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교육신화 비판
이철호 외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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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검색창에서  '메이데이'라고 쓰고 클릭하면 대략 출판사의 성향을 알 수 있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책 뿐 아니라 읽은 책 중에서도 메이데이 에서 나온 책은 이 책이 유일한 것 같은데, 이렇게 출판사명을 가지고 궁시렁 거리고 있는 건 별다른 딴지를 걸려는게 아니고, 책장을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어떤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다는 말을 하고파서다. 대략 교육 문제에 관한 여러 주제들에 관해 평소 관심을 갖고 신문이나 뉴스를 꼼꼼히 챙기신 분들에겐 이 책이 필요없다. 진보성향의 단체 소속의 개인에 의해 한 꼭지씩 쓰여져 엮인 대한민국 교육 비판서이기 때문에 여기 담겨있는 주의주장들은 평소 언론에서 대립구조를 이루는 한쪽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가지 걸고 넘어지면 나는 전교조에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다. 평소 사회에 관한 내 생각들을 따라가면 전교조로 연결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전교조와 또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교총이 맘에 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교총은 전교조보다 조금 더 싫다. 전교조는 단지 그보다 아주 조금 덜 싫을 뿐. 아무래도 하나의 '단체' 안에 여러 다양한 의견을 가진 분들이 모이다보니 내부에 진통이 지속되기도 하는데, 그리하여 나오는 주의주장이나 결론은 그다지 동의해주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교육 현장에서 흔히 목격되는 비정규직 교원에 대한 태도나 학생을 대하는 태도도 전교조에 소속된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한다. 어쩌면 내가 전교조는 이래야 한다, 라고 감당 못할 기대감을 떠안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한국 교육이 제 갈 길을 가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 파헤치고(?) 있다. 학교 교육이 평등하고 중립적이다, 라는 세간의 시선은 왜곡된 것이라고 시작하며, 공교육이 부실해서 사교육이 번성하는 것인가, 대학입시제도를 고치면 교육문제가 해결되는가, 교원을 평가하면 교육의 질이 높아지는가, 간판이 품질을 보장하는가, 등등의 아주 민감한 '정치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각각의 글은 여러 사람들이 하나씩 도맡아 작성했다. 필자에 이름 올린 이들은 홍세화씨를 비롯 참교육연구소 소장 이철호, 민노당 정책연구원 송경원, 대안교육연대 사무국장 이치열, 진보교육연구소 사무차장 박유리 등 단체의 이름을 걸고 나온 이들과 교육 현장에 있는 중고등학교 교사들이다.

  머릿글에서 이철호 저자 대표는 "소수의 경쟁력 있는 인재가 육성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학생들이 현 교육제도 아래서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은 영어와 컴퓨터에 능숙한 젊은이들을 많이 육성해낼 수 있을지 모르나, 창조적 지식, 높은 수준의 과학적 지식, 문화적 감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을 양성해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 의식에 동의한다.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는 평준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이다. 사회에서, 기업에서 필요로 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을 국가의 공교육에 떠맡기고, '大學'의 이름을 먹칠하면서 학원화시키고 있다.

  '경쟁'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은 용납되고, 마치 '경쟁'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양 부추기고 있는 언론과 정치인들에 의해 빈부격차 벌어지듯 학력까지 벌어지고 있다. 잘하는 놈은 잘하는 놈들끼리 묶고, 못하는 놈은 못하는 놈들끼리 묶어서, 잘하는 놈들은 더 잘하게 만들고, 못하는 놈들은 더 못하게 만든다. 여기에 개입하는 게 '자본'이다. 건너들은 어떤 분의 말씀따라 강남에선 초등학생들이 카프카며 니체며 읽고 있고, 강북이나 지방에선 산수와 한글을 배우고 있다. 태어나면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에 따라 맞춤형 교육이 시작되고, 친구들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타자가 되어간다.

  한국 교육은 결코 평등하지 못하다. 과거에 교육에 있어서 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의미했지만 이제 더 이상 기회의 평등은 껍데기만 남았다. 애초 시작이 다른 학생들을 놓고 기회의 평등을 논하고, 경쟁에서 진 아이에게 기회를 똑같이 줬는데 네가 졌으니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건 폭력이다. 이제 기회의 평등은 그 의미가 정정되어야 한다. 기회의 평등을 논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차별'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혜택을 받으며 자란 아이의 문을 더 좁게 만듦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논해야 한다.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올 법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며 누린 혜택부터가 이미 역차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또다른 역차별을 막기 위해선 사사로이 가진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차이를 충분히 인위적으로 메꿔줘야 할 것이다.   

  한달 평균 50만원의 비용이 사교육에 지출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왜 사교육을 멈출 수 없을까. 안보내면 그만인데, 안보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왜? 학급의 친구들이, 같은 동네 영희, 쳘수도 다 그만큼의 사교육을 받고 있으니까. 불안해서 불안해서 안보낼 수가 없다. 내 아이만 뒤쳐질까봐. 똑같이라도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만의 비용을 매달 지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그들 모두가 함께 멈추면 된다. 그런데 멈추지 않는다. 영희가 학원 가면 철수도 학원 가고 철수가 학원 가면 순이, 갑수, 말자 다 따라 간다. 그래야 보통이라도 유지를 하니까. 사실 시작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우수해지기 위해서, 더 앞서나가기 위해서였는데, 종국엔 모두가 평균이라도 따라가기 위해서 다니고 있다. 비극이다.

