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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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한다.

이 말... 누가 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굳이 찾아봐야 할 필요를 못 느껴서 출처는 미상으로 두기로 한다. 어느 영화의 유행어처럼, 뭣이 중헌디. 저 말이 중하고 저 말을 한 이가 누구인지는 (지금 이순간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기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린다라....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자기 자신이 되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거나, 못마땅한 현재를 견디거나.

 

돌연 채식을 하다 완전히 섭식을 끊기로 한 영혜는 투쟁하는 편을 택했다. (택했다기 보다는 사실, 그에겐 그 길밖에 없었다)

이 현재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이제까지 고수해온 취향, 식성, 습관, 성격, 가치관. 내가 몸 담아아온 세계와 사람들과 그 모든 것의 질서, 그 사이에서 공유했던 정서와 규칙들. 그래서 현재에 투쟁한다는 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과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 세상의 질서와 어쩌면 온 우주와 싸우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 당신 옆에서 현재에 투쟁하고 있을 때 당신은 그에게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그의 싸움을 지지할 것인가, 저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방관할 것인가 

이 소설은 묻는다. 이 물음이 왜 중요하냐면 이때 폭력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영혜의 각성은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아주 어린 시절, 그녀의 명치에 대롱대롱 작은 목숨 하나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일이었다. 현재에 투쟁할 힘이 없어 견디기만 했던 그녀에게 꿈이 불을 당긴 것 뿐이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느꼈지만 한강은 인간의 폭력성을 서글프게 전달하는 특이한 작가다. 처참하게 피를 흘리는 살덩이를 그려 폭력이 나쁘다고 알리는 법이 없다. 다만 슬퍼하고 애끓는 어떤 목소리로 해치면 아프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 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상대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말 한마디조차도 필요없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 하나로도, 아무 감정을 담지 않은 눈빛 하나로도 인간은 상대의 다리를 꺾어 다시는 못 일어서게 만들수도 있다. 애정을 가장한 간섭이나 예의를 가장한 경멸 같은 것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다는 위로를 잠자코 들어야 하는 굴욕처럼 살면서 얼마든지 겪어야 하는 아픈 것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다.

 

물론 살아가면서 이렇게 아픈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아픔을 달래주는 것들도, 치료해 새 살이 돋게 하는 것들도 분명 있다.

영혜의 언니가 생각한 것처럼, 그래서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죽일듯 미웠던 사람에게 아주 오랜 뒤에쓸쓸한 연민이 들기도 하고,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소리내어 웃기까지 하고.

어쩌면 이런 인간의 아이러니가 이 민감한 폭력의 바다에서도 인간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신이 배려한 유일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영혜보다는 영혜의 언니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현실을 허물고 꿈으로 건너가기 위해 미쳐버리는 대신, 현실에 투쟁하지만 미칠수는 없어서 굴욕과 경멸을 꾸역꾸역 삼키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영혜는 이름이 있지만 그녀의 언니는 이름이 없다.

왜 영혜는 영혜라는 고유의 이름으로 특정되었지만 그녀의 언니는 그러지 못했나.

어떤 인물로 특정되지 않아 내가 되기도 하고 내 지인이 되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도록, 그래서인가보다.

영혜처럼 살지 못하여 그녀의 언니처럼 살아가는 많은 우리를 위해 이름 없이 두었나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 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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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은 주역 - 동양철학과 인문학의 고전 읽기
이중수 지음 / 별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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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괘니 천간이니 하는 규칙들은 참 신비하다.

