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이라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영화광고문구에는 항상 '<매트릭스> 그 이후'라는 문구가 따라붙었었다. 그리고 유독 매트릭스와 함께 영화의 주인공이 키아누 리브스임을 강조했다. 이 영화는 어쩌면 '매트릭스'와 '키아누 리브스'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에게 덜 관심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홍보하는데 있어서 그 둘을 이용해먹었다 하더라도 영화의 품질은 결코 기대이하로 떨어지지 않은 작품이다. 한 마디로 인상 깊었다.

 영화는 <매트릭스>에 버금가는 현란한 개인기(?)와 액션을 선보이지는 않지만 고독한 한 영웅의 고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트릭스>와 공통적이다. 그런데 그 고독한 영웅은 두 영화 모두에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영웅은 탄생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다."라는 말은 두 영화 모두에 적용시킬 수 있다.

 태어날때부터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는 능력을 지닌 존 콘스탄틴.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마 혼혈족과 천사 혼혈족을 볼 수 있고, 악마 혼혈족을 퇴치하는 퇴마사다. 한때 자신의 이와 같은 능력을 저주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시 살아남았고 결국은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며 혼혈 악마를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일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악마의 아들이 이승으로 나타난 것이다. 콘스탄틴은 지상의 선악의 균등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악마의 아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선다.

 결국 예상했던대로 승리는 그의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영화의 중간중간 공포영화인지 사람 놀래키는 여러 장면들과 특수효과, 그리고 영화의 진행에 있어 전제되어있는 내용들로 인해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전해주고 있다. <매트릭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수많은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이 영화 역시 여러 가지 생각거리와 볼거리를 던져놓고 간다는 점에서 영화관람 후의 파장이 크다.
 
 이 영화는 기독교 홍보영화인가? 영화를 보고있자면 마치 교회 다니세요, 교회 안다니면 지옥가요. 아까 지옥불 보셨죠? 라고 관객에게 말하는 듯 하다. 시나리오를 만든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인지는 난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애초에 천국과 지옥을 전제하고 천사와 악마의 대결구도를 만듦으로써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당연시된다. 물론 영화 속의 가정이지만 함께 영화를 본 다른 이가 "우리 교회다니자"라는 말을 꺼낼 정도면-물론 우스개소리지만- 영화는 대단한 기독교 홍보효과를 뽑아내고 있다고 봐야겠다. 그야말로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엄청난 지옥불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믿어야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한다라는 메세지를 보이지 않게 흘려놓는다.

 영화 줄거리에서 특이할 점 또 하나는, 현실세계에도 천사와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이는 현실에도 천국와 지옥이 있다는 말이다.
현실은 선과 악이 대결하고 있으며 혼혈 천사와 악마는 인간의 행위에 전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매개를 통해 이들을 조종할 수는 있다. 천국과 지옥은 기독교에서 말하듯 죽음 뒤의 세계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도 존재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의 결과로 그것은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본 후에도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존재여부를 내게 묻는다고 해서 이에 대한 마당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메세지에는 공감한다. 그것의 목적이 구원이든 아니든 간에 현실 세계에서 바른 행위를 하고 선하게 살라는 것이다. 구원을 제외하고는 이는 모든 종교가 말하는 현실의 삶의 태도이다. 기독교라는 영화 속 배경은 내게 있어선 그저 하나의 영화 속 장치일 뿐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의 메시지다.

 우리네 현실 삶 속에서 혼혈 악마와 혼혈 천사가 존재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인에 따라 좀더 선한 본성을 키운 사람과 악한 본성을 키운 사람은 존재한다고 본다. 본래 인간은 백지상태라고 생각하며(중국의 고자의 성무성악설) 선과 악의 본성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자라나면서 어떤 본성을 키워내느냐에 따라 지금의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본다.

