로 내긴 힘들었겠죠. 분위기 타면서 배수아 작가 노력도 있고 해서 <불안의 서> 완역이 나온 걸로 생각합니다. 배수아 작가 번역이 완역이라고 하니 잘 사신 거 아니겠어요ㅎㅎ

카알벨루치 2018-10-27 22:50   좋아요 0 | URL
읽은분들 이야기 얼핏보니 문동판이 기대치 이하라고 해서요 전 배수아 번역판을 구매했습니다 페소아가 죽고난후 많은 글을 남겼더군요 ㅎ

단발머리 2018-10-28 0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galmA님 페이퍼는 언제 봐도 아름다운~
책과 커피와 굿즈의 대향연~~~
전 <불안의 책> 앞에만 들쳐보다 이게 뭐여~~ 하고 포기한 사람이라 AgalmA님 리뷰 읽고 다시 도전할 예정입니다^^
참, 글구 생일 축하드려요!!!
책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AgalmA 2018-10-29 15:09   좋아요 0 | URL
<불안의 책>은 다른 사람 리뷰 안 봐도 가치 있는 작품이라 그냥 읽으시면 되는데 왜 굳이 제 리뷰를^^;
어렵다, 이해가 안 된다 뭐 많은 표현들을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페소아 같은 작가는 궁합이 맞는 독자들이 좋아할 작가죠. 단발머리님은 배수아 작가 책도 별로 궁합이 안 맞으실 거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명쾌한 서사로 끌어가는 작가들이 아니라서. 그래서 더 궁금해하게 되는지도 모르죠. 많고 많은 책과 작가를 모두 독파하긴 정말 어려운 일이죠. 이런 책들과 지지고 볶고 하며 제 이번 생은 안녕일 듯ㅎ;

2018-10-29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8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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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9 1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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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1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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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2 2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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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2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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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2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3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3 0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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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3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03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마션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8월
평점 :
판매중지


대체로 문학을 세계의 ‘발견‘으로 높은 점수를 주는데, 문학의 가장 큰 힘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창조‘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소설. 다음 소설이 기대되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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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10-16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좋았어요. 보셨죠? ^^

AgalmA 2018-10-16 22:41   좋아요 1 | URL
으히히;; <마션> 처음 나왔을 때는 영 안 땡겨서 안 봤지 뭐예요ㅎ;; 뒷북으로 소설을 이제야 보고선 저를 원망ㅎ; 그러나 <퍼스트 맨>은 누구보다 먼저 보려는 부지런을 떤; 누구 말할 것도 없이 웃기고 모순적인 게 바로 접니다-_-;

북다이제스터 2018-10-16 22:47   좋아요 1 | URL
언제나 항상 그렇듯 소설보다 영화는 별로 일 것 같아요. ^^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나사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것이 떨어진 곳을 알고 있다. 예전에도 떨어져서 죈 기억이 있다. 다시 떨어질 거라는 걸 예상하면서 돌이키기 어렵게 망가진 자리에 임시변통으로 죄었던 나사였다. 처음같이 변함없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게 많다. 사물만이 아니다. 사랑 특히 모든 사랑의 전사(前史)가 되는 평생의 사랑에서라면 냉정한 판단은 더욱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 가장 큰 장애인데 기억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 나사는 짐작하지 못한 데서 회전하고 멈추기도 하니까. 줄리언 반스는 그걸 내내 의식하면서 연애의 기억을 써나갔다.

