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문학동네 시인선 43
리산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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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완 시인은 평을 위한 평을 하고 있다. 침묵하는 혁명가라...정말 그런가. 시인은 너무 많은 것을, 자기를 말하고 있었다. 시든 소설이든 첫째로 두는 게 단순미라는 걸, 쓰는 자는 종종 잊는다. 내가 말하는 단순미는 간결함이 아니다. 내용과 의미가 겉돌지 않는 일체성을 뜻한다. 이해와 공감의 여부를 떠나 사람들이 글을 읽고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건 이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흔히 파편적이라 말하는 초현실주의 시의 자동기술법은 가장 강렬한 일체성을 꿈꾼 노력이었다. 무의미 시도 사실 그랬다. 언어를 거부할 때마저도 잊지 않는 언어를 향한 주문(呪文)이자 기원(祈願)이었다.

나는 늘 시의 혁명이라 할 '일체를 향한 독창성'을 읽으려 애썼다. 성기완 시인이 혁명을 가져와 붙이는 바람에 시의 감상이 도드라져 보이는 역효과만 낳았다. 그 뒤에 혁명을 숨겼다고 말하지 마시라. 
언어에서 혁명은, 시는 제 불행을 심지로만 남겨두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겨우 끌어 모아 세계를 폭발시키는 침묵이다. 성기완 시인도 이 뜻은 같이 하면서 왜 평은 그런가. 평을 위해 혁명을 그릇되게 사용하지 마시라. 
현실처럼 언어에서도 혁명은 앞장서는 것이지 따르는 것도, 뒤에 남는 것도 아니다.
진두 지휘하지도 못하고 노래가 되어 산화하지도 못한 채 패배를 당연시 받아들이는 모습에 씁쓸했다. 결기를 잃은 혁명은 이미 실패다. 시집 제목이 "쓸모없는 노력의 혁명"이 아니라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 된 이유겠지. 본인이 원한 시집 제목이라면 시인은 최소한 정직했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참 밉겠지만 다음 혁명을 고심하는 데 참고가 되길.... 


ㅡAgalma

레이먼드 카버 氏의 장점은 땅, 권총소리가 날 것 같은 장면에서 그런데, 라고 말하는 것, 아슬아슬 경계를 피해 가는 것 그걸 미니멀리즘이라고 한다지만

당신과 함께 우연히 보게 된 어떤 드라마에서도 선(線)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지, 마음을 끄는 한 여자의 발밑에 선을 죽 긋던 남자


詩 수용미학(발췌)

숫자 1은 0을 불문에 붙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했다
다만 부재하는 모든 것으로 밤은 시작된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까


목소리가 그리운 날에는 혼잣말을 한다


詩 서쪽의 국경수비대(발췌)

그런 강은 아니지만
강물이 얼어붙는 걸 지켜보고 있었지


詩 호탄의 도적이여, 강은 얼어붙고 말은 지쳤으니(발췌)

한 생이 끝나고 또다른 생을 시작하려는 죽은 새의 뜬 눈


詩 폭풍추적 전문가(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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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1-02 0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니 찬찬히 살펴보겠음 .^^
생일 뭐하며 보냈나요?
11월 멋지게 보내길..바랄게요!

AgalmA 2015-11-02 03:38   좋아요 1 | URL
아니, 이 별점을 보고도 보시겠다는 의욕은 뭔가요...ㅎ; 저 대신 제대로 평해 주시길^^;
별다른 건 없었고 밥을 아주 오래오래 먹었어요. 사는 것처럼.

[그장소] 2015-11-02 03:42   좋아요 1 | URL
그러니 궁금해서..대체 어떤 말을 지껄이면 시집을 낼수있는건지...중고도 아까울까?일단 도서관에 있음 거기서..보려고. ..눈이 ..시력이 아까웠오?
그정도였오?혹..나무와종이와 활자가 낭비된 그모든게 아깝다면 안볼것이오.
시간아까우니...
음..그럼 되었죠..생일 에 밥한끼...느림의미학을 즐기며...^^

2015-11-02 0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5-11-02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넘한 처사요...당신 말고...이 시집을 내준이는 대체 왜 그랬다는건지..궁금하오!^^
가혹한 일 아니겠오..뭐..그런 책이 아주 없진 않지만..
ㅡㅡ

2015-11-02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2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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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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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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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3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골상학 얘기에 문득...