 어찌되었건 "착하게 살자"가 영화가 주는 메세지인 듯하다. 더불어 영화는 금연광고와 금주광고도 함께 하고 있다. 연신 담배만 피워대는 존 콘스탄틴은 결국 폐암으로 두달에서 일년정도밖에 못산다는 경고를 받고, 그의 친구이자 신부는 알콜 중독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적시에 알콜을 섭취하지 못함으로써 사망한다. 담배피지 맙시다. 과음하지 맙시다. 공익광고가 따로 필요없다.

 키아누 리브스는 이 영화를 통해 <매트릭스>에 이어 확실한 인류의 구원자 역할을 굳히게 되었다. 고독한 사색하는 어딘가 좀 어설퍼보이는 영웅의 이미지. 인류는 어쩌면 이런저런 갈등과 분쟁 속에서 구원자를 희망하며 영화 속에서 그 갈증을 해소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서양식의 성장중시, 물질중시의 풍조로 인한 여러 폐해의 속출이 동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매트릭스>에서도 그러했고, <콘스탄틴>에서도 그러하다. 레바논 태생이며 중국계 하와이인의 아버지를 두고 있는 키아누 리브스가 그 구원자 역할을 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원자로서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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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2-11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핏 예고편 보니, '데블스 애드버킷' 생각 나더군요.

마늘빵 2005-02-1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영화 굉장히 인상깊게 봤어요. 그러고보니 소재가 비슷하네요. ^^;
 
이문열과 김용옥 - 하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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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이론서적도 아닌데 책 한권 읽는데 3일이나 걸렸다. 아주 부담없는 인물비평서인데도 말이다. 설연휴임에도 이 정도라면 나는 참 놀고 먹는 백수다. 게으름증이 뼈 속까지 스며들었나보다.

 이 책은 <이문열과 김용옥> 전 2권 중 김용옥 비판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하권이다. 상권이 머리말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이문열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반면, 하권은 책의 절반 가량만을 김용옥을 위한 장에 할애하고 나머지는 다시 이문열에게로 돌아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강준만 교수는 이문열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나보다.

 상권을 읽고 쓴 리뷰에서 상권은 이문열, 하권은 김용옥을 위한 책이라고 말했지만 수정해야할 듯 하다. 김용옥 비판에 대한 글을 읽기 위해서는 하권만 읽어도 충분하지만, 이문열 비판을 위한 글을 읽기 위해선 상, 하권 모두 읽어야겠다. 단 하권의 앞 절반가량의 김용옥 부분을 제외하고 말이다.

 상권과 하권이 차이점은 또 있다. 이는 엄밀하게는 상권과 하권의 차이라기보다는 강준만의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한 시선의 차이라고 해야 옳겠다. 강준만은 이문열에 대해서는 '얄짤없다'. 하지만 김용옥에 대해서는 김용옥을 둘러싼 수많은 비판을 물리치고 그를 옹호하는 면모를 보인다. 심지어 일본 가나가와대 윤건차 교수의 책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에서 한국의 지식인 지도에 있어서 동일하게 '비판적 자유주의' 진영에 속해있는 진중권으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강준만은 김용옥을 옹호한다.

 물론 강준만은 김용옥을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김용옥 비판은 옹호에 비하면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그의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한 관점은 내가 책을 읽기전에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에 대한 그것과도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어 반갑기까지 하다.

 나는 강준만 만큼이나 구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이문열의 정치적 언사에 대해서 심히 불쾌했었고, 김용옥에 대한 항간의 비판에 대해서는 그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서 안아주고 싶었을 정도였다. 표현이 너무 너무 과장되었나? 어쨌든 나의 두 사람에 대한 시선은 이 책을 읽기전에도 강준만의 그것과 비슷했다.

 김용옥은 주변이 모두 경기고-서울대 출신인 KS 마크를 밟은 집안에서 자랐고, 홀로 지지리도 공부못하는 바보로 취급받으며 고려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SKY대학인데 바보 취급했다니 너무한다. 그래도 먹어준다는 학벌이 아닌가? 그럼 스카이도 못간 이들은 뭐가 되나? 이것도 스카이 아닌 이들에게 가해지는 또다른 '지식폭력'이다.

