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철학자 - 키르케고르 평전
클레어 칼라일 지음, 임규정 옮김 / 사월의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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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고 사진도 여러 번 찍고 하는 동안에서 수없이 표지를 봤었다. 읽기 시작하려 책을 앞에 둔 시점에 눈에 들어온 「평전」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이미 의미를 알고 있는 단어를 검색해 봤다. <인물의 업적이나 활동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 전기문>이니 이 책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업적이나 활동에 대한 전기문이라는 이야기이다. 보통의 전기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가 된다. 「마음의 철학자는」 목차를 보니 독특하게도 거꾸로 흐르는 곳이 있었다. 이러한 형식으로 글을 적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읽어 나갔다.


레기나 올센과 약혼 한 키르케고르는 신학과의 졸업생으로 목사나 대학의 신학 교수 등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방식에 따라 측정되고 판단되는 것들에 자신에게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궁금해했으며 결혼생활에 대해 두려워했다.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앞에는 남편이 아닌 저술가의 삶이 놓여있음을 알게 된다. 약혼이 파기되는지 알고 있었다. 누구에 의한 것인지가 궁금했다. 이 파기된 약혼이 키르케고르의 삶과 저술활동, 사상 등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어떻게 해야 인간으로 존재하는가?』 문제에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무언가 심오하고 철학적인 이 질문에 키르케고르는 <개념들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실존의 영역들'을,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구분하는 것>이라 답한다. 개념을 구별? 실존의 영역? 존재의 다양한 방식?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라 몇 번을 반복하여 읽었다. 반복해서 읽으며 이해하려 한 이유는 책의 전반에 깔려 있는 키르케고르의 철학이나 사상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에게 기독교는 상반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가 출간 한 「기독교의 훈련」은 뮈스테르 감독에게 '이것은 신성을 불경스러운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평가를 받은 것을 두려워한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그는 기독교가 세속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루터의 연설문들을 연구하며 종교적 혁신과 후세의 기독교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일지에 기록한다.


키르케고르의 삶을 읽다 보니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뿌리가 깊이 내려 단단한 나무 같았다. 약혼자와 파혼을 하고 온전히 믿었던 종교가 변해가는 것을 참지 못해 논쟁을 하면서도 어떤 한 것이 옳은지 계속해서 자신을 들여다본다. 브뢰크너는 <'사나운 전투가' 얼마나 철저히 그의 친구의 삶을 찢어발기고 그의 에너지를 소진시켰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키르케고르는 여전히 "평소의 평정심과 쾌활함", 그리고 번득이는 유머감각을 보여주었다.>고 한 말이 키르케고르를 설명하기에 더 없이 적합한 것 같다.


그의 비판하던 생전 기독교에 의해 장사되는 것에 그의 조카인 헨릭은 매장 과정에서 <그가 온 힘을 다해서 격렬하게 항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공식적 교화'에 의해서 사랑받는 한 구성원으로 매장되고 있다니, 이것이 그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입니까?>라고 외친다. 키르케고르는 죽음 이후에도 논쟁을 불러왔다.


키르케고르가 외치는 마음이 하는 소리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은 「마음의 철학자」는 현대를 살아가며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굴복하지도 않으면서 불안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키르케고르의 독특한 매력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다.>라는 뉴욕타임스의 추천사가 공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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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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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재독 리스트 1위는 「펄 벅의 대지」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 몇 년에 한 번씩 재독을 하였다. 「모비 딕」을 읽고 난 지금 재독 1위는 바뀌었다. 「모비 딕」을 받고 차례를 보고 든 생각은 한 1-2일 많으면 3-4일이면 다 읽지 않을까였다. 읽을 서평 책들도 좀 있었고 하여 서평 마감 며칠 전에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먼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매일 책을 읽었다. 자기 전 마지막과 일어나 처음 읽는 독서대에는 「모비 딕」이 있었다. 그러나 남은 책장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44장 해도에서의 에이해브의 모습에 결국 모비 딕이 잡혀서 이슈메일이 풀어놓은 고래의 해체 과정을 겪는다 생각하니 마지막 장에 도달하기가 싫었는지 아니면 에이해브의 '흰 고래'에 집착과 광기, 집념을 더 보고 싶었을까? 무엇이 모비 딕을 오랫동안 떠나보내기 싫어하게 했을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모비 딕이 화제의 중심이 되었을 때 서평단에 <현대지성의 모비 딕이> 올라왔다. 향유고래와 그를 잡으려는 선장의 이야기라는 것 이외의 알지 못하고 읽게 된 책은 왜 아라비안의 로렌스가 장엄함 정신을 보여주는 거대한 책만 두는 서가에 「모비 딕」을 꽂아두었는지 알게 되었다. 모비딕 안에는 성경, 철학, 신화, 심리 등이 인용되기도 저자 나름의 해석으로 담겨 있기도 하였다.


