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통과한 용기 - 길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
러셀 무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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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에게서 우리는 승리를 통한 용기가 아닌 십자가를 통한 용기를 볼 수 있어야 한다"(33).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를 읽으며 '믿음의 다른 이름이 용기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왜 우리에게 익숙한 믿음이라는 개념 대신 용기라는 개념을 선택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에 대해, 그리고 용기가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강철처럼 그 두려움에 맞서 결국 승리를 쟁취해 내는 것을 용기 혹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두려움의 한복판에서 다시 일어서 길을 찾는 것인데, 그 용기는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지고 무너지는 십자가를 통과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러셀 무어 목사님은 우리가 알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하여 이것을 탁월하게 설명해줍니다. 이 책의 표현대로 하면, 그 용기는 '하늘에서 불을 내린' 담대함하고 당당한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광야에서 헤매던' 낙심과 비관과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 더 잘 설명되어집니다. "엘리야의 용기는 불의 힘으로 아합을 제합하는 상황보다 오히려 아합에게 쫓길 때 더 분명히 나타난다"(36).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사역의 현장에서 가장 갈망하는 사역자의 모습은 아마도 갈멜산에 선 엘리야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세상 한복판에서 거짓된 우상의 세력에 맞서며, 확실한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강함을 원했습니다. 그런 '선지자적'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이 증명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엘리야를 광야로 보내셔서 엘리야의 마음속에 있는 바알을 제거하실 필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자기 이야기의 중심에서 끌어내고 계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과 나를 위해서도 해주시는 일이다"(281). 승리에 대한 우리의 바람 속에는 '하나님의 선지자적 힘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었구나' 하는 것이 벼락처럼 깨달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극도로 열심' 싸우는 것보다,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더 큰 용기, 더 큰 믿음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용기를 드러내야 할 순간은, 절대 다수인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기 위해 갈멜산에 서야 할 때가 아니라, 외로움과 낙심과 피로가 극에 달해 몰락 직전까지 약해져서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던 광야에서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선다'는 것은 내면의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거나 반박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승리'로 적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는 더 큰 힘과 지혜로 세상의 지혜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처럼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이끌려갈 때 찾아온다(요 21:18). 성경은 우리에게 일어설 용기를 어떻게 얻게 되는지 분명히 알려 준다. 일어설 용기는 곧 십자가에 달릴 용기에서 시작된다"(37).

"우리는 성경이 밝혀 주는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것은 따분해하고, 영원의 관점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열을 올린다. 왜일까? 세상이 인정해주는 종류의 힘에 열광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82).

우리는 보통 고난의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의 영광도 있다고 설교해왔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한 후' 맛볼 빛나는 영광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러셀 무어 목사님은 십자가야말로 빛나는 영광 자체라고 선포합니다.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를 통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회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함께'하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에 사역자로서 저는 사역을 할 때마다 '팀'이 조직되기를 원했고, 한 성령 안에서 한 뜻을 품은 팀을 갈망해왔습니다. 그런데 러셀 무어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 칠천 명'의 무리 속에 엘리야를 두지 않으신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무리에 맞선 '외톨이'로 두신 것처럼, 저에게도 그것을 명하신다면 기꺼이 외로워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깨달아졌을 때,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던 갈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을 용기라고 착각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용기를 갈망하는 것은,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기보호본능의 작동 가운데, 삶의 중심이 아직도 자신의 이야기에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모든 두려움과 의심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며, 나의 이야기에서 빠져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끝을 알지 못해도 기꺼이 광야 속으로 들어갈 용기, 일어설 용기, 무너질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용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세상 가운데로 흩어질 때매대, "한주간도 승리합시다"라는 인사를 많이 했었는데, <십자가를 통과한 용기>는 우리가 많은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승리에 대해 오해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 깊은 통찰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번 읽고 치워두는 책이 아니라, 꼭 곱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책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가기 원하는 '제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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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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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기습이 있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딸을 잃은 '딸'이 아버지를 잃었던 '아버지'에게 '가는' 이야기입니다. 딸을 잃고 죽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이 살았던 '딸'이 다시 고향집을 찾은 것은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늙은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을 듣고 딸은 아버지가 아버지를 잃었던 것이 열네 살 때라는 것을 기억해냅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며 부모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았던 딸은 으깨진 마음으로 아버지 곁으로 갑니다. 그리고 격변의 시대에 겨우 목숨만 살아남았던 '아버지'를 살펴보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제게는 딸을 잃고 누구도 옆에 오지 못하게 했던 이 딸이, 표절로 작가의 생명을 잃은 '신경숙'으로 읽힙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으깨진 마음으로 다시 고향 집을 찾은 이 딸이, 자신을 작가로 키워준 아버지의 집을 다시 찾아간 작가 '신경숙'으로 보입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막막한 시간들을 밀어낼 힘을 얻었던 것일까요. 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일까요. 6년 만에 신작을 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처럼 기척도 없었던 작가가 다시 내놓은 이 책을 읽는 일은, 제겐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그녀의 흔적 찾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작가로서는 죽은 사람이었으나, 그럼에도 살아야 했던, 그래서 쓸 수밖에 없었던 그 모진 시간들의 흔적말입니다.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면 이해하겠나?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한없이 선하고 끝간 데 없이 폭력적이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행과 대치하며 한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자취를 남기네.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흔적 말이야.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그 흔적 찾기였는지도 모르겠어"(322).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자식들의 기억 저편으로 물러난 허름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자식에는 더는 줄 것이 없는 가난한 아버지를 우리는 쉽게 잊고 살기 때문이지요. 마치 "버리지도 없애지도 누구에게 준 적도 부숴버린 적이 없어도 어느 시간 속에서 놓치고 나면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고 희미해지는"(20) 어떤 물건처럼말입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했던 '엄마' 이야기와는 달리, 이번엔 아예 잃어버리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찾아나섰다고나 할까요.

