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 & 싱어 : 매사에 공평하라 지식인마을 16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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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벤담과 피터  싱어. 두 사람 모두 윤리학에 있어선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고 그만큼 많이 이름이 알려져있다. 벤담은 밀과 함께 공리주의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피터 싱어는 현재 살아있는 영향력있는 윤리학자 중 한명이다. "벤담과 싱어는 이익들에 대한 평등 고려 원칙을 가지고 차별을 반대한다. 이익은 누구의 것이든 똑같이 고려해야 하므로 성별이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옹호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원칙을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면 동물에 대한 차별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음식으로 동물을 먹거나 실험 도구로 이용하는 일이 일상적이고, 그것이 반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고려된 적 없는 세상에서는 그들의 동물 해방론이 생뚱맞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그런 낯섦은 여성 차별을 당연시하던 시기에 여성 해방을 부르짖거나 인종차별이 의심받지 않던 시기에 흑인 해방을 외치던 사람들이 받던 시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이 두 사람을 소개하고 그들의 이론을 비교하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해준다. 보통 벤담을 밀과 비교하는 것이 더 익숙한데, 벤담은 양적 공리주의자, 밀은 질적 공리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의 한계를 밀이 극복했다고 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기는 하나 벤담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쾌락의 양을 최대한 늘이고 고통의 양을 최대한 줄임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고, 이때의 쾌락은 측정가능하고 양적인 것이다. 행위가 산출하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판정할 수 있고, 이로부터 최대한의 쾌락을 산출해낸다. 하지만, 같은 돈이라 할지라도 거지에게 주는 만원과 백만장자에게 주는 만원은 엄연히 다르다. 동일한 양이 동일한 쾌락을 산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밀의 공리주의다.

  여기서는 밀은 다루지 않는다. 벤담과 밀을 비교하기보닫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싱어의 공리주의를 비교하는 구도를 형성한다. 벤담의 원칙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었다면, 싱어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이익 대신에, 나의 결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려는 나에게 모든 이익들을 측정해서 영향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최대화할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적어도 어떤 수준에서 도덕적인 추리를 할 때, 나는 영향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행동을 선택해야만 한다." (실천윤리학, 33-34쪽)

  이러한 싱어의 '고려'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확장된다. 싱어는 윤리의 기본전제인 공평함을 나에서부터, 혈연, 아는 사람들, 민족과 국가, 인종을 넘어 전 인류로 확장시킨다. 우리는 지금까지 윤리의 범위를 인간에게만 한정지었으나, 싱어의 사고는 그것을 넘어선다. "이익들에 대한 평등한 고려원칙". 이것은 "이익을 측정할 때 나의 이익을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국가와 인종, 민족을 넘어서 모든 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본다. 벤담도 일찍이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로 계산되며 어느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싱어가 말하는 '이익'이란 개념은 누구나 추구할 공통적인 것, 인간 다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지칭하는데, 벤담은 이익을 말하지 않았을 뿐 이미 싱어와 같은 논리를 펼친 바 있다. 다만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벤담은 이익을 평등하게 '대우'하라는 것이고, 싱어는 이익을 평등하게 '고려'하라는 것이다. '대우와 '고려'는 다르다. '대우'는 그야말로 양적으로 평등하게 다루라는 것이고, '고려'는 질적인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다. '고려'는 밀의 질적 공리주의와 닿아있다. 하지만 좀 더 엄격하게 따지고 들어갔을 때 밀 또한 싱어와 다르다.

  저자 최훈은 책에서 이런 예를 든다. A. 아무도 행복하지 않지만 아무도 고통을 받지 않는다. B. 아무도 행복하지 않지만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이 몇 명 있다. C. 아주 행복한 사람도 몇 명 있고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도 몇 명 있다. 그런데 행복의 양이 고통의 양보다 더 크다. 이런 상황에서 벤담과 밀은 A가 B보다는 더 낫다. 하지만 A와 C를 비교했을 때는 C가 행복이 더 크므로 C가 더 낫다고 한다. 하지만 싱어는 다르다. 싱어는 고통의 양을 최대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고로 그는 A가 더 낫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이 벤담, 밀과 싱어의 다른 점이다.