골상학은 프란츠 요제프 갈(1758~1828)을 시작으로 구스타브 셰브(1810 - 1873), 요한 스푸르츠하임(1776~1832)으로 이어지며, 머리 형태가 사람의 성격 특성을 좌우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사이비과학으로 판명되었지만, 골상학 관념은 여전히 어설픈 심리학, 성차별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ex- 남자 뇌/여자 뇌 - 아래 그림 참조)

뇌와 신경중추, DNA를 조사하는 뇌과학 시대, 지금은 좀 나아졌다 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건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의식, 영혼, 자아는 어느 장소에 있는가!


˝영혼은 하나의 사건이다. 영혼의 장소는 뇌가 아니며 다른 어떤 신체기관도 아니다. 영혼은 성찰의 종합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삶이 있는 곳에 있다˝
-루트비히 뷔히너(1824~1899) <영혼의 장소에 대하여>

ㅡ한스 J. 마르코비치, 베르너 지퍼 <범인은 바로 뇌다> 중

유물론자인 루트비히 뷔히너의 말은 관념적이기도 한데, 마르크시즘 시대를 거쳐온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닮은 것도 같다.

 

 

 

 


2. 사건이 연결될 때

연말이 다가오고 2015 독서계획 중, 들뢰즈(<의미의 논리>, <안티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읽기는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다 싶었다. 세 책 다 읽기는 시작했지만 완료가 까마득)) 신간 그만 보고! 중고서점 뒤지는 것도 이제 그만해!(내 안의 독서 초자아의 외침) 들뢰즈 읽기가 완료되면 계획 60% 성공률! 계획의 좌절 속에도 내년에 또 계획을 세우겠지...흥미로운 신간도 계속 날 유혹할 테고(아아, 이게 제일 문제지. 올해도 그렇게 당했ㅜ).
이 실패의 범인도 바로 뇌!
무거운 의무감과 신나는 도전의식(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가...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의미의 논리>를 펼쳤다.

이 책에서 제일 처음 거론되는 1, 2계열- 플라톤과 스토아 학파는 서로 대립한다. 들뢰즈는 스토아 학파의 사건 개념을 받아 들인다.

˝플라톤에게 달의 둥그럼은 달의 질료에 구현된 하나의 형상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에게 이 둥그럼은 달의 질료가 일정하게 배치됨으로써 생기게 된 표면효과이다. 플라톤의 경우, 달이 변화해도 둥그럼의 형상 자체는 하등의 변화를 겪지 않는다. 스토아 학파의 경우, 달이 변화하면 둥그럼 자체도 변화하는 것이다.˝(<의미의 논리> 중 이정우 교수 서론, p26)

플라톤과 스토아 학파를 골상학과 뇌과학으로 대입해봤다. 플라톤은 골상학의 논리라고 볼 수 있다. 내부 특성이 형태와 사건을 좌우한다는 식. 스토아 학파는 현대 뇌과학과 신경심리학이 섞인 걸로 생각된다. 뇌에서 특성을 맡은 유전자들과 기관들이 상호작용하고 외부와 만나며 사건과 의미가 발생한다. 완료는 아니니 끝없이 변화한다.
이 생각은 어디까지나 내 가정(假定)적 추론일 뿐이고 앞으로 바뀔 수있다.

˝사건이란 존재 세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기호 체계 바깥의 그 무엇을 요청한다는 것이다˝(p27)

이 사건들을 인식하며 내가 무슨 의미를 만들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한 가지는 안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는데 이런 식이면, 내 2015년 독서 계획 마무리는 무척 곤란할 거라는 걸...
이웃들의 독서 계획은 잘 되고 있으려나.