 

내가 꼭 일이 일어난 순서대로 적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기억에는 다른 종류의 진정성이 있고, 이것이 열등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우리가 기억이 우선순위를 정하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을 우선시하는 듯하다. 따라서 행복한 축에 속하는 기억이 먼저 표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따르는 작용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단지 추측일 뿐이다.”(하나)

 

케이시 폴이 수십 년간 공책에 사랑에 관한 문장을 채우고 지우길 반복하며 사랑의 진실을 찾으려 애썼듯이 이 소설에서도 그렇다/아니다를 오가는 저울 같은 문장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기억과의 사투일까, 진실과의 사투일까. 아니면 기억과 진실 간의 사투일까.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하나)

그는 가끔 자신에게 인생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 그는, 결국,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너는 공감과 반감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인간의 마음에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들이 나란히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너는 그간 읽은 책에 화가 난다. 단 한 권도 이런 것에는 대비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엉뚱한 책들을 읽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엉뚱한 방식으로 읽었거나.”()

삶의 슬픔. 그것은 그가 가끔 생각에 잠기게 되는 또 다른 난제였다. 어느 것이 올바른또는 더 올바른공식이었을까. ‘인생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아니면 인생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둘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진실이지만, 어느 것이라고는 결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최종 평가는 사후에 가능하다. 정확한 사후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고 있나삶의 문제에서 더 하고 덜 하고를 현명하게 선택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다. 무신경 혹은 무책임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때도 있다. 어쩌면 더 많이. 그에 따른 결과가 행복이나 불행, 진실이라고도 재단할 수 없다. 어떤 문제는 고통, 시간의 경과, 기억과 사실의 부재나 혼동으로 인해 깊이 고찰하기도 어렵다. 가능하다 해도 올바른 판단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일흔이 넘어서야 폴은 수전을, 수전과의 사랑을, 진실을 알기 위해 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모든 연인이 자신들의 관계를 두고 하는 착각ㅡ“자신들은 범주와 묘사를 다 벗어나 있다는 것”(특수성)ㅡ을 제일 먼저 경계하면서. 폴은 자신이 일기 같은 기록을 남긴 적이 없고 시간, 장소 같은 걸 순서대로 나열해 쓰고 있는 게 아니라고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써 나가며 그는 깨닫는다. 자신도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걸. 그럼에도 그가 남기는 이 연애의 기록은 그가 사랑했던 첫 사람—단 한 사람—의 지워지고 잃어버린 모습을 되찾고 그녀의 순수를 기억하고 유지하고자 하는데 의미가 있다. 또한 ‘그들 둘 다를 위한 마지막 의무’이다.
줄리언 반스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가 내게 진부한 사랑, 19년 연상연하 커플의 사랑과 삶의 파국, 신파로 읽히지 않는 건 그가 인간 삶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결합ㅡ우리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는 것ㅡ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이 시작되는 첫 공모의 순간(“어떤 음모나 계획은 물론, 접촉, 키스, 말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몇 마디 던지고 진입로를 따라 걸어가기 전, 그냥 그렇게 함께 차 안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공모를 하는 관계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뭔가를 하자는 공모는 아니었다. 그냥 나를 조금 더 나로 만들어주고, 그녀를 조금 더 그녀로 만들어주는 공모일 뿐이었다”),

