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른다. 그를. 클림트라는 이름과 그의 몇몇 작품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이다. 음악엔 관심 있지만 - 그것도 장르가 한정 되어 있지만 - 그림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다. 철학을 했어도 해석학, 분석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철학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미학을 들을 땐 거의 졸았다. 하긴 다른 수업에서도 졸았긴 마찬가지구나. 보통 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림에 대한 관심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생초짜인 내가 미학에 관심을 갖기는 환경상 어려웠다. 이것은 내가 처음 악기를 배우고자 할 때 피아노나 기타를 배우지 않고 드럼을 배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피아노나 기타는 원래 어릴 때부터 해서 좀 치는 녀석들이 많다. 그래서 20살 먹고 남들보다 빠르게 뛰어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잘 선택하지 않는 악기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드럼이 간택(?) 되었던 것이다. 나의 선택은 적중해서 밴드 결성시 가장 희귀한 파트가 드러머였고, 나는 안되는 실력에도 초반부터 괜찮은 밴드를 잡아 그 생활을 시작했었다.

  영화 <클림트>를 보기 위해 오는 관객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나와 같은 부류. 즉 클림트가 어떤 인물인가를 영화를 통해 알기 위해 오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하나는 평소 클림트와 그의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영화가 개봉되자 그것을 확인하고 어떤 식으로 삶을 그려냈는가를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 그의 작품이 그려진 과정과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오는 부류도 넓은 범주의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화는 나와 같은 부류에게도, 후자의 부류에게도 만족감을 주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삶에 촛점을 맞춘 것도 아니고, 그의 작품 활동에 촛점을 맞춘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놓여있는 듯한 인상이다. 양자 모두를 잡으려 했던걸까, 아니면 양자 모두 초월하여 스치고 지나가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의 삶에 있어서, 작품에 있어서, 특정한 시기를 잘라내 그 평면을 비춤으로써 클림트란 인물을 관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삶도, 작품도 한 편의 짧은 영화로 보여주지 못하느니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을지도.



   그가 미술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성향과 파를 조성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1862년에서 1918년까지를 살아간 그가 죽은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지금, 클림트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왜 지금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어떤 시도나 그를 기념할 만한 뭔가를 찾지 못하겠다. 난 그저 누군가가 그의 그림이 좋다고 하여 보게 된 것이고,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뭔가 조각조각 짜맞춘 듯 하면서 그것이 묘한 아름다움을 구성한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알지 못한다. 

  영화를 봄으로써 되려 그림에 대한 나의 무지와 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차버렸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그림을 접했을 때의 그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순차적으로 뭔가를 보여주기 보다는 그의 삶의 중간중간을 잘라내어 하얀 도화지 위에 툭툭 던져놓고 멋대로 짜깁기 한 듯한 느낌이다. 영화를 봄으로써 그의 그림을 본 듯한 이 느낌. 그것으로 만족한다.

 * 함께 본 이의 덕분으로 영화 속의 또다른 인물 에곤 쉴레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 가 아니었다면 클림트 말고는 등장인물들을 그저 엑스트라 쯤으로 여기고 봤을 터.



* 이 사람. 에곤 쉴레. 손가락 제스쳐가 참 인상적이었다. 얼핏 본 어느 책에서 그가 클림트를 존경하며 따르고 교류했다는 글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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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6-07-0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데... 클림트 그림 마음에 드는데... 존 말코비치도 마음에 드는데... 끄응~

마늘빵 2006-07-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나침반님 클림트 모르고 가면 그냥 막 던져주는 먹이 구경만 하고 그냥 오게 되는거 같아요. 제가 그랬어요. 따옴표까지 신경쓰실건 없는데. ㅎㅎㅎ 나침반님은 너무 눈치가 빠르셔.

프레이야 2006-07-0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림트 읽고 봐야겠어요.. 담아갑니다~~
 



   새로운 액션을 선보인다. 액션영화 매니아라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 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화면만 쳐다보고 있고 싶은 사람에게도 적절한 선택. 영화는 뻔히 보이는 전통 액션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고 있다. 약자가 당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영웅이 나타나 그들을 제압한다. 뻔히 보이는 스토리지만 그래도 이런 전통 액션 영화를 찾는 것은 영웅의 무용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소룡과 성룡이 쿵후를 했다면, 이연걸은 우수로, 그리고 이제는 토니 자의 무에타이다.

