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

세상을 고통과 비교로 보기 시작하면 빠져나갈 길이 없어. 그것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순간도 내 속에 있지. 뭐든 내 속에 다 있어. 와하하, 나 부자다! 이 부자 바보야, 그걸 누가 몰라? 근데 왜 안 해. 힘들어. 아냐, 잘 생각해 봐. 어렸을 때 몰두하던 놀이를. 이젠 그게 잘 안 돼. 음.....그렇담 노력이 필요하단 소리군?

균형을 맞추는 노력, 그게 힘들지 않아야 해. 노력을 재미로 바꾸기. 아니, 노력이 재미인 줄 모르면서 빠지고, 재미가 노력인 줄 모르고 사는 상태. 난 그림 그릴 때 그 상태가 가장 완벽했던 것 같아. 지금은 무슨 책이든 분석해서 보고 잡다한 낙서에 뭐가 정말 많아. 일까지 하면 넉다운;; 안다고 해도 잘 안 되는 이 많은 상태(아이스 커피 한 잔 마시고~캬~~)

자꾸 잊는데, 목소리에 힘주지 말 것. 그거 좋아하는 사람 없어. 좋아한다고? 상대의 노력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내가 우선 그걸 싫어하잖아? 그러면서 글쓸 땐 왜 힘줘? (입운동 살짝~~아, 에, 이, 오, 우~~)
실체 없이 가장 가볍고 짧게 도착하는 말이 너를 쓰러뜨리리라.
사랑해.
죽었어.
끝났어.



어제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집 보고 또 힘주려고 한 거 있지? 어휴)))
책 읽다가 닭살 돋고 눈물날 뻔 했어.
그렇게 오랜 시간 그의 사진을 봐 왔고, 북새통에 줄을 따라가며 전시를 봤음에도, 난 그를 전혀 몰랐단 생각이 들더군. 매일 내가 바보인 것을 깨닫는다. 나 안경 두 개 써야 될까봐. 그걸로 될까. 변명은 무엇으로도 가능하다. 깨닫기 전까지는.

장 클레르가 ˝카이로스(kairos)˝를 가져와 브레송을 얘기한 게 맘에 들었어. 제우스의 가장 어린 아들 이름이자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기회˝라고 부르는 오래된 단어.
브레송에게 붙은 ˝결정적 순간˝에 대해, 가장 오래된 기원부터 천천히 이끌어오는 침착성과 현명함, 이런 평론 좋더라.

˝한 장의 사진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의 의미작용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설명하는, 시각적으로 통찰된 형태의 엄격한 조직이, 동시 발생적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ㅡ앙리 카르티에-브레송

힘준 글은 눈에 잘 안 들어 오는데, 브레송은 사진은 가볍고 날카롭게 만들 줄 알았지만 문학수업을 했어도 언어에선 그도 어쩔 수 없었나봐ㅎ; 장 클레르의 말처럼 브레송은 카이로스에서 끊임없이 로고스를 이끌어내려 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초현실주의가 추구하는 우연성과도 결별한 거고.
브레송이 사진에서 그랬듯 언어에 날개를 찾아주기. 날개를 단 카이로스여.
그렇다고 내가 언어를 가볍게 써야 된다고 말하는 거 아닌 건 알지? (찡긋~)

여하간 그가 어릴 때 그림에 심취했고 초현실주의에 빠졌다가 노년에 데생으로 돌아간 걸 이해하겠다면, 나 너무 오만한 걸까?

하지만 느껴지는 걸.
초점이 흐려지는 걸 따질 새도 없이 잡아챈 긴박한 상황.
브레송이 바라보는 시선과 동등하게 피사체의 시선이 만나는 찰나.
그림을 그릴 때처럼 자신을 사로잡는 구도를 정확히 포착한 장면.
다음 사건이 곧 이어질 거 같은 화면의 시간성.
무엇이 지나간 듯한데도 여전히 거기 무언가 있는 것 같은 기다림.
끝없는 행진과 기다림이 거기 있어.

앙리 마티스가 새를 붙잡고 있는 모습 좀 봐ㅎㅎ;
카메라를, 연필을, 키보드를 저울과 식칼처럼 들고 있지만, 사실 그것이 오기 전까지 우린 내내 백치야. 내가 그것을 잡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오는 거지. 그것을 만날 때 나도 무엇이 되는 거고. 그것이 돈이든 영감이든 선택은 자유.
순간에 대한 기다림은 자발적이며 금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쉽게 감정에 휩싸이지. 고통, 무력감. 시체더미처럼 보이는 세계. 세상이 날 버리고 내가 세상을 죽이는 게임. 부정적이 되든 긍정적이 되든 세계가 나고 나도 세계인 거지.

