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단상 - 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 읽기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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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에 이어 고종석의 또다른 저서 <서얼단상>을 읽었다. 부제로 '한 전라도 사람의 세상 읽기'라고 달았듯 그는 이 땅에서 전라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이땅에서 전라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서얼'과 같은 삶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같으나 어머니가 다른, 즉 배다른 어머니를 둔 서자는 적자와는 달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 태생이 천한지라 그는 비록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미 태어남과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을 안고 있다. 이 땅에서 '전라도'가 그렇다. 반면 경상도는 그렇지 않다. 경상도는 이 땅에서 오랜 세월동안 주류였고 앞으로도 주류다. 경상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적어도 보통이상의 삶을 의미한다. 이 땅에서 개인의 삶에 학벌만큼이나 사회적으로 크게 작용하는 것이 지역주의다. 천박한 전라도인과는 달리 경상도인은 이미 태생과 함께 우월함을 지닌다.

고종석은 이 땅에서 전라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기본적으로 고찰한 후 이와 함께 자신의 삶과, 다른 전라도인의 삶의 경험에서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낸다.

선거 때면 이 나라에서는 평소에는 그나마 잠잠하던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전라도와 경상도로 구분된 지역주의는 그들 각자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몰표를 행사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해가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양상을 보이고는 있으나 아직 멀었다. 고종석은 '신분제로서의 지역주의'라는 첫 글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남과 호남의 '대립'을 큰 틀로 삼는다. 여타 지역의 지역주의는 이 큰 틀에서 파생된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또는 맥락에 따라 영남은 '비호남'으로 확장될 수도 있고, 드물기는 하지만 호남이 '비영남'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종주의가 그렇듯, 영남 대 호남의 '대립'도 대칭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두 지역 주민집단이 지닌 지역주의가 동일한 질의 것은 아니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여남의 지역주의는 패권적이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데 비해 호남의 지역주의는 반작용적이고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다."

이어 그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인종주의라는 것이 우월하다고 인정되는 인종이 열등하다고 인정되는 인종에게 갖는 태도와 감정을 주로 가리킨다면, 지역주의도 우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 주민집단이 열등하다고 인정되는 지역 주민집단에게 갖고 있는 태도와 감정을 주로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남에 대한 호남의 지역주의보다도 호남에 대한 영남의 지역주의가 더 전형적인 지역주의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에 대해 이보다 심정적으로 정확히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논리적인 명쾌함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논리적 근거를 뒷받침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그의 해석은 저널리스트로써, 또 이 땅의 지식인으로써 오랜 세월 관찰해왔던 그의 시각을 통해 축적된 내공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글에서 뿐만 아니라 나는 고종석의 글을 보면서 새롭게 깨닫는 바가 너무나도-'정말로'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나'많기에 '너무나'로 표현했다- 많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내게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내가 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전달해준다. 그것은 아직 내공이 약해 볼 수 없는 무대 뒷면의 것들이다.

그는 스스로 '희미한 우파'라고 하고, '자유주의자'라고 하지만, 우파가 되기에는 그는 이미 태생적으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미 서얼이기 때문이다. 자칭 우파라 하지만 사실상 그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진중권이나 강준만과 오히려 닮은 꼴이다. 나는 스스로 '좌파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이나 행동은 오히려 우파라 자칭하는 그에게 손톱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자신을 우파라 칭한다면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는 우파이기에는 너무나 왼쪽으로 걸어왔다.

고종석의 글은 물 흐르는 듯한 자유연상적 글쓰기의 형태를 지니고 있고, 문장과 단어가 깔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조심스럽고 약간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김병익보다는 덜 방어적이지만, 거침없는 '전투적 글쓰기'-고종석은 이 단어가 껄끄럽다고 한다-를 하고 있는 진중권이나 강준만보다는 확실히 방어적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 그의 글은 김규항의 글에서 느껴지는 비장미는 아니지만 김규항만큼이나 현실에 천착되어있다. 경험적인 내용들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글쓰기가 좋다. 김규항, 진중권, 강준만, 고종석 네 사람은 나를 항상 질책한다. 너는 왜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군 입대전까지 하던 글쟁이 짓을 지금은 안하고 있다. 삶이 너무 힘겹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핑계를 들어 나는 당분간 글쟁이 짓을 미루려고 한다. 기껏해야 읽은 책에 관해 끄적이는 정도가 다 일 터다. 하지만 내가 글쟁이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비록 못쓰는 글이지만 나는 적어도 잘쓰려고 노력은 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이 먹은 뒤에는 나만의 문체가 드러났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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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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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에 비해 꽤 오랜시간에 걸쳐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가 않아 한번 손에 잡으면 오래토록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칼 마르크스에 대한 평전임을 내세우고 있는 책이고, 실제로 평전의 내용을 담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상가들의 평전보다는 어렵다. 그의 생애라는 것이 사상을 논하지 않고는 펼쳐보일 수 없기에 이책은 평전임에도 상당부분 사상이 들어가 있다.

