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건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절판


니콜라는 내 배에 올려진 아기를 보았다. 그제야 겨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에 천사의 얼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아기는 내가 기대하던 장밋빛 뺨에 미소를 띤 얼굴이기는커녕, 이게 왠 원숭이 새끼인가 싶었다. 털 많고, 지저분하며, 태지와 분비물을 뚝뚝 흘리고, 온몸이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얼룩덜룩하며, 예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72쪽

떠날 때의 우리는 젊고 자유롭고 분방했는데 돌아올 때는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결코 예전 같을 수 없으리라. 딸을 낳기 전까지의 나는 스스로를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었다. 이제 끝이다. 딸을 낳고 나는 늙어버렸따. 나는 과거였다. 나는 더 이상 그날그날을 누리며 살지 못했다. 나는 나 아닌 다른 이를 책임져야 했다. 다시는 걱정을 모르고 살 수 없으리라. 다시는 혼자 일 수 없으리라. 다시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수 없으리라. 저녁에 외출을 하면 나를 기다릴 딸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리라. 그리고 나중에는 외출할 딸을 기다리느라 안절부절 못하리라. 아이를 낳고 난 후로는 내 정신으로 사는게 아니었다. 난 항상 그 애에게 매여 있으리라. 나는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나를 낳았다. 다름 아닌 내 딸이 나를 출산했다. 아둔하고, 매사에 의식적이며, 환멸에 찌든 나, 또 다른 나를. 생명을 낳고 난 뒤에 삶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을까? 나는 더 이상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내 인생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움푹 파인 구멍, 텅 빈 공허, 무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였다. -83쪽

그보다도, 이 애는 누구인가?
레아.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똘똘 뭉친 괴물, 오로지 제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써먹는 아이, 타인에 대한 관심은 눈곱만치도 없이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존재, 그저 먹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전혀 없는 식충이. 아기는 오로지 먹기 위해 살았다. 아기는 식사를 끝내자마자 어느새 소화시켜 버리고는 다시 배를 채워야만 했다. 아기에게는 먹는 것 말고는 뭐든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권력은 예외일지도. 아기는 권력을 좋아했다. 아기가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에는 만사 제치고 달려가야지, 안그러면 분노를 터뜨렸다. 아기는 화가 나기 시작하면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히스테리,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 광기의 온갖 징후를 여실히 드러냈다. -94쪽

사랑에 빠진 연인은 정념을 불태우면서 바로 그러한 무한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첫 단계, 가장 초보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자기애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다. 진정한 사랑은 세월이 흐르면서 구축되어간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판타지를 꿈꾼듯 반복적으로 동일한 모습을 취하는게 아니란 말이다. 사랑은 꺼지지 않는다. 사랑은 발전한다. 사랑은 패러다임을 바꾼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평가하지도 못하면서 사랑 따위는 없다느니 하는 신소리를 하는 것이다.
처음에 사랑은 열정으로 활활 타오른다. 그때의 사랑은 마치 아기가 그렇듯이 정신분열증과 조울증의 징후를 농후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아기가 자라듯 사랑도 자란다. 사랑은 성숙해지고, 단단해지고, 사려 깊어지며, 자리를 잡는다. 사랑은 그렇게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모른다. 우리는 그저 떠들 뿐이다. 사랑은 끝났어, 라고. -145쪽

"있잖아, 니콜라. 난 사랑은 눈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렸다가 금방 녹아서 없어지는 눈."
"아냐...... 그렇지 않아, 바르바라. 사랑은 없어지는 게 아니야. 세월이 흐르는 것 뿐이지......" -169쪽

