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가 세인트 제임스 홀의 만원을 이룬 청중 앞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큰 소리로 낭독했을 때 그의 심장 박동은 72에서 124까지 치솟았다. 당연한 일이다. 우선 그는 페이긴이 되었다. 측면에 날개처럼 붙은 청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친구 찰스 켄트는 그 몇 분간 디킨스가 “악마의 화신” 같았다고 전한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으며, 차양을 친 듯한 눈썹은 무시무시한 파충류의 더듬이처럼 움직였고, 반쯤은 여우같기도 하고 반쯤은 독수리 같기도 한 그의 모습 전체가 굶주린 맹수처럼 사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파충류, 포유류, 조류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려면 누구라도 맥박이 빨라졌을 것이다.) 이어 디킨스는 책의 여백에 써놓은 무대 지시 사항(“몸을 부르르 떤다… 공포에 질려 주위를 돌아본다… 살인이 다가온다.”)을 흘끗 본 뒤에, 빌 사이크스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그는 낸시가 되어 숨을 헐떡였다. “빌, 오, 빌.” 그녀는 자신의 피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디킨스는 낸시를 몽둥이로 때리고 사이크스의 목을 매단 뒤에는 무대 밖의 소파에 엎어져 10분 동안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 p.147,「낭독의 쾌감」 

 

앤 패디먼의 에세이『서재 결혼 시키기』의 미덕은, 같은 활자중독자로서 작가에게서 유사한 경험을 발견하고 공유하는 데서 오는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트루먼 카포티의 자전적 소설『인 콜드 블러드』가 원작인 영화《카포티》에도 문제의 ‘낭독’ 장면이 나온다. 카포티는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업도 했는데 당시엔 출판 전후에 홍보를 겸한 자신의 책을 낭독하는 행사가 일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낭독’에 대한 부분은 온다 리쿠의 장편『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에서도 잠깐 언급되는데, 작가는 읽는 책이 보는 책이 된 디지털 세대인 지금의 다음 세대쯤에 이르면 아마 다시 ‘듣는 낭독’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라고 자신의 견해를 살짝 내비친다. - 사족이지만,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 타고' 이다. 단어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도 그 느낌이 참 다르다. 왜 쓸데없이 제목을 잘라 버렸을까 궁금한 대목.

나도 낭독을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주로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한다. 대부분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혹은 반대로 너무 싫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입 밖으로 쏟아내고 싶은 욕구를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 낭독을 하는데 내 낭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 하던 친구가 유학을 간 후로, 지금은 M군이 내 낭독의 대상을 도맡아 한다. 처음엔 전화기를 붙들고 M군에게 그 책을 꼭 읽어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다가 급기야 M군이 ‘문제의 책’을 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내 성급함이 전화선을 타고 ‘낭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M군, 처음엔 잘 들어주는 것 같더니 차츰 귀찮아하다가 나중엔 들어주는 척만 하다가, ‘척’하면 한 번 들을 걸 두 번 듣게 된다는 걸 경험한 후에는 이젠 제법 성의있게 들어주고 촌평도 해준다(하지만 여전히 귀찮아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고민은 내가 낭독자로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사실 내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이다 보니 ‘낭독’하기에 이르면 스스로 알아서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 낭독 전에 자연히 사설이 길어지게 되는데, 전화기 저쪽에서 내 이런 사설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던 M군이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한다. 

“다 감안해서 들으니까 그냥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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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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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 p.254 

작년 여름호부터였던가,『엄마를 부탁해』가 창비 계간지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연재이긴 하나 그것이 우리 집에 처음 등장한 신경숙의 글이었다. 첫 회 앞 부분을 읽다가 곧 흥미를 잃은 것은 아마 인칭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취향이 아니야'라고 내던졌던 소설을 (이번엔 완성된 한 권의 책이지만) 주문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할까. 이쯤되면 인연이 없는 게 아니라 인연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사실 신경숙은, 나하곤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작가였다. 어디까지나 내 의지적인 문제인데 내가 없는 동안 내 책장을 차지한 그녀의 책들은 아직도 읽지 않은 채 그대로 꽂혀 있고, 지금까지 출간된 그녀의 소설 중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했을『엄마를 부탁해』도 딱히 읽어야지 라거나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신작 베스트셀러를 주문한 것은 몇 가지 우연적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인데 과정이야 어떻든 소설을 읽고 난 감상은, 소설가 김연수의 말을 빌려, "당장 서점에 가서 이 소설을 사서 읽으세요" 

