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이 혹독한 2월에 어찌 춥지 않았을까?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얘야, 나 좀 볼래, 착하지. 아저씨가 눈이 안 좋단다. 지독한 근시라서 편지 넣는 구멍을 못 찾을 것 같구나. 저기 있는 우체통에 나 대신 편지 좀 넣어줄래." 쪼그리고 있던 아이가 나를 보더니 일어섰다.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보기 드물게 예쁜 작은 얼굴이었다. 아이는 편지를 받아 들고 긴 속눈썹을 꿈틀하더니 경이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체통으로 달려 갔다. 나는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길을 가로질러 갔다. 정말로 눈이 나쁜 척 실눈을 떴다. (이건 언급해야 한다.) 그 행동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었다. 나는 이미 멀리 벗어나 있었으니까. 다음 광장 모퉁이에서 유리로 된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아르달리온에게 전화했다. 그에 관한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만 했다. 바로 이 꼰질꼰질한 초상화가야말로 조심해야 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오래 전에 섰기 때문이다. 근시인 척한 것이 아르달리온과 관련하여 오래전에 했던 구상을 실행에 옮기라고 부추긴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그의 위험한 시선이 부단히 떠올랐던 탓에 근시를 가장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그건 심리학자들이 해명할 문제다. 아, 그런데, 그런데...... 그녀는 자라날 것이다. 그 소녀 말이다. 예쁠 것이고 아마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일에 매개자로 개입되었는지 그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의도하지 않은 순진한 매개 행위를 참지 못하는 운명이, 쓴맛 단맛 다 본 운명이, 비열한 사기 행각은 스스로 능숙하게 알아내는 운명이, 질투하는 운명이 일에 끼어든 죄목으로 소녀를 잔혹하게 벌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녀는 놀라게 되리라. 왜 나는 이토록 불행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리고 결코, 결코,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내 양심은 깨끗하다. 펠릭스에게 편지한 건 내가 아니다. 편지를 보낸 건 그다. 답장을 보낸 건 내가 아니다. 모르는 아이가 보낸 거다.


ㅡ 라디미르 나보코프 《절망》

* 뷰티풀말미잘님 페이퍼 <악몽>에 대한 먼댓글로 인용 : http://blog.aladin.co.kr/Escargo/8869875

 

 

 


§
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100% 좋아할 수 없는데, 그는 인간의 비열함에 대한 온갖 색깔의 실로 소설을 직조한다. 진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고 생각해야 할까. 불편한 것이 꼭 진실이다 라고 할 수 없어 나는 더 불편해진다. 광대한 표현의 영역에서 표현된 것과 표현하는 자까지 끼어 있는 상황 속에 우리가 진실과 거짓(악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언제나 내게 큰 의문이다. 확신을 담고 있는 "쓰기"는 더 무시무시해진다. 쓰는 일에 대한 무게감. 살짝 미쳐야 쓰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영감(靈感) 타령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요즘 한국 문단의 성폭력 문제처럼 가장 골칫거리는 창작과 성적(性的)인 것의 연결과 관계인 거 같다. 나보코프가 《롤리타》를 쓰고 질타와 환호를 동시에 받았던 것처럼 아주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늘 이 줄타기 속에 있다. 문장 뒤에 숨어 타락하기 얼마나 쉬운지 이미 여러 번 목격되었다. 차라리 악몽이 더 아름답고 진실같아 우리는 그토록 꿈을 불러 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고백 성사라 하더라도 꿈 속에서 우리는 죄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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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6-10-31 1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인용하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아마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풀어내는 솜씨야 비할 바가 되지 않으나,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결이네요. 또 하나 경탄스러운 것은 그 많은 독서목록에서 이 책, 몇 줄을 찾아낸 아갈마님의 매의 눈!

밤에 꿈 얘기를 쓰느냐 마느냐를 고민했는데, 쓰기를 잘 한 것 같아요. 저는 책에 밑줄 긋는 걸 극혐하는 편인데, 이런 문장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긋고 말 듯.

“불편한 것이 꼭 진실이다 라고 할 수 없어 나는 더 불편해진다. 광대한 표현의 영역에서 우리가 진실과 거짓(악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언제나 내게 큰 의문이다.”

