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2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7년 4월
구판절판


<옮긴이의 들어가는 말>

밀이 생각하는 공리주의는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정신적 쾌락에 집중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결코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밀은 또한 인간이 사회적 감정을 타고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아끼며 일체감을 느끼는 사회적 존재가 바로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이다.-8쪽

<여기서부터 본문>

쾌락의 질적 차이가 무슨 뜻이냐 또는 양이 더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쾌락을 보통의 다른 쾌락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만일 두 가지 쾌락이 있는데, 이 둘을 모두 경험해본 사람 전부 또는 거의 전부가 도덕적 의무 같은 것과 관계없이 그 중 하나를 더 뚜렷하게 선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쾌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에 대해 확실하게 잘 아는 사람들이 엄청난 불만족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쾌락의 양이 적더라도 어떤 하나를 분명하게 더 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더욱 선호되는 즐거움이 양의 많고 적음을 사소하게 만들 정도로 질적으로 훨씬 우월하다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27쪽

도덕적인 속성이나 그 결과와 상관없이 두 종류의 쾌락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지, 또는 두 가지 삶의 방식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쾌적한 기분을 안겨줄지 결정해야 할 때, 각각에 대해 정통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 또는 이들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중 다수의 판단이 가장 존중되어야 한다. 쾌락의 질을 놓고 볼 때, 이렇게 도출된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양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도 달리 의견을 물어볼 만한 심판관이 없기 때문이다.-31쪽

'최대 행복 원리'를 따를 경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든 앙니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든, 가능한 한 고통이 없고 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상태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된다. 나머지 모든 것은 이 궁극적 목적에 비추어서, 그리고 그것에 도움이 될 때 바람직한 것이 된다. 자기 경험,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자의식과 자기 관찰의 습관을 ㅌ오해 최선의 비교 수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런 궁극적 목적을 선호한다. 따라서 이것은 질을 검사하고 양과 대비해서 그 질을 측정하는 규칙이 된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 행동의 목적일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도덕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인간 행동을 위한 규칙과 지침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을 잘 준수하기만 하면 최대한 많은 인류가 앞에서 묘사한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니 인간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이 허용하는 한, 감각을 가진 모든 피조물 역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32-33쪽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황금률에서 바로 그러한 공리주의 윤리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를 너 스스로 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가르침이야말로 공리주의 도덕의 완벽한 이상을 담고 있다. 이런 이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공리주의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첫째, 모든 개인의 행복 또는 (보다 실감나게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가능하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법과 사회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교육과 여론은 사람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만큼 모든 개인이 자신의 행복과 전체의 이익 사이에, 특히 보편적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행동 양식과 자신의 행복이 서로 끊을 수 없는 관계임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41-42쪽

(위에 이어서) 그래야 어느 누구든 공공의 이익과 배치되는 행동을 통해서는 지속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해야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직접적인 충동이 각 개인의 습관적인 행동 동기 중 하나가 되고,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모든 사람의 일상 속에서 크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42쪽

공리주의 도덕 이론가들은 동기를 통해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의 값어치를 판별할 수는 있을지언정, 동기와 그 행동의 도덕성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다른 어떤 이론가들보다 더 분명하게 주장해왔다. 그런데도 이러한 특정 오해 하나 때문에 매도당하는 것은 공리주의자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해주는 행위는 그 동기가 의무감에서였든 아니면 그런 수고를 통해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든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옳다. 자신을 신뢰하는 친구를 배신하는 것은 비록 그 사람의 더 큰 의무를 지고 있는 또 다른 친구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아주 나쁜 짓이다. 그러나 의무감에 의해서, 그리고 어떤 원리의 명령을 좇아서 한 행동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더라도 공리주의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 세상 또는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성에 입각해서 살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선한 행동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 개인들의 이익이 모여 사회의 이익이 형성된다. -43-44쪽

어떤 대상이 가시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것의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밖의 다른 것도 우리의 실제 경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같은 방법으로, 무엇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얻기를 갈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공리주의 이론이 스스로 목적이라고 제안한 것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하나의 목적이라고 인정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든 그것이 목적이 된다고 믿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자가 행복을 획득 가능하다고 믿고 행복을 갈망한다는 사실 외에, 왜 일반 행복이 바람직한지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경우를 통해 행복은 좋은 것이라는 점에 관한 모든 증거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를 통해 각자의 행복은 당사자에게 좋고, 따라서 일반 행복은 모든 사람에게 좋다는 사실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사람들의 행복이 지향하는 목적 중 하나로, 나아가 도덕 기준의 하나로 위치를 굳혀 온 것이다.-75-76쪽

효용 원리는 특정 쾌락(이를테면 음악) 또는 고통이 없는 상태(혹은 건강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불리는 포괄적인 무엇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거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갈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 스스로 갈망의 대상이 되고 바람직하다. 따라서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적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공리주의 이론에 따름녀 덕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원래부터 목적의 일부였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사심 없이 덕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덕이 목적의 한 부분이 되고,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행복의 한 부분으로서 갈망되고 소중히 여겨진다. -78쪽

