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 - 하나님의 선은 어떻게 인간 공동체에 구현되는가
천종호 지음 / 두란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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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앞에 당신의 외아들과 인류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병들어 누워 있다고 가정하자. 치사율이 높은 병인데, 한 사람분의 약밖에 없다. 한 사람의 치료제만 손에 들고 있는 당신, 외동아들과 아인슈타인이 서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12장. 정당한 몫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中에서

<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은 이에 대해 우리가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외동아들에게 투약한다면 이것은 정의관에서 공동체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아인슈타인에게 투약한다고 하면, 정의관 중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동전을 던져 제비를 뽑아 투약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가치가 동등하므로 누구에게 투약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되고, 이는 정의관 중 자유주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169).

이 책은 현직 판사의 시선으로 우리 삶과 법 집행의 영역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해보는 책입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에피소드 중심이 아님에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잘 읽힌다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학부 교양수업에서 다루어질 만한 개념적 지식들이 쏙쏙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인데도 (심지어 법과 관련된 내용들이) 재미있게 잘 읽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또 하나 유익했던 것은, 이 책을 읽고 나니 각종 매체를 통해 보도 되는 사회 문제의 '숨은 쟁점'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개인으로 조각조각 나면서 모두가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고려해야 하고,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의 문제가 '좋은 삶'의 문제라면, 정의의 문제는 '옳은 삶', 드워킨의 표현대로라면 '잘 살기'의 문제일 것이다"(105).

선과 정의, 법의 문제는 결국 존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선과 정의, 그리고 법은 당연하게 '공동체'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는 선과 정의와 법은 '공동체를 위한 선'(1부), '공동체를 위한 정의'(2부), '공동체를 위한 법'(3부)입니다.

천종호 판사님은 선과 정의, 법의 관점에서 잘 산다는 것과 좋은 삶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06). 선이 좋은 삶의 문제라면, 정의의 문제는 옳은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정의의 문제, 다시 말해 옳은 삶이란, 인간이 인간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대우받는 삶"(115)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문제는 정당한 자기 몫, 즉 '분배'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설명을 들으니, 인간 삶의 문제라는 것이 한 없이 복잡하면서도 또 생각보다 단순한 원리 속에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깨달아졌습니다.

다시 말해, 선과 정의가 인간다운 삶을 떠받치는 초석이요, 법은 그것을 수호하고 지켜주는 안전장치라고 할 때, 어쩌면 이 책이 던지는 가장 충격적인 시사점은 이것이 아닐까요? "왜 법학에서는 정의와 선에 관한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가?" 천종호 판사님은 법학에서 선과 정의에 관한 논의가 사라져 버렸다고 폭로합니다. "우리 법학계에서는 선과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고, 법 실무계에서도 선과 정의의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특히 헌법 재판에서도 선과 정의를 둘러싼 논의보다는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우선되고 있다"(11).

"도덕성의 회복은 선의 회복이고, 선의 회복은 정의로운 신의 귀환이다"(269).

기독교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기독교 변증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신'의 존재가 철학, 윤리학, 정치학, 법학에서 사라질 때, 인간의 삶이 어떤 혼돈에 빠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으면, 왜 선을 잃어버리게 되는지, 왜 어디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는지, 왜 도덕 윤리가 아니라 도덕 논리가 만연해질 수밖에 없는지, 왜 사랑의 책무가 정의가 아니라 호의나 자선의 차원에서 접근하게 되며, 그럴 때 어떤 문제가 발생되는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여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이 책은 진짜 '잘 사는 것'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법(말씀)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닫게 해주며, 우리의 책무가 무엇인지 깊이 돌아보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흔히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는데, 왜 정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는지의 문제도 깊이 숙고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의 공동체'에 발을 붙이고,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정의의 공동체를 무시한 채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할 수는 없다. 정의는 사랑의 최소한이고, 사랑은 정의의 최대한이다. 우리 삶은 정의를 무시한 채 사랑으로 비약할 수 없다. 각자에게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정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희생과 용서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120-121).

좋은 삶, 잘 사는 삶, 품위 있는 삶을 위해 모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교양수업이었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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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 - 이야기를 활용한 내러티브 변증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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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온 세상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다.