   토니 자는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영화 세트장에서 요리사, 스탭, 심부름꾼 등 잡다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5년 후 한 영화에서 스턴트 대역을 맡았고, 이후 <옹박>으로 일약 액션영화계의 스타로 떴다. 그의 나이 28살. 나랑 동갑이군. 녀석. 17년 동안 닦은 무에타이 실력으로 그는 그동안 영화 속에서 보여진 와이어액션에 대한 불만을 실제로 재현함으로써 촬영장 스탭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했다한다. 그간의 무술훈련이 빛을 발한 영화다. 17년의 경력과 7년의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갑작스런 발탁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무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오랜 인내의 결과.

  * 많은 무술영화들이 있지만, 또 무술영화를 별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그중에서 내 취향대로 하나를 꼽아보자면, 난 이연걸식 영화를 선택하겠다. 이소룡, 성룡은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지만 난 그다지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무술의 달인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영화로서 보여지는 재미는 별로. <옹박>을 통해 선보인 무에타이는 신선하긴 했지만, 영화 스타일이 옛날식을 고집해서인지 얘도 별로. 이연걸이 나오는 영화는 무술만 보여주기보다는 스토리를 중시한다. 짜임새있고 알찬 스토리가 바탕이 되어 불가피하게 이연걸이 무술을 선보일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 어떻게 보면 이소룡과 성룡, 토니 자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감독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지금 언급한 세 사람의 무술은 짜임새있는 스토리를 통해 뭔가 보여주기에는 투박하고 거칠다. 이연걸의 우슈는 좀더 부드럽고 싸우지 않는 듯 하면서 싸우는 스타일이랄까. 순수하게 무술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연걸 영화보다는 다른 세 사람의 영화가 더 낫겠지만, 영화 자체가 주는 재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이연걸이 단연 우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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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0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박을 이제야 봤군. 입만 다물고 있으면 더 멋있을텐데 말이야.
근데 이 영화가 제목이 좀 이상해서 우리 나라에서 흥행이 안좋았다는 말이 있더라

마늘빵 2006-07-0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신영화이지만 옛날방식을 따르고 있는 영화인지라 과거의 홍콩액션물을 좋아했던 이들에겐 반가울거 같은데, 난 대략 별루.
 
작가의 방 -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 이야기
박래부 지음, 안희원 그림, 박신우 사진 / 서해문집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의도는 좋았지만 기대한 만큼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했던 책"이라 감상을 이야기 하고 싶다. '작가의 방'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는 신선했다. 작가들의 오랜 노력 끝에 서점에서나 접했던 그들의 창작물이 아닌, 그들이 창작을 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방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티비 오락 프로그램에서 탈랜드, 가수들의 방을 들여다본 적은 있어도, 소설가, 시인의 방을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탈랜트나, 가수, 배우들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던 반면, 소설가와 시인은 평소 책을 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이였기 때문이었을 터.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티비나 극장 상영관을 통해 '비디오'를 보여주는 배우와 탈랜트는 당연히 브라운관을 통해 엿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활자를 통해 독자와 교류하는 소설가와 시인의 경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브라운관 보다는 활자를 통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방>은 그런 차원에서 매우 적절한 방법으로 작가에게 다가갔던 책이라 말하고 싶다.

  책을 즐겨 읽는 이라면, 또 그중에서 빌려보기보다 사보는 이라면, 집에 적어도 책 수십권쯤은 있을 터이고, 책이 쌓여감에 따라 나도 서재를 꾸려보고 싶다라는 생각은 한번쯤 들 터, 내가 꿈꾸는 서재는 백지에서 상상력의 발현을 통해 만들어지기 보다는 기존의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려지기 마련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서재사진들. 아름답고 깔끔하지만 책을 찾아보기에는 불편한 서재도 있고, 지저분하고 정리가 안된 듯 하지만 푸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서재도 있다.

  <작가의 방>에서는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 중에서 이문열, 김영하,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 이렇게 여섯 사람만들 다루고 있다. 선택 기준은 따로 없는 듯 하고 이 책을 기획한 박래부씨의 마음이지 뭐. 그가 선택한 작가들은 모두 우리 문단을 대표할 만한 이들이고, 충분히 독자들이 그들의 서재를 궁금해 할 만한 작가들이다.

