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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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어찌보면 당돌해 보이는 저자의 주장이다. 사실 우리는 뼛속은커녕 자신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부유물질의 출생·사망체계하나 관리 못해 쩔쩔 매는 입장이다. 그런 우리에게 어쩌다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온몸의 구석, 이곳저곳에서 달콤한 낮잠을 자던 아드레날린들에게 비상령이 떨어진다. 비상! 비상! 잠에서 덜 깬 아드레날린들이 갈피를 못잡고 방방거릴 때 구석구석의 땀들이 탈옥을 시도하고 우리의 손과 머리는 애처롭게 덜덜 떨게 된다.

보통 글쓰기의 방법론에 관한 책들에 대한 불평들을 살펴보면 글쓰기에 대한 너무도 당연한 말들을 -나도 저런 말쯤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만의 특권물인양 떠들어 대느냐라는 불평어린 소리들을 자주 접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저자들은 왜 그렇게 새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글쓰기란 것은, 우리가 매일 문자를 머릿속에 집어넣어 갈아내고, 즙을 짜내어 말로 토해 놓듯이 우리의 삶에 너무나 일상화, 일반화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저 입으로만 편히 내뱉어 버리는 행위에는 온갖 칼로리를 쏟아부음에 아낌이 없지만 정작 그런 말들을 가꾸고, 주워담을 수 있는 글쓰기에는 1칼로리조차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 인색이 정작 신경을 쓰지않음에서 오는 무시의 인색인지 나홀로의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회피의 인색인지는 모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꾸준히 하셔야 해요'. '하루를 쉬는것은 1주일의 운동을 버리는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맞다 여기며 실천해야 할 사항들이라 믿는 운동에 관한 상식이다. 이런 사항들을 나탈리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통해 글쓰기도 마찬가지란 것에 -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어야 할 행위 - 대해 당연한 충고를 해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글쓰기란 운동과 같이 일상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행위가 아닌건 사실이다. 두렵고, 경외스럽고, 오직 나만 소외되어 있는 것 같은 그 미지의 공간. 그 미지의 공간 속에서 멀뚱멀뚱 서있는 나탈리는 외친다. '여긴 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여러분이 서있는 그곳 바로 여기란 말입니다!!' 그녀의 외침. 그리고 뒤따르는 일상이라는 곳을 증명해 보이는 사항들. 그 증명들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뚜렷이 보이는 만큼이나 비례적으로 실천하기 두려운 것들이다. 그런 두려움을 나탈리는 조금이나마 덜어내 주기 위해 자기를 믿으며 실천을 하라고 나직히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말해주기는 쉬워 보인다. 더구나 그것이 일반인에게는 실천하기 어렵고 두려워 보이는 것이기에, 이 책처럼 항상 전문적 위치에서 말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쉽게 말한다고 치부해 버린다. '그래 말하기는 쉽지. 하지만 믿지는 않아.'라며 쉽게, 쉽게 넘겨 버린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실천에 따르는 어려움을, 그리고 두려움을 이처럼 덜어내 주기위한 말하기는, 비록 그 이야기가 당연한 말만 나열되어 있더라도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 것만은 주지하고 싶다. 당연한 것. 그 당연한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고 그 당연한 것을 사람에 와닿게 하는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다소 잠언적인 성향이 배여있는 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잠언이 주는 모호함에 또 선(禪)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더욱 모호해 보이고,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세부적인 그런 것으로 이 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오는 작은 제안, 제시들을 조금이라도 따라 봤는가?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냥 팽! 하고 코웃음 흘리고 갈 터무니없어 보이는 사항도 따라보리라고 노력이라도 해보았는가?'란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자만의 몫일 것이다. 이 책의 제안, 제시에 일체의 협력도 없었던 이들은 이 책을 평할 자격이 없는 게다. 실력은 없을 망정 이 책이 안내하는 그곳의 문턱에 손이라도, 발끝이라도 대보려는 노력을 하는 분들에게는 이 책의 진미가 보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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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 상상을 초월하는 33인의 유쾌한 발상
김용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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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란 주제 자체가 추상적이어서 원고 청탁서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상상의 매력인 다양성과 신선함이 사라진다.' <상상>의 기획일지 중 한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생각의 끈을 잡아 끄는 것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상상의 매력인 다양성과 신선함이 사라진다.'이다. 바로 지금, '명확한 방향'과 '다양성'이라는 두가지 조건의 조율이 여기 이 <상상>에서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기획의도 또는 나아갈 방향점은 33인의 유쾌한 발상이란 구심점이었다. 그러기에 이 책을 접하는 사람의 의도 또한, 33인만의 기발한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의 이 의도는 앞서의 명확성과 다양성 사이의 아쉬운 조율 속에 조금은 무너지지 않았나 한다.