독특하게 고지식한 첫사랑의 특징(“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 둘이, 그리고 우리가 이르러야만 하는 곳이 있다,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내가 꿈꾸던 곳에 가까운 어딘가에 실제로 이르렀지만, 나는 대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춘 시기에 사람의 습성, 관습, 기성세대에 대해 가지는 불만과 혐오 그것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내가 어른의 무엇을 싫어하고 불신했을까? 글쎄,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자격을 가졌다는 느낌, 우월하다는 느낌, 가장 잘 알지는 못해도 더 잘 안다는 가정, 어른이 지닌 의견들의 엄청난 진부함, 여자들이 콤팩트를 꺼내 코에 분을 바르는 모습, 남자들이 두 다리를 벌려 음부의 묵직한 윤곽을 바지에 그린 채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정원과 정원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말투, 그들이 쓰는 안경spectacles과 그들이 자신들을 재료로 만들어내는 광경spectacles, 음주와 흡연, 기침을 할 때 가래가 끓는 끔찍한 소리, 자신의 짐승 냄새를 감추려고 바르는 인공적인 냄새, 남자들이 대머리가 되고 여자들이 풀 분무기로 머리 모양을 만드는 모습, 그들이 여전히 섹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쾌한 생각, 사회적 규범에 대한 유순한 복종, 풍자나 의문을 드러내는 모든 것에 대해 짜증을 내며 못마땅해하는 모습, 자식의 성공은 부모를 얼마나 잘 모방했느냐로 잴 수 있다는 가정, 서로 맞장구를 치며 내는 숨 막힐 듯 시끄러운 소리, 조리한 음식과 먹는 음식에 관한 논평, 내가 역겨워하는 것(특히 올리브, 절인 양파, 처트니, 야채 겨자 절임, 고추냉이 소스, , 샌드위치 스프레드, 악취가 나는 치즈, 마마이트 이스트)에 대한 그들의 사랑, 감정적 자기만족, 인종적 우월감, 잔돈을 세는 방법, 잇새에 낀 음식을 추적하는 방법, 나에게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원치 않을 때 나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것. 이건 짧은 목록일 뿐인데, 수전은 당연히 또 이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 한 가지 더. 진짜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유전적 공포 때문이 틀림없지만, 그들이 감정생활을 비꼬고, 양성 간의 관계를 반복해서 멍청한 농담거리로 삼는 태도. 여자들이 실제로 모든 일을 좌지우지한다는 남자들의 암시, 남자들은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여자들의 암시. 자신이 강하기 때문에 여자는 귀여워해주고 응석을 받아주고 돌봐줘야 한다는 남자들의 허세, 축적된 성적 민간전승에도 불구하고, 상식과 실용성을 갖춘 사람은 자신들이라는 여자들의 허세. 양성 모두, 상대의 모든 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여전히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흐느끼며 인정하는 것. 그들하고는 살 수 없어, 그들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과 결혼해 살았으며, 어떤 재사(才士)가 표현했듯이, 결혼은 정신적 제도*라는 의미에서 제도였다. 누가 그 말을 먼저 했을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어느 시대든 자식의 불길한 사랑에 부모들이 겪는 혼란(“부모가 당황하고, 이웃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해하고, 잠시 잠적하고, 문을 닫아놓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내 앞길에 놓인 곤경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결국 자신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의 투사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가설을 세우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을 수용하는 자신들의 능력에서 약간의 침착한 영웅적 자질을 찾아내고, 어머니는 페드로가 계속 자신의 머리를 자르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적절한지 궁금해하고, 그러다최악의 단계로자신이 새로 발견한 관용에 명예의 훈장을 수여하고, 그러는 동안에도 내내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서 이런 날을 보지 않은 것을, 믿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감사할 것이다…….”),

사랑 뒤에 우리가 괜찮은 척하는 연기들(그건 연기야. 우리 모두 연기를 하지. 너도 언젠가는 연기를 하게 될 거야, 오 하고말고.”, 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지.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

나이가 들고 사랑의 파국을 겪어본 이들이 연인들을 보게 되는 시선(“젊은이들이 내가 그들을 부러워한다고 믿도록 놓아두는 것. 글쎄, 먼저 죽는다는 잔인한 일과 관련해서는 분명히 부러워하지만, 그 외에는 아니다(중략)나는 세상이 아마도 그들에게 하게 될 일로부터, 그들이 아마도 서로에게 하게 될 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싶다. 하지만 물론, 이건 가능하지 않다. 나의 돌봄은 요구되지 않고, 그들의 자신감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니까”),

결국은 모두에게 진짜로 남는 사랑-이야기가 있다는 것(“어쨌든 절대 잊지 마세요, 폴 도련님.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그리고 이 과정은 인간의 기억 작용을 짐작게 한다.