  사교육 번성의 원인은 결코 공교육 부실에 있지 않다. 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학교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서 생겨난다. 근데 모두가 두각을 드러내고 싶어하다보니 종국엔 사교육이 공교육보다 우선시 된다. 학교에서 우수해지기 위해서, 그래서 점수를 잘받고 내신을 다지고,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에 잘 가기 위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면 결국은 대학이다. 그런데 그냥 대학이 아니라, 일류대학이다. 이미 고등학교 정원보다 대학 정원 수가 더 많고, 지방의 몇몇 대학들은 망할 위기에 처해있는 판에, 대학에 가려고 그 고생을 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하늘대학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늘대학 나와서 대접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그래서 성공한 인물로 기억되고 싶어서.

  민노당 송경원 정책위원장은 이 책에서 이 짓을 멈추기 위해서 첫째, 일류대 거품을 빼자. 둘째, 60만 명의 희망자에 맞게 일류대 문을 더 열자. 더불어 국공립대통합네트워크를 만들자. 나라에 속한 국공립대만이라도 먼저 네트워크를 만들어 함께 뽑고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학 이상은 평생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고3 마치고 들어가는 코스가 아니라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나 기업이 노동자의 평생교육을 위해 학습휴가제나 학습비 지원 등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멈추기 위해서는 공교육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저들이 경쟁을 멈출리는 없으므로 경쟁을 멈출 수 있게끔 문을 활짝 열어버리고 같이 뽑고 같이 교육시키는 마인드를 가진다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는 것이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하겠다는 합의만 있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방법이다.

  왜 부모는 자식을 남들보다 더 뛰어나게 만들고 싶어할까.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럼 잘 사는게 뭔데? 특목고와 일류대학과 대기업이 잘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리자. 돈 많이 벌고 풍족하게 살면 그걸로 충분할까. 왜 스스로의 몸만 살찌우려 하고 영혼을 돌보지 않는가. 결국 부모가 꿈꾸고, 아이들이 꿈꾸는 것은, '행복'이라 할 수 있을텐데, 정말 그것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걸까. 부모가 자식이고 교사고 기타 등등 동일한 공동체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미친 짓을 멈추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들을 통해 내가 이루고자하는 것은 또 무엇이고, 또 무엇이고, 또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의 욕심에 의해서, 혹은 부모가 주입한, 사회가 주입한 대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진 않을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건 아닐까, 를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은 공교육과 사교육의 문제, 평준화의 문제 뿐 아니라 교원평가, 학벌사회, 대학선발, 대안교육, 조기영어교육, 자립형사립고, 로스쿨, 구조조정 등에 대해서도 다룬다. 우리가 각각의 커다란 주제들을 살펴보며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복잡한 제도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하지만 이 책엔 그런 근본적 물음은 들어있지 않다. 그보다는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맥락에 대해, 또 그들이 가진 정치적 교리에 따라 각 주제를 살펴보고 있다. 틀렸다고 말하고픈 것이 아니다. 나는 대략 여기 쓰여져있는 주장에 대해 90%는 동의한다. 10%를 뺀 것은 근본적으로 더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미리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탕에 두고서 작성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정치적 맥락을 치고서 시작했다면 더 좋은 생각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든다. 

p.s. 진보교육연구소, 범국민교육연대, 참교육연구소 등이 전교조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모른다. 앞에서 전교조를 이야기한 것은, 느끼기에 전교조의 주의주장과 여기 거론된 단체들의 대표로 나온 이들의 주의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서이다. 사실상 관련 없는 단체들을 임의로 엮어 개인적 견해를 드러낸데서 오해가 빚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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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07-12-07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총은 전교조보다 조금 더 싫다. 전교조는 단지 그보다 아주 조금 더 싫을 뿐."
어느 쪽이 더 싫다는 겁니까 -_-;

마늘빵 2007-12-07 09:10   좋아요 0 | URL
-_- 흐음. 이래서 쓰고나면 한번은 읽어봐야해. 수정하겠습니다. 리을 하나의 차이가 크군요.

미즈행복 2007-12-0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기 전교조와 지금의 전교조는 차이가 많지요. 초기에는 정말 열혈분자(?)들의 집합이었으나 이제는 특별한 생각없이 가입해요. 세 늘리기죠. 전교조 사람들도 '교총보다는 낫지 않냐, 그냥 한달에 만원 회비 내는거 아깝지 않으면 좀 들어달라'고 말하면서 회원을 모집하니까요. 아무래도 사람이 많아지면 순수한 열정은 희석되기 마련일테니까요.

마늘빵 2007-12-09 00:40   좋아요 0 | URL
큰 조직이다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있겠죠. 그 안에서도 각기 다른 생각으로 갈등이 있을테고. 교총도 마찬가지겠죠. 조직이 커지면 어쩔 수 없나봐요. 그 안에서 자정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겠죠.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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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진보한다는 것의 잣대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의 풍요에 뭔가를 더 주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아주 적게 가지거나 거의 못 가진 사람들에게 견딜 만큼 마련해 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는 것이다." (프랭크린 델라노 루즈벨트)-9쪽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출발선을 같게 하자"라는 '형평성'의 관점에서 사회적 합의를 찾고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큰 복병을 만나게 되었고,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 셈인데,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것이 '형평성'이라는 것이다. 국민들 입장으로서는 '평등(equality)'을 포기하는 대신 형평성이라는 보다 완화된 가치에 동의를 해준 셈이다. 그리고 그 형평성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바로 교육이다. 최소한 안정적 시장 경제를 운용하고 있는 선진국 정부와 국민들이 합의한 내용은 고등교육, 즉 대학교육에까지 형평성을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나라마다 제도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따라서 "동거하는 주제에 대학은 뭐하러 다녀?"라고 말을 한다면 이건 이 사회의 근간을 깨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 되는 셈이다.-46쪽

