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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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선생의 지식인으로서의 태도는 여러 가지로 루쉰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독재 정권에 우호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민중계급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책장에 꽂힌 책(가족 중 누가 구입한 것인지는 모르겠다)을 우연히 읽어본 건데 아무래도 독서의 순서가 잘못 된 듯. 리영희 선생의 저작들을 읽어보고 나서야 이 책에 대해 무어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런 상황에서 ‘친미 반공 군부 독재’ 체제 수립을 위해 나온 이데올로기가 바로 ‘로스토 독재개발이론’입니다. (...) 케네디 대통령의 후진 동맹국가 운영정책의 기둥으로 채택된 거요. 이는 바로 후진 미개발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친미국적 군부의 강력한 독재체제로 우선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실현한 후, 그 바탕 위에서 후진 사회적 부정 부패들을 척결 개혁하면서 경제건설과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는 개발이론이지. 이 이론이 그때 남한에 적용되어, 박정희어 5.16 쿠테타가 표방한 강력한 반공이념 아래에서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정책으로 채택된 것이지요. (...) 케네디가 채택한 이 로스토 독재개발이론은 그 집행주체를 군대로 설정한 것이 특징이에요. (...) 박정희 정권의 일정한 물질적 성과를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뛰어난 정치적 지도력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데, 사실은 이상과 같은 미국의 세계적 체제경쟁 배경 때문이었다는 국제정치를 알 필요가 있어요.(295)

우리가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는 온갖 성격과 형태의 사회에서, 오랜 체험과 그것으로 얻어진 예지로써 이제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행복 추구의 실천적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 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해요.(523)

자기 나름의 문제의식이나 분석방식 없이 남의 이론을 빌려서 자기의 권위로 이용하는 작태를 나는 멸시해요. 내 글에는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는 식이 없어. 정치이론도 사회비평도 다각도로 교차검증한 다음에 일단 소화하고, 내 머릿속에서 내 것으로 만들고, 충분히 반죽해서 자신의 누룩을 가미해서 발효시켜서, 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 나는 현학적인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런 현학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인용한 누구의 이름에 자기를 동일시하려는 허영에서 출발해요. 자기의 지식이 돼버린 것은 굳이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대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한 철저한 ‘자기화’가 필요하지.(549)

198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의 젊은 투사들 사이에서 드러났던 현실대응에 대해서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별로 없었어. 나는 그쪽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냉담했다고 그럴까. 그것이 우리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역사적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데 오히려 전력을 분산, 소모하지 않을까 우려했어요. (...) 세계의 정치개혁운동사에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큰 공통점이 있어요. 즉,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념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을 지나치게 정밀화, 세밀화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이에요.(625)