소크라테스, 칸트,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은 아기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따. 그들은 모두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인생을, 타자성을, 사랑을, 증오를, 광기를, 현실의 상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인간의 첫째가는 감정이 동정심이 되고 마는지를 그들은 몰랐따. 루소만큼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레아가 울면서 보챌 때, 그 애가 내게서 멀어져 가고, 내가 그 애에게서 멀어져 갈 때 나는 레아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동정심은 아름답다. 아니, 동정심이 인류의 첫번째 단계는 아니다. 본능적이기는 해도 그것은 가장 숭고한 감정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타인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는 감정이다. 타인의 기대를, 희망을, 고통을 느끼는 감정이다. 어떤 성스러운 이끌림에 따라 우리는 타인에게 몸을 숙이고 손길을 건네며 자신의 품으로 맞아들인다. 그것은 본래적이면서 심오하다. 그게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어머니의 젖과 가슴, 그것이 바로 그러한 관대함이다. 동정심, 그것은 곧 피붙이에 대한 극진한 마음이다. -226-227쪽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을 포기한 채 살 수도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딱 그랬다. 질문들을 던져도 결코 해답을 찾지 못한다.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도 알지 못한 채 궁지에서 벗어나보겠다고 불가능에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행복을 포기해 버리고, 불행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다가 정말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다시 솟아올라 처음 순간의 비약에 대한 감각을 되찾는다.
아이를 갖고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데도 배턴을 넘겨주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업이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방정식을 풀거나 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아이를 낳고, 번성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부모에게 꽉 매여 살고, 좀 자유로워지는가 싶으면 이제 자식들에게 더 꽉 매여 살아간다. 행복, 그래 행복이다. 하지만 한 순간이다...... 그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다...... -237-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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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9-1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셨군요. 남자가 보는 '행복한 사건'은 어떨지 여성과는 좀 다른 눈일 것 같아요. 리뷰도 기대해도 되죠?

마늘빵 2006-09-1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정말 좋았어요. 리뷰를 얼른 쓰고픈데 시간이... ㅠ-ㅠ
지금 밀려있는 리뷰만 영화 한 이십편에 책은 네 권.

비로그인 2006-09-1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 일간지에서 이 책을 추천한 이후에 저도 참 궁금했습니다. 밑줄긋기를 슬쩍 훔쳐보니, 읽어도 후회스럽지 않을 것 같군요.^^

2006-09-20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지음, 김봉래 옮김 / 문지사 / 2005년 3월
구판절판


<욕망은 채워지는 법이 없다 >

욕망에는 이득이 있고, 그 욕망의 만족에도 이득이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욕망에는 증가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대에게 말하거니와, 나타나엘이여! 욕망의 대상을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허망한 소유보다도 나를 풍부하게 하여 주었노라고 고백한다.
'욕망은 채워지는 법이 없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쪽

'걷고 싶은 욕망, 거기엔 길이 열리고, 쉬고 싶은 욕망, 거기엔 응달이 있다' -32쪽

나타나엘이여! 그 모든 책을 언제 우리들은 불살라 버리게 될 것인가!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사실을 책에서 읽은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나의 맨발이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먼저 감각이 앞서지 않은 지식은 일체 나에게는 소용이 없다. -34쪽

너는 과거에 살고 미래에 살며 순식간에 찍혀지는 사진과도 같은 죽음에 이른다. -73쪽

떠나자! 그리하여 아무 곳에서나 발걸음을 멈추자. 거기가 바로 내 고향이 아닌가. -85쪽

"아무리 행복하다 하더라도 발전이 없는 상태는 무의미합니다. 발전이 없는 기쁨은 경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자신의 저서 <좁은문>에서 인용)-188쪽

죽음은 자신의 일생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러한 사람에 대해 종교는 지나치게 즐거운 모습으로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 참된 생활은 저승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대는 보상을 받으리라."
그러나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곳은 바로 이 세상이다. -198쪽

삶과 꿈을 연결시키지 말고 현실 속에서 영혼의 시를 찾아내도록 하라. 현실 속에 시가 부재 중이라면 그대의 삶 속에서 시를 가꾸도록 하라.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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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살림지식총서 237
차병직 지음 / 살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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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읽어온 살림지식총서의 다른 책들이 대체로 나에게 만족감을 안겨준데 비해 이 책은 좀 아쉬웠다. 책의 내용이 부실하다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방향의 인권에 대한 성찰이 아니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미리 이 책의 목차를 봤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약간의 실망은 느껴지지 않았을텐데.  