현재의 시스템에서 18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것도 나의 해법은 해법이다. 두 번째는 등록금 융자와 같은 개인융자로 비용을 지출하고, 나중에 고소득의 연봉으로 빚을 상환하는 방법이다. 전형적인 인간자본론 이론에 따른 해법인데, 만약 대학 졸업 이후 고소득의 연봉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평생 초기 출발 때의 빚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개인의 삶을 전체적으로 디자인하면서 위험부담이 상당히 큰 방식인데, 투자 이론에서는 이를 '위험선호도'가 높다고 표현하고, 이러한 행위를 '위험감수형 행동'이라고 부른다. 세번째 해법은 부모의 재정에 기대는 것인데, 이는 세대 간 소득 이전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동거와 같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선택은 꿈도 꿀 수 없게 된다.-50쪽

'세대'라는 용어는 이런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회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종종 세대 담론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것이 '역사성'과 '공간성'이라는 구체성을 추상성에 덧붙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금 20대'라는 개념은 매년 20대가 갱신되기 때문에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물'과 같은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21세기 초반이라는 특수한 구체성을 부여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개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세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보편주의적 접근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맥락이라는 또 다른 매력 때문이다.-77-78쪽

마케팅 세력이 아닌 어른들은 10대가 독서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예산과 제도를 비롯한 많은 지원을 해주겠지만, 마케팅 세력은 10대들에게 주어진 용돈을 독서가 아닌 다른 곳에 사용하도록 계속 유도할 것이다. 작지만 이 두 가지 힘의 싸움이 대한민국의 미래와 나머지 힘들 사이의 균형을 결정할 가장 큰 요소이다. 마케팅 세력과 비마케팅 세력은 10대의 용돈이라는 1318 시장에서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여기에 한국의 미래가 걸려있다. 이것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는 지표는 간단하다. 10대들이 상대적으로 책을 사는데 더 많은 용돈과 에너지를 지출할지 아니면, 1318 마케팅 세력을 지시하는 화장품과 소비재를 사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바뀌는 셈이다. -142쪽

지금의 20대는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며, 곧 비정규직이 될 운명 앞에 서 있다. 8백만 명을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평균은 119만원이며, 전체 임금에서 20대가 평균적으로 받는 비율을 적용하면 88만원이 된다. 그나마도 세전 금액이다. 따라서 하루 8시간을 일하는 20대 비정규직이 한 달에 확보할 수 있는 경제력은 그보다 적다. 이 임금을 기준으로 한 달에 50만원을 저축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려면 죽음과 같은 삶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10년을 모으면 6천 만원이고, 20년을 모으면 1억 2천만 원이 된다. 그리고 50대가 되었을 때, 그나마 비정규직 일자리조차 남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렇게 본다면 20대는 평균적으로 전세는 물론 결혼도 하기 어려운 세대이다. 결혼을 해서 손에 얻는 돈은 중산층이 자녀 한 명에게 들이는 사교육비 정도이다. 아니, 이들도 전부 그만한 돈을 들여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아닌가? TV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사들이고, 잡지가 시키는 삶의 방식을 채택한다면, 20년 후에 1억 2천만 원의 자산 대신 그만큼의 빚이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20대, 그들이 바로 '88만 원 세대'이다. -143쪽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즉, 대학 국유화를 쟁취한 뒤 다음 단계로 진화했던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우리의 386은 대학개혁에 대해 거의 아무런 청사진이나 의미 있는 노력을 개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벌사회를 더욱 강화시키며 교육 엘리트주의를 강화시키는, 일종의 역사에 대한 배신을 행한 세대이다.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경제 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은 차이점은 세대원들끼리 서로 지원하며 일종의 경쟁력을 가지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177-178쪽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학번 중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시절에 대학생 정원을 대폭 늘리면서 운 좋게 대학원만 졸업을 하고도 대학교수가 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교수가 된 상태에서 야간 대학원을 다니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80년대에 대학에 다녔던 많은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박사과정에 진학하거나 유학 붐을 만들며 교수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문은 잠깐 동안만 열렸고, 석사학위만 가지고도 교수가 될 수 있는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박사를 수용할 수 있는 대학교수직이나 연구직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박사들 특히 인문학이나 특수전공을 가진 사람들은 후에 개인적으로 아주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사람들에게 발생한 운명을 우리나라에서는 '고학력 실업'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일이 유럽에서도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걸 '과잉 교육'이라고 불렀다.-182쪽

다른 세대와의 경쟁에서 20대는 서로를 소외시킬 확률이 높은데, 여러 가지 사회적 경험을 공유하면서 단결하고 뭉치도록 배우고 또 그렇게 살아온 앞의 세대와는 살아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조직에서 인사권을 가진 세대는 유신 세대이지만, 곧 그 권한은 386세대로 넘어갈 것이다. 이 상황에서 별도의 그룹을 만들지 않을 확률이 높은 20대의 아주 일부가 윗세대에게 '포섭'되어 대다수의 20대를 소외시키는 일들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연공서열제가 사라진 상탵에서 발생할 첫 번째 일이 바로 이것인데, 사회적으로 새로운 균형 상태가 나타날 때까지는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언젠가 자신들에게 인사권을 비롯한 경제적 권력이 쥐어질 날을 기다리면서 버티는 것이 대부분의 20대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위 패턴이라 할 수 있다. 이걸 밖에서 보면 '20대가 20대의 적'이라는 상황으로 해석될 것이다. 20대에게 주어진 승자 독식 게임에서 사실 세대 간 경쟁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매우 거칠고 불행한 승자 독식 게임이다. -191-192쪽