덧)
아래 첨부된 이런 이미지는 제발 웃고 넘어갑시다. 이미지와 `시뮬라크르`에 매번 당하면서도 또 당하는 우리.
그림 내용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분류하는 문제를 웃으며 생각해보자 올린 건데, ˝이런 걸 자꾸 보게 되는 게 더 문제다!˝ 라고 폭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주셔도 됩니다/ 고치는 걸 운명으로 생각하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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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u:Do 2015-10-27 0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웃들의 독서 계획도 엉망입니다. 계획과 실행 그 사이의 괴리는 항상 언제나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지요 ㅎㅎ

AgalmA 2015-10-27 06:38   좋아요 0 | URL
저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전혀 기쁘진 않군요. 남은 두 달 잘해보자고요ㅜㅜ/

Clou:Do 2015-10-27 0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네. 함께 힘내보아요 ㅎㅎㅎ

cyrus 2015-10-27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가 요제프 갈의 골상학 이론에 심취한 적이 있어서 자신의 소설에 갈의 골상학을 자주 언급해요.

AgalmA 2015-10-27 21:47   좋아요 0 | URL
사람은 그 시대의 영향 속에 있어서 겠죠. 발자크가 프로이트나 융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많이 달랐을 지도...

cyrus 2015-10-27 22:38   좋아요 1 | URL
발자크가 프로이트의 시대에 태어났으면 심리소설의 대가가 될 수도 있겠군요. ^^
 

바스코 포파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에서 성동혁 <6>과 연결고리 하나를 찾다.

- 휴전선이 있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반도 분위기
- 크리스마스로즈(유럽에서 널리 자생하는 미나리아재빗과의 여러해살이 식물. 독성이 있어 한때 화살독으로 쓰이기도 했다)
- 가계도
- 언어의 초현실성

나는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찾는다. 현실과 아무 상관 없이.
찾고 나면 버린다. 그래서 기억을 잃는다. ㅁㅁ을 닮았다.
블랑쇼, 알고 있었습니까.
당신의 피난처는 언제 생겼습니까.


누군가 덜 불행할 순 없을까요. 오늘도 슬픈 이야기가 많아 잠들 수 없었습니다. 슬픈 노래는 듣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그런 표정 짓지 않도록, 나 대신 말해줘. 나와 아무 상관 없이.




그림자 만드는 사람



당신은 영원히 영원히 걷는다
자신의 개인적인 무한성 너머로
머리에서 뒤꿈치로 그리고 등으로


당신은 당신 자신의 빛의 원천이다
천정(天頂)은 당신의 머릿속에 있고
당신의 뒤꿈치에 설치되어 있다


천정이 죽기 전에 당신은 당신의 그림자들을 내보내
길게 늘여 스스로 낯설게 만들도록 하고
기적과 부끄러움을 행하게 하고
오직 그들 자신들에게만 절하게 한다


천정에서 당신은 그림자들을 줄여
적당한 크기가 되게 하고
당신에게 절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그들이 절하며 사라질 때


당신은 오늘도 이 길로 오고 있다
그러나 그림자들은 우리가 당신을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


바스코 포파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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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0-25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 1월, 이 시집을 읽었을 때(첫번 째는 언제인지 모른다. 두번 째 읽었다고 메모가 돼 있을 뿐) 기억이 하나도 남은 게 없었다. 모든 게 잘도 사라지는데, 왜 나는 아직도 여기지.
坐礁. 피항지는 없다.

나와같다면 2015-10-25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대학 1학년때.. 그 사람이 전해줬던.. 쪽지..
순간 같은 사람인 줄 알고.. 헉! 소리와 함께 벌떡 일었나 앉았어요..

AgalmA 2015-10-25 04:10   좋아요 0 | URL
세상엔 불행한, 아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시기가 왜이리 많죠~_~;

나와같다면 2015-10-25 0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서로의 구원을 갈구한다.. 그는 오른쪽 구석에서.. 그녀는 .. 그러나 그 공간은 사각형이여서.. 그 시선은 왜곡되고..

잘 기억나지는 않네요..

어린 그 시절.. 연애편지 치고는 좀 무거웠네요..

AgalmA 2015-10-25 05:11   좋아요 1 | URL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이 구절과도 비슷하네요.