  싱어는 이것을 <동물해방 >이라는 책을 통해서, 동물에게까지 적용하며 "어떤 존재가 어느 동물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그 존재의 이익을 다르게 고려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인종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잘못되었듯이, 우리가 인간이고 저들이 짐승이라하여 저들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씹는 고기맛을 즐기기 위해서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주장은 채식주의로까지 나아간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나아가 종차별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죽음에 고통을 받는 만큼 동물도 고통을 받는가를 따져묻고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간과 달리 대우해서는 안된다. 논의가 깊어짐에 따라 '인간 대 비인간'의 대결구도는 이후에 '인격 대 비인격체'에 대한 대결구도로 나아간다. 종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인격과 비인격체로 나눈 것이다. 삶의 질을 따져묻는 것이다.

  싱어의 주장에 우리가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주장은 나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싱어의 책을 읽고 싶어졌고, 평소 아무렇지 않게 씹고 있는 고기덩이들에 대해서도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근무하는 학교에 아일랜드 원어민 교사가 있는데, 그녀는 채식주의자다. 이 책의 채식주의 분류에 따르면, 그녀는 '비건(vegan)'까지 나아갔다. 채식주의도 정도에 따라서 비덩주의-준채식주의-페스코-락토오보-락토-비건 으로 나뉘는데, 그녀는 모든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는 비건인 것이다. 새삼 그녀가 존경스러워졌고, 한국 땅에서 채식주의는 힘들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해봤다. 단체와 집단의 문화를 중시하는 우리는 튀는 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회식자리에서 나는 비건이니 샐러드만 먹겠다고 했을 때 이를 존중해주고 받아들여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내가 싱어의 주장에 100% 공감하고,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건 아니다. 하지만 설렁 그런 결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 땅에선 힘들지 않나 생각해본다. 다름보다는 같음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므로.  

 

*  이 책을 읽고 관심갖게 된 책 ( 다수는 이 책 '깊이 읽기'에 소개된 책들 )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피터 싱어의 <생명윤리학> 
   피터 싱어의 <삶과 죽음> 
   피터 싱어의 <사회생물학과 윤리>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임종식의 <개고기를 먹든 말든> 
   주강현의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
   남유철의 <개를 위한 변명>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
   하워드 F 리먼의 <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
   마크 롤랜즈 <동물의 역습>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제임스 레이첼스 <도덕철학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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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름보다는 같음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므로."
오.. 아프락사스님의 언명이 갈수록 사안의 핵심을 찌릅니다.

오래 전의 TV극 'V'시리즈에서 보듯이
식인을 즐겨하는, 지구인보다 문명이 발달한 파충류계열의 외계인들이
지구를 점령하고 지구인을 '식량'으로 삼는다면 그들에게 어떤 논리로
항변할 것인가? 그런류의 얘기도 싱어가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먹히는.. 고통을 느끼고 그걸 의식하는 동물의 입장에서
육식을 고려해야할 그런 시대가 되지않았나 생각합니다.


마늘빵 2007-05-1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어릴 적 V시리즈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땐 그런 생각을 못했었어요. 아는 만큼, 생각하는 만큼 보이는 거니까요. 그땐 꼬맹이였고, 그저 재밌기만 했고. 쥐잡아먹는 장면이 기억에 나는군요. 싱어의 생각이 궁금해졌습니다. 그의 책들을 읽어봐야겠어요. 어제 숭실대 베어드홀에서 강연회있었던거 같은데 직장인인지라 가고팠는데 못갔습니다. 흠. 마침 또 이렇게 이 책을 읽었을 때 싱어가 내한을 했는지라.

비로그인 2007-05-18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를테면 삼겹살의 공여자인 '돼지'는 결코 돼지같지 않고
개만큼 영리하답니다..

마늘빵 2007-05-1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어디선가 저도 본거 같습니다. 아마도 요 책에서 본거 같은데. 그래서 인간 대 동물의 구도가 아니라, 싱어는 인격체 대 비인격체의 구분을 시도하죠. 돼지는 상대적으로 인격체로 분류가 되고, 식물인간, 뇌사상태인 인간은 비인격체로 분류가 되죠. 이 때문에 피터 싱어가 욕을 먹는 듯 합니다. 일부 인간을 돼지보다 못한 쪽에 분류를 했기 때문에.
 