난 브레송 사진을 데생이라고 말하지 않겠어. 그건 크로키였어. 가장 단 시간 안에 포착하는 스케치.
그림의 기초로 크로키를 말하지. 가볍게 생각하지만 이게 가장 힘들어. 덧칠할 시간도 없어. 한 번이면 끝나! 성공 아니면 실패!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려 봐.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 날 기다려주는 것은 하나도 없어! 나는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TV 화면에서, 날아가는 새들에게서 그것을 잡아보려 애썼지만 숱하게 실패했지. 그런데 브레송은 사진으로 성공한 거야! 순간적 집중이 곧 완성인 크로키를.

가만히 있는 것들을 그리는 데생은 느린 시간, 내가 가두는 시간이야. 그래서 사냥의 시기를 거친 후 그가 노년에 데생으로 돌아간 걸 거야.
크로키는 사냥의 시간이지. 그 사라짐 때문에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빠르고 강한가. 역설적이지 않아?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데도 느껴지는 견고함, 영원불멸의 느낌!


엉망진창, 말을 크로키처럼 하려니 힘들다. 작법 선생님들은 엄청 구박하겠지ㅎ 언어를 묵혀라!

이건 나중에 또 고칠께.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
이따 또 봐/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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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6 1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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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6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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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6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6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Dear 기형도 -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듯

 

 

 

 

 

 

 

 

 

 

 

 

 

 

 

 

 

§

 

어제 기형도에게 편지를 쓰며, 이제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밤 그렇게 멍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매번 이 모양이다. , 차라리 기형도를 몰랐다면. 이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죽은 당신이 원망스럽다. 당신이 해명 좀 해! 무지했던 어린 내가 기형도를 신화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선고는 잊을 만하면 날아든다. 이제 이건 내 문제다. 삶은 늘 이런 식이지.

 

 

이 글의 계기는, 흔적님 <신화화, 매혹, 시마(詩魔)....> 글 때문이다. ‘2005년 계간 시인세계의 기획 글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에서, 과대평가된 시인으로 서정주, 윤동주, 김수영, 기형도 시인이, 과소평가된 시인으로 박목월, 박인환, 전봉건, 김종삼 시인이 선정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과대 평가된 시인들 특히 기형도에 대한 내용이 主다. 동의되는 부분도,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2005년 나는 뭘 했더라. 그들이 이리 편을 가르든 저리 편을 가르든 나와 무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일용할 양식을 코로 뒤적여 찾는 숲속의 생물일 뿐이다.

 

전봉건과 김종삼은 특히 눈에 밟히는데, 이 글은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형도에 집중하기로 한다.

이 신화의 발단은 요절에서부터 왔. 나는 가장 가까이 비교해 볼 대상으로 진이정 시인을 생각했다. 고인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려고 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고려 바란다.

 

기형도 - 60년 출생, 연세대, 85년 동아신춘문예 등단, 89년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1989)

진이정 - 59년 출생, 경희대, 87년 실천문학 등단, 93년 폐결핵으로 사망. 유고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1994)

 

두 사람 다 첫 시집이 유고시집이며, 기형도는 김현 평론가, 진이정은 황현산 평론가가 해설을 맡았다. 진이정의 시집엔 지인인 유하 시인의 발문까지 있다. 기형도 시인이 스펙상(죄송...)으로 조금 더 앞서는 듯 보이지만, 지금 진이정 시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집은 절판된 지 오래다. 세계사가 망한 관계로 재출판 될 가능성도 없다.

결정적인 차이는 뭘까. 기형도가 먼저 죽어서? 기이한 죽음이어서? 유명한 출판사여서? 김현 평론가의 후광 때문에? 학벌? 인맥도 넓고 유명한 지인들의 끝없는 추도 때문에? 잘 생겨서?

 

 

 

아트만의 나날들

 



 

 

