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 감각 말고 실제 감각 탐구 시작 1

소리는 3초에 1킬로미터를 이동하기 때문에 내 손뼉 소리는 3킬로미터의 왕복 여행을 다녀온 셈이었다. 나중에 터널 아래로 한참 내려간 우리는 소리가 튕겨 나왔던 계단을 발견했다. 구역질 나는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로 뒤덮인 계단이었다.

낮은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어서 머리를 부딪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것은 잘 부러지는 암석으로 이뤄진 종유석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채 벽돌에 매달린 지방질 침전물이었다. 나는 키가 컸기 때문에 머리가 천장에 무척 가까웠고 이 역겨운 종유석은 내 셔츠 뒤쪽으로 비집고 들어와 피부를 할퀴었다. 이곳은 혐오스러운 종유석들이 있다는 점에서는 최악의 장소였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한 음향 효과를 관찰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라디오 인터뷰가 시작되자 나는 내 목소리가 원형 모양의 터널 벽을 바싹 붙어 나아가 나선을 그리며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말소리는 죽음의 벽을 달리는 오토바이처럼(커다란 원통 안쪽을 오토바이로 달리는 묘기를 말함—옮긴이. 이하 모든 용어 풀이는 옮긴이의 주다.) 휘어진 하수도 안쪽을 회전하면서 나아갔다. 다른 감각들이 전부 혐오에 압도되어 있는 동안 내 귀는 보석 같은 놀라운 소리를 맛보고 있었다.

청각적 주의에 대해 처음 연구가 이뤄진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군대에서 전투기 조종사들이 가끔 엄청나게 중요한 청각 메시지를 무시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잔향 시간과 함께 실내 설계자가 고려해야 할 요인은 진동수(주파수)다. 진동수는 사람이 감지하는 음의 높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악기를 켤 때 바이올린 줄은 조그만 줄넘기 줄처럼 원을 그리며 휙휙 돈다. 연주자가 음악에서 ‘가온 도middle C’라 불리는 음을 연주하면 줄넘기 줄은 1초에 262번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바이올린의 진동이 1초에 262개의 음파를 공기 중에 내보내는 것이다. 이때의 진동수가 262헤르츠다(종종 Hz로 표기된다). 이 헤르츠라는 단위는 처음으로 라디오파를 보내고 받은 19세기의 독일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의 이름을 땄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장 낮은 주파수는 대개 20헤르츠 언저리이며 젊은 성인의 경우 들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주파수는 약 2만 헤르츠다. 하지만 중요한 진동수들은 대부분 이처럼 듣기에 극단적인 수치가 아니다. 그랜드피아노가 내는 음은 30~4,000헤르츠 정도에 불과하다. 이 범위를 넘어서면 음의 높이를 쉽게 분간하지 못하고 모든 음이 똑같이 들리기 시작한다. 4,000헤르츠를 넘어가면 우리가 듣기에 음악의 멜로디는 음치가 아무렇게나 분 휘파람 소리가 된다.

콘서트홀에서 대부분의 음향을 흡수하는 것은 관중이다. 바게날은 좌석을 500개 줄여 잔향 시간을 늘리자고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 대신 혁신적인 해결책 하나가 발견되었다. 전자 기기를 활용해 인위적으로 음향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에 이르는 계절 시작시인선 43
조연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춘수 시인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처서 지나고」)라고 했다면, 조연호 시인은 ˝메뚜기 앞이마 같은 집을 얻었구나, 내 방을 둘러보고 할머니가 말했다.˝(「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라고.


김춘식 평론가 평에 공감해 내가 애써 더 덧붙일 게 없다.
이렇게 품절되긴 아까운 시집.