불행을 비교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극단적인 승자독식 체제로 흘러가면서, 승자와 패자만 나뉘는 것이 아니라 패자들 사이에서도 또다시 변종 승자독식 게임이 벌어지게 된다. 젊은 세대 내부에서 극소수에 해당하는 승자들이 갈리고 나면 패자들끼리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지는 것이다. 여성, 고졸 이하 학력자, 지방대학 출신, 전문대 출신 등등의 집단이 벌이는 경쟁이다. 실업 문제와 비정규직의 여성화라는 문제는 '패배한 다수 가운데' 에도 계층이 나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여성이면서 지방대학 출신일 수 있고, 남성이면서 전문대 출신일 수도 있으므로 각 집단은 독립적인 게 아니라 중층적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 벌어지는 승자독식 게임은 '패자부활전'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개미지옥 게임'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197-198쪽

현재의 20대가 맞게 된 사회적 고통들의 원인은 20대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경제 구조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직접적인 요인 두 가지를 꼽으라면 결국은 한국 경제의 영광의 30년 동안 화려하게 활동했던 중소기업이 지난 5년 동안 붕괴하게 된 것과 사회적으로 경제적 약자들의 탈출구였던 자영업의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모두 한국 경제의 독과점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하나는 생산자본에서 발생한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유통자본에서 발생한 일이다.
-241쪽

중소기업의 붕괴는 단기적으로는 20대 실업과 10% 미만의 소위 '우아한 직업'에 대한 과잉 경쟁을 만들어내고, 구조적으로 90% 정도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원치 않았던 비정규직과 중소기업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자신이 원해서 간 것이 아니므로 이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기는 어렵다. 게다가 기존의 경제조직에서 완전히 내몰린 사람들이 자영업에 대한 창업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이미 유통에서도 대형 할인매장과 편의점을 중심으로 독과점화가 거의 완료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90%의 젊은이들에게는 불만족 상태에서 '메뚜기'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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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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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에서 하승우씨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경제적, 물리적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힘의 논리가 만연해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똘레랑스를 제안하고, 차이와 다양성에 관용적이지 못한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강조하고 나선다. 얇은 책세상 문고판 책이지만 하승우 씨는 이 안에 똘레랑스의 등장배경부터 미국의 털러런스와 프랑스의 똘레랑스의 차이를 설명하고, 인권, 양심, 토론, 설득, 다양성의 존중 등에 걸쳐 적용한다. 또한 똘레랑스의 한계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똘레랑스'는 '참다', '견디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tolerare 에서 나왔다. "서구 사회에서 인종, 문화, 종교의 차이는 격렬한 갈등의 씨앗을 뿌렸고, 결국 많은 피로 그것을 수확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똘레랑스다."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1572년 기독교 구교과 신교 사이의 갈등으로 빚어진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이란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국왕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구교도들은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파리에서 3천을 비롯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2만여명이 죽었는데, 신교도들은 생존을 위해 그들에 반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종교전쟁으로 번졌다. 

  유럽의 중세 13세기부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들이 '종교재판'이라는 합법적 제도를 통해 이단과 이교도에 대한 처형과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세우고, 비진리를 제거했는데, 15세기 종교 개혁 이후로 지난한 전쟁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서 '종교적 관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피에르 베일이며 홉스며 로크,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관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승우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앵똘레랑스'와 짝을 이"룬다. "똘레랑스는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종주의나 종교적 광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긍정하는' 논리일 뿐 아니라 극단을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즉 똘레랑스는 그 자체에 이미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똘레랑스의 원리로 몇 가지를 들자면, 첫째, '인간의 완전함에 대한 부정'을 들 수 있는데, 홍세화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의 저자 필리프 사시에에 따르면 "자기 중심주의의 포기"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자기 중심주의를 버릴 때 타인의 목소리가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다. 이를 롤즈와 비교해보면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합리적인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 같은 자발적인 포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래서 롤즈는 원초적 상황에서 무지의 베일이란 장치를 통해 이를 보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하승우의 논의와 별개로 칼 포퍼는 <관용과 지적 책임>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쳐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제 1원칙,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제 2원칙 "무슨 일이든 합리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어떤 잘못을 수정할 수 있다.", 제 3원칙 "만약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하승우가 극단을 거부하는 태도를 언급한 것은, 이와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극단을 거부하고 서로 토론을 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은 셋째 원리인 '폭력을 거부하는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 넷째 원리인 '차이와 다양성의 존중'은 모두 첫째, 둘째 원리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토론과 설득은 분명 이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싫고 좋음의 마음의 문제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또한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것도 다양한 여러 의견들이 광장에 나와 논의되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승우는 이후 홍세화와 그람시, 마르쿠제, 루쉰 등을 끌어들이며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논의를 전개한다.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가 절실히 필요함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똘레랑스'이라는 개념이 자비나 베풂과 동일시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똘레랑스는 '관용'으로 표기할 수 있는데, 똘레랑스, 라고 지칭했을 때와 관용, 이라고 지칭했을 때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편의상 그것을 '관용'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지만 전적으로 우리말에서의 관용이 똘레랑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용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한남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는 그의 책 <관용과 열린 사회>를 통해서 우리말 관용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우리말 '관용'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함' 내지는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의 본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해선 곤란하다. 우리말 '관용'은 그 뒤에 '베풀다'라는 동사가 붙는 반면, '똘레랑스' 뒤에는 '하다'라는 동사가 붙는다. 즉 우리말 관용은 상대에 대한 나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고, 똘레랑스는 대등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p.s.  