  책은 매우 이쁘게 만들어졌다. 그냥 책표지만 보더라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내용은 둘째치고 서재를 그려낸 그림들이 아기자기하고 이쁘다.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 박래부는 사진가와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씩을 대동하고 작가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메모하고, 사진가는 작가의 집 구석구석을 촬영하고, 일러스트레이터는 손바쁘게 서재를 중심으로 집안 곳곳을 그려낸다. 마치 수색영장 들고 용의자 집을 수색하는 경찰 같다.

  나만의 비밀 공간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는 것은, 일단 나에게 그런 제의가 왔다는 자체로서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조심스럽고 꺼림칙하기도 하다. 작가의 방은 그 자체가 작업 공간이며, 그것은 나의 글쓰기의 노하우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문열씨는 의자에 앉아 책상다리를 하고 노트북에 글을 쓰고, 어두칙칙한 교수 연구동 구석에 박혀 글을 쓴다. 공지영씨는 고급스런 양털 침대에서 다리를 펴고 책을 보기도 하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문열씨의 방은 대체로 예상했던 그런 과거 문인들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그런 방이었고, 김영하씨의 방은 신세대(?) 작가다운 냄새가 풍기는 방이었고, 강은교씨의 방은 정리가 깔끔하게 잘 된, 하지만 책무덤이라 할 만큼 엄청난 책들에 둘러싸인 그런 방이었고, 공지영씨의 방은 고급스런 유럽의 귀족들의 방과 같은 느낌이었다. 공주방이라고나 할까. 김용택씨는 좁은 집구석에 책을 한가득 쌓고 쌓고 또 쌓아올려 방을 좁혀가고 있는 형국이었고, 신경숙씨는 역시 정리가 잘 되고 깔끔한 하지만 고요히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작가들의 각자의 성격이 잘 묻어나는 서재였다.

  박래부씨와 여섯명의 작가가 주고받는 입담들, 그리고 방안 곳곳의 사진, 귀엽게 그려낸 서재그림이 잘 어우러져 하나의 이쁜 책으로 만들어졌다. 기획의도도 좋았고, 작업 방식도, 책의 형태도 좋았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것은, '작가의 방'이라고 했지만 '방'만 있고 '책'은 없는 듯한 느낌이다. 그들의 방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필 방식, 작가가 되기 전의 어린시절부터의 이야기, 그들이 읽어온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풍성하고 알차게 들어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 나에게도 서재를 가지고 싶다는 꿈이 있다. 많다 할 순 없지만 내 좁은 방안 한쪽을 가득 메운 책꽂이는 이제 꽉 들어차 더이상 책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 방바닥에서부터 책은 한권, 두권 쌓아올려지고 내 생활공간은 줄어들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책과 함께 있어. 내가 바라는 나의 미래의 모습 중 하나는 책무덤에 갇혀 사는 것이다. 너무나도 책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고 어떻게 분류를 해야할지 감히 엄두도 안나는, 퇴근 후 매일매일 진땀빼며 한달은 족히 정리를 해야만 하는 그런 책방을 가지고 싶다. 이문열씨의 서재 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높이의 책장이 있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책이 많으면 사다리를 탄단 말인가. 나도 그런 서재를 가지고 싶다. 내 서재를 꾸리고 군데 군데 사진을 찍으며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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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0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샀군. 작가의 방이란 책에서 '방' 외에 '책'까지 요구하는 건 좀 무리지 않을까? 이 책의 컨셉 자체가 작가의 서재를 보여준다는 건데 그만으로 신선한 기획이라 보는데, 그 이상을 요구하는 건 좀 무리지 않을까 싶다. 다른 곳에서 작가의 생각, 철학 등에 대해선 접할 수 있으니 말이야 ^^

마늘빵 2006-07-0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작가의 방'이라 하면 '방'보다는 '작가'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독자들은 '방'보다 '작가'의 서재에 기대를 걸지 않을까 싶다. 책 제목이 내용을 속이거나 한 건 아니지만 독자들의 기대치에는 부응하지 못한 인상.

마늘빵 2006-07-06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밑천이 보여서. ㅋㅋ 음 저는 잘 꾸려놓고 나중에 공개하고 싶어요. 김용택 시인 서재는 서재라기보다 그냥 집구석이던데요? ^^ 하긴 그런게 더 정감있어 보이긴 해요.

