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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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19쪽

"그렇지만 너희들 뭔지 모르게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이렇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뭐 그런 분위기."-23쪽

수면이라는 것은 고양이 같은 것이다. 시험 전날처럼 부르지 않을 때는 잘도 찾아와서, 잠에서 깨어나면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으면 죽어도 오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하게 한다.-29쪽

"웃지 마. 소풍 도시락이라고 하면 당연히 비엔나 꼬치잖아."-48쪽

일상생활은 의외로 세세한 스케줄로 구분되어 있어 잡념이 끼어들지 않도록 되어 있다. 벨이 울리고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내린다. 이를 닦는다. 식사를 한다. 어느 거이나 익숙해져 버리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할 수 있다.
오히려 장시간 연속하여 사고를 계속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느끼게 되며, 일단 의문을 느끼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촘촘히 구분하여 다양한 의식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은 언제나 자주 바뀌어가며 쓸데없는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60쪽

"다카코는 겉보기는 무심해 보이지만, 알맹이는 의외로 순정파라니까."
"무심해 보인다기보다 반응이 늦은 거지. 신경전달이 둔해서 얼굴에 감정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아하하."
"이거 정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자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 좀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빌어먹을,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하는 식으로."-67쪽

지구는 둥글어서 그것을 누군가가 꼬옥 껴안고 있다.
수평선을 보면 언제나 그런 느낌이 든다.-83쪽

"오래된 마을로 그다지 크지 않고 산보할 수 있는 자연이 있는 곳이래."
불쑥 리카가 끼어들었다. 다카코와 치아키는 당황한다.
"뭐가?"
"독창적인 학문이 생겨나는 마을의 조건이."-93쪽

처음 가는 길인 경우 돌아올 때가 짧게 느껴지는 것은 뇌가 이미 익숙해져서 정보처리를 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13쪽

"... 마지막까지 다 읽었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어쨌든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뿔싸' 하는 말이었어."
"아뿔싸?"
"응. "아뿔싸, 타이밍이 늦었다.'야. 어째서 이 책을 좀더 옛날, 초등학교 때 읽지 않았을까 몹시 후회했어. 적어도 중학생 때에라도 읽었더라면. 10대의 첫머리에서 읽어두어야 했아. 그랬더라면 분명 이 책은 정말 소중한 책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뭔가가 되어주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분해서 견딜 수 없어졌어. 사촌형은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주었던 게 아니었어. 우리 남매의 나이며 흥미 대상을 생각해서, 그때에 어울리는 책을 골라주었던 거야. 사촌형이 책을 주었을 때 바로 읽었더라면, 사촌형이 골라준 차례대로 순순히 읽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만큼 분했던 일은 최근에 없었던 것 같아."-155쪽

뭐, 생각해 보면 매년 이랬던 것 같군. 행사 당일까지는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우물쭈물하지만, 막상 시작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마음에 남는 것은 기억의 웃물뿐. 끝난 후에야 겨우 여러 장면의 단편이 조금씩 기억의 정위치에 자리 잡아가며, 보행제 전체의 인상이 정해지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177쪽

까치발을 하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남자아이도 있지만, 언제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유이치의 그 이성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친구들과의 의미 없는 일상적 대화가 우울해졌을 때, 유이치의 생각 깊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거웠다.-220쪽

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 1미터 걷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 분 일 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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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한국문학대표작선집 14
채만식 지음 / 문학사상사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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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심이는 그런데, 우선 반지 한 개 얻어 가질 일이 좋아, 온갖 정신이 거기만 쏠려서, 제 부모한테 발설을 하지 말라는 신칙도 그저 건성으로 대답을 하다가, 윤직원 영감이 뒤를 내는 눈치니까는, 되레 제가 지천을 해준 것이고, 그런 것을 윤직원 영감은 지천이 되었건 코 묻은 밥이 되었건, 그런 체모는 잃은 지 오래고, 애인의 맹세를 믿고서 적이 안심을 했습니다. 자고로 노소없이 사랑하는 이의 말은 무엇이고 곧이가 들린다구요.-183쪽

연애에는 소위 퍼스트 임프레션이라는 게 제일이라고요. 과연 둘이 다 같이 첫인상이 만점이었습니다.-205쪽

찰거머리처럼 붙어 앉아서는 쫀드윽쫀득 졸라댑니다.-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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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경제학 - 30대를 위한 생존 경제학 강의
유병률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품절