  프랑스에서 택시 운전을 하던 홍세화씨가 한국에 돌아와 똘레랑스를 외친지도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었다. 그는 책에서나  강연회서나 똘레랑스를 외쳤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똘레랑스를 전파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한번쯤을 다 들어봤을만한 용어가 됐다. 그런데 똘레랑스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연구서나 학술서가 많지 않고, 해외에 이미 나와있는 유명 철학자의 책조차도 번역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으로는 프레스톤 킹의 <관용론>, 로크의 <종교 관용에 대한 편지>, 포퍼의 <관용과 지적책임>을 들 수 있다. 로크의 <통치론>이나 <시민정부론>은 번역되었지만, <종교 관용에 대한 편지>는 번역되지 않았고, 포퍼의 수많은 저서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1987년에 쓴 <관용과 지적책임>이라는 책은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되어 나와도 그다지 팔릴 것 같지 않은 책들이지만, 의식있는 출판사에서 이 책들의 번역을 추진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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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제는 우리가 '똘레랑스'해야 할 때
    from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007-12-11 01:13 
    '똘레랑스'라는 게 이제는 그리 새삼스러운 단어는 아니다. 저 먼 타국 파리에서 택시를 몰던 한 사람이 어느날 홀연히 날아와 이 '똘레랑스'라는 걸 던져 준 후로, 우리에게 이 말은 비교적 유행을 제법 탔다. 그래서 이제는 '똘레랑스'하면, "아 그거"할 정도는 된다. 많이 들어보고 대충은 뭔지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는 '대충'에 들어가야 하겠다. '똘레랑스'라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개념을 접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수긍할 수 있었
 
 
 
한국사회 교육신화 비판
이철호 외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5월
품절


소수의 경쟁력 있는 인재가 육성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수의 학생들이 현 교육제도 아래서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은 영어와 컴퓨터에 능숙한 젊은이들을 많이 육성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르나, 창조적 지식, 높은 수준의 과학적 지식, 문화적 감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을 양성해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12쪽

그(홍세화)는 특정 개인을 넘어서 우리 사회 구성원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의식과 존재에 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그릇된 교육으로 인해 의식이 존재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고 있다. 국민학교라는 군국주의 교육이 의식의 통제 이상의 강력한 효과를 갖는 권력 지배 장치로서 몸을 통제했다는 것이다. -15쪽

설령 서민의 자식이 '개천에서 용이 나서' 교육 자본을 통해 계층상승에 성공한다고 해도 계급 구조에서는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서민 출신도 일단 출세하면 자신의 출신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천에서 용 낭기가 무척 어렵지만, 어렵사리 개천 출신의 용이 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개천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애당초 개천 출신은 지배계급의 '마름'이 된다는 조건에서만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38쪽

그리하여 한국에서 입시는 평가가 교육과정에 발전적인 영향을 주기보다는 평가에 의해 교육과정이 역으로 왜곡당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평가가 교육을 지배할 때 교수 학습 활동은 시험에 대비한 능력을 키우는 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문제 해결력 등 시험에서 요구되는 기능만이 의미를 가지게 되고 단기간에 많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주입식 수업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잦은 제도변화와 졸속적인 정책입안은 수험생들과 학교, 학부모들의 심리적인 불안을 가중시키며, 대학입시정책의 변화에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를 형성하였다. 즉 체계 순응적이게 하며, 입시정보를 쥔 자들에게 종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자세히 보면 중요한 변화가 보이는데, 1980년대 대학입학과정을 국가가 장악하면서부터 대학의 수직적인 서열화가 고착되었으며, 이는 국가고사가 서열화된 대학에 학생을 입학고사 성적순으로 배정하는 결과를가져오게 하고 있다. -66쪽

이 과정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지표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학력이라는 기준이다. 근대 제도교육의 형성과정에서 교육의 양적 기회는 확대되었을지언정 그에 반해 사회 불평등을 확대재생산해 왔다. 이를 위해 기회는 확대하면서도 동시에 그 기회를 차등화함으로써 평등한 접근의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제가 바로 학업 성취도로 측정되는 학력이라는 준거이다. 우리 사회는 학력을 직접구조와 연동시킴으로써, 불평등이 개인의 학력차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게 한다. 즉 학력수준이 높으면 고위직에 오르고 고임금을 받는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것이 학력의 신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력은 개인의 잠재력이나 학교의 교육활동과 무관한 영역에 변인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직업, 재산, 거주 지역과 학생의 학력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학력은 공정한 준거가 아니다. 결국 기득권 세력이 의도하는대로 공정한 학력평가라는 쟁점을 따르다 보면 갈 곳은 체념과 불평등에 이를 수밖에 없다.-69쪽

교육은 다음 세대를 위한 노력이다. 지금의 삶이 차별적이거나 불평등하다면, 사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는 차별과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즉 교육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을 극복하고 사회를 민주적이거나 또는 공동체적으로 통합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우리 교육은 심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교육으로 불평등을 극복하기는커녕 교육으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71쪽

교육은, 특히 학교 교육은 보편과 중립이라는 가면을 쓴 채 불평등한 관계를 재생산하면서 동시에 이를 은폐하는, 그래서 자본주의 지배구조를 유지하도록 하는 핵심 기제다. 그리고 이 모든 지배와 은폐와 과정을 체계화한 것이 교육과정이다. 그러므로 교육과정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비밀과 거짓말로 점철된 교육이 이루어지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77-78쪽

흔히 21세기를 문화의 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다양성과 창의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왜곡된 지식 위주의 입시 교육은 암기력 있는 로봇을 만들어낼 뿐이다. 창의력 있는 인간은 인지 능력과 함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정의 능력, 문화 감수성과 연계된 정서 능력을 균형 있게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교육과정은 지식 교육을 넘어 문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82-83쪽