자본주의가 앓는 사회적 암을 치유하는 데 사회주의라는 항생제가 필수적입니다. (...) 사회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부패, 불법, 부정, 타락, 빈부격차, 폭력, 범죄, 잔인, 인간소외 등을 낳게 마련이에요.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본태성 질병’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사회주의의 인간중시적 가치관만이 그러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을 방지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질병이 그 제도의 골수에까지 심화하여 제도 자체가 붕괴하는 위험을 어느 정도 선에서 예방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또 그렇기를 원한다면 사회주의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지요. 나는 우선 지난 300~400년 사이에 인류의 발전을 이루어왔던 제도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절한 배합이라고 생각합니다.(685)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비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는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 우리는 아무리 희구해도 이미 먼 옛날에 인류의 사회적 형태로 지나온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게젤샤프트’(서로의 이해관계의 계산을 매개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와 적절히 배합한 인간 생활 형태를 미래의 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겠지요.(687)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 나라와 사회에서 일정한 선구적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광주민주항쟁 뒤에는 우리 대중의 의식이 급진전했고, 국민생활과 민족문제의 국가적 위기, 사회적 부조리 전반에 대한 지식인, 청년, 대학생, 노동자들의 문제의식과 인식능력의 수준이 나를 뛰어넘는 감이 있을 만큼 발전했어요. 60~80년대에 걸친 나의 글과 책과 말 그리고 나의 행동으로 계몽되고 ‘의식화’된 후배와 후학들의 역량이 놀라울 만큼 커졌어요.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나라, 사회의 변화와 진전을 지켜보면서, 혹시 요구가 있으면 몇 마디를 해주는 것으로 족하지.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성현의 가르침은 지금 바로 나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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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카또오 노리히로 / 창비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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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토는 전후책임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사죄’와 ‘망언’을 반복하는 일본의 인격 분열의 원인을 사죄할 주체가 제대로 구축되어있지 않는 데서 찾고 있다. 그는 사죄해야 할 타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라는 주체가 있어야 하며, 주체를 구축하는 것과 관련해서 “자국의 3백만의 무의미한 사망자들을 바로 그 무의미함 때문에 깊이 애도한다는 것이 그대로 타자인 2천만 아시아의 죽은 자들 앞에 우리를 세워놓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전쟁으로 희생된 2천만 아시아인에게 사죄하기에 앞서 먼저 3백만의 자국 희생자들을 추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토의 이러한 주장은 90년대 일본에 때 아닌 역사주체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논쟁이 가열되면서 가토는 자유주의사관파와 혁신파 진영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혁신파 진영의 지식인들은 가토의 주장이 어디까지나 자국의 사망자만을 감싸는 내향적인 논리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논리는 피해자인 아시아인들의 존재를 은폐하고 망각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통합된 주체를 구축하자는 가토의 논의는 특히 다카하시로부터 내셔널리즘적 책략이라는 이유로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논쟁의 포문을 연 가토가 애초에 꺼낸 논의의 취지는 결코 내셔널리즘의 복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가토의 주장이 내셔널리즘적으로 해석될 요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셔널리즘이라는 혐의가 발화 자체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가토가 언급한 '주체'는 다카하시가 비난하는 류의 '내셔널리즘적 주체'보다도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한 ‘근거지’에 해당하는 주체에 가깝게 느껴진다. 사실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있어서도 내셔널리즘은 ‘회심’과 ‘근거지’를 위해 불가피한 요소였다.  

   
  근거지는 일정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범주다. 그것은 절대로 빼앗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고정적이지 않으며 동적이다. 고수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이다. (...) 근거지란 불균형한, 패배로 이를지 모르는 조건에서 가치의 전환을 이루어내는 자기 개조를 뜻한다. 이것은 전향과 다르며, 차라리 반대이다. 전향이 바깥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버린 것이라면, ‘근거지이론’의 자기개조는 바깥의 불균형한 조건을 자기 몸으로 받아내 자기변화에 이른 것이다. 전향에서 바깥의 환경은 전향을 해봐도 그대로 남지만, 자기개조에서 바깥의 환경은 주체 갱신의 축을 따라 변화한다. -다케우치 요시미, <내재하는 중국> 中에서  
   

사회적 상황의 모순에 대한 천착과 해부, 그리고 이를 통한 반성과 갱신. 이것이 애초의 가토의 발화에 담긴 취지가 아니었을까. 나는 가토의 글에서 자신의 언설이 비난 받을 것을 각오하면서도 끝내 사회의 모순점을 물고 늘어지는 사고의 핍진함을 읽는다. 그리고 거기서 다케우치가 강조하는 ‘회심’의 가능성을 본다. 물론 사상의 폭과 깊이가 루쉰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가토의 발화가 복잡한 현실의 토양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는 점 하나 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반면, 가토를 비난하는 다카하시의 주장에는 모든 전후 상황을 굉장히 쉽고 당위적이고 명료하게 정리해버리는 ‘전향’의 태도만이 있을 뿐이라고 비판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통일된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가토의 주장 역시 '내셔널리즘의 복권'으로서의 의도를 갖는다기보다는 모순투성이의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는 의지로 읽힌다. 물론 그가 구상해낸, 자국의 삼백만을 먼저 추도하자는 그 구체적 방법이 다소 엉성하고 문제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화하는 내부를 성찰하려는 시도 자체는 그 가치를 높이 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시도를 가리켜 피해국과의 관계를 절연하고 과거 청산 문제를 교묘히 회피하려는 자기중심적인 수작이라고 힐난한다면, 그것은 가토에 대한 너무나 가혹한 평가일 뿐만 아니라, 가토의 발화의 핵심을 전혀 못 건드리고 있는 비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역사주체논쟁을 둘러싼 일본 내부의 논의는 피해자의 입장에 놓인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체결 이후 전후보상문제에 대해서 한국 공론장에서는 일본의 경우만큼의 큰 논의가 별달리 불거진 적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때문에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한국과 일본이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은 자못 인상적이다.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는 속담이 실감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맞은 놈이라는 게 마치 벼슬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니, 맞았다는 사실이 과연 도덕적 우위를 증명해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애당초 우리가 정말 맞은 놈이긴 한 것인가? 전후세대인 우리 역시 전쟁에 대한 기억도 없고, ‘논 모랄’이고, 딱히 응어리진 것도 없는데, 사죄 받을 권리를 마치 상속 받은 재산 마냥 갖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상속받은 그 재산이 정말로 불로소득에 해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종의 책임이 대가로 따르는 재산인 것인지 한번쯤 재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섣불리 확실한 답안을 마련하기 어려워 잔뜩 의문만 쏟아내 놓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의 역사주체논쟁을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어떤 새로운 ‘고민의 연대’라는 것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하나의 사건인지 모른다. 이 글에서 나는 가토를 옹호했지만, ‘고민의 연대’라는 것이 결코 무작정 일본인의 입장이 되어 가토의 논의에 심정적으로 동조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일본에서 불거진 이 논쟁을 매개로 하여 우리가 처한 장소에서 가토의 고민에 값하는 새로운 고민꺼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고민의 연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무수한 의문들을 만들어보는 것으로 출발해도 나쁘지 않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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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0-09-04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국주의 시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태도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했던 태도보다 합리적이었다거나 온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해석하기에 따라 반대였을 수도 있다고 봐요. 예를 들어 일본은 2차대전 때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는데, 저는 일본의 그런 정책에서 제국주의적 흐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동아시아 국가로서 가질 법한 자긍심과 함께 동아시아민족 전체에 대한 모종의 책임의식 같은 것도 느끼게 되거든요.