이 땅의 모든 딸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특히 이 땅의 남편들, 아들들에게 무조건 읽히고 싶다.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의 인칭은 '너' '당신' '그' '나' 로 이동하고 그래서 읽는 동안 나는 '너'가 되었다가 '당신'이 되었다가 때로는 관찰하고 때로는 화자가 되어 실종된 엄마의 족적을 따라 간다.
누구의 말처럼 소설을 읽다가 '펑펑' 우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 엄마가 되어 보지 못해서가 아닌가 짐작한다. '펑펑'은 아니지만 내가 결국 울음을 터뜨린 것은 3장을 읽던 중 엄마의 상처와 마주쳤을 때였다. 우리는 '엄마'의 역할을 벗어난 '엄마'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누군가의 딸로 태어난 엄마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아버지는 약주 한 잔 하시면 남매 중 그나마 싹싹하고 만만한 나를 붙들고 곧잘 옛날 얘기를 해주시곤 했는데 '나 어렸을 적에' 류의 얘기를 좋아하는 나는 하도 들어서 대개가 거기서 거기인, 벌써 몇 번째 듣는 아버지의 그 얘기들이 늘 들어도 늘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는 다른 날 들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아버지가 자란 곳은 그 시절엔 흔했던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모두가 잠드는 밤이 되면 달과 별이 세상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 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깬 아이들이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외따로 있는 짚으로 엮은 캄캄한 화장실에 가는 것이 무서워 배를 움켜 쥐고 끙끙 참는 그런 시골이었다.
그날은 해가 빨리 져서 저녁도 함께 짧아지는 어느 겨울밤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유독 아버지만 잠을 못자고 문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겨울 초입이라 바람이 많이 불 때였는데 마당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꼭 산에서 내려온 여우나 멧돼지 같은 야생 짐승이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만 같더라는 것이다. 참다 참다 결국 무서웠던 아버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깨웠다. 왜 그러느냐는 할머니에게 아버지가 마당에 뭔가가 있다고 하자 할머니가 낙엽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는 소리라고 안심시켜 주셨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몇 살이었는데요?" 내가 물으니 아버지는 "다섯 살인가 여섯 살쯤 됐을 거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때 아버지한테도 다섯 살, 여섯 살이 있었구나 좀 많이 놀랐던 것 같다.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식하기 전부터 아버지는 늘 아버지였고 엄마는 늘 엄마였다. 우리 아버지도 나처럼 아이였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낙엽 구르는 소리가 무서워서 할머니를 깨우기도 하셨다는 것이 생소하고 낯설었던 것이다. 그 때는.

책을 읽은 다음 날, 마침 귀국 사흘 만에 딸을 내팽개치고 휘리릭 남쪽으로 떠났던 엄마가 이모와 함께 올라오셨다. 나는 엄마를 붙들고 종일 책 얘기를 했다. 엄마, 내가 어제 책을 한 권 읽었는데요, 엄마에 관한 내용인데…… (쫑알쫑알)

내가 응석부리고, 나의 응석을 받아 줄 엄마가 내 옆에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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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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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두 편『백야행』과『용의자 X의 헌신』을 읽었다. 

두 소설을 읽고 난 소감은 일단 히가시노의 소설은 '로맨스 추리소설' 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로맨스'와 '추리'라는 두 단어의 전후(前後) 순서가 중요한데 추리소설에 로맨스를 가미한 것이 아니라 로맨스에 추리 요소를 넣었다는 의미에서 '로맨스 추리소설'이다. 