또한 일반적으로 학교교육의 질을 좌우하는 요소로 중요하게 꼽히는 것은 교육재정, 교원확보율, 교육시설, 학급당 학생 수, 학업성취도 등이다. 그런데 교육인적자원부는 일반적이며 실질적인 교육의 질을 높이는 방안은 무시한 채, 오로지 교원 평가만을 학교교육의 질을 높일 방안이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교육의 질을 둘러싼 책임을 '개별 교원'에게 떠넘기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106쪽

교사의 전문성이란 지적으로 복잡하고 다면적인 것이어서 일률적인 기준에 의해 교사의 전문적 역량과 실천의 질을 높잉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교원평가는 교사의 전문성을 기술주의적이고 타율적으로 붙잡는 경향이 있어 결과적으로 교원평가를 통하여 교육활동을 통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108쪽

입시가 획일적인 줄 세우기식으로 이루어지면서 학생들은 입시성적에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입시성적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한 사교육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교육이 빈부격차의 대물림을 조장하는 기재가 되고 있다. 이미 많은 연구결과를 통해 부모의 학력수준이 높거나 경제력이 높을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그리고 교육여건이 입시교육에 집중된 곳일수록 학생들의 성적이 높다고 밝혀지고 있다.

지금과 같은 입시경쟁체제에서는 예전처럼 단지 본인의 노력이나, 타고난 소질만으로는 높은 입시성적을 얻을 수 없으며, 따라서 서울대와 같은 상위권 대학 역시 진학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처럼 대학서열을 유지하기 위한 상위권 대학들의 한 줄 세우기식 학생선발은 학생들의 다양한 소질과 적성을 파괴하고 있음은 물론 교육이 해야 할 공공적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계층이동의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빈부격차에 따라 사회적 계층이 그대로 이어지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유지시키는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131쪽

학벌문제가 현실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령이 제정되어야 한다. 법은 학벌이 사회구성원 다수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성 확보를 위해 독점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아야 한다. 이 법안이 담아야 할 기본정신은 '할당'과 '제한'의 원칙이다.

구체적으로 법령은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에서 두 방향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적극적으로는 지역인재를 할당하여 등용하는 것이며, 소극저긍로는 공직자 채용과 임명시 각 대학의 비율을 제한하는 것이다.

학벌 문제의 핵심은 사회 각 분야에서 권력 있는 높은 자리를 몇 개 대학 출신이 독차지 하는 것이다. 학벌 없는 사회로 가려면 사회 권력을 몇 개 대학이 독점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 곳에 권력이 골고루 나눠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에서 학벌을 선호하는 것도 다른 어떠 이유보다 공직이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이 시민사회 위에 군림하는 한국에서는 기업 운영을 할 때도 언제나 국가 기관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서울대 권력이 게속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34-135쪽

학교 간, 지역 간 학력 격차 때문에 내신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교 간, 지역 간 차이를 인정한 평가야말로 공정한 평가이다. 강남에서 사교육의 혜택을 받으며 자란 학생과 농어촌 지역의 학생을 동일한 시험으로 평가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 아니라, 강남 학생은 강남 학생끼리 경쟁하고 농어촌 학생은 농어촌 학생끼리 경쟁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다. 아니 나아가 더 열등한 교육 여건을 가진 이들에게 그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보정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147쪽

기본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라 학생을 가려내어 일류대부터 지방대까지 배치하는 '선발'시험으로 변질되어 있는 것이다. '선발'은 동시에 '배제'를 의미한다. 즉 누군가를 뽑았으면 누군가를 탈락시켜야 하는 것이다. -148쪽

국공립대학은 어떠한가. 국공립대학은 개인이 설립한 것이 아니므로 국공립대학마다 다른 이념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은 단지 소재한 지역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국공립대학이 개별적으로 성적순에 따라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은 설립취지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오히려 국공립대학은 학생선발 기능을 국가에 위임하여 학생들을 공동으로 선발하게 하고 배정된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으로서, 그리고 학문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 -151쪽

아직도 대도시 중고등학교에 지역유지들이 돈을 모아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전달한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우리사회에는 '공부 잘하면서 가난한 아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7-8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고학생으로 상징되는 부모의 자본력과 아이의 성적간의 불균등 사례를 목격할 수 있었지만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181-182쪽

본래 '대안'이란 몰가치적인 말이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안은 수없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에 주목한다면 그 대안은 우리 사회의 모순과 주류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사회를 추구하는 대안적 가치를 의미할 터이다. 제도적인 측면에 주목한다면 제도교육이 갖는 비효율성, 억압성 등에 대한 문제제기로서의 대안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대안이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대안교육 또한 그런점에서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대안'의 의미는 이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의 허구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대안적 가치이며, 진정한 '대안교육'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의 교육일 때 그 의미가 있다. -191-192쪽

(로스쿨) 우수한 교수요원 및 교육시설 등 법학교육여건을 먼저 개선한다. 여기에 다양한 학부를 졸업하고 어느 정도 사회경험이 있는 우수학생이 입학한다. 이들에게 이론교육과 문제해결능력에 강한 실무교육을 실시한다. 이런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사법시험을 통해 선발한다. 이런 4다계의 과정을 거쳐 법조인이 나오면 이들은 당연히 우수한 전문 인력이지 않을 수 없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이는 법조계의 현실 문제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현행 법조계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교육이 아니라 독점에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간에 이들은 소수이고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상황이다. 법률시장이 개방된다고 하여 변호사가 생활에 바로 경제적 위협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수특권계층이기에 그렇다. 이들에게 통상 분야의 전문법조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특별한 외적 조건이 없는 한 자발적인 노력을 할 유인 동기가 없다. 따라서 로스쿨을 도입하여 전문교육을 강화하더라도 현실안주형 법조인이 될 것이며 결국 현재와 큰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251-252쪽