'인간이 잠을 자지 않는다면?', '이혼하는 사람들은 부조금을 반납하라', '전유성의 기발한 몇 가지 아이디어' 등등은 정말 유쾌한 발상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 네가 사랑하는 목성이 태양계 최대 행성이고, 1등성의 약...(중략).... 이렇게 분석하는 게 싫어. 유성이 흐를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간직하고 싶지. 지구 밖에서 얼음이나 작은 바위 덩어리가 날아와 지구 공기와의 마찰로 인해 뜨거워지면서 빛을 발하는 거, 바로 혜성의 조각이 유성이란 걸 기억하고 싶지 않아.' 처럼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공명을 울리려는 글도 다분히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을 제외한 몇몇의 글은 상상이란 체계가 던져줄 수 있는 발랄함이 사라진 무미건조한 문체로 지루한 맛을 던져 주었고, 또 몇몇의 글은 다양성에 너무 중점을 준 탓인지 상상을 하라고 했더니, 상상이 지니는 의미 - 포스트 지구화, 유토피화 등등 - 와 그것에 따르는 해석과 과제를 던져 주고 있었다.

물론 그런 글이 부실하다던지, 인정할 수 없는 빈약함을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니나, 책에서 강조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33인의 유쾌한 발상'이라는 문구와 비교했을 때는 뜨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이라는 책 속에 그런 글이 실려있음이 정말 상상을 초월하긴 했지만 그닥 유쾌하진 못한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다양성을 중시하려고 했다지만 어찌 이 정도의 조율도 하지 못했나 싶은 지경이다.

33명의 글 중 일부는 확실히 나의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유쾌하고 기발한 발상이었기에, 그 만큼 남의 상상을 즐기는 기쁨을 누릴수 있었다. 하지만 몇몇의 전체적 분위기와는 다른 논문적 글들이 그 유쾌한 기분의 연속에 찜찜함을 남겨버렸는데, 차라리 삭제 해버리는게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보기드문 기획 속에 대단한 기대감으로 접해본 그 결과물은, 당초의 의도마저 실망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나오는 것이었기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기획의도와 작가 사이에 조율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신경을 썼었더라면 참신한 걸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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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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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성석제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인간의 힘>과의 만남을 가져 보았다. 첫인상은 '과연 설레인다'였지만 막상 그와의 대면을 끝내고 남겨진 나의 기분의 여운은 실망의 화장터다.

성석제의 소설은 작가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인한 유머가 아주 독창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것일 게다. 나 역시 그런 독창적이고, 독특한 작가의 유머 앞에서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인간의 힘>은 순간순간에 지나치는 잠깐의 걸쭉한 유머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전체적 소설의 유머로는 개인적으로 실격이다.

<인간의 힘>은 역사소설의 형식을 띈다. 아니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자체가 어울리겠다. 무엇이 되었든 여기서 부수적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야기의 주 모태는 소설이 되어야 함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물론 <인간의 힘>도 부수적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주 모태는 '채동구'라는 역사적 인물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그려내는 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긴 하다. 그리고 그 형식속에 묻어나오는 재미도 뛰어나긴 하다.

하지만 이 <인간의 힘>은 70%의 소설과 30%의 역사적 사실이 균형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체계가 구성져 어디가 소설이고 어디가 역사인지 모르게 깨끗이 용접 되어 있는 것이 아닌, 지그재그 불안정하게 땜질 되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즉, 소설과 역사의 담을 허물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맛이 아니라, 각자의 색깔을 가지며, 고유의 영역을 목청껏 외치며 떡하니 독립해 있다는 말이다.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가 한창 진행나갈 무렵이면 작가는 꼭 '이 무렵, 정세는....'이라는 말로 단순 역사적 사실들을 요약하며 이야기의 흐름에 잠시 맥을 늦춘다. 재미가 있더라도 흥분적 긴장상태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늦춤의 미학이 잠시나마의 휴식을 줄 수 있어 바람직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늦춤 속에서, 작가는 그 시대에 관한 일반 역사 서적에 맞먹는 분량으로 -다소 과장하여 - 설명하고 있다. 아무리 이야이가 흥미롭고 그 진행에 매료되더라도 중간에 턱하니 10페이지 이상씩을 할애하는 단순적 역사서술은 보는 이를 짜증이 나게 한다. 그리고 한 번 나기 시작한 짜증은 제 아무리 특출한 이야기꾼이라 하더라도 가라앉게 하기는 힘든 법이다.

