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자수 - 소중한 이를 더욱 특별하게 하는 자수 한 땀
장정은 지음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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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5학년 쯤이었나, 그때 한창 자수가 유행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패션잡지에, 티셔츠에 수를 놓아 개성있는 패션을 입어보라 어쩌라는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었을 정도였다.

나는 그때 순 눈대중으로 해바라기를 수놓는 법을 익혀서는 하얀색 니트에 수를 놓아서 입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내게 가르쳐 준것은 나는 수놓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한 가지였다. 그 이후에 다른 무늬를 더 배워보겠다거나 해보겠다는 일은 일체 없었을 뿐더러 자라면서 단추달기, 찢어진 곳을 임시방편으로 꿰매어 입기 정도 말고는 수놓기에 관심도 인연도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가, 그저 단순히 나의 취향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인가.

부쩍 자수에 눈이 간다. 특히 아이보리색이나 하얀색 천에 소박하지만 명랑한 색감의 꽃이나 무늬들이 수놓인 것들을 볼 때면 절로 마음이 즐겁다.

 

눈으로 보면서 마음이 자꾸 즐거워지다보면 신기한 일이 생긴다. 눈으로 보기만 할게 아니라 내가 내손으로 해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슬금슬금 솟아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자수는 어렵다. 어릴 때 해봐서 너무나 잘 알지.

그래서 단번에 복잡하고 어려운 스티치나 도안에 도전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오랜만에 자수에 도전해보려는 나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좋은 가이드가 필요하다. 이것만큼은 꼭 지키면 될 일이다. 눈을 흡족하게 해주는 어여쁜 도안이면서도 스티치는 가능한 쉬울 것!

 

[선물자수]라는 책을 통해 다시 '자수'에 도전해보게 된 것은 참 행운이다.

비교적 쉬운 스티치로 단정하고 예쁜 도안과 소품들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만족스런 일인지 모른다.

프리랜서 아나운서인 장정은씨가 펴낸 이 책은 21개의 크고작은 자수 아이템의 도안과 제작법을 담고 있다.

아기옷이나 일반티셔츠 등 의류를 비롯하여 카드, 장식용 액자, 거울, 주차 번호판 등 일상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소품들에도 자수를 활용하여 독특하면서도 소중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너무 어려운 스티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보들이 신중히 한 땀 한 땀 도전하다보면 무난하게 완성할 수 있어, 누구든지 수록된 작품들을 구경하다보면 당장이라도 따라하고 싶어서 손이 간질간질해질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퇴근하고 늦은 밤 혼자 방에 앉아 있다가 정말 난데없이 바늘에 실을 꿰었다.

아무 준비물도 계획도 없이 불현듯 도전한 자수라서, 책에서 가장 쉬운 스티치를 찾아, 가장 무난한 도안을 따라 그리고 책이 안내해주는 대로 따라갔다.

수틀도 없고, 천도 빳빳하지 않은 티셔츠였지만 뭐 어떠랴. 갈매기 같은 M자가 나오고 엄한 곳을 꿰매어 다음날 아침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했지? 라고 생각했지만 뭐 그것도 어떠랴.

조용한 한밤중에 손을 움직여 홀로 집중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재미이고 힐링이 된다는 걸 배웠다.

저자가 쓴 '조금 엉성해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가 참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다.

 

이제는 수틀을 구해보련다. 수틀도 구하고 빳빳한 천도 구해서 [선물자수]에 실린 작품들을 하나 하나 따라해보려고 한다.

나에게 힐링이 된 자수들이 누군가에게도 특별한 선물이 될수 있다면 그것도 너무 좋은 일일거다.

완벽하게는 못해도 적어도, 누군가가 받고 예뻐해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는 날까지, [선물자수[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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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인다 - 다큐 3일이 발견한 100곳의 인생 여행
KBS 다큐멘터리 3일 제작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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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함이요,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보기 위함이니, 보면 모으게 되나, 다만 헛되이 모으는 것은 아니어라"

 

조선 후기 문인 유한준의 말이다.

아는 것은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보기 위하여, 그리하여 알고 사랑하고 보게 된 것을 모으게 되니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라 한다.