˝나는 네발로 기어 그대 앞으로 간다
그리고 그대의 은총 속에서 울부짖는다
마치 그대의 위대한
초록 시대 속으로 들어가듯이˝
 

시집을 빌리러 도서관을 갔다가, 도서관이 가까우면 뭐 하나, 휴관일만 골라 가는 나인 걸 확인하고 터덜터덜 돌아왔던 밤,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시전집 소식을 접하니 역시 오늘은 시 밤이었어! 그 시밤 말고....
반가운 마음에 [지만지]에서 폴란드 원문 번역으로 50편을 수록했던 <헤르베르트 시선>을 다시 펼쳐봤다. 철학과 아름다움이 압축되어 있던 시가 와락 다가왔다. 그래, 여전히 거기 있었다. 나는 그 앞을 매일 무심히 지나쳤지.

전쟁 시기나 암울한 시대엔 신화 모티프가 예술에 자주 애용되는데, 인간 심리(융의 집단무의식, 원형의식 등등)와 엮어서 생각해 볼 문제다. 헤르베르트(1924~1998) 詩도 신화와 역사, 당시 시대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형식의 압축미가 강하다. 폴란드어를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시를 잘 살리지 못한다는 평(늘 나오는 골칫거리;)이었는데, 김정환 시인은 분명 영역본으로 번역했을 테니 그게 좀 걱정된다. 같은 폴란드 시인이자 동시대(2차 세계대전과 소비에트 전체주의)를 겪은 노벨문학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시선집 <끝과 시작> 경우 폴란드어 전문 번역가이자 폴란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최성은 교수였던 걸 생각하면 좀 아쉽지만....각각 일장일단이 있겠지.


쉼보르스카는 헤르베르트의 새로운 시를 사람들이 늘 기다렸고 이름을 가려도 그인 걸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나는 ˝판 코기토˝나 신화와 전쟁 참상을 엮은 시 경우 독특한 형식 때문에 단번에 알 수 있는 정도다; 애정도 문제인가, 판별력 문제인가....무엇이든 반성하게 되는군...
소설도 아닌 시에서, ˝판 코기토˝ㅡ폴란드어 pan(남자 귀족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과 데카르트의 Cogito(생각하는 존재)ㅡ라는 캐릭터를 구축한 것만 봐도 예사 시인은 아니다. ˝판 코기토˝는 어찌 보면 이성적인 돈키호테 같기도....


방대한 시집 분량과 시인 소개글에 독자들이 선뜻 접근하기 저어할까 싶어 <헤르베르트 시선>(2008, 지만지)에서 비교적 난해하지 않은 시들을 발췌해 소개해 본다.





개의 물방울 (全文)


˝숲이 불길에 휩싸이면 장미를 위한 시간은 없다˝
-율리우시 스워바츠키


숲들이 불타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목을 팔로 휘감고 있다
장미 꽃다발처럼


사람들은 은신처로 달려갔다
그가 말하길 아내는 긴 머리카락을 가졌기에
그 안에 몸을 숨길 수 있다고 했다


한 이불을 덮은 채
그들은 속삭였다 음란한 밀어들과
연인들을 위한 연도(煉禱)를


상태가 악화되자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 속으로 뛰어 들어가
눈꺼풀을 굳게 닫았다


끝까지 용감했다
끝까지 서로에게 충실했다
끝까지 서로와 닮은꼴이었다
얼굴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멈춰 선
두 개의 물방울처럼





내면의 목소리 (全文)


나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목소리는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으며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도 말하지 않고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 파장이 너무나 미약해서
거의 알아들을 수조차 없다


아주 깊이 몸을 숙여 귀를 기울여도
간신히 들려오는 건
의미를 벗어난 분절음뿐


행여 다른 소리에 휩쓸려 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나는 그를 정중하게 다루려 애쓴다


마치 그의 말이 중요한 의미라도 있다는 듯
동등하게 대하는 척한다


심지어 때로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시도도 한다
ㅡ알잖아 내가 어제 거절했던 일 말야
지금껏 그런 일은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 할 거야


