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알라 - 고대와 중세 철학 철학하는 철학사 1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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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주는 원자가 아닌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뮤리엘 루카이저의 경구로 시작한다. 이야기라는 것은 허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 이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세상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해석하는 근거가 타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은 철학의 한 분야인 인식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 자신도 머리를 길러 영적인 모습의 철학자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철학하는 철학사 시리즈의 첫 번째 편은 <세상을 알라(원제: Erkenne die Welt)>라는 제목에서 알다(Erkenne)라는 독일 단어는 인식하다(Recognize)는 영어 단어와 아주 먼 지점에서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세상을 알라는 말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풀이되고, 이는 최초의 철학이 인식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대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처음에는 신화로 시작했다. 이어 이오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자연철학이 신화를 밀어내고 세상을 인식하는 틀로 자리잡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며 로고스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로마의 멸망 이후 기독교의 확산과 더불어 종교는 철학을 지배했고 이어 등장한 중세시대의 학자들은 믿음과 이성을 결합하여 종교를 신학으로 변화시키려고 했다. 신화, 자연철학, 로고스, 종교, 신학,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믿었다.


처음에 이런저런 해석들이 등장했을 때 그것들이 바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플라티누스는 플라톤을 재해석하여 신 플라톤주의를 만들었고 사도 바울은 인간 예수를 재해석해서 신 예수로 만들었고 그제서야 기독교는 공동체의 믿음을 벗어나 시대를 지배하는 종교로 기능했다. 후대의 인간들이 선대의 단어와 문장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앞선 것에 대한 재해석과 재조립. 앞선 것들에 대한 반목과 극복이 반복되는 것이다.


우주는 원자가 아닌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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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리커버)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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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정치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포용적인 정치체제가 포용적인 정치과정을 가능하게 하고, 포용적인 정치과정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때 포용적인 경제체제가 구축되면서 정치와 경제는 서로 선순환의 관계 속에서 지속하여 성장할 수 있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두 명의 경제학자와 정치학자가 함께 내놓은 결론이다. 정치 싸움에서 벗어나서 경제 성장에 집중하자는 정치가들의 수사는 허구에 가깝다. 이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을 읽을 무렵 한국에서는 12.3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했고 행정부-입법부-사법부 사이의 숨막히는 정치권력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 대외경제는 심각한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미국에 있는 입장에서 가장 피부로 와닿는 부분은 아무래도 환율일 것이다. 11월 말에 1,300원 후반을 기록하던 원-달러 환율은 이 글을 쓰고 있는 12월 말에 1,459원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불안정한 정치가 불안정한 경제를 야기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700쪽이 넘는 책을 읽으며 가장 궁금했던 것은, 포용적인 정치가 포용적인 경제체제를 가능하게 하고 이 선순환이 경제 성장을 견인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포용적인 정치가 어느 나라는 가능하며 어느 나라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물론 저자들은 여러 사례를 통해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집권화되지 않은 권력은 착취적인 정치체제 강화의 유혹에 무릎을 꿇기 마련이며 당장의 부와 권력을 놓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법이다.

무엇보다 저자들은 포용적인 정치와 경제가 가능했던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구분했던 요인 중 하나로 역사의 우발성을 언급한다. 역사의 우발성을 인정한다는 점은 역사를 하나의 만능 이론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견제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허무주의로 귀결될 오류도 내포하고 있다.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 알맞은 토양과 환경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임계점을 넘을 수 있는지가 우발적이라면, 영화 <오아시스>처럼 차라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며 현실을 포기해 버릴 수도 있을 법하다. 이래저래 책을 읽은 뒤 개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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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 처음 듣는 이야기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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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거실에서 TV를 아예 없애고 책장을 놓아 서재처럼 꾸민 적이 있었다. 내 시선에서 가장 책이 잘 보이는 코너에는 민음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을 비치했는데 어느 날 아내와 소파에 앉아 책장을 바라보다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앉아서 책장에 전시된 책등을 보면 책 속의 인물들이 닫힌 책 틈 사이로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아. 마치 그 책을 열면 말을 걸던 인물들이 우르르 이 현실 속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가끔 들어.”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책이란 외부로 통하는 문이며 책은 독자를 지금이 아닌 시대와 여기가 아닌 장소로 데려가는 힘을 지녔다. 책 한권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닫힌 공간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기고 그로부터 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아내에게 이야기한 것은 착각만은 아니었다. <레미제라블> 책 이면에는 19세기 격동의 프랑스 혁명이 존재했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책 너머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예술의 서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점의 변화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독서란 책을 읽지 않는 행위까지 포함한 것이며 정확히 말하면 언젠가는 그것을 읽을 것이라는 전미래적 시제를 포함한 행위라는 점이다. 나아가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둘러싸여 사색하고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그는 말하는데, 이렇게 보면 책이란 그 안에 담긴 활자를 읽음으로 사람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읽지 않음으로 인해 그것을 읽고 싶은 지점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우치다 타츠루 작가의 책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했지만 기록을 살펴보니 약 10년 전인 2013년에 그가 쓴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를 읽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의 나는 미셸 푸코와 구조주의 철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정작 지금까지 꾸준하게 책을 읽었던 주제는 마지막 자크 라캉에 대해서였다. 모르는 것은 여전히 많고 그것을 알려주려는 책은 여전히 많다. 나는 여전히 무지했고 그 무지함이 나를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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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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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MBTI 유형지표-쌍 중 두 번째 인식 기능은 감각(Sensing)과 직관(Intuition)으로 나뉜다. 몇 번을 반복해서 테스트해도 INFJ 유형으로 판단되는 나로서는 세상을 보다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세상을 이성이나 경험이 아닌 즉각적인 직관으로 인식하고 판단한다는 점이 때로는 스스로를 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여겨지게 만들었고 때문에 남들보다는 조금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이 드러난다고 여겼고 이런 성격을 나는 나의 한계점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바른 마음>에서 사람은 누구나 직관이라는 내면의 코끼리가 순간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하기 마련이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추론이라는 기수가 그 코끼리의 움직임을 최대한 보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처음에는 위안을 받았고 이어서는 그것이 누구나 가진 사람의 본성이라고 조금은 믿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와는 다른 직관을 지닌 이에게 우리는 본능적으로 끌리고 다른 직관을 가진 이는 경계하며 부정한다.