공리주의 철학에 따르면, 덕이라는 것도 이런 성질을 대단히 많이 띠고 있다. 쾌락을 얻는 데, 특히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성질을 빼고 나면 덕을 갈망하거나 추구해야 할 원초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관계 때문에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느낄 수 있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강렬하게 갈망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덕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성에 대한 사랑과 차이가 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후자와 같은 것에 집착하는 개인은 때로 그가 속한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해로운 존재가 되는 반면, 사심 없이 덕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다시없이 귀한 존재가 된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 철학은 일반 행복을 해치지 않고 그것을 증진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도 안에서 사람들이 습득하게 된 다른 욕구들을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한편, 일반 행복을 달성하는 데 그 무엇보다 중요한 덕을 최대한 사랑하며 쌓을 것을 명령하고 요구한다. -80-81쪽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옳은 일이 아니면 하지 않을 사람은 제쳐두고, 덕스러운 의지가 아직은 미미해서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을 두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 어떻게 하면 그 의지를 키울 수 있는가? 아직 덕스러운 의지가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 어떻게 그 의지를 심어주거나 일깨울 수 있는가? 방법은 딱 하나, 그 사람이 덕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덕에 대해 생각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반대로 덕이 결여되면 고통을 느끼게 해야 한다. 옳은 일을 하면 즐거움이, 옳지 않은 일을 할 때는 고통이 연상되게 하거나 아니면 전자의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내포된 즐거움이, 후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고통이 생긴다는 것을 그 사람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깨닫고 깊이 인식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 방법을 통해서만 덕스러워지고자 하는 의지가 단련을 거듭하면서 쾌락이나 고통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절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의지는 갈망의 자식이다.-84-85쪽

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정의롭지 못한 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현상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법이 정의에 관한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이익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의와 정면 배치되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법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할 때, 그것은 이를테면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함으로써 법을 위반했을 때 정의롭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경우 그것은 법적 권리가 아닌 다른 이름, 즉 도덕적 권리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두 번째 경우의 불의는 누구에게나 인정되어야 하는 도덕적 권리를 빼앗는 것과 관련이 있다. -93쪽

심지어는 평등론을 주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편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만큼이나 정의에 대해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집단 노동의 산물이 완전 평등 원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나눠지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강조하는 데 비해, 어떤 사람은 쓸 곳이 가장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받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일을 많이 하거나 생산량이 더 많은 사람 또는 사회적으로 기여가 더 큰 사람이 생산물의 분배 과정에서 더 큰 몫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자기 입장에 따라 자연적 정의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다. -97쪽

(위에 이어서) 이처럼 '정의'라는 말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됨에도 그 개념을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런 차이들을 관통해 연결하고 그 말 특유의 도덕적 감정을 연상시키는 정신적 고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 말을 둘러싼 어원의 역사를 훑어보면 어느 정도 단서가 밝혀질지 모르겠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언어에서 '정의'에 해당하는 말들은 그 어원이 법의 명령이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라틴어의 경우 justum은 명령을 받는다는 뜻을 가진 jussum의 한 형태다. ... 옳은과 의로운이라는 말의 뿌리가 되는 독일어 Recht는 법과 동의어다. 따라서 정의의 심판장, 정의의 집행이란 곧 법정, 법의 집행을 의미한다. ... 중략 ... 그러므로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는 감정은 일체의 법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단지 반드시 존재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법에 대한 위반, 그리고 법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것을 지니지 못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성질을 띠는 법에만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법의 정신과 그 명령은 여전히 정의의 개념을 둘러싸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97-99쪽

칸트가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을 핵심 도덕률로 주장했을 때, 그는 행위자가 자기 행위의 도덕성에 대해 양심적으로 결정하는 상황에서 마음 속으로 인류 전체 또는 적어도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공공이익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칸트는 아무 의미 없이 그런 말을 한 셈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성적 존재가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규칙을 채택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든가, 또는 그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격률이 의미를 지니려면, 이 말은 공공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모든 이성적 존재가 채택할 수 있는 어떤 규칙에 맞추어서 사람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닫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107쪽

나는 지금까지 권리라는 개념이 피해를 입은 사람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피해로 인해 권리가 침해됐다는 것, 그리고 이때 그 권리가 개념과 감정의 혼합물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요소가 함께 엮어내는 여러 형태 중 하나라는 사실을 주장해왔다. 이 두 요소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특정 개인 또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벌을 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정신을 잘 분석해보면, 권리의 침해라고 말할 때 이 두 요소가 우리가 뜻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가 어떤 사람의 권리에 속한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사회를 향해 법 또는 교육과 여론의 힘에 의해 자신이 그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음을 정당하게 주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08쪽

지금까지의 분석이나 그와 비슷한 것이 정의라는 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되지 못하고, 정의가 효용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준이 되며, 인간 정신이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정의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정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명령이 왜 그리 불분명하고, 수많은 사안들에 대해 동일한 잣대를 갖다 대는데도 왜 어떨 때는 정의롭다고 하고 또 어떨 때는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것인가?

우리는 효용이 사라마다 모두 다르게 이야기하는 불확실한 기준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듣ㄷ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의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개념 규정할 수 있으며, 세상 생각과 무관하게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만일 이들의 말이 옳다면 정의라는 문제를 둘러싼 그 어떤 논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든, 마치 수학 공식을 대입하듯이 처리하면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111쪽

(위에 이어서)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너무나 먼 이야기다. 무엇이 사회에 유익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듯이, 정의가 무엇이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며 숱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로 다른 개인들과 민족들 사이에서만 정의에 대한 생각이 엇갈리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상황에 따라 정의를 하나의 일관된 규칙, 원리 또는 격률로 이해하지 않고 다양한 성질을 띤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끼리도 늘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어떤 사람이 외부의 특정 기준과 자신의 주관 중 어느 것에 따라 행동을 해야하는지 판단할 때 별 도움을 주지 못하기도 한다. -111-112쪽