단순히 성을 바꾸게 한다거나 풍습을 금지하는 행위만으로 식민국에 대한 착취의 강도를 비교한다는 건 너무나 단순화된 논리인 것 같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침략국으로서의 일본의 태도를 유럽국가의 경우와 비교하는 것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그것은 개별적이고 특수적인 상황과 조건에 대한 선이해 없이 몇 가지 드러난 결과만을 가지고 단순비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전후 처리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저는 일본이 독일과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까닭이 단순히 일본의 윤리적 무감각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 특유의 문화나 국민성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작용한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국화와 칼>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 문화를 규정하는 열쇳말로 온(恩), 기무(義務), 기리(義理)를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확인하게 되는 거는 타인이 베푼 은혜에 대해 과도한 부채감과 의무감을 지니는 일본 특유의 정서입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거나 은혜를 입거나 신세 지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거기서 오는 부채감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일본인들로서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과오를 떳떳하게 시인하고 인정하는 게 독일인의 경우처럼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과거사에 대해 사죄하는 것이 독일인에게는 청산과 새출발을 의미할 수 있지만, 일본인의 경우에는 평생 헤어나올 수 없는 형벌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전후 책임 문제에 미온적인 일본의 입장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단순비교에 의한 맹목적인 비난보다도 이같은 일본 특유의 정서와 국민성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물론 그러한 고려가 일본이 져야 할 책임을 가볍게 해줄 수는 없겠지만 말이죠.

2010-09-06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3-04-30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에 이 책의 저자 카토 노리히로가 "전쟁으로 희생된 2천만 아시아인에게 사죄하기에 앞서 먼저 3백만의 자국 희생자들을 추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을 때 일본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진보진영 지식인들이 카토를 강도 높게 비난했죠. 솔직히 이 책에서 카토는 굉장히 많은 고민과 성찰을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활한 보수우익의 교언영색 같다는 인상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수유너머에서 이 책 가지고 토론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카토를 반대하는 쪽이었지요. 저는 토론에서 카토를 지지하는 입장에 섰었어요. 이 독후감은 그때 쓴 발제문을 약간 수정하여 올린 것이고요.

제가 카토를 지지하는 입장에 섰던 까닭은 카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그의 논리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처지에서는 카토를 비난하는 것보다 지지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그 토론에서 제가 카토를 지지하는 쪽에 섰던 진짜 이유는 아마도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엔 약간의 객기도 없진 않았을 겁니다.

