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로이드 존스의 내 구주 예수 - 복음의 핵심을 묵상하는 대림절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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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탄절을 생각할 때 이런 관점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는 틀렸다 할 수 있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좋은 소식이 도착했고 그 앞에서 우리는 일어나 고개를 들고 우러러보면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60)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는 성탄절의 인사말을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대신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s)로 바꾸자는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탄절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나신 날이 아니라, 세계적인 휴일의 의미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대림절'(대강절)이라는 교회 절기의 의미를 더 강력하게 되살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일을 집중적으로 묵상할 수 있도록 돕는 책자가 있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림절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내 구주 예수>와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내 구주 예수>는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누군가 복음은 교회 안의 성도에게 더 필요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데, 얼마나 많은 성도가 여전히 복음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아찔해지곤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이라는 문제는, "먼저 생각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55)고 일침합니다. 사람을 경배와 찬양, 큰 기쁨과 흠모로 이끄는 것은, '이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치 있는 찬양은 진리의 이해에 근거한 찬양입니다"(32). 그러니 특별히 예배 인도자들은 감정이나 의지를 곧바로 공략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이 위대한 설교자(마틴 로이드 존스)의 교훈을 똑바로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감정과 의지는 지성이 어떤 것을 알아보고 난 뒤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32).

우리는 뒤로 물러나 지켜보고 귀를 기울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찬양, 이 선언이 울려 퍼졌고 그들은 마음이 사로잡혀 올라다보았습니다.

성탄절은 이렇게 옵니다"(59).

마틴 로이드 존스의 <내 구주 예수>는 성탄절의 진짜 메시지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열심히 생각하도록 돕는데, 첫째로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은, '성탄절은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천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선포합니다. 그러니 복음은 권고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강력한 선포이고, 이것이 복음에 접근하는 바른 방식이라는 것입니다(57). 사실 성탄절이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고 기뻐하기보다, 사랑을 실천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며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성탄절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며 우리가 마땅히 행할 바라는 메시지를 더 많이 말해오는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일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내 구주 예수>를 통한 복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마리아 찬가'라는 짧은 노래가 사실은 얼마나 위대한 선언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혼과 영이 깊은 감동으로 즐거워하도록 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일이 이토록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가 놓치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힘이 없는 아기로 나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 아이가 태어날 때 선택된 여인이 이름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 평범하고 가난한 처녀일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이 생각할 법한 모든 것을 뒤집고 무너뜨리고 깨뜨립니다.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이 뽑내는 학식, 지식, 지성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인간이 의지하는 의를 무기력하게 흩어버리시며,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것을 뒤집으십니다.

그러니 복음을 들었다면, 중대한 변화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강력하게 선포하며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의 의미, 복음의 핵심을 진정으로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여러분의 내면에서 거룩한 웃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78).

복음을 계속해서 듣는데도 우리가 무심하고 초연하게 반응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복음을 알기 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그것은 끔찍한 상태입니다(142).