 

행복, 기쁨, 웃음으로 이루어진 오랜 기간들은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미 내가 묘사하기도 했으니까. 기억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그것은…… , 이런 식으로 표현해보자. 통나무를 쪼개는 기계가 작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주 인상적이다. 통나무를 일정한 길이로 잘라, 기계의 대에 올려놓고, 발로 단추를 밟으면, 통나무가 도끼날처럼 생긴 날 쪽으로 밀려간다. 거기에서 통나무는 결을 따라 쪼개진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인생은 단면이고, 기억은 결을 따라 쪼개지는 것이며, 기억은 그것을 끝까지 쭉 따라간다.
따라서 나는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기억하기 가장 힘든 부분이라 해도. 아니, 기억이 아니라묘사하기에. 그것은 나의 순수함의 일부를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성장이란 순수를 잃는 필연적 과정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삶에서 문제는, 그런 상실이 언제 일어날지 아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안 그런가? 그리고 어떻게 될지, 그 뒤에.”(하나)

너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공적 개입은 원하지만 너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너의 진실성이라는 것이 위태로울 정도로 유연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잃어버린 기억 하나는 순수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 상대에 대한 순수 하나를 잃어버리면 내 순수 하나도 잃어버리는 게 된다. 폴은, 우리는 얼마나 추적해나갈 수 있을까. 진실과 마찬가지로 그 순수는 정확히 거기 있으며 하나일까. 폴과 수전은 세상의 눈총과 족쇄에서 달아나 둘만의 새로운 세상을 바랐지만 그곳에 순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수전은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을 혐오했으면서 자신도 알코올 중독과 정신 이상으로 폐인이 되어 갔다. “알코올중독자의 파트너는 그 습관에 혐오감을 느끼기는커녕아니, 그 습관에 혐오감을 느낌에도 불구하고스스로 그 습관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듯이 수전도 그리되었다. 그러나 원인은 더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망, 친척 아저씨의 집요한 성폭력, 전쟁과 시대적 상황, 연인의 사망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개인적 이유들이 있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수전과 다른 듯 비슷하게 폴도 무력하고 수동적이었다. 그녀를 돌보느라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고 전도 유망한 변호사가 되기보다 시원찮은 일을 하며 삶을 꾸려나갔다. 거기서 또 보람을 느끼면서. 그가 이리 된 걸 수전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자신이 말짱하게 남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바라며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속이면서도 그들은 상호의존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삶을 채우는 사랑, 가식, 의무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내면화되는 인간성이다.

 

젊은 시절, 수전을 사랑한다는 자부심으로 뜨거웠던 그는 경쟁심이 강했다, 모든 젊은 남자가 그렇듯이. 내 좆이 네 좆보다 크다, 내 심장이 네 심장보다 크다. 젊은 수컷들은 또 여자친구에게 딸린 것들을 자랑하기도 했고. 반면 그의 자랑은 달랐다. 나의 관계가 너희의 관계보다 얼마나 더 위반적인지 봐라. 그리고 또,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 또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의 강도를 봐라.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당연히. 감정의 강도가 행복의 수준을 지배한다, 그렇지 않은가? 당시에 그에게는 그것이 지극히 논리적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그녀가 과거에 어땠는지 돌아보고, 그녀를 탈환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었다. 돌아보고…… 자신을 탈환하는? 무엇으로부터? ‘그 이후 그의 삶의 난파로부터? 아니, 그것은 멍청할 정도로 신파적이었다. 그의 삶은 난파한 적이 없었다. 그의 심장, 그래, 그의 심장은 불로 지져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 방도를 찾아냈으며, 그 삶을 계속했고, 그것이 그를 여기로 데려왔다. 여기에서, 그는 그 자신을 한때 그랬던 모습으로 볼 의무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젊었을 때는 미래에 아무런 의무가 없는데, 나이가 들면 과거에 의무가 생긴다. 하필이면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것에.”()

낡은 교조로부터의 이런 해방은 그 나름의 복잡한 상황을 초래했다. 의무감은 내면화되었다. ‘사랑은 그것 자체로 의무였다. 너는 사랑할 의무가 있었고, 이제 그것이 너의 중심적인 믿음 체계이기 때문에 의무감은 더욱 강해졌다. 사랑자체가 많은 의무를 수반했다. 그래서, ‘사랑은 겉으로는 무게가 없어 보여도 아주 무거울 수 있었고, 강하게 속박할 수 있었으며, ‘의무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큰 재앙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이 열아홉에 느끼려 한 사랑의 진실과 일흔이 넘은 뒤 돌이켜보는 사랑의 진실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반스는 그 비교도 썼다.