 

알지 못하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니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알고 사랑하고 진정으로 보아야 그것을 모으고 소중히 품게 되는데, 그래야 헛되이 흘러가지 않고 차곡차곡 쌓인 인생이 남는 법인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이것이 참 어렵다. 모여지고 고여지고 쌓이지 못하고, 무엇이든 쉽게 흘러가고 금방 사라지고 잘 버려지고 무너지는 것에 더 익숙한 게 우리 세상이지 않나. 진정보다 헛된 것을 더 편안해하고 즐거워하는 탓에 우리는 보려고도 하지 않고, 사랑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다큐멘터리 3일은 언제나 신선한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이 자그만 땅에서 부대끼고 요동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만드는 공간과 시간과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모아 만든 그 영상을 보면서 어느 때에는 위로를 받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도전을 받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런 생명력을 느낀 시청자는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많은 한국인이 이 프로그램에 공감하고 동감했기에 10년간 제작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알지 못하여 사랑하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그 익숙하고도 낯익은, 아주 사소하고 무가치하게 보였던 풍경들을 새롭게 조명해 온 <다큐멘터리 3>. 이 프로그램이 담았던 공간에 대한 기록이 책으로 엮여 나왔고, 나는 이 프로그램을 사랑했던 만큼 이 책도 사랑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직전에 나는 경주에 다녀왔다. 고루하고 익숙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경주는 너무나 새롭고 아름답고 빛나는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경주로부터 모아온 소중한 것, 진짜 경주의 얼굴을 간직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것이 실은 얼마나 다채롭고 신선한 풍경을 가지고 있는지를 발견한 후에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의 목소리가 더 마음 깊이 와 닿았는지 모른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애정을 담아 새롭게 조명해 낸 제작진의 10년의 노력에는 존경을 보내며, 어느 한 장소도 소홀함 없이 각각의 풍경이 품고 있는 의미와 가치들을 정성스럽게 기록해 주어 고마운 마음으로 읽었다. 단순한 장소 소개가 아니라 한 편의 에세이처럼 글이 아름다워서 영상으로 볼때와는 또 다른 감동과 느낌을 전해준다.

휴가나 여러가지 이유로 국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이 책을 만나기를 바란다. 단순히 몸이 떠났다가 몸이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마음으로 떠나가서 마음으로 알고 사랑하고 보고, 그 모든 순간을 모아오는 진짜 여행을 이 책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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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지금 우리가 원하는
박종평 지음 / 꿈결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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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의 출근길을 뉴스로 읽으면서 나는 가장 먼저 이 책을 떠올렸다. [이순신, 지금 우리가 원하는]

이 책은 탄탄한 사료와 분석을 바탕으로 이순신의 일생을 글로 옮긴 책이다. 웬만한 소설보다도, 드라마보다도 더한 흡인력이 있어 나는 이 책의 첫 장을 연 그 날 몇 시간만에 끝까지 다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남긴 삶의 기록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이순신을 향한 끝없는 흠모와 경외를 아끼지 않고 글에 담은 저자의 문장도 아름다웠다.

 

책의 첫 머리는 저자의 전언으로 시작한다.

420년 전, 1597년 정유년은 리더 이순신, 장수 이순신, 경영자 이순신, 아들 이순신, 아버지 이순신에게 견딜 수 없는 온갖 고통이 1년 내내 밀어닥친 지옥 같은 해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겨 냈고 불멸의 신화를 썼습니다. (중략)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무엇도 할 수 없고 이룰 수도 없습니다. 이순신은 자신을 죽도록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넘쳐 가족과 이웃, 국가와 민족까지 녹여낸 사람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삶의 시작입니다.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본문 8-9

 

이순신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앞서 저자는 이순신의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의 위대한 가치를 먼저 짚어낸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을 사랑했고, 가족을 사랑했고 민족을 사랑했고 나라를 사랑했다. 그는 그저 말로만 백성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랑은 뿌리까지 온통 진실한 것이어서, 가족을 돌보고 백성을 부양하고 왕을 섬기고 조선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실질적이었다. 그의 아주 구체적이고 진실한 사랑 덕에 백성과 왕이 그리고 온 나라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거북선이나 조총을 만든 일과 버려진 섬과 나라의 목장을 이용해 백성과 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소금을 굽게 한 일, 또 승려를 이용해 구리를 모으는 방식 등은 모두 발상의 전환이 만든 기적들이다.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백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고,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며 공존하고 공영하는 일거양득의 지혜였다. 이순신이 만든 기적과 배경와 지혜와 원천은 지독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지도자의 고독에서 비롯되었다.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 가슴에 품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홀로 내내 앉아 있었다.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다.

홀로 높은 수루에 기댔다. 온갖 생각에 어지러웠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다.

 

홀로 아픔을 견디면서 결국에 그는 언제나 이제야 온갖 생각 끝에 얻어 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삶의 주인공이 겪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온갖 생각을 다 했고 그 생각의 결과로 기적을 만들어 냈다.