마틴 로이드 존스의 <내 구주 예수>는 하나님께서 내게 관심을 가지시고, 나를 위해 무언가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일깨워줍니다! 덕분에 이 책과 함께 대림절을 보내는 내내 얼마나 큰 자유함을 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를 품은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자"인지 깨달아질수록 다시금 전율이 일었습니다! 내 영혼을 향해 "너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몇 번이나 크게 외쳤는지 모릅니다. 대림절을 보내며, 어떤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관심으로 이 책이 반가웠는데, 복음을 들은 내 영혼이 먼저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작은 책자에 담긴 복음의 진수를 다 감당하지 못하여 올해는 나의 메시지(설교)로 옮기지 못했지만, 이 진리에 대한 이해가 나의 영혼에 녹아들어, 더욱 강력한 복음이 제 입술을 통해서도 선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며, 모든 교회에 기쁘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분께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요함이 여러분 안에 흘러넘치도록 그분이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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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황혼이 깃든 예술가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분투기
윌리엄 E. 월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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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미켈란젤로가 지은 건물이라고 생각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1505년에 착공하여, 공식적으로 완공할 때까지 무려 15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러니까 미켈란젤로가 수주를 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고, 또 그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 공사가 진행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이 거대한 공사에 투자할 수 있었던 시간은 겨우 17년뿐이다. 그럼에도 이 대성당은 미켈란젤로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도 수정이 가해졌고, 그 건물의 오랜 역사에서 미켈란젤로가 차지하는 시간적 비주은 겨우 12퍼센트 남짓에 불과하다. 어떻게 나머지 88퍼센트를 직접 통제하지 않았는데도 성 베대로 대성당을 지은 공로가 미켈란젤로에게 돌아갔을까? 브라만테, 라파엘로, 줄리아노 다 상갈로, 안토니오 다 상갈로 등은 모두 설계자(건축자)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다. 공사를 시작한 브라만테도, 공사를 마무리한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카를로 마데르노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자라는 영예를 얻지 못했다. 단순히 이들보다 미켈란젤로의 명성이 더 높았기 때문일까?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은 어떻게 성 베드로 대성당이 미켈란젤로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널리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한다.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일흔하나였다. 건축은 엄청난 양의 노동과 시간이 드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이 고령의 예술가는 자신이 완공을 보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성 베대로 대성당 건축이라는 대대적 규모와 복잡한 구조의 공사를 이어받는 새로운 소명을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은,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전심전력 했던,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을 집중 조명한다.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이 일깨워주는 사실 하나는, 병약하고 고령이었던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이라는 엄청난 공사의 책임을 맡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이거나 혼란스러운 모험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미켈란젤로가 달성한 가장 큰 건축적 업적은 피란체의 산 로렌초 교회의 파사드였고, 그마저도 20년 전에 중도 취소되어서 "예술가는 두고두고 그 일을 슬퍼하고 부끄러워 했다"(124)고 전한다. "교황은 미켈란젤로가 건설한 건물은 단 하나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완공된 건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미켈란젤로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최고 수석 건축가로 임명하려는 교황은 어떤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124)

그럼에도, 이책은, 미켈란젤로가 죽음의 그림자가 불길한 기세로 어른거리는 시기에, 성 베드로 대성당 최고 수석 건축가라는 부담스러운 소명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다섯 교황이 오고 가는 세월 동안, 무엇보다 대성당 공사에 전심전력으로 매달렸음을 증언한다. 새삼스러운 사실은, 이 역사적인 대(大) 예술가도, 삶의 현실에서는 건축의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겪을 수 있는 온갖 고초를 겪어내야 했다는 점이다. 공사는 이미 애초에 진행한 설계안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고,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축가가 여섯 명이나 교체되었으며, 저마다 자기만의 독특한 건축 구상을 '강요'하려 드는 바람에 대성당 건축은 대혼란 그 자체였다. 관리 감독관들은 미켈란젤로의 임명을 엄청난 실수로 생각하여 그에게 의구심을 품었고, 현장에는 비효율성과 부정부패, 뇌물과 횡령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예술가였지만, 대성당이라는 대공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지루하고, 뺀질뺀질하고, 거만한 자들을 직접 상대해야 했다. 이밖에도 곤란한 문제는 많았다. 미켈란젤로가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브란만테의 건축 구상을 살리되, 여러 가지 공학적 결점을 보완하는 것이었다(134). 그러나 예술가가 직면해야 했던 이 산적한 문제들이야말로 왜 미켈란젤로가 대가인지, 왜 이 성당을 건축한 공이 미켈란젤로에게 돌아가야 했는지를 증명해주니, 삶은 참 역설적이다.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이 들려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미켈란젤로, "그는 이 세상에서 그저 초연히 물러서지 않았다"(15)는 한마디가 아닐까 한다. 책의 모든 페이지에서 "순순히 아늑한 밤을 맞이 하지 말라"고 노래했던 딜런 토마스의 시가 울려퍼지는 느낌이었다. "노인이여, 저무는 날에 소리치고 저항하세요.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세요. 순순히 아늑한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은 최후의 임무였고, 이 공사는 미켈란젤로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계속 그를 괴롭혔지만, 그것은 이 거장이 절망과 죽음에 굴복하지 말아야 할 최선의 이유가 되어 주기도 했다. 이미 성공한 예술가였던 미켈란제로는, 그의 생애 마지막을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 베대로 대성당이라는 까다롭고 복잡하고 힘겨운 일에 기꺼이 매달렸다. 무엇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그는 하나님의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작업이었음을 미켈란젤로가 일깨워준다. 그에게 생명을 주신 분, 재능을 주신 분, 그리고 기회와 시간을 주신 분에게 생의 마지막 호흡이 다하도록 깊이 헌신하기를 원했던 예술가의 열정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담겨 있음을 모두가 기억해야 할 터이다.