나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가 - 채식주의자가 된 미국 최대 축산업자의 양심 고백
하워드 F. 리먼 지음, 김이숙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1월
절판


도살하기 위해 소를 운반하고 고기를 포장하고 얼리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집약적으로 소비된다. 이와 비교할 때, 과일과 채소는 식탁에 오르기 전까지 고기처럼 얼리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다. 농산물 시장의 급증으로 인해,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더욱 신선한 상태로 공급된다. 사육장에 가둔 동물에게 인공적으로 '살아 있는' 환경의 온도를 맞추어주고, 동물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고, 동물의 배설물을 치우는 데는 물론이고 동물 공장에서 동물을 '돌보기 위해'사용하는 항생물질과 다른 약품들을 제조하고 운송하기 위해서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다양한 유형의 식물성 식품과 다양한 유형의 고기를 비교 연구한 결과, '아무리 비효율적인 식물성 식품이라도 가장 효율적인 동물성 식품보다 거의 열 배는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에너지 생산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오염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해 쓰는 에너지량을 낮추면 외국산 기름과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51쪽

소는 순진하고 슬퍼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초식 동물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무시무시하고 수완이 뛰어난 살인마이다. 모든 종류의 동물이 서부를 지배하는 소 밑에서 신음해왔다. 토끼는 은신처와 먹거리를 제공하는 초목의 부족으로 인해 위험에 빠져있다. 개구리와 두꺼비, 곤충은 축우가 메마르게 만들기 이전의 풍부하고 축축했던 흙을 그리워한다. 멧돼지는 풀과 나무 열매와 딸기류 열매를 빼앗겼다. 물고기는 소가 오염시킨 개울과 강에서 죽어 나간다. 고라니와 영양은 축우가 퍼뜨린 박테리아 때문에 생긴 여러 가지 질병으로 죽어간다. 사람들은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당뇨병과 암에 걸린다. -173쪽

우유에 붙은 '저지방' 표시에도 속지 말자. 그런 표시는 갈피를 못 잡게 한다. 지방 함유량을 전체 칼로리의 백분율이 아니라 무게의 백분율로 표시하기 때문이다. 우유 무게의 대부분은 물이다. 지방 2퍼센트라고 적힌 우유를 전체 칼로리의 백분율로 고치면 실제로 지방 35퍼센트가 된다. 그 정도면 고지방 식품이다. 지방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믿음직한 통계는 지방으로 환산한 칼로리 백분율을 알려주거나, 1회 식사분으로 계산하여 지방을 그램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지방 함유량을 전체 무게의 백분율로 표시하는건 오해의 소지가 크며 현혹성 광고로 보아 금지해야 할 것이다.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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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5-18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부지런하셔, 우리 아프님. : )

마늘빵 2007-05-18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프님. 네꼬님 ^^*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 지적 열정을 추구한 나의 삶, 나의 길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5년 1월
구판절판


인생에는 여러 가지 살아가는 길이 있고 인생에는 많은 종류의 할 일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생의 보배를 모두 다 동시에 소유할 순 없다. 우리는 모든 만물과 똑같이 어떤 우연의 소산인 것으로밖엔 생각할 수 없다. 일단 생명을 갖게 된 동물로 나는 생명을 지속하려는 본능에 의해 살고, 역시 우연의 결과로서 의식을 갖게 된 인간으로서 나는 내 삶의 모든 행위에 의미를 찾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욕 속에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20쪽

모든 학문, 모든 사유는 철학으로 통한다는 말에는 깊은 일리가 있다. 모든 학문은 반드시 어떤 원칙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모든 사유, 즉 이치도 반드시 어떤 전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전제의 옳고 그릇됨이 따져지고 설명되기 전에, 이미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그 사실이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은 다른 학문이 받아들인 전제를, 즉 원칙 자체를 비판하고 설명하려 한다. ... 다시 말하자면 철학은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고 있는 원칙 자체를 명석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비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서 갈 수 있는 한까지의 철저한 이해르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학문이고 깊이 추구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철학적인 사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26쪽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 어머니의 젖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도 젖 대신에 밥을 먹어야 하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도 어른으로 변신할 수 밖에 없다. 늙고 싶지 않아도 늙을 수 밖에 없고, 죽고 싶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 삶은 부단한 변화의 과정, 즉 길 위에 존재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정해진 길을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나들이길에 나선 순례자이며, 그의 삶은 곧 끝없는 순례의 과정이다. -62쪽

