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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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 늦가을을 제일로 / 숨겨놓은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살아도 살아갈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과일을 다 가져가고 / 비로소 그 다음 /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 혼자서 / 다 바라보는 / 저곳이 / 영리가 사는 곳 / 살아도 못 살아본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전문

 

시인은, 과일 떨어지고 난 빈 밭은 아직 제대로 된 늦가을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일 다 떨어진 다음에, 그 다음에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자잘한 잎사귀들마저 하나 둘 지기 시작하고 종내는 제일 마지막으로 남은 잎사귀마저 스러지는 것, 그게 진짜 늦가을이라고 한다. 시인에게 있어 빈 원두막은 그런 광경을 혼자서 오롯이 다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이고, 그래서 늦가을이라는 계절을 가장 진정으로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원두막은 '영리'가 사는 곳이다. 

시를 읽다가 아무래도 시인이 '영리'라는 시어를 일부러 (한자어로 쓰지 않고) 한글로 남겨놓아서 뜻을 모호하게 처리해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리'의 한자어를 찾아봤는데 웬걸, 날카로운 의혹이 무색하게도 그냥 '영리할 영'에 '영리할 리'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영리할 영'이라는 한자가 영리하다는 뜻과 함께 '지혜롭다,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여기다, 어여삐 여기다, 귀여워하다, 사랑하다'의 뜻도 있더라. 옛날엔 '가엾게 여길 줄 아는 것'이 '영리'한 거였구나. 아, 그렇구나.

 

늦가을 지나기 전에 빈 원두막에 가고 싶다. 단 하루라도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바라보고 나서 아주 조금은 영리해져 돌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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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론장의 구조 변동 - 미디어사상총서 1
손석춘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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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한국 근현대 언론의 전개 양상을,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공론화 요구의 내부적인 배제’와 ‘외부 정치 세력에 의한 공론장의 왜곡’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맞물려 갈등하는 형국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구조 속에서 ‘체제 안의 공론장’에 맞선 ‘민중 차원의 저항 공론장’이 억압과 분출의 변증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 확대되어 왔다고 분석한다. 이상이 5장까지의 내용이며, 내가 주의깊게 읽었던 부분은 하버마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6장이다.

6장에서 저자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구조 변동 이론’을 소개한다. 하버마스는 국가와 사회, 혹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특질을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생활세계’가 점차 합리화됨에 따라 ‘체계’ 역시 자체 내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분화하며 확장해 나간다. 그러나 ‘생활세계’가 합의 도출적 의사소통의 절차를 지향함에 비해, ‘체계’는 신속하고 일방적인 상명하달의 성격을 가지며, 이런 차이 때문에 체계가 점차 생활체계를 침투, 잠식해 들어간다. "목적 합리적 ‘체계의 논리’가 의사소통 절차를 거쳐 합의를 도출해내는 생활세계의 내적 구조를 침탈, 대체함으로써 생활세계의 고유한 특성과 상호이해의 통합적 구조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사회는 빈부격차 심화, 신중상주의정책으로 인한 국가 간섭, 매체의 상업화 등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공론장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공론장의 재봉건화).

이 책은 하버마스의 이론을 도입해 한국의 언론 지형을 분석하고 있지만, 하버마스에 대해 생소한 나로서는 하버마스 입문서나 다름 없었다. 논문을 윤색하여 출판한 글에 쉼없이 순우리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지며리, 밑절이, 시나브로, 허투루, 비금비금 등 문맥에서 떼어놓고 보면 여간 낯선 단어가 아니다. 저자가 소신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순우리말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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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눈물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5
전상국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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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체제에 반항하는 개인을 어떻게 응징하는가. 이 소설은 그러한 응징의 한 가지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정작 교활하고 포악한 쪽은 '기표'라는 반항아가 아니라, 김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권력 시스템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속 인물 '기표'는 정말로 하나의 '기표'에 불과한 셈이다. ‘기표’라는 개인이 보여주는 폭력성의 최대치는 기껏 상대에게 물리적인 상해를 입히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시스템이 행사하는 폭력은 소설의 경우에서처럼 한 개인의 사회적 입지 자체를 철저하게 해체시켜 버린다. 그것도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대단히 신사적인 방식으로.  

그러니 정말로 탐구해 보야야 할 대상은 제도권 안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개인이 아니라, 악행을 저지르는 개인을 생산해내는 총체적인 사회적 동력학 그 자체일 것이다. 그/그것들은 김 선생님처럼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차라리 무표정에 가까운 것이리라), 이면에는 자신의 유기적 신체를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개인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가차없이 처단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면역체계가 병원균을 처리하는 과정처럼 지극히 생리학적인 반응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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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체의 미학
베네데토 크로체 / 예전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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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로체의 견해에 따르면, 논리적 지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직관적이어야 한다. 즉, 모든 논리적 지식은 직관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은 김종흠의 <마술 과학 인문학>에 나오는 내용과 놀라우리만치 일맥상통한다. <마술 과학 인문학>에서는 모든 (논리적인) 과학적 지식이 ‘가설’이라는 (비논리적인) ‘직관’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마음은 미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논리적인 것으로 진행한다. 

2. 감각(인상, 느낌, 미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정서, 욕망, 감정 등 일체 포괄)이란 질료이다. 이 질료가 표현이라는 형식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직관이 이루어지게 된다. 직관은 이미지나 표상일 수 있으며 진정한 의미의 표상은 ‘표현’이다. 즉, 직관은 표현이다. 직관활동은 스스로가 표현하는 만큼의 직관을 가지고 있다. (직관을 결여하고 있는 표현(알맹이는 없고 스킬만 요란한 경우), 혹은 직관은 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표현(스킬이 부족한 경우) 모두 크로체는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다시말해 크로체의 견해로는, 꽃을 못 그리는 사람은 꽃을 모르는 거다. 꽃을 알면 잘 그릴 수 밖에 없다.)