비록 노인의 몸이나마 내가 그분에게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해주시기를.

이제 내게는 이 노구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의 두뇌와 기억은 이미 다른 곳에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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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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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개회기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좋아하여

열 살 전후에 사서삼경 독파 이십세 전에 장원급제했네

안동 김씨에 본명은 김병연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 둘에 처 하나

중국의 이태백 일본의 바쇼 그렇다면 보여주자 대한민국 김삿갓

백일장 과거에서 조상을 욕한 죄로 하늘이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이름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양반 또한 버렸네

그후로 한평생 삿갓을 쓰고 삼천리 방방 떠돌아다니니

사람들은 그를 보고 김삿갓 김갓삿 삿갓이라 하네

삿갓 쓰고 죽장 짚어 바람 부는대로 구름처럼 떠돌며

착한 서민의 친구 되어 못된 양반 혼내 준 의리의 사나이

도인에는 도 시에는 시로 맞서 시 짓기 내기에 져 본 일이 없네

산첩첩 수중중 구경하고 동가식 서가숙 방랑하네

외롭고 고독한 방랑의 생활 술은 삿갓의 유일한 친구

한 잔 하면 시상이 떠올라 두 잔 하면 세상이 내 것이라

한 잔에 시 한 수 또 한 잔에 시 한 수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천재로다 천재로다 김삿갓 김 삿갓 삿갓 삿갓 삿갓 삿갓

그의 삶에 있었던 진실은 다르다(79).

이문열의 <시인>은 '김삿갓'이라 불린 '김병연'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한 소설입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평전이나, 혹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극적인 요소 안에서도 '진실'을 추적하는 작가의 매서운 눈빛이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은 한 번 손에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는 스토리의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이문열'이라는 이름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 작품이었습니다.

이문열의 <시인>을 읽고, 가수 홍서범 씨의 노래 '김삿갓'의 가사를 다시 찾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랩'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이 곡을 통해, '김삿갓'이라는 인물의 통상적인 설화를 처음으로 접했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시인 '김삿갓'에 대한 통상적인 설화는, 김병연이라는 한 인물이 나이 스무 살에 백일장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의기양양해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가 그날 시제를 통해 추상 같이 죄를 물은 인물이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하늘 아래 떳떳이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해 삿갓을 쓰고 일평생을 방랑 시인으로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78-79). 그러나 작가 이문열의 <시인>은 "그의 삶에 있었던 진실은 다르다"고 폭로합니다. 불효가 부끄러워, 이름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양반 또한 버렸던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선비께서는 이 김병연의 지난 삶을 짐작이나 하실는지요? 역적의 자손이란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선비께서는 아까 사람이 문물 제도보다 앞이라 하셨지만, 그 문물 제도의 비호 밖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한 번 자신을 거역한 사람에 대해 제도가 얼마나 끈질기고 음험한 복수를 하는지를 잘 모르실 겝니다 …."(95)