 어쨌든 김용옥은 한국사회 전체에서 보자면 괜찮은 학벌이지만 그 집안에서는 나홀로 돌탱이인 고려대를 들어갔고 무지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나보다. 그러한 집안의 지식폭력에 시달리며 그는 고려대 철학과에 재입학해 대학원을 마치고, 대만, 일본, 미국의 최고 대학들에서 학위를 받아 한국에 '당당하게' 돌아왔다. 서울대는 가볍게 제친 것이다. 그의 학벌 앞에서 서울대는 우습다. 게다가 40중반 나이에 원광대 한의학과까지 들어가 졸업하고 한의학 자격을 획득하다니. 실로 그의 공부벽이 놀랍다. 아니 학위수집벽이라 해야겠다. 

 그렇게 그는 한국사회에서 그 누구도 무지할 수 없는 막강화력의 학벌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자신의 철학을 펼친다. 그것도 최초로 EBS 방송을 통해 전국 생방송 중계되는 2시간 넘는 철학강의를 펼치다니 실로 놀랍다. 그런데 그 사실만으로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일반 시민들이 그의 강의에 푹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광기와도 같은 분위기다.

 바로 여기서 김용옥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다. 당신은 연예인인가, 철학자인가? 를 시작으로 도올이 펼치는 노자강의가 학계에서 통용되는 정식해석방식이 아닌갑네, 니 강의 방식이 영 마음에 안든다 왜 욕설을 지껄이느냐는 등 비판도 가지가지다. 자신을 천재, 신이라고 표현한 도올이 열받을만하다.

 강준만은 이들의 모든 가지각색의 비판들을 종합해 반론을 펴고 도올을 구해준다. 하지만 그라고 도올의 모든 것을 포용하지는 않는다. 극우 언론을 비롯한 수구반동세력의 입을 빌어 글을 쓰는 것이나 노태우, 김영삼의 똥구멍을 핥는 용비어천가를 내놓은 것도 영 못마땅하다. 이점에서는 나 또한 강준만에 동의한다. 나도 도올의 이런점만은 영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도올이 철학을 대중화시킨 점이나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학문을 아무나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지식폭력으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철학은 그들만이 언어가 아니다. 지금껏 그랬을지 모르지만 도올은 이를 거부하고 쉽게 쉽게 쓰고 일부러 재밌으라고 욕도 섞고 무당이 굿하듯 쇼도 하면서 강연을 한 것이다.

 그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답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다른 지식폭력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던 핵심적인 지식폭력, 지식의 독점을 깼다는 점에 비하면 그의 또다른 지식폭력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김용옥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학문을 혼자만 소유하려하지 않았고 대중과 함께 하길 바랬으며, 그것이 비록 쇼라는 형식을 통해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벌어졌다 하더라도 대단한 일임은 인정해야한다. 우박 쏟아지듯 하는 비판에 결국 방송을 그만두고 잠적해버렸지만 나는 그가 다시 나와 광기를 부려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덧붙이며...

 나는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있는 SKY 학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도올과도 같은 학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대학을 수직서열화시키는 이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대학의 수직서열화는 곧 한 개인의 인생의 수직서열화로 연결된다. 학벌을 타파하자는 구호는 간혹 곳곳에서 들리고 있지만 아직 멀었다. 학벌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라진 듯 보일 뿐이다.

 나는 서울의 중위권 학부 대학을 나와 스카이중 한 곳인 고려대 대학원으로 간다. 그러나 우리네 학벌사회에서 적용되는 것은 석사, 박사를 어디서 땄느냐보다는 학부를 어디나왔느냐다. 그 점에서 나는 비록 고려대로 가 석사를  받는다해도 학벌사회의 피해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도올이 지식폭력의 희생자였다고 하지만 도올은 나에 비하면 상위층에서 시작해 최상위층으로 올라선 셈이다. 나는 바닥에서 시작해야한다.