N. T. 라이트 (45)

어떻게 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바닥이 없는 늪과 같았던 제 십대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돌연사'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럽게 친구 둘을 연달아 잃고, 잘 나가던 아버지의 사업까지 부도가 나면서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사춘기는 뜨거운 열병 같았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언제든 끝나버릴 수 있는 생명, 돈과 함께 아버지 곁에서 사라져갔던 사람들, 지위들, 풍요들, 그리고 깨어진 꿈들을 목격하며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허무'라는 짙은 어둠이 얼마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지, 어떠한 열정도, 하고 싶은 일도, 소망하는 미래도 없으니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 없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 말씀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고, '영원'한 것이 실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자 그렇게 지독하게 마음을 괴롭혔던'허무'의 그림자가 단번에 물러갔습니다. 우리의 실존은 고통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또한 영원한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에 내 모든 것을 다 걸어보고 싶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그 사랑 이야기 안에서 '영원'을 살며, '영원' 속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이 주목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줄 의무가 있다"는 말로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모든 책이 그러하겠지만, 이 책은 특별히 '목차'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찰이 깊은 만큼 논지가 펼쳐지는 과정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목차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훨씬 쉽게 이해되고 풀이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야기꾼이며, 이야기 안에 머무는 존재다.

다른 모든 이야기를 이해하게 해주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다.

기독교 서사의 힘, 은혜의 복음을 향해 나를 열어젖히고 싶어지다.

'성경의 서사'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우리가 몸담은 세상'이 보인다.

예수가 절실한 인생들, 어떻게 그분을 들려줄 것인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마음의 방황, 기독교 서사로 길을 밝혀 주라.

서사를 폭넓게 활용해 '예수가 어떻게 내 삶을 바꾸었는지' 들려주라.

                 

"변증의 주목적은 특정한 관념들의 집합이 옳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선함, 진리를 충실하고 생생하게 묘사하여 사람들이 그 풍성하고 심오한 세계관에 이끌리게 하는 것이다"(24).

이 책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교리나 지침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 주목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가진 힘을 새롭게 환기시킵니다. 책을 읽으며 인간은 '이야기를 만드는 동물'이지만,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설명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인류는 "서사의 틀 속에 자신을 대입하고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려 드는 존재"(12)라는 설명을 깊이 이해했을 때, 우리가 할 일, 다시 말해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답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형성하는 지배적 이야기들보다 나은 서사를 들려주도록 부름을 받았다"(128).

<포스트모던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제가 이 책에서 찾은 답변은 한마디로 "자기가 더 크고 위대한 어떤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도록 돕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보다 '더 큰 종류의 이야기'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보다 이 세상을 더 잘 (가장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이며, 더 빛나고 매력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아 그 큰 이야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말씀을 공부하며, 우리가 세상에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말씀대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믿는 자들에게 먼저 성경에 담긴 진리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가, 성경의 서사와 연결된 삶을 살고 있는가, 복음이 삶을 진실하고 의미 있게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을 맛보아 알고 있는가에 대한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 내가 모르는 세계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는 없으니까요.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는 우리가 보통 '전도'라고 말하는 바로 그 일이 얼마나 우아하고, 근사하고, 매력적이고, 강력한 도전인지 일깨워줍니다. 이것은 매우 '진지한' 논의이며,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얕은 대화와 허술한 사고로 결코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권위 있게 설명해줍니다. 이 책은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 즉 전도에 대해, 설교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방향성을 제시해줍니다. 누구보다 먼저 설교 사역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갈 강력한 해법이 이 책에 들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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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아저씨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 1 - 유, 초등부 교사와 어린이를 위한 그림 성경동화 탄탄 어린이성경탐험
크리스토퍼 용 김 지음, 리디아 윤 그림 / 여원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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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날, 하나님은 흙으로 당신의 모습을 꼭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셨어"(17).

제가 고모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첫 조카가 생긴 것입니다! 엄마 태중에서 무럭무럭 자라며, 손과 발가락이 생기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니 경이롭기만 합니다. 이 소중한 생명에게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까 고민 중에 <크리스토퍼 아저씨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유, 초등부 교사와 어린이를 위한 성경책이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누구보다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을 위한 책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아이에게, 아니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제1의 책임을 부모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수많은 소리들을 통해 나에 대해 인식하고, 세상에 대해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저마다 그렇게 형성된 자기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내가 접한 모든 소리들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념은 사는 동안 또다시 많은 소리들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문제는 세상에는 좋은 소리, 옳은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소리, 거짓 소리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나쁜 소리들, 거짓 소리들을 계속 접하면 자신의 자화상마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말지요. 주장하는 소리들이 많아질수록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기는 더 어려워지고요. 내 인생길을 인도해줄 바른 신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많은 책을 읽고, 방황하고, 탐구한 결과, 제가 내린 결론은 <성경>만이 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랑하는 조카, 그 귀한 생명에게 가장 먼저 선물하고, 꼭 선물해주고 싶은 것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할 창조주의 소리니까요.