약 냄새,
돈은 슬퍼라,
어린 육체보다 더 슬픈 십원짜리 지페,
황혼, 두견, 소양강 처녀보다 더 슬픈
내 어릴 적의 십원짜리 지폐,
미국 중앙정보부가 노나주었던 십원짜리 지폐,
어느덧 나의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그 사내의 선의를 믿지 못하네
코끝에선 약냄새가 났고,
미친 듯이 돈을 뿌리는 백인 병사의 곁을 지나
적산가옥 앞길을 지나
포대기에 업힌 나는 어디론다 실려가고 있었다
외삼촌의 술주정이 약냄새에 섞여 날 어지럽게 한다
박카스를 한 병 마시곤 다시 잠든 외삼촌
그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의 아트만은 사라지고 없다 한다
그러니 거룩한 브라만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그리워하는 건
박카스에 취한, 구체적인, 생생한 그의 아트만이다
난 그런 현실감에 목마른 것이다
자동차 바퀴살을 호이루라고 부르던 시절,
<빵구 나오시> 집에서 나는 살았다
일용할 봉지쌀과 함께 퇴근하던 외삼촌의 구체성은
저 머나먼 브라만 속으로 사라졌다 한다
그러나 내가 브라만을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봉지쌀 아트만이 사라졌듯이, 내 유년시절의 아트만들도
이젠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기분을 슬프다고 하는 것일까
이 범아일여의 천지에서 아니 슬픈 것이 무엇이던가
오십환짜리 백동전처럼 남루한 슬픔이지만,
슬픔의 화폐개혁은 아직도 기약 없어라
슬픔의 지폐에서 길어올린 육십년대 꼬마의 쾌락들,
땡이와 연필 함대, 크라운 산도, 코롬방 아이스케키…
고 코묻은 아트만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라는 말씀조차
내겐 더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브라만을 믿지 않듯, 지금 나는
온갖 종류의 아트만을 신뢰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렇다 …
그냥 없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거의 삼십 갑자가 흘렀다
그리고 나는 중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제 난 구체성의 신, 일상성의 보살만을 믿기로 한 것이다
덧없음의 지우개 앞에, 난 흑판처럼 선뜻 맨살을 내밀 뿐이다
아트만이 무너진 마당에
인생이 꿈이란 건, 그 얼마나 뻔한 비유인가
이제부터 나의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현실이다
하지만 못내 구체적인, 빵꾸 나오시 가게의 흙바닥에 굴러 다니던
호이루와 몽키스패너들의 그 완강함이다
나, 아트만 없이 숨쉬고 있다
브라만에 구걸하지 않으리라
난 이제서야 그 옛날의 십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
그 슬픈 돈을 내고 구체적인 박카스를 한 병 사먹으리라
슬픔의 드링크에 취해, 내내 위안받으리라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각성이
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
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

 

 


 

 

 

詩 진이정

 

 

내가 두 사람의 시들을 꼼꼼히 읽어본 바로, 시에 대한, 시대에 대한, 사람에 대한 고민은 죄송하지만 진이정 시인이 더 치열하다. 그런데 그는 왜 잊히는 걸까. 진이정이 쓰고 있는 시어들을 언급하면 당신은 짐작할지 모르겠다.

천지, 영겁, 백마부대 용사들, 기지촌, 이태원, 보광동, 인류애, 윤회, 보수화, 수호신, 카바레, 조국, 미국 중앙정보부, 아트만, 브라만, 보살, 강남 중산층, 사바세계, 굿, 민족반역자, 해탈……

나는 이 시어를 부정적으로 가져온 게 아니다. 두 사람의 발화방식도 매우 상이하지만, 이 시어들은 기형도 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와 가난을 겪었지만, 기형도는 광주나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시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결정적 차이는 비겁함모던함이다. ‘그의 죽음이 완벽한 액자가 되었고, 그림은 전시되었다. 내가 정리하는 기형도 신화는 이것이다. 내가 그랬듯 지금의 독자들이 여전히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이 비겁하고, 우리 속내를 모던하게 꾸미길 바라며, 겪지 않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흠모하는 자이기 때문에!!!

 

또 비교해 볼 시인이 있는데, 이 부분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같은 해 교통사고로 사망한 신기섭 시인도 <분홍색 흐느낌>(2006, 문학동네, 품절)이 유고 시집으로 나왔다. 그로테스크와 죽음의 향기는 진이정, 기형도보다 더 강렬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앞서 말한 결정적 차이 때문에 그리 알려지지 못했다고 나는 진단한다.

 

 

 

추억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 속같아
하얀 꽃, 숨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 속을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에서 천천히 숨쉰다
빨랫줄 잡고 변소에 갈 때처럼
절뚝절뚝 할머니의 몸이 움직인다
내 가슴속을 밟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따뜻한 봄날이므로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할머니는 또
똥을 싼다 지금 내 가슴 속 가득
흘러넘치더니 구석구석
번지더니 몸 바깥으로 터져나오는
추억, 향기로운 나무껍질처럼
내 몸을 감싸고, 따뜻하다

 

 


  

 신기섭

 

 

 

더불어 기형도와 김수영이 대중들에게 이토록 신화화 될 수 있었던 것도 앞서 말한 비겁함모던함이 만든 시세계, ‘이른 죽음이라는 완벽한 액자, 이 구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ɑ가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호남형?

평단의 신화는 평론가들의 것이겠지만, 시장에서는 어림없는 소리다. 이 시장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평론의 신화화가 더 가중되고 있는 걸 그들은 모른다. 선택에선 영향을 줄 지 몰라도 詩의 수용은 오로지 독자만의 몫이다. 그 시들은 바로 우리의 허위였다!  

 

내 짧은 변론은 여기서 마친다.

언젠가 과소평가된 다른 시인들에 대해서도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내가 살아있다면.

 

 

 

ㅡAgalma

 

 

 

덧)

죽은 이들을 함부로 말한 죄를 통감하며,

마지막으로 황현산 평론가가 진이정 시인의 해설로 쓴 문장을 가져온다.