 또한 서열화에 있어서 나보다 못한 대학을 나온 이들은 나보다 더 밑에서부터 그들의 인생을 시작해야한다는 점에서 나보다 더한 지식폭력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학벌타파가 유일한 해법이지만 학벌은 타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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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2-0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첫직장에서 이대석사가 한명 있었는데 어느날 사장이 그 사람에 대해 "학력세탁이나 한 것이 말이야"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그 사람이 다른 여대학부를 나오고 대학원을 이대로 갔다 해서 한 말이더군요^^ 약간 끔찍하죠?

마늘빵 2005-02-09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런 너무하네요. 대학원을 좋은데 나와도 그걸 또 세탁했다고 하는군요. 우리나라의 학벌구분이 역시 '학부'에 있다는걸 증명하는 한 사례네요.
 
이문열과 김용옥 - 하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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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주의는 하나의 인식론임과 동시에 하나의 신앙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라는, 포착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실존한다고 일컬어지는 현상에 대한 존경만이 아니라 숭배까지를 요구한다. 대학들은 그런 이데올로기의 제조공장이자 그런 신앙의 신전이 되어왔다. 하버드대학은 그 문장에 진리(veritas)라는 말을 새겨놓고 있다. ...... 문화적 이상으로서의 진리는 하나의 아편으로서, 그것도 어쩌면 근대세계에서 유일하게 심각한 아편으로서 기능해왔다."
이매뉴얼 워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창작과 비평사, 1993), 85-86 -15쪽

"한국 사회, 특히 지식계엔 '긴장'이 필요하다. 지금 그게 너무 없어서 탈이다. 이름을 얻으면 얻는 만큼 언제든지 씹힐 수 밖에 없다는 걸 각오해야한다. 그건 매우 공평한 게임이다. 유명 지식인들이 씹히지 않게끔 몸조심하고 계속 공부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 나라가 잘 된다."-70쪽

"어떻게 해서든 자기 메시지 전파를 위해 대중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대중매체 중독증'을 갖는건 당연한게 아닐까? 텔레비젼과 김용옥은 상호 공생관계였지 김용옥이 무리를 저질러가며 무슨 치열한 롤비를 한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진짜 문제삼아야 할 '대중매체 중독증'은 좌파, 진보적 지식인들이 '조선일보'를 상종하는게 아닐까?"-83쪽

"번역이란 정보의 대중화, 민중화, 즉 민주화를 뜻한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화란 '누구든지 같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번역은 우리말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칸트철학에 같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같이 참여할 수 있게 한다는 그러한 전제가 없는 번역은 참다운 번역이 되지 못한다. 칸트의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칸트에 대하여 강의한다는 것은 칸트를 독점한 자가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칸트를 강요하는 일방적 부과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해방 후 오늘날까지 우리 학계를 지배해 온 '주입식 교육'이라는 것의 정체다! 정보가 민주화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정보를 독점한 자만이 특권을 누리게 된다. ... 중략 ... 논쟁에 있어서도 그들의 발언은 절대적 권위를 지닐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이 부재하여 상호간에 자극, 발전이 없게 되고, 따라서 그러한 학계는 정체되고 마는 것이다."-85쪽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고전이 아닙니다. 모든 고전은 몽땅 다시 해석되어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건 똥경이건 모든 고전에 고전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모든 정치권력에 맹목적으로 복속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한 고전 이해는 '왕정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의 멘탈리티에나 적합한 것인데 오늘 '민주시대'를 구가하는 인간들도 고전 이해에 있어서는 그러한 멘탈리티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위선이며 괴리감이며 불철저성입니다."(김용옥, <절차탁마대기만성 : 도올문집> 3-4쪽)-88쪽

"지식인이 민중을 저항으로 유도할 경우에는 반드시 결과에 대한 책임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김동춘)-92쪽

"김용옥은 원래부터 편협하고 보수적인 학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학계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학계가 그에게 제공할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101쪽

"그러나 적어도 현재 상태에서 말한다면 지금 내가 우리 지식사회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정직하게 느낀대로 표현해내야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분노를 너무 성숙시키고 절제하여 애쓰다 보면 잘못된 것에 대한 본질적인 파악력을 놓쳐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분노를 표출하고 그 대가로 자신을 고독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역사 앞에 철저한 단독자로서 설 수 있다는 사실은 창조적 사상가로서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옥, 김현 <김용옥의 '저술세계' : 철학에서 연극, 영화, 동화론까지> '조선일보' 1989년 6월 27일, 9면.-107쪽