같은 시기에 읽은 미야베 미유키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한데 책 표지를 두르고 있는 홍보 띠지가 가리키듯 히가시노의 두 소설에서 '사랑'을 빼놓고는 소설을 얘기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여느 로맨스소설처럼 달달한가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주인공들이 용의자로 혹은 피해자로 음침하고 음울한 사건의 중심에 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들이 비극적인 보다 큰 이유는 그들 사랑의 방향성 때문이다. 수학선생인 이시가미가 연모하던 이웃집 모녀에게 불행이 닥치자 자발적으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용의자X의 헌신』은 그렇다 치고『백야행』역시 몇 가지 점에서 유키호와 료지가 양방적 사랑을 했다고 보기엔 의문점이 남는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자국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된『백야행』은 3인칭 시점인 소설과 달리 유키호와 료지의 독백을 삽입, 1인칭 시점을 취한다. 
덕분에 11부작인 드라마는 소설에서 여백으로 남겨졌던 부분을 어느 정도 메꿔주지만 소설에 비하면 두 사람의 행로를 지나치게 운명적 신파로 몰고가는 경향이 있어 오히려 원작의 의도를 흐리는 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유키호의 동기를 해석하는 부분에서 원작과 시각의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유키호가 선택한 '행위'의 동기를 유키호 자신이 아닌 료지에게 두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를 위해 했는가, 타인을 위해 했는가의 차이는 명백하다. 무엇보다도 이타적 이유의 동기는 상대를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드라마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다. 드라마는 유키호의 독백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이 양방향적인 평행을 이루게 하지만 사실 소설은 일방적인 것에 좀 더 무게를 싣는 듯 보인다. 일방적이라고 해서 료지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키호에 비해 료지의 사랑이 더 절실하고 무조건적이라는 의미다. 료지가 오로지 유키호를 위해, 유키오에 의해 백야행을 선택한 것과 달리 유키호의 백야행은 보다 개인적이고 자기애에 의한 이유가 더 강하게 작용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눈에 띄는 점은 직업적인 책임감이 투철한 형사 사사가키를 불쌍한 연인을 집요하게 뒤쫓는 위험하고 미운 인물로 설정한 드라마의 선택이다. 두 아이가 사사가키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빌며 마음 졸이게 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강요하는 이러한 인물 해석은 가해자는 가해자일 뿐이라는 (원작)작가의 냉정한 시각을 가장 많이 비켜가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살인'이라는 범죄 행위를 보는 시각은 소설이 드라마보다 훨씬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소설은 두 아이를 옹호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로맨스의 가장 큰 비극은 뭘까. 개인적으로 로맨스의 가장 큰 비극은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이 아닌가 싶다. 

덧. 드라마에서 유키호의 의상실 이름은 유키호와 료지의 약자인 'R&Y' 인데 정작 (국내 번역본)소설에선 'R&B'다. 어떻게 된 것일까. Y와 B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굉장히 크다. 이 한 글자로 인해 소설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 정보를 검색한 결과 일본내 원서에는 'R&Y'라고 분명하게 표기되어 있다고 하니 'R&B'는 국내 출판사의 업무적 실수인 듯 하다.

덧2. 영화《포레스트 검프》와 유사한 방식의 서술 구조를 취하고 있어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80년대 일본의 시대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덧4. 내가 구입한 것은 개정판인데 예전 표지가 훨씬 낫다. 

덧5.『백야행』과『용의자 X의 헌신』중『용의자 X의 헌신』쪽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사실『용의자 X의 헌신』의 미덕은 딱 한 페이지 혹은 한 줄에 있다. 읽고 나면 희미해질 그저 그런 흔한 추리소설을 인상적인 추리소설로 기억하게 만드는 그 한 부분이 작가에게 '재능있는' 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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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읽기 직전까지 엘리자베스1세의 이복자매인 '블러드 메리'의 얘기인 줄 알았다. 

메리 스튜어트는 동시대에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를 통치할 때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던 여왕으로 비록 그 기간은 4-5년에 불과하지만 통치자로서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에 더 열정적이었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즉위식에서 '영국과 결혼했다'고 선언한 엘리자베스의 삶과 매우 대조적인 삶을 살았는데, 여러 권의 저작을 통해 인문주의 지지자임을 드러낸 츠바이크는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라는 두 여왕 중 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메리 스튜어트에게 더 우호적인 듯 하다.
반면 엘리자베스에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츠바이크의 이런 성향은『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카스텔리오를 박해한 칼빈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나는 메리보다 엘리자베스에게 끌린다. 한 사람의 여자로서 열정을 제대로 불태웠으니 본인은 만족스러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메리 스튜어트는 간통녀이고, 전남편 살해에 가담한 살인 공범이며, 사랑에 빠져 조국을 등한시한 직무유기의 죄를 지은 죄인임에 틀림없다. 반면 츠바이크가 비열하고 저급하다고 비난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감금하기로 한 선택은, (그녀 입장에서)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으로 보인다.