사실 카토를 비판하기는 참 쉽지요. 그래서 더 객기를 부리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카토를 비판하는 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사유의 장소- 그 장소는 대단히 쉽게 구축되는 장소니까요. 저는 운신이 쉬운 장소에 자신의 입지를 마련해 놓고 쉽게 비판적 태도를 보임으로서 쉽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을 경계해요. 우리는 카토를 비판함으로써 쉽게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선 대단히 나이브한 태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수양 2010-09-06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어떤 맥락에서 '관행'이라는 용어를 꺼내신 것인지 그 부분은 저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다만 님이 2010-09-06 02:19에 달았던 댓글 중에, "(1)그들이 실제로는 그들의 과오를 인정하나 사죄의 내용을 말로 표현한다면 괴롭기 때문에 표현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2)실제로 자신들의 과오가 아닌 대동아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겠죠" 라는 대목은 저로서도 궁금한 점입니다. (1)과 (2) 사이를 왕복하는 복잡한 심리구조 속에서 모호한 태도를 견지하는 게 어쩌면 카토의 입장 같기도 하고요.

수양 2010-09-07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들이 이성적으로는 혹은 대외적으로는 전쟁 도발에 대해 피해국에게 사죄하는 게 지당하다고 여기고 있으면서도, 그 내면의 심리구조는 여전히 복잡다단한 마음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입니다.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하는 일은 곧 자기를 철저히 부정해야만 하는 일인데, 그게 누구나 그렇듯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카토가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러들이는 것이 문학적인 감수성입니다. 카토를 비난했던 일본 진보진영 지식인들은 그가 정치적인 사안에 문학적 감수성을 끌어들여 문제를 희석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저는 오히려 카토가 문학의 영토에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키는 데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번쯤은 우리도 카토가 내는 그런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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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흔히 악으로 규정된다. 박애정신과 시민의식을 갖춘 사람들은 비폭력 평화주의만이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말한다. 이런 와중에 폭력을 선동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극단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경계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든 도덕 판단이 그러하듯 폭력이 악이라는 테제 역시 특정한 계보 속에서 산출된 명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계보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폭력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중에는 분명 ‘옹호해야 할 폭력’이 있다. 폭력이 악이라는 테제는 이런 폭력의 가치마저 폄하하고 부정하게 만든다. 

옹호해야 할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억압받는 소수자가 행하는 폭력이다. 소수자가 저지르는 폭력은 강자가 자기 보존과 확장을 위해 수행하는 폭력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강자의 폭력이 생명욕동에서 비롯하는 유기체적 성장의 수단이라면, 소수자의 그것은 온통 죽음욕동으로 들끓는 폭력이다. 소수자의 폭력은 목숨을 걸었으되 아무런 승산도 전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분투하는, 처절한 자멸의 폭력인 것이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던 프란츠 파농은 착취당하는 원주민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극단적인 폭력투쟁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폭력의 행사가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의 의식에 공통의 대의와 민족의 운명, 집단의 역사 같은 관념들을 싹트게 한다고 말한다. 결집된 민중의 폭력을 식민지 해방을 위한 결정적 수단으로 여겼던 파농에게 비폭력 평화주의, 점진적 개혁, 지배국가와의 타협을 외치는 식민 치하의 민족주의 정당은 어디까지나 ‘자유를 누린다고 착각하는 노예계급’에 불과했다. 민족주의 정당은 겉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착취국의 정치 세력과 은밀하게 결탁하여 식민 체제를 영속화했기 때문이다. 

1961년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지지했던 프랑스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식민 치하에서 착취당하는 소수자 계급의 극단적 폭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 부드러움으로 폭력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오직 폭력 자체만이 폭력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원주민은 무력으로 이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식민지 노이로제를 치료한다. 분노가 들끓을 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 반역의 무기는[즉, 폭력은] 그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거다. -p.36 <1961년판 서문 中에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알제리 원주민들이 보여준 극단적인 무력투쟁은 정당방위로서의 폭력도 아니고, 정당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폭력도 아니었다. 그들의 폭력은 도덕이나 정의의 범주를 초월한 영역에 있었다. 그들의 폭력은 ‘존재론적’이었다. 그들은 폭력을 통해 실존하는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보여주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폭력, 그것은 일종의 자해다. 자해는 자기를 파괴하는 행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욕동의 분출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실존하게 하는 폭력,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폭력, 자멸 속에서 생의 감각을 느끼는 데 소용되는 폭력. 과연 이러한 폭력을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만약 이것이 '악'이라면,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러한 '악'을 타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교묘한 정치적 제스처는 어떠한가. 그것이야말로 더 끔찍한 ‘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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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1호 - 창간호 다언어 문화이론 및 번역 총서 흔적 1
문화과학사 편집부 엮음 / 문화과학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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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은 각국의 지식인들이 필자로 참여하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곳곳에 동시적으로 발간되는 잡지라고 한다. 직접 구해 보지는 못하고 일부만 복사본으로 읽어보았는데, 그 중 펭 치아의 <보편적 지역- 변화하는 세계에서의 아시아 연구>라는 글은 ‘지역학’이라는 학문을 주제로 한 글로, 지역학이라는 게 있는 지도 몰랐던 나로서는 이 글 자체가 무시무시한 ‘수면의 지역학’이었다.  