씩씩하니 2006-07-0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재 있는대.........그냥 알라딘.서재..헤~~~
자가의 방이 궁금하긴했는데 아 이런 책도 있었네요..요즘은 숙제(!!) 하느라 허덕이는 중이라 나중에 읽을까봐요...
나중에 정말 멋진 서재 구경시켜주세요~ 사다리 타고 있는 아프락사스님을 기대하며...

kleinsusun 2006-08-0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 서재 사진이 참 맘에 들었어요. 당장 서재는 아니더라도 그런 길다란 쇼파를 하나 사려구요.^^ 저도 빨리 멋진 서재를 갖고 싶어요.

marine 2006-09-2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경숙씨 서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나중에 따라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공지영씨 서재의 그 스툴도 멋있었구요
궁금한 게 있으면 일단 책부터 산다는 공지영씨 말이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 양장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절판


풀섶에서 자라는 붉은 장미여,
빛에 씻긴 진홍 색깔과,
그 농염하고 향기로운 자태를 자랑한다만,
아니다. 내 바르게 이르거니와,
너의 불행은 목전이다.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7쪽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해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소설을 쓰지 말 일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작품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 고결한 원칙을 지키는 데엔 한 가지 장애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소설에는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10쪽

소설의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위안 가운데 가장 으뜸 가는 위안은,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썼는데도 불구하고 독자의 이해를 통하여 전혀 다른 독법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학문적인 논문을 썼을 경우, 서평자에 대한 나의 자세는 법관의 판단 만큼이나 명쾌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그가 정확히 이해했는가, 혹은 하지 못했는가? 그러나 소설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다. 나는, 작가가 타인에 의해 발견된 독법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설사 그런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침묵을 지킴으로써 다른 독자들에게도 텍스트 자체를 통해 그 잘못된 해석에 도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5쪽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19쪽

나는 중세에 <대해서> 쓰고자 결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세<에서> 쓰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그 시대 연대기 작가의 입을 통하여 중세라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35쪽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 놓으면 언어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Rem tene, verba sequentur, 즉 <주제를 붙잡으라, 그러면 언어가 뒤따라온다> 인 것이다. 시의 경우는 Verba tene, res sequentur, 즉 <언어를 붙잡으라, 그러면 주제가 뒤따라온다>. -43쪽

저자는 책을 쓸 때 마음 속에 어떤 경험적인 독자를 상정하고 쓴다. 근대 소설을 확립한 리처드슨, 필딩, 디포 같은 작가들(출판업자와 자기네 마누라를 위해서 쓴)도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이스 역시,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상적인 독자를 상상하면서 소설을 썼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대중을 위해서 쓰건, 돈을 위해서 쓰건, 아니면 새로운 독자를 만들기 위해서 쓰건, 글쓰기라는 것은 곧 텍스트를 통하여 자기 나름의 독자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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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Mr. Know 세계문학 16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절판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성서의 주석서 저자들이 늘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서책의 뜻은 우리에게, 일각수는 도덕적 진실, 비유적 진실, 우화적 진실을 나타내고 있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순결이 고결한 미덕이듯이, 이 서책이 드러내는 의미 또한 진실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가지 진실을 지지하는 언어적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이 이러한 표현을 부여했는지를 한번 따져 보아야 한다. 아무리 그 뜻이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언어적 관념이라는 것은 반드시 논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588쪽

우리는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되 모든 것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퀴나스께서는, <필요로 하는 자가 있거든 쓰게 하라, 이는 자비가 아니라 의무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642쪽

나는 <탐구>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보존>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하느님께 속하는, 지 식이라는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태초부터 완전한 것으로 정제된 것이고, 말씀의 완전함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중략... 지식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리 없습니다. 오로지 연속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요점 약설이 있을 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창조에서 부활을 거쳐, 구름 위에 좌정하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지 않게 변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 지상적인 지식은 이런 길을 걷지 않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채같이 단단한 이 지식은, 우리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때만 우리가 걸을 길을 예언하고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내어 줍니다. 그러나 이 길이 지식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의 하느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 길>이라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진리의 무서운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장미의 이름' 호르헤 수도사) -7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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