태어나면서부터 여왕이었던 메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여왕이었는데, 고귀한 혈통이라는 '자존감'은 메리의 가장 큰 장점인 동시에 또한 단점이다. 혹 엘리자베스에겐 없었던 메리의 이런 타고난 품성이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라이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을 인색하게 했던 것은 아닌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얻어야 하는 사람과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삶에 대처하는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실례(實例)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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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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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읽은 날. 2008/09  

 

1. 개인적인 완독 감상은, 역사소설로는 부족하지만 연애소설로는 괜찮았다. 

2. 1, 2부는 훌륭하다. 이야기를 엮어 내는 힘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고 이야기의 응집력도 대단하다. 생명력이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누구 하나 버리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굉장한 감정이입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지문과 대사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이 당연한 얘기를 왜 언급하는가 하면 3부를 지나 4부에 이르면 대사와 지문의 역할에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실험성이나 독창성 등의 작가의 '새로운 시도'로 이해할 범위를 넘어선다.

3. 3, 4부에선 지문과 대사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데(다행히 5부에선 한결 깔끔해진다) 그중에서도 지문이 대사인지, 대사가 지문인지 구분하기 힘든 장면과 마주칠 때는 적잖이 당황스럽다. 소설 속에서 대사란 인물과 인물 간에 주고 받는 것이 규칙이다. 그러나『토지』에서는 한 사람의 대사가 지문이나 상대방의 말줄임표 없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몇 있다.  

4. 심지어 5부에 들어서면 느닷없이 ‘독자는 기억하는가’ 운운 작가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그렇지 않아도 5부는 양현과 영광, 오가다와 인실의 사랑 때문에 통속극의 분위기가 짙은데 거기에 변사의 역할을 하는 작가의 지문이 등장하니 당황스럽다. 다행히 이런 지문은 한 번만 등장한다.

5. 문장의 호응에 문제가 있는 단락이 여러 권에 걸쳐 나타난다. 특히 ‘그러나’ ‘그래서’ 등의 등위접속사의 쓰임이 적확하지 못하여 어색한 문장이 많은데 다음은 14권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과거지사는 어찌 되었건 윤필구는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 당시는 부친인 윤 도집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그는 동학의 골수분자다. 비록 육임(六任)의 제삼위인 도집이 직책이나 상당한 지식과 뛰어난 지략가이기도 했었던 부친에 비하여, 지략은 떨어지나 학문의 깊이는 부친을 훨씬 능가하여 동학경전에 투철하다. (p.134)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기예학교의 여선생이 항의편지를 냈다 하여 만나자 한 것은 조용하의 경우 파격적인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불미스럽고 참혹한 사건, 그것은 인실이 담임하고 있는 반에는 방직공장 여공 아이가 서너 명 있었다. 그 중의 박차순(朴次順)이라는 아이가 방직공장 창고에 끌려가서 감독으로부터 추행을 당하려다 심히 반항을 하여 팔이 부러졌던 것이다. (p.329) 

6. 출판사 편집부의 오역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어이없는 오탈자가 몇 군데 있다. 한 예로 지문 말미에 느닷없이 쌍따옴표가 등장하고(p.232, 13권 첫 줄), 반대로 대사가 끝나는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쌍따옴표가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7.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중과거에 대한 논란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으로 보인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인 만큼 변화하고 진화하는 유기적인 속성을 가진다. 잘 안 쓰거나, 사용하지 않거나, 낡은 언어는 이미 죽은 언어다. 중요한 건 이중과거든 영어식이든 일본식이든 우리말(=한글) 체계는 그것을 모두 수용할 수 있고, 또한 한글이기 때문에 '안 먹는다'도 '먹지 않는다'도, '먹었다'도 '먹었었다'도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이렇듯 우수하고 위대하고 최고로 멋진 문화 유산이다.