도덕적 판단의 여섯 가지 기반, 즉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비례와 인과법칙), 충성심/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이 각기 다른 비중으로 반응한 결과 사람이 진보적인 성향 또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는지를 살핀 점도 인상적이다. 도덕은 어느 한 가지 기반의 점유물이 아니다. 도덕은 여섯 가지 기반의 조합이며 어느 기반에 가장 높은 비중을 두고 있는지가 사회정치적 성향을 결정짓는다는 이 유기적인 움직임을 나는 머리 속으로 떠올렸다.


남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도덕적 기반에 내가 좀 더 밀접하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사회집단은 어떤 도덕적 서사에 밀접하게 반응하는지는 동태적인 것일까 정태적인 것일까? 도덕적 판단이 도덕적 기반의 조합의 결과라면 한 집단이 선호하는 정치, 경제, 사회체제 역시 그러한 조합의 결과일 것인데 다만 조합은 한 시점에 멈추어 있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시대정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인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나는 궁금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과 똑같은 도덕적 서사를 가진 사람들과 뭉쳐 정치적 집단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살아가며 어느 한 가지 서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로는 다른 대안적인 도덕 세계는 더 이상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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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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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다사다난했던 2020년. 올 해로 과장 3년차가 되었고 2010년부터 시작된 직장 생활도 만 11년이 되었다. 아직 Junior였던 사원 무렵이 생각난다. 그때는 내가 직장인으로서의 소명 의식도 높지 않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성취했다는 자부심도 없었고,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의식, 누군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느낌 역시 희박했을 때였다. 무엇보다 어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시절이 그립다. 항상 좋았다는 이상한 그리움이 피어난다. 돌아보면 우리 팀에 특출나게 잘 하는 (소위 에이스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재능과 열정을 비교하고 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했고 조화롭게 지냈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언어로 바꿔 말하면, 같은 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공선(Public Good)이랄까? 그런 것이 존중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들과 일했던 그 순간이 참 마음이 편했고, 마음이 편했던 그 시절을 늘 그리워한다. 능력과 인정과 성공이라는 것에 눈을 뜨고 일하고 있는 요즘 더 그 시절이 그립다. 아마 2013년 무렵인 것 같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은 여러 의미로 아주 각별히 내 마음 여러 곳을 쓸어내렸다. 마 교수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조금 뒤에야 그의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 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으며 아주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옳은 것을 믿는 공동체를 강조하지만, 옳음을 강제하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정말 좋았다.


오랜만에 그가 펴낸 신작이라 반가웠다. 무엇보다 올 한 해 내가 능력과 인정과 성공이라는 달콤한 덫에 빠져 회사 생활에 몰두했던 터라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가 묻는 마 교수의 질문이 더없이 날카로웠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이런 것이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 문장을 몇 번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점차 불평등해지기만 한다.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흔히 결과의 평등은 공산주의, 기회의 평등은 그나마 인정할 수 있는 자유주의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칙 자체가 옳은 것인지 돌아본다. "야 너도 노력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에 가서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어. 그건 네가 당연히 얻어야 할 몫이야. 그러니까 야 너도 능력만 갖추면 할 수 있어 우리처럼 나처럼."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루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위너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틀을 깨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야너두'와 '야나두' 중에 뭐가 더 폭력일까? 너도 노력하면 나처럼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내려다보는 것과 (야너두), 나도 노력하면 저곳까지 갈 수 있다고 희망을 품은 채 올려다보는 것 (야나두)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폭력적일까?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자산 규모로 국내 3위의 그룹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나의 이 감정은 위선인가 아니면 뒤늦은 자각인가.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오랜 생각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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