"가인, 하나님은 네가 드린 과일 바구니 어디에도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감사가 없다는 것을 아신단다"(31).

이 책은 <크리스토퍼 아저씨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으로, 성경의 첫 책 <창세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아저씨가 들려주는> 창세기를 읽으며 다시 깨닫게 된 사실은 믿음은 감사하는 삶이요, 감사하는 마음이 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고, 내가 어떻게 지금 여기 이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내 생명의 주인은 누구신지를 분명히 깨닫는다면, 그것을 깨달은 분명한 증거가 '감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바로 깨달아서 우리 소중한 조카의 삶에도 불평과 불만, 불안과 걱정이 아니라, 감사가 풍성하게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아, 하나님! 언제나 제 곁에서 저를 돌봐 주고 계셨군요. 감사합니다. 이곳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곳임을 제가 몰랐습니다. 이곳이 바로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었군요"(71).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늘 자녀 곁에 있고 자녀를 보호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자녀의 평생에 진짜 보호자가 되어줄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창세기>의 모든 여정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가장 풍성한, 가장 놀라운, 가장 위대한 삶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크리스토퍼 아저씨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는 부모님이 먼저 읽어야 할 책입니다. 아이에게 읽어주거나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아이에게 이 책을 선물하는 것으로 (그냥 던져주는 것으로) 부모님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진리 아닌 것, 거짓과 속임수에 아파하고 절망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아저씨'처럼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서, 우리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바른 믿음, 강한 믿음, 큰 믿음을 가진 빛의 자녀들로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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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하루 성경 - 성경 말씀 따라 쓰기
유윤희 지음 / 여원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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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성경을 필사할 때마다 영혼 저 깊은 곳에서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 이 세상 근심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라는 가락이 울려 퍼지는 듯 합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시간이 제게는 말씀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는 말씀기도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모든 곳이 막힌 것 같은 막다른 골목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말씀 앞으로 온전히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직 말씀을 붙들어야겠다는 절박함으로 말입니다. 그동안 말씀을 따라 산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는 것을, 막다른 골목을 만나고야, 그제서야 처절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앞으로 저를 다시 부르셨을 때, 말씀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고, 또 말씀 자체가 길이 된다는 것을 기쁨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매일 성경을 읽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골로새서 3:16)는 성경 구절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성령님께서 성경말씀을 암송하며, 암송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겠다는 마음의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때에 만나게 된 책이 바로 이 책 <내가 쓰는 하루 성경>입니다.

나만의 말씀 골방, 나만의 기도 노트, 내가 쓰는 하루 성경!

<내가 쓰는 하루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독교인이라면 꼭 알아야 하는 기독교 교리와 관련 된 270절(구약 135절, 신약 135절)의 말씀을 필사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일 한 페이지씩 필사한다면 90일이면 모두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단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필사합니다. 시간이 된다면 성경구절이 나오는 해당 본문을 통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필사한 구절을 붙들고 기도하다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가 있다면 필사 노트에 간단하게 메모를 해둡니다. 필사 노트 부분을 넉넉하게 제공해주기 때문에 묵상을 메모하기에도 좋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제목을 적어 놓기에도 좋고, 또 때로는 성경말씀을 2번 반복해서 필사하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성경암송노트를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도 있습니다.

<내가 쓰는 하루 성경>은 빠른 속도로 성경을 필사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크고 넉넉하게 제공되는 필사 노트에는 아마도 말씀 가운데 오래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의 요란한 곳을 피하여 주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말씀을 통해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주님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입니다.

<내가 쓰는 하루 성경>은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자녀와 함께 말씀을 필사하며 어릴 때부터 말씀을 따르는,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도록 이끌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태교 중인 막내 동생 부부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려고 합니다. 하루에 3구절 정도 천천히 필사를 하며 활용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빨리 완성하는 것보다, 꾸준히, 매일, 말씀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제자의 삶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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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부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7
잭 런던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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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하느냐, 굴복하느냐, 둘 중 하나였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야생의 삶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자비는 두려움으로 오해를 받게 되고 그런 오해는 죽음을 불러올 수 있다. 죽느냐 죽이느냐,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싸움의 법칙이었다. 그는 아늑히 먼 원시 시대에서 내려온 이 명령에 복종했다"(109).