인간은 자연의 물리적 자연 법칙에 지배되는 동시에 규약적 규범에 묶여있다. 규약은 언어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인간 존재는 필연적으로 언어적이다. 언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의미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거꾸로 인간이 의미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의 삶의 양식은 텍스트 쓰기이며 그러한 인간의 삶은 텍스트로 볼 수 밖에 없다.-70쪽

허무주의는 모든 존재 특히 인간 존재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부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반허무주의적 주장의 밑바닥에 허무주의가 숨겨져 있는 것을 지적해 낼 수 있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사물적 관점의 테두리 안에서 허무주의를 부정하는 태도는 이성적 사유가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본능적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주의를 부정하게 되는 이유는 허무주의와 삶에 대한 본능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삶에 대한 동물적 욕망보다 더 강하고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현상을 사실적 관점에서 대하는 한 철학적으로 허무주의는 역시 옳다. 그것은 전통적 기독교적 교리와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에게 지동설은 역시 옳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72-73쪽

인간은 언어적인 존재로 그냥 있지 않다. 그가 접하는 모든 것을 언어화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의식 대상의 관계는 언제나 의미적이며 의미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언어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인식론의 혁명이 보여주었듯이 인과적이 아니라 해석적이며, 자연중심적이 아니라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미다스 왕의 손에 비유된다. 미다스 왕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바뀌듯이 인간의 의식이 닿는 모든 대상, 행위,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의미로 변하게 마련이다. 문화를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인간화 즉 의미화로 정의할 수 있고 또한 인간의 의식이 닿는 모든 것을 의미화한다면 자연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문화적 즉 의미적 존재로 이미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언어적 존재로서 인간이 모든 것을 문화화 즉 의미화할 수 밖에 없고, 언어를 떠난 '의미'가 있을 수 없고, 언어적 작업이 글쓰기이고 그렇게 써놓은 글을 텍스트라 한다면, 인간의 삶은 텍스트 쓰기에 지나지 않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삶의 과정과 그의 일생은 필연적으로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78쪽

모든 인간의 삶의 과정을 텍스트 쓰기, 모든 인간의 일생이 각기 자기가 써서 남긴 텍스트라는 말은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글쓰기를 하며, 똑같은 내용의 텍스트를 쓴단든 말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존재 양식은 플라톤의 경우처럼 '이데아'라는 보편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p,q,s,t' 등의 이름이 붙은 개별적 실존자로만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인간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모든 '나'는 각자 다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다 같이 텍스트를 쓰고 모든 텍스트가 다같이 의미를 갖지만 그들의 텍스트와 글쓰기의 스타일은 각자 필연적으로 다르고 따라서 그 텍스트의 의미도 필연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마치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작가마다 다르고, 한 작가의 개별적 작품들이 저마다 다른 것과 같다. -78-79쪽