그 벽 한구석에 나는 달력 대신 뭉크의 판화「죽음의 집」을 붙여놓았다. 창 밖은 비극적 세계관이지 않은가
ㅡ「죽음의 집」

겨우내 나는 길눈이 어두웠다. 나는 또 詩라는 잘 닫히지 않는 상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해맑은 소년 같던 옆집 고양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처럼 평생 바람을 퍼올리던 아카시아숲, 나는 또 病이라는 낡은 산책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친구가 남기고 간 화분 속 석회가루들이 잎새 쪽으로 희게 몰려간다. 고즈넉한 자목련과 친족들의 장례와 트럭 폐유의 냄새, 모든 걸 다 숨기기에 이 상자는 너무 거짓말이 많았다. 소음벽 아래 모인 목련이 용서로 가득 채워진 꽃잎을 꺼낸다. 다만 한 발짝씩 기억에서 발을 옮겨놓았을 뿐인데도, 좌판을 벌이는 노인네의 감자 몇 알처럼 뎅글뎅글하게달이 떠오른다. 생명체가 있을지도 몰라, 시력 나쁜 애인은 깊게 패인 쪽의 달이 신비롭다. 전생이 있다면, 그것이 서로의 열매를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의 흔들림이라면, 목련이 있던 자리에서 한걸음 비껴서서 목련꽃이 핀다. 달의 인력이, 애인의 월경이 목련을 끌어당긴다. 영영 소년이 될 수 없는 아이와 상자 속의 거짓들은 용서 받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ㅡ「달의 목련」


누군가 강 저편으로 외롭게 돌 던졌고, 항상 돌은 더 아프고 더 외로운 쪽으로만 날아갔다. 어떤 이가 몸 속에 깊은 웅덩이를 파고 목마름을 담는다. 식물에게 四柱가 없는 것이 슬펐다
ㅡ「불을 꿈꾸며」


좁은 골목을 휘저으며 산꼭대기로 오르던 과일장수 여자의 두꺼운 팔뚝이 행복에도 불행에도 가깝지 않았다.
ㅡ「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꺾이고 어떤 나무들은 스스로 젊어진다.
ㅡ「나쁜 혈통」

봄볕 내리던 날, 다투어 가지 않아도 아물지 않은 상처와 만나졌다.
ㅡ「오월」


비 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 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 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 굴리는 소리만큼 크다.(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燈을 켜지 않았다.
오월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쩍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남는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ㅡ「오월」


너무 많은 질투를 가진 이상한 아동인 빨간 모자, 따뜻해지고 싶은 어린 시절이 모두 불화의 색깔이었다.
ㅡ「빨간 모자」


연인의 퍼즐 맞추기가 석양 아래 거진 끝나가는 것이, 뭔가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태양은 억새꽃 아래,
굴뚝은 수납장 옆에, 뿌리는 가지 위에, 연인의 손끝이 세상을 하나하나 완성해 간다. 마지막 한 조각을 남겨두고 이제 갈림길과 걸음을 마주했으니 어쩌나, 뒤집힌 무당벌레처럼 擬死하는 하늘, 이 길들 중 어느 쪽을 죽여 붉고 무거운 쪽을 가질 수 있을까.
ㅡ「갈림길」


바퀴벌레는 바퀴벌레와만 교미했고 뒤집힌 손이 뒤집힌 손을 맞잡았다.
ㅡ「해피엔딩」

배부름과 같거나 비슷해진 말들이 그의 속에서 텅텅 울린다.
ㅡ「斷食」


처음엔 生이 얇은 비닐막 같았고, 다음엔 김 휘휘 도는 찌개그릇 같았고, 나중에 生은 자기 입에 못 담을 험담들이 되어갔다. 
ㅡ「모래의 시작」


희망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해 내가 울다.
ㅡ「희망」


여름 개암열매에는 아직 세속의 이름이 없다고 애인이 말했다.
ㅡ「몇 개의 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제는 감각 자체가 아니다. 감각에 매몰되어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감각이 천상의 신들의 회전을 보고 그것을 본받아 우리 내면에 다시 질서와 조화를 가져오는 데에 쓰일 때, “야만적인 진흙탕 속에 묻힌 영혼의 눈”은 비로소 천상의 신들이 사는 저 영원한 세계를 향할 것이다.˝
ㅡ <06. 불을 뿜는 눈: 플라톤>

현대시를 ‘그들만의 리그‘라고 자주 말하는데 철학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위의 저 문장이 21세기에 어울리는지. 차라투스트라 빙의라도 보는 거 같아 내 눈이 민망할 지경.
예술에 국한된 미학을 새로운 위상으로 쓴다는 취지는 좋지만 이 글들이 효과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야마구치 슈가 철학 등반에서 독자들이 초반에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고 한 제 1 경고대로 서양 철학의 계보와 개념들의 지루한 연결, 고답적 수사... 오랜만에 펼쳐든 진중권 저자 책인데 무척 실망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감각‘의 역사를 처음부터, 세세히 짚어보는 건 좋지만 현재의 다양한 학제 간의 지식과 적극적인 연계, 독자의 호기심 자극 등이 부족해 나로선 근본적으로 답답하다. 3부작으로 기획된 책이라는데 이런 식이라면 적극적으로 따라갈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분명한 건 친절한 대중서는 아니라서 저자의『미학 오디세이』3부작 정도로 기대한 독자라면 그보다 어려울 거라는 각오를 하시길-,-)))