<야성의 부름>은 남부의 따뜻한 햇볕을 쬐며 여유로운 귀족 생활을 해왔던 '벅'이라는 개가, 그 집 정원사의 조수이자 도박꾼이었던 '매뉴얼'에 의해 아무도 몰래 얼어붙은 북쪽 땅으로 팔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금광의 발견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북쪽 땅으로 몰려들면서, 사람들에게는 썰매를 끌 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평화롭던 문명의 중심지에서 갑자기 원시 세계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벅'에게는, 분노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할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인 면을 벗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평화도 없고, 휴식도 없고, 무엇으로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원시 세계에는 오직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만이 존재했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벅은 자신 안에 숨은 교활한 본성을 깨우며 냉혹한 현실에 맞서야 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투쟁이 아니라, 순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시의 노래가 벅의 몸속으로 파도처럼 흘러들며 불과 집이 있는 문명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시적 본성을 되찾았을 때, 우리는 그 야수의 모습을 진보라 불러야 할지, 퇴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작가는 '벅'이 문명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시의 세계로 들어선 증거로 도덕성의 상실을 이야기합니다.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폭력적인 힘과 도둑질과 같은 교활함이지, 죄책감과 같은 도덕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덕적인 문제를 완전히 무시할수록 '벅'은 더 위험한 존재, 즉 야생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야성의 부름>은 대-자연의 위엄 속에 그곳을 지배하는 한마리의 '유령 개'로 깨어나 포효하는 '벅'의 전설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문명'이라는 허울 속에 감추어진 인간 사회의 야만을 폭노하는 고발 소설로도 읽힙니다. '벅'은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원시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빠르게 터득하며 교활한 야만의 본성으로 자신을 채우면서도, '길잡이 개'의 지위(썰매 개의 우두머리)를 얻기 위한 본능에 굴복하여 싸우며, 지위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그럴수록 썰매를 끄는 노역에 충성을 다 합니다. 우울한 불안과 불만은 오로지 밤의 일입니다. 낮 동안은 '길잡이 개'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야수의 모습을 하고 노예로 살아가는 '벅'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삶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덫에 걸린 야생 동물, 이것이 우리가 잊고 사는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말입니다.

"숲속 깊은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불가사의하고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매혹적인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닥불과 그 주위의 다져진 땅을 등지고 숲속을 향해 뛰쳐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110).

자연에 자연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 세계에도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고 있음을 봅니다. 문명과 도덕성으로 온갖 치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인 힘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돈의 힘이든, 지위의 힘이든, 지식의 힘이든, 여전히 힘 쎈 놈에 의해 폭력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닙니까?

차갑게 얼어붙은 쓸쓸하고 고독한 땅, 잃어버린 금광이 비극으로 물들었을 때, '벅'은 썰매를 끄는 노역과 위대한 사랑에서도 벗어나 자신을 부르는 그 신비한 소리, 야성의 부름을 따라 달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저 빈둥거리며 게으르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원초적인 동경과 흥분이 가득한, 자기 됨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세계로의 부름이었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나도 매일 밤, 삶에 대한 탄원과 생존의 고달픔 속에서, 나의 무능에 대한 좌절과 비애 속에서 나를 꺼내줄 어떤 부름, 그 야성의 부름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나 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세계로의 부름말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한 행위도 그 소리를 찾고자 하는 기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부름의 실체가 명확해지기까지 내가 할 일은 피투성이라도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야성의 부름>은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은 맹수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고 넌즈시 알려줍니다. 그 덕목이 의외였습니다. '인내심'이라니, 맹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인내심이야말로 가장 맹수다운 모습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야생동물에게는 생명 그 자체처럼 지칠 줄 모르는 끈질긴 인내심이 있었다. 바로 이런 인내심 덕분에 거미는 거미줄에서, 뱀은 똬리를 튼 채, 표범은 매복을 한 채 몇 시간이고 가만히 있을 수 있다. 이 인내심은 특히 살아 있는 먹이를 사냥할 때 발휘된다"(142). 맹수의 인내심이야말로 공격 대상을 화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미쳐 날뛰게 할 수 있는 맹독과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세상이 무자비한 야수의 세계와 같이 느껴질 때일수록,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기를!

이 무자비한 원시 세계를 그려낸 작가는 "인간의 진정한 소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는 것이다"(155)라고 말했다는데, 사실 <야성의 부름>은 생존을 넘어서는 부름입니다. '벅'의 결말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내동댕이 쳐진 현실 속에서 단순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야성의 부름을 따라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는 데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그 무한한 자유가 사실 '벅'의 혈관 속에 흐르는 '야성의 본능'에 온전히 순응할 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것을 벗어던질 때가 아니라, 부름을 따를 때, 다시 말해, 창조 질서를 온전히 따를 때 주어진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전율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나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서 속에 만들어졌다는 저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주니까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영상으로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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