3. 표현은 인상(감각)을 조탁하고 형태화 시킨다. 인상은 표현 속에서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인상이 아니다. (형식 안에 이미 그 내용이 조탁된 상태로 포섭되어 있으므로). 표현은 형식이며 인상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미적인 것’이란 ‘형식’을 말한다. 내용은 형식을 만나 실제로 변형되고 난 후에라야 미적인 내용이 되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아니다. 따라서 ‘미적인 것’, 즉 예술은 더 이상 감정의 세계나 심리적 질료가 아니라 형식이며 지식이다. (이론적 정신 중에 직관적 형식의 지식)

4. 예술가는 미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정열과 평온함 양자를 갖추어야 한다. 전자는 ‘미적인 것’의 질료인 ‘감각’을 풍부하게 확보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감각’을 세련되게 조탁하여 형식화시키기 위함이다. 즉, 정열은 최대한의 감수성, 즉 예술가가 자신의 심리적 기관 속에 흡수하는 풍부한 양의 질료이며, 평온함은 최대한의 냉정, 즉 감정과 정열의 혼란스러움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형식. 이 두 가지 요소를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예술가는 ‘미적인 것’을 완성할 수 있다.

5. 이론적 정신의 1단계인 직관적 형식의 궁극의 분야는 예술이고, 2단계인 지성적 형식의 궁극의 분야는 철학이다. 그럼 과학은 뭐냐. 과학은 직관적인 자료들로 구성된 인식의 집합일 뿐이다. 과학이 궁극의 경지로 승격되려면 자신의 영역을 떠나 철학에 편입되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역사는 뭐냐. 역사는 그 자신 속에 철학적(2단계적) 특징을 받아들이면서도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채로 남아있는 예술의 산물이다. 즉 1과 2의 짬뽕.     

6. <직관적 형태와 지성적 형태로 구성된> ‘이론적 정신’은 ‘실천적 정신’의 기초가 됨. 즉, 모든 앎은 행동을 위한 앎이다. 물론 이론적 정신이 과다한 햄릿유형의 인간이 있고 실천적 정신이 과다한 혁명가적 인간이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정신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이행됨. “인식적 활동이 선행하지 않는 한 결코 진정한 행위, 즉 의지된 행위가 될 수 없다.”

7.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 예술은 학문, 유용성, 도덕 등 모든 사회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러니까 비평가들이 설령 악마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대중과 소통이 전혀 안되고 기존의 이론을 초월하는 초특급 예술작품을 만나더라도 왜 이따위 것을 만들었냐고 그 예술품 존재 자체와 작가의 실천적 의지(내용적인 부분)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형식이 불완전한 것을 가지고 비난한다면 또 모를까. (그러나 예술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소산이고 또한 그것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지 않을까. 물론, 크로체의 말은 도덕적 잣대나 대중과의 소통능력의 결여 따위가 예술을 구속할 수는 없다는 의미인 듯하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거나 직관적 지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예술이라고 하는 걸 보면 크로체는 정말로 모더니즘 미학자인 것 같다.)  

8. 표현의 양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1단계에 해당하는 '표현'은 굉장히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양태'라는 보편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표현은 그 자체가 오리지날한 것. 그래서 수사학적 범주에 따라 표현들을 구분짓는다거나(ex. 이 표현은 사실적이네, 고전적이네, 장식적이네, 은유적이네 어쩌구) 이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번역한다거나 하는 일은 사실 엄밀히 따지면 무의미한 일이다. 특히나 수사학적 범주들은 학문이나 철학적 비평과 관련된 토론에서나 가치가 있을 뿐이지 문학과 예술 비평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9. 미적인 것은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것도 아니고 감각적인 쾌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미적인 것은 순수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순수의 미학) 단, 이때 미적인 것은 반드시 표현된 것만 미적이다. (2번과 같은 주장. 크로체는 예술의 본질을 표현으로 여김)  

10. 미적 개념이란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 맘대로 규정되는 것이다. 미적 개념은 지극히 자의적이다.   

11. 미적 생산의 과정 4단계는 다음과 같다: (1)인상 (2)표현 또는 정신적이며 미적인 종합(이 단계가 핵심) (3)쾌락주의적 부수물, 혹은 아름다운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미적 쾌) (4)미적 대상으로부터 물리적 현상(소리, 톤, 움직임, 선과 색의 조합 등등)으로의 변환. 미적 재생산도 얼마든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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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강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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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망과 고독, 죽음에의 관심, 허무와 염세, 한없는 우울에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간혹 파괴적이고 악랄한 광기가 엿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동양종교와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듯 현세를 초탈하고자 하는 열망과 영원성을 희구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에밀 시오랑은 끊임없이 파괴와 죽음과 절망과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그처럼 정열적인 사람도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허무에 대한 집착도 정열의 한 표현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에밀 시오랑! 그의 글에 대해 사실 내가 무슨 평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여지껏 이토록 정신병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산문을 보지 못했다. 평생토록 죽음을 갈구했으면서도 정작 자살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 정신적 발광의 극치를 보여준 사람. 내가 적는 모든 감상은 불필요한 사족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의 글이 내뿜는 마력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속수무책으로 베낄 뿐이었다. 공책에 옮겨적은 구절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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