1593년부터 1596년까지 이순신은 전투와 경영에서 모두 성공했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성장과 복지를 같이 이루었고 끊임없는 경영 혁신과 창조 경영을 해 나갔다. 성장과 복지, 경제와 국방, 혁신과 창조의 세 영역에서 삼위일체를 만들며 모두가 승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경영자이자 지도자이자 장수였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 백성과 군사는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싸우는 군사가 되었다. 또 때로는 어부, 때로는 농민, 때로는 노동자가 되어 힘을 모았다. 서로가 서로를 함께 살렸다. 이런 일들은 모두 이순신을 향한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 이순신의 솔선수범이 성공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본문 190-191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다. 400여 년 전의 위대한 인물에 대한 감동으로, 진정한 리더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 이 시대에 과연 저런 리더는 어디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울었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그 밤에 리더는 언제나 혼자였다.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혼자가 된 리더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들과 시대와 나라에 대해 가슴을 치며 고민하고 고민하다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생각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을 불러온 그의 치열한 고민은 단 한번의 패배도 없는 완전한 승리를 만들었고 백성과 군사를 함께 살게 했다. 이순신의 옆에서 백성과 군사들은 목숨만 부지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으로부터 이 시대를 견뎌낼 신념과 용기를 받아 먹었다.

죽음조차도 사람과 나라를 지키는 데에 온전히 바친 이순신의 무서우리만치 헌신적이고 완벽한 인생은 읽는 것만으로 내내 경탄과 경외를 불러 일으킨다. 이 책은 그 어떤 드라마나 소설보다 명백하고 분명하게 이순신 생애의 가치와 무게를 보여준다. 삶의 수많은 고비와 변화 속에서 이순신이 무엇을 느꼈고 어떤 선택을 내렸으며 그에 대한 결과들까지 세밀하게 기록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순신의 심정을 가깝게 느끼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과 그 사랑만큼 강한 실력을 가지고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살다간 이순신이라는 인물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대로 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얻기 위하여 고민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을, 나는 이순신의 삶에서 보았다.

 

저자는 이 책에 이순신의 일생을 켜켜이 담고 나서 책 제목을 참으로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우리 자신이 이순신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또한 이 나라가 이순신과 같은 지도자를 또 한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이 깊어 차마 몇 개의 단어로 이 책을 단정지을 수 없었나보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세 개의 짧은 단어에 너무나 많은 꿈과 바람이 넘실거린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리더, 지금 우리가 원하는 세상, 지금 우리가 원하는 나라, 지금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

 

어제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내가 지지했던 후보는 예상대로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떠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는 대한민국을 이끌 19대 대통령이 탄생했다. 누가 앉아도 힘든 자리이고 누가 해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가 갈래갈래 찢어지고 난폭하고 흉흉해진 민심을 이어 붙이길 바란다. 한 국가의 수장다운 실력과 덕으로서 새롭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길 부디 응원할 뿐이다.

그러하기에, 19대 대통령께서도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여기에 다 담겨 있으므로.

    



온갖 생각이 가슴을 쳤다. 가슴에 품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홀로 내내 앉아 있었다.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었다.

홀로 높은 수루에 기댔다. 온갖 생각에 어지러웠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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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를 보여주마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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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 새끼는 어미의 뿔을 보고 가야 할 곳을 찾는다. 코뿔소는 새끼든 어미든 뿔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간다.

 

사람의 미래는, 그가 그의 과거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아무리 우람한 나무라도 작은 씨 하나에서 출발하고, 햇빛의 영광을 누리는 건 울창한 가지일지라도 나무의 뿌리가 깊지 않으면 강한 햇빛은 오히려 해가 된다.

뿌리가 탄탄하지 못한 나무는 시들 수밖에 없듯이 사람도 그렇다. 과거에 빚이 남겨진 사람은 미래를 빚의 그늘에서 살고 과거에 한이 있는 사람은 미래를 한의 터 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는 때로 과거를 잊게 한다. 현재의 안락함과 안온함이, 현재에 누리고 있는 부귀와 권세가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를 돌아보고 청산하게 만드는 의무를 잊게 한다.

하지만 시간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시간은 심판자다. 시간이란 현재 권력을 쥔 자의 편도 아니고 과거 피해자의 편도 아니다. 다만 일어났던 모든 일을 간직하고 묵묵히 흘러갈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때가 되면 시간은 가증스럽고 부패한 뿌리를 샅샅이 파내어 사람의 눈앞에 드러낸다. 그렇게 사람에게 경고한다. '너의 과거에 파숫꾼을 세우지 않으면 현재는 잠잠할지라도 미래는 분명 망하게 된다'는 것을.

 

조완선 작가의 [코뿔소를 보여주마]를 읽고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잊은 자들의 말로, 피해를 입은 자들의 현재..... 그 모든 것이 비극이다.