물론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그랬다 볼 수는 있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듣는 이야기보다는 어느정도의 배경을 갖추면 확실히 그 재미가 배가되는 것이니 - 하지만 역사'소설'인 만큼 최대한 간략히 그리고 그 윤곽만 대충잡아주고 넘어가며 소설의 흐름자체는 끊지 말아야 할 것을, 모든 사건 하나한, 정황 하나하나에 10페이지 이상씩을 할애한다는 것은 독자를 위한 역사'소설'이 아닌 지면을 채우기 위햔 '역사'소설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소설이 갖는 재미는 이야기가 끝나가는 종반까지 그 어디에도 내가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거나, 역사적 지식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그 주변의 정황속에 몰입하여 빠져들 수 있는 점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소설 중반중반에, '자 잠시 소설은 잊고, 역사적 정황으로 돌아본다면..'식으로 그 흐름을 완전히 두손 두발 놔버린다면 읽는 사람의 집중만 떨어뜨려 놓을 뿐이라 생각한다.

나 처럼 성석제란 작가의 타이틀 하나만을 믿고 덤벼들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성석제란 작가에게는 문단의 칭찬이 유달리 많이 나오고 관대한 정황속에서 잠시의 개인적 느낌이 전달 되었음 한다. 성석제란 타이틀 하나만으로, 주변의 평가하나만으로 달려들 그런 책은 글쎄, 아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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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
로이 H. 윌리엄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더난출판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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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 안주하여 지금에 만족하며 사는 것
- 나 자신을 돌아보고 본연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
이 두 명제 사이에 이는 끊임없는 갈등의 파장.

쉼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의 체계 속에서 톱니바퀴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가 과연 그 어지럽게 돌아가는 틀을 깨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잠시 쉼으로 주변의 매커니즘은 한없는 정체와 혼란을 겪을 것이고 그 혼란의 야기는 바로 나의 위치를 박탈당하는 결과로 치닫는 스피드시대에서 그 위치를 잠시 떠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에서 주인공은 흔히 지식층, 엘리트층이라 불리는 변호사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항상 손수건을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반딱이는 구두를 신고 언제나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아주 정신없이 바쁘지만 고급스럽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삶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지적이고 대단해 보이는 삶에서는 자신을 되돌아 볼 여유도 없어 보일뿐더러 굳이 그렇게 해야할 필요성조차도 실상은 찾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외면적으로는 완벽스러움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삶도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을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가 보여줌으로써 현실과 자신의 갈등 체계 속에 구심점을 제공해 주었다.

작품 속의 변호사의 모습은 무엇인가가 결여된 반쪽뿐인 자신이었다.-주인공과 비글에게 주어진 이름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반쪽뿐인 불완전한 자신이었기에 변호사는 역경이 닥치자 말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는데, 결국은 완벽해 보이는 삶일지라도 그 내면은 알맹이는 없는 위태로운 껍질일 뿐인 것을, 그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에 드러낼 외경심은 실상은 별게 아니란걸 그 모습에서 다시 한번 드러내 보여 주었다. 결국은 무엇인가?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 속의 여행은 실상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내면을 향한 여정이란 게다.

인생이란 자신을 알아가고 또 자신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한정된 여행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을 새로이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 인생의 궁극적 목표중의 하나란 것을,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던져 준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는 내면으로 향한 여정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채비를 갖춘 것이다. 그동안의 인생이란 한정된 여행 속에서 우리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사고를 지니고 있었는가?

진정한 자기 모습은 내버려둔 채, 근시안적인 만족만을, 근시안적인 적응만을 위해 한정된 여행의 시간을 소비하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변호사가 손수건을 사각형으로 접고, 구두를 닦고 정확히 시간을 지켰는지 안절부절 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역경 속에서 엉덩이가 까발려지고 구두가 더러워진 것을 보고 허탈해 하고 마는 변호사의 모습에서 그것이 인생 속에서 얼마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다. 근시안적인 모습을 모두 져버리고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노력은 힘들지라도 보상은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소중한 것이다.

일시적인 만족을 쫓을게 아닌 자신의 궁극적 의미가 숨쉬는, 그 도달점을 알아가는 것. 그 도달점이 바로 데스티나이였으며, 그 곳의 존재 의의가 우리는 왜 자신의 비글을 찾아 떠나야하는지에 대한 답안을 아스라이 들려준다. 자신의 비글을 찾아 떠나는 내면의 여행, 결국 본연의 나 자신을 찾는 것과 동의어인 그 인생의 통과의례적 시련.