저자는 77년에 쓴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쓴지 40년 가까이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37년에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인데 당시 저자 이사야 벌린이 30살무렵이라고 하니 저자 또한 대단한 철학자였다. 그 젊은 나이에 마르크스를 꿰뚫고 그의 평전까지 쓸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자는 본래 이 책을 낼 때 마르크스의 경제, 정치, 사상에 대한 부분을 상당부분 집어넣으려고 했으나 출판사측의 요구로 지적전기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500쪽 넘는 분량으로 꽤 두꺼운 편인-평전치고는 두껍다고 할 수 없지만-이 책이 두세배 가량 늘어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서론, 청소년기, 정신철학, 청년 헤겔학파, 파리, 역사적 유물론, 1848년, 런던에서의 망명생활, 인터내셔널, 붉은 테러박사, 황혼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르크스에 있어 사상적 전환점이 되는 시기를 기준으로 차례를 나눈 듯 하다.

이 책이 읽기에 어려운 것은 마르크스의 어렵고 딱딱한 사상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저자 이사야 벌린은 평전쓰기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저자의 문체가 난해하기 때문에 책읽기가 퍽퍽한 것은 아닌듯하고 아마 번역의 문제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나의 무지함으로 비롯된 퍽퍽함을 일정부분 번역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원전과의 비교는 불가능하고, 번역체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마르크스에 관한 책들 중에서는 이 책이 그나마 쉬운 책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생애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다른 책도 읽기 힘든건 매한가지이니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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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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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지식인들을 다뤘다는 점에서, 어려운 한자어구들이 등장하는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베스트 셀러에 오를만한 책은 아니었음에도 이 책이 그렇게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제목의 대담성 때문이리라.

'미쳐야 미친다'는 제목은 한자어 '불광불급(不狂不及)'에서 나온 말로, 세상에 미치지 않고서 큰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메세지를 품고 있다. 이책은 이래저래 취업도 어렵고, 살아가기 팍팍한 세상에 '성공'이라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소재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잘 팔리는 책'의 잠재성을 갖고 태어났다.

물론 이 책은 최근 몇 년간 출판가, 서점가 불황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책인 '처세술'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그것과 모티브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잘 팔리는 책'이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열망하고, 무엇엔가 미치기를 열망한다. 이 책은 무언가에 미침으로써 성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문구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책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은 당대의 소외된 지식인들이라는 점에서-물론 그들의 이름이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있지만 당시에는 주류 지식인들이 아니었다-미침으로써 성공할 수 있다는 책의 제목이 품고 있는 메세지는 얼핏 책의 내용과 모순되어 보인다.

하지만 '큰일'이라는 것이 굳이 '성공'이라는 단어와 일치하지는 않다고 본다면, 이 책의 제목과 내용은 들어맞는다. 성공은 하지 못했지만 큰일을 도모할 수는 있었다?

허균, 권필,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김득신, 노긍, 김영 등은 당대의 마이너리티들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에피소드는 '정상적임'과 '평범함'을 벗어난다. 어떤 이는 싸이코 기질이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무엇엔가 미쳐있음으로써 이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죽은 뒤에 삶이 더 빛난 던 것이다.

내용언급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이 책을 읽은 뒤의 느낌을 말하자면, 아쉬움이 크다고 하겠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너무 많은데다 그 내용은 짧아 이들의 삶의 진수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이야기다. 한시를 읽으면서도, 지식인들의 삶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도 나는 가슴에 뭔가 퍽 와닿기보다는 눈으로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무릇 고전이라는 것은 후대에 재차 읽음으로써 새롭게 다가와야하는 것인데, 이 책은 그저 고전의 겉모습만을 쑥~ 핥고 지나갔다는 느낌이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에 많은 인물을 다루려한 것이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박 겉핥기라도 이들을 소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으로썬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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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자서전 -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
간디 지음, 함석헌 옮김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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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책은 <간디 자서전>(함석헌 역, 한길사)이다. 군에 있던 시절 책에 목마름을 느낀 나는 공용(행정상 타부대나 상급부대로 출장을 나가는 경우)을 가거나, 외출, 외박을 나갈 때면 꼭 한 권씩 책을 사오곤 했다. <간디자서전>은 그렇게 구입한 책이다. 그러나 군에 있을 때는 다른 책을 읽다가 이 책은 읽지 않은 채 나와 함께 제대하고 말았고, 나는 이제서야 이 책에 다시한번 눈길을 주었다.

애초 서점에 널려있는 수많은 자서전과 평전을 물리치고 <간디자서전>을 구입한 것은, 반전평화주의에 빠져있는 나에게 고등학교 시절 배운대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주체인 간디는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간디자서전>을 번역한 이가 '함석헌'이라는 점에도 끌렸다. 또한 출판사가 '한길사'라는 것도 조금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간디'와 '함석헌'과 '한길사'라는 삼박자가 어우러져 나의 손길에 닿았고 내것이 되었다.