  어떤 하나의 주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여럿이 있을 수 있다. 사형제에 관해서도 헌법의 관점이 있고, 실정법의 관점이 있으며, 철학적 관점이 있고, 정치적 관점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사형제뿐 아니라 인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살림지식총서 <인권>은 법적인 관점에서 인권을 바라본 경우이다. 목차를 보면 인권에 관한 생각, 인권의 역사, 인권의 내용, 국제인권법, 인권의 현실과 미래 로 구성되어 있다. 딱 보면 법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인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내가 원했던 건 좀더 인문학적인 관점에서의 인권이었다. 인권위원회가 어쩌구, 역사가 어쩌구, 제도며 학회며 이런 것들보다는 인권에 대한 좀더 깊이있는 성찰을 원했던 것이다.

  저자 차병직은 이 바닥에서 꽤 오래묵은 인물이다. 사시합격후 강사활동을 하면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출판홍보위원장과 참여연대 현동사무처장을 거쳐 인권운동연구소 운영위원을 지내왔고, 현재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 법무법인 한결 구성원 변호사,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로 활동중이라 한다. 인권 문제에 대해 오래 고민해왔고, 그 바닥에서 활동한 인물인데 그의 꿈은 장차 미셸린 이샤이의 <세계 인권 사상사>보다 더 나은 책을 쓰는 것이라 한다. 이 책을 보진 않았지만 저자의 자신의 꿈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라면 확실히 검증된 책이고, 걸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인권을 주제로 하여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 내용을 압축적으로 종합한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미 고등학교 사회, 도덕, 세계사 교과서에서 한번씩 본 내용들도 있지만 좀더 내용이 풍부하다고나 할까. 내가 원한 방향에서 인권 문제를 바라본 책은 아니었지만 한번 쭉 훑어볼만한 참고할만한 책이다.

  살림지식총서의 이 얇은 시리즈들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관련 주제들에 대해 이 책 한권이면 꽤나 깊이있는 상식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체계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라고나 할까. 그래서 내가 살림지식총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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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삶 그르니에 선집 4
장 그르니에 지음, 김용기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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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매일같이 눈을 뜨며 마주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은 너무나 단조롭고 지극히 '일상적'이다. 매일마다 아침 출근길에 보게 되는 지하철, 콩나물 시루처럼 빡빡하게 꼼짝달싹 못하게 서서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햇살 드리운 따땃한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자도 자도 졸리다는 듯 새근새근 자고 있는 작고 귀여운 하얀 똥개녀석과 지각한다며 드넓은 4차선 도로 위를 빨간색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코 질주하는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교복입은 녀석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그다지 신기하게 보이지 않는 그저 어젯밤 읽다 잠든 책을 꺼내 조용히 무릎위에 올리고 까만 눈동자 굴려가며 한줄 한줄 내려와 책장 넘기는 내 모습과, 그 밖의 그 모든 것들이 다 일상적인 삶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지. 
 
