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워지고 여름이 다가오다 보니 이제 서서히 공포영화들이 속속 개봉하고 있다. 올 여름 공포영화물의 시작을 알리는 <그루지>는 사실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일본의 공포영화 <주온> 1편과 2편의 미국 리메이크작인 <그루지>는 이미 <주온>시리즈를 본 사람에겐 익숙한 장면들이다. 단지 달라진 것은 주연인 일본인이 아닌 미국인이라는 점만 다를 뿐.

 이제 더 이상 미국식 공포물은 우리에게 식상하다. 매번 똑같이 등장하는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마들. 미국의 공포영화를 보면서 으례 이런 장면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런 시점에서 일본의 공포영화가 안겨주는 그 섬뜩함은 참신하다. 미국의 공포영화가 단 하나의 괴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오로지 그에 의한 공포를 조성한다면 일본의 공포영화는 괴물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처해진 상황이 안겨주는 섬뜩함을 공포의 요인으로 삼고 있다.

 이미 일본의 또다른 공포영화 <링>이 미국식으로 리메이크된지 오래고 곧 리메이크작 <링2>가 다시 나온다. 그리고 <그루지>는 단지 일본 공포영화 <주온>을 이름만 바꿔 내놓은 작품이다. '주온'은 본래 '죽음 사람의 저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고, '그루지'는 '원한'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뜻은 그대로 지닌채 단어만 교체한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영화 <그루지>가 <주온>의 재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상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을 모르고 봤으니.

 <그루지>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주온>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이미 <주온>을 봤지만 내가 <주온>을 봤을 때 느꼈던 그런 섬뜩함은 <그루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영화를 두번 보면 처음의 느낌이 반감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루지>를 볼 때는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이 영화 주온이랑 비슷하네? 재탕이구나! 라는 생각만 가졌을 뿐. 그런 점에서 <주온>을 재탕한 <그루지>는 나름대로 제대로 리메이크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내가 <주온>을 본지 오래됐고 이를 전부 기억해내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무감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주온>을 이미 본 사람에게 영화표 값을 지불하고 다시 보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주온>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봐도 무방할 듯. 아니 어쩌면 이 영화는 <주온>을 보고 푹 빠져들었던 사람들이 봐야할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줄거리와 공포가 목적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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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5-06-0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온 받는데, 제가 3초 기억력? 뭐 그런 비슷한거라서
그루지에서 '아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봤는데 ..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야 주온을 리메이크한 걸 알았다는 ;
근데 정말정말 무서웠어요! 역시 이런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제맛 ! +_+

마늘빵 2005-06-0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쵸 주온을 기억못한다면 재밌는 영화죠. 전 봤던 장면이 또 나와서 다음엔 이렇겠구나 하고 예상을 하고 보니깐 조금 진부하더라구요.
 

 

 

 

 

"전 세계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그것! 섹스" 라는 포스터 문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시선을 집중시켰던 영화 <킨제이 보고서>. 하지만 아무리 포스터 문구로 시선을 끈다해도 영화의 본질을 알아버린 예비관객들은 다른 영화로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보고서'를 다루고 있으며 그 대상이 비록 '섹스'가 됐을지라도 영화 자체가 지루하고 따분할 거라는 인상을 받은 예비관객들은 이 영화로 몰리지 않았다. 상영관을 잡지 못한 것도 영화의 상업적 성공의 패배요인중의 하나이다. 나는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봤지만 그곳에서조차도 아주 작은 상영관 하나만을 '킨제이'에게 할애하고 있었다.

영화는 말 그대로 섹스를 다루고 있다. 모든 정신분석을 성적인 것과 관련지어 해석한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나고 나치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성 연구의 주도권이 독일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 성 연구에 있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미국에서는 표본조사를 토대로 한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특정인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성 연구를 했지만 미국에서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면담을 하거나 설문을 실시하는 등의 표본조사를 통해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한 방식을 도입해 최초로 성과를 거둔 인물이 바로 킨제이 박사이다.

그는 미국 전역에서 1만 8천명을 면접해서 1만 2천건의 자료를 가지고 두 권의 책을 냈는데 하나는 남자의 성행위, 다른 하나는 여자의 성행위에 대한 책이었다.

이 책이 파장을 일으킨 것은 표본조사의 결과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개 정상적인 이성애자 부부 사이에서 정상체위만을 하려니 생각했던 기존의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깨져버린 것이다.

동성애를 경험한 남성이 37%나 있었고, 여성의 절반이 혼전성교를 경험했으며, 26%의 유부녀가 간통경험이 있었다. 또한 여성의 오르가슴에 있어서도 남자가 한번 경험하는 동안 여자가 10여차례 경험한 사례도 있었다.