ㅡ글루(glu)ㅡ글루(glu)ㅡ


ㅡ그러니까 네 생각엔
내가 잘했다는 거지


ㅡ가(ga)ㅡ고(go)ㅡ기(gi)ㅡ


우리의 의견이 서로 일치되어 기쁘다


ㅡ마(ma)ㅡ아(a)ㅡ


ㅡ자 그럼 편히 쉬어
내일 또 이야기하자


내게 전혀 필요치 않았기에
그에 관해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내게 희망은 없다
그저 약간의 회한만 남았을 뿐
그가 연민의 이불을 덮고
거기 그렇게 누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벌릴 때
그리고 무기력한 머리를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는 걸 보면서





포위된 도시에서 온 보고서 (발췌)


만일 도시가 함락되고 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면
그는 망명길에 도시를 지니고 갈 것이다
그가 도시가 될 것이다





이력서 (발췌)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알고 싶었다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집은 새로 얻게 되는지 사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과 악한 것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무엇이 희고 무엇이 완전히 검은 것인지도 확실히 알고 싶었다





시인의 집 (발췌)


그의 찬장과 침대, 의자 사이에 부재를 뜻하는 흰 외곽선이 아로새겨져 있다. 뭔가를 던지던 그의 손동작만큼이나 날카롭게.





묘사를 위한 시도 (발췌)


내 새끼손가락은
나와 똑같은 날 태어나
죽는 날을 함께하고
똑같은 외로움을 공유한다




수치 (발췌)


내가 몹시 아팠을 때 나에게서 수치심이 떠났다
아무런 저항의 의지 없이 내 몸의 가련한 비밀을
낯선 손에 내보이고 남의 눈에 보여주었다





판 코기토와 상상 (발췌)


그는 동어반복을
같은 말을 같은 말로 번역하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새는 새다
노예는 노예라는 뜻이고
칼은 칼이고
죽음은 죽음이다





계곡의 문에서 (발췌)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그것은
어린아이를 빼앗긴 어머니들의 울부짖음
왜냐하면 밝혀진 대로
우리는 한 명씩 구원되기에




기도문 (발췌)



제 인생은
끝없는 심연에서 깨어난
물 위의 원과 같이 되지 못했을까요
나이테에 겹겹이 주름을 만드는
생장의 시작점이 되지 못했을까요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무릎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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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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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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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5-10-20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란드에 이런 시인이 있었군요. 장소가 장소인지라 더욱 관심이 가네요. ˝두 개의 물방울˝이란 시의 이미지가 너무 선명해서 좋네요 . 이북이 있나 찾아볼래요.

AgalmA 2015-10-20 20:39   좋아요 0 | URL
전집을 보면 확연하겠지만, 작품 시기별로 경향 차도 꽤 있는 것 같아요. 헤르베르트를 ˝신고전주의˝라고도 하던데, 어떤 시들은 사물에 대한 천착이 두드러지고(특히 ˝돌˝), 또 어떤 시들은 대단히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가 하면, ˝두 개의 물방울˝ 경우는 시대의 비극성과 시적 아름다움이 절묘하고...쉼보르스카와 헤르베르트 수준을 보면 그곳 시 세계도 대단할 거 같은데, 달걀부인님 눈 크게 뜨고 찾아보셔야 할 듯~_~ 세계엔 우리가 모르는 작가가, 시인이 얼마나 많은지....

북다이제스터 2015-10-20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는 같은 내용이라도 사람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힘이 있는거 같아요.

AgalmA 2015-10-20 20:21   좋아요 1 | URL
언어가 그래서 참 대단한 듯. 시에서 저는 그런 충격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위안 또한. 그래서 참 끈질기게 연연해 하고....그래서 참, 그래서 참....