순간을 그토록 옮기고자 한, 모든 죽은 시인에 대한 추도사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그의 시와 맺는 관계도 그 세계와의 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 육체가 정신의 좁은 감옥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시가 어떤 방식의 해방을 기약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의 삶을 통해서만 증명된다. 해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문제 자체를 없애버리는 해답은 해답이 아니다. 지우개에 지워지는 글자는 지워지고 남은 흑판으로가 아니라 지워지는 순간으로 자신의 존재를 영원에 새긴다."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세계사,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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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6-07 0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이정과 기형도를 비교한 부분은 설득력이 강합니다.
이 점을 참고해야겠네요. 신기섭의 경우도 그렇고요.
감사합니다. 대중의 선호는 불확실하고 다소 치우친
부분이 분명 있지요. 시 읽기가 이미지, 느낌 등과
무관할 수 없지만 ‘이미지로만, 느낌으로만‘ 또는
’이미지와 느낌에 치우쳐‘ 대하고 수용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진이정 시인은 요절 시인이라고만 알고
있었으니 더할 부분이 있지 않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시여서 선호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형도를 중점적으로 언급한 것은 (어제 바로 올렸다가 지우신 댓글과 달리)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평론(가들)과 시인, 또는
평론(가들)과 대중(적 취향)의 차이를 밝히려는 의도로 시작한 글은
아니었지만 agalma님의 글을 통해 그런 단서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변명 같은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기형도 시를 대중이
신화가 되게 한 것에 굳이 책임(신화화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여야겠지만)을 묻자면 시나 문학작품을 평소에 거의
읽지 않다가 이상한 분위기에 편승해 snob처럼 들고 다니고
입에 올린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지 싶습니다.

블로그에 게시한 글들을 보면 그래도 책을 읽는 사람들인 블로거들이
어떤 글을 선호하고 선호하지 않는지 참 종잡을 수 없고
상(적립금)을 주는 경우도 일정한 원칙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과 신화화는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의 경우
다른 인터넷 서점들과 달리 비교적 일관성이 있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진지한 글을 당선작으로 뽑는 것 같습니다. 머리를 어지럽혀 죄송합니다.

AgalmA 2015-06-07 07:30   좋아요 0 | URL
제가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는 `모던함`이 기형도 ㅡ 진이정, 신기섭을 가르는 차이입니다. 그들은 시 속에서 비겁하려 하지도 않았고요. 용감함과는 다른. 솔직함도 정확하지 않죠.
김수영과 기형도는 좀 다른 양상이지만, 기형도 경우는 확실히 대중의 공감을 잡았고 죽었기에 신화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신화로 인해 더욱 대중화되는 우로보로스 상태가 된 거죠.

이 글로 대체될 듯해서 댓글은 지웠습니다. 신경쓰실 일은 아닙니다~

수이 2015-06-0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이정은 읽었지만 신기섭이라는 이름은 처음인걸요_ 저도 반성하는 의미에서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AgalmA 2015-06-08 00:31   좋아요 0 | URL
우리가 모든 걸 어떻게 알겠어요^^; 신기섭 시집은 품절이고 도서관에도 잘 없는 시집이라...삶이 참 신산했을 시인...
 

§

보슬비님 페이퍼(http://blog.aladin.co.kr/boslbee/7582075) <콩고양이>그림책 보고, 고양이가 엄청 그리고 싶어서 간만에 습작을 해봤다. 키우지 못하면 그리기라도! 헌데 모처럼 내 그림 그리려니 쉽지 않다.
고양이를 그린다는 게, 멋진 말이 눈에 먼저 들어와 말을 그리다 헉; 원래 계획이 어디로! 다시 고양이로.
주인공은 고양이었는데, 고양이가 제일 맘에 들지 않는다. 원했던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아니었다ㅡㅜ!

하루에 한 장, 매일 고양이 그림을 그릴까.
하라는 외국어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딴짓이야. 뭐 될래?
몰라. 그림 그리는 게 뭐 어때서!
낼 폭탄이 떨어져도 나는 그림을 그릴테다. 흥.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낼 지구가 망해도 과실수를 심겠다고 한 사람이 스피노자가 처음이지도, 유일하지도 않았다. 그 이전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에서도 그런 얘기가 있다고 한다.
스피노자를 강조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방점을 찍어서일까. 하지만 스피노자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그런 명언과 핵심만 알아서야... 나조차도 그런 주입식 암기로만 공부했으니. 다시 한번 교육의 시기와 방식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뭐야, 고양이 그림 얘기하다 뜬금없는 급진지 모드;

사드는 자기 무덤에 과실수를 심어달라고 유언했다던데(당연히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다;), 흔적이 지워지기는커녕 명성이 승승장구~ 그는 작전이 성공했다고 지하에서 회심의 미소 짓지 않을까.