나는 효옹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정의에 관한 가상의 기준을 제시하는 모든 이론을 반박하는 한편, 효용에 바탕을 둔 정의가 모든 도덕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그 어느 것보다 더 신성하고 구속력도 강하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것은, 인간 삶을 이끄는 어떤 규칙보다 더 진지하게 인간의 참된 복리에 대해 염려하고, 따라서 어느 것보다도 더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 종류의 도덕적 규칙을 지칭한다. 그래서 우리가 정의라는 개념의 본질적 요소라고 규정한 것, 즉 모든 사람이 권리를 지닌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보다 강한 구속력을 암시하며 정당화한다.-118-119쪽

정의란 사회 전체 차원에서 사회적 효용이 아주 높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예외적 상황 아래에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요구되는 몇몇 일반적 격률을 무시하는 것이 불가피하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는 특정한 도덕적 요구를 지칭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면, 힘으로라도 필요한 양식이나 약을 구하거나 훔치는 것 또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전문의를 납치해서 강제로라도 환자를 돌보게 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덕스럽지 않은 것을 정의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가 어떤 다른 도덕적 원리를 위해 포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정의지만, 다른 도덕적 원리에 비추어볼 때 특정 상황에서는 정의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말의 의미를 이정도로 적당하게 변용하면, 어떤 경우에도 정의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불의를 용인해야 하는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125쪽

여기서부터 <옮긴이 해제 중>

희생 그 자체가 선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을 증대시켜주는 등, 행복의 전체 양을 증진시키지 않는 희생이란 쓸데없는 허비라고 보는 것이다.-134쪽

밀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감정이 자연적 감정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사회적 감정이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인데, 이것은 이미 인간 본성에서 강력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다행스럽게도 굳이 인위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에 비례해 점점 강해진다. 그래서 마치 본능적인 것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해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는 존재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그들에게 좋은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이며, 마치 생존을 위한 물리적 조건인 것처럼 되는 것이다.

결국 밀이 생각하는 공리주의는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정신적 쾌락에 집중된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아끼며 일체감을 느끼는 사회적 존재가 공리주의적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벤담의 공리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137쪽

밀은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효용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합리적 선택을 내릴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관련 사실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은 뒤 오랜 시간 숙고하면, 대체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욕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밀은 '이성의 객관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말해 '이성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가치 문제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합리적 토론을 거치면 합의 도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밀은 이런 전제 위에서 가치의 객관성을 주장한다. -141쪽

밀에 관한 전통적 해석은 밀이 공리주의의 한계를 직시하며 그것을 극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영국의 저술가 벌린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밀은 자유가 수단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공리주의적 시각과 반대로 전체 복리의 증진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도덕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라는 생각, 이 두 상반된 관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채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 밀은 직관이 아니라 이론을 추구한다면서 공리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유라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직관적 당위론을 주장했다. 밀이 이러한 모순의 늪을 헤쳐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벌린의 생각이다.-144-145쪽

각주 25

밀이 직관주의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당시 사회의 윤리적 편견이나 모순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밀이 살았던 19세기 유럽 사회를 지탱하던 도덕률이나 사회 문화적 제도는 모두 일정한 가치 기준 위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구시대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서는 직관주의적 인식론으로 무장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세력과 힘든 싸움을 벌여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경험과 관찰이라는 '객관적'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직관주의자들의 논리를 수용한다면, 자유라는 것도 다수의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정한 기준에 의해 왜곡, 변질될 가능성이 높았다. 교양 없는 다수의 호불호가 도덕의 기준이 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자유는 심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밀이 직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178-180쪽.-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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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 통합네트워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8
정진상 지음 / 책세상 / 2004년 10월
구판절판


학벌주의는 무한 입시 경쟁을 야기하는 대학서열체제를 재생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지만, 거꾸로 학벌을 생산하는 기제 내지 공장이 바로 대학서열체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학벌주의 자체를 타파할 수 없다면, 학벌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눈을 돌려야한다. 학벌주의를 타파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학벌을 생산하는 대학서열체제를 혁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서열체제 혁파는 학벌과 학벌주의를 타파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의 학벌주의는 생성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어떤 부분적인 극복 대책으로는 그것을 타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쪽

고등학교 교장은 학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서울대 보내기' 경쟁에 기꺼이 참여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교육부장관이나 교육전문가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무한 입시 경쟁과 사교육 문제의 한 원인을 학부모들의 의식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는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파악한 것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입시 위주 교육이 지속되는 한 학부모들의 의식을 나무랄 수 없으며 그들의 행동 또한 매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24쪽

현재의 대학서열체제는 형성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착된 것이다. 그리고 고착된 대학서열체제를 재생산하는 결정적 요인은 학벌주의다. 따라서 현재의 대학서열체제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학벌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그런데 학벌주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학벌주의의 포로가 되어 학벌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의식개혁운동 같은 방식으로 학벌주의를 타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벌주의는 그 물질적 기초인 학벌을 없애지 않는 한 타파될 수 없다. 화폐에 물질적 기반을 두고 있는 황금 만능주의를,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와 화폐 자체의 폐지 없이는 타파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학벌주의가 재생산되는 물질적 토대에 눈을 돌려야 한다. 학벌주의는 대학서열체제를 재생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지만, 거꾸로 학벌과 학벌주의를 생산하는 기제 내지 공장이 바로 대학서열체제다. 따라서 학벌과 학벌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인 대학서열체제를 혁파하는 것이다.-31-32쪽