한편으로 의식, 즉 인지되지 않은 존재는 의미가 있을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언어 이전의 다양한 의식 즉 지각, 경험, 세계, 존재 그리고 의지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와 독립해 존재하며 세계를 표상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이미 언어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에 의해 구성되기 전의 존재, 세계 그리고 경험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이른바 언어 이전의 '객관적' 존재들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말할 수 없는 혼돈상태로 '무의미한' 채로 어둠 속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어둠은 언어의 빛으로 밝아지고 비로소 '의미의 질서'를 갖고 인간 앞에 '나타나게'된다. -89쪽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의 경험이나 생각을 기록해 두거나 타인에게 더욱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서다. 경험이나 생각이 비가시적 의식의 활동인데 반해서 그것을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언어는 가시적인 객관적 현상이다. 경험/사고는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언어에 선행하며 그것들은 서로 분리할 수 있는 독립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험/사고와 언어는 완전히 독립할 수 없고 경험/사고는 그것이 곧 언어적 활동이며, 글을 쓰는 이유는 기존의 경험/사고의 표현이나 전달에만 있지 않다. 글로 써지기 전까지의 경험/사고가 의식 활동이니만큼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유동적이며 불확실하며 막연한 채 남아 있으며 오래 지속될 수 없다. ... 글쓰기가 가장 중요한 근본적 이유는 좀 더 잘 생각하고 세계와 인생을 좀더 잘 인식해보자는 데 있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더 정확히 생각하고 더 세계를 잘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글쓰기에 대한 욕망의 근원에는 진리에 대한 깊은 숨은 욕망이 깔려 있다. 문학이나 철학은 다른 어느 지적 활동보다 각별한 언어활동이니만큼 작가나 철학자는 일반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지적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다른 지식인/학자보다도 진리를 추구하고 세계를 투명하게 보고자 하는 욕망이 많은 종족에 속한다. 나는왜 시를 쓰려 했고 문학을 하려고 했으며 철학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글쓰기를 하는가? 나 자신과 세계를 더욱 투명하게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91-92쪽

내가 진심으로 저 깊은 속에서부터 갈구하고 있었던 것은 앎 자체, 앎의 투명성 자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영원히 해답이 없는 삶의, 그리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으미에 목말라 있었다. 나의 근본적 문제는 지적인 것을 넘어서 아니 그 이전에 종교적인 것이었다. 물론 지적인 문제와 실존적 문제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깊이 따지고 보면 구체적 한 인간에게 있어서 지적 가치와 실존적 의미는 서로 뗄 수 없는 역동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으로 지적으로 투명해지지 않는 실존적 가치는 착각이거나 맹목적일 수 있고, 실존적으로 그 가치가 체험되지 않은 지적 투명성은 공허함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46쪽

진리가 재현이 아니라 구성이라는 사실과 철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발견이 아니라 세계의 관녀적 건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철학으로서 이에 대한 학문의 가치의 궁극적 평가는 그것이 가져오는 삶에 있어서의 실천적 가치에 비추어서만 도구적 관점에서만 평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세계에 대한 탈. 도구적이고 즉 순수한 지적 탐구가 선행되지 않는 소망과 이상적 꿈 역시도 충족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 탐구로서의 철학의 원초적인 동시에 궁극적 의미와 가치는 그것의 사념성이 아니라 실천성에 있다.

-190쪽

꽃이 진다고 해서 그 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조만간 죽어 흙이 되고 벌레의 밥이 되게 마련이라고 해도 삶 일반, 특히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귀하다. 아니 우리가 머지 않아 사라지기 때문에 그만큼 더 우리들의 삶은 보람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삶의 존엄성, 절대적 가치를 의식하고 삶에 대한 경외, 삶의 성스러움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시들시들한 꽃보다 생생한 꽃이 더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적극적 삶, 인텐스한 삶은 그만큼 더 귀중하다. -222쪽

자기기만의 현상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기기만이라는 현상은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남의 가치관, 다른 사회의 이념은 나의 이른바 객관적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고 개혁될 수 있다. 하나의 주관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의 객관성이라는 명목하에 일률적으로 남의 가치관이나 다른 사회를 비판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칫하면 남의 자율성,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하는 독단주의적 독선의 길로 뻗어 가기 쉽다. 우리들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에 대해서, 다른 사회의 이념에 대해서 항상 반성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비판되고 개혁되어야 한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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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ood Book!