8. 평사리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1, 2부에 비해 3, 4부는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항일단체(혹은 항일운동가들),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고 암중모색하는 동학잔당, 서울에 모여든 신지식인 등이 전면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들이 둘 이상만 모이면 술상을 앞에 놓고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탁상공론식 설전(舌戰)을 늘어놓기 바쁘다는 것인데, 그들이 늘어놓는 장광설은 툭하면 길을 잃고 헤매는가 하면 중구난방에 결론도 없이 흐지부지 흩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도 장광설의 주인공이 (지문을 통해 설명되듯)스스로도 습관적으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일 뿐 생각은 다른 데 가 있거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회의를 느끼기까지 한다. 강조하지만 장광설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맥락도 없고 요체도 애매한 대동소이한 내용의 장광설이 거듭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 문제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겨운 법이다.
더 나쁜 것은 3부 중반쯤부터 나타나는 '다음 중 틀린 문장을 고르시오' 하면 답으로 고르기에 딱 안성맞춤인 요상한 문장 구조다.『토지』에 쏟아지는 문학적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비문들은 심심하면 등장하는 장광설만큼이나 독서를 피곤하게 한다.

9. 13권. 서울역에서 우연히 명희를 만난 조찬하가 명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집에 도착해서, 그리고 그의 방에서 잠들기 직전까지 무려 13페이지에 걸쳐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적 자의식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pp.176 - 188) 이 장면은 리얼리스트가 어떻게 신비주의와 동일한 개념이 되는지 논리의 비약을 보여준다. 

10. 16권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무라가미가 병문안을 온 오가다에게 하는 니체의 초인 관련 대사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pp.351-352, 16권) 작가가 지문을 통해 따로 언급하지 않으면 독자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작가의 목소리(=주장)겠거니 생각하기 마련이다.
대사에 등장하는 니체의 초인(超人)은 일본식 한자 조어의 예를 그대로 수용한 어휘인데 한자어를 그대로 풀이하여 받아 들였다가는 자칫 오류를 범하는 낭패를 피할 수 없다. 흔히 어휘는 개념의 집이라고 한다. 물론 ‘초인=超人=초월적 인간’이라는 어휘를 가지고 위버멘쉬 개념을 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겠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이런 부분은 작가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11. 소설속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 관하여.
토지와 민족자본을 수탈당하던 일제강점기의 그 어려웠다던 시절이 무색하게, 정작 평사리 사람들은 교육과 자산에서 성공을 이루고 거기에 신분의 상승까지 이루는 성공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대체적이었던' 것처럼 보여지는데, 이는 조정래가『태백산맥』『아리랑』등을 통해 농한기에 굶주리며 마름에게까지 수탈 당하고 핍박받는 농민과 고리대금의 덫에 빠져 각종 부역에 팔려가는 농민들을 통해 헐벗은 시대를 조명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특히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가 우리 민족 자본 수탈로 이어진 전형적인 한 예인 광산 열풍이 조준구의 몰락이라는 개인사에 머물고 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소설의 시작과 끝인 1897~1945년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시기를 배경으로 삼는 대하소설에서 작가의 짤막한 서술과 야무네와 석이네 정도를 제외하면 식민지 조국의 역사적, 시대적 고단함을 전달할 매개체=민중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12. 민족주의에 대한 작가의 시각(파시즘을 경계하는)이 재미있고 이범호, 강두매를 통해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명백히 드러내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13. (8의 장광설에 이어)얘기가 쌓여갈수록, 뒷 편으로 갈수록 중언부언하는 장면이 잦다. 특히 석이가 조준구의 모함으로 왜경에게 붙잡혀 가는 아버지(한조)의 신발을 손에 쥐고 쫓아가는 장면은 석이의 회상과 석이를 기억하는 혹은 석이와 마주친 평사리 사람들의 회상과 대사를 통해 여러 번 등장한다. 이 장면이 어린 한복이 함안의 외가에서 평사리로 돌아오던 장면과 함께 손에 꼽을 정도로 마음이 짠한 대목인 건 사실이지만(이 장면 역시 몇 차례 '언급'된다) 과유불급이라, 아무래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14. 마지막 21권은, 앞서 등장했던 장면들이 페이지를 통째 옮긴 듯 고스란히 다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동진이 만주로 떠나기 전 최치수를 찾는 장면, 조병수가 별당의 서희를 훔쳐보는 것을 발견하고 화를 내는 길상, 오가다와 외조카 시게루가 환국의 얘기를 나누는 장면, 오가다와 조찬하가 별장에서 제문식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 등이다. 이중에는 두 번 이상 등장하는 장면도 있다.