하도 진실이 불편한 시대라, 불편해야 진실처럼 생각하기도 하죠. 간혹 편안한 진실이 주어지더라도 그럴 리 없다고 의심부터 하게 됩니다. 결국 제대로 된 진실 하나 건질 수 없어 우리는 늘 화가 나 있고, 이런 시절에 말빨만 조금 따라준다면, 정치하기도, 글쓰기도 참 쉽겠죠.

“문장 뒤에 숨어 타락하기 얼마나 쉬운지 이미 여러 번 목격되었다. 차라리 악몽이 더 아름답고 진실되어서 우리는 그토록 꿈을 불러 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꿈 속에서 우리는 죄가 없으니까.”

이 문장은 마음에 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AgalmA 2016-10-31 10:22   좋아요 2 | URL
뷰티풀말미잘님이 이 소설을 안 읽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알았다면 자기 검열이 문장 속에 나타났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 페이퍼 제목을 ˝우리는 악몽처럼 연결된˝이라고 썼죠. 신기하죠. 네, 정말 신기해요....

2016-10-3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 며칠 이 곡을 한참 들었다. Pat Metheny - Come and See




 

팻 매시니 카소 기타 소리는 들을 때마다 아찔할 정도로 좋다. 옆 얼굴과 앞 얼굴을 동시에 보여주는 피카소 그림처럼 하프와 기타가 합체된 듯한 소리. 공연장에서 실제 그가 피카소 기타 치는 걸 보면 르페우스로 보인다! 줄무늬나 후드 티셔츠 말고 고대 그리스 복장으로 나타나셔야죠!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에서 철학의 씨줄과 날줄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는 리안 마리아스 문장도 피카소 기타 소리 못지않다.

˝종교는 인간에 의해 수용되고 신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진, 하나의 확실성이다.˝

가톨릭 철학자로서의 견해가 뚜렷하지만 재련된 도끼로 찍듯 체계화에 단련된 문장이라 무신론자라 해도 가벼이 지나칠 수 없다.

˝철학은 항상 자신의 확실성의 근거를 갱신한다˝

˝철학자는 이성의 고안자가 아니라 인간 이성의 입법자다˝



 

동양은 왜 합리적 논변을 구성하지 않았는지 깊이 들어가지 않고 서양 사상의 뛰어난 차이점이라 간주하며 희랍철학 분석으로 들어가는 건 좀 아쉽다. 서양인의 당연한 한계일까. 철학의 역사가 철학이란 입장에서 마리아스에게 동양 사상은 그의 역사가 아니니까.


11월 1일부터 집앞 재활용 쓰레기 수거를 하지 않는다고 하자 오늘 골목 곳곳에 산더미로 쌓여 있는 그것들을 봤다. 마리아스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을 인용하며 일상 사물을 통해 인간이 가지게 된 경이(驚異)에서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관조의 시간이 희박해진 현대에서 사물은 경이보다 쓰레기에 더 가까워졌다.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인간도 그렇게 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던가. 벤야민의 아우라도,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도,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도 논의 이상의 위력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리아스가 현대 철학을 근대 철학 단원에 포함한 것에 자못 수긍되기도 한다. ˝귀결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 영역˝.... 죽음으로 마감되기 전까지 나는 나로 귀결되지 못한다. 그 처리도 내 손으로 할 수 없다! 오로지 현재 속에서만 서성대며 서로를 딱하게 생각하며 ˝이게 나예요˝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나는 나의 방부제, 당신은 당신의 방부제이다. 워워, 너무 시니컬해졌어.


더 읽고 싶은데, 더 생각하고 싶은데 졸려서 너무 슬프다.
내 몸으로 갈 수 있는 하루가 너무 짧다.
Come and See
Sleep and S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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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6-10-31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팻 메스니 좋아해요ㅠ
키스자렛두요~~

AgalmA 2016-11-01 07:50   좋아요 1 | URL
^^ clavis님이랑 음악 좋아요♥ 하이파이브하는 거 좋네요^^

고양이라디오 2016-11-04 1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음악과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오늘은 Agalma님의 서재에서 조용히 음악들으면서 책구경하면서 놀다가겠습니다ㅎㅎㅎ

come and see 하겠습니다ㅎ

AgalmA 2016-11-04 10:06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 문화생활에 기여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서재시스템 자체가 스터디그룹 같기도 하죠ㅎ
 

 

 1. 너는 나비를 벗어나


아침에 너를 봤을 때 거기 쉬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거짓말. 죽음의 예감은 찬 공기보다 빠르게 왔잖아. 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하루 종일 바빴고 널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 돌아오니 너는 어둠의 조각처럼 거기. 꼼짝없이 너 서서히 그럴 동안 나는 얼마나 분주했던가.

