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한창훈이 첫 작품을 상재할 때부터 그가 이문구 선생의 직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 아닌 이 책을 읽고 나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구수하고 텁텁한 입말은 이문구의 것인데

예의 의뭉스럽게 슬슬 꼬아 길고 긴 복문 대신 드라이한 단문 위주의 문장은 되레 요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문구 선생과 같은 길에 있다는 것은 동류의 곡진하고 웅승그레한 시선과 

감성때문이다. 어류 박물지에 달큰하고 속 깊은 사연이 만나니 절로 흥겹다.

게다가 툭툭 무렴없이 던지는 담백한 단문의 재미가 아주 달고 찰지다.

 

내륙 출신인 나에게 바다 생물들이란 백과사전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피에나 나오는 것들이고

먹었다고 해봐야 다들 먹어 본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물론 살아 온 세월이 있으니 이것 저것 걸터듬어 먹어보기야 했지만 

그 속사정을 알고 먹은 게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연유로 이 책은 나 같은 미생에겐 

아주 긴요한 가이드북이자. 萬漁譜이고 그 어류들에 얽힌 萬人譜였다

 


한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번도 못 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 p78

 

객쩍은 소리 한마디 보태자면 근래 맛집이고 여행이고 그 비슷한 것들을 담아

 저자거리에 도는 책들을 들추어보면 매냥  '중2병'에 걸려서 하냥 개갈안나는 소리만

 주야장천 왜장을 치는 책들이 태반이다.

(자기 인생도 제대로 간추리지 못한 것들이 이국 땅에서 뭔 깨달음을 얻었다고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이들에게 훈계에 선생질에 흰소리를 해대는지 보다 보면 기도 안찬다.)

 

그것도 아니면 기본적인 글쓰기 훈련도 안받은 저자와 교정도 안보는 편집자 둘이 

짝짜꿍을 지어 생쇼를 벌이는 허접쓰레기와 블로그에나 올라 갈 사진만 예쁜 팬시류 책들이

또 그 반인 이 풍진 세상에 한창훈의 이 책은 알곡이다. 공들인 편집도 그 짝을 만나 더 좋다.

 

며칠 자료 조사 때문에 피 뚝뚝 떨어지는 기사와 사진, 영상들만 들여다 보다가

눈호강했다. 이젠 이 책을 들고 입호강하러 가야겠다. 주말이니까.

'세 식구 머리 맞대고 꼬리뼈까지 쭉쭉 빨아먹는 맛'(p297)이라는

우럭이나 한 '사라'하자. 소주 일병과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라이트 마일>을 끝으로 아껴가며 읽던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를 끝냈다.

내 감상은 '아껴가며 읽었다'라는 결어에 다 담겨 있다.

 

좋다, 훌륭하다, 멋지다,재밌다, 끝장나는군, 이거..죽음이야..어썸! ..블라 블라 등등의

모든 호들갑스럽 상찬을 합친 것보다 열배쯤 좋았다.

 

영어판과 번갈아 가며 읽었는데 조영학의 번역도 멋지지만 루헤인..글 잘 쓴다. 정말.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능력, 캐릭터의 명확한 구분, 감정선과 심리 묘사의 디테일 심지어

유머와 재치까지...

 

나는 시리즈 중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가 가장 좋았다. 그 이유는 상처받으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가 오버랩되고 비지엠으로 깔리기 때문일거다. 그리고 또 우리의 친구, 부바가 그

멋진 존재감을 가장 깊게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서로를 보았다. 난 둘의 내면에서 그 옛날의 피가 물결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들의 신성한 유대감같은...필립도 나도 집안에서 환영받는 존재는 못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에 갱생 불가의 난봉꾼이었다. 동네 여자들과 닥치는대로 뒹굴고 아내한테 자랑까지하는 인간. 필립이 일곱 여덟살때쯤 그의 집은 욕설과 접시가 날아다니는 DMZ였다. 카민과 로라 티미시가 한 방에 있을 때면 예외없이 베이루트 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놈의 독실한 가톨릭신앙과 교리에 대한 몰이해로 둘 다 이혼이나 별거를 한사코 거부했다. 그래서 두사람은 낮에는 국지전을 즐겼고 밤이면 보상을 빌미로 격렬한 섹스파티를 벌였다. 아들 방을 가로 막은 벽에 온 몸을 부딪칠 정도의 광적인 섹스. 난 다른 이유로 가급적 집 밖을 떠돌았다. 필립과 나는 함께 피난 생활을 버텼다. 우리 둘 다 편안하게 생각했던 최초의 집은, 버려진 비둘기 둥지였다. 그 장소를 찾아낸 곳은 수단 스트리트의 공장 지붕이었다.