"나는 욕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건전하게 수용해야 할 하나의 문화 양식인 것이지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것처럼 언어는 권력의 한 체계입니다. 즉 욕설을 저속한 것으로 규정하는 계층의 사람들은 그 권력 체계에서 득을 보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사실은 욕설보다 더욱 저급한 차원에 있는 권력의 노예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욕설의 사회화를 통해 우리의 기존 언어관에 혼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역사를 보편 한 시대가 혁명을 겪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언어 체계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이런점에서 나의 책에 나오는 욕설은 매우 중요한 선례를 남기게 될 것으로 봅니다."
(김용옥, 김현 <김용옥의 '저술세계' : 철학에서 연극, 영화, 동화론까지> '조선일보' 1989년 6월 27일, 9면.-107쪽

"소위 논문이라는 형식 자체가 근대 서구 대학교육에서 성립한 모종의 특수 형식을 지칭하는 것이지 철학논문 일반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가 없음은 명백하다. 좀 더 자세히 그 일치된 관념을 분석해 보면 그것이 너무도 막연하고 근거 없는 허구임이 드러난다. 그들의 관념은 이런 것이다. 일인칭을 쓰지 않는 서술문으로 감정의 표현이 없이 메마르게 쓸 것, 엄숙하고 고상한 말들만 골라 나열할 것, 철학사의 기존 개념의 조합속에서만 맴돌 것, 그리고 설명없는(저자, 책명 등만 나열하는) 주석을 붙일 것 등등이다. ...중략... '논문'이란 '자기의 주장을 펴서 시비적부를 가리는 글'이며 여기에 어떠한 일정한 양식이 주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주장을 펴기 위해서, 또 자기 나름대로 체계를 의식하면서,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양식이 자유롭게 동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옥, 최영애 <도올 논문집>(통나무, 1991), 92-94)-127쪽

"나는 '공정한' '잣대'를 가지고 한국 진보적 지식인의 '치정주의'를 비판하는 강준만이 '살랑살랑 꼬리를 치는' 정도를 넘어 아예 노태우, 김우중 똥구멍을 핥으려 했던 김용옥 '똥' 강아지를 종자있는 강아지 족보에 올려놓고 '대국적으로 밀어 주자'고 말한 걸 읽은 기억이 난다" (진중권)-135쪽

"저는 지식인의 저널리즘 행위 또는 대중매체 이용 행태와 그 내용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도 건드리고 국문학자도 건드리고 경제학자도 건드리고 정치학자도 건드리고 소설가도 건드려 왔습니다. 제가 아무리 그 분야에 대해 문외한일망정 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생산해내는 현실 참여적 글과 말에 대해서는 평가할 자격과 능력이 저에게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저의 그런 믿음이 타당하며 그런 믿음에 근거한 저의 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159쪽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분노는 결코 맹목이 아니다. 그것도 판단하고 선택하고 용납하고 거부한다. 그러니 분노하지 않는 법을 배울 게 아니라 제대로 분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왕주, <쾌락의 옹호>(문학과 지성사, 2001), 43쪽)-177쪽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돼 있지만 또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권력은 무조건 악이라고 공격하면 최악의 권력만 살아남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나는 '열린 권력'이라는 개념을 주장하고 싶다. 스스로 비판하고 비판을 환영함으로써 권력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권력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권력의 부작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유형의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자는 것이다. 권력은 무조건 악이라는 주장은 최악의 권력에 봉사하는 어리석은 자해행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184쪽

"'지식폭력'을 살펴보자. 대학을 나오지 못했거나 서울대를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서울대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어도 서울대 비판을 꺼려한다. 누군가가 글이나 말에 유명한 서양 사상가 이름을 들먹이면서 이야기를 하면 그 사상가가 누구냐고 묻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사람 주장에 뭔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 한 편을 읽어도 뭔가 남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지식으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게 다 '헤게모니'가 성립된 '지식폭력' 현상인 것이다."-204쪽