작품 해체를 제외하고도 691쪽의 방대한 책에 담긴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조금 막막한 느낌이다. 작품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흑백의 목판화가 만약 컬러였다면 모비 딕은 어떻게 읽혔을까 떠올려 보았지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삽화는 흔들린 램프 아래에서 해도를 보는 에이해브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해도에 몰두하는 동안, 그의 머리 위 쇠사슬에 매달린 육중 안 백랍 등불이 배의 요동에 맞추어 끊임없이 흔들리며 주름진 선장의 이마에 흐릿한 빛과 그림자를 번갈아 가며 던졌다」를 읽으며 본 에이해브의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장면이 선원들에서 항해의 진짜 목적을 밝힌 직 후라 더 깊이 각인된듯하다.


흰고래를 보았소?

보았소. 바로 어제. 혹시 표류하는 보트를 보았소?

 - 중략 -

그 고래는 어디 있었소? 안 죽였지. 안 죽였어!

그놈의 상태는 어떠했소?

모비딕 P636


피쿼드호가 레이철호를 만남을 때 에이해브는 아들이 탄 보트를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선장의 청을 거절한다. 자신의 다리 한쪽을 사라지게 하였다고 보이기에는 '흰 고래'에 대한 집착이 비이상적이다. 무엇이 에이해브를 사로잡은 것일까? 너무 높은 자존심? 잡지 못한 고래에 대한 미련? 사라진 다리로 인해 평생을 해온 고래잡이를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에 대한 분노? 에이해브는 왜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모든 선원들의 목숨을 걸 만큼 '모비 딕'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지난 온 항해 일정을 보면 분명 '흰 고래'를 잡는 것에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선원들이 에이해브를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허먼 멜빌은 이 예측할 수 없고 파란만장한 고래잡이 여정안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어떤 질문에는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고 몇몇 질문은 답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하기에 '모비 딕'은 여전히 읽는 중 책들 꽂혀있는 책꽂이 한편을 오랜 시간 차지 하고 있을 것이다.


우연히 여관에서 마주한 야만인 퀴케그와 이슈메일의 진정한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피쿼드호에는 백인, 흑인, 야만인 등 다양한 인종과 각기 다른 종교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인디언 타슈테고가 고래기름통으로 가라앉을 때 다구가 그를 구해준다. 이렇듯 서로가 협력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배 안의 생활 모습은 당시의 인종에 대한 차별과 종교등 편협한 시각에 전하는 메시지이다.


에필로그의 '구명부표'를 보자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특별한 표시를 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쳤던 한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몇 페이지를 되돌아가니 찾던 문장이 나왔다. 그 부분을 읽고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 눈치챈 독자가 있었을까? 너무 궁금하다.