 
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대표 김교빈은 '개정증보판을 내면서'라는 글을 통해 이 책을 쓴 의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처음 책을 쓸 때 동양철학을 신비로운 것으로 해석하거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쓸모 있는 위대한 사상으로 무조건 떠받드는 태도를 부정하는 시각을 갖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각 사상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의미와 한계를 통해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함께 드러내 보이려고 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운 동양철학이 아니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살아있는 동양철학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책을 썼고 만들었다면 성공이다. 첫 출간 이후 1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고 개정증보판을 낼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김교빈은 동양철학 분야에 있어서 꽤 다양한 책에서 이름을 올리는 열정적인 철학자다. 대중을 대상으로 쓰여지는, 또 개론서격 동양철학서에는 항상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얼마전에 읽은 <한국철학 스케치>의 몇명의 필진에도 이름을 올렸고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강좌에도 강의진으로 자주 이름이 올라온다. 호서대 예체능대학 문화기획학과 교수. 그것이 그의 직함이다. 아마도 추정컨대 호서대 철학과가 폐지된 이후 '문화기획학과 교수'라는 직함이 '철학과 교수'라는 직함을 대신한 듯 하다. 이 책 저자 소개에 나와있는 '철학과 교수'라는 직함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대학에 철학과가 있어야 하는건 아니지만 인기없는 학과라 하여 경제논리에 의해 과를 없애버리는 작금의 사태는 정말 아니다. 또 실제로 현재 철학과를 대학 학부 과정에 두고 있는 학교 또한 많지 않다. 다 있을 필요도 없지만 있는걸 없앨 필요도 없다. 더군다가 그것이 단지 인기가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이유라면 더더욱. 지방의 알려지지 않은 대학, 그것도 철학과라니. 취직하기 위해선 학벌이 안되면 경쟁력있는 학문을 공부한 과라도 졸업을 해야하는데 그마저도 안되니 학교차원에서는 차라리 없애자고 결정했던 것이다. 당시 철학과 폐지 반대운동이 학내에서 꽤 격렬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다뤄지지 않았기에 많은 이들이 알지 못했고, 나는 다른 대학 철학과에 적을 두었다는 이유로나마 소식을 접했을 뿐이다. 결국 경제논리에 의해 과는 사라졌고 졸업생은 다른 과로 전과했다고 들었다. 철학을 공부하고픈 이들을 강제로 찢어 다른 과에 배속시키는 이 행위를 어찌 봐야한단 말인가.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는 보통 '동양철학'이라고 하면 사주나 관상을 봐주는 점집을 예상한다. 또 실제로 그런 점집에는 '철학관' 내지는 '동양철학' 이라고 쓰여져있다. 그러니 오해를 할만도 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철학과를 나오면 철학관을 차리는 줄 알고 있다. 그래도 좀 안다 하는 사람들도, 동양철학과 중국철학을 동일시한다. 중국철학이 동양철학인건 맞지만 동양철학이 중국철학이지는 않다. '동양철학'이란 범주 안에는 엄연히 한국철학도 포함된다. 그러나 서양과 동양의 대립구도에서 중국철학이 동양철학을 대신하게 되었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를 한다. 이 책은 동양철학에 대한 항간의 오해를 풂과 동시에 좀더 엄격히는 중국철학의 대가들을 만나보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개정판이 나오면서 흔히 동양철학개론서에서도 다루지 않는 농가가 추가되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이라고 말하면, 이미 동녘에서 나온 80년대의 필독서였던 조성오씨의 <철학에세이>를 읽은 분들은 알테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과 연결지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단순히 공자와 노자와 장자와 순자와 맹자와 한비자와 기타 등등의 온갖 유명한 중국의 철학자들을, 그들의 이론을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와 관련하여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바라본다. 결국 우리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각자의  시선을 키우고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중국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다. 고로 우리는 개론서를 익히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익힌 바를 가지고 새롭게 사회를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얇은 책이고, 그 안에서 여러 철학자들을 다루느라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묵자와 관련해서는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장자와 관련해서는 현대 과학기술의 병폐와 환경문제를 이야기한다. 또 맹자의 혁명론과 관련해서는 5.16과 12.12를 말한다. 단면을 살펴보자.