이 책이 던져준 그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오직 읽는 이의 몫일 게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나름의 인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개개인의 가슴속에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가 지금을 반성하는 교훈이 될 것인지, 한낱 쓸모 없는 파지 묶음으로 전락해 버릴 것인지에 관한 물음. 결국 내면의 여행을 위한 첫걸음을 땔 것인가,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선택이 독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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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
신용구 지음 / 뜨인돌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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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박정희? 나라를 살린 위인이냐, 나라를 말아먹은 천인이냐? 박정희에 대한 글들은 무수히 많다. 조갑제씨와 같은 글들 - 그래서 박정희를 극도로 추켜세워 위인으로 만드는, 반면에 최상천씨와 같은 글들 - 그래서 박정희를 극도로 깎아 내리고 도저히 한국인이라 보기 힘들다는. 이렇게 아웅다웅 깎고 올리고 다시 세우고 하는 과정 속에는 좌파냐, 우파냐라는 정치적 색깔. 다시말해 이념적인 공격적, 방어적 색채가 강하게 묻어 나온다.
그리고 이런 두 갈래의 치열한 다툼이 이제껏 우리가 가장 흔히 접하는 책들이였기도 하다.

이런 극과 극의 책을 접하는 독자들은 자신의 이념적 색깔에 맞는 책에는 점수를 주고 그렇지 않은 책은 내팽겨쳐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피곤하다. 옥신각신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문체로 - 그 진위의 여부를 완전 떠나서 말이다. - 진행되는 글들을 읽고 있으면 독자는 자연스레 흥분하게 되고 머리는 피곤하게 된다. 이념적 색깔이 묻어나오지 않는 뭔가 편안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그런 박정희에 대한 책은 없을까라는 피곤함의 한탄, 슬며시 묻어 나올법도 하다.

2. 그래서
이 책이 그 피곤한 한탄에 대한 해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우파, 좌파란 이념적 색채에서 벗어난 정신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 전문의로서의 위치로 박정희를 보려고 한다. 재밌지 않을까? 박정희란 한 개인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분석이 아닌 철저히 개인심리를 바탕으로 분석을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끌리게 된 것이고 이제껏 사실 위주, 또는 작위적 해석위주의 책이 아닌 개인을 분해하는 흥미로운 서술에 끌리게 된 것이다.

3. 그리고
저자는 단순한 정신분석학자, 정신과 전문의가 아니다. 물론 직업적으로는 정신과 전문의라고는 하지만, 저자는 그런 직업과는 별개로 항상 역사란 분야에 관심을 두며, 그리고 연구에도 몰두해온 인물이다. 즉, 이 책은 절대 가볍지 않은, 개인의 단순한 흥밋거리는 아니란 소리겠다. 두서없이 한 개인을 이리 뜯고 저리 뜯은 것이 아닌,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해 놓았다는 말인 게다.

4. 하지만
정신, 심리학에 보통의 사람들은 거의 문외한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구강기 욕구, 오이디푸스적 거세불안 등등 어디선가 들어 대충은 알만한 -물론 뜻은 모르고 듣기만 해 본것도 있겠지만 - 용어가 나와 어렵지 않다는 장점이 있긴하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행위, 사소한 행위조차도 '이 행위는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해 볼 때 구강기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불안한 심리상태가 무의식적으로 축적되어....' 등등 따위로 분석을 풀어놓으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지나쳐 보이고 괜히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무슨 행위든지 심리학에서 무조건 해석 가능하고 또 그것이 맞다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는 심리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의 동의를 과연 100%로 얻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란 말이겠다. - 이 책 역시 박정희의 사소한 문제까지도 정신분석을 행하기 때문에 가끔 나의 짜증을 돋게 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참신했다. 박정희의 어린시절에서부터 성장기, 쿠데타, 10·26까지 모든 부분들을 정치적, 사회적 색채를 일체 배제하고 오로지 심리학으로만 분석했다는 것은 읽는 이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비록 가끔은 짜증이 날지라도-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정치적, 사회적 색채가 묻어나는 공격적인 문체의 박정희 글보다는 가끔, 어떻게 보면 부드럽기까지한, 그러면서도 결코 객관이라는 길을 벗어나지 않는 책이 그리워지지 않을까?

6. 덧붙여
정신분석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박정희의 정신을 심리학으로 풀어놓은 것이지만, 결코 어렵지는 않다. 가끔 다소 생소한 용어가 나오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쓰임은 쉽게, 쉽게 되어 있어 누구나 읽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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