컴퓨터 하나만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오늘날, 지식의 암기보다는 지식을 재구성할 수 있는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지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습관,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익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학교는 최소한이라도 호기심이나 의문을 가질 기회를 제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의욕을 체계적으로 박탈하고 있다. 암기 위주 교육의 문제점을 잘 아는 대학이 학생들의 창조적 사고를 평가하기 위해 도입한 '논술 시험'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 또한 틀에 박힌 시험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독서와 사색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논술 학원에서 배운 틀에 박힌 글쓰기로 대응하니 답안지가 대동소이해 채점 교수들이 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37-38쪽

그(<2002년 이후의 입학 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의 저자 고형일>의 주장대로 국가가 관리하는 수능시험이라는 입시제도가 전국의 학생들을 일렬로 세움으로써 무한 경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수능시험은 각 대학 입학생의 점수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대학 서열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국가가 관리하는 입시제도는 입시 경쟁을 강화하는 매개자이기는 하지만 입시 경쟁과 대학서열체제를 만드는 원인은 아니다. 잘 알다시피 현재 국가가 수능시험을 관리하지만, 교육부는 수능 점수를 입학 전형 자료로 쓰는 것을 의무 사항으로서 각 대학에 강요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급적 고교내신성적을 활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대학, 특히 명문 대학이 수능 점수를 전형 자료로 고집하는 것은 대학서열체제 아래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66쪽

그(고형일)는 국립대와 사립대가 같은 조건이 되면 수요자의 요구로 인해 대학 간 경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데, 학벌주의와 유착되어 있는 고착화된 대학서열체제 속에서 수요자인 학생들은 실상 대학의 질이 아니라 학벌을 보고 대학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수요자인 학생들이 시설이 우수한 지방 국립대학을 마다하고, 비싼 등록금과 하숙비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의 사립대학으로 몰려드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70쪽

각 학구별로 교육대학원을 두어 학구 내의 중등학교와 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한다. 현재의 사범대학 및 교육대학 체제와 교사임용제도는 많은 폐단을 낳고 있다. 고육책에 불과한 교원임용고사에 의한 교사임용제도는 폐지해야 한다. 중등학교와 초등학교의 교사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의 교육대학원 졸업생(석사) 중에서 선발함으로써 교사의 질을 높여야 한다. -109쪽

사실 국립대 통합네트워크가 제도화되더라도 학생들이 서울 소재 대학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역할당제를 실시하면 서울에는 서울의 인구 비율인 25%만큼만 입학 정원이 할당될 것이므로, 서울 소재 대학을 선택할 동기가 현저히 줄어들면서 학생들이 지방으로 분산될 것이다. -129쪽

1980년대 이후 고등교육 수요 폭증에 따라 정부가 사립대학의 설립 인가를 남발하면서 대학교육에서 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4년제 대학 학생의 75%가 사립대학교에 다닌다고 보면 된다. 사립대학은 비영리 공익 재단임에도 불구하고 재단이사장의 사유물로 인식되고 있으며, 부패와 부실의 온상이 되어 있다. 또한 대부분의 사학 재단은 거의 전적으로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해 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며 재단 전입금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또한 이사장의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운영 구조와 관행으로 사실상 1인 독재체제나 다름없는 사립대학이 많다. 그동안 사립학교법은, 유력한 재단이사장들이 국회의 교육위원회에 직접 참여하거나 강력한 로비를 벌이는 가운데, 대학의 공공성을 해치고 이사장의 대학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악되어 왔다. 최근에는 '사학청산법' 입법이 시도되고 있는데, 이는 사립 재단 설립자나 2세들이 자신들이 과거에 사회에 내놓았던 공익 재단을 청산해 재산을 돌려받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법을 중단하고 사립대학을 원래의 설립 취지로 돌려놓을 수 있는 법 개정이 대학 개혁의 선결 요건이다. -130-131쪽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에서는 서울대 학부를 개방해 서울대를 졸업장 따는 곳이 아니라 진정으로 학문을 하려는 전국의 수재들을 교육하는 장으로 만들고, 서울대를 대학원대학으로 전환해 학문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한다. 서울대를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학문의 중심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서울대 교수들에게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에 저항할 명분을 주지 않게 되고, 따라서 그들의 주장이 결국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내의 발로임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이다. -146쪽

서울대가 높은 수능 점수를 받은 학생들을 독점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의 수재들이 모두 서울대에 모여든다. 이렇게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한 울타리 안에 모아놓은 대학은 세계에서도 드물 것이다. 이들을 엘리트라고 한다면 분명 서울대는 엘리트 집합소다. 게다가 지금까지 정부는 재원을 서울대에 집중시켜왔다. 국가 차원에서 인재를 서울대에 집중시켜 엘리트를 양성하는 정책을 써온 것이다. 이렇게 전국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우리 사회의 권력 엘리트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엘리트를 말한다면 그것은 서울대 학벌로 나타나는 지배 엘리트일 뿐이다. 이런 식의 지배 엘리트 양성은 봉건 시대의 특권층 양성과 다를 바 없다. 우리의 개혁안이 노리는 목표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지배 엘리트 양성소를 폐지하는 것이다. -173-174쪽

현대 사회는 다양한 방면에서 창조적 엘리트를 요구한다. 그러나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이 가진 소양은 획일적이다. 오직 수능 점수가 유일한 기준이다. 사회는 수능시험을 잘 보는 엘리트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참된 의미의 엘리트를 얻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개인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의 대학서열체제 아래서는 서울대 또는 한 단계라도 더 서열이 높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교과목을 고루 잘해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을 마음껏 키울 기회가 없다. 이런 조건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가 육성될 수 없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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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행복 2007-12-2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 학생을 키우겠다는 것은 당연한 욕구겠지요. 학군제로 대학 간다는 프랑스도 대학 위의 대학이라고 국립 사범학교나 행정학교등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대학 가려면 재수, 삼수도 한다고 하고요.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혼외정사로 낳은 딸이 국립 사범학교 학생이었다는 것을 미테랑 대통령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니까 말예요. -물론 프랑스나 미국은 학과별로 분화되어 여러 명문대가 있지요. 우리나라처럼 서울대가 다 장악하고 있는 시스템은 아니니까요- 교육문제는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학문할 수재만 서울대에 가게 한다는 것은-권력의 중심이 아닌 학문의 중심- 좋은 발상이긴 한데, 글쎄... 아, 머리아파라~ 물론 한국애들이 창의성이 떨어진다고 하지요.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가 나올 수 없고...
아, 정말 모르겠어요. 이 책을 읽으면 좀 알려나요?