1960~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에 대해 외국인들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던 것은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안 됐기 때문이겠죠. 천연자원이 풍부했던 것도 아니고, 인구가 많아 시장이 컸던 것도 아닙니다. 공장을 지을 돈도 없었거니와 있는 공장도 전쟁 때문에 파괴가 됐죠. 자본의 축적 정도가 형편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은 창업 1세대들의 기업가정신을 빼고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가난과 빈곤에서 벗어나 한번 잘 살아보자는 강한 성취 동기와 승부 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야성적이고 동물적인 충동과 본능 말입니다.-65쪽

경제학 개념인 모럴 해저드라는 안경을 쓰면 안 보이던 것도 보이고, 봤던 것도 달리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벌의 성장사가 그렇습니다. 대마불사는 전형적인 모럴 해저드입니다. 정권 차원의 몰아주기식 자원 집중이 이뤄졌지만 감시나 모니터링도 없었고, 실패에 대한 패널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할 수 있었던 것이죠. 바로 여기에 재벌 성장사의 또 다른 비밀이 있습니다. 이런 국가적 모럴 해저드는 역설적이게도 1970년대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을 가져왔고, 또 이런 모럴 해저드는 당연하게도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왔습니다. 우리의 영웅들이 만든 우리 역사의 일그러진 한 단면이 바로 외환위기입니다.-71쪽

기업을 알기 위해 족보까지 살펴봐야 한다니, 아마 우리나라 직장인들만 겪는 고통일 겁니다.-112쪽

소득 격차를 측정하는 지표 중에 지니계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0'에서 '1'까지의 값으로 표현하는데, '0'이면 완전 평등, 즉 국민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가진 경우입니다. '1'이면 국부를 한 사람이 다 거머쥐는 사회입니다.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의 정도가 심하다는 뜻이지요.-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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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품절


"인내심. 사람들을 참을성을 키워야 해. 아냐. 이것도 제외. 내가 인내심 과정을 개설해서 교육한다면 사람들은 불안해 할 거야. 게다가 이미 공무원들이 인내심을 가르치고 있는 걸."
.......
"사람들은 웃음이 필요해. 아냐, 아냐. 회계사들은 남을 웃길 줄 모르지. 내가 사람들을 웃기려 든다면 아주 형편없을 거야. 게다가 그건 이미 정치인들이 하고 있잖아."-37쪽

법적인 관점에서 T의 소비는 근로 시간이라든지 특정 용역의 제공 등 모든 형태의 계약 관계와 충돌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 이런 충돌은 그리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고속도로 제한속도가 120킬로미터인데 시간 당 200킬로미터로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도 생산되며, 국제환경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수치의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산업 활동도 혀용되지 않는가.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하는 줄 알면서 담배가 생산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니까 결과에 너무 치중하지 않은 채 일단 무슨 수를 써서든 판매부터 하고 보자는 식이다.-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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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구판절판


그처럼 완전한 평화 속에는 본래 슬픔이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17쪽

내 코는 새까매. 새까만 구두약을 칠해놓은 것처럼 윤기가 흐르지. 늘 축축하게 젖어 있고, 만져보면 차가워. 콧구멍은 정면을 향해 뻥 뚫려 있고, 돼지코처럼 벌렁거리지.
구멍 속을 길고 좁은데, 구멍은 밖을 향해 점점 넓게 벌어져서 세상의 온갖 냄새를 빨아들이기에 알맞아. 나팔처럼 생겼다고 알면 돼. 이 콧구멍이 위로 쳐들린 들창코는 좋지 않아. 들창코들은 머리를 숙이고 바삐 달릴 때 땅의 냄새를 정확히 맡기가 어려워. 달릴 때, 땅의 온갖 냄새를 빠르게 분별하지 못하면 길을 잃기 쉽지. 그래서 허우대는 다 같은 진돗개라도 들창코들은 바보 축에 들어.-45쪽

아이들은 언제나 한 아이가 웃으면 모든 아이들이 따라 웃는다. 다들 한꺼번에 웃어서 어느 아이가 맨 처음 웃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럴 때 교실은 별이 부서지는 것 같고, 개울물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내리는 것 같다.-119쪽

바다에서 돌아온 사내들은 드럼통 둘레에 모여서 불을 조이면서 라면을 먹었다. 그때 나무토막이 타는 불길의 냄새는 매캐했다. 나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의 냄새를 맡아본 적은 없었지만, 새벽 선착장에서 나무토막이 타는 불길의 냄새가 왠지 그 눈물의 냄새를 닮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71쪽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과 몸으로 겪은 일들이 오히려 꿈속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악돌이와 싸우던 일과 흰순이의 죽음이 그러했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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