우리는 그곳의 흰똥을 모두 치우고 낡은 참상에서 뜯어온 널빤지를 깔았다. 버려진 가구도 몇 점 갖다 놓았고 그 다음에는 우리 같은 미아들을 불러들엿다. 처음엔 부바, 케빈 얼리히, 넬슨 페라르와 앤지, 이른바 계급에 대한 분노와 도벽으로 똘똘 뭉치고 권위에 대한 존중심 따위는 철저히 결여된 작은 악동들이엇다.


데니스 루헤인/조영학 번역,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황금가지,  2009, pp361-362

 

그녀는 계속해서 내 얼굴을 살폈다.  뭔가를 찾아내려는 모양이지만 내 얼굴에  그 게 있을리가 없었다.  그녀가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곧바로 돌아왔다.  마치 아이스크림 트럭 앞에 서 있는 가난한 아이처럼 보였다.

다른 아이들의 손에서 손으로 아이스콘과 초콜렛 에클레어가 건네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결국 얻어먹지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과  아이스크림 아저씨가 어쩌면 콘 하나를 공짜로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시시각각 주먹다짐을 하며 피를 흘렸다.

 Ibid. p97.

 

<전쟁 전 한잔>-<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신성한 관계>-<가라 아이야 가라>

-<비를 바라는 기도>-<문 라이트 마일>이 내용 전개 상 맞는 시리즈 순서다.

 

올 겨울에 다시 한번 읽을 예정. 정말 재미있고 멋지고 죽여주는데다 심지어 가슴에 큰 펀치 한 방까지 날려주는 그런 책을 찾는 이에게 버선발로 뛰어 나가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 1
차이나 미에빌 지음, 이동현 옮김 / 아고라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크지만 퇴락한 도시의 스모그위로 내달리는 고가 철도밑으로 더럽고 질척거리는 슬럼가를

어슬렁걸리다 개구리를 닮은 보야노이드족이 욕조에 앉아서 바텐더일을 하는 컴컴하고

천정낮은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선인장 모양의 캑터스케이족이 더러운 골목에서 판매하는

싸구려 마약 한 봉지를 받아서 딱정벌레 얼굴을 가진 캐프리 여인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도시..

뉴크로부존.

 

부패한 정치가와 탐욕스런 자본가들은 지옥의 마족과 정치적 협상을 벌이고

하역노동자들인 보야노이드족들은 "No Pay No Work"를 외치며

인간족과 연대 파업 투쟁을 벌이는 도시..뉴크로부존.

 

과학과 마법, 음모와 책략, 예술과 파업, 살인과 학살, 정치와 자본..

이종 연애와 섹스..생체개조와 이식..

이렇게 저렇게 섞이고 버무려진  뉴올리안즈 케이준 샐러드같은 소설.

(작가의 국적을 따르기엔 영국의 피시 앤 칩스는 맛없다)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책이긴 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다가 읽었다.

1, 2권..천페이지 가까운 분량이 순식간에 먼지처럼 사라진다.

대단하고 멋지고 엄청나다.

 

상투적인 우울한 디스토피아인 줄 알았다가 마법이 공존하는 판타지로

연애소설에서 정치소설로...죽죽 외연과 내연이 확장되어서 종국에 거대한 만화경이 된다.

그런데 그 속에 오늘의 삶, 당대의 현실, 자본과 권력, 노동과 착취,

계급과 생산, 예술에 대한 패러디와 야유 그리고 희망이 담겨있다.

 

차이나 미에빌, 이 이국적인 이름의 영국 작가를 기억해 둘 것.

 

읽다가 정든 박쥐를 닮은 '티포투'의 귀염귀염한 말투를 빌리자면

"갑자기 우울하고 답답하세여 ? 그럼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으로 오세염"

(번역자의 재치에 박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3-04-11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차이나 미에빌이 너무 멋져 '쥐의 왕'인가 그 책을 구하려는데...
절판이더라는~ㅠ.ㅠ
게다가 제가 엄청 좋아하는 이창식님 번역이더라는..., ㅋ~.

알케 2013-04-12 13:00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 알라딘에 king rat 페이퍼백이 있네요. 저는 이거하고 <언런던> 주문할려구요. 대단한 상상력이예요. 이런 이들은 머리속을 한번 들여다 보고 싶어요. 신경구조나 시냅스가 다른가 ㅎㅎ
 
콜드 그래닛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8
스튜어트 맥브라이드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나를 세번 놀라게 했다. 표지 디자인을 보고 "표지에다 대체 뭔 지랄을 한것인가"싶어서

처음 놀라고 읽으면서는 "이거 대박이네" 두번 놀라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시계를 보고 나선

책의 두께와 읽은 시간의 반비례성에 세번 놀란다. 요약하면 뭐  '어썸'하다는 얘기다.