바람결에 너는 결국 어디로 간 것이니...

 

 

 

 

 

 

 

 

 

 

 

 

 

 

 

 

 

 

 

 

 


 

2. ㅂ님의 선물 -  감사합니다!

 

 

덕분에 알라딘에 이렇게 신기한 것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조그만 깡통에 작은 글귀. ˝책 좋아하시나봐요˝ 이 문장엔 왜 미소가 같이 있는 것 같지? 다른 분도 그러셨습니까? 하나, 둘, 셋.... 정량 75개보다 5개가 더 왔다. 와와~ 생긴 것도 꼭 생일 초같이 생겨선 80살까지 살아 볼 텐가(예쁘지만 날카롭게;;) 묻고 있는 거 같다.
 

 

 

 

 

3. 알라딘 커피 

 

 

 

 

 

 

 

 

 

 

 

 

 

 

 

 

 

 

로스팅한 지 이틀밖에 안된 게 왔다. 향도 괜찮고 내일이면 적당한 맛이 나겠군. 지금은 졸리니까 낼 먹어 보겠음. 알라딘은 참 별거 별거 다 만드느라 머리 쥐어짜는 듯.

 

(다음날)

로스팅을 약배전으로 한 것 같다. 연한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사람에겐 좋겠지만 강배전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비추.

책 읽으며 마시기엔 약배전도 괜찮을지도. 책을 읽을 땐 입맛도 바꾸라?;;

 

(and)

5만원 이상 일 때 주는 2000 마일리지 원두커피 살 때도 적용!

 

 

 

 

 

 

커피 100g 다 먹을 동안 저 책들도 다 읽었으면 좋겠군.


 

 


4. 11월에 읽고 싶은 책

셸 우엘벡은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서신 <공공의 적들>과 <플랫폼>만 읽으면 국내 출판된 건 다 읽은 셈이다. <플랫폼>은 왠지 <투쟁 영역의 확장>과 <어느 섬의 가능성>을 섞어놓은 연장선일 거 같지만 우엘벡 책들은 사실 다 그렇지 않았던가.


 

 

 

 

 

 

 


 

도르 마라이는 <하늘과 땅>으로 처음 접했는데, 칭찬이 자자했던 것에 비해 그때 내 상황 때문이었는지 잘 와 닿지 않았다. <반항아>는 제목처럼 내게 임팩트 있게 다가와 주길!

 

 

 

 

 

 

 

 

 

 

 

 

리언 반스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후 이번 책이 두 번째 접하는 책이다. 첫인상이 나쁘진 않았지만 나는 뭔가 다른 걸 바란다.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처음 제목이 `첫인상`이었다지. 조이스 캐롤 오츠에 대한 내 첫인상도 어서 바꾸고 싶다ㅜㅜ 첫인상으로 어떤 작가든 결정짓고 싶지 않아 읽어야 할 책이 무한해진다. 한 번도 안 접해본 작가까지 생각한다면 아득....

 

 

 

 

 

 

 

 

 

 

 

 

 

 

 

 

 

 

 

 

 

 

현상학, 분석철학, 레비나스, 니체, 노자... 나는 어떤 궤도처럼 늘 여기를 맴돈다. 왜지?

 

 

진령 <곡마단 사람들>은 다이앤 아버스의 서커스단 사진 생각이 나서 사봤다. 다이앤 아버스와 비슷한 구도가 많이 보이지만 꽤 맘에 든다

오랜만에 <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음악도 다시 찾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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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29 23: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커피향에 책의 언어를 태우고~~~^^. 가을 밤도 더 깊어집니다. 커피향 뭍어나는 가을 밤되시길..