생각 짓지 말고 그림이나 그려라. Agalma 씨.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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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dgling 2015-06-06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걸 소묘라고 했던가요. 재능이 있으시네요!

AgalmA 2015-06-06 03:49   좋아요 0 | URL
소묘는 따라 그리는 거라 꾸준히 하면 늘죠.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

fledgling 2015-06-06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가 예쁘네요~ 소개 좀 시켜주세요~^^ 잠이 안 와서 뒤척이고 있는데 반가운 답글이! 즐거운 주말이죠?

AgalmA 2015-06-06 04:16   좋아요 1 | URL
저 소녀는 제게도 그림의 여인입니다ㅎ; 책이 갑자기 안 읽히고 영화도 눈에 안 들어와서 그림삼매경 잠깐 갔다왔죠. 억, 벌써 4시...fledgling님은 어쩌다 이리 늦게까지 안 주무시고.

fledgling 2015-06-06 04:04   좋아요 0 | URL
낮과 밤이 바뀌어서 큰 일입니다. 요즘 자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요... 메르스때문에 방콕모드까지.. 책읽기 딱 좋죠~? ㅠ

AgalmA 2015-06-06 04:12   좋아요 0 | URL
저는 강제백수라...돈도 없고...아녀도 늘 부엉이 신세였지만ㅎ 읽을 책은 많은데, 갑자기 공황상태라 난감한 새벽입니다

2015-06-06 0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6 0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6 0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6 0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6 0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6 0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6 0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6 0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5-06-06 0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림 잘 그리시네요^^ 제 눈에는 고양이.. 충분히 귀여운데 말입니다~?? 그림의 선이 주는 느낌이 굉장히 따뜻하고 좋아요! ^^

AgalmA 2015-06-06 12:49   좋아요 1 | URL
소녀와 비례 비교했을 때 6년 이상된 장년 고양이죠. 얼굴은 동안;; 그리기 쉽게 크게 그린 판단착오가; 그림그리며 또 이런 걸 배우게 되죠^^;
따뜻하게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헤헤

단발머리 2015-06-06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저도 고양이 허리선이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Agalma님 글 찾아 읽는데 댓글 달고 싶어도 내용이 어려워서 포기... 할 때가 많았어요. 오늘은 고양이 그림이라 용기내서 달아봅니다~~

AgalmA 2015-06-06 20:02   좋아요 0 | URL
음... 제가 혼잣말 안 되려고(그러나 상당히 혼잣말을 하고 있다;) 소통의 노력을 하는데, 여러모로 참....용기까지 내야 하나요ㅡㅜ;
고양이 인기 덕에 단발머리님과 즐거운 대화를^ㅇ^! 담엔 동물농장 그려야겠어요ㅎㅎ!

북다이제스터 2015-06-06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화에 모두 능하시군요^^ 신영복 선생님이 글쓰는 사람도 그리기에 관심 갖고 소양을 개발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

AgalmA 2015-06-06 16:42   좋아요 0 | URL
글보다 산수보다 그림을 먼저 시작했죠. 지금까지도 다행히 산수보다는 실력이 좋습니다. 과연 이것은 자랑이라는 소린가;
그림그리기가 창의성도 길러주고, 심신단련에도 좋은 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생활이라는 육체적 결박까지 겪으셔서 표현의 자유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보슬비 2015-06-06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진자 잘그리셨네요. 고양이도 소녀도 보는내내 행복해지는 느낌이예요.
이제보는 글뿐만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시는 만능 재주꾼이셨네요.

AgalmA 2015-06-06 15:08   좋아요 0 | URL
다 보슬비님 덕분이에요^^ 보슬비님 페이퍼 보면 그림그리기 충동이 ((((뭉게뭉게)))
글보다 그림을 더 잘 하고 싶어요...언제나...

돌궐 2015-06-06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혹시 다빈치하고 미켈란이하고 라파엘하고 친구 먹다가 온 르네상스인 아닌가요?

AgalmA 2015-06-06 16:58   좋아요 0 | URL
저는 고딕예술 장르쪽이 더 적성에 맞더라고요^^
르네상스인이 되기엔 수학때문에 다 틀어져버렸어요. 흑흑;;
저 그림도 원근법 무시한 게 팍팍 티가 나죠;;

AgalmA 2015-06-06 19:17   좋아요 0 | URL
어느 서커스에 팔려고 이 분들이...;_;)...당나귀로 변하기 싫은데;;

돌궐 2015-06-06 19:38   좋아요 1 | URL
원근법이 뭐죠? 먹는 겁니까? 아... 피카소가 발라버렸다던 그 진부한 상징형식 말씀하시는 건가요?
21세기가 됐는데 아직도 그런거에 연연하시면 르네상스인도 중세인도 아니지요.^^