동생은 몇 년 생이니? 토끼띠에요. 아유, 언니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이런 대화가 가능한 문화권에서 살아왔으므로, 십이지나 갑을병정이니 하는 십간은 나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규칙이다. 그리고 때로 이런 규칙들로 풀어내는 운세, 사람 생의 흐름이 어느 정도 맞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토정비결이나 오늘의 운세 등에서 풀어내는 것들도 전혀 얼토당토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올해만 해도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병신년'으로 작년부터 우려도 많고 말도 많았는데 이름에 걸맞는 오만가지 사건들이 다 생기는 것을 보라. (웃자고 하는 소립니다)

 

주역에 대한 책을 읽게 된 건, 위에서 설명한 나의 성장배경 때문이다. 십간과 십이지가 지배하는 시간 속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런 질서의 근본이 되는 역학 체계가 어찌 아니 궁금할 수가 있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궁금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미래를 점치는 건 일기예보를 믿는 거와 같다고 생각한다. (기상청 디스 아닙니다) 큰 그림을 그릴 수는 있으나 세세한 사건과 운명의 향방까지 예측하는 것은 신도 못하는 일이라고 감히 생각하며 살고 있다. 왜냐면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니까. 생각도, 선택도 변화무쌍한 존재, 그래서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가 인간 아닌가.

 

<바로잡은 주역>을 읽으면서 생소하고 복잡한 체계와 언제 읽어도 어려운 한문 덕에 머리가 복잡했다. 아직은 내가 감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구나 싶어 포기하려던 나를 한 구절이 위로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입장과 주역이 바탕에 깔고 있는 미래에 대한 입장이 같다는 사실.

 

' [주역]이 보여주는 운명 예측은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 195쪽 에필로그

 

이런 공감대를 발견하고 나면 그때부터 책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진다. 부쩍 재미있어지고, 흥미로워진다.

 

저자는 젊은 시절부터 주역을 공부해보려고 시도했으나 매번 첫 장에서 낑낑대다가 포기하곤 했단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이 부분에서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어려워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격려했다. 너가 이상한게 아니다... ㅠㅠ)

 

​​​이 책은 본격적으로 괘에 대한 부분 즉 본편을 들어가기 앞서 주역의 근간 사상을 먼저 익히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주역의 철학을 담고 있는 계사전을 크게 두 덩이로 나누어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 나간다. 해석이나 기술적인 부분이 아닌, 사상을 담은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갈릴 듯 하다. 나의 경우에, 사상을 설명해주어서 오히려 읽기가 부담이 없었다. 동양 인문학을 읽는 느낌으로 주역이 사상적을 바탕하고 있는 세계관을 짚어 나갔다. 주역의 세계관을 읽어나가면서 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이 책이 그간 많은 군자와 학자들의 총애를 받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주역의 철학은 사람의 운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하므로, 그 운명이 조금이라고 길한 쪽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옳은 행실을 하라고 가르친다.

 

미래를 점쳐보는 '' 자체도 흥미롭지만 '변화하는 인간'이라는 변수에 무게를 두되 이 변화를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지, 또한 나는 어떻게 변화해나갈 것인지를 고민해보는 주역의 근간도 아주 재미있다. 주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나, 주역의 철학이 궁금한 사람이 차분히 읽어볼 만하다.

  

 

 

    



"선한 일을 쌓지 않으면 족히 이름을 빛내지 못하고,

악한 일도 쌓이지 않으면 족히 몸을 망치지는 않으리니,

소인은 조금 선한 것을 유익함이 없다 하여 행하지 아니하며,

조금 악한 것은 (나쁘긴 하지만) 해가 적다 하여 그만두지 아니한다.

그런데 악이 쌓여 숨길 수 없게 되면 죄가 커져 풀 수가 없게 되니,

역이 이르되 `형틀을 짊어져서 귀가 없어지니 흉하다` 했다."

- 火雷噬嗑괘 上九 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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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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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도 품격이 있다.

사람에게 그러한 것처럼.

문장이란 사람이 쓰는 것이라 문장의 품격은 다름아닌 사람의 품격에 달렸다.

그래서 문장의 품격을 만나게 되는 일은 멋있는 문장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멋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문장의 품격]이라는 책 제목을 읽는 순간, 나는 그런 기대에 설렜다. 멋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을 기회다!

 

조선의 문장가들은 무엇을 썼을까?