이문열의 <시인>은 어쩌면 방랑 시인 '김삿갓'이 그 삿갓으로 진짜 가리고 싶었던 것은, 자식은 어버이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는 가르침이 주는 죄의식이라기보다, 할아버지를 팔아서라도, 세상과 더러운 거래를 해서라도, '김익순의 손자'라는 주홍글씨, 역적의 자손이라는 그 굴레를 벗어던져 버리고 싶었던, 그 안에 숨은 검은 야망, 그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체제 이데올로기의 악의에 대해 저항하기보다, 다시 그 체제 속으로 편입하고 싶은 그 뜨거운 열망을 끝내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문물과 제도는 누구도 벗어던지기 어려운 차꼬와 칼이고, 우리 삶의 자잘하고 성가신 나날로 쌓아 올린 무덤이며, 자칫 떨고 주리게 되어 있는 우리 몸은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버텨 내기 힘겨운 짐이다. 하지만 시인은 바로 그러한 것들에서 벗어난 자다. 그 모든 것을 떨쳐 버린 뒤에야 시인이 난다"(149).

작가 이문열은 "모든 일탈자가 다 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은 반드시 모두가 일탈자다"(159)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일탈을 꿈꾸게 하는 그 무엇이 결국 시인이 부르는 노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김병연이라는 한 인물도 그를 일탈로 몰아낸 그 차가운 현실이 아니었다면, '김삿갓'이라는 시인으로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적의 자손이 모두 김삿갓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적의 자손이라는 차꼬가 없었다면 우리는 김삿갓이라는 시인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벗어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자신의 운명 안에 갇혀 있는 피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대목 중에 하나는, "사민의 평등과 공영을 외치는" 큰 도둑의 두령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쓸데없으면서도 세상의 물자를 축내는 목숨은 거두어야 한다고 호령하는 도둑의 두령은 김삿갓과 같은 시인이야말로 도둑이라고 일갈합니다. "어쨌든 너는 일하지 않고 먹고,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쓰는 자다. 우리가 목숨을 앗으려 하는 것은 바로 너 같은 도둑이다."

큰 도둑의 이같은 일갈에 시인은 시의 효용을 항변합니다. "선생 같은 분에게 시 그 자체가 바로 생산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소. 그러나 꿈도 생산이 되고 기대도 생산이 될 수 있다면 시도 생산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시도 꿈과 기대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오. 하지만 보다 나은 세상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소. 꿈과 기대 외에 다른 감정들도. 그런데 그 같은 감정의 생산에는 시도 유용한 도구일 수가 있소"(224).

경제적인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를 잊어가고, 시를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작가의 소리 없는 항변처럼 들립니다. 글쟁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도둑'으로 몰리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까요. 작가 이문열은 <시인>이라는 작품이 "위장된 자서전 혹은 고백록이기도 하다"고 털어놓습니다. <시인>이라는 작품의 시발이 (알려진 사실과는 다르게) "젊은 날의 그(김삿갓)가 출세를 위해 권문세가에서 문객 노릇을 한 적이 있다"(10)는 것임을 감안할 때, 혹시 작가 '이문열'에게도 보이진 않지만 스스로 쓰고 있는 '삿갓'(죄의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는 어떤 의심도 생깁니다. 그러니 여러 면에서 특히 작가 '이문열'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시인>은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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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브루그만의 복음의 공공선
월터 브루그만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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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라는 광야와 같은 시기에,

우리는 다시 애굽(착취 시스템 속의 제국)으로 돌아가기를 꿈꿀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을 만큼 배움이 컸던 책입니다. 책은 얇지만, 메시지의 무게감은 실로 상당합니다. 왜 '월터 브루그만'을 구약 성경 해석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특히 구약성경으로 현대의 삶을 해석하는 능력이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탁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보화를 캐낸다는 것이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구나 싶습니다.

