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가는 대로
수산나 타마로 지음, 최정화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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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 마음 가는 대로 가거라.

유행처럼 번지는 현대인의 우울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품어온 실존적인 고독이 아니라, 병리적인 외로움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외로움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병리적인 현상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수산나 타마로의 <마음 가는 대로>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는다면 이것이 아닐까 한다. "마음이라는 말이 구식으로 들리는 반면, 이성이라는 말은 아주 현대적으로 들리지. 요즘 시대에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다간 동물적이고 충동적인 사람 취급을 받지. 반대로 이성을 따라 살면 고상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진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면 어쩌지? 지나친 이성이 결국 우리 삶을 갉아먹는다면?"(105). 수천 년 동안 문학은 영혼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영혼은 우리의 마음과 함께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유실물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사람 사이에 있는 섬,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마음에 닿으려 하지 않고 이성으로만 다가가려 하고 있다.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연인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정보와 사실만을 주고받으며 논리와 판단과 분석과 주장과 설득으로 가득찬 이성적인 대화뿐이다. 내면의 대화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친밀성은 낯선 감정이 되어버리고, 밖으로 향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움츠려 드는 마음의 목소리는 익명성을 담보로 하는 가상 공간 안에서 낯선 상대를 대상으로 뱉어질 뿐이다. 결국 우리의 내면은 빈곤해지고, 친밀해야 할 관계에서 느껴지는 극단적인 단절은 병리적 외로움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간소화되고 표피적인 의사소통 방법이야말로 우리의 내면을 빈곤하게 하고 인간적인 성장을 더디게 하는 것 같다"(5).

<마음 가는 대로>는 팔순의 할머니가 손녀에게 남기는 15통의 편지이다. 이 편지는 부치기 위해 쓰는 편지가 아니라, 남기기 위해 쓰는 편지이다. 손녀는 냉정하게 떠났고 팔순의 할머니는 몸에 이상 신호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자신이 죽고 없는 집에 어떤 이유로든 다시 오게 될 손녀를 생각하며 손녀가 쓰던 연습장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편지를 쓰는 할머니는 손녀의 마음에 가 닿기를 원하고, 손녀가 자신의 마음에 와 닿아주기를 바란다. 손녀와의 추억을 더듬어나가던 할머니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을 닫아버린 손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준다. 왜 손녀에게는 아버지가 없는지, 왜 손녀의 엄마이자 할머니의 딸은 그렇게 슬픈 죽음을 맞았는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할머니는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손녀에게 영향을 끼친 엄마의 인생은 다시 할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고, 딸에게 영향을 끼친 할머니의 인생은 또한 그 부모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어린 소녀였고, 딸이었고, 아름다운 아가씨였고, 불행했던 아내였고,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할머니의 추억 속에는 한 여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생애와 더불어 가족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인간은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가족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가족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고 영향을 끼치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 가는 대로>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의 한 여인의 삶이 다른 가족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내 삶의 원인과 근원의 뿌리가 엄마와 할머니라는 세대의 소통을 통해 찾아진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인디언 속담을 들려준다. "그 사람이 신발을 신고 세 달을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196).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아주 깊게 살펴봐야만 그의 행동 방식, 동기, 감정 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런 이해는 많이 안다는 자만심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손에서 나오는 거라고 설명하며 말이다. 할머니는 편지를 읽는 손녀가 할머니의 "신발"을 신어보기 원한다. 즉, 마음과 마음의 소통을 원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자연과 일상을 비유로 어떤 지혜자의 잠언보다 더 깊은 교훈을 들려주는데, 내가 마음에 새겨놓은 것은 이것이다. "난 시간은 낭비해도 상관없다고, 인생은 달리가 경주가 아니라 활쏘기 게임 같은 거라고 대답해 주었지. 중요한 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과녁의 중앙을 맞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35-36).

<마음 가는 대로>를 읽으며 생각한다. 내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한 여인으로서 엄마의 삶을. 그리고 한 남자로서 아빠의 삶을. <마음 가는 대로>가 내게 가르쳐 준 마음은 타인의 생을 바라보는 "연민"이다. 지금 이 마음, 이 기분이라면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가는 대로>를 읽으며 또 생각한다. 이제 이성보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더 기울여보자고. 할머니는 말한다.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를 때, 네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 마음 가는 대로 가거라."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동안 이성으로 마음의 소리를 억압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마음의 소리까지 이성으로 판단하며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일에 소홀했는지 모르겠다.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마음 가는 대로>는 인용하고 싶은 구절이 많은 아름답고 지혜롭고 또 슬프고 마음 아픈 그런 편지이다. 할머니가 된 한 여인의 추억이 하도 생생하여 도저히 소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실적인 이야기로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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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망이다
제프 헨더슨 지음, 나선숙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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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찾은 행복이 너무나 소박한 일상이여서 눈물이 난다.