킨제이는 이 책으로 하룻밤만에 일약 스타가 되어있었고 이후 온갖 잡지의 표지모델을 차지했으며,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외면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이 부끄러워서 혹은 이 보고서로 인해 많은 비정상적인(?) 성행위가 난무할까봐 두려워서 사실을 부정하고 킨제이를 비난하기에 이른 것이다.

킨제이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킨제이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았지만 이후로 록펠러는 지원을 끊었고 결국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던 킨제이는 2년후 사망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킨제이 보고서>가 정말 사실일까? 믿어도 되는 걸까? 그 시대의 많은 미국인들이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품었을 것이고 그래서 킨제이를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믿을만한 것인가? 킨제이 보고서는 유례없는 대규모의 사람들의 면접과 설문을 통해 얻어낸 결과이므로 믿어도 될 듯 싶다. 하지만 킨제이 보고서의 표본연구 대상자가 1만 8천명이라는 점은 여전히 미국 전역의 인구를 대표하기에는 부족한 수치인 듯 하다. 또 면접에 응한 사람들과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만약 면접에 응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점도 하나의 의문거리다. 정상적인(?)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아닌 특별한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면접에 응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

감독이 <킨제이 보고서>를 영화로 만든 이유는 뭐였을까? 오래된 보고서이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보고서이겠지만 일반인들은 아직 이런 보고서를 접해본 사실이 없고 그래서 당시에 충격적이었던 이 보고서의 내용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감독은 충분히 성과를 달성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킨제이 보고서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킨제이 보고서>는 정말 놀랍다. 하지만 킨제이 보고서가 빠뜨리고 있는 점이 있다면 섹스를 사랑과 분리했다는 점이다. 대개의 섹스는 사랑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킨제이는 철저하게 섹스를 사랑과 분리했고, 사랑과 연관지어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순전히 섹스만을 가지고 보고서를 작성했을 뿐. 물론 보고서상의 실수는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킨제이는 자신의 젊은 동료와 동성애를 갖고, 젊은 동료는 또다시 킨제이의 부인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킨제이 또한 이를 허락한다. 이런 엽기적인 일이. 그리고 그 젊은 동료는 또다시 다른 동료의 부인과 관계를 맺고 결국 그 둘은 사랑에 빠져버린다. 이후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 부인의 남편과 젊은 동료는 서로 치고박고 싸우게 된다. 킨제이가 사랑을 제외하고 섹스를 연구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사랑없는 섹스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또한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린 것이다. 오히려 사랑없이 섹스를 하는 경우보다 사랑해서 섹스를 하는 경우가 더 많을텐데도 말이다.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

나는 성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고, 성관념이 개방적이 되어버린 이 시대를 살고 있지만 킨제이 보고서의 사회적 파장에 대해서는 당시에 킨제이를 비난했던 사람과 비슷한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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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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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클베리핀. 굳이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이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허클베리핀은 '모험'을 상징하는 인물의 일반명사가 되어버렸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모험을 상징하는 다른 문학서 <톰 소여의 모험>과 함께 언급되곤 한다. 실제 <허클베리핀의 모험>에는 톰 소여가 중심인물로서 등장하고 <톰 소여의 모험>에도 역시 허클베리핀이 그의 친한 친구로서 등장한다. 두 소설은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수많은 번역서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언급하고 있는 1998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이 번역서는 이전의 다른 번역서들과 달리 <허클베리핀의 모험> 완역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가을 로스엔젤레스의 한 다락방에서 우연히 발견된 마크 트웨인의 친필원고. 이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허클베리핀의 모험> 보다 100페이지 가량이 더 첨가되었으며 질적으로도 더 우수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민음사에서 번역한 이 책은 분량이 매우 두껍다. 해설을 빼고만도 600페이지에 달한다. 그래서 어쩌면 청소년추천도서로 소개되곤 하지만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인해 쉽게 읽히는 내용과 상관없이 청소년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책인지도 모르겠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어릴적부터 인쇄소 견습 식자공, 저널리스트, 수로 안내인, 출판업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미시시피 강 주변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뿐 아니라 <톰 소여의 모험>과 <미시시피강의 추억>에서도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으며 후에 이 세 소설을 일컬어 미시시피 3부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시시피강을 배경으로 장난꾸러기 허클베리핀이 주정뱅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있을 무렵 만난 흑인노예 짐과 함께 겪는 모험담을 담고 있다. 소설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쉴새없이 펼쳐지는 구조로 되어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들에서 그리고 소설 전체에서 작가는 자연과 문명을 대립시키고, 문명을 비판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문명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타락한 모습들을 아버지, 공작, 왕 등의 캐릭터들을 통해 보여주고 헉과 짐, 톰 소여는 이들을 조롱하는 대립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헉, 짐, 톰이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조롱하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작가는 재미를 부각시키려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진중권씨가 어디선가 신랄한 비판보다는 웃음을 자아내는 조롱이 더 효과적인 비판 방법이라고 말했듯 마크 트웨인의 문명을 향한 조롱은 매우 유쾌하다.