네이버에서 ‘지역학’이란 것을 치면 이렇게 나온다: 어떤 특정 지역에 대한 타자성의 인식 아래 그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혹은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활동을 총칭. 엄밀히 말해서 ‘지역학’이란 용어보다는 ‘지역연구’가 더 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지역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고유한 방법론이 부재하고, 지역 연구의 특성상 다른 분과 학문 즉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방법론과 연구 성과를 이용해야 하는 실정에 있기 때문이다. 지역연구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략적 필요에 의해 미국에서 제일 먼저 발달해 왔다. 그러던 것이 전쟁의 종결과 함께 순수한 학문의 분야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결론적으로 지역연구란 그 지역의 언어를 바탕으로 각각의 분과학문의 방법론과 연구 성과를 이용하여 그 지역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업적을 쌓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 

펭 치아는 분과학과 지역학이 보편자-개별자 구도를 이루어 상호 작동하는 양상을 주목하면서, 지역학이 현지조사를 거쳐 비-서구라는 타자를 포획해 오면 분과학은 포획된 타자를 자기 방식으로 소화해 버리는 이러한 학문적 메커니즘이야말로 서구유럽이 타자를 인식하는 지극히 헤겔스런(?) 태도라고 비난한다. 헤겔적 시각에서의 보편성이란, 언제나 개별자 가운데 제일 힘세고 포악한 하나가 나머지 다른 개별자들을 무참하게 포섭 장악하는 방식으로써만 전유될 수 있는 성질인 바, 이런 점에서 보편 이론의 정립을 목표로 하는 (그리고 그것을 비-서구에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분과학문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의 절대정신을 구현하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지식 가공 방식인 것.

문제는 이런 방식이 선진적이고 정통적이고 일반적인 학문 연구 방식으로 전 세계에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비-서구로서의 아시아는 언제나 서구에 기반을 둔 학자들에 의해 가공되어야 할 원자료, 원천이 되고 만다. 비-서구 출신 아시아 학자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을 연구하기 위해 ‘원주민 정보제공자’로서 서구로 유학 오는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까닭이다. 왜 그들은 자기네 사회를 서구 지식의 구조와 방법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어버렸나.

펭치아는 ‘보편-특수’라는 코드로 인간의 활동을 인식하는 것이 결코 절대적인 학문 방식은 아님을 강조하면서 개별자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자의 개념 또한 파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보편성을 데리다의 사유를 빌려 “특수한 영토적 신체들 혹은 지역들 간에 공유하는 중단 없는 운동 속에서 거듭 절합되고 재정의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보편성은 어떤 한 특수한 개별자에 의해 전유될 수 있는 정태적인 실체가 아니라, 각각의 개별자들의 끊임없는 연쇄에 의한 계열화 운동, 개별자들의 중단 없는 공유 운동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편은 '수렴'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모범', '전범'으로서의 가치로 전환된다. 이렇게 펭 치아는 헤겔적 색채가 강했던 기존의 낡은 보편-특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앞으로의 아시아 연구에 있어서 서구적인 보편성의 유령을 몰아낼 것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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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데올로기 1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박재희 옮김 / 청년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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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첫머리에서 맑스는 “어떠한 시대에서도 지배적 사상은 곧 지배 계급의 사상”이라고 말한다. 이런 맑스에게 역사를 지배하는 추상적 힘으로서 어떤 독자적인 정신을 상정하고 역사는 그 정신이 자기를 규정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헤겔의 역사철학은 교조적인 잠꼬대에 지나지 않았다. 사상을 낳는 기저의 힘, 사상이 만들어지게 된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이나 사상의 생산자에 대해서 일절 고려하지 않는 헤겔의 철학은 맑스가 보기에는 그저 현실을 은폐하는 사변 철학에 불과한 것이었다.