AgalmA 2015-06-06 19:56   좋아요 0 | URL
제 궁극의 목표는 초현실주의자였습니다만 그것도 한참 전에 유행지났대요. 뭐 좀 하려고 하면 이미 다 했대니 거참;

만화애니비평 2015-06-06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 원피스 좋군요

AgalmA 2015-06-06 19:26   좋아요 0 | URL
항상 색을 칠하고 나면 후회돼요. 다른 색으로 칠하고 싶어져서...아날로그와 디지털 표현 방식을 이 지점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돼요. 디지털은 아주 쉽게 바꿀 수 있으니까 말이죠. 하여간 이제 바꿀 수 없게 되었어요^^;

CREBBP 2015-06-07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에서 튀어나올 듯한 소녀인데 아무것도 안보고 그리셨다면 완전 소질 있으신 듯.. (고양이는 뒷전)

AgalmA 2015-06-07 00:49   좋아요 1 | URL
고양이가 주인공인데ㅜㅜ...네, 소녀는 오로지 제 머릿속에서만 나왔습니다. 머릿속에 뭐가 더 있는지 자주 그려야겠어요...

오쌩 2015-06-0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보니, 갑자기 은하철도의 메텔이 생각나네요ㅎ

AgalmA 2015-06-13 18:03   좋아요 0 | URL
오, 우리의 현명하고 아름다운 메텔여사~ 지금의 저보다 더 어린 나이일 거 같지만ㅎ 만화 속 성숙한 여인 캐릭터로는 top

나와같다면 2015-09-1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 고양이를 키우지는 못하는 여린 마음.. 알 수 있을것 같아요..

AgalmA 2015-09-14 00:35   좋아요 0 | URL
여러 가지로 공감대가 많아서 그럴까요....고맙습니다...
 
病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입 속의 검은 잎> )

 

당신을 안 지 20년이 지났어. 누군가에겐 20살 넘은 아들이 있다면, 내겐 20년 넘은 허무가 있는 셈이야. 책갈피로 꽂아두었던 낙엽이 페이지를 누렇게 물들이는 것을 매해 지켜보았고, 년도를 확인할 수 없는 메모들 속에 올해도 몇 자 끄적였어. 이건 희망일까.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 )

 

당신 시집 속에 희망이란 단어가 얼마나 많은지 당신은 세보고 죽었을까. 아니었을 거야. 20번도 넘을 텐데 나는 굳이 세지 않았어. '희망'으로 가장했지만 ‘허무’였지. 그건 세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삶과 허무는 동등하며 계속돼. 진짜 ‘희망’ 또한 셀 수도 재현할 수도 없어. 그래서 당신은 미안하지만을 붙였을 거야. 그 문장에 이어지는 시 속에 떨어지고’, ‘덮는다’, ‘멎는다’, ‘쓰러져’, ‘굴러다닌다’, ‘떠나’, ‘없으니’, ‘나부낀다’, ‘들이닥쳤는지’, ‘알지 못한다’, ‘갈라졌으니’, ‘주저앉으면’, ‘감시해온’, ‘머물다’, ‘흘러온다’, ‘늙은으로 끝나는 동사들에서 희망’은 계속 실패 중이지. 형용사들도 마찬가지고. 당신의 시집 전체가 그렇지.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植木祭> ) 각오는 무력하고,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물 속의 사막> ) 말하는 자조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 ) 말하는 탄식은 스스로를 휘어잡지. 무관심만이 우리를 쉬게 한다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는 없어진다”(<종이달> ) 말하며 추억을 부르고 죽여도 이 허무는 계속돼. 글로 집을 짓고 버리는 한 내내.

 

“‘내버려두세요. 뭐든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 아무도 없을 때는 발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법이죠스위치를 내릴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가슴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그 소리는 분명히 내게 들렸다.”(<소리 1> )

 

끈질기게 귀 기울이는 <소리 1>에 이어지는 시는 <소리의 뼈>. 소리의 뼈가 무엇인지 우리는 많은 견해를 내세우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보다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소리의 뼈>中) . 하지만 슬픔은 유예된 것에 지나지 않지.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 순간은 나타나자마자 죽어. 잃어버림과 시간은 영원한 짝.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럽지만 창밖에서 사내의 울음을 중지시키지 않고 들어주는 일(<기억할 만한 지나침> ). 나는 당신 시집을 그렇게 들어주고 있어. 매년. 당신은 알지 못하지. 나는 살아남았지만 당신은 없어. 당신이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나도 당신에게 그래. 당신이 짐작하지 못한 '희망'이 이런 거면 안 될까.

 

나도 미안하지만 이거 하난 짚고 넘어갈게. 당신은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詩作 메모)고 말하면서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썼어.