자기 인생을 망치고 싶어서 망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처음부터 희망을 거세 당한 인생이 있다. 그의 기억 어디에도 행복의 흔적이 없다.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고, 가난한 어머니는 그를 돌봐줄 시간이 없었다. 자신의 돌봐준 할아버지에게 그가 배운 것은 도둑질이었다. 의사의 경고를 받고도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한쪽 눈은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경찰의 함정 수사에 걸려들어 체포되었다. 파란색 옷을 입은 패거리들의 구역이 있고, 빨간색 옷을 입은 패거리들의 구역이 있는데, 옷색깔을 잘못 입고 나갔다가 칼에 찔려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습관적인 도둑질을 해도 관심 있게 야단을 치는 사람조차 없었다. 누구에게도 다정한 눈길을 받아본 적이 없고, 진심어린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다. 학교마저도 최하 점수를 주어 그를 졸업시켜버렸다. 

그래도 그를 짓눌렀던 환경이 이것 뿐이었다면 어쩌면 그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태생적으로 사회적인 차별과 편견과 멸시를 받도록 태어난 ’흑인’이었다. "조선소의 백인들이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어머니는 조선소의 백인놈들이 언젠가 당신에게 지은 죗값을 치를 거라고 말했다. 그 조선소에 얼마 되지 않는 여자들 중에서도 어머니가 유일한 흑은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오줌을 누기도 하고 인종차별적이고 성적인 농담을 일삼았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자주 눈물을 보였다"(79). 내 어머니가 당해야 하는 이런 일상적인 모욕은 어쩌면 자신이 당하는 모욕보다 더 큰 분노를 그 안에 심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흑인 "제프 헨더슨", 빨리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꿈이 인생의 전부였던 그는 길거리에서 마약을 팔다가 체포되어 징역 235개월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19년 7개월, 이것으로 이제 그의 젊음도 끝날 것이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비로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참옥한 환경 한가운데서 희망을 발견했다. 인생이 본래 그런 것인지 "며칠째 북쪽 마당의 내 구역을 청소하지 않았다"(191)는 이유로 식당으로 쫓겨나 "빌어먹을" 설거지를 하게 된 것이 인생역전의 기회가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즉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이 인생에서 뭔가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214).

그는 비로소 인생의 참된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열정적으로 일했고, 열정적으로 요리를 배웠고, 또 열정적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가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과거가 나를 괴롭혔다. 세상의 쓰레기들 가운데 끼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나의 추락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이 나라 미국에서 정확히 내가 속해야 할 곳에 속해 있었다. 사회의 인간 쓰레기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 나는 마침내 이 나라가 나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는지 알아차렸다. 나는 그저 저급한 범죄자였다"(213).

출소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과거와 편견과 그를 위협하는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발견한 희망의 불꽃은 어쩌면 좌절보다 더 지독한 고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피어난 희망의 불꽃을 끝내 지켜내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최고 요리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참된 성공과 행복이 여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찾은 행복이 너무나 소박한 일상이여서 눈물이 난다. "나중에 아이들이 컸을 때, 엄마 아빠와 함께한 시간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들을 위해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한다. 거리에서 23년을 보냈지만 이제는 내 가족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멋진 삶이라고 믿는다"(382-383).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할 줄 모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두었던 제프 헨더슨, 그가 가장 소망했던 것은 따뜻한 사랑이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지 않았을까. 이제 그 스스로 희망이 된 제프 헨더슨은 희망과 사랑을 나눠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사랑과 관심이 가장 필요했을 때는 외면했다가, "성공한 제프 헨더슨"이 되자 열렬히 박수하며 열광하는 우리의 모습이 솔직히 좀 씁쓸하다. 어쩐지 경박해보여서 말이다. 성공한 제프 헨더슨이 또다른 "제프 헨더슨"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것처럼,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성공을 향한 무한 열정이 아니라 "어린 제프 헨더슨"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일, 즉 사랑과 관심을 갖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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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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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의 상징성을 열심히 추측하며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제는 ’느닷없이’(!) 맞이한 통일 대한민국의 혼란한 상황을 예측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장미빛 몽상을 걷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후, 가벼운 마음으로 마주한 ’작가의 말’은 이 책의 주제에 대한 내 모든 결론을 헝클어버렸다.