 

당신은 나이 열아홉에 사랑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깊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법정에서라면 그런 이해가 책 몇 권과 영화 몇 편, 친구들과의 대화, 어찔한 꿈, 자전거를 탄 어떤 소녀들에 관한 가슴 아린 환상, 내가 잠자리를 함께한 첫 여자와의 사분의 일 쪽짜리 관계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평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열아홉 살짜리 자아는 법정의 평결을 바로잡을 것이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나중에 오는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성에 근접한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심장이 식었을 때 오는 것이다. 무아지경에 빠진 애인은 사랑을 이해하고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그 강렬함, 사물의 초점이 또렷이 잡히는 느낌, 삶이 가속화하는 느낌,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이기주의, 욕정에 찬 자만심, 즐거운 호언, 차분한 진지함, 뜨거운 갈망, 확실성, 단순성, 복잡성, 진실, 진실, 사랑의 진실을 느끼고 싶어 한다.
사랑과 진실, 그것이 나의 신조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나는 진실을 본다. 그렇게 간단해야 한다.”(하나)

몇 번의 검열에서도 살아남은 그의 공책의 한 기록.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사랑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 가지 주제다.” 그는 처음 이 말을 발견한 이후로 계속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 더 넓은 생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사랑 자체가 절대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 그 참가자들 누구도 그렇지 않다는 것. 한 사회가 강요하려 하는 감정과 행동의 모든 엄격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것을 미끄러져 지나쳐버린다.” ()

 

열아홉의 폴은 사랑과 진실이 단순한 실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흔이 넘은 폴은 진실은 항상 변하고 있었으며, 양립할 수 없을 때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며 여러 관점에서 해석해본다. 자신과 수전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여러 상황을 가정해본다. 수전의 남편 매클라우드 입장에서 상황을 재해석해보기도 한다. 자신의 사랑이 사라진 시점도 파악한다(“가장 열렬하고 가장 진지한 사랑이라도, 정확한 공격을 받으면, 연민과 분노의 혼합물로 응고해버릴 수 있다는 깨달음”, 죄책감과 가책, 불가피하다는 도덕적 판단을 내렸지만 결국 그녀보다 자신을 구원하기로 한 선택, 연민과 분노와 함께 자기혐오를 감당해야 하는 수치에서 벗어나기).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라는 말을 청년 시절에는 절망의 권고처럼 들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정상적이고, 감정적으로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수전의 순수를 찾는 이 과정은 자기 보호이자 용기이자 비겁인 모순적인 양면성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단 한 번의 사랑을 평생 전사로서 간직하며 사는 폴은 사랑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을 연기하며 독신으로 생을 마감할 듯하다. 수전의 삶이 그랬듯 그의 이유도 복합적이다. ‘그의 부모, 그들의 성격과 상호작용, 다른 결혼에 대한 그의 관점, 그의 눈에 보인 가족이 주는 피해, 그것에서 탈출해 수전 매클라우드에게 간 일, 어떤 마법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짧은 착각, 관계 속 환멸과 소심의 왕복, 거듭되는 상심, 그의 생각을 바꿀 대상의 부재등등. 그는 인간이 너무 불완전해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그것은 또한 영화에서 파생된 환상(브롬화물)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주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다고도 말한다. 어느 시대 어느 세대나 ‘사랑’이 온 세상을 바꿀 혁명적 힘이자 만병통치약인 듯 말한다. 줄리언 반스의 이 소설은 어떤 형태로 있든 사랑의 민낯, 사랑에 대한 불가피한 통찰과 현실성을 말했다. 공감할 수 없어 반스에게, 나에게 사랑에 대해 이것이 정녕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우리가 알고 겪었던 많은 사랑이 대개 이렇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거 같다한계와 때늦음을 곱씹으며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이런 사랑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계속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랑은 어떤 이에겐 외면하고 덮고 싶은 상처이고, 어떤 이에겐 삶의 의지와 위안을 주는 행복이며, 어떤 이에겐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는 평생의 숙제이지만, 우리는 승자도 패자도 아니고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하며 살아간다.