북다이제스터 2015-10-20 20:29   좋아요 1 | URL
북플 어느 이웃님께서 제게 근래 알려 주신게... 현대 철학은 결국 언어로 귀결 된다고 하던데... 님 글 보니 막연하게 동일하게 느껴집니다. 어제 들은 팟케스트 지대넓얕에서도 현대인 인식은 언어라고 한 것도 같은 선상 공감 많이 되네요 ^^

AgalmA 2015-10-20 20:52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들어서야 철학, 문학, 과학, 인식 이 모든 문제에 ˝언어˝가 관건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전에 마냥 어려웠던 부르디외 ˝언어권력˝도 요즘 이해하게 됐고...제가 프랑스철학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게 ˝언어˝ 문제에 대한 제 의문을 많이 다뤄주기 때문이죠.
아, 갈 길이 참 멉니다

2015-10-20 2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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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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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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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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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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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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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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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0-20 21:36   좋아요 1 | URL
이 문젠 많이 생각해 봤는데도 아직 답을 못찾고 있어요.
어, 틀렸네. 고치고 끝~~이 아니라 아니@@ 틀렸잖아! 왜 틀린 걸까, 나는 이 개념과 뜻을 잘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이러한 불협은 어째서 생기는가, 상대가 오해할 소지를 더 줄여야 한다!, 더 철저히 훑어봐야 한다!!, 더 정확하고 완벽한 표현은 없을까...생각의 자물쇠들을 모두 점검해보는 지옥이 되는데-_-....서재를 둘러보며 글쓰는 사람들 대부분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해 하더군요.
제 경우는 ˝개념˝ 지탄을 받은 트라우마가 있어서 좀 더 심해졌고요;;
완벽성이란 자기보호와 자기치장의 극대화라고도 할 수 있겠죠.

언어 얘기도 나왔던 만큼 언어도 우리 자신을 위한 최대 장치니 더욱 그런 상황이죠

2015-10-20 2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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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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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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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5-10-20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넵넵. agalma님 글을 읽는것으로 먼 곳에서의 독서갈증을 다소 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당.

물고기자리 2015-10-20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면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서글프게 읽히는지 모르겠어요.. 서글픔을 서글픔으로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오물이 될 수도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승화시킬 수 있는 것, 걸어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글의 힘인 것 같아요..

AgalmA 2015-10-20 21:33   좋아요 1 | URL
그쵸! ˝내면의 목소리˝ 베케트랑도 비슷하지 않나요? 정말 소진될 대로 소진된, 그러나 그 손에 무언가 놓지 못하고 있는 심정...헤르베르트 시들 중에 이런 내면의 극지를 드러내는 시들, 표현들이 저는 특히 좋더군요.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폐허가 된 저택 창가에 걸린 커튼의 휘날림을 보는 기분....

물고기자리 2015-10-20 21:22   좋아요 1 | URL
시인들은 조각가인 것 같아요. 소설가들이 화가라면 말이죠.. 소진되었다는 느낌도, 아갈마님의 마지막 구절도 황량함 속에서 흔들리는 애처로운 손짓처럼 와 닿아요..

2015-10-20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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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0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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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0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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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1 15: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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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

움베르토 에코 중세와 위스망스 거꾸로를 곁눈질로 보다가 그 종합은 차후 또 때가 있겠지 싶어 이 글에선복종만 생각했다.

 


일단 미셸 우엘벡의 본심이 매우 궁금하다. 아마 차후 작품에서 파악되리라 짐작해본다. 그간 미셸 우엘벡 소설의 주인공들이-다분히 우엘벡의 삶과도 유사한-자멸에 가까운 은둔자의 길을 고집했다는 걸 생각해보면,복종』의 결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주인공 프랑수아와 실존작가 위스망스의 개종에 우엘벡 자신의 고민은 섞이지 않았을까. 이슬람교를 "가장 멍청한 종교"라고 발언해 소송까지 간 논쟁적 은둔자 미셸 우엘벡도 이 주는 달콤함에 사실 흔들리고 있진 않을까. 고통과 번민에 시달리는 한 인간으로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유명한 예수 수난상에서 위스망스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이었고, 이 점에서 위스망스는 그의 종족인 다른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은 사실 자신의 죽음 자체에는 거의 무관심하다. 인간의 유일하고 실제적인 관심사, 그들의 진짜 근심은 바로 가능한 한 육체적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p341)




 

우엘벡은 인간을 괴롭히는 불가항력적인 힘들-국가자본주의성적 욕망에 대해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싸워왔다. 그리고 그 패배는 주인공들의 은둔으로 귀결되었다.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히피문화와 관련해 뉴에이지 종교를 신랄하게 보여준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종교와 신을 본격적으로 다룬 적은 없었다.