맑스는 유물론적 관점에 따라 사회의 토대가 되는 물질적 생산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그 사회를 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결코 어떤 추상적이고 고아한 정신의 외화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산력의 역사였으며,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 관계 변천의 역사였다.

향상된 생산력은 자기 활동의 조건으로 새로운 교류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생산력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그러한 교류 형태가 나중에는 자기 활동에 대한 질곡으로 다가오는 시기가 찾아온다. 역사상의 모든 충돌은 생산력과 교류형태 간의 모순이 발생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때 사회는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향상된 생산력에 조응하는 새로운 교류형태를 또 다시 만들어 낸다. 이러한 부단한 과정이 곧 인류의 역사다.

여기서 맑스는 생산관계의 법적 표현물로서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소유 형태에 주목한다. 그는 사유재산의 형태가 변화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인류의 역사가 부족적 사유재산제 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로,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적 혹은 토지적 사유제산제 사회로, 그리고 이후 부르주아적 사유재산제 사회로 넘어간다고 말한다.

4장은 변천 단계의 마지막 모습인 부르주아적 사유재산제 사회의 성립 과정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다. 그는 이 장에서 부르주아 사회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사회의 생산 구조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자연발생적 생산용구와 문명이 만든 생산용구

먼저 맑스는 산업이 발달하기 이전의 사회와 이후의 사회를 대별한다. 전자는 물이나 경작지 같은 자연발생적 생산 용구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이고, 후자는 공장이나 기계처럼 문명이 만든 생산 용구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전자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연에 예속되어 있으며, 소유가 자연에 대한 직접적 지배로 나타난다. 교환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교환을 의미한다. 개인들은 가족과 부족 및 토지 등등의 유대 하에 결합되는 것을 자기 생존의 근거로 삼는다. 이 사회에서는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이 분리되지 않으며, 노동 역시 분업화 되지 않은 상태다. 무소유자에 대한 소유자의 지배는 어디까지나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관계이다.

반면, 후자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노동 생산물에 예속되어 있다. 소유는 자연을 지배함으로써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에 대한 지배를 통해 일어난다. 이 사회는 철저한 분업화 사회이며 따라서 공동체적 유대 관계보다 교환 관계를 통해 주로 개인 간 결합이 일어난다. 이 사회에서 지배는 화폐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길드 시스템

맑스는 중세 이후 도시가 출현하고 점차 도시와 농촌이 분화되어가는 모습을 자본과 토지 소유 간의 분화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중세 도시의 생산 구조의 변화를 분석함으로써 토지적 사유제산제 사회가 어떻게 부르주아적 사유제산제 사회로 이행해 가는지 보여준다. 도시를 향한 농노들의 도망은 중세 사회가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들 농노들은 도시 안에서 아무런 권력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노동은 숙련을 요하는 전문직의 노동이 아니라 그저 날품팔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에서 뿔뿔이 흩어져 빈민으로 살아갔다.

빈민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당시의 도시는 도제 시스템이 모든 직종에서 조직화 되어 있었다. 장인과 장인 밑에서 수련하는 직인들은 화폐를 매개로 한 고용-피고용의 관계가 아니라 가부장적 유대관계로 이루어진 사이였다.

또한 노동의 분업화가 아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 사회에서의 자본이란 투자가 빠른 근대적 자본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것은 소유자의 특정한 노동 분야에 직접적으로 결합된 채 결코 그 노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자본이었다.

도시들 간의 노동 분업과 공장제 수공업의 출현

그러나 이후 노동 분업은 점차 확장되었다. 생산과 교류가 분화되고 장인이 만들어낸 것을 판매만 하는 계급, 즉 상인이라고 하는 특수한 계급이 형성되었다. 상인들이 활동하면서 도시 간 상업적 교통 또한 활발해졌다. 생산과 교류가 분화되고, 교류의 규모 또한 확장되면서 도시 간 경쟁이 심화되고, 마침내 도시들 간에도 새로운 생산의 분업화가 일어났다. 도시로서 존속하기 위해 각 도시마다 대규모 특화산업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이제 각 도시는 제각기 하나의 주요 산업 분야를 개척하여 떠맡게 되었다.