2011년 5월 9일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흡수통일하였다는 설정과 (내가 읽어내기에) ’느닷없는’ 통일이었다는 강조점,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과 갈등은 주제가 아니라 문학적인 견지의 소재, 다른 말로 이 책의 ’모티브’였던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범죄의 장면들로 가득한 소설을 만들면서 나는 질문했다. 무엇이 죄인가? 살인? 누가 악인인가? 살인자? 혼돈 속에서도 제 정체성을 회의해 보지 않는 것이 죄이고 그러한 그가 악인다. 혼돈 속에서 살면서도 그 혼돈 자체를 부인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 죄. 혼돈을 치장해 장사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척하는 죄. 그러다가 스스로 더 무지막지한 혼돈이 되는 죄. 나는 누인가를 왜곡하는 이런 식의 저 모든 뻔뻔함들이 처세를 신념으로 위조하고 위선을 격조로 착각하게 한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간에"(p. 260).

<국가의 사생활>은 작가의 설명대로 "인민군 출신 폭력 조직의 내부에서 벌어진 한 살인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남한에 자리잡은 광복빌딩, 이곳에 자리 잡은 ’은좌’는 이북의 아가씨들을 모셔다 놓고 철저한 회원제로 관리되는 최고급 술집이다. 은좌를 운영하는 ’대동강’은 인민군 출신 폭력조직이다. 그들은 지하에 시체를 태우는 화덕까지 갖추고 그들만의 체제와 법으로 은밀히 조직을 운영해나간다. 

준비 없이 맞이한 통일 조국의 현실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느닷없이 무장해제된 이북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남으로 내려오지만, 그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은 상대적인 박탈감과 "잃어버린 반쪽의 진실"이다. 인생을 설계하는 견고한 틀이었던 사회 체제가 무너지고, 핵탄두마저 미국에 빼앗긴 이북의 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이남과 만나 "무시당하고 우리답게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며 좌절한다.

이러한 사회와 조직 안에서 생명이 위태롭고 정신이 위태로운 주인공 ’리강’이 등장한다. ’작가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주제로 리강을 다시 재구성하면 이렇다. 리강은 절대적인 것에 믿음과 신념을 상징하는 이북의 미신과 이남의 기독교를 모두 거부한다. "신앙은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님으로써 강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너를 죽일 것이다"는 찜찜한 예언 하나가 그의 내면을 괴롭힌다. "너를 너를 죽일 것이다"라는 이 수수께끼같은 예언은 바로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살인 사건 안에 감춰진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리강은 "저 여자가 나 같다"고 느끼는 여자(윤상희)를 만나고, "내가 되려고 하는 한 남자(오남철)"의 실체를 알게 된다. 리강은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결국, 이 혼돈은 "나인 네(윤상희)가 자신을 죽이고 (그를 통해 나이고자 하는 오남철을 제거함으로) 너인 나를 구한 거야"라는 결말을 맺는다. 작가 자신의 해석에 따르면, 이남의 시끄러운 괴변을 대표하는 이선우는 "저 여자가 나 같다"고 느끼는 리강에게 "내가 너고 네가 나인 건 사랑인 거야"라고 알려주고, 이북의 정신을 대표하는 남기정은 리강에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주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정체성의 회복을 ’자신이 운명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 즉 자주적인 삶을 사는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작가의 의도를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작가는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환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상처와 후회를 거절하지 말고,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고통의 비등점에 서 있는 영혼이 되라고. 통일 조국이 겪는 "거시적인" 혼란의 소용돌이는 그대로 "미시적인"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의 사생활은, 국가 안에 살아가는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다. 완벽한 국가 없듯이, 완벽한 개인의 삶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완벽한 개인의 삶이 없기 때문에, 그 총합인 국가도 완벽할 수 없는지 모른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환란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든, 나 자신 안에서든 스스로를 속이며 ’매몰’되는 않는 것,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작가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교육받아온 ’통일 조국’에 대한 당위성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체의 것을 회의하도록 하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에 매몰된 현대인들의 소유욕은 ’물질세계’에 대한 집착만큼, 상대적으로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 <국가의 사생활>은 철학의 출발이 되었던 그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물음 앞에 우리를 다시 끌어다 앉힌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도달하기까지 어쩌면 <국가의 사생활>이 보여주는 또하나의 장치는, 이남은 이미 정신을 잃었다면, 이북은 왜곡된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이 다른 거대 사상과 물질세계와 충돌하며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국가"의 혼란상을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다가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추측에 확신을 주는 요소는 이북의 ’장군도령’(미신)과 이남의 기독교를 배치해둔 것이다. 영적이면서 정신적인 세계에 대한 집단적 믿음과 신념을 대표하는 이 두 가지 요소는 당위적인 것을 교육(세뇌)하는 실체(세력)에 대한 의심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이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과학성을 잃어버리면 철학은 진리의 나침반이 아니라 악마의 입술이 된다"(p. 180).