 

그래, 사랑은 그에게는 완전한 재난이었다. 그리고 수전에게. 또 조운에게. 그리고그의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당연히 매클라우드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줄을 그어 지운 기록 몇 개를 훑어보다가, 공책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어쩌면 늘 시간을 낭비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랑은 결코 정의로 포착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오로지 딱 이야기로만 포착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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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16 2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아닌 듯 하고. 나의 기준에 따른다면 다른 이들의 사랑은 저와는 또 다른 것도 같은. 그래서, 사랑은 아마 그 때 그 장소에서 당시의 나에게 일어났었던 박제된 감정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뭔 소리를 하는건지...ㅜㅜ)

AgalmA 2018-10-16 22:44   좋아요 2 | URL
백 가지 사랑이 있다면 백 가지 정의가 있겠죠. 일반화로 모으려 하지만 예외와 불가해를 우린 늘 직면하잖습니까.

겨울호랑이님 그 감정, 뭔 소린지 저는 좀 알 거 같은데요ㅎ; 이심전심도 아니고 이건 뭐람;; 공부가 부족하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리커버 특별판)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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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은 계란 노른자를 좋아합니까, 흰자를 좋아합니까. 이런 식성 취향을 물을 때 대체로 대답은 명확하다. 노른자와 흰자를 다 좋아한다고 해도 되고 계란을 싫어한다고 해도 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싫어요 보다 그게 뭐죠?라는 무관심이 더 난감할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한 번씩 받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음에 성 구분이 있었는지, 대답에도 인접한 성에 대한 선호가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머니, 아버지가 다 일을 하는 상황인 요즘, 사회생활로 가족을 건사하는 전통적 부권 가장 이미지와 권위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가부장제 뿌리는 사회 곳곳에 여전하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특성 때문에 고용에서 꺼려지는 존재가 되기 일쑤고 여성의 양육 재능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편견도 만연해 사회생활보다 가정으로 더 내몰린다.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서 신경 쓰는 게 차별로 돌아오는 악순환이다. 생명공학 발전으로 성 구분이 희미해지고 임신과 출산이 여성만의 몫이 아니게 되면 이 문제는 바뀔까. 페미니즘은 그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주치며 그들이 대개 “페미니즘 하면 남자처럼 되고 싶은 한 무리의 성난 여자들”을 떠올리고, “그들이 아는 페미니즘은 십중팔구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것일 뿐이며 페미니즘 운동이 실제로 무엇인지 거기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벨 훅스는 요령부득한 학술용어만 가득한 기존의 페미니즘 책이 아닌 쉽고 대중적인 이 책을 썼고,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는 간결한 정의와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벨 훅스의 이 책이 나오기 9년 전인 1991년 출판돼 페미니즘 고전으로 여겨지는 수전 팔루디 『백래시』도 대중에게 쉽고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사례 제시를 풍부히 했는데, 80년 대 미국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실태, 상업주의 소비자로 혹은 상품으로 공략되거나 제외되는 현상, 여성이 정신질환자나 아이 낳는 기계로 치부되는 상황 등 여성의 기본권조차 무시되는 것을 고발하는 르포였다. 이후 나온 이 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은 여전히 무시되고 있는 문제와 남성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훅스는 페미니즘 혁명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을 ‘가부장제, 인종 차별,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 & 자본주의’라고 했다. 체감하기 쉬운 키워드를 뽑은 건 이해하지만 나는 더 깊이 들어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체성 형성은 오랜 역사와 진화 속에서였다. 혼자 있는 여성이 험악한 인상에 체구가 큰 남성을 만났을 때는 경계와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피부색이 지표가 아닌데도 낯선 유색 인종일 때는 인종 차별적인 경계심,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위계에 의한 위축감 등등 편견과 상황적 판단을 한다. 우리는 생각만큼 정의롭거나 합리적이지 않으며 감정적인 영향도 많이 받는다. 이건 남성이냐 여성이냐 구분을 뛰어넘는다. 신체적으로 연약한 포유동물은 자연스레 무리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인간의 공동체 생활도 그런 연장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국가, 종교, 각종 문화들이 구축했다. 중앙 집권적 이러한 체제들에서 무리에서 힘이 센 남성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거의 차지했고, 지배와 착취의 수단인 폭력성을 사회 통제 수단으로 허용하는 지배 문화와 함께 가부장제는 내면과 외면에 걸쳐 단단히 뿌리를 틀었다. 체제와 공동체 결속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민족주의가 국가, 자본, 종교와 만나 문제는 더욱 얽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2017년까지도 여성이 운전을 하지 못했다. 아직도 많은 이슬람 사회에서는 전통과 문화 상대주의를 내세우며 여성에게 히잡, 차도르, 부르카 착용을 강요한다. 종교적 풍습에서 유래된 할례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여성의 낙태 문제만 해도 바로 종교계와 부딪힌다.
여성 신도를 지배하고 유린하는 사건과 사회적 차별이 건재한 ‘종교’는 여전히 위세가 막강하다. 종교 문제를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벨 훅스는 이 책에서는 어쩌면 거론하지 않은 것도 같은데 이것이야말로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에서 과학적인 진화론이 우세한 거 같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보다 종교 신자가 더 많다. 신자가 많은 종교만 추산해도 기독교 23억, 이슬람교 18억, 힌두교 10억, 불교 5억에 달한다. 무신론자는 대략 11억으로 추산되고 있다. 종교의 힘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회가 어렵고 힘들수록 종교에 의지하려는 심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인간의 전면적인 의식 개혁 없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만들어진 신’이 존재하는 한 ‘만들어진 여성’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좀 더 현실적인 얘기들을 말해보자.