마늘빵 2007-12-29 09:13   좋아요 0 | URL
아직 리뷰 작성 전이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방안은 매우 구체적이고 학벌사회를 깨고 입시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은 물론 있습니다.

일단 가장 큰 게 돈 문제인데, 이 초기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될 듯 하고, 법대, 의대, 사범대 등의 전문계열은 전문대학원을 통해서 인재를 배출하자는 안이니 등록금의 문제 또한 남아있습니다.

대부분 국고보조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지만, 지금 현재 로스쿨 설립 후 돈 없는 이들이 과연 그곳에 진학해서 정상적인 변호사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들 같은게 해결되 수 있다면 큰 문제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큰 문제는 돈이 아니라 학벌 기득권 세력의 저항일 겁니다.

수능시험 위주의 일렬로 나란히 세워놓는 지금의 풍토에서는 아무리 창의성 교육 한다한들 소용이 없죠. 나라에서는 창의력을 강조하지만 지금 풍토는 창의력 말아먹는 풍토입니다. 그러니 수능점수에 의한 서열화를 깨야만 하고, 정진상씨가 제시하는 방안은 창의력 위주의 인재양성으로 가는 적절한 해답이라 생각됩니다.
 
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분명 쉬운 책은 아니다. 그 내용이 일단 심각하고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며, 내용을 감싸고 있는 외형 또한 투박하고 딱딱하다. 그래서 친숙하지 않고 낱말과 문장은 마음에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다. 전형적인 학문을 하는 철학자의 글쓰기이고, 대중을 고려하지 않는 학자적 글쓰기의 표본이다. 일반적인 '철학과현실사'의 책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고 보면 되겠다. '관용'을 알기 위해서 참고할 만한 책은 국내에 몇 권 있다. 일단 이 책 <관용과 열린 사회>가 있고, 하승우씨가 쓴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홍세화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 반 룬의 <관용>,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대략 참고하면 되겠다. 이 책들 중 특히나 이 책은 더욱 투박하다. 쉽게 읽히는 책을 원한다면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얇은 하승우씨의 책을 권한다. 물론 내용은 모두 각기 다르다.

  김용환은 머릿말에서 이런 말을 한다. "불관용의 만연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른 것과 틀린 것을 동일하게 보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니다." 김용환은 우리 사회는 아직 불관용이 만연하고 있고, 이러한 불관용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생겨난다고 말한다. 우리는 분명 '다른 것'과 '틀린 것'을 머리로 구분할 줄 안다. 머리로 알고 있지만 막상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불관용을 해소하고 관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해주고, 머리로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언제나 머리보다는 가슴이 뒤늦다. 앎은 이해로 이뤄지지만, 실천은 '감''동'으로 이뤄지기 때문인가보다. 

  <관용과 열린 사회>는 불관용의 사회를 살고 있는 민주사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관용적으로 탄생하기 위한,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책이다. 두껍지는 않지만 범위는 방대하고, 깊이는 깊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를 통해서 관용의 개념과 의미를 명확히 하고, 왜 관용이 문제가 되는가,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탐구한다. 3장에서는 관용이 처음 제기되던 중세유럽으로 넘어가 '종교적 관용'을 살펴보고, 당시 관용을 외쳤던 홉스나, 로크, 흄 등을 통해서 관용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알아본다. 이후 4장에서는 '다원주의 사회와 관용'을 연결지으며, 결국 우리가 다른 삶,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관용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나머지 5,6,7장은 한국 사회에서의 관용이 요청되는 영역과 관용적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가, 에 대해 '교육'을 통해서 해결방안을 내놓는다.

  우리는 보통 '관용'이라는 우리말 뒤에 '베풀다'라는 동사를 붙여, "관용을 베푼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관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관용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어야 한다. '베푼다'라는 말은, "소수의 지배 집단 또는 권력의 소유자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으로 관용을 이해하는 데 있다." 주인이 종에 대해, 높으신 '분'이 낮은 '것'에 대해, 던져주는 아량으로 해석하는데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오히려 관용은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관용하는 사람과 관용되는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관용은 자유를 확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자유없이는 또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어떤 혜택의 개념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향해서 기본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에 가깝다.

  관용을 영어로 표기하면 톨러레이션(Toleration) 또는 톨러런스(Tolerance)로 표현할 수 있는데, 관용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은 이 둘을 굳이 구분하지는 않지만 - 유네스코에서는 톨러런스로 통일해 사용한다 -, 프레스톤 킹은 이 둘을 나눠서 설명한다. 그는 톨러레이션을 톨러런스보다 넓은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전자를 힘에 의한 묵인과 인내로, 후자를 자신과 상충되는 입장을 거부할 능력이 있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힘으로 관철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대상에 대한 반대를 거부의 행위로 표출하지 않고 수용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프레스톤 킹에 있어 '톨러런스'는 힘 있는 강자가 힘 없는 약자에 대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반대의사를 행사하지 않고 상대를 수용함을 의미한다. 프레스톤 킹의 이러한 정의방식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둘 모두 같게 보아도 상관이 없다.

