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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의 노래
싯다르타 무케르지 외 지음 / 까치 / 2024년 2월
평점 :
영국의 문학자이자 칼럼니스트 존 서덜랜드는 그의 책 <문학의 역사(소소의책, 2023)>에서 “우리는 문학에 관한 한 치즈 속의 구더기들” 이라는 인상적인 구절을 남긴다. 이 구절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문학의 세계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문학을 사랑하고 그를 읽는 독자들은 마치 게걸스럽게 치즈를 먹어대는 구더기와 같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한 구더기가 치즈를 먹으며 만들어내는 치즈 터널의 모습과 경로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문학을 읽는 것 역시 정해진 하나의 모습과 경로가 있는 것 없이 모두 각자만의 문학 읽기 경험을 쫓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문학을 일반 책으로 바꿔 읽어도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일생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은 무한정 많지만 현실적으로 한 명의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책은 유한하며, 결국 각자의 독서 경험은 한정되며 독특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사상을 접목해보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2015년 펴낸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절대적인 하나의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형이상학과,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개별적인 존재만 가능하다고 믿는 구성주의 모두를 비판하며 신실재론을 언급한다. 신실재론 사상 속에서 존재란 “특수한 대상영역 혹은 의미장(Sinnfelder)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떠한 특정 맥락 속에서 하나의 현상이 등장하여 이해될 때 존재라는 것이 여러 의미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손을 높이 들었을 때 몸 이라는 의미장에서 손은 내 신체의 일부이지만, 사회적 저항이라는 의미장에서 손은 무언가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의사 표시 혹은 용기라는 존재 의미를 갖는다. 하나의 대상 또는 사물은 여러 의미장에서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은 여러 맥락에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서라는 치즈 속의 구더기가 만들어내는 책의 통로는 언뜻 보기에는 하나의 단선적인 길로 보이지만 어떤 맥락에서 그 길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층적인 여러 길로 나뉘어 존재할 수 있다. 이 다층적인 의미장을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서점에서 책을 분류하는 카테고리다. 인문, 사회과학, 예술,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장에서 나의 독서 경험, 혹은 그 경험을 하는 주체인 나는 다양한 의미로 존재할 수 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언급한 의미장이라는 단어를 접하기 전에도 나는 이러한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오늘의 나는 여러 겹의 레이어가 겹쳐 존재하는 데 문학적 레이어, 사회학적 레이어, 생물학적 레이어 이 세 가지 종류의 레이어가 나를 정의하며 그 레이어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책을 읽어가겠다…… 라고 뒤늦게 생각한 것이 몇 년 전이었다.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싯다르타 무케르지 컬럼비아 의대 교수가 Covid-19를 겪으며 저술한 신작 <세포의 노래(The Song of the Cell)>는, 다층적인 의미장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존재와 그 의미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고, 동일한 의미의 종착역을 향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세포에 대해 다룬다. 세포가 무엇인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과거부터 현대까지 세포의 진실을 알기 위해 의료인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세포의 비밀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흥미롭게 풀어낸다. 책을 읽으며 지금까지 다양한 책을 읽으며 파편처럼 이해되었던 지식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유레카처럼 느꼈다. 물리학에서 정의하는 기본입자 중 하나인 쿼크에서 시작한다. 업쿼크와 다운쿼크가 모이면 양성자와 중성자가 되고, 그것들이 기본입자 중 하나인 전자와 결합하면 원자가 된다. 다수의 원자는 분자를 구성한다. 그런데 세포의 핵심 구성요소인 세포핵에 들어있는 염색체, 염색체 속의 DNA, DNA를 구성하는 염기는 곧 C,N,O 따위의 원소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분자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기본입자(쿼크, 전자) - 양성자/중성자 - 원자- 염기(분자) - 뉴클레오타이드 - DNA - 유전자 - 염색체 - 세포 - 조직 - 기관 - 개체(종) – 종속과목강문계…… 이렇게 물리학, 화학, 생물학 또는 생명과학은 연결된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은 서로 다른 의미장이고, 그들이 조명하는 대상은 서로 다른 의미장에 출현하는 다른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대상은 대상끼리 의미장은 의미장끼리 서로 연결된다는 점은 놀라우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지구라는 공간에 종속된 이 대상과 의미장을 우주로 넓히면 어떻게 될까. 종속과문강문계로 대표되는 생물 분류 체계는 지구에 통용되는 것인데 그러한 생명의 존재가 외계에서도 가능한 것인지 1977년 보이저1호 이후 무수히 많은 탐사선이 그 가능성을 찾기 위해 우주로 나선 것이다. 지구라는 대상영역에서 존재하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라는 의미가 다른 대상영역에서도 존재 가능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쉽게 말해 모든 과학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 이러한 연결은 과학에 그치지 않고 철학, 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모든 영역에 걸쳐 서로 연결되고 중첩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횡으로 또는 종으로 서로 병렬하여 정렬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의미장들은 마치 뉴런이 서로 끝없이 연결되는 것처럼 계속해서 서로에게 가지치기를 한다. 이것이 <세포의 노래>가 말하는 첫 번째 연결이다.
<세포의 노래>가 말하는 두 번째 의미의 연결은 책 말미에 그가 마이클 샌델 교수를 언급하면서 등장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은 <공정하다는 착각(와이즈베리 펴냄, 20200>에서, 그는 능력은 애초에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고 결함을 메우기 위한 끝없는 경쟁을 지양할 것을 주장한다. 결함이 메우기 위해 경쟁할 때 우리는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한계와 우연의 원리를 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없으면 없는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것에 만족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의 가치를 현대인들은 잊어버리고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싯다르타 무케르지 교수는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싯다르타 무케르지 교수는 세포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어떻게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 여러 질병을 개선하고 그를 극복할 수 있는지 희망의 단초를 세포에서 발견한다. 결함과 결손을 메우는 것은 끝없는 경쟁을 위한 자기 최면이 아니다. 적어도 인간의 삶 측면에서 결함을 메우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장에서 읽힌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 교수와 싯다르타 무케르지는 윤리학이라는 같은 의미장 위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에 모든 논의와 의미는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의미장에서 출현하는 다층적인 존재들은 상호 연결될 수 있고, 수없이 많은 연결들은 끝내 하나의 단일한 점으로 연결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 단일한 점이 모두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이 두 가지 의미의 연결은 충분히 가능하다. 결국 특별한 한 의미장에서 출현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그토록 다양한 층위의 영역에서의 의미를 탐색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 마지막 의미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마지막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질문들에 공감하며 흥미를 느끼는지는 알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 <바른 행복>을 읽으며,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으며, 뤼트허르 브레히트의 <휴먼카인드>를 읽으며 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의사결정체계를 존중하는 윤리학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그 책들은, 그 책에 담긴 저자의 사상들은 비록 철학, 심리학, 과학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장에서 출현하여 내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살것인가’ 라는 윤리학의 종착점으로 다같이 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대상영역의 다양한 나는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나로 수렴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 노래가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보편적인 노래'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