브래지어를 태우는 등의 여성 항의 운동을 공정한 시각으로 잘 다루지 않는 대중매체, 자본주의-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를 탑재한 패션업계와 화장품 업계, 드라마, 상업 영화, 광고 등이 퍼트리는 여성 이미지 때문에 페미니즘은 오해와 지탄을 받기 쉽다. 초기 페미니즘이 남성중심주의에 분노해 대항한 건 사실이지만 페미니즘=反남성주의로 해석되어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적대적인 일부 여성들의 운동', '시끄럽고 나쁜 페미니스트'로 매도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혁명적 페미니즘’ 의식을 가진 여성들은 다수가 레즈비언이고 노동자 계급 출신이어서 주류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고, 학계에 포용되고 난 이후에는 대중과의 소통이 더 어려워졌다. 기존 구조를 유지하면서 젠더 평등을 강조하는 ‘개혁적 페미니즘’은 계층 이동의 수단에 천착해 하위 계급 여성을 착취함으로써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와 동맹을 맺었다. ‘라이프 스타일 페미니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성의 수만큼 다양한 페미니즘이 존재할 수 있다"라는 개념으로 페미니즘의 정치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페미니즘이 경력을 쌓는 도구로 변질되면서 기회주의로 이용되다 보니 페미니즘 정치의 의식화 과정도 선명해지지 못했다. 남성중심주의나 젠더 평등에 대한 문제 직시 없이 분노 표출에 집중하거나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 않은 채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배반하곤 했다.” “모든 여성은 어떤 식으로든 남성중심주의의 피해자라는 현실 인식만을 토대로 세워진 유토피아적 자매애는 계급과 인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무너져버렸다.” 혁명적 페미니즘 운동에서는 “남성의 페미니즘 의식화가 여성의 의식화 만큼이나 중요하다.” 남성과 연대해 투쟁하지 않고 페미니즘 운동은 전진할 수 없다는 훅스의 말에 동의한다. ‘페미니즘 이론이 남성성에 대해 좀 더 해방적인 비전을 제시했다면, 페미니즘 운동이 반남성주의 성향을 띤다고 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남성들의 유대는 인정과 지지”를 받았다.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은 수용 외에 유대가 불가능했다. 한국 사회의 ‘시월드’라는 갈등 구조도 이에 기인하는 게 크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유대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결정권, 효과적인 피임, 임신 선택권, 임신거부권, 강간과 성희롱 근절, 고용 차별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단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사도우미 고용을 이해관계로 보는 일례에서 착취와 억압 체계에 기초하는 계급주의와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영향을 보지 못한다면 ‘자매애’의 연대와 지속은 어렵다.