도시 간 노동 분업의 결과 출현한 것이 ‘공장제 수공업’이라고 하는, 길드 체제의 틀을 벗어난 생산 방식이었다. 이 새로운 생산방식은 많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우선 소유관계가 변화했다. 공장제 수공업은 대량의 자본 동원을 필요로 했으며, 이때부터 근대적 의미의 자본이 개인들 손에 축적되기 시작했다. 일부는 길드 내에서 일부는 상인들 내에서 손쉽게 이동 가능한 근대적 의미의 상인 자본이 축적되었다.

한편, 공장제 수공업은 도시로 도망쳐 왔으나 딱히 가진 기술이 없어 날품팔이 신세를 면할 길이 없던 농노들에게 유익한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공장제 수공업은 봉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생긴 유랑자들 역시 재빨리 흡수하였다.

공장제 수공업의 출현과 함께 여러 나라들은 각각 보호관세, 수입금지, 각종 조약 등을 내걸고 상업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상업은 정치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공장은 특권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경쟁이 가속화된 나라들은 외국 간 경쟁에 대처하기 위해 많은 특권을 공장주들에게 허용했다. 공장제 수공업은 국내 시장에서는 보호 관세에 의해, 식민지 시장에서는 독점에 의해, 그리고 해외에서는 여러 가지 차등 세금들에 의하여 가능한 한 보호받았다. 반면, 소(小)부르주아들이 모인 길드는 점차 공장제 수공업의 위력 앞에서 몰락해 갔다.

공장제 수공업의 출현은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길드에서는 장인과 직인들이 가부장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나,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화폐 관계가 나타났다.

길드가 융성했던 시대에는 도제 수업을 통해 숙련된 기술을 갖춘 장인과 직인들이 일종의 전문 인력이었으므로 당시에 근대적 의미의 자본가가 희소하게나마 활동했다 한들 그는 노동과정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간섭할 수 없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자본가가 취할 수 있는 이윤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장제 수공업의 출현과 함께 협업 체제가 발달하고 기계가 도입되면서 기계에 장악된 노동은 점차 숙련노동의 성격을 잃어갔고, 자본은 노동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는 점차 심화되었다.
 
대규모 공업의 발달

공장제 수공업이 대두했다고는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정치적 영향력은 상업에 집중되어 있었고, 공장제 수공업이 상업에 주는 영향력이란 미미한 것이었다.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제 수공업은 상업에 비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분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후 영국을 시초로 대규모 공업사회가 등장하게 되면서 이런 관계는 역전된다. 19세기 등장한 대규모 공업은 상업을 자기 자신에게 예속시켜 모든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시킨다. 대규모 공업은 근대적 세계시장을 낳았으며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신속한 유통 체계와 자본의 집중을 만들어냈다.

대규모 공업이라는 생산 방식의 변화는 사회의 많은 모습을 바꾸었다. 대규모 산업은 수공업을 비롯한 이전의 모든 단계의 산업을 파괴했다. 노동은 일체의 자연적 성격을 잃었다. 농촌은 몰락하고 도시는 비대해졌다. 도시 안에서는 계급의 분화가 또렷해졌다. 개인들의 생활 조건은 계급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생활상의 지위 및 인격적 발전 역시 자신이 속한 계급에 귀속되었다.
 
대규모 공업 및 자유경쟁 하에서의 생산력과 교류 형태 간의 모순,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

도제 사회였던 중세 도시에서의 자본은 소유자의 특정한 노동 분야에 직접적으로 결합된 채 결코 그 노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자본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공업사회에서는 노동과 자본이 분리된다. 축적된 노동과 현실적인 노동이 분리되는 것이다. 또한 분업이 심화됨에 따라 노동의 조건 또한 분열하여 노동 도구와 노동 재료 간의 분리가 일어나고, 그에 따라 도구의 소유자와 재료의 소유자에게로 각각 자본이 분리되어 축적된다.

이렇게 대규모 공업사회의 노동 분업은 자본과 노동 간의 분열 뿐 아니라 갖가지 서로 다른 소유 형태까지도 내포한다. 노동 분업이 발전함에 따라, 또한 축적이 진행되고 증대됨에 따라 이러한 분열 역시 더욱 첨예해진다.