AgalmA 2016-10-30 09:07   좋아요 1 | URL
yureka01님 댓글 덕분에 오랜만에 ˝Issue - 커피향기의 오후˝를 다시 찾아 들었습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저는 커피의 낭만을 뒤로 하고 출근ㅜㅜ....

moonnight 2016-10-30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다트라는게 있군요 신기해요@_@;; 예뻐서 저도 보관함에 담아봅니다^^ Agalma님께 인사를 드린 적 있나 기억이 안 나네요. 죄송합니다. 글은 잘 읽고 있습니다만;; 우엘벡 좋아해서 괜히 더 반갑습니다. ^^

2016-10-30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30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30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30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30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30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30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굿즈 전문 판매점 알라딘이 커피 장사까지 하게 될 줄 누가 예상했을까요? 사업 확장하다가 크게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AgalmA 2016-10-30 18:37   좋아요 1 | URL
오프라인 중고서점 믿고 커피 사업 추진한 거 같은데 yes 중고서점도 곧 하겠네요ㅎ;; 앞으로 또 뭘 할라나ㅎㅎ

2016-10-31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31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31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31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11-0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저도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네요.

AgalmA 2016-11-04 11:12   좋아요 0 | URL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보다 이 책을 더 꼽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장우재 연출 <불역쾌재(不亦快哉)>를 보고 왔다. 제목의 뜻은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이다. 어두운 세상을 뒤집어 밝게 보는 마음을 갖추자는 뜻이 담겨 있다.


장우재 연출가는 임형택 교수가 쓴 <한문서사의 영토>를 보다가 조선시대 문인 성현(成俔)이 쓴 기행문 `관동만유(關東漫遊)`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 작품을 연출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불역쾌재`는 ˝다산 정약용의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중국 문인 김성탄의 `불역쾌재삼십삼척(不亦快哉三十三則)` 등 옛 선비들이 세상을 달랬던 시˝와 연결되기도 한다.

왕의 스승이기도 한 기지와 경숙은 각각 예술과 실용학문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들의 절친이 분서를 쓴 것에 연루되어 파직된 그들은 `금강산 외팔담 아래에 동굴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언쟁 끝에 금강산 여정을 떠나게 된다. 짐작하다시피 동굴이 있는지 없는지는 히치콕 영화의 맥거핀처럼 중요하지 않다. 이 여정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하다.
(생각난 김에... 맥거핀님, 나타나셔서 리뷰 좀 올려 주세요ㅜㅜ)


왕은 세자였을 때 강상칠우(江上七友)라는 사건을 겪었다.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다 물에 빠진 세자의 친구들을 선왕이 구해주지 않은 사건이다. 선왕은 그들이 앞으로 세자의 숙적이 될 것이라 여겨 구해주지 않았다. 강상칠우가 상징하듯 왕은 왕으로서 요구받는 자세와 개인으로서의 위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이는 자신과 타인 속에서 갈등하는 보편적 인간상이기도 하다.
강상칠우(江上七友) 사건은 `세월호`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건은 일어났고 이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연출가의 모색이 담겨 있다.
왕은 경숙과 기지를 파직하면서 이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해답을 가져와보라는 질문을 준다.

막간에 뒷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나무는 무엇을 뜻할까. 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질문을 가지는 건 좋은데 왜 나무에만 집중합니까. 그리고 이야기 진행 속에 공연장 가득 채워진 소고기 냄새처럼 소고기 얘기만 한창이었다. 우리의 감각과 생각은 이렇듯 지엽적인 데 치우치기 쉽다.
왕이 분서에서 자신을 향한 비판만 읽고 충언은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처럼, 경숙과 기지에게 만족할만한 답을 각각 내놓길 요구한 것처럼, 우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잘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숲이 정답인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결말에서 왕은 경숙과 기지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순수 무사 회옹을 동.시.에 처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서를 쓴 태보가 경숙과 기지에게서 칼춤을 배웠다고 말하며 양손에 칼을 쥐듯이, 진시황이 찾던 것이라고 그가 주는 술이 돌이 담긴 물이었듯이, 수동적으로 기록하는 늙은 사관과 능동적으로 비판하는 태보 역을 윤상화 배우가 1인 2역으로 맡았듯이, 이 연극 곳곳에는 전환적 사고와 합일하는 사고에 대한 강조가 가득했다.

당신이 있기에, 나는 마음을 나눌 수도 있고 비판적 사고도 할 수 있다. 고마움을 전한다. 이에 따르는 에토스, 파토스, 토포스 모두 내가 짊어지고 살아내야 할 나무와 숲이다. 가능한 한 기꺼이.
요즘 사회상을 보면 특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사죄하는 인간이기보다 고마워하는 인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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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8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9 0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9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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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비아 플라스. 테드 휴스 때문에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처럼 죽음의 사연까지 닮아 더 애잔하다. 살아 계셨다면 최승자 시인과 함께 큰 산맥이었을 이연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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