 

책 뒷 표지에 이런 저런 무시무시한 문장들이 적혀있어서 이거 또 미친 싸이코패스가 피바다를

철벅거리며 다니는 이야기인가 싶지만 '페도 새끼'들을 담은 소재에 비해선 '산뜻'하고 '담백'하고

때론 '유쾌'한  스코틀랜드 애버딘 경찰서 강력반의 분투기를 담은 '경찰소설물'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미덕을 꼽으라면 캐릭터들의 입체감과 생동감이 아닐까.

주인공인 로건 맥레이는 넬슨 드밀의 캐릭터인 '수다쟁이 뉴욕경찰 존 코리'가 좀 더 과묵해

져서 스코틀랜드로 갔다고 상상하면 적당하다. 서브 캐릭터들도 모두 생생하고.

우리나라로 치면 '꿈틀이'같은 젤리과자를 '마구 퍼먹는' 인치 경위나 '몸짱 여경'인 왓슨 순경,

레즈비언 경찰 스틸 경위..경찰서 문지기 듀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구장창 내리는 '비'까지

모두 제 몫을 톡톡히 한다. 덤으로 시퀀스마다 등장하는 썰렁한 영국식 유머도 좋고.

 

이 작가와 동향인 발 맥더미드 여사의 때론 장황하고, 갈수록 더 어수선한 '시리얼 킬러 프로파일

링'에 질린 이들에게 권한다. (하긴 이 책에서도 프로파일링을 씹어대긴 한다. 토니같은 임상심리학자도 잠깐 출연하고) .

 

소개에 나와있는 '스코틀랜드 타탄 느와르'운운에 혹해서 집어들었다면 한번은 실망하고 또 한번은 만족한다. '느와르'치고는 마일드해서 그리고 '타탄 느와르'가 맛깔스럽다는 걸 알게되어서.

느와르 쟝르가 스코틀랜드로 가서 '남귤북지南橘北枳'된 셈인가.

(책 소개 미다시가 너무 세다. 편집자가 오버한다..)

 

Ps. 1.나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에 가봤다. 자랑임. ㅎ

      2. 연작 시리즈 중 1권이라니 다음 권도 빨리 출간해주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곱 도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4
다나카 요시키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뭐 하나 휘적거린다고 머물던 아무개 작업실에 이런 저런 책들이 많아서 자기 전에 아무거나 집어

들다가 발견한 책. 저자 이름을 보고 반가웠다. 이런 다나카 요시키 센세 아니신가.

 

을지서적판으로 <은하영웅전설>을 읽던 무렵이 내가 한창 바쁘게 살던 이십대 중반 무렵이었는

데 그때 다나카 요시키의 '삐딱선 프레임' (내가 define 한 것이므로 인용 시 레퍼런스 밝히길 ㅋ)

은  큰 조직 속에서 말 많은 사람들에게 치여 살던 나에게 제법 유용한 처세술 매뉴얼이 되었다.

(<은영전>은 SF가 아닌 정치소설 카테고리에 들어가야 한다.)

 

거리두기, 냉소와 회의..기본적으로 '인간종'에 대한 불신에 기반한 요시키의 세계관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와 상관없이 <은영전>과 마찬가지로 <일곱 도시 이야기>도 숱한 '인용하고 싶은 문구'들

의 보물섬이다. 뭐 쫌 오글거리는 중 2병 스타일의 경구도 있지만 정곡을 찌르는 근사한 아포리즘이 더 많다.

 

<일곱 도시 이야기>는 <은영전> 캐스트들이 같은 피디가 같은 소재로 연출한 단막극에 출연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 자체로  다나카 요시키스럽다. <은영전>을 본 이들이라면..아니

안보았더라도 충분히 끝내주는 책.

 

<은영전>도 완전판 박스셋으로 나왔다는 소식은 예전에 들었는데 잊고 있었다.

심란한데 은영전으로 한 시절 잊을까. 라인하르트.양 웬리...  반가운 이름들. ㅎㅎ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더니 잊고 있었던 '덕후질'의 불꽃이. ㅋ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3-04-09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사려고 보관중인 책인데요, 궁금해지네요. 은영전은 정말 명작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아직 완전판은 구하지 못했지만요. 사실 더 해보고 싶은건 은영전 게임인데, 이건 너무 어렵더라구요. 메뉴얼도 없고, windows의 한글/영어 호환도 문제가 있고해서 인스톨만 하고 못했었죠. 양 웬리는 정말 반가운 캐릭터입니다.ㅎ

알케 2013-04-09 14:23   좋아요 0 | URL
전 완전판 구해놨습니다. 좀 한가해지면 읽을 작정입니다. <은영전>게임이 있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