밤눈은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아. 지상도 거부하지 않고. 그렇게 연결 짓는 건 우리야. 나는 이걸 교훈 삼고 다른 걸 생각할 거야. 그런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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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은 시인을 위한 변론, 그리고 두 갈래 고해
    from 공 음 미 문 2015-06-07 03:43 
    § 나는 어제 기형도에게 편지를 쓰며, 이제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밤 그렇게 멍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매번 이 모양이다. 아, 차라리 기형도를 몰랐다면. 이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죽은 당신이 원망스럽다. 당신이 해명 좀 해! 무지했던 어린 내가 기형도를 신화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선고는 잊을 만하면 날아든다. 이제 이건 내 문제다. 삶은 늘 이런 식이지. 이 글의 계기는, 흔적님 <신화화, 매혹, 시
 
 
AgalmA 2015-06-0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오늘부로 버린다

2015-06-05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5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5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애 2015-06-06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난 적 없지만 소년이며 청년 시절엔 전 그의 그림자 같기도 하였죠.

AgalmA 2015-06-06 15:00   좋아요 0 | URL
기형도....제 인생을 참많이 뒤흔든 지진였어요.....지금도 그 여진이 가끔.
 

 

 

 

 

 

 

 

 

 

 

 

 

 

 

 

 

 § 엄원태와 박진성 

엄원태 시인의 병과 시를 보며, 일명 病詩 불리는 박진성 시와 겹쳤습니다. 박진성 시인은 공황장애를 오래도록 앓고 있다고 하더군요. 최근 나온 박진성 식물의 밤(2014, 문학과 지성사)은 읽어보지 못했으나, 제가 읽었던 시집(목숨』 『아라리)이 그 투쟁의 역사임은 분명했습니다.

 

 

 

외도

 

 

 

일행이 배[]에 오르고서야 바다를 본다 外島 바깥에는 낡은 선착장이 있

 

고 수령 몇 백 년 느티가 있고 오래 사람에 섞이지 못한 내가 있다 지금 나의

 

우울은 외도 외도 외워지지 않는 낡은 시집 구절 때문일까 어떤 싯구는 내

 

동공에 닿아 종이의 결을 버리고 격렬함으로 출렁인다, 출렁인다, 사람 밖

 

에서 사람을 쓰겠다는 나의 각오는 지나친 外道였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관

 

광안내 표지판 지나 外島에 가까운 선착장 부두에 앉는다 해금강이라든가

 

매물도 같은 지명들이 시집 사이에서 뒹굴었다 外島, 시집 한 켠을 다 읽고

 

나서야 나는 늙은 배를 손질하는 어부 지느러미 같은 장화를 본다 알약을

 

삼키는데 내 안에서 外島가 꿈틀댔다 숙취로 속은 엉망인데 ‥‥‥ 유람선 밖

 

으로 일행들이 걸어 나온다 나는 그걸 구토, 라고 쓰는 대신 귀환이라고 적

 

는다 태평양 너른 바다에 내 오랜 외도를 버리고 싶었다 뼈아픈 외도가

 

에 닿을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물결처럼 흔들려야 하나, 일행이 外島

 

바람이라며 두 손 가득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나의 指紋들이 내가 알 수 없는

 

길을 만들고 있었다, 격렬하게

 

 

 

 

 

 

 

 

 

 

박진성 아라리(2008)

 

 

 

 

 §§ 병과 나 

제 개인사를 잠깐 말해도 될까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 늑막염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집안이 망해서 시골로 야반도주 한 형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 죄 때문에 아이가 이리 된 것이라 많이 우셨고, 철없는 저는 다시 만난 어머니의 사랑이라 아프면서도 좋았습니다. 어머니 등에 꼬옥 업혀 병원 가는 게 그리 싫지 않았고, 수업을 따라갈 수 없어 지진아 반에 들어가 구구단을 외워도 그리 괴롭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겐 아이들이 뛰어노는 운동장이 눈부신 천국 같았습니다. 병이 나았을 때 평범해진 운동장을 보고 천국과 환상이 사라진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20년 뒤에 또 폐결핵을 앓게 됐는데, 제 병을 걱정하기보다 주변 사람에게 옮겼을까봐 이 사람 저 사람 가까이 지낸 이들에게 검사를 받아보라고 말하는 상황인 게 초라하고 슬펐습니다. 폐결핵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병이라 돈이 그리 들지 않아 이번에도 살아남았지요. 이런 과정을 겪어온 터라 을 앓는 시인들의 를 저는 공감하며 관심 있게 보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 웅크려 흔들리지만 환한 빛의 세계를 꿈꾸는 일을 말이죠. 병 속에서는 이성적 관념이 존재할 공간이 없습니다. 그곳은 감각과 직관이 소용돌이치는 곳이며, 어떠한 것도 절실한 소망이며, 죽을힘을 다해 부여잡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 그로테스크적인 리얼리즘이 아니라 그로테스크와 리얼리즘

기형도 작품 중 「미로」라는 단편은 병든 귀를 치료하러 간 이야기지요. 누구든 아프면 삶은 즉각 '죽음을 향한 미로'가 됩니다. 작가는 병, 아픔을 통해 임사(臨死) 상태가 되며, 글로 옮길 때 샤먼이 되죠. 저는 기형도 시인의 시와 소설을 엄살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람에 따라 경험벼랑 끝의 체험일 수 있습니다.