각 대학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교육인적자원부 지원금을 받고 정원감축이나 전임교원을 확충하여 수입이 대폭 줄어드는 손해 보는 '계산'을 한 것이 아니라 원칙 없이 모집단위만을 바꿈녀서 '생색내기'에 급급하다. 정부가 유도하는 구조조정 방식인 통폐합과 대규모의 정원감축보다는 신입생 유치에 혈안이 되어 별 연관성 없는 학과들을 묶어 비인기학과를 자연스레 도태시키거나 일부 학부를 해체하여 인기학과를 독립시키거나 하는 등 조령모개식으로 모집단위를 바꾸고 있다. 결과적으로 대학 구조조정은 시늉이 되고 대학의 학문이 구조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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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누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는가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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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평생 정의만을 연구했던 한 철학자가 타계했다. 그는 공리주의가 온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을 내놓아 세상을 놀래켰고, 철학 분야에 있어 죽어버린 정의의 영역을 부활시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1957년에 발표한 논문 <공정으로서의 정의>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이 논문을 보완하는데 또 한 세월을 쏟아 필생의 역작 <정의론>을 1971년에 펴냈다. 그는 바로 다음해 하버드 대학을 빛낸 교수로 뽑혔고, 이후의 모든 정의론은 그를 가운데 두고 퍼져나갈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죽기 10년 전 <정의론>에 이어지는 후속 연구 결과인 <정치적 자유주의>와 이 이론의 적용 영역을 세계로 넓힌 <만민법>이 출간되었다. 

  김영사에서 나온 스물 세번째 지식인 마을 시리즈 <롤스&매킨타이어>는 이런 롤즈의 이론과 그의 동료인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담아낸 책이다. 제목은 두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했지만 무게는 확실히 롤즈에 쏠릴 수 밖에 없다. 매킨타이어만을 다루는 책이라면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롤즈를 다룬다면, 자연스레 무게는 롤즈에 실리게 된다. 롤즈는 그의 역작 <정의론>이 출간된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두 '롤즈의 비판자' 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본래는 주목받지 못하던 철학자들도 롤즈의 비판자가 됨으로써 롤즈와 더불어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롤즈의 비판자로는 대표적으로 샌들, 테일러, 왈쩌, 그리고 이 책에 다루는 매킨타이어가 있다. 롤즈의 이론과 그에 대한 이 네 사람의 비판은 스티븐 뮬홀(표기는 스테판 뮬홀로 되어있으나 스티븐 뮬홀로 부르는게 옳다)과 애덤 스위프트가 지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아카데미)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있다. 그외에도 로티, 드워킨, 래즈, 노직 등도 롤즈와 관련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들이다. 앞의 네 명은 공동체주의자로, 뒤의 네 명은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롤즈가 이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은 그의 이론이 바라보기에 따라서 어느 진영으로부터도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롤즈의 이론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양 진영 사이 어디엔가 위치해 있다.

  이 책에서 롤즈와 함께 다뤄지는 매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다. 고로 이 책에서 롤즈가 비판을 받는 점 또한 공동체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주의에서도 해당 철학자마다 롤즈를 비판하는 부분이 다 다르다. 매킨타이어의 경우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에 주목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렇게 비판한다.

  "도덕성은 타인의 이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항상 자기 합리성을 추구할 줄 아는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도덕적 함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완전함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을 굳이 도덕적 인간의 대변자라고 볼 이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도덕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그 입장이 반드시 실제의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센 환경의 변화에도 굳건함을 잃지 않는 덕성이다. 이러한 덕성을 지닌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줄 아는 구체적인 인간들이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을 토대로 이후의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때 원초적 입장에 처한 당사자들은 '합리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말은, 남의 것을 빼앗아 가면서까지 욕심을 부리지는 않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존재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공동체주의들은 롤즈의 이론에서 제일 첫번째 전제가 되는 '원초적 입장'을 비판함으로써 이후의 논의를 무너뜨린다.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너무나 이상적인 존재이고, 현실적으로 상정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매킨타이어는 따라서 그들이 도덕적이라고 간주할 근거가 없으며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도덕적 덕성을 기르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개인을 굳건히 지켜주는건 오랜 시간 다듬고 가꿔온 길러진 덕성이라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공동체주의자 중에서도 테일러와 함께 가장 바깥에 서있는 자이다.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매킨타이어와 테일러, 다음이 샌들과 왈쩌가 될 것이고, 롤즈가 다음에 서게 될 것이다.  먼저 언급한 인물이 공동체주의적 경향이 더 강하단 말이다. 고로 저들 중엔 롤즈가 가장 덜 공동체주의적이다.