『모비 딕』은 언제가 꼭 한 번은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단 후루룩 급하게 보다는 느긋하게 천천히 1장부터 135장, 에필로그와 작품 해체를 지나 작가 연보에까지 글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읽어보길 추천한다. 가끔은 읽다 멈추고 글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도 하고 복잡한 고래의 해제 작업이나 머리, 뇌경유, 꼬리, 향유 기름에 대한 설명을 꼼꼼히 읽어보며 에이해브와 그의 선원들의 항해를 함께 하다 보면 깊은 바닷속에 숨겨져 있는 나만의 '흰 고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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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2 - 제 꿈 꾸세요
김멜라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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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멜라 작가」는 2022년 13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으로 만났었다. 「저녁놀」도 독특하지만 따뜻한 느낌이 든다 생각했는데 「제 꿈을 꾸세요」도 그러했다. 저녁놀의 작가노트의 <웃게 해 줄 수 있다면의 연장 선상에서 떠난 이와 남은 이가 만나 좋은 꿈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로 이어진다.


'메기의 추억'을 배울 때 친구들과 함께 메기?라고 하면 쿡쿡 웃었던 기억이 있다. '오 수재너'는 순간 무슨 노래였지 하며 멈칫했다. 분명 배웠을 노래이지만 기억에 없는 노래였다. 책을 읽는 내내 메기의 추억의 가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챔바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죽음, 그중에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어둡지 않고 통통 튀는 밝고 경쾌함이 드는 것은 챔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상상력으로 다른 사람의 꿈으로 갈 수 있다. 혼자 죽어 언제 발견될지 모르는 자신을 발견해달라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규희, 세모와의 꿈으로 가려 하며 여러 추억들을 떠올리다 결국 그들에게 가지 못한다.


'나'는 꿈으로 찾아갈 이를 결정했다. 챔바는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다른 세계에서 '깨어나' 꼭 찾아가고픈 이의 곁으로 '나'를 데려가 준다. '길손'과 비슷하게 아파한 이가 '가이드'가 되어 꿈을 찾아가는 길을 안내한다. 저자는 이 소설이 그들이 건네는 인사라 한다. 누가 누구에게 건네는 인사를 말하는 것일까? '챔버'가 '나'에게 건네는 인사?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 누구에게 하던 <좋은 꿈 꾸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다. 오늘 밤에는 자기 전에 「제 꿈꾸세요」하고 인사해 봐야겠다.


다른 우수작품상들도 모두 각가 나름의 색깔에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김지연 작가의 『포기』는 만약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했다. 그리고 미루는 것에 대한 후회를 자주 하는 입장에서 아! 음... 슬그머니 책이 멀어졌다.


백수린 작가의 『아주 환한 날』은 <2022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도 실린 것을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다. 어떤 글이기에 두 문학상에서 우수상을 받았을까 궁금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된 고양이와 지금도 매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나로서는 너무나 공감이 되는 글이었다. 고양이를 무서워했었던 나와 동물은 좋아하지만 키운 것에는 무척 반대했던 남편, 고양이를 데려오는 것에 혼자 반대했던 작은아들 모두 지금의 모습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라는 작가의 문장이 너무나 이해가 되었다. 그 이후의 문장 또한...


<사랑>은 사람들을 비이상적이게 하기도 한다. 머리로는 「안돼! 」라고 소리치지만 마음은 전혀 반대 방향으로 가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한다. 위수정 작가의 『아무도』의 '희진'의 상황이 지금 딱 이러하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희진의 손에 났지만 수형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났으리라. 그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현실은 언젠가는 깨어나야 할 꿈처럼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숲 속의 잠자는 공주는 어떻게 100년이나 잠들어 있었을까? 하는 삼천포로 빠진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주혜 작가의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는 <대어를 낚았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이 인상 깊었다. <무엇이 자꾸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까? 우릴 자꾸 고립시키고, 왜 저러고 사나 싶게 만들고, 경멸하기 좋은 얼굴로 변모시키고, 끊임없는 자기 증명의 압박을 가하는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라는 글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의 고민이 아닐까 한다.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이 더 크고 세게 부닥치게 하며 큰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리라. 맑게 개인 파주에서 즐거웠던 모임의 결과는 흐림이 아닌 천둥번개가 되었다. 과연 햇볕이 드는 맑은 날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지난밤 내 꿈에』를 읽고 나서 문득 몇 해전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친정이 없었다. 아버지와 결혼 후 고향인 부산을 떠나온 후 연락이 끊어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너무 어릴 때라 가물거리지만 유치원에 다니던 나와 2살 터울인 큰동생과 외갓집에서 하룻밤을 잔 기억이 있다. 예전 주소로 찾아가니 이사를 하여 물어물어 찾아갔었다. 무엇이 그리 그리웠을까? 지금 느끼는 이 그리움과 같을까? 궁금해졌다.