15. 600-700여 명에 달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토지』에서 나를 사로잡은 인물은 단연 김 환 혹은 구천이다. 소설이나 드라마와 같은 픽션 속 인물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떼어 놓고 바라보게 되는 객관적인 거리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환은 그 거리를 단숨에 부수고 시시각각 지면 밖으로 튀어나와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더 할 수 없이 입체적이고 극적이며 복잡다단한 면모를 지닌 환은 아마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가장 뜨겁고, 가장 메마르고, 내면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인물일 것이 틀림없다. 환이 내뿜는 생생한 생명력은 그에게 동시성까지 느끼게 한다. 이야기 속에 머무는 인물이 갖는 구체성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생각하게 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환의 죽음이 등장하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미리 알고 있었던 그래서 읽는 동안 내내 그 순간이 언제 올까 두려워했던 그 장면은 막상 더 없이 담백한 작가의 한 줄로 정리되었다. 마흔 줄에 들어선 강쇠가 어린아이처럼 “으흐흐흣-” 울음을 터뜨릴 때는 나도 함께 울고 싶었다.
불륜과 패륜 그리고 동학의 후예로서 자신에게 남겨진 사명과 소명 그 모든 업보를 짊어지고도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남자는 비록 소설이라도 흔치 않다.

16.『토지』전반에 걸쳐 가장 아쉬운 인물은 김길상이다. 조준구로부터 평사리의 토지와 집을 되찾은 서희가 용정에서 평사리, 정확하게는 진주로 돌아온 뒤 용정에 혼자 남은 길상의 행보가 영 오리무중이다. 계명회 모임이 화근이 되어 진주로 압송된 뒤 2년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뒤에도 마찬가지. 등장하는 분량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라 서희와 혼인 이후 길상이라는 인물 자체가 본연의 힘과 빛을 현저하게 잃은 느낌이다. 특히 2부 마지막에서 용정에서 서희와 헤어진 후 3부에 들어서면서부터 길상이라는 인물이 소설 속에서 차지하는 역학적 위치는 급속도로 힘이 빠져 버렸다.

17.『토지』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요인물 중 여성의 경우 사랑 혹은 애정과 관련되었을 때 일정한 전형성을 보인다. (공통점이 아니다) 
『토지』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들, 그 중에서도 윤 씨 부인 - 최서희 - 임명희 - 유인실 - 이양현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 중 가장 매력이 떨어지는 인물은 역시 양현이다. 윤 씨 부인과 서희는 가문에 집착하는 의지적 인물로, 명희는 가부장주의와 신문물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여성으로, 인실은 사회주의에 경도된 독립운동가로 각자 정체성의 뿌리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안팎과 부단히 싸우는 반면 양현은 자신의 뿌리를 지키려는 자존심 강한 여성도 아닌, 그렇다고 시대의 불행을 고민하는 신념을 가진 여성도 아닌 말하자면 관상용 꽃에 가까운 인물이다. 예쁜 꽃받침 위에서 사랑받는 조화보다 하수구 옆에 핀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이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다.

18. 땅을 목숨처럼 알고 땅과 더불어 사는 민중은 잡초마냥 강하다. 그러나 그 자식들, 소위 신식물을 먹고 사상과 신분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진 다음 세대에 이르면 그들 부모가 보여주었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 대신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무기력하고 패배주의적이며 현실도피적인 모습을 보인다.  