"삶과 앎이 따로 노는 사회에서는 삶과 유리된 앎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득권 강화를 위해 삶과 관련된 지식을 폄하하기 마련이며, 바로 그런 풍토 속에서 '지식폭력'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214쪽

"학력자격이 보증하는 '교양'은 지배자 측의 정의에서 '완벽한 인간'의 기본적 구성요소의 하나이고, 그 결과 교양 없음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훼손하는 본질적인 결함으로 인식되는데, 모든 공식적 상황, 즉 자신의 신체와 매너, 언어와 함께 다른 이들 앞에 설 때, 그 사람은 침묵을 강요당하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下>(새물결, 1996), 642-643)-232쪽

"관찰된 대상에 따라 관찰 지점을 변하게 할 수 있고 각각의 관점을 연속적으로, 그리고 분리해서 취할 수 있는 그들의 성향과 적응력 때문에 그들은 좌익과 우익에게 다른 쪽이 취하는, 또는 취해야 할 이미지를 돌려보내면서 좌우익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중립주의를 취한다. 그들은 이러한 객관성의 외양을 논쟁적으로 사용하는데 탁월하다"
(피에르 부르디외, <예술의 규칙 : 문학 장의 기원과 구조>(동문선, 1999), 367)-236쪽

"사회주의자라고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오로지 민족주의만을 연구해야 하고, 잡문은 입장이 들어가므로 학술 논문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문 사회의 정서는 정신병적 상황이다. 분단과 군사독재는 우리를 이러한 정신병적인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한번도 전복적인 자유주의나 개인주의가 나타난 적이 없다. 그러한 전복적인 개인주의자라면 이러한 우상과 위선의 덩어리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따라서 나는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을 의심한다. 나의 일은 정치가 아니며 나는 정치를 모른다는 사람들을 더욱 의심한다. 그래서 인간의 논리, 혹은 문화의 이름으로 '정치'를 떠난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많다."
(김동춘, <탈정치의 시대에 '정치'를 생각한다>, '현대사상' 제 4호(1997년 겨울), 263-264쪽)-239쪽

"현재 한국 사회의 주요 갈등 구도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상식-반 상식' 문제라는 게 나의 소신인 것이다."-253쪽

"일부 좌파, 진보적 지식인이 저지르는 '지식폭력'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도덕적 우월감'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지식폭력'과 또 다른 하나는 실천은 전혀 없이 '허공에만 대고 떠드는 거대 담론'을 주무기로 한 '지식폭력'이다."-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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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크루트. 국내채용정보사이트가 아니다. 영화 제목이다.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외국 영화배우들 중 일부인 알파치노와 콜린파렐 주연의 심리스릴러. 좋아하는 배우에 좋아하는 영화장르까지 딱이다.

 영화 <리크루트>의 소재는 미국범죄영화에서 흔히 우려먹는 CIA 이다. 그러나 다른 영화가 CIA를 그저 영화에 출연하는 한 인물의 근무지 혹은 주변배경 정도로 그치는데 반해 <리크루트>에서 CIA는 좀더 깊이있게 영화 속으로 침투한다. 엄밀히 CIA훈련과정에서 벌어지는 조교와 교육생간의 관계, 교육생들간의 관계, 그리고 고도의 심리전 등 CIA는 주변배경이 아닌 영화 자체로서 써먹힌다.

  영화를 보면서도 콜린파렐이 경험하고 있는 현장이 훈련일까 실제일까 궁금해하며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반전과 반전이 거듭하고, 끝내 뭔지 모르겠다 하는 혼란을 틈타 막판 뒤집기가 진행되며 마무리짓는 영화는 비로소 영화가 끝난 뒤에야 아 그거구나 하며 꼭 붙잡고 있던 마음을 놓게 된다.