<월터 브루그만의 복음의 공공선>은 광야와 같은 환경 가운데 던져진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제 인류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전망합니다. 많은 사람이 슬퍼하고 걱정하고 한탄하는 것은 무너진 경제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월터 브루그만의 복음의 공공선>은 이전의 경제 시스템으로의 회귀는 오히려 저주라는 것을 벼락처럼 깨닫게 해줍니다. "해방된 노예들이 볼 때 광야에서의 선택사항은 죽음 아니면 바로에게 다시 복종하는 것이었다. 바이러스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참여해야만 생계에 필요한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의 재활성화라는 말은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태도로 볼 수 있다"(15).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제국의 착취 시스템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아니라, 고된 작업이 되겠지만 공공선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굽의 착취 시스템을 '떠나' 하나님의 계명이 있는 거룩한 산에 이르는 '여행'을 해야 하는데, 이 책은 바로 지금이 그 기회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유대인들은 애굽의 착취에서 거룩한 산에 이르는 이 여행을 여러 세대에 걸쳐 반복해 왔다"(34).

공공선을 위해서는 '부족함의 악몽'을 낳는 '불안의 시스템'을 떠나야만 했다(49).

월터 브루그만은 노예로 살지라도 안정된 빵을 보장하는 제국(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를 돌려 세워 '하나님의 거룩한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데, 첫째는 '부족함의 왕국'을 떠나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주는 출애굽 내러티브를, 둘째는, 세상의 고통에 심히 괴로워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웃의 고통 속으로 뛰어들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예레미야의 계시를, 셋째는, 현재 실패한 도시 경제의 '상실'로부터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살펴봅니다.

<월터 브루그만의 복음의 공공선>은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가운데 부족함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그때야 비로소 이웃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출애굽 내러티브, 예레미야의 계시, 이사야서의 메시지 모두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과 마주하게 하는 힘이 있는데, 무엇보다 도전적이고 새롭게 읽혔던 부분은, 출애굽 내러티브였습니다. 이미 온 세상을 먹여살릴 만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제국의 바로가 '부족함의 악몽'을 꾼 후, 그 불안이 어떠한 착취적 정책을 낳는지를 보여주며, 광야로 부르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그리고 바벨론에서 발견한 사실은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긴 역사는 '바로의 부족함의 시스템'과 '하나님의 풍성함의 제시' 사이의 충돌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의 긴 역사도 통제를 낳는 '부족함'과 후함을 낳는 '풍성함' 사이의 충돌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62-63).

<월터 브루그만의 복음의 공공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결국', 이웃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메시지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절박하게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계명을 받고도, 우리는 여전히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채, 제국의 시스템 안에서 부족함의 악몽을 꾸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 법이 우리 사이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백성들을 제국 밖으로 불러내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 제국 안으로 편입해 들어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만을 위한 신앙'에서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신앙'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낡은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제대로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채,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을 다시 회복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폭력적이고, 약탈적인 사회 체제 속에서 신음하는 이웃들 속으로 뛰어들라고 초대합니다. 옛 체제를 떠나 예수님이 여신 새 체제 속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합니다. 착취적인 사회 체제를 뒤엎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로 이런 믿음의 공동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월터 브루그만의 복음의 공공선>은 바로 지금이 행동해야 할 때라고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시내산을 떠났다. 그들은 누구도 부족함 없이 사는 세상을 꿈꿀 수 있었다. 세상에 만연한 부족함의 악몽을 거부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물론 고대 이스라엘에도 온갖 폭력과 착취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말씀이 선포되었다. 빵이 주어졌다. 계명이 주어졌다. 안식일이 지켜졌다. 이스라엘과 동맹국들은 바로에게서 벗어나 이웃 사랑을 향해 가는 길에 머물렀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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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역사다 - 누가 예수를 신화라 하는가, 개정증보판
리 스트로벨 지음, 윤관희 외 옮김 / 두란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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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가?