만약 매달 500만 원 여의 돈이 매달 생긴다면 무엇을 할까? 저축부터 할 것이다. 노후대비를 위해서. 그러나 몇십 년 전이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선택을 했을까?


단편집은 한 호흡에 책을 읽기 좋다. 그러면서 장편 못지않은 다양한 의미들을 전달한다. 짧은 글안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을 어려운 일이다. 한 해 최고의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가에서 수여되는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은 엄격한 심사로 유명하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22는 지금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작가와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작품의 내용을 더 깊이 알고 싶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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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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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그믐, 즉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세 명의 노인은 자살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만난다. 세 노인들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전혀 모르던 타인들이 어느새 자신의 삶에 스며들었음을 깨닫는다. 책을 읽어나가며 주의를 기울인 것은 이야기의 시점이 자주 바뀌어 서로가 어떤 연결점을 가지는지 찾아가며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아들, 딸, 손녀, 손자, 알고 있던 지인 등 많은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노인들이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간단히 장례식만 치르고 더 이상 만남이나 연락이 없었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의 만남이나 연락의 연결고리의 시작은 누구였을까? 모두에게 활발하게 다가간 하즈키였을까, 송별회를 열자며 가족들을 모으려 한 준이치였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며 읽어나가다 문득 누군가와 계속 소통이 이어졌다는 것은 한쪽만 일방적인 경우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하즈키의 메일에 로코가 답장을 하지 않았다면, 준이치가 건넨 사탕을 미도리가 받지 않았다면, 도우코가 보낸 라인 메시지에 유우키가 대답하지 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즈키와 로코가 서로 메일을 주고받는 이야기도 글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기에 의미가 큰 부분이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미도리가 준이치를 찾아간 장면이었다. 아버지 간지 씨의 죽음에 슬퍼 시시때때로 울음을 터뜨려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약까지 먹는 미도리가 왜 준이치를 찾아갔을까? 그녀의 울음을 멈추게 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책을 모두 다 읽고 다시 그 부분을 읽어도 모두 납득을 못하였다. 마치 이 책이 내어 놓은 숙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몇 번의 재독을 다시 할 것 같다.


"나는 이미 끝났으니까" P152


이곳엔 이제 하나도 없어. P153


그때는 이미 죽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P155-156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중


세 노인은 각자 나름의 이유로 죽음을 선택했다. 허나 그 이유 하나하나에 반박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변인들 중 누군가의 죽음을 볼 때, 드라마, 영화 등에서 죽음이 등장할 때나, 뉴스의 사건사고 등으로 너무나 쉽게 죽음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은 한 번쯤은 죽음을 생각해 볼 것이다. 태어남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과연 이것을 선택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을까라는 윤리적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남겨진 이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이미 떠난 이들은 대답할 수 없기에. 그럼에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정말 마지막 선택이 이것밖에 없는지 한 번쯤은 되돌아봤으면 한다. 삶은 혼자서 인생의 비를 맞으며 종이우산을 쓰고 가는 것이다. 맞다보면 찢어진 곳으로 들이치는 비에 맞아 아프다. 그러나 그 고통을 혼자서 참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한다. 종이 우산을 쓰고 있는 또 다른 이가 옆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서로가 기억하는 간지 씨, 츠토무 씨, 치사코 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메일을 주고받으며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써 아버지를, 할아버지를, 할머니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아가며 그들의 선택을 이해해가는 모습들을 보며 조금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세 노인이 그렇게 떠나기 전에 알았더라면 그들의 선택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맞다고 우겨보고 싶어졌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마자 핸드폰을 들고 친정아버지와, 시부모님들께 차례로 전화를 드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라는 궁색한 핑계를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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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 후에 죽는다
사카키바야시 메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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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라는 독특한 소재의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15초 후에 죽는다」는 내용도 신선했다. 15초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어떤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책을 열었다.