  김용환은 관용을 정의함에 있어 상대방의 견해를 '용납'함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를 프레스톤 킹이 말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일반화해서 넓은 의미의 용납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김용환은 이렇게 명확히 선을 그으려 하는 것은 '용납'이라는 개념이, '복종'이나 '강제적 시인', '묵인' 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관용의 유사한 개념으로부터 관용을 구별하는 일을 곤란하게 만들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용납한다는 말 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그 반대표현을 중지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조건은 내가 상대를 반대한다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그 반대표현을 중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용은 '반대'와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다.

  김용환은 이 책 전체에 걸쳐 관용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개인적 차원이거나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관용의 정신이 확대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며 관용이 의사 결정의 한 기준이 되고 또 사회 정책의 한 태도가 되기 위해서는 비판과 논증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고 합리적인 논증이 자신의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이라는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관용이 크고 작은 일상과 사회 전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갈등을 해소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여러가지 수반 조건들이 있을테지만 나는 그 중 관용을 제일로 생각한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서로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이미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다른 것을 다르게 바라보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 관용이고, 관용은 곧 합리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된다. 오로지 "합리적인 논증이 자신의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공중 앞에서 표현하기 위해선느 자신의 견해가 합리적인가를 먼저 스스로 살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통해서 발견했다. 롤즈가 말하는 '중첩적 합의'와 '공적 이성'이 바로 '개인적인 견해'를 '합리적 논증'으로 바꿔주고 검증해줄 수 있는 장치라고 본다.

   우리가 관용을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그 한계가 무엇인가,이다. 김용환은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관용의 역설이라는 논리적 한계요, 또 하나는 자기부정의 어려움인 실천적 한계이다. 우리는 분명 머리로는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이런 경우 머리와 마음이 서로 따로 놀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관용의 역설'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생기는 의문점 하나. 나는 관용적이지 못해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관용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용적이지 못해서 어쩔 수 없어, 나는 원래 그런걸, 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까지 관용을 행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는 관용적 자세를 스스로 저버렸으므로 타인을 관용으로 대하지 않는 이들까지 관용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한계는 앞서 언급한 '자기 부정의 어려움'인데, 이는 "어디까지 관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행위자의 선택과 결정에 달린 문제이지 원칙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결국 관용을 행하는 것은 행위하는 주체에 달려있고, 그의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실천적 한계'라고 이름한다. 이렇게 관용을 행함에 있어 실천한 한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이익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이익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불관용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이때 '이익'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처해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이익'안에 고려해 넣어야 할 것이다.

  일단 관용을 행사하려면, 관용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칼 포퍼는 '오류가능성 논변'을 통해서 자기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절대 무오류성'을 깨야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관용을 통해서 어떤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포퍼가 말하는 진리 또한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게다. 포퍼는 제 1원칙 "내가 틀릴 수 있고 니가 옳을 수 있다." 제 2원칙 "무슨 일이든 합리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어떤 잘못을 수정할 수 있다." 제 3원칙 "만약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는 진리에 도달하는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자기 부정을 전제로 한 관용에 도달하기 위한 길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그럼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김용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부정을 불가능한 요구라고 믿으면 관용의 범위는 점점 좁아질 뿐만 아니라 불관용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다시 말해 이기적인 인간에게 자기 부정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라고 보는 것은 결국 관용을 공리적이거나 실용적인 가치로 정당화하는 정도에 그치도록 만들며, 이런 경우 관용의 한계는 지극히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된다. 관용의 한계는 처음부터 이미 그 개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한계이며, 문제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야 비로소 그 한계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관용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해서 그것이 갈등을 해소하는 사회의 기본적 자세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알고 정확히 인식하는데서 비로소 민주시민의 기본적 자세로 자리매김한다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용은 필수적이며, 그것은 사회가 지향해야할 가치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입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전제'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관용은 자기부정을 전제로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개개인이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는 생각을 가져야만 비로소 그 사회는 관용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전체의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 관용은 구성원들 개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 합리적인 의견이 자유롭게 교환되는 사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 절실하다.

p.s.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서로의 모든 의견을 '다름'안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광장에 나와있는 많은 견해들엔 '다른 것' 뿐 아니라 '틀린 것'도 속해있다. 우리는 그것들 중 틀린 것을 골라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해서 다르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틀린 것을 솎아내는 방법은 그것이 과연 사회 구성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를 스스로 생각해봄으로써 걸러내고, 이후에 그것이 과연 나의 이익만을 고려한 이기적인 견해가 아니라 모두에게 수용가능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나아가 합당한 견해인가를 검증해야 할 것이다.

p.s. 2.