 쉽고 재미있는 내용임에도 6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은 역시 내게도 부담스러웠고 이 책을 읽는데 이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것은 시간의 부족과 여유없음, 게으름의 조합으로 인한 결과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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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하지 않으면 몸을 완전히 맡길 수 없어. 춤을 출 때만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댄서의 순정>이라는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사이다.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고 무릎도 다치게 된 1급 스포츠 댄스 트레이너 나영새. 그가 연변처녀 장채린에게 춤을 가르치며 던진 말 한마디. 영새는 채린에게 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친 것이고, 채린은 영새에게 춤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운 것이었다.

 1급 스포츠 댄스 트레이너이자 댄서였던 나영새는 자신이 가르쳐서 파트너로 삼은 사랑하는 여자 세영을 라이벌이자 재력가인 현수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대회도중 현수의 고의적인 행위로 무릎을 심하게 다쳐 그 바닥을 뜬지 오래다.

 하지만 선배 상두의 권유로 중국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연변처녀를 파트너 삼게 되는데 이런! 기대했던 연변처녀는 안오고 그녀의 19살 먹은 동생 장채린이 와버렸다. 몸치다.

 하지만 영새는 순수한 그녀를 가련함 반, 동정심 반으로-그거나 그거나-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몸치에서 최고의 댄서로 변신시킨다. 하지만 또 현수의 작업이 시작되고, 결국 그녀는 영새를 위해 현수에게 가고, 결국 댄스 스포츠 대회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며 우승한다.

 어쩌면 <댄서의 순정>은 오직 문근영을 위한, 문근영에 의한, 문근영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문근영'이라는 이름 석자는 이제 더이상 우리에게 어린 여배우 정도로 인식되지 않고 다른 어떤 일급 여배우들과 견주어도 뒤쳐지지 않는 하나의 문화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문근영' 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상업적인 성공은 보장받는다.

 <댄서의 순정>이 아쉬운 점은 바로 그런 점이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향해 이런 지적을 했다.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댄스영화가 없다. 댄스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영화 속에서 댄스는 소재로서 쓰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댄서의 순정> 역시도 문근영이라는 자라나는 문화권력(?) 앞에서 댄스는 묻혀지고 말았다. 관객은 댄스를 보러 영화관에 가지 않고 문근영을 보러 영화관에 간다. 나 역시도 그러했고.

 어쩌면 이 영화가 댄스를 위한 영화가 되길 바라는 것은 우리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감독도 그런 의도로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고, 배우도 그런 의도로 연기를 한 것이 아닌데 일부 관객들이 그렇길 바라는 희망사항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에 아쉬움은 표하지만 영화를 비판할 수는 없다.

 댄스가 주가 되기 보다 배우가 주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문근영과 박건형은 이 영화에서 대단한 댄스 실력을 보여주었고 우리는 충분히 볼거리를 보상받았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잘 출 수가 있나. 물론 카메라 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정말 단기간에 이와같은 댄스실력을 키웠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마냥 어리기만 할 것 같은 문근영이 이제 고3이 되었고,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서서히 그녀는 연기변신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쁘고 공부 열심히 한다는 고3이 연기를 병행하면서 이만한 성과를 낸다는 것은 개인의 부단한 노력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녀는 또 공부도 잘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쁘고, 공부 잘하고, 연기도 잘 하고 뭐 하나 빠지는 거 없는 문근영. 그녀를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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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다 본 뒤에야 그 였음을 알게 됐다. 리들리 스콧 감독. 그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감독이었다.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 계속 입 속에서 되뇌이면서 어느 영화의 감독이었지. 내 머리 속에 그의 이름은 꽤 좋게 기억되어있었는데 정작 어느 영화의 감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보고나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의 전작 <글래디에이터>와 꽤나 유사하다. 엄청난 스케일과 웅장함, 그리고 한낱 대장장이에서 왕국을 살리게 되는 영웅, 이 영웅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죽이려드는 왕국의 후계자, 영웅을 좋아하는 신분 고귀한 여왕. 이 모든 것이 <글래디에이터>를 답습하고 있다. <글래디에이터>만큼의 화려하고 거친 긴장감 넘치는 결투씬은 없지만 그보다 더 웅장하고 스케일이 크다.