또한 대규모 공업사회에서 생산력은 각 개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자적인 세계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생산력은 분산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인들을 결합하는 현실적인 힘으로서 작용한다. 사람들은 일체의 현실적 생활 내용을 박탈당한 채 추상적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또한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개개인들이 ‘개인으로서’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해진다.

근대적 사유재산제 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국가의 역할

근대적 사유재산제 사회에서 사유재산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재산을 사수하기 위해 조세나 국채 등의 수단을 동원해 근대 국가를 장악한다. 결국, 국가란 유산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익을 그 속에서 관철하는 형태로서 존재하게 된다. 지배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는 국가는 무엇보다도 자본의 증식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시초가 되는 자본, 즉 본원적 자본의 축적에 깊게 관여했다. 자본의 시초 축적은 국가의 대규모 폭력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본의 본원적 축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선 지배세력과 기득권층에 의한 폭력과 약탈, 강압과 협박에 의해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가 자행된다. 그 결과 자본가의 생산수단 독점이 이루어지고, 근대적 무산자가 대규모로 양산되어 인력풀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시장은 더 이상 원시적 형태의 ‘단순상품 내지 소생산에서 비롯되는 국지적인 자연발생적 교환의 장으로서의 시장’이 아니라, ‘기아와 결핍에 의하여 시장에 나가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이다.

국가는 통치 전략으로서 이러한 시장의 전국적인 확대를 지원하는 한편, 노동력으로 기능할 수 없는 자들은 치안을 이유로 모조리 수용소, 병원, 학교, 감옥 등에 격리 또는 감금하고, 교화와 훈육 및 처형을 감행한다. 즉 근대 이후 자본주의 국가는 거대한 국가적 폭력이 개입하여 지극히 부도덕한 방식으로 성립된 셈이다. (이 부분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진경, 그린비, 2004)》 참고)  

사유재산제 폐지의 필연성, 전제 조건 및 그 결과


자본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일체의 자기 활동을 박탈당한 채 자본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그들의 노동은 더 이상 유적 존재로서의 자기 활동이 아니라 물질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즉 월급을 타서 생계를 잇기 위한 벌이, 즉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유적 존재로서의 자기실현을 이루기 위해 생산력들의 총체를 그들 자신의 것으로 점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점취가 사유재산 폐지를 통해 가능하며, 이 모든 과정은 오로지 노동자들의 단결과 혁명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혁명은 오래 지속된다

맑스는 사유재산제 폐지를 주장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견하지만, 역사는 결코 그 내적인 논리에 따라 원시공동체에서 노예제,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이행되어가는 식의 단선적 흐름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사회는 20세기 중반에 이미 실패한 실험으로 판명되었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지배적인 경제 형태로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 역시 빈부 격차, 경쟁, 자원 낭비, 과잉 생산, 실업률의 증가, 불황과 공황, 기계화와 분업화로 인한 노동 소외 등 자본주의가 낳는 각종 모순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그런 점에서 맑스는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맑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저자는 공산주의와는 구별되는 '코뮨주의'를 제안한다. 공산주의가 내부성의 논리를 따라 자본주의 발전 법칙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코뮨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자본의 '외부'를 구성하려는 부단한 시도이며, 이는 곧 다양한 양상으로 창안되고 창출될 수 있는 '현재'의 시제를 갖는 이행운동이라는 것이다.

훗날 자본주의의 맹아가 된 중세의 자치도시라는 것도 말하자면 봉건신분제라는 당대의 주된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한 '외부'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당대의 외부였던 중세의 자치도시를 다음 시대를 향해 가는 하나의 '이행운동'으로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혁명으로 점화된 20세기 체제 실험이 거대한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자본주의가 정점에 이르렀다는 이 시대에도 중세의 자치도시처럼 시스템의 외부를 형성하려는 전략들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기획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들이 점진적으로 축적되어 언젠가는 분명, 지난 세기의 그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임계치를 넘어서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끊임없이 외부를 구성하여 탈주의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이행되어가는 운동이 여전히 이 시대에 현재진행형으로서 계속되고 있는 한, 맑스가 꿈꾸었던 혁명은 결코 실패로 돌아간 게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체제 내부의 무수한 맹점으로부터 발아하는 조용한 혁명, 무수한 외부로부터 서서히 번져나가는 21세기형 혁명! 어쩌면 밤늦게 맑스를 함께 읽는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한 혁명의 한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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