관용에 대한 더 깊이있는 논의를 원한다면 김용환 교수의 논문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는 관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미 여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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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구판절판


사람들에게는 세속의 권력자 또는 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노예근성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은 법이나 여론이 특정 행동을 촉구하거나 금지시키는 행동 규칙을 결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노예근성은 이기심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나 위선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술사나 이단자를 화형시키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증오심을 낳는다. 한 사회의 도덕 감정이 형성되는 데는 여러 요소들이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그 사회 전체가 크게 의미를 부여하며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당연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면밀히 따져보면 그런 이해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공감과 반감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의 이해관계와 그다지 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공감과 반감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26쪽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자유이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35-36쪽

사람들이 마음 놓고 믿는 것일수록 온 세상 앞에서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이 단단해지는 것이다. 그런 검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일단 검증을 받았으나 허점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도, 인간의 현재 이성이 허용하는 수준 안에서 검증을 받은 데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확신할 일은 결코 아니다.-50쪽

기존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그에 대해 자유 토론을 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이 그저 사람들이 그 주장의 근거에 대해 잘 모르게 되는 것뿐이라면, 자유 토론을 하지 않은 것이 지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도덕적으로는 크게 해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면에서 볼 때 그 주장이 갖는 가치에도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 토론이 없다면 단순히 그 주장의 근거만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모르게 된다. 그 주장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특별한 생각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처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의 일부분만을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생생한 개념과 분명한 확신 대신에 그저 기계적으로 외운 몇 구절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둘러싼 몇몇 껍데기는 남을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본질은 잃고만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순간들을 뒤돌아보면 이런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고 심사숙고하더라도 모자랄 지경이다.-78-79쪽

기존의 통성일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와 다른 의견이 진리일 수 있다. 또는 통설이 진리일 경우, 그 반대 의견은 오류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진리와 오류 사이의 논쟁은 진리를 보다 분명히 이해하고 또 깊이 깨닫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기보다는, 각각 어느 정도씩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이럴 때 통설이 채우지 못하는 진리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도록 그 통설에 도전하는 이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감각을 통해 확인할 수 없는 주제에 관한 대중의 주장이 흔히 진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거의 또는 전혀 없다. 그런 주장은 상황에 따라 진리를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담고 있기는 하나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 대체로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존재하는, 그래서 상충되는 내용을 담은 진리들과는 거리가 멀다. -89-90쪽

진보라는 것도 진리를 새로 덧붙이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진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중략) 다수가 받아들이는 의견이 비록 올바른 기초 위에 서 있을지라도 이처럼 부분적인 진리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통설이 빠뜨리고 있는 진리의 어떤 부분을 구현하는 다른 모든 생각은, 그것이 아무리 많은 오류와 큰 혼돈을 초래하더라도, 마땅히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세상살이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자칫 우리가 어떤 진리를 빠뜨리고 놓칠까봐 윽박지르면서 정작 우리는 알고 있는 진리의 어느 부분에 대해 모른다고 그에게 화를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수의 주장이 일방적인 한, 일부의 의견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일방이 존재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소수파가 아주 강력하게 유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실은 부분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그 소수 의견에 대해 억지로라도 관시믕ㄹ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90-91쪽

"인간의 목적, 또는 막연하고 덧없는 욕망이 아니라 영원하거나 변함없는 이성은 우리에게, 각자의 능력을 완전하고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최대한, 그리고 가장 조화 있게 발전시킬 것을 명령한다." 그러므로 그는 "각자의 개별성에 맞게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특히 다른 사람을 이끌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 목적을 향해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훔볼트는 이를 위해서 '자유 및 상황의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필수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개별적 활력과 고도의 다양성'이 생기는데, 이들이 곧 '독창성'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101쪽

인간은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것들을 획일적으로 묶어두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잘 가꾸고 발전시킴으로써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창작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듯이, 인류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한껏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인간이 발전하게 되면 우리 삶도 풍요로워지고 다양해지며 활력이 넘칠 것이다. 고귀한 생각과 고결한 감정을 더욱 북돋워주게 되고,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연대의 끈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더욱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이처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면, 개인들이 모인 사회 역시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119쪽

이 원리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타인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서로의 행복이나 성공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이 이기적인 무관심을 조장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심각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이 원리는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심없는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심 없이 남을 돕는 것도, 글자 그대로 또는 비유적인 의미에서 채찍질을 하거나 혼을 내는 것보다는, 그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스스로 하도록 설득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자기중심적 덕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사회적 덕목을 꼽아야 할 것이다. -142-143쪽

(위에 이어서)

교육자들은 이 둘을 동일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교육도 강압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확신과 설득을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한다. 그래서 일정한 교육 기간이 지나고 나면 오직 후자, 즉 설득과 확신을 통해서만 자기중심적 덕목을 배양해야 한다. 사람은 서로 도와가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며, 나쁜 것을 피하고 좋은 것을 취하도록 서로 격려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높은 능력과 감정과 목표가 현명하게, 그리고 품위를 유지한 채 고상한 목표와 계획을 점점 더 지향하도록 서로 자극을 주며 살아야 한다.-143쪽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문제가 되고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의 이익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어떤 행동과 성격 때문에 무언가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데 대해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남에게 해를 주는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달리 취급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정당한 권리 없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타격을 입히는 것, 거짓으로 또는 표리부동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 불공정하게 또는 관대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에게서 이득을 얻는 것,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이기적인 마음에서 모른척하는 것 등, 이 모두는 도덕적 비난 또는 심각할 경우에는 도덕적 징벌잉나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기질도 비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잘못하면 혐오감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146-147쪽

사려 깊지 못하고 인간적 존엄을 지니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타인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한 까닭에 비난을 받는 것은, 단순한 명목상의 차이 이상으로 다르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그를 통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일에서 불쾌하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행동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사람이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면 우리는 싫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그 일은 물론이고 그 사람도 멀리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로 그 사람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모든 벌을 벌써 받고 있다고 또는 받게 되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이 일을 잘못 처리해서 이미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데, 그러한 잘못을 이유로 그의 삶을 더 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 -148-149쪽

(위에 이어서)