 <킹덤 오브 헤븐> 하늘의 왕국. 좀더 들어가면 하느님의 왕국. 즉 예루살렘을 둘러싼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인가. 기독교인에게, 유대인에게, 무슬림에게.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유럽인들은 다른 믿음과 종교를 가진 이방인들에 대항해 싸운 크리스트교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믿는다. 십자군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예루살렘을 찾아 크리스트교의 통치아래 두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찾으면 골고다 언덕에 올라 성묘 교회에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그 묘에 묻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발리안은 예루살렘을 맨 먼저 찾았을 때 그곳에 올라 기도를 올린다.

 한편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찾으면 통곡의 벽을 찾아 운다고 한다. 유서 깊은 유대교 성전을 로마 군이 파괴한 뒤 이 성전의 잔해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또 무슬림들은 이곳을 찾으면 오마르 사원을 찾아 반석 위의 돔에 참배를 한다. 예언자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천마를 타고 와 이곳에서 승천, 일곱 하늘을 돌아보고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각각의 종교인들에게 소중한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3000년경 한 가나안 부족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생겨났다. 그들은 이곳을 '평화의 도시'란 뜻의 '우루살림'으로 불렀는데 유대인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 이 도시의 운명은 이름과 달리 기구하기만 했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로마 등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렸으며 로마가 기독교의 성지로 인정한 다음에는 사산 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았다. 전화로 얼룩져온 예루살렘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100년 전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점령하면서부터 였다. 우마이야 왕조는 승천 장소에 사원을 세웠지만 기독교도나 유대교도가 자기들의 성지를 참배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11세기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유럽의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영화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부터 시작이 되고 비록 기독교인들이 정복한 상태지만 타종교인들에게도 예루살렘을 개방시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죽고 후계자인 여왕이 즉위 그의 남편 가이 드 루시안에게 왕권을 이양함으로써 상황은 바뀐다. 그는 전쟁광이고, 대군을 이끌로 살라딘에 맞섰다. 결과는 살라딘의 대승. 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발리안은 남은 기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사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살라딘의 엄청난 대군의 공격을 마냥 버텨낼 수는 없다. 결국 성벽은 무너지고. 하지만 자비로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가져가되 그 안의 백성들은 온전히 살려준다.
 
 감독은 이점에 있어서 지극히 두 종교에 공정했다. 대개 부시를 위시한 미국인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전쟁의 근거로 내세우며 충동질하는데 반해 리들리 스콧은 양쪽 종교에 공정한 시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살라딘은 무자비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궁지에 몰린 기독교인들을 살려줌으로써 관용을 베풀었고, 그동안의 무수한 기독교와의 전쟁에서의 패배를 복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자비했던 것은 십자군이었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에 갇힌 기독교인들을 살려주는 장면이 왜 이리도 감동적으로 다가오는지. 이 영화는 부시와 그의 작전참모들이 봐야만 했다. 기독교만이 선이오 나머지는 악이다 라는 문구는 이곳에 없었다.

 십자군 전쟁은 영화에서도 밝혔듯이 종교를 위한 싸움은 아니었다. 종교는 핑계였을 뿐 저들은 자신들의 위대함을 알리려 했으며, 모험과 약탈과 정복의 기회로서 삼았을 뿐이었다. 그 어느 곳에도 신은 없었다. 신은 단지 핑계였을 뿐. 발리안이 이슬람인들과의 평화공존을 외치는 대목에서 어떤 이는 신성모독이라고 했지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이 모시는 신이나 우리가 모시는 신이나 같은 신이다. 단지 이름만 다를 뿐.

 영화는 화려한 전투씬과 권력암투, 사랑 등 수많은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그 안에 담긴 이와같은 메세지를 읽어낸다면 더욱 감동적이고 값지게 다가올 것이다.

 "어느 곳에도 신은 없다. 신은 단지 핑계일뿐."

 하나 더.
 
 발리안이 예루살렘을 사수하며 그곳에 남은 백성들을 모두 무릎 꿇리고 기사작위를 주는 장면은 정말 또 하나의 감동이다. 그는 천민에게도 노예에게도 기사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신분을 파괴했다. 이건 대단한 혁명이다. 그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싸운 것은 '나는 기사다'라는 어떤 자부심이나 명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신의 천한 신분을 없애준 발리안이 고마워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는 오늘날의 세계인권선언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화 속 저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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