  "하지만 맹자의 혁명론에는 한 가지 필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 주체에게 민중의 뜻에 근거한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봉건 왕조의 교체는 언제나 혁명이냐 아니냐의 논란을 일으켰스빈다. 5.16과 12.12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혁명이라고 강변하지만, 역사가 준엄하게 군사 쿠데타로 규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맹자의 혁명론은 지배 집단에게는 반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임금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주장이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 '남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오늘날 동양철학의 유행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첫번째는 개인주의의 문제요, 두번째는 개인주의의 확산이 가져오는 사회성 부정과 실천성 결여, 세번째는 이런 것들이 귀결할 수 밖에 없는 신비주의, 네번째는 위의 것들이 갖는 몰역사성의 문제를 든다. 넷째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속에 담긴 가치와 아울러 한계를 함께 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절대화된 보편성과 가치만을 강조하면서, 토대가 다른 현대에 무차별로 접맥하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객관적이라는 말을 통해 엄청난 주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변형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유교 자본주의론 같은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교 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적 물질 문명과 봉건주의적 정신 문명을 마구잡이로 엮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지배 형태인 관과 민, 자본가와 노동자 등의 관계에서 지배 집단의 이익을 관철하는 논리가 되고 맙니다."

  동양철학의 유행한다고 반길 일도 아니고, 굳이 유행시킬 필요도 없다. 우리가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가 중요하지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부차적 산물일 뿐 먼저가 되어선 안된다. 우리가 동양철학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하며, 그 기준은 '현실적 요구'가 되어야 한다. 현실을 보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고, 현실의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기 위해 철학을 공부한다. 저자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게다. 여기 공자, 노자, 묵자, 장자, 맹자, 순자, 한비자, 공손룡, 허행 아홉명의 철학자가 있다. 그리고 <주역>을 말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그대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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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7-05-1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와 함께 장바구니로..^^

가넷 2007-05-1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종류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읽었는데, 생각보다 별로 였었어요. 음.-_-;

마늘빵 2007-05-1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가슴에 불을 지폈나요? :)

마늘빵 2007-05-1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네 별 다섯까지는 아니지만, 오래된 고전 중의 고전으로서, 이땅의 현실과 관련해 살펴봤다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봤습니다. 쉽게 빠르게 읽히진 않습니다.

yoonta 2007-05-1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동양철학은 언제쯤 손에 잡히게 될지 모르겠네요. 일단 한자의 압박때문에..-.- 위 책읽으면 동양철학도 쉽게 다가올 수 있을까요? ^^

마늘빵 2007-05-17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타님 / 저도 한자 잘 모릅니다. 빡빡한 한자로 된 원서로는 아직 안봤어요. -_- 풀이본으로만 봤죠. 그래서 주변 언저리의 책들을 두루 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수월하게 읽으려고.

yamoo 2010-08-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철학과 나오셨군요! 김교빈 교수는 개인적으로 몇 번 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말이 없으셔서 좀 재미없는 분..

마늘빵 2010-08-21 08:37   좋아요 0 | URL
네 ^^ 김교빈 교수는 김시천 교수와 함께 뵙고 싶기도 합니다. 두 분이 항상 같이 작업을 하시더라고요. 몇몇 책에서 함께 이름이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 철학 스케치 2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풀빛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사상은 단순한 생각의 나열이 아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시대의 사회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그에 맞는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상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생명력을 잃은 나무는 큰 의미가 없다. 살아있는 철학은 바로 사회를 이끌어 가는 깨어 있는 시대 정신인 것이다.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두권으로 이루어진 <한국철학 스케치>의 2권의 시작은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이다. 1권에서는 '원시 시대와 고대의 철학 이야기'에서부터 불교, 성리학을 다루었고, 2권에서는 조선 후기의 실학부터 위정척사파와 동학운동파, 갑오농민군, 활빈당,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개화사상과 주역들에 관해 다룸으로써 마무리 짓는다. 