<간디자서전>은 서문에 간디가 밝히고 있듯이 그의 '자서전'이라기 보다는 '진리실험 이야기'이다. 간디는 "만일 학문적 원리를 토론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자서전은 아예 쓰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하며, 목적이 자신이 "실제에 적용했던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자는데 있었"기에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꾸준한 실험이야기들을 하다보니 어린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삶이 섞여나올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이 책은 '자서전'의 색깔 또한 지니게 되었다.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그렇다. 간디는 그다지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고,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서 책을 좋아하는 학생도 아니었으며, 그다지 정의심에 불타는 인물도, 용기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대개의 '위인'이 지니고 있는 요소들을 단 하나도 지니지 못한 이 인물은 그저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대로 삶을 한발자욱씩 걸어왔을 뿐이다.

간디의 집안은 대대로 인도에서 총리를 지냈던 집안이기에 아버지에 이어 총리를 하려면 굉장한 뭔가가 있어야 했다. 특출난 경력이나 학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간디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척의 도움으로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게 되지만 인도에 온 뒤에도 그 자격증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인도법이 아닌 영국법에 관한 자격이었기 때문에 간디는 인도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공소장 작성이나 해주며 근근히 벌어먹었을 뿐이다. 그는 그 나이대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처럼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 남아프리카에 가게 되면서 그의 삶은 바뀐다. 그곳에서 각종 운동과 시위에 참석하게 되면서 간디는 주변 환경이 만들어준 유명인이 되었다. 간디 또한 개인적인 노력을 했겠지만 책을 읽은 뒤의 느낌은 간디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주변 환경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다. 그러나 간디의 '진리'를 향한 열정이 없었다면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의 위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진리를 쫓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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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망매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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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두번째로 출판된 소설이다. 이전에 난 그의 세번째 소설 <엘리야의 제야>를 읽었고, 이제야 <제망매>를 읽었다. 첫번째 소설인 <기자들>은 지금 절판되어 온데간데 찾을 수가 없다. <기자들>을 제외한 두 소설로서 고종석을 느껴본다.

<祭亡妹>라는 제목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동일 제목의 고대 향가다. 향가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고려 초까지 존속하였던 향찰(鄕札)로 표기된 한국 고유 정형시가(定型詩歌)"라고 정의된다. '제망매가'는 월명사라는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가 지은 것으로,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비는 10구체 향가로서 누이와의 못다한 정과 뼈저린 사별의 아픔이 종교적으로 승화되어 있다. 고종석의 <제망매>도 이와 크게 달리 하지 않는다. <제망매>안에는 '제망매', '서유기', '찬 기파랑', '사십세', '전녀총의 이여성 회장님께 드리는 공개 서한' 의 다섯개의 짧막한 소설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즉 소설 제목 '제망매'는 <제망매>가 담고 있는 다섯개의 소설 중 하나를 책의 제목으로 택한 것이다.

고종석의 소설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세번째 작품 <엘리자의 제야>를 통해 그의 소설의 주된 내용과 문체를 맛본 나는 그의 소설에 매료되었고, 돈이 생기자 보고 싶은 수많은 책들을 놔두고 그의 두번째 작품 <제망매>를 선택했다.

그의 소설은 지식인의 눈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이나 한편 세속적이고 일상적이다.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내용들 속에서 그는 '아웃사이더', '마이너리티'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비주류를 대상으로 하다보니 당연히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된다.

나는 고종석의 소설에서 항상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하지 못하겠다. 그의 소설 속에는 그의 살아온 배경과 주변인물들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야기들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의 장르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허구인데, 그의 소설 속에는 상당부분 진실이 담겨있다. 그것은 그의 신문사를 때려치고 파리로 간 그의 경험이기도 하고, 언어학을 공부한 그의 학문적 배경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한국일보에 지금까지도 연재하고 있는 '고종석의 오늘'이라는 코너에 등장하는 역사속의 인물들을 소설에 담아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모든 경험들이 소설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인데, 나는 그중 진실이 어디까지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어쨌든 이것은 나의 불평불만일 뿐이다.

<제망매>를 읽고 난 뒤에, 한가지 그에 대해 불편한 점이 있다면, 소설의 하나인 '전녀총의 이여성 회장님께 드리는 공개 서한'이다. 엄밀히 이것은 소설보다는 편지글이라고 해야 온당하다. 그는 이 글에서 머리가 나쁘고 이쁜 아이와 머리가 좋고 못생긴 아이는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한다고 피력한다. 즉, 직장에서 용모를 직원채용의 선정기준으로 하는 것은 고용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간섭하거나 부당하다고 말할 게재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얼굴이 못생기고 머리가 좋은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그를 옹호하면서, 머리가 나쁘고 얼굴이 이쁜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그를 옹호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그의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이해가 되면서도, 나의 '자유주의'에서는 심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함을 느낀다. 고종석은 스스로를 '중도우파', '자유주의자'라 지칭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견해는 타당하다. 하지만 나의 '좌파적 자유주의'에서 보면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거북하다. 나는 고종석의 다른 면은 모두 좋아하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그의 지나친 '자유주의'적 견해에 대해서는 심히 불쾌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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