아버지 곁으로 간 딸은, 지금의 자기 나이보다 더 어렸던 아버지,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싶은 젊은 아버지의 아련한 삶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살아냈을 뿐이다"라고 하는 늙은 아버지의 무심한 삶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처럼, 사실은 얼마나 거룩하고 찬란한 것인가를 되새깁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허름한 아버지, 모든 익명의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통속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냈을 뿐이야"라고 하는 무심한 말들이, 무너지려는 나의 시간들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작가 신경숙의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을 때, 내가 울었던가. 기억이 희미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으며, 나는 울었습니다. 간첩으로 오해 받은 둘째 아들을 데리온 아버지가 아들을 변호하는 대목에서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내가 둘째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말 없는 아버지가 자식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었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다 들여다 보면서도 해줄 것이 없는 가난한 아버지라는 것 때문에 또 얼마나 애가 닳고 속이 아팠을까를 생각하니, 제 속도 아팠습니다.

아버지, 나는 부서지고 깨졌어요.

당신 말처럼 나는 별것이나 쓰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 별것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해요.

- <아버지에게 갔었어> 中에서

딸은 잃은 이 딸은 왜 나의 근원이며, 뿌리인 아버지, 나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 품에 한 번도 안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버지 품 안으로 파고들만도 한데 말입니다. 아버지는 고통 가운데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요. 피투성이라도 살아내는 힘, 부서지는 고통을 견뎌내는 힘은, 살아 있는 고통 속에서만,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만 배울 수 있다는 걸, 다시 되새겨봅니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제게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신경숙 작가에게 내가 당신의 아버지는 될 수 없어도, 당신의 동생처럼, 조카처럼, 그렇게 옆에 있어주는 독자는 되고 싶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책 덕분에 나도 한 시절을 잘 지내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을 지키고자 서로를 찌르는 무기가 아니라,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일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자녀의 죄 짐을 대신 지고자 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 서로를 들여다 봐주고, 품어주는 그런 이야기라고. 당신이 말한 대로 "세상의 기준은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소. 필요에 따라 변화하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312). 그러니 당신도 계속해서 살아가라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삶이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숨을 받은 자의 임무이기도 하다는 것. 그 곁에 읽는 것과 듣는 것과 보는 것이 있기도 하다는 것,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423).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아버지에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근원이며, 뿌리인 아버지. 그러나 인류의 모든 아버지는 사랑할 수 있어도, 나의 아버지는 사랑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라고 했던가요. 그저 아버지 옆에 앉아 TV라도 같이 보고, 함께 볕도 쬐고, 밥도 먹고, 내 얘기도 하고, 아버지 얘기도 좀 들어주는, 그런 사랑이면 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현실에서는 그것 하나가 잘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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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챙김 - 1년 52주 하루 15분, 한 줄 성경의 힘
킴벌리 D. 무어 지음, 나수아 옮김 / 아이템하우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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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1:1)

"우리는 신명기 28장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권, 즉 복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선택권을 주십니다"(73). 하나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성경>을 주시며 두 가지 선택권을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읽고 따르는가, 그렇지 아니한가에 따라, <성경>은 우리에게 복과 저주의 갈림길이 될 것입니다.