죄를 지었으므로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죄를 지은 자는 원한에 의한 살해가 아닌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법이 그들을 심판하기를 원치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법이 그들에게는 눈을 감고 나에게만 그 냉혹한 칼날을 들이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의가 사라진 세상에서 나라도 정의를 지키겠다는 일념은 옳은 것인가 아둔한 것인가?

 

조완선 작가는 '코뿔소는 새끼든 어미든 뿔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간다'면서 어미의 뿔이 새끼 곧 후대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썼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어미의 뿔의 방향이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나는 이 말이 이 땅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말이라고 느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의 모습. 우리가 태어나면서 배운 수많은 부조리와 부패와 부당함. 무엇보다도 인식 속에 그리고 사람들의 말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폭력. 그렇다면 다음 세대에게 우리 역시 이런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다음 세대가 따르게 될 뿔의 방향에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잔재들을 남겨둘 것인가.

 

작가는 이 작품을 1980년대 부당한 국가권력의 횡포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라고 썼다.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는데도 그 누구도 진실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자들이 이 땅에 너무나도 많다는 것, 어쩌면 알려진 사람들보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슬프다. 또한 그 누구도 곪고 냄새나는 뿌리를 도려내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슬프다. 흙으로 덮어둔 채 현재만 모면하려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지금도 그런 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 자들을 겨냥한 코뿔소의 뿔은 때로는 촛불로, 때로는 서명으로 여러 개의 모습으로 어떻게든 자라가고 있다.

 

[코뿔소를 보여주마]1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버지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는 코뿔소들의 시도가 정말 그들의 목적을 이루게 될지 어떻게 될지, 책에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또한 코뿔소들을 추적하는 베테랑 두식과 범죄심리학자 수연 그리고 검사 준혁이 각자의 트라우마와 과거에 진 빚들을 어떻게 청산해갈지도 미지수로 남았다. 그래서 450쪽을 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버리고 다음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이 다음 이야기를 읽게 될 쯤에는 한국 그리고 한국인이 썩은 것을 도려내고 털어내 보다 깨끗하고 맑은 심정으로 코뿔소를 마주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코뿔소 새끼는 어미의 뿔을 보고 가야 할 곳을 찾는다. 코뿔소는 새끼든 어미든 뿔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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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이비 포켓 좀 말려줘 아이비 포켓 시리즈
케일럽 크리스프 지음, 이원열 옮김 / 나무옆의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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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가끔 이 아이가 12살이라는 걸 잊는다. 산 것과 죽은 것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그 아이의 입장이라면, 어쩌면 당연한 걸까? 보통 그 또래 아이들이 갖는 친구에 대한 그리고 선의에 대한 기대를 비칠 때면 아이비 포켓을 소녀로 떠올리며 읽는 데에 무리가 없지만 가끔 이 친구가 정말 대책 없이 사건을 만들거나 어떤 일에 뛰어들거나 대담한 독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댈 때면, 차라리 12살 아이가 주인공인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읽는 게 편하다.

 

아이비 포켓 시리즈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하녀 시리즈라는 문구로 국내에 소개된 소설이다. 주인공 아이비 포켓은 열두 살로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는 꿈 많은 소녀가 아니다. 오히려 잔혹하고 냉담한 어른들의 세상살이에 강제로 합류하게 된 당찬 아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고로 어떤 어렵고 험난한 상황에서도 풀이 죽거나 삶을 비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캔디같은 아이라고 보면 큰코 다치기 십상이다. 어른 뺨을 서너대 후려치는 수준 높은 독설로 주변 어른들을 그리고 아이비 포켓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자다.

 

[누가 아이비 포켓 좀 말려줘]는 아이피 포켓 시리즈 중 두 번 째 이야기다. 불행하게도 첫 번째 이야기를 읽지 못한 나는 아이비 포켓의 세계에 흡수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인물들의 대사와 문장들이 무슨 의미인지 그 뜻과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 한 페이지를 여러 번 읽기도 했다. 그런 탓에 아이비 포켓의 눈 앞에 들이닥친 여러 위기와 놀라움을 읽으면서도 쉽게 공감할 수 없고 쉽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도 못했다.

 

아이비 포켓이라는 주인공 자체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인간들의 여러 위선을 꼬집고 있는 이 책의 전반적인 씨니컬함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이 책은 내게 너무도 어려운 책이었다. 1권을 읽고 나서 2권인 이 책을 읽었다면 분명 달랐을텐데 말이지.

3권인 [아이비 포켓의 머리를 가져와]가 나온다는데, 이건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아마 아이비 포켓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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