 난 이와 같은 심리스릴러가 좋다. 그냥 스릴러도 좋아하지만 거기에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스릴러라면 더더욱 좋다. 또 스릴러가 아니더라도 미묘한 심리전이 들어가 있는 법정영화도 좋아한다. 이런 영화는 가슴으로 느끼는 영화이기 보다는 관객의 머리 속에서 치밀한 싸움이 진행되며 뭘까 뭘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에 가지를 치며 추리를 하게 만든다. 영화가 지적욕구를 유발시키고 채워주는 것이다. 물론 가슴을 따뜻하게 울리는 감동적인 영화들도 매력적이지만 머리싸움을 끌어내는 스릴러도 매력이 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콜린파렐을 내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폰부스>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통해서였다. 지적인 이미지에 날렵한 체격을 지닌 그는 앞의 두 영화와 본 영화에서 모두 지능적인 역할을 맡고 소화내했다. 그 전에는 그가 출연한 수많은 영화들에서 그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스피드>와 <매트릭스>시리즈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키아누 리브스보다도 배우로서 더 매력적이다. 키아누 리브스보다 미끈하고 완벽한 역할은 아니지만 그가 영화 속에서 소화해내는 역할들은 지능적이지만 어딘가 부족한 듯한 냄새를 풍기는 약간은 어설픔이 들어있는 그런 인간이다. 물론 배우로서의 역할이 본인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특정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기 위해선 배우 본인에게 들어있는 잠재적인 요인들이 표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어설픈 지적인 남자의 이미지를 콜린파렐이 제대로 소화해냈고 나는 거기서 그의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로보나 탄탄한 시나리오로 보나 극적 사실감으로 보나 손색이 없는 영화다. 세번 봤지만 그래도 재밌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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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아톤>을 알기 전에 TV의 어느 아침 프로그램을 통해 먼저 그와 그의 어머니를 접했다. 내가 그를 본 것은 잠깐이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게 된 그동안의 사연은 정말이지 인간 승리였다. 그렇게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말아톤>은 그와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화제거리가 되었고 그 감동의 세월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영화관을 찾았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사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이 기대할 것은 실화의 내용과 감동뿐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서 대강의 줄거리는 접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줄거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실제모델 배형진, 영화 속 인물 윤초원. 그는 5살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진 20살 청년이다. 외관상 보기에는 괜찮은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초코파이와 얼룩말, 달리기를 좋아한다.

 그가 실제로 달리기를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만이 알뿐.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를 위해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을 바쳐가며 아들을 위한 삶을 살아온 엄마 경숙은 아들을 온전히 바꿔놓음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녀는 이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이에게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엄마로부터 버림받을 것이 두려운 초원은 그저 엄마가 원하는 일이면 좋단다. 결코 싫다,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달리기는 그저 엄마가 아이에게 강요한 한 가지 일에 불과했던 것일까? 엄마는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면서 나중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이에게 주입시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정말 초원이가 원했던 것도 달리기였다. 초원이는 달리기 위해 홀로 춘천까지 갔다.

 이 영화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인간승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 어머니라는 존재의 강한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모성애는 때로는 지나친 집착으로 내몰리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영화 속 초원의 동생 중원이와 같이 반항심이 가득해지기도 하지만 사랑이 지나치면 아이에게 지나친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줄 수도 있다. 단지 초원이는 이를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영화의 감독 정윤철은 <말아톤>이 그의 첫 장편데뷔작일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도 처음 들었다. 그의 이름을. 그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실제 인물 배형진과 함께 마라톤 클럽에 가입해 일년여동안 함께 뛰었다고 한다. 뛰면서 그의 마음을 읽으려 했고 느끼려 했다. 영화 <말아톤>의 감동적인 장면 하나하나는 온전히 그의 이러한 기나긴 노력의 산물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기는 쉽다. 왜냐면 줄거리를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화를 실화만큼이나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실화가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실화여서가 아니라 실화에 담긴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 3자가 그 사연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엮여내 감동을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감독은 그것을 느끼고자 실제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체험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이 영화를 통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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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5-03-19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애들 데리고 자동차 극장 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