<말씀챙김>은 1년 52주를 단위로, 매일 하루 15씩 말씀을 챙겨 읽도록 인도합니다. 이 책의 인도를 따라가면, 1년에 성경을 1독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신이 누구의 꾀를 따르며"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의 꾀나, 세상에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지식을 따라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고 싶은 이들은 오늘도 성경을 펼쳐 읽고 있을 것입니다. <말씀챙김>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책입니다. 매일 자진하여 복을 받을 자리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이지요. <말씀챙김>은 그것이 매일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고 캐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항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민 6:24-26)

<말씀챙김>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생긴 습관은 말씀에서 복된 구절을 발견할 때마다, 그 구절에 약속된 하나님의 복이 우리 삶 가운데 임하도록 멈춰서서 말씀을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챙김>은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약속의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 선포해 보라고 조언합니다. "자녀가 등교하러 집을 나설 때, 이 축복의 말씀을 선언해 보세요. 배우자가 출근하거나 출장을 갈 때도 이 말씀으로 축복하고 보내 주시고요"(54). <말씀챙김>의 저자 킴벌리 D. 무어 목사님은 "이런 축복 기도는 제 삶을 너무나 아름답고 의미 있게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삶에 선포된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54)라고 감탄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해 주어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이 참 즐겁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여성'이 아니라, 길을 닦는 여성입니다.

또한 우리는 변화를 일으키고자 노력합니다.

당신은 무력하지도, 역량이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굳세고 강한 승리자이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입니다(64).

<말씀챙김>은 슬로브핫의 딸들을 묵상하며 이런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특별히 "개스턴 카운티 침례 교단에 속한 첫 번째 여상 목사"라는 수식어를 가진 킴벌리 D. 무어 목사님은 <말씀챙김>을 통해 여성 목회자들을 격려하며 기운을 북돋아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들은 처한 위치와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개척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입니다.

<말씀챙김>은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선물하고 싶은 책 헌정 1위, 신약성경 성경 공부 1위, 기독교 성경 공부 가이드 1위)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책이라고 할까요.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으면서도, 삶 속에서 말씀을 따르게 하는 강함이 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읽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누가 가장 소중한 사람인지 분별하기를 원한다면 <말씀챙김>과 함께 <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특별히 스스로 축복보다 저주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챙김>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말씀챙김>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은혜, 잊고 있는 은혜를 다시 기억나게 해주며, 희미했던 것들이, 오해해왔던 것들이, 혼란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되는 은혜를 맛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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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더클래식 한국문학 컬렉션 1
김승옥 지음 / 더클래식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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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사랑과 상실의 문제이다. 김승옥 소설의 남성 인물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대상을 이미 상실했거나 지금 상실하고 있는 중이며, 혹은 곧 상실할 예정이다"(460).

"한국 작가들의 스승이자 한국 문단의 거목"이라고 평가되는 김승옥 소설 속에서 왜 "남성 인물들은 대부분은 사랑하는 대상을 이미 상실했거나 지금 상실하고 있는 중이며, 혹은 곧 상실할 예정"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이 책에 수록된 12편의 작품을 다시 음미해보니, 김승옥, 그는 시대를 슬퍼했던 작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김승옥의 모든 중단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편소설 1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두 작품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1960년대에 쓰여졌으며,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등장인물들의 삶은 여전히 전쟁 때처럼 훼손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살기 위해 자기 생명을 쓰지만 그렇게 생명을 쓰다 곧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모순처럼,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운명에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저항을 해보지만, 그 소중한 것을 내어준 덕에 결국 타락하고 마는 나약한 인간의 삶의 현주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지간히 성실하게 사는 척하지?"(174)