이 소설에서 이슬람교는 풍요와 개인적 욕망을 내세에서가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해결해주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복종이 서구-이슬람 문화 사이의 문제성을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준 것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그 둘은 차라리 형제처럼 닮았다. 개종의 길까지. 









유일한 해결책은 이라 불리는 유일한 점을 포함하는 상위 그래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개인들 전체가 관계를 맺고, 이 매개체를 통해 사적으로도 관계를 맺었다. (p334)



서구의 무기력 상태가 결국 이슬람 문화에 굴복해가는 과정은 서구의 정신과 종교가 더 이상 현실에서 강력할 수 없는 노후하고 노회한 힘인 것을 보여준다. 이제 서구에서 십자군 전쟁 같은 일은 가능하지 않다. 지금의 서구 종교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체제 속에 갇힌 형국이다. “수도원이라는 표상이 말해주듯, 기독교는 예수를 통해 영혼의 기쁨에 머무르는 여성적 종교”(p265)라고 프랑수아는 말한다.

   

 

중세 기독교는 그 예술적 성취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토록 생생하게 남을 위대한 문명이라는 것을 르디제 그 자신이 제일 먼저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점차로 영역을 잃었고 이성주의와 타협해야 했으며 교황의 지상권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차츰차츰 사멸할 운명에 처했다. 왜 이 모든 일이 벌어졌을까? 참으로 미스터리했다. 신이 그렇게 결정해버렸다.(p336)

 

 

이슬람 문화권은 종교와 민족주의가 맞물려 체제를 지휘하고 있다. IS를 비롯해 각종 이슬람 무장단체의 성질이 단순히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서구 국가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없다그것은 권력에의 의지며, 가부장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는 폭력성에 기반하고 있다.   

한국에서 IS로 간 소년의 동기를 생각해보며, 모두들 소년의 교육과 학교생활(왕따), 가정사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인간 본성을 탐구해 볼 여지도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 전 세계적인 우경화는 과연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풀릴 문제인가. 경제 활동에서 남성과 여성은 앞으로도 경쟁 관계이다. 이 소설은 이슬람교로 새로운 세계를 시뮬레이션해 본다. 이슬람화가 되자 가정으로 돌아간 여성 때문에 일자리는 늘어나고 경제는 호황이 된다. 권력과 성도 혹할 만한 논리로 모두를 유혹한다.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를 진화론으로 그럴 듯하게 이야기하는 소설 속 지배층 인사는 이 현실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바다.


"자연선택은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긴 하나, 그 형태는 천차만별입니다. 심지어 식물한테도 적용되는데, 식물의 경우는 대지와 물과 태양이 제공하는 영양분으로의 접근성과 직결되죠. 인간은, 물론 동물이긴 하나, 들판의 개나 영양이 아니거든요. 자연선택에 의한 인간의 지배적 위치를 결정짓는 건 발톱이나 이빨이나 빨리 달리기 능력이 아니라, 바로 지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진지하게 말씀드리지면, 대학교수가 지배적 수컷의 위치에 놓이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p354~355)



페미니즘의 공격 대상이기도 한 우엘벡의 개인적 가치관은 여기선 차치하겠다. 

그는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서구 체제가 전복될 새 카드를 유심히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카드는 매우 익숙한 카드다. 과학을 통해 우주까지 내다보며 많은 인간은 ’ 세계를 버렸다. 그런데 여러 체제와 사상을 거치며 거듭 실패를 경험한 인간은 우주를 거쳐 다시 신을 타고 돌아오고 있다. 이슬람은 신과 우주 법칙을 수와 아라베스크로 표현하며 복종해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라 꼽는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을 버리진 못했다.