  롤즈의 이론이 다소 이상적이라는 점은 그의 <정의론>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롤즈는 자신의 이론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이상적으로 보이는건 전제가 되는 원초적 입장에 놓인 당사자들의 조건 때문인데, 현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 유형은 아니어도 충분히 현실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머리 속에서 사고 가능하고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느껴 볼 수 있을테지만 매킨타이어의 비판은 롤즈와 대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롤즈가 바라보지 못하는 구멍을 메꾸기 위한 비판이라고 봐야한다. 롤즈의 이론을 무너뜨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롤즈가 충분히 기존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리주의를 뒤엎는 성과를 냈고, 그것을 인정한 채로 더 완벽한 이론으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롤즈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의 극대화는 사회 성원의 희생을 볼모로 잡은 채 전개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롤즈는 칸트에 자신의 이론적 기초를 의지하고 있는데, 칸트의 관점에서 보아 공리주의는 수단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린하기에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롤즈는 공리주의가 버린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정의론>을 통해 실현시킨 것이다. 롤즈의 정의 원칙 중 '최소수혜자의 이익 극대화의 원칙'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만으로 롤즈의 이론과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저 대략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 그리고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 접근은 하지 않지만, 대략 어떤 관점에서 두 사람이 사회를 바라보고 정의를 논하는지를 파악하는 정도로 책을 활용하면 되겠다. 롤즈와 매킨타이어로 들어가는 입문서 격으로 보면 영양가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철학자고 마찬가지이지만 롤즈는 워낙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는데 있어 새로운 용어과 개념을 등장시키기 때문에 용어에 대해 개념을 잡고 내용접근을 할 필요가 있는데, 입문서격인 책으로는 그것을 수용하기 힘들어보인다. 저자는 맨 뒤에 대표적인 용어들을 간단하게 서술했는데 서비스 차원으로 봐야지, 이 정도 해설로 용어를 파악했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롤즈는 <정의론>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책을 통해서 그 사이에 있었던 여러 철학자들의 비판점을 수용하고 이론을 좀 더 현실적이고 완벽하게 만든다. 가장 흔한 비판인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주장을 의식한듯이 이후 '중첩적 합의', '공적 이성', '정치적 구성주의'와 같은 개념들을 새롭게 선보이며 완성도를 높였다. 이 책에선 <정치적 자유주의>의 논의는 다루지 않는다. 롤즈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정의론>에 머물러있고, 그에 가해지는 매킨타이어의 비판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니 <정치적 자유주의>의 출간 이전의 논의라고 보면 되겠다.

  참으로 방대한 영역에 걸쳐서 논의를 전개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 롤즈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또 롤즈를 둘러싼 여러 철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입문서는 중요하다. 한 눈에 그 모든 것이 쉽게 들어오지 않고, 바로 일차서적을 읽는 건 너무 막연한 접근이라 어렵다. 롤즈와 비판자들의 논의를 살펴보려면 이 책 이후에 영역을 조금 더 넓히고, 깊이는 몇 배 더하여,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읽는다면 한 눈에 모든 것이 파악될 것이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롤즈의 일차서적을 읽기 전에 롤즈 이론을 개념잡길 원한다면 염수균씨가 정리한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를 권한다. 이것도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이것 말고는 일차서적 읽기 전에 마땅히 접근할 만한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아싸리 무대뽀로 <정의론> 1장부터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신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p.s.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 책 18쪽에선 이렇게 전제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자세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권창은 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과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김주일 저, 프로네시스, 2006)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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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11-2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예전에 어느 책에선가 롤스의 이론이 잠깐 언급된 부분을 읽었는데, 세 문장인가, 그쯤 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낑낑댔던 기억이 나요. 번역의 잘못일까,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걸까, 하면서요. (내용은 까먹었는데 분배의 정의에 대한 얘기였던 것 같음.) 이런 걸 술술 읽고 술술 써내는 아프님도 얼핏 보면 난해한 분일 것 같지만, 여러분, 그건 오해예요. 저 마지막 부분을 좀 보세요. "아니면 아싸리 무대뽀로~... 맨땅에 헤딩.." 음음음 난 이래서 아프님이 좋다니까!

마늘빵 2007-11-28 09:2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입문서격이고 구체적인 이론적 내용은 많이 나오지 않아서 읽기 한결 수월해요. 롤즈 책을 직접 읽으면 머리 아프죠. -_- 제가 롤즈를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관심이 많고. 사실상 공리주의 이후에 롤즈의 이론이 사회 전반적인 부문들에 적용이 되고 있어요. '정의'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역시 현실에서의 문제에 정의론을 적용해서 책의 뒷 부분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수행평가의 공정성, 비정규직 문제를 살펴보고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7-11-28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사람이 공정하게 행동해야 하는가?
왜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왜?'에 관해서는 맥킨타이어의 '길러진 덕성'이 유의미할 것입니다.
제가 공자의 문도인 이유이기도 하지요. 하하


마늘빵 2007-11-28 09:59   좋아요 0 | URL
아직 매킨타이어의 저서를 직접 살펴보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매킨타이어의 입장만을 접한지라 명확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롤즈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입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해나갈 것인가, 에 있다고 한다면, 매킨타이어의 그것은 롤즈가 살짝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보완해줌으로써 롤즈의 이론이 좀 더 완전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매킨타이어는 롤즈만큼이나 체계적으로 사회 제도의 문제를 다루지는 못하고, 롤즈 이론의 빈구석을 메꿔주는 정도로 보입니다. 매킨타이어와 공자의 - 두 사람의 이론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 개인의 덕성을 꾸준히 기르는 것 또한 공정한 사회, 도덕적인 사회를 위해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겠죠.

yoonta 2007-11-3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즈..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한번 봐야지하고 아직도 못펼쳐들고 있는 사람인데..아프락사스님의 깔끔한 리뷰 잘봤습니다. 서점가서 한권 집어와야겠네요. ^^

마늘빵 2007-11-30 21:45   좋아요 0 | URL
아핫, 윤타님께서 제 서재까지 오시고. :) 요 책을 통해서 뭔가를 많이 기대하시진 않는게 좋겠습니다. 대중적인 입문서격이고, 롤즈의 원초적 입장과 그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비판에 주로 할애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