살아남기 위한 대응전략이었을까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배신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무진기행>의 윤희중이 그처럼 허깨비로 보였던 것은, 그가 생각했던 '고결함'을 팔아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6.25 사변으로 대학의 강의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놓친 나는 서울에서 무진까지의 천여 리 길을 발가락이 몇 번이고 불어터지도록 걸어서 내려왔고, 어머니에 의해서 골방에 처박혀졌고 의용군의 징발도 그 후의 국군의 징병도 모두 기피해버리고 있었었다. 내가 졸업한 무진의 중학교의 상급반 학생들이 무명지에 붕대를 감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을 부르며 읍 광장에 서 있는 트럭들로 행진해가서 그 트럭들에 올라타고 일선으로 떠날 때도 나는 골방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들의 행진이 집 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 나는 무진의 골방 속에 숨어 있었다. 모두가 나의 홀어머님 때문이었다.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갈 때 나는 내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14). 그는 무엇을 배신했던 것일까요? 자신의 양심? 조국? 참전용사?

<생명연습>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몸을 팝니다. '형'에게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 보이는 사내를 하나 데리고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생선 장수를 시작하기 전으로, 바느질로써 용돈을 벌었고 남아 있던 살림살이를 하나씩 팔아서 살고 있었을 때였다. … 그날 나와 누나는 공포에 차서 덜덜 떨며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말았다. 중학교에 다니던 형도 엎치락뒤치락하며 밤을 그대로 새우고 있는 눈치였다. 다음 날 형은 학교엘 가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망 후에 어머니가 맞아들인 최초의 사내였다"(65-66).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사내'는 급성 뇌막염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월부판매 외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4,000원을 주더군요. …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 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째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93)

시대(환경)에 훼손 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삶이 우리를 배신하는 것인지, 우리가 삶을 배신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훼손되는 인간의 타락이 이 단편집 속에는 사람들이 '비윤리적 행위'라고 부르는 다양한 성적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주로 폭력적인 형태로 말이지요. "더구나 짓궃은 장난인 듯이 가장하고 있는 사내들의 그 행위 속에는 대낮의 생활로부터, 이 도시로부터, 자기의 예정된 생활로부터, 자기가 싫증이 날 지경으로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해보고 싶은 욕구가 움직이고 있음을 현주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110). <야행> 속 현주는 그것이 도망해보고 싶은 욕구라고 했지만, 절망감으로부터의 도피, 자기혐오의 몸부림이 또다른 약자를 강탈하고 훼손한다면, 2021년에도 우리는 여전히 야비한 '개새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슬픔이 남자들의 윤리를 허물어뜨려요. 윤리란 미래적인 거죠. 우리에겐 미래가 없는 거예요"(432).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밤낮 없이 일하며,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삶에 꽤 낙심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여전히 찬바람 부는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속 '영이'처럼 불안한 희망을 품어보지만,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환멸이라는 것을 이 책이 다시 확인해줍니다. "그때 멋지게 차린 사내가 여자 앞으로 다가온다. 슬퍼 보이는군요 하고 사내가 말한다. 그러자 여자는 정말 자기는 지금 슬프다고 느낀다. 따뜻한 곳으로 가시죠 하고 사내가 말한다. 울림이 있어서 신뢰하고 싶은 목소리. 여자는 조금은 불안해하며 사내를 따라 걷는다. 여자와 사내는 어디로 갔을까?"(292)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vs. "나는 무엇을 신음하고 있을까?"

1960년대를 뜨거운 청춘으로, 또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살아낸 작가가 그의 작품을 통해 결국 묻고 싶었던 것은 이 둘 중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생선 시장의 개들처럼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아 넣고 눈을 슬프게 치켜뜨고 다니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발정한 개들처럼 닥치는 대로 붙을 자리만 찾아다닌다.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431). 여전히 우리 삶은 작가의 이 통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수치와 환멸과 야비함과 적의와 배신과 도피로 가득 차 있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한국 문단의 한 거목은 사랑의 부재를 독자들이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데도, 어째서 그가 사랑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짐승 같은 삶을 보라, 사랑은 없다고 조롱하는 작가의 절망이 사실은 사랑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말이지요.

