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2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조중걸의 서양예술사 시리즈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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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 특유의 애써 꾸민 듯한 가식성을 유물론적 회의주의의 산물로 보는 견해가 신선하다. 그것은 실체에 닿지 못하는 인간, 이상의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끼는 인간이 스스로 인공적 세계를 꾸며낸 데서 기인하는 가식성이며, 그런 점에서 이 양식은 매너리즘 예술이나 현대예술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념과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것. 로코코 역시 신념이 결여되어가는 '붕괴의 시대'의 예술이며 여기서 오는 회의와 좌절에 대해 매너리즘이 불안으로 반응했다면 로코코는 자기인식적 현실도피로 향한 셈이라고. 로코코에 대해 은연중 갖고 있던 부정적 편견을 재고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낭만주의에 관한 분석도 심도 있다. 이 사조는 즉자적 자연관을 가지며, 보편에 반하는 개별성과 고유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상상과 직관과 감성에 의해 세계의 유기적인 종합을 지향한다는 것, 아울러 낭만주의는 견고하게 닫힌 체계인 고전주의에 비해 미확정과 변화와 확장 그리고 미지의 대상에 대한 신비감의 요소(숭고미로 일컬어지는)를 갖는 유연한 체계로서 근대국가의 실질적 정치경제 활동의 중추인 중산층의 이념을 반영하는 예술적 표현이라는 것.

미술양식에 대한 대응으로서 로코코에 흄을, 신고전주의에 볼테르와 로크를(경험론과 관념론의 이중기준을 갖는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에 루소를, 인상주의에 베르그송의 생철학을 놓고 비교하는 점, 신고전주의를 위장된 고전주의로 기실은 프로파간다 예술로 치부하면서 이 양식을 거시적으로는 낭만주의 이념의 전개 과정의 일부로 보는 것, 낭만주의-인상주의-표현주의를 일군의 흐름으로 묶어서 감성과 직관을 중시하는 반지성주의 계열로, 사실주의-후기인상주의-형식주의(문학적 양식으로는 사실주의-자연주의-상징주의-모더니즘)를 경험론 계열로 분류하는 점,

신고전주의 시대 이후로 예술이 인식론에서 독립하여 이념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며 보편을 닮기보다 주장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는 곧 예술의 경험론적 세계관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는 얘기, 사실주의가 경험비판론의 예술적 대응물로서 주제나 줄거리와 같은 '의미'보다 심리적 거리두기에 의한 '표현'에서 완벽성을 구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사실주의는 현대예술의 시초라는 평가, 또한 이 사조가 경주하는 시지각의 공정성이 사회의 계급적 위계를 해체함에 의해 의도치 않게 사회주의에 공헌하는 사조가 되었다는 통찰,

'해체'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조가 등장하는 근세 말에 이미 벌어진 일이고(전자는 논리•지성적 종합을 도모하는 신고전주의를 해체하고 후자는 감성•직관적 종합을 도모하는 낭만주의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현대는 '요청'의 시대이며 이 요청이야말로 현대의 이념이라는 것, 지성의 붕괴에 봉착하여 후기인상주의가 제시하는 두 가지 삶의 가능성으로서 표현주의와 형식주의를 언급하는 대목(전자는 반지성적이고 무의식적인 모종의 내적 심연에서 새로운 착륙의 토대를 찾고자 하는 것, 후자는 자기인식적 지성을 불러들여 가언적이고 인위적인 질서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세잔을 세우는 것 등등 곱씹어 봐야 할 지점들이 많다.

다만 이 책에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 한 군데 있어 배암발을 달아야 할 듯- 저자는 들뢰즈, 가타리, 데리다, 바타이유 등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도 큰 틀에서는 미술양식에 있어서의 표현주의와 같은 계열로 보면서 어찌되었든 지성은 문명 성립의 전제조건이기에 지성을 제거해버린 무정부주의적이고 반질서적인 혼수상태(!) 속에서는 애당초 문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표현주의자들의 이념은 무책임하고 유치하다고 일갈하는데, 자기 논리와 내적 일관성을 지니고 나름의 자기완결적 체계를 갖춘 모든 현대 철학 이론은 본질적으로는 형식주의로 봐야지 않을까.

