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소설을 쓰고 독자가 그것을 읽는 과정도 소설 속 ‘꿈 읽기’ 작업의 하나다. “누군가가 오래된 꿈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꿈을 같이 꿔줌으로써 잠재된 열량이 달래지듯이(『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179p), 우리는 하루키가 구축한 소설 속 세계를 읽으며 우리 안의 ‘역병의 씨앗’(‘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무용한 것, 오히려 해로운 것’(『도시와 … 벽』, 178p)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달랜다. 하루키가 이 소설을 수십 년에 걸쳐 개작 해온 과정도 그렇고, 주인공이 100퍼센트 첫사랑을 쏟은 소녀를 오랫동안 기억해온 시간과 ‘세계의 끝’ 마을을 곱씹다가 마침내 그 마을에 들어서는 과정도 그렇다. 사실 ‘세계의 끝’ 마을은 주인공 ‘나’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소녀를 통해 알게 된 세계다. 스피리츄얼한 재능을 지녔으나 현실 세계에 적응할 수 없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세계의 끝’ 마을에 등장해 ‘꿈 읽은 이’의 작업을 계승했듯이, 인간의 의식과 마음이 한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주인공 ‘나’가 ‘Z**마을 도서관’ 관장 고야스 다쓰야를 꿈속에서 이미 보았고, Z**마을로 와 고야스 유령의 존재와 그의 사연을 소에다 사서와 공유하는 상황도 인간의 여러 연결점을 보여준다.
주인공에게 첫사랑이었던 소녀의 사라짐은 ‘나’라는 존재의 가치 없음과 철저한 상실의 상흔으로 남았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꿈’이 되었다. 하루키 소설에서 젊은 시절 갑자기 사라지거나 자살하는 인물이 유독 많은 것은 소설 장치로써 그가 애용하는 모티프의 의미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자주 한다. 주인공처럼 하루키에게도 (밝힐 수 없는) 어떤 사람에 대한 상실이 큰 트라우마로 각인되었고, 그의 작품 세계에서 끝없이 변용되는 게 아닐까. 그가 이 소설의 작가 후기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도시와 … 벽』, 766p)라고 소회를 남겼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트라우마적인 모티프에 중점을 두는 것은 너무 단정적이다. 우리의 정신에 각인된 어떤 문제, 우리의 선택에 대해 골몰하다 보면 우리는 인간의 마음과 의식 작용이 왜 이런 것인지 따져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방향성을 잡아간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과 선택이 “나무토막이 조류에 실려오듯 그저 어떤 힘에 이끌려 이곳에 와닿은”(『도시와 … 벽』, 125p) 것과 같은 의심스러운 날들로 되는 걸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