  개인적인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동양철학, 그러니까 중국과 한국의 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는 서양의 철학을 공부할 때보다 역사적인 배경이 매우 중요하게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양철학에 있어서 기독교와 신, 이성을 빼고 논할 수 없지만 과거에 지나왔던 역사의 현장들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철학 역시도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함께 성장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 비중면에서 동양의 것을 공부할 때보다는 덜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중국철학을 함에 있어서 춘추전국시대를 빼놓을 수 없고, 한국철학을 하면서도 각각의 사상들이 지나왔던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선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한국철학 스케치>는 이러한 역사의 장면과 장면을 이어줌으로써 각각의 철학을 다루는 장과 장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었다. 이 책의 강점은 다른 한국철학개론서와 비교해  높은 가독성과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철학은 세상을 보는 눈을 준다. 세계관, 역사관, 자연관 등은 모두 세계를 보는 눈, 역사를 보는 눈, 자연을 보는 눈을 뜻한다.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철학을 하는 이유이고, 삶을 살아가는 개인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철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교수가 되려는 이들이 해야하는 공부가 아니라,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아가는 개인이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기본이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타인의 시각에 의해 사물을 바라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자기의 시각이 없다는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남들이 다 이렇게 한다더라, 그러니 나도 이렇게 하자. 옷은 유행에 따라 바꿔입으면 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중심이 되는 시각, 가치관조차 시대의 흐름에 내맡길수는 없다. 

  각자가 자신의 시각을 갖기 위해, 또 우리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아가며 지녀야 할 나만의 시각을 갖기 위해, 한국철학은 공부할 가치가 있다. 철학이 없는 국가, 철학이 없는 개인은 존재의미를 찾을 수 없다. 번지르르 명품으로 치장한 몸뚱이와 세계경제대국 10위권 국가라는 타이틀은 빈껍데기다. 자기주관을 가져라. 나아가 불편부당한, 외부의 자극에 흔들림 없는 기초가 튼튼한 자기철학을 세워라. 나를 포함한 살아 숨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다. 새로운 체계를 세우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것 보다 이미 대가라 칭송받고 있는 그들의 사유를 빌려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이 더 확실하고 빠를 것이다. 그것이 내가 철학책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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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교수가 되려는 이들이 해야하는 공부가 아니라,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아가는 개인이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기본이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타인의 시각에 의해 사물을 바라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자기주관을 가져라. 나아가 불편부당한, 외부의 자극에 흔들림 없는 기초가 튼튼한 자기철학을 세워라."

오.. 감동스러운 언명입니다. 아프락사스님.
철학책을 읽어야하는 이유! 추천!


가넷 2007-05-1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질렀습니다 Thanks to~^^;

비로그인 2007-05-15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서재에 한부 스크랩해 갑니다. 아프락사스님.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07-05-15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좋습니다. 강하면서도 주르륵 읽어내리게 하는 흡입력.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철학 분야에는 무지인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나만의 독특한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동감되는군요. 제가 그러거든요. 그래서 별종이란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만. (웃음)
'눈'은 필시 얼굴 앞면 상부에 달려 있는 동글이 2개가 아니라, 심층에서부터 뻗어나온
'자아'이겠죠. 평상시의 '사회적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아' 말입니다.
담아가겠습니다. ^^

달팽이 2007-05-1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아프락사스님께서 '소크라테스 카페'라는 책을 읽지 않으셨다면
한 번 권해봅니다.
서양 철학도 이렇게 생활에 그리고 삶에 밀접하게 용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매력적인 책입니다. 물론..제 눈에..

마늘빵 2007-05-1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그리 콕 찍어서 따로 놔두니 부끄럽습니다. 스크랩까지. -_-a 평소 철학에 대한 생각을 끄적 해봤습니다.
그늘사초님 / 빠르십니다. :) 1,2권 둘다 읽기 편하실 겁니다.
엘신님/ 엘신님도 스크랩을. -_-a 철학사의 지식을 몰라도 자기철학, 자기주관이 있는 사람은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엘신님은 서재상으로도, 만나봤을 때도, 확실히 독특하십니다. 엘신님은 이미 철학자입니다.
달팽이님 / 네 그 책 읽어봤습니다. :) 일상 속에서 대화를 통해서 철학을 실천하는 모임이더군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통해서. 그런 모임 갖고 싶습니다. 제가 주재할 능력은 아직 안되고 해서 누군가 주도한다면 참여할 의사는 있어요. 재밌을거 같아요.

향기로운 2007-05-2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추천리뷰에 떠서 읽게되었네요^^;; 저의 게으름... 저도 담아갈게요^^

마늘빵 2007-05-2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게요? -.- 어디죠? 알라딘 마을인가요?

leeza 2007-08-26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놀라워요.. 이 땅에 빌붙어 사는 사람이라면 철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공감하게 되구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