어떤 철학 이론이 아무리 표현주의 성향을 보이고 자유분방하더라도 (심지어 논리철학자의 눈에는 끔찍한 혼수상태처럼 보일지라도) 그 또한 '가언적이고 인위적인 질서를 구축'하는 하나의 체계적인 사유라는 점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그 내용에 있어서 해체를 표방한들 존재론적으로는) 형식주의에 가깝지 않을까. 히피 철학이 펄럭이는 유령의 환영 같다면 영국 신사들의 철학은 도무지 유도리라곤 없는 고루하고 뻣뻣한 샌님 같고 결정적으로는 둘다 덤앤더머의 삽질이란 점에서 진배없어 보인다. 괴테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려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오로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고.



117쪽 밑에서 2번째 줄: 지기 --> 자기
165쪽 밑에서 2번째 줄: 신고주의 --> 신고전주의
378쪽 밑에서 6번째 줄: 그러나 --> 그러니
415쪽 3번째 줄: 나누는 보는 것 --> 나누어 보는 것
480쪽 밑에서 6번째 줄: 대상 일반을 찾아야 하면 --> 대상 일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483쪽 밑에서 1번째 줄: 가공적 세계와 실재를 대체 --> 가공적 세계가 실재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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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1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조중걸의 서양예술사 시리즈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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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주억이며 읽긴 했지만 몇 가지 의구심도 남는다. 이 책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 세계관의 변천이 철학적 통합 경향(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 실재론, 합리론 등의 관념론적 신념)과 해체 경향(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론, 유명론, 경험론 등의 유물론적 회의주의)의 진자 운동에 의한다는 전제 하에 각 시대정신의 반영으로서의 예술사를 조망하고 있는데, 이렇게 선제적으로 설정하는 프레임이 확고할수록 거기서 벗어나는 사례들은 쉽게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폄하되거나 아류 내지 부수물 정도로 간과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통시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어떤 기준으로든 선별과 배제가 불가피하다 할지라도- 이론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부득이 확증편향이나 무리한 꿰맞추기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은 아닌지.

흡사 밤하늘에 별자리를 그리듯 환하고 또렷한 맥락을 짚어낸다는 것이 이 책의 독보적인 안목과 장기임에는 틀림없겠으나 한편으로 이런 식의 환원주의적 접근은 분명 어떤 맹점과 한계를 노정하고 있을 것만 같다. 저자의 표현을 이 책에 다시 돌려주자면 이 또한 '횡포에 의해 얻어지는 기하학적 형상'(451)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상은 관점에 따라 전혀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가령 16세기를 르네상스로 17~18세기를 고전주의 시대로 19세기 칸트 등장 이후를 근대로 구분하고 각각을 서로 완전히 단절된 인식론적 지층으로 파악하는 푸코의 시대 구분을 따르게 되면 푸코가 포착하는 각 시대의 독자적 인식 구조에 의해 예술사의 별자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을까.

중세와 르네상스가 실재론이라는 인식틀을 공유했다면 이후 등장하는 매너리즘은 단지 반동적 변이나 일탈의 수준을 넘어서 (지동설, 마키아벨리즘, 종교개혁을 추인하는 유명론-예정설 신앙과 함께) 이전의 르네상스와는 인식론적 측면에 있어서 단절과 전환이라 할 만한 질적 차이를 갖는다는 것, 그런 점에서 르네상스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 시기로 봐야 하고 매너리즘은 내용분열 혹은 내용부재의(허울에 불과한 내용의) 형식주의라는 측면에서 이행기에 해당하며 기계론적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의 본격적인 시작은 사실상 사물에 외재하는 동적 메커니즘을 포착하게 되는 케플러와 데카르트 그리고 바로크의 등장부터라는 얘기,