나는 오늘, 인스타00에 내가 만든 소품 사진 한 컷을 올리면서 짤막한 문장 몇 개를 썼고 점심을 먹고 난 뒤 생각난 일정들을 다이어리에 짧게 정리해 썼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것들을 달력에 두 문장으로 써 넣고 지금은 이렇게 포스팅을 쓴다. 일기거나 일정이거나 sns거나.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이런 기록들, 사소하고 즉흥적인 문장들이 지배하는 내 삶과는 달리 조선의 문장가들은 분명 뭔가 그들만의 특별한 글감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문장의 품격은 특별한 것을 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 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다.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이렇게 일상을 쓰면,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내 삶에도 품격이란 것이 자라게 되나?

 

조선의 문장가들은 참 사소한 것들을 쓰고 그것을 주고 받았다. 집에 쌀이 없으니 좀 꿔주게, 이런 부탁을 하거나 '우리집에 서재를 새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어울리는 글 좀 써주시오'라는 부탁에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이런 자랑글을 쓰기도 하고 벗을 위로하는 짧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일상들이 거기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나와는 접점도 교집합도 거의 없는 옛날 사람들이 쓴 이야기가 재미있을 줄이야.

재미 뿐 아니라 유익하기도 하다. 애초에 글 잘 쓰는 기술에 대한 내용을 읽기 위해 이 책을 편게 아니었다. '품격 있는 문장'을 썼다고 알려진 문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살다 갔는지 궁금했다. 그런 나의 물음에 대해 이 책은 아주 적합한 답변을 해주었다.

 

이 책이 보여주는 많은 글, 많은 문인들의 삶이 인상적이지만 이덕무와 이용휴의 글이 특히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청빈.. 말이 좋아 청빈이지. 쌀을 꾸면서 술도 있으면 좀 같이 보내달라고 청하기까지 하는 것이 그들의 나날들이었다. 그런 궁핍함 속에서 그들이 문장에 담은 것은 좁은 방의 답답함이 아니라, 조금만 몸의 위치를 바꿔도 사방이 바뀌는 이치의 신비함이었다. 좋은 재료로 빚었기 때문에 좋은 그릇이 되는 게 아니라, 좋은 것을 담았기 때문에 좋은 그릇이 되는 법이다. 문장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무엇을 생각하며 글을 쓸 것인가. 이 부분이 문장의 품격이 출발하는 지점이겠지.

 

시간이 지나 또다시, 글이 무엇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하게 될 때 꺼내 보고 싶은 책이다.

 

 

아! 우임금도 풍속을 따라 바지를 멋었고 공자도 남을 따라 사냥을 하고 잡은 짐승을 비교해보았다. 대동하는 마당에 시세를 위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들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할 것인가? 아니다! 마땅히 이치를 따라야 한다. 이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에 있다. 범사에 반드시 자기 마음에 물어보라! 마음이 편안하면 이치가 허락한 것이요,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이치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따라서 행하는 일이 올바르고 하늘의 법칙에 절로 부합할 것이며, 마음의 요구에 따라 행동해도 기수(氣數: 저절로 오고 간다는 길흉화복의 운수)와 귀신이 모두 그 뒤를 따를 것이다.

69-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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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일 동안 아이슬란드 - 네 여자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배은지 지음 / 미래의창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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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는 참 낯설다.