단순하게 읽지 않고, 지나치게 작가의 의도를 의식한 나머지 너무 제멋대로 작위적인 설정과 해석을 도출하지 않았나 걱정스럽다. 책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대해 작가는 물론 이 책을 읽은 사람들과 토론해보고 싶은 소설이다. 이북 사람들의 말투가 맛깔나고 신선하며, 살인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도 거대한 음모를 품고 있어서, 이런 복잡한 생각 없이 그저 재밌는 소설로 읽기에도 충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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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 지음, 린 살라모 외 엮음,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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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랭혼 클레멘스', 우리가 '마크 트웨인'으로 알고 있는 작가의 본명이다.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고, 신선하고, 재치 있고, 신랄하고, 지혜롭고, 활력 있는 초절정 익살을 담았다는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은 그가 직접 편낸 책이 아니다. 캘리포니아대학 뱅크로프트 도서관의 ‘마크 트웨인 프로젝트’ 편집자들이 마크 트웨인의 사적인 편지, 자전적 글, 연설문, 소설, 미발표 원고 등을 추려 엮은 것이다.

편집자 중 한 사람인 린 살라모는 이 책의 특징을 잘 설명해준다. "마크 트웨인의 여러 가지 일화, 기발한 제안, 격언, 훈계 등을 모은 이 책은 인류를 위한 독창적인 에티켓을 담고 있으며, 일상의 변덕스러운 파도를 잘 헤쳐 나가게 돕는 색다른 길잡이가 되어 준다. 도덕 교육이라든지 가정과 해외에서의 올바른 처신에 대한 고찰, 옷, 건강, 음식, 육아에 대한 의견, 좀도둑 대처 방안부터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제안은 발표되거나 발표되지 않은 그의 글들 곳곳에 퍼져 있다 "(p. 9).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은 마크 트웨인의 일상에 정밀하게 밀착된 글이다. 한마디로 마크 트웨인의 "살며, 사랑하며"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의 일상은 다소 엉뚱하고 기발하고 장난끼가 가득하다. 일상에 밀착된 그의 유머는 말장난이나 그저 웃자고 하는 농담이 아니다. 정말 기발하다고 한바탕 웃고 지나칠 수 있는 풍자요, 해학이 아니다. 가족을 온 열정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내면에 무섭도록 몰두하면서도 어울려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들에도 전력으로 반응하는 그의 에너지가 놀랍다. 남성의 시각에서 거의 불가사의한 일로 해석되는 여성들의 전화 통화를 묘사하고, 잦은 고장을 일으키는 전화기 때문에 분노하고, 형편 없는 음식을 증오하는 마크 트웨인은 한마디로 "모든 것에 대한 예의"를 존중한다. 주기적으로 변덕스럽게 새로운 건강요법 혹은 식이요법에 열광하고, 편안하면서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옷차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고한 견해로 흰 양복을 즐겨 입는 강하면서도 톡톡 튀는 개성의 마크 트웨인은 자신만의 세계를 즐기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사는 일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학부 때,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일상에서 실패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예로 제시하고 그 상황을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직접 제시해보라"는 과제를 받았었다. 나는 잔소리가 부부싸움으로 발전하는 상황을 포착하고,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유머의 활용'을 제안하여 레포트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런데 평가가 형편없었다. 이유는 '유머'를 잘못 사용하면 상대가 그것을 자칫 조롱과 비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잔소리를 대신하여 유머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부부싸움과 같이 예민하고 부정적인 상황에서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 교수님의 해석이었다. 마크 트웨인을 보면서 다시 깨닫는다. 유머야말로 예의와 수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못말리는 개구장이이면서도 또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이요, 아버지인 마크 트웨인의 위트는, 날카로운 독설의 또다른 얼굴로 보인다. 위트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그 어떤 철학과 논리보다 중요한 사람과 삶에 대한 정중한 예절이라는 것에 감탄하고 또 감탄하게 된다. 철 없는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마크 트웨인의 모습을 보면, 그가 "물질문명과 종교와 전쟁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불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신랄한 비판을 가한 미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책보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상과 위트의 만남! 일상적인 문제을 위트로 풀어낸 그의 접근과 의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마크 트웨인의 본명이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마크 트웨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혁신적인 만찬 신호 체계"에서의 행복한 모습으로 그를 내 기억 속에 살게 하고 싶다. 남편을 걱정스레 나무라면서도 무척이나 귀여워 했을 것 같은 아내의 사랑스러운 눈길, "아빠 야단치기" 거사를 몰래 숨어보며 아빠를 놀리며 행복해 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런 가족들 안에서 무한히 행복한 마크 트웨인. 아마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가족을 잃어야 했던 마크 트웨인도 이 시절을 가장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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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 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 마로니에북스 Art Book 15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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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아버지는 어렸을 때 망명하는 배에서 돌아가시고,
그후 페루 리마의 부유한 저명인사였던 삼촌의 집에서 자라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중학교에 다녔으나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학업성적도 좋지 않았다.
선원이 되어 배도 탔지만, 
군복무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후견인의 주선으로 베르탱 증권 중개소에 취직했다.
그는 여유있는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수입을 벌었으며,
결혼도 하여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증권 중개소에서 일하면서 그림에 관심을 보인 폴 고갱은 
그림 전시장과 미술관을 찾아다녔고, 미술에 관해 토론하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는 방 하나를 화실로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에 출품도 했다.