19. 대하소설『토지』를 이끄는 힘은 민족 정기의 고양을 부르짖는 혁명가, 식자들이 펼치는 그들만의 논리·사상·주의·고민 같은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의 터전를 꿋꿋이 지켜내며 민족적 정취를 유감없이 뿜어내는 평사리의 농민들에게 있다. 그런 점에서 스토리텔링이 강한 1, 2부에 비해 3, 4, 5부가 겉도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야기를 지탱하는 인물들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싶다. 1부 혹은 2부에서 끝을 맺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3부에서라도. 3, 4,(5)부가 구성상 앞선 이야기의 연속성을 잇기 위해 혹은 완성하기 위해 과연 불가결한 전개였는가 의문이 든다.

20. 작가와 독자, 출판사가 모두 동시대를 살면서도 그래서 완간 이후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책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오자(誤字)는 물론 문법적 문장구조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3부 중반을 넘어 4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작가가 어지간히 글을 쓰기 싫었나, 생각이 들만큼 뭉텅뭉텅 아무렇게나 잘려나간 문장의 어미, 오자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마침표와 쉼표를 아무렇게나 혼용한 것, 지문이 충분하지 못하여 화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대사, 기본 문법을 아무 이유 없이 무시한 문장들, 색인이 귀찮을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호응이 엉망인 문장, (심지어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회상 장면의 잦은 반복, 작가의 역사적 현실 인식을 읽어내기에 여러모로 부족하게 느껴지는 시대 구현에 이르기까지 아직 남은 과제가 많아 보인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을 덮고 책을 책장에 꽂은 뒤 가장 많이 든 생각은『토지』의 문학적 성취가 아니라 우리나라 문단과 문인들이 그와 그의 소설에 얼마나 많은 짐을 지우고 있는 것인가, 하는 거였다. 

분량 때문에 대하소설 읽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꽤 있다. 사실 첫 권을 잡는 것이 어렵지, 근데 이건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다, 막상 시작하면 의외로 마지막 권까지 한 호흡으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이 또한 대하소설이다. 대하소설의 특성상 긴 흐름을 유지하는 요소들 즉 인물은 인물로, 사건은 사건으로 이어지는 극의 연속성이 독서를 지탱해주기 때문인데, 더군다나『토지』는 공중파에서 여러 차례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탓에 드라마를 봤든 안 봤든, 소설을 읽었든 안 읽었든 대중들에게 서희·길상은 한 번쯤 들어 본 낯익은 이름이 되었고, 어린 계집아이 서희의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테야!”는 어느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이 눈을 부릅뜨고 읊조리던 “부셔버릴 거야!” 만큼이나 유명한 대사다.

모든 소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소설은 ‘소설을 읽는 관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느끼는 재미와 감동의 영역이 달라진다. 때문에 한 권의 소설을 누구는 연애소설로, 누구는 역사소설로, 또 누구는 사회고발소설로 읽기도 한다. 대하소설『토지』역시 수없이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또 그 인물들의 수만큼 많은 이야기가 펼쳐지므로 읽는 관점이 다양하다.
막대한 재산을 두고 벌이는 친인척간의 암투. 빼앗긴 토지를 되찾으려는 집념 강한 한 여성의 일대기. 일제강점기 찢어진 산하에서 버티고 살아 남는 민족혼. 만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항일투사들과 민족의 산하에 남아 민족의 정기를 지키려는 동학 잔당들. 일제 강점기 친일파와 민중들 사이에 벌어지는 민족적 갈등. 그 외 기타 등등... 

이렇듯 한 권의 소설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겠으나 내가 읽은『토지』의 이야기의 근간은 독립 운동도 아니요 동학 운동도 아니요 그렇다고 민중의 이야기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게『토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연애사건’이라고 하겠다.『토지』는 숱한 인물들이 벌이는 연애사건을 빼고는 얘기가 안 되는 소설이다. 

언젠가 인터넷에 떠돌았던 우스개 소리처럼 그들은 동학운동을 하면서 사랑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랑을 하고, 신지식과 아나키즘을 부르짖으며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면서도 사랑을 한다. 평사리에서도 사랑을 하고, 진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용정 만주 상하이 일본에서도 사랑을 한다. 특이한 것은 주요인물로 범위를 좁혔을 때 정상적인 사랑을 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다 보니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불륜은 예사고 때로 패륜도 등장한다. 연애사건의 백미인 삼각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그냥 ‘Love’도 아닌 ‘Love affair’다. 이건 박경리 작가의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왜곡된 사랑’의 형태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점 때문에 소설『토지』의 통속성이 유난히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 통속성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의미 그대로 통속적이라는 뜻이다.