뭘 해서 먹고 사는 나라인지도 잘 모르겠고 뭐가 유명한 나라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나의 무식함을 인증하게 되어 무척 송구하지만. 정말 이제까지 살면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느꼈던 나라에 크로아티아라든지 핀란드라든지 뭐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한번도 아이슬란드를 가보고 싶다고, 거기가 궁금하다고 느꼈던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나를 아이슬란드는 단 몇 시간만에 홀렸다. 단번에 '.. 진짜 여기 가고 싶다'고 동경하게 만들었다. 이런 교통사고 같은 애정을 일으켜 준 문제작이 있으니, 바로 아이슬란드의 매력을 콕콕 꼬집어 전해준 책, [10일동안 아이슬란드] 되시겠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행에 그리 능한 편이 아니다. 아무데서나 잠들기 능력은 꽤 쓸만한데 그것 뿐이다. 짐꾸리기, 길찾기, 맛있는 식당 찾기 등등 여행에 필요한 주요 스킬은 영 신통치않다. 그렇다고 해서 여행 그 자체를 즐기지 않는 건 아니다. 새로운 세상은 항상 옳다. 새로운 세상이란 거기가 좀 척박하고 문명의 혜택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곳이라고 해도, 새롭다는 것 자체로 좋다. 낯선 언어, 낯선 공기, 낯선 풍경이 주는 그 묘한 긴장감은 카페인 같다. 처음 한 모금이 힘들뿐, 자꾸 자꾸 다시 찾게 되니까.

몸이 훌쩍 떠나기가 어려운 처지여서 그런가, 요즘 확실히 여행기를 읽는 횟수가 잦다. 예전에는 남이 다녀온 여행 후기 읽는 게 뭐가 재미있나, 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남이 여행길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거기로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을 달랜다. 읽으면서 혼자 여행계획을 세워보는 거지. 신통치않은 여행 스킬을 이렇게라도 연마해보는 거다.

 

나 같이 여행력이 미비한 사람들은 원정대를 구성해서 떠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0일동안 아이슬란드]의 저자와 그 원정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너는 길찾기와 운전하는 발이 되고 나는 식사를 만드는 손이 되고 또 다른 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는 눈이 되라. 탕탕탕. 이렇게 서로를 보완해줄 파티원을 잘 짜서 출발한다면 적어도 햇반을 미처 못 구해 굶거나 야밤에 숙소를 못찾아 길을 헤매다 밤을 꼴딱 새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지만 아니, 여행은 그런 걸 예측할 수 없다. 단언할 수도 없고 확신할 수도 없고. 그래서 여행을 인생에 비유하잖아.

[10일동안 아이슬란드]의 저자 배지은씨는 아는 사람들끼리 이참저참(친하던 사이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 뭉쳐서 열흘간 아이슬란드 여행에 나섰다. 일행이 아이슬란드 공항에 도착하기도 전에, 책을 읽으면서 나는 걱정부터 들었다. 4사람, 그것도 평소 교류가 많지 않던 사이라 손발이 안 맞아서 혹은 크게 싸워서 어려운 일은 없었을까, 이런 생각 때문에. 그런데 그녀들의 여행기는 매우 훈훈했다. 문화와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자 광활하고 장엄한 자연 앞에 감탄을 마지 않는 솔직한 사람들이라는 교집합 때문일까. 그녀들이 찾아다닌 아이슬란드의 폭포, 마을, 미술관 등 다양한 관광지도 매력적이고 그녀들의 여정 그 자체도 매력적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도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다고 느낀 건 아이슬란드 자체의 매력과 더불어 너무나도 유익한 여행을 다녀온 그녀들의 여행기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열흘이면 너무 짧다, 조금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이 끝나가는 게 아쉬웠다.

 

경비는 구체적으로 어디어디에 얼마가 들었는지, 공항에서 내려서부터 렌터카 대여 그리고 숙소로의 이동 등 여행 경로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 이 책은 아이슬란드 여행 정보도 꼼꼼하고 알차게 잘 담아냈다. 저자들이 다닌 여행 경로 그대로 쫓아다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좋다.

이전까지, 내 신혼여행지는 항상 '하와이'였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아이슬란드로 가야겠다. 오로라 아래서, 데티포스 앞에서 그 사람 손을 잡고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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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의 기도
오노 마사쓰구 지음, 양억관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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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단편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각 단편에서 각각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사는 지역은 같다. 오이타의 작은 바닷가 마을. <9년 전의 기도>는 세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일 것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저자 오노 마사쓰구는 자신이 오이타 현의 사이키 시에서 태어났다고 했고 역자는 이 단편들이 연작이라고 했다.)