을 가장 거부한 자, 니체도 나는 의심한다. 니체는『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신화를 가져와 자유로운 인간상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를 거부할 뿐이지 여전히 "신들 세계로의 귀환"이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평생 이라는 개념과 싸웠지만, 그의 저작은 복종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기도 했다. 을 초인으로 바꿨을 뿐 신=힘과 법칙에의 유혹을 결코 거부하지 못했다고 나는 본다. 

즉 이 모든 건 동서양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문제다. 

 은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통용되는 대표적 우주법칙이다. 이라는 개념은 태어났고, 그 법칙을 깰 증명은 여전히 없으며, 가장 강력한 인간 세계의 체제다. 우리를 고통 속에서 구원해 준다면, 복종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현대어인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자유는 복종할 지 말 지를 정하는, 이미 넘어가 놓고 거부의 시늉만 하는 남루한 모습이다. 

 

 

 

미셸 우엘벡의 다음 책이, 위스망스가 『거꾸로』 이후 쓴『좌초된』으로 좌초된 것처럼(제목이 잘못했네;) 되지 않길 바란다. 그가 농경소설을 쓴대도 흥미롭긴 하지만. 





ㅡAgalma








ps)사람들은 왜 그렇게 로마(의 흥망성쇠)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서구가 가지는 향수성은 회자되어온 바지만 전반적으로 그 제국의 헤게모니가 만들어낸 많은 문화에 강력하게 끌리고 있지 않나 싶다. 아닌 게 아니라 『복종』에서 이슬람은 제 2의 로마 제국을 건설하려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었다. 암튼 더 깊은 내막은중세』를 읽은 뒤 다시 점검하기로...서구-이슬람의 뿌리깊은 반목의 역사도 상세히 알게 되겠지.


지금 읽고 있는 책에 그런 심리와 관련되어 보이는 내용이 있어 참고로 옮긴다. 


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사람이 신과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우주에서 표류하며 따라서 불안 속에서 부유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실존주의자들은 불안이 생겨나는 까닭이 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신과 무신론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자유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만 선택의 자유가 불안을 일으킨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썼다. "나의 가능성들을 보면 자유의 현기증과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공포에 떨며 선택을 한다." 선택을 피함으로써 불안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기괴하게도 사람들이 권위주의 사회에 매혹을 느끼는 까닭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엄격하고 선택을 억압하는 사회의 확실성이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격변의 시기를 지나다 보면 극단적인 지도자가 등장하곤 한다. 바이마르 독일의 히틀러, 대공황기 미국의 코글린 신부, 오늘날 프랑스의 장마리 르펜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등이 그렇다. 


스콧 스토셀『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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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1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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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9 15: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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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9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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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9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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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01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스망스의 소설 <좌초된>의 원제가 궁금해요. 혹시 원제가 ‘Là-Bas’입니까? 원제가 맞다면 우리말 제목을 ‘저 아래에’, ‘지옥에서’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AgalmA 2015-10-01 22:56   좋아요 0 | URL
<좌초된>은 소설 속 그대로 인용한 겁니다. <거꾸로>와도 어울리고 이 소설 상황과도 참 적절하지 않은가 했는데, 작가의 의도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번역자가 국내에도 알려져 있는 <저 아래로>를 함부로 의역하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요.

<거꾸로>에서 바로 <좌초된/저 아래로>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죠.
<거꾸로>책에 있는 소개를 옮겨 보았습니다. 정식 불어가 아닌 점은 감안하시고요/
<거꾸로A Rebours>(1984)->가톨릭 개종 후 가톨릭 3부작<피항지에서En Rade>(1886)-><어떤 이들>(Certains>(1889)-><저 아래로La-Bas>(1891) 이 순서죠.
이후 ˝에밀 졸라 <루르드Lourdes>(1984)에 맞서 기적과 치유의 신비를 옹호하려는 르포르타주 형식 <루르드의 군중들Foules de Lourdes>˝을 쓴 게 마지막 저작이라고 되어 있어요.
적절한 의문 감사합니다.

cyrus님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cyrus님 가을 독서는 또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하네요. 모쪼록 건강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