연애사건의 주인공들 외관이 평범해서야 아니 될 말이다. 그랬다간 이야기의 재미와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터, 당연히『토지』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귀골의 선남선녀다. 그중 연애소설의 통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들이 이양현과 송영광인데 이 두 사람은 단연 돋보이는 아름다운 얼굴과 예민한 감성, 그것에 어울리는 상처를 지닌 인물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정체성은 각자 양어머니 최서희, 아버지 송관수에 기대고 있어 막상 그들 본연으로는 이야기를 끌고 가거나 지배할 힘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즉 그들 자체로는 존재감도 없고 매력도 없다는 얘기인데, 그들의 아픔, 상처, 방황, 사랑에 썩 공감하거나 연민을 느끼기가 힘드니 그들에게는 안 된 일이다.

『토지』에는 환(구천)과 별당 아씨, 용과 월선, 서희와 길상-상현, 상현과 명희-기화(봉순), 인실과 오가다, 양현과 영광은 물론 오송과 선혜, 인옥과 상길, 몽치와 모화에 이르기까지 따로 떼어내도 한 편의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 많다. 이들 중 인옥과 상길은, 물론 둘 다 큰 상처를 극복한 후이긴 하지만 등장인물들 중 드물게 슬며시 웃음이 나게 했던 귀여운 중년 커플이어서 기억에 남고, 이야기가 좀 더 있었으면 싶었던 이들은 몽치(박재수)-모화였다. 양현과 영광처럼 아름다운 외모도 아닌, 뛰어난 예술적 감성을 가진 것도 아닌 하물며 등장하는 장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아름답고 청초한 수선화 같은 양현과 영광에게 질릴 즈음 등장한 이들은 토지 후반부를 읽는 동안 내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이 두 사람에 관해 잠깐 부연하면, 모화는 첫 결혼 실패 후 아들과 노모를 데리고 통영의 뱃사람을 상대로 술 장사를 하는 강인한 심지를 가진 여성이다. 결혼 전력, 딸린 식구 거기에 나이마저 연상인 자신의 주제로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몽치의 청혼을 뿌리치는 모화와 그런 모화에게 사정하고 화내고 빌다가 나중에는 두들겨 팬 끝에 ‘혼인은 안 하지만 동거는 하겠다’는 대답을 받아내는 몽치. 결국 소원하던 합가를 이룬 뒤 몽치는 장가들었다 하고, 모화는 같이 산다고 하니 일견 김유정 식 해학을 느끼게 한다. 한편 몽치는 환의 죽음 이후 근근히 명맥을 잇는 동학 모임에서는 또다른 일면을 드러내는데 어린 나이에 깊은 산중에서 죽은 아비의 곁에서 밤을 지샌 이력이 있는 몽치는 동물적인 직관을 지닌 인물로 얼핏 환을 잇는 면모가 보인다. 

내게『토지』세트를 선물한 이는 M군이다. 평균 하루 한 권 꼴로 읽은『토지』는 책을 읽는 이십여일 동안 1부 2부 3부 4부 그리고 5부로 진행될수록 그것과 비례해서 M군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횟수도 늘어갔다. 내가 혼자 롤러코스터처럼 떠드는 동안 비록 대꾸는 없었지만, 가끔 짜증도 냈지만, 어쨌든 묵묵히 그 많은 불평을 들어준 M군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누군가에게 쏟아내지 못했더라면 독서가 훨씬 지루해지고 편협해졌을 것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M군이 어릴 때 읽었다는 임어당(=린위탕)의『북경호일』얘기를 해 준 적이 있는데 그때 인상적인 얘기를 했다. 어린 나이에도『북경호일』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과연 이들이 행복했을까, 했다는 것이다. M군이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주인공들을 괴롭히던 시대가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라고 했다.『토지』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은 그후 행복했을까...

해방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는 평사리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듣는 서희의 모습에서 끝나는 이 긴 이야기는 그러나 그대로 조정래의『태백산맥』의 시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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