  매일 아침 신문지상에 어제는 어디서 누가 어떻게 죽었으며, 지난 밤 로또 추점엔 세명이 당첨되어 얼마씩 나눠가졌다는 이야기, 다음 주에 한국영화 최초로 대형블록버스터가 개봉된다는 이야기, 그 영화의 감독이 해외 무슨 영화제에서 개발바닥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 저 멀리 이름 모를 나라에서는 내전이 한참 진행중인지라 요 며칠 폭탄테러가 심심찮게 발생했고 수천명이 사망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또 반대편 거대한 제국에서는 한 코미디언이 영화제 시상식에 나와 멋드러진 양복 입고 개다리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 그것도 모두 우리에겐 지극히 일상적인 삶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인식되지 않은 채 벌어지는 수많은 내 주변의 이야기들과 신문과 티비의 주목을 받으며 뉴스거리가 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는 이야기들은 모두 각각 다른 차원에서 일상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옮긴이 김용기는 말한다. "우리가 이런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들에 혹이라도 어떤 의미를, 아니 그 이전에 어떤 긴장 - 단순히 심미적인 것이든 혹은 더 나아가 존재론적인 것이든 - 이라도 부여하게 되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니와 일상이란 워낙 긴장의 반대말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가끔씩. 가끔씩. 이렇게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들이 신기해보일 때가 있고, 내가 평소에 쓰고 있는 유일하게 알고 있는 언어인 한국어의 어떤 단어는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왜 똥을 똥이라 했을까. 애초 똥을 물이라 했다면 어땠을까. 등등의 남들이 보면 아주 이상하고 괴상망칙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할 만한 그런 것들.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일상적인 일들에 의심을 갖기도, 의문을 갖기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장 그르니에. 그는 일상의 철학을 하는 철학자였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라는 그는 알제에서 철학교수를 했고, 수많은 철학서와 명상집 등등을 냈다고 한다. 여기 이 <일상적인 삶>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은 그의 평상시의 주변의 사물에 대한, 주변의 일들에 대한 사색을 담아 옮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눈을 감고 잠시 다른 곳으로 떠나있어야 될 것만 같은 그런 글이다. 여행, 산책, 포도주, 담배, 비밀, 침묵, 독서, 수면, 고독, 향수, 정오, 자정의 12가지 테마를 가지고 그는 수페이지에 걸쳐서 사색을 펼쳐놓고 있다. 아주 일반적이고 너무나 일상적인 저것들에서 무슨 생각할 거리들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싶지만 해당 장을 넘겨 글을 읽는 순간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내 주변의 것들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김용석과 같은 철학자이다. 김용석은 철학자이지만 철학이론을 가르치는 강단의 철학이 아닌 일상의 철학을 하는 이 이다. 고독, 불안, 사랑, 분노, 낭만, 향수, 시기, 질투 등등의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 속의 자연스러운 감정들에 대해 사색할 기회를 준다. 장 그르니에는 그와 같은 철학을 한다. 내가 꿈꾸는 철학자. 철학적 지식을 가르치는 철학자가 아닌 아침 이슬 머금은 발 밑에 깔릴만큼 작은 풀꽃을 보고 멍 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사색할 수 있는 그런 철학자. 장 그르니에는 그런 철학자이다. 그의 일상의 철학의 단편들을 보고 있자면, 읽고 있자면, 모든 문장들에 줄을 긋고 싶다. 너무나 많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간직하고 싶다. 푹 빠져들고 싶다.

 p.s

같은 말을 하더라도 어떤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구성해나가느냐,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나의 느낌을 전달하는  또다른 묘미가 있다. 장 그르니에는 자신이 느낀 것을 표현하는데에도 자기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글귀들은 마치 그가 프랑스인이지만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의 이야기와 우리네 옛 선비들의 말씀과 그 표현법이 닿아있다. 여운이 있다고나 할까.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닐까?
(산책 中)

 내가 담배를 피움으로써 세계가 내 속으로 흡입되며 그럴 때 나는 세상을 단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 나를 둘러싸고 있으나 결코 내 것이 아닌 이 견고한 세계를 담배를 태움으로써 내 것으로 전환시킨다. 왜냐하면 내가 그 견고한 세계를 연기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 사물을 통해 세상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담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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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6-08-30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제목도 그 속의 이야기도 님의 글도 편안합니다.
일상, 너무 가까워서 그 가치를 헤아리지 못하죠.
이렇게 누군가 문을 두드려주기 전에는요.

마늘빵 2006-08-30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우울과 몽상님 감사합니다. 편안한 음악을 들으며 손가는대로 쓰고자 했습니다. 참 좋은 책입니다. 언제고 꺼내어 아무데나 펼쳐놓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푸훗 2006-12-27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르니에의 글은 대쪽 같은 단정함을 드러내지만 버드나무 가지 같은 유연함도 동시에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참 좋아합니다. 모호하고 어려운 말로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부드럽게 조근조근 이야기해요. 그러면서도 한참을 생각하게 하는 공간을 글 속에 숨겨 놓아서 그의 책은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죠. 민음사 그르니에선집은 완소도서 목록 중에 하나에요, 깔깔. 아는 분 서재에 들렀다가 흘러왔어요. 제가 눈팅만 하는 서재들에 아프락사스가 종종 보이더라구요. 어쨌든 안녕, 아프락사스.