'그로테스크'의 양식과 기능, 목적은 매우 다양합니다. 기형도 작품에서 보는 그로테스크의 특징으로 이 문장을 가져와 볼 수 있겠습니다.

 

그로테스크는 낯설어진 혹은 소외된 세계의 표현이다. , 새로운 관점에서 봄으로써 친숙한 세계가 갑작스럽게 낯설어진다(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낯설음은 희극적이거나 또는 으스스한 것, 아니면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로테스크는 터무니없는 것과 벌이는 게임이다. 다시 말해서 그로테스크를 추구하는 예술가는 존재의 깊은 부조리들과 반쯤은 우스개로 반쯤은 겁에 질려 장난을 한다.

그로테스크는 세상의 악마적 요소를 통제해서 쫓아내려는 시도이다“(ㅡ카이저, p24)

 

기형도는 부정성에 깊이 천착했지만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 그로테스크 요소와 사실 요소를 끊임없이 병렬했습니다. 그런데 흔적님이 말씀하시는 평론가들의 이의제기는 '김현은 어떻게 그로테스크와 리얼리즘을 같이 붙여서 볼 수 있는가' 이죠?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연상되기도 하는, 기형도의 등단작 <안개>만 살펴봐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한밤중에 입이 틀어 막히고 사라지는 여공과 안개 속에 한 사내의 반쪽이 잘리는' 그 시가 그로테스크하지 않고 리얼하지 않다고요? 이라 지칭되는 사내가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쥐새끼처럼 끽끽대는 게 그로테스크하지 않고 리얼하지 않다고요? 그로테스크의 절정이라 생각되는 <포도밭 묘지> 연작 시에서 자신이 주인인지 종()인지 헷갈려하며 벌벌 떨고 있는 지경을 그로테스크하지 않고 리얼하지 않다고요? 여기 그로테스크와 리얼리즘은 단절보다 보족적이며 교류가 잘 되고 있습니다.  제발 시인이 세계를 극한으로 껴안고 병과 약을 제 스스로 앓고 먹고 있듯이 평론가들도 절절히 앓아보고 그런 재단을 하길 강권합니다. 귀납이니 연역이니 이론으로 갈기갈기 찢으려고 하지 말고, 그들이 제대로 해 본적 없는 창작을 해보고 그런 소리를 하기를.

 

단절과 연결에 대해서,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연결해 말씀드리자면, 입과 항문은 서로 단절적인 관계가 아니고, 항문과 똥은 서로 단절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서로의 지점에서 단절되지만 그 속성의 연결고리는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겁니다. 입의 역할없 똥이 나올 수 있습니까. 똥 없는 항문은 항문입니까. 좀 거칠고 외람된 비유를 써서 죄송합니다만, 바슐라르와 김현 평론가의 감싸기'는 이 지점과 연결을 보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프로이트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법칙과 이론 속에서 가차없이 잘라내고 신화까지 끌어들여 환원했듯이, 그렇게 재단하기 좋아하는 평론가들도 바흐찐의 그로테스크는 그게 아니었다 등등을 거론하며 어디 잘해 보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말이든 조금의 진실은 있겠으나 100% 진실은 아닌 법이죠. 부디 그들이 갇힌 곳이 빈집이 아니길 기원합니다해석이 권위나 쟁취가 되어서는 안될 겁니다. 김현 평론가의 기형도에 대한 잘못이 있다면 해석보다는 애도에 더 가까웠다는 점이겠죠.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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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ar 기형도 -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듯
    from 공 음 미 문 2015-06-05 21:35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입 속의 검은 잎> 中) 당신을 안 지 20년이 지났어. 누군가에겐 20살 넘은 아들이 있다면, 내겐 20년 넘은 허무가 있는 셈이야. 책갈피로 꽂아두었던 낙엽이 페이지를 누렇게 물들이는 것을 매해 지켜보았고, 년도를 확인할 수 없는 메모들 속에 올해도 몇 자 끄적였어. 이건 희망일까.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 中) 당신의 시집 속에 ‘희
 
 
2015-06-05 0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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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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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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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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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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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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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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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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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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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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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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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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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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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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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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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0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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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6-05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진성은 잘 모르고요.
엄원태는 아우는 어머니의 아픈 무릎이다 (?)하던 시인이죠?
따뜻해서 좋아했어요~^^

AgalmA 2015-06-05 21:52   좋아요 0 | URL
저는 이번에 엄원태 시인은 알게 됐어요. 저도 알게모르게 독서 시장성에 좌우된 모양입니다;;
이 기회에 읽어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