 

한밤중에 혼자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풍경을 본 사람, 그 소리를 듣고 그 거역할 수 없는 무게에 설득당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안다.

짙은 남색 파도가 한없이 한없이 밀려올 때의 암담함, 쓸려 나가는 모래의 소리를 들으며 슬픔인지 허전함인지 그런 것에 빠져 마냥 앉아있게만 되는 것이다. 한낮에 찬란하게 빛나던 바다의 하얀 포말은 수평선 어딘가로 간 곳이 없고, 그저 이대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지 바로 흐르는지도 모르겠는 그런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한밤의 바다에서 혼자 파도를 마주할 때.

 

아들 캐빈의 발작을 겪으며 피곤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이 여자(사나에)의 삶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나는 거역할 수 없는 무게의 그 느낌을 상기했다. 내가 무엇을 해도, 어떻게 해도 파도는 계속 밀려올 것이다. 이 파도를 멈출 수 있는 스위치 따윈 없다. 밀려 오고 밀려 오고, 계속 밀려 오고. 사람들의 시선과 막막한 앞날,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아들의 병. 그래서 사나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줄기 어딘가, 끈질기게 사나에가 붙잡고 있던 위로가 있었다. 9년 전, 함께 여행을 갔던 밋짱 언니.

남들과 다른 아들을 키우며 남몰래 많은 눈물을 흘렸던 그 언니(실상은 아주머니)가 교회에 앉아 기도하던 풍경이 사나에의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사나에는 현재와 기억을 오가며 자신의 모습과 밋짱 언니의 처지를 비교하기도, 때로는 자신이 밋짱 언니인 듯 동일시하기도 한다. <9년 전의 기도>9년 전, 사나에가 밋짱 언니 등과 함께 캐나다로 여행을 갔던 시절과 현재 동거인과 헤어지고 아들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 된건지, 잘못 짠 니트의 코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듯 사나에는 기억과 현재를 오간다. 향기로운 술처럼 발효된 사랑인줄 알았건만 그녀가 보낸 시간들은 발효가 아닌 '부패'였다. 그녀 스스로 이토록 혹독하게 과거를 평가하는 동안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신경질과 독만 잔뜩 올라가는 딸 옆에서 그녀의 늙은 부모는 무기력하다.

사나에는 암담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섬을 찾아간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가 탈출한 것은 은 끝없이 현실에 갇혀 절망을 반복하는 그녀 자신으로부터 였다. 그리고 그녀의 탈출을 도운 것은 인자와 평안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밋짱 언니. 아니, 밋짱 언니의 모습을 한 '삶의 의지'라고 해야 할까. 아들을 위한 기도였는지 자신을 위한 기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멈춘 듯 간절하게 기도하던 밋짱 언니의 모습은 구원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현실의 상처에 버둥거리는 사나에의 중심에 그리고 그런 그녀가 해방과 구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의 중심에 기도하는 밋짱언니의 모습을 한 '삶의 의지'가 있다.

저자는 삶의 죽음의 기로에 선 사나에에게 '손을 놓으면 안돼'라는 삶의 의지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교회 안에서 기도하던 밋짱 언니의 등 뒤로 슬픔이 서 있던 것을 느꼈던 사나에는 이제 자신의 등 뒤에도 그 슬픔이 어깨를 어루 만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사나에는 이제 담담히 그 슬픔을 인정하고 아들의 두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슬픔이 그 슬픔의 무게를 미안해하고 인간을 위로하는 이 장면은 이 책 전체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부분 때문에 이 작품 <9년 전의 기도>는 인간의 의지를 다룬 다른 작품과 차별된다. 파도를 거역하라고, 파도에 맞서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어깨를 주무르며 이제 일어나자고 위로하는 느낌이다. '살아야만 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다만 모두가 자신의 슬픔가 함께 담담하게 살고 있으니 '손을 놓지 말자'고 부드럽게 손을 잡는 저자 오노 마사쓰구의 메시지가 고마울 정도로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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