북유럽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각각 중세말의 경험론적 세계관과 근세초의 인본주의적 관념론의 반영으로 보면서 북유럽에서는 한층 진보한 중세는 있었으되 인간의 지성이 여전히 신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르네상스 같은 건 없었고(!)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근세의 포문을 연 르네상스라는 것은 사실상 피렌체 고유의 업적이라는, 그중에서도 (후기고딕양식 계열이 아니라) 공간성의 구현에 성공한 조토-마사초-만테냐-페루지노로 이어지는 환각주의 계열의 작가들에 국한된 성취라는 주장,

그리스적 가치를 옹호했으나 정작 그들 자신의 정신적 업적은 고전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라스무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심지어 몽테뉴까지도 르네상스 예술가가 아닌 매너리스트로 분류하고 있는 점,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관심사가 존재에서 운동으로 옮겨감에 따라 탐구의 주제 역시 사물 내재적인 보편 개념에서 사물 외재적인 필연 법칙에 관한 것으로 대체되며 그러한 가운데 존재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존재는 그저 필연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추상적 기술 대상으로 전락하는 바, 역동성 속에서 존재를 희석시키는 바로크 회화가 근대의 이러한 경향성과 정확한 일치를 보인다는 것 등등 솔깃하고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매너리즘 부분은 이 책의 압권이다.



322쪽 밑에서 4번째 줄: '자연을 담는 예술'과 '예술을 담는 자연' --> '자연을 닮는 예술'과 '예술을 닮는 자연'
325쪽 9번째 줄: 엄격함이 있다 --> 엄격함이 없다
345쪽 1번째 줄: 내재화된 델리커시에 대한 슬픔 --> 내재화된 델리커시에 의한 슬픔
414쪽 7번째 줄: 근대인들이 이해하는 근대란 존재는 --> 근대인들이 이해하는 존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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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서양예술사 : 형이상학적 해명 1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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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한 주제를 일이관지하며 명석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독서의 고난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지적 쾌감을 준다. 개별적인 이해 속에서 막연하게 흩어져 있던 지식의 파편들이 비로소 맥락을 갖추고 전체 가운데 하나의 좌표를 부여받아 그 의미가 선명해질 때 오는 깨달음의 기쁨이 상당하다. 이 분의 저서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작주의를 목표로 하는 게 좋을 듯하다. 모든 책들이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만한 일관된 통찰을 공유하는 까닭이다. 물론 이 데이터베이스가 궁극의 해답은 아니며 이 또한 하나의 관점 혹은 입장이라고 해야 옳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적 언명을 바로 이 책 자신에게 돌려주자면 각 시대의 예술에 대한 저자의 형이상학적 해명 역시 실재를 요청하는 자의적 체계이며 이것 자체가 실재는 아닌 것이다.

이른바 대륙철학이 아닌 영미분석철학에 적을 두고 있는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에게 근대의 칸트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하면서 이후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시도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부연이나 주석 쯤으로 일축해버린다. (저자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대한 평가는 '기생'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가혹하다. 그러나 푸코를 19세기 환원주의자들의 연장선상에 놓는 견해는 가혹한 정도를 넘어 자못 부당해 보인다. 푸코는 오히려 환원주의를 메타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론의 질서가 미시적 실천 속에서 어떻게 형성 및 구축되고 작동하는지, 지배 담론을 생산하는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을 시도하는 푸코의 중기 작업을 고려해 보면 푸코는 차라리 비트겐슈타인의 사례연구를 수행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전통 형이상학의 사망을 최종 선고함과 동시에 현대 철학의 본령을 규명한 이래, 철학의 재구축을 위한 오늘날의 새로운 탐구와 모색은 그저 잘해봐야 애처로운 사후 경련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한편으로 현대의 예술은 역사의 검증을 마치고 이미 응고된 것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 매 순간 미지의 의미를 낳고 있는 미완의 영역이기에 그 종합적 이해와 통찰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적 해명에의 또 다른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점증하는 의문들은 잠시 접어두자. 걸음을 재촉할 일이다. 거인의 발걸음을 좇다 보면 어느덧 언덕이다. 그 언덕에서 내가 나고 자라온 이 고장의 장대한 풍경을 조감하게 된다. 머릿속이 환해지는 경험이다.