이 책은, 날카로운 지성으로 무장된 한 저널리스트가 2년 간 '나사렛 예수'에 대해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고고학을 살피고, 질문을 하고 해답을 분석"하는 여정과, 그 과정을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냉소적인 회의론자였던 저자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넘치는 증거 앞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간단한 지적인 동의만으로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목회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신 나사렛 예수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내가 연구하면서 알게 된 설득력 있는 사실들을 놓고 볼 때, 예수 사건에서 이처럼 압도적으로 많은 증거에 직면하여 큰 아이러니가 생겼다. 곧 나사렛 예수를 신뢰하는 것보다 무신론을 주장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390).

냉소적인 무신론자였던 한 저널리스트의 이 극적인 변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성의 빛이 신의 계시를 이기는 분위기였고, 인간 이성과 특히 과학의 발달이 오랫동안 인간의 삶을 지배해온 종교로부터 곧 자유를 선포하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에 예일대 법대에서 지성을 훈련했으며,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로 일하고 있던 한 무신론자가 비판적인 연구 끝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고백은 '무신론적 믿음'을 흔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다시 개정 증보판으로 독자와 만나게 된 <예수는 역사다>는 한 사람의 인생과 믿음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그 증거들을 직접 대면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도전장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확고하게 말하는 사람들 중 치밀한 조사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리 스트로벨 목사님도 자신의 무신론적 믿음이 사실은 '피상적인 조사'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실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고 하니까요. 무신론자이기를 자처했던 진짜 이유는 확실한 증거 때문이 아니라,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어 내가 예수의 추종자라도 된다면 그동안의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생활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17)이라고 밝힙니다.

<예수는 역사다>는 "학문적인 신뢰에 있어 흠잡을 데 없는 13명의 권위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예수 사건'을 수사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데, 목격자들의 증언, 기록상의 증거, 확증적 증거, 과학적 증거, 정체성 증거, 심리학적 증거, 인물속성 증거, 지문(예언) 증거, 의학적 증거, 사라진 시체의 증거, 출현 증거, 정황 증거 등이 나사렛 예수는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이며, 확실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으며,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리 스트로벨의 연구 결과는 여러 책들에서도 재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며 많이 들어온 이야기인데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강렬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개증 증보판으로 <예수는 역사다>를 다시 읽으며, 가장 감동이 되었던 증거는 정황증거입니다. 전에는 정황증거 중에 예수 제자들의 죽음이 나의 삶에 가장 강력한 도전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유대인의 삶에 일어난 다섯 가지 혁명'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배워왔던 다섯 가지 사회 제도를 모두 바꾸거나 포기해버렸습니다. 동물 희생 제사, 모세 율법(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자신들의 공동체 멤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500년 동안 이어져 온 안식일 전통의 변화, 유일신론을 가르치면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고 가르치는 것, 온 세상의 죄로 인하여 고통 받고 죽는 메시아에 대한 선포가 그 다섯 가지입니다. 이것은 곧 유대인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유대인들에게는 이단 중의 이단으로 보일 만큼 혁명적인 이러한 주장을 담대하게 가르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명도 아니고 최소한 1만 명이 넘는 유대인 공동체가 사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수 세기 동안 자신들을 지탱시켜 오던 다섯 가지 핵심 제도들을 기꺼이 포기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372).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든지,

이니면 미치광이거나 더 악한 존재이든지 말이다(399).

누군가 이 글을 읽으며, "나사렛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면, 제발 성급하게, 감정적으로,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우리의 미래와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리 스트로벨'이라는 누구보다 뛰어난 지성인도, 무신론자였고, 냉소주의자였고,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삶을 드려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했는지, 그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던 역사적 증거와 개인의 체험은 무엇이었는지, 이 책을 한 번 진지하게 살펴보시기를 간곡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나아가, "나는 확실한 증거를 가진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면, 이 책과 대결을 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단, 비판적이되 열린 마음으로 말입니다. 사실 안 믿기로 작정하면, 어떤 증거를 가져다놔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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