이쯤에서 그의 아내는 메테는 
"남편에게 그림이 순수한 소일거리에서 
그를 완전히 사로잡은 열정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점점 불안해졌다.
메테는 고갱이 남편과 아버지로서 
의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p. 18).

고갱,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안정된 삶을 뒤로 하고,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출발을 한 때가 대략 삼십대 중후반이다.

고갱이 화가가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이렇게 길게 쓴 것은
이 책이 부제이기도 한 그의 작품세계, 즉 그의 "원시를 향한 순수한 열망"을 
이해해보고 싶어서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평균수명을 고려해 볼 때,  
삼십대 후반이라는 시기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도전하기가 쉬운 나이는 아니다.
하던 일이 실패했다든지 하는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는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게다가 아내의 거센 만류까지.

어쩌면 고갱은 증권 중개소를 그만 두기 그 이전, 배를 타는 선원이 되었을 때부터
도시생활에 실증을 내며 미개척의 땅, 원시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문명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의뿐 아니라, 
이후 문명세계에서의 실패와 좌절도 그 이유에 포함될 것이다.

아카데미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폐기하려는 욕구를 가진 인상주의 화가답게
독특한 기법을 추구했지만,
"성공에 대한 희망은 환상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의 혁신적인 미술을 이해하지 못했다"(p. 24).
안타깝게도 고갱이 보란 듯이 화가로서 멋지게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고갱의 독창적인 기법은 눈길을 끌었지만, 그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는 포스터를 붙이는 노동도 해야 할 만큼 가난해졌다.
이후에도 계속 궁핍과 병과 싸우다 한 섬에서 심장마비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이 책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는 자살 시도도 한다.)
책은 그이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한다.
"마지막까지 그이 곁에 남아있었던 사람은 늙은 마오리족 주술사 티오카와
개신교 목사 베르니에였다.
이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원시인처럼 살고자 했던 한 유럽인의 
이중적인 본성을 드러낸다"(p. 126).


문명이 아니라, 원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고갱.
"품위 있는 삶을 약속했던 남편의 무능력한 실망한 아내 메테는 친정으로 가버리고",
이후 다소 문란하게 보일만큼 미개한 소녀(!)들과 사랑을 나누는 고갱.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한 그는 평생을 여성들 틈에서 살지 않았나 싶다.)
그의 그림 속의 원시적인 여성들은 모두 한결 같이 건강하고 활력이 있다.

나를 가장 매료시킨 고갱의 작품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가로 347센티미터, 세로 139.1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작품은
실존적인 물음을 가진 작품이다.
이 그림은 그의 사랑하는 딸 알렌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린 그림이며,
그는 이 작품을 마치고 자살 시도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이 책에 없다. 
마로니에북스의 아트북 시리즈는 다소 딱딱한 내용의 책인 것이 아쉽다.)

그전까지 내가 아는 고갱의 작품은 
독창적인 기법을 바탕으로 다소 거친 붓질과 색감의 아름다움, 
그리고 원시적인 아름다움과 순수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하는 그림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 속에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고뇌와
문명세계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사실 자신이 없지만.)

지금도 항상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며 도시에서 사는 나에게
고갱의 고달프지만 정열적이면서 고독했던 생애와 작품은 또다른 동경의 세계가 된다.
나는 고갱에게 깊은 우정을 느낀다.
고흐만큼이나 친구해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다독여주고 싶은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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