144쪽 1번째 줄: 플라톤이 --> 플라톤의
147쪽 12번째 줄: 예술인한 --> 예술인 한
220쪽 밑에서 8번째 줄: 아니라 사실 --> 아니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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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새로운 길 - 종교적 키치, 예술적 키치, 그리고 구원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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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또 다른 책 <키치, 달콤한 독약>과 짝패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서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이 둘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겠다. <키치, 달콤한 독약>이 주로 키치에 대한 정의와 분석적 통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적용 범주를 예술 뿐만 아니라 신앙, 윤리, 원리주의, 민족주의, 지성의 영역 전반으로 확장하면서 키치가 출현하게 된 철학사적 맥락과 역사적 배경을 소상히 짚어낸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한편으로는 ‘한 권으로 읽는 서구 문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르주아의 이념적 반동 심리와 졸부 근성에 기원을 둔 키치가 그 어떤 시대보다도 거대서사가 붕괴한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는 병리적 특질이라고 진단한다면, 키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포괄적 조망은 필연적이리라. "우리가 현대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과거의 모든 시대들과의 차연의 종합으로서"(156)이기에.

 

쏟아내는 이야기의 규모는 방대하고 그 종합적 해석과 통찰은 날카롭다. 정치, 종교, 사회, 철학, 문학, 예술, 수학, 과학 등등 온갖 방면을 종횡무진하며 흩뿌려놓은 보석 같은 조각들을 하나씩 꿰맞춰 나가다 보면 거대한 그림이 보이는 듯하다. 그동안 밤하늘에 둥둥 뜬 별들을 멀뚱히 올려다보고만 있다가 갑자기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현란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 것과도 같은 상황이랄까. 넋이 나갈밖에. 때로는 너무나 무리한 주장이 아닌가 저어되기도 하지만, 아마도 저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별자리는 "확정된 사실도 아니고, 항구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필연적인 사실도 아니"(170)라고, 이 또한 인간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며 "오류일 수도 있는 전제"(169)를 필히 가정해야 한다고.

 

행간에 면면히 흐르는 지적 치열함, 당대의 세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어떤 절박성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결코 이 책을 이렇게 읽어선 안 될 것 같은데, 풍성한 지식의 향연 앞에서 마냥 황홀한 독서 체험이고 말았다. 이 책을 대단히 키치적으로 소화했다는 방증이겠다. 키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개진하고 있는 이 책을, 이거야말로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가 아닌가 감탄하며 키치적으로 읽다니 자조할 만한 역설이다. 어쩌겠나. 교양(으로 간주되는 것)을 황홀하게 소비하는 것- 이것이 바로 키치적 태도에 단단히 매몰된 딜레탕트의 한계인 것을.

 

의미의 죽음에 대한 상세하고도 냉엄한 전언이자 그러한 죽음에 대한 안일한 대응으로서의 키치를 고발하고 있는 이 책을 힘겹게 덮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면, 밤하늘은 여전히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다. 의문이 들 수밖에. 모든 의미가 소멸한 이 시대에, 과거의 실재론 또는 합리론 계열의 철학자를 좇는 일은 과연 "병든 행복"(240)에 잠기는 일인가? 의미를 재건하고자 하는 이 시대 철학자들의 시도는 "어리석음이며 위선"(192)에 불과한가? 어차피 우리 모두 새장에 갇힌 신세라면, 실재에 대해 그 누구도 닿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면, 결국 어느 산에 오르느냐 하는 선택도, 어떤 산을 건설하느냐 하는 결심도 모두 그저 개인의 기질에 따른 심미적 취향의 문제 즉 "마음의 경향"(275)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화단을 휩쓸던 6-70년대에 인물 초상을 고수했던 신사실주의 계열의 화가 앨리스 닐은 "추상은 인간을 외면한다. 나는 여전히 휴머니즘을 지향한다."며 주류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다. 자기인식적 시대착오는 더 이상 시대착오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키치도 아둔함도 아니며, 다만 또 하나의 결의이다. 책장에 꽂힌 채 어느덧 기약 없는 숙원사업이 되어버린 나의 <존재와 시간>이, 이 책의 매서운 전언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선 꺼지지 않는 온기와 빛을 발하며 살아있다. "순진한 자부심"(291)인가? 그럴 지도. 그러나 이 또한 "단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내적 요구"(283)일 뿐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소간은 키치적으로, 다소간은 우이독경으로 소화한 셈이 되고 말았다.