여성학이 자리를 잡은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문제점도 있었다. 학계 엘리트주의와 출세지상주의가 맞물려 학계 밖 여성, 남성들과의 원활한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았고, 대중 기반의 교육 운동을 일구는 데 실패했고, 페미니즘 사상이 학문으로 고착되어 탈정치화가 진행되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급진성이 약화되었다. 그러니 현실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다. 임신 선택권과 임신 중단권 즉 여성의 자기 선택권 문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아직까지 쟁점이 되고 있다. 피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 조심스럽지 못했다거나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여성의 잘못으로 보는 시선, 생명 존중을 모르는 범죄자로 모는 사회적 지탄 등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이런 상황에서 현실 정치로서의 페미니즘은 절실하다.

“건강한 자존심과 자기애를 키우지 않으면 여성은 절대 해방될 수 없다.” “페미니즘의 개입으로 의복과 인체 혁명이 촉발되면서 여성은 우리 몸이란 본디 타고난 그대로 사랑받고 추앙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성이 치장하지 않기로 한 이상 아무것도 더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비쩍 마르고 금발인 여자들’이 미의 표준 인양 등장하는 성차별주의적 이미지들, 여자들의 자기 몸에 대한 혐오는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 페미니즘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 문화를 가시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누구나 젠더, 여성 문제를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그게 페미니즘 관점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너무 축소해서 보는 것일 수 있다. ‘국가, 종교, 애국심, 인권’ 등도 우리가 구축하는 허구 이야기라고 말하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이 주목되듯이 우리의 인식은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더 폭넓게 보려 하고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과 아동에 대한 여남 모두가 관여된 폭력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문화혁명"을 일으켰다. 훅스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페미니즘 담론이 지닌 한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정치는 여전히 이론과 실천의 결과로서 상호 간 행복의 비전을 제시하는 유일한 사회운동”이라고 말했다. “유일한”이란 표현이 좀 과도하다 싶지만 불평등과 불화가 만연한 지금 이 시대에,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공동체 추구'는 유혈 없는 21세기의 훌륭한 혁명정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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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8-10-17 1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갈마님, 잘 지내고 있으시죠?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바쁘고 고단한 일이 많아 최근 이 곳도 접속을 못하고 있네요. : ) 신카이 마코토 애니메이션 보면 각각 우주의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두 주인공의 애틋한 교신에 대해서 나오는데요. 추석 후 보름은 지나서 명절 인사를 나누고, 다시 또 보름은 지나서 그 답을 드리는 우리의 사정도 못할 바는 없군요. 종종 갈마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읽고, 쓰시겠지 하고 들어와 보면 역시 그렇게 계시는군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이번에 올린 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끄덕끄덕 하면서요. 벨 훅스의 책은 저도 탐독 했었는데, 갈마님 리뷰로 새롭게 보이네요.

2018-10-19 12: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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