마늘빵 2007-02-06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반갑습니다. 저도 돌아댕기며 푸훗님 뵈었는데 정말 그르니에 에 대해서 딱 들어맞는 말씀을 해주셨네요.
 
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간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던 나로서는 김영하의 작품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번째 만남이다. 이 만남을 불행이라 말한건 그 전에 읽었던 <검은꽃>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좋았으며 이 작품을 통해 그 때의 느낌을 더이상 그대로 간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만남을 다행이라 말하는건 김영하라는 소설가는 아직 좀더 시간을 두고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껏 그의 책이라고 해봐야 이제 두번째 작품이니 아직 나 개인이 그를 평가하기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싶다. 그리고 그를 평하가는데 있어 비난할 만큼 이 책이 나쁜 것은 아니며 이 책은 충분한 즐거움은 선사했지만 단지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뿐이다.

  꽤나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들과 아마도 정확한 당시의 시대 자료들, 그리고 설득력있는 이야기 전개 등등 원고지 1500장 분량의 소설을 써내며 한장 한장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설은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하지만 아 뭔가 아쉽다 싶은 그런 공백도 느껴진다. 그것은 아직 그가 젊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소설을  쓰라하면 단 한장도 뽑아내지 못할 나 같은 이에겐 이 소설은 그의 젊음에 비했을 때 상당히 묵직하다.

  가벼운 연애 소설 따위가 아닌 남북 분단의 문제와 이로인해 빚어지는 한 사람의 인생, 그리고 그의 가족의 인생의 이야기를 녹여낸 잘 쓰여진 소설이다. 간첩으로서의 인생, 하지만 15년의 세월 동안 그는 그저 반쪽짜리 대한민국의 소시민적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아내와 사랑하고, 돈 걱정하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회사 생활을 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갑자기 떨어진 4번 명령만 아니었다면 그는 그저 남쪽에서 태어나 남쪽에서 그저그런 삶을 살다 죽은 한 남자로서의 인생을 마무리했을 것이고,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되지 않는 삶은 그에겐 불행이 아닌 삶의 안정과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 내려왔을지 모르는 그 명령을 따라 지금껏 살아온 남쪽에서의 생활, 아내와 딸과 친구와 회사를 그만 놓고 갈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러나 가야만 한다. 가야만 한다. 가기 싫지만 가야만 한다. 그럼 아내는 딸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아내는 스무살의 어린 대학생 두 명과 무인러브호텔에서 그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아 어떻게 이럴수가. 나와 가족의 남은 삶이 걸린 문제를 홀로 고민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내는 섹스의 환락에 푹 빠져있었다. 이 두 사람의 하루 동안의 행보가 이렇게나 극명하게 대조될 수 있는가. 이렇게나 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버릴 수가 있는가 싶다. 그녀는 그랬다. 내가 거짓말같은 사실들을 다 까발려 말했을 때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그러면서, 믿었고, 믿은 뒤에 남고 싶다는 나를 북으로 올라가라 했다. 자신과 딸은 그냥 남쪽에 내버려둔채로. 남쪽에 내려와 살며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15년을 산 그녀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너는 가고, 우리는 남는다고.

   소설은 많은 문제들을 보여주려고 했다. 크게는 남북한의 분단상황과 남파간첩 문제를 묵직하게 던져놓고 있지만, 남쪽의 한 가정의 소시민적 삶을, 그리고 부부의 사랑을, 자본주의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하나하나 그 속에 녹였냈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구성해내려 애쓴 김영하에게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다음 작품에서는 2%의 부족함을 메워주리라 기대하면서, 좀더 나이가 들어 삶을 관조하고 깊이있는 사고를 할 수 있을 때 즈음에 걸작이라 불릴만한 작품을 하나 내놓으리라 기대하면서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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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3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소설 보면서 결론은 가족의 붕괴라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이념갈등과 간첩등등의 고차원(?)적인 사회문제보다는 서서히
보여주고 있는 평범한(?) 사회문제 더 끔찍했어요..

마늘빵 2006-08-30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그랬습니다. 묵직한 주제를 툭 던져놨고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 속에 녹아있는 부부의 일상적인 면들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