이런, 아직 15초가 남았네요.

15초 후에 죽는다 p18


표제작 「15초」는 구성이 재미있었다. 자신이 15초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 시간을 어떻게 할까 고민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타임 스톱이 가능하여 시간을 잠시 멈출 수 있다는 설정이 추가되어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 해도 죽음을 앞두고 제대로 무언가를 떠올린다는 것만으로 힘든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범인에 대한 단서를 남기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실행하기에는 15초는 너무나 짧아 보인다. 글의 마지막 반전이 놀라웠다. 추리소설을 꽤 좋아해서 대부분의 책은 읽으며 웬만한 추리는 가능해 범인을 찾거나 숨겨진 복선은 자주 찾아낸다. 하지만 15초에서는 마지막까지 작가가 의도한 결말을 예측할 수 없었다. 다 읽고 다시 처음부터 읽으니 글 곳곳에 복선들이 숨겨져 있었다. 자신을 죽인 범인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싶어서 일까? 끝에 가서야 밝혀지는 저자의 숨겨진 의도를 알고 나니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만약 처음 생각했던 의도대로 복수를 위해서라면 최고의 복수가 아닐까 한다.


「이다음 충격적인 결말이」는 제목에 결말? 너무 궁금한데 마지막부터 볼까라는 유혹이 유독 많았던 단편이었다. 가끔 책이 너무 안 읽히거나 너무 흥미로워서 결말이 궁금할 때 마지막부터 볼 때도 있다. 너무 큰 유혹이었지만 처음부터 차근히 읽었다. 타임워프라는 소재는 닥터 스트레인지나 닥터 후를 통해 접한 내용이라 소재가 신선하지 않다 생각했다. 하지만 쌍방향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TV라는 소재와 결합이 되자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시리즈 드라마의 마지막 결말 15초를 알고 싶어 되짚어가는 과정에 작가가 교묘히 숨겨놓은 복선들이 연결될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왜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예 작가가 일본 추리소설계를 놀라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잠을 못 자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자려 누어서 2-3시간은 뒤척여야 잠이 든다. 양도 세어보고 숫자도 세어보고 따뜻한 우유도 마셔보고 하지만 쉽지 않다. 두 번째 단편의 소재가 타임워프였다면 세 번째 단편 「불면증」은 타임 루프이다. 어떤 기점으로 같은 시간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몇 번 되풀이될 때까지 응?! 머지 하였다. 상황 파악이 된 것은 중반부쯤이었다. 4편의 단편 중 몰입감이 가장 높았다. 이야기에 집중해 보지 않으면 흐름을 놓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요우의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여운이 길게 남았다.


마지막 단편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는 우리의 머리 없는 살인 사건」은 분량이 가장 많은 단편이었다. 거의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였다. 머리를 뽑아내어도 죽지 않는다는 설정을 본 적이 있었나 떠올려보았으나 없었다. 작가는 글 초반에 모든 단서를 제공하였었다. 제시된 단 두 가지 단서만으로 사건은 해결될 수 있었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어라도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나면 과연 행복할까? 다른 모든 이들이 모른다고 하여도 자신은 알고 있다.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의 심리가 너무 궁금해지는 이야기였다.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엘러리 퀸의 소설 속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며 다잉 메시지를 남기는 부분을 읽다 생각한 소재라고 하였다. 추리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다잉 메시지를 볼 때면 정말 저러한 내용을 남길 시간이 있을까 의문만으로 끝나는 독자와 그것으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작가와의 차이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눈에 들어온 <다음에는 조금 더 어렵게 만들어 주지.>라는 문장이 저자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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