 

*

 

사족- 책에도 운명 같은 게 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의 운명은 험난해 보인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워서 외면할 테고, 책을 읽는 소수의 일부는 지적 포만감에 취해 키치적으로 읽을 것이며(그리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개진하고 있는 이 책이 결과적으로는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로서 키치적 향락의 대상이 되는 역설에 처할 것이며), 나머지 일부는 그 누구보다 근대 교육 과정을 착실하게 이수한 전형적인 근대인으로서 이 책이 말하는 죽음을 끝내 인정하기 어려울 테니까. 오탈자와 몇몇 불편한 문장이 눈에 띈다. 개정판이 나올 때 다듬었으면.


156쪽: 전제군주만이 시민을 어둠 속에 가두지 않는다. → 전제군주만 시민을 어둠 속에 가두는 것은 아니다.

205쪽: 사실주의 예술과 인상주의 예술에 대한 부르주아 계층의 반발은 기득권 계층의 이념은 언제나 지성과 의미 속에 고형화되기 때문이다. → 사실주의 예술과 인상주의 예술에 대한 부르주아 계층의 반발은 기득권 계층의 이념이 언제나 지성과 의미 속에 고형화되는 까닭이다. (제안)
236쪽: 박에 → 박애
304쪽 밑에서 4번째 줄: 만약 그가 새로운 세계에 창조하여 → 만약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315쪽 밑에서 5번째 줄: 작품을 상품이나 부르고 → 작품을 상품이라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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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선택 - 세계를 가르는 두 개의 철학과 15가지 쟁점들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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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에서 유구하게 반복되어온 '통합'과 '해체'라고 하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성이 15가지 주제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생각해볼 것은 이 책이 취한 '철학의 선택'이다. 이 책에서는 현대에 이르러 철학 사조의 무게중심이 실재론-합리론-관념론 계열에서 유명론-경험론-분석철학 계열로 이동했다고 보고, 흄에서 비트겐슈타인으로 이어지는 해체적 흐름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상대적으로 헤겔,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지젝이나 바디우 같은 사람들로 대별되는 일군의 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키치라고 폄하하거나 별 언급이 없다. 그러나 중세의 오컴 역시 당대의 주류는 아니었듯이, 심지어 이단이었듯이, 키치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사망 선고를 내릴 만한 철학이 과연 있을까. 우리에게는 오로지 재발견되어야 할 철학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 7~8장에서는 이념이 어떻게 당대의 예술 양식에 반영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런 의문도 든다. 이념이 무릇 예술에 반영되는 것이라면 메인스트림 주변의 서브스트림 역시 비록 희소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현대 예술 사조에 (결코 키치적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는) 엄연한 이념적 지분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미술사에서의 혁명적 성취는 언제나 당대의 주류적인 흐름을 찢고 나온 이단이 아니었던가. 철학과 예술이 호응하는 양상에 대해 이 책과는 반대로 비주류적 관점(?)에서 조망한 책이 있다면, 이를테면 현대예술에서 해체주의 너머를 모색하는 모종의 맹아적 기미를 포착함으로써 철학의 (시대착오적 회귀가 아닌) 새로운 복권을 기도하는 그런 책이 만약, 정말로, (이 책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있다면, 상보적 독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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