시대의 전환기마다 권력은 구성원들의 신체를 뜯어고치는 생체공학을 발동한다. 가령 감각을 불신하고 정념을 억압하는 데카르트형型 아이스테시스는 중세의 호전적 전사들을 근대 국민국가의 합리적 주체subject이자 신민으로 길들이려는 기획의 산물이다. 18세기에 일어난 아이스테시스의 유미화는 서구에서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유미화의 결실인 미적 예술문화를 파괴하려 한 모더니즘 예술은 산업혁명, 특히 산업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시민사회에 던져준 정치미학적politico-aesthetic 충격의 미학적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데카르트주의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그동안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이성주의의 패러다임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감각지각, 즉 아이스테시스를 구제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미학(감성론)이라는 학문은 바로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근대미학(감성론)이 구제한 아이스테시스는 신체활동으로서 감각sensation이 아니라 정신의 하위활동으로서 지각perception이었다.
지각이란 감각이후post-sensory와 이성이전pre-rational의 인지능력이다. 이 영역을 대륙의 이성주의자들은 ‘유사이성’으로,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유사감각’으로 여겼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미학에서 다루는 감성의 영역이 대체로 과거에 ‘내감’이라 부르던 영역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한동안 망각되었던 중세와 르네상스의 내감 이론이 미학을 통해 다시 부활한 셈이다. 공통감, 상상력, 판단력 등 과거 내감의 목록을 이루던 능력들은 18세기에 일어난 감각의 유미화를 통해 새로이 정위定位된다. 근대미학에서 아이스테시스는 ‘지각’으로서만, 그것도 미적 지각으로서만 구제된다.
한편 과도한 이성주의를 수정하는 또다른 방식이 있다. 아예 그것의 토대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근대철학의 완성자 헤겔은 미학이 애써 복원한 감성의 영역을 다시 증발시켜버렸다.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감성의 영역은 자연으로 ‘외화外化’했던 정신이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궁극적으로 ‘지양止揚’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급진적인 이성중심주의의 근원도 데카르트주의다. 따라서 아이스테시스의 영역을 온전히 복원하려면 데카르트주의 자체를 거부하고, 신체와 정신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근원적 체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리스 블랑쇼 컬렉션도 나의 즐거움~
블랑쇼 신간이 자주 나와서 좀 당황스럽다💦 몇 달 전에 『지극히 높은 자』 비싸게 샀잖아요. 선집 10이 나오고 7이 나오는 상황이긴 하지만ㅎ; 이렇게 출간이 속속 되는 저자가 아닌데... 그린비,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블랑쇼답게 여전히 ‘죽음‘ 얘기 가득. 그 불가능한 앎의 도전이 나를 감동케 하고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블랑쇼만큼 죽음-부재(˝모든 것은 지워져야 한다˝)에 천착하는 저자 못 봤다. 흥미로운 것은 그 접근은 관계, 글쓰기 등을 통한다는 것. 블랑쇼 마니아가 아니라면 섣불리 샀다간 책장 망부석이 될 수 있으니 구매 주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괴마다 한 페이지 설명으로 단출해서 아쉽다. 중국 『산해경』 같은 신비한 맛도 없고🤨
but 몰랐던 한국 요괴 얘기는 재밌다. 한국 공포 드라마(《전설의 고향》), 영화는 왜 이런 요괴들을 적극 활용하지 못했는가! 신박한 요괴들 많구만. 놀래키기, 처녀귀신과 구미호 우려먹기, 일본에서 수입된 관절꺾기 귀신들만 응용하고 말이지.

E.T.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 같은 독일 낭만주의 환상문학 캐릭터는 무시무시한데, 저자가 소개하는 한국 요괴는 꽤 익살스럽다. 반쪽짜리 감을 먹은 어머니에게서 반쪽 인간으로 태어나서도 잘 자라 왕이 되는 ‘감돌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