대한민국은 지금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이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전쟁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으니 삶을 즐기라고 손짓합니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필요 이상의 음식과 필요 이상의 교미? 우리가 <무진기행>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사랑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 그 운명의 굴레 속에서 여전히 훼손 당하고 있고, 또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우리 삶의 현주소인 이 시대를 여전히 슬퍼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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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완벽주의자 - 내 안의 완벽주의로 더 행복한 나를 만드는 법
이동귀.손하림.김서영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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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절반 이상이 완벽주의자라고?

이 책 덕분에, '완벽주의적 성향'에 대한 저의 두 가지 억울함이 해소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완벽주의적 성향'에 대해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첫째는,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완벽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65). <네 명의 완벽주의자>는 "연세대학교 상담심리연구실에서 한국인 51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두 명 중 한 명 이상이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5)고 보고하며, 이것을 "성인 두 명 중 한 명은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21). 그동안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완벽주의자'라는 지적을 받아오며, 제 스스로도 이러한 성향을 '고쳐야 할 피곤한 성격'으로 인식하고 있던 저에게는 충격적인 통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완벽주의적 성향은 어느 한 개인만의 유별한 성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조금씩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또한, "취업포털사이트 잡코리아가 한 출판사와 함께 남녀 직장인 1,1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직장에서 완벽주의를 추구한다'는 응답자가 무려 전체의 67.2퍼센트나 되고, '완벽주의가 업무 성과를 높인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 또한 전체의 61.3퍼센트로 과반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이는 "직장인 10명 중 7명 가까이가 완벽함을 추구하고, 완벽주의가 성과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해석됩니다(21). 이러한 통계 결과는, 완벽주의적 성향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이 점차 그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불행한 완벽주의자 vs. 행복한 완벽주의자

<네 명의 완벽주의자>는 우리(한국인)를 완벽주의자로 만드는 다섯 가지 요소(실수에 대한 지나친 염려, 정리 정돈 습관, 부모의 높은 기대, 높은 성취 기준, 행동에 대한 의심)와 완벽주의의 네 가지 유형(눈치백단 안정추구형, 스릴추구 막판스퍼트형, 방탄조끼 안정지향형, 강철멘탈 성장지향형)을 분석하여, 내가 가진 완벽주의적 성향을 정확하게 진단해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완벽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긍정적인 요소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다시 말해, 불행한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행복한 완벽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것은 완벽주의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완벽주의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완벽주의적 성향의 '부정적인 측면'을 설명해주는 책은 많이 보았는데, 완벽주의 성향의 '긍정적인 측면'을 이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은 처음 만났습니다.

행복한 완벽주의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스스로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도 많지만, 완벽주의를 잘 활용해 탁월한 성취를 이끌어내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과 달성을 위해 완벽주의가 상당히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완벽주의자'가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높은 기준은 유지하면서도, 실패했을 때 자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자기를 비난하기보다 실패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능력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완벽함은 이룰 수 없지만 완벽을 추구하면 탁월함을 얻을 수 있다"(17).

<네 명의 완벽주의자>에 인용되어 있는 빈스 룸바디(전 미국 내셔널 풋볼리그 총재)의 말입니다. 저는 그동안 어떤 일을 잘 해내고도 사람들의 칭찬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일의 결과 상관 없이 울적해지는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울적함을 실패의 증거로 해석"(80)한다는 문장을 보고 화들짝 놀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제 속내를 들킨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높은 기준'과 '부정적인 자기 평가'로 목표를 지나치게 높게 책정해놓고,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자신을 비난하기 쉽고, 결과적으로 우울감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완벽주의가 만들어내는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 갇히면 우울증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네 명의 완벽주의자>는 그래서 우울증을 이해하려면 심리의 근원에 자리 잡은 완벽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는 어떤 일의 성과와 상관 없이 그 일을 마쳤을 때, 울적해지는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고, 그 울적한 감정 때문에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향을 버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네 명의 완벽주의자>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향을 버릴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난하고 탓하는 버릇을 멈추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나를 탓하는 버릇이 내게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밝아짐을 느낍니다. <네 명의 완벽주의자>는 내 안의 완벽주의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힘을 가진 책입니다! 특히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완벽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힘들었던 분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사는 데도 늘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런 분들에게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 문제의 근원이 완벽주의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자유를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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