그 사람을 처벌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에게 그런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나쁜 일들을 어떻게 피하거나 치유할 수 있을지 가르쳐줌으로써 그가 받는 벌을 경감시켜줄 방도를 열심히 찾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동정이나 혐오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노여움이나 분노의 대상은 아니다. 그를 사회의 공적인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흥미나 관심을 보임으로써 선의로 간섭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정당한 범위 안에서 그를 가장 심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위반했다면, 그런 경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을 보호해야 하므로, 그에게 응징을 가해야 하고 명백한 징계의 표시로 고통을 주어야 하며 그 처벌이 충분히 무겁도록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149쪽

사회적 윤리나 타인에 대한 의무 같은 문제를 놓고 공공 여론, 즉 압도적 다수의 의견이 가끔씩 틀리기는 하지만 옳을 때가 더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ㅁ누제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 그리고 어떤 특정한 행동 양식이 실제로 실천에 옮겨질 경우 자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해서만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다수 의견이라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관계되는 행동에 대해 하나의 법으로서 군림하는 의견은, 옳을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틀리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공공 여론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다른 사람에게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고, 실제 대부분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쾌락이나 편의에 대해 그저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은 전부 자신에게 해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며 극단적인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 마치 몹시 완고한 신자가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무시하낟고 비난을 받자 오히려 그들이 이상한 의식과 교리를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무시한다고 반박하는 것처럼 말이다. -156-157쪽

우리가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박해할 수 있지만 저들은 옳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떤 정의롭지 못한 원리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런 것을 함부로 남에게 적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마땅하다.-160쪽

그러나 포주가 되는 자유, 도박장을 운영하는 자유도 허용해야만 하는가? 이런 경우는 정확하게 두 가지 원리 사이의 경계선 위에 있어서 둘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까운지 즉각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양쪽 모두 주장할 근거가 있다. 관용을 주장하는 쪽에서 본다면, 생계를 잇거나 이윤을 얻기 위해 직업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범죄가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일은 전부 허용되든지, 아니면 전부 금지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주장해온 원리가 옳은 것이라면, 사회가 - 글자 그대로 사회가 - 한 개인만 관계 되는 일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이라고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회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누구든지 그런 일을 하도록 또는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데 똑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183-184쪽

다른 사람이 문제 되지 않는 한, 개인의 자발적인 행동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사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가 자발적으로 무엇인가 선택했다는 것은, 그 일이 자기에게 바람직한 또는 적어도 참을 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최선이라고 판단한 수단을 동원해서 그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준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그러나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것은 자유를 포기한다는 말이다. 한번 이렇게 하고 나면 나중에 다시는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이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행위도 허용해주는 원리, 즉 자유의 목적을 본인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른없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자유 상태에 있을 때 누리는 이점을 향유할 수 없다. 자유의 원칙이 자유롭지 않을 자유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자유를 포기한 자유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189쪽

국가는 각 개인에게만 특별히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권한의 행사에 대해서는 항상 주의 깊게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의무 사항이 가족들의 관계 속에서는 - 인간의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관계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함에도 - 거의 완전히 무시되다시피 하고 있다.-192쪽

"인간은 그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밀)-223쪽

"인간의 삶에서 각자가 최대한 다양하게 자신의 삶을 도모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다."(<자유론>의 표지)-229쪽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밀)-230쪽

각주63)

그러나 밀은 자유를 향유할 '성인'의 자격 요건을 매우 낮게 설정하고 있다. 즉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 또는 '충분히 나이가 들고 보통 수준의 이해 능력'만 갖추면 '확신과 설득에 의해 자기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능력'을 갖추고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에 의해 정신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유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밀은 자신의 <자유론>이 주된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개화되어서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유를 누릴 만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고 본다. '문명사회'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생각하며 살 정도'의 도덕적, 지적 능력을 어느 정도는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낙관론을 바탕으로 밀은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선의의 독재'라는 것이 '악 중의 악'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선의의 독재는 그 포장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리에 어긋나는, 가공할 만한 위험한 괴물로 탈바꿈하고 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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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22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운 개인이 중요하지요.
떼거리, 집단, 사회.. 등등을 경멸하는 편입니다.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옳든 그르든..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라는 선동적인 메세지는 이 책의 내용과 저자의 메세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인생의 초반부터 삶을 포기한 듯한 무기력한 20대들에게 힘을 준다. 자발적으로 연대해 문제제기하지 못하는 20대들을, 행동하지 못하는 20대들을, 뒤에서 퍽퍽 밀어붙여 올라가게 도와준다. 절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조그마한 희망을 안겨줬지만, 그나마 남은 조그만 희망을 키우는건 그들 스스로의 몫이다.

  나는 매달 88만원보단 많이 벌었지만, 아마 일년동안 번 돈을 평균내면 88만원을 약간 초과할 것이다. 동시에 나는 20대이고, 비정규직이었다. 지금은 백수다. 고학력 백수. '그 누구보다'라고 말할 만큼은 아니지만 비정규직의 설움을 겪었고,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뻑뻑한 일상인지를 알고 있다. 내가 경험한 비정규직은 상황이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다른 비정규직 20대들의 일상은 나보다 심하면 심했지 낫지는 않았을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려 책을 읽지 않은 이들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한번쯤 접해봤을 즈음, 주변에 있는 공업고졸, 전문대졸 학력의 두 살 어린 직장인에게 '88만원 세대'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아이 曰 "에이 그건, 다 20대가 게을러서 그렇지, 예전에는 막노동도 뛰고 이 일 저 일 닥치는대로 다 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20대들은 그렇게 안하잖아. 다 찾으면 일은 있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받는 금액이 딱 88만원 맞긴 한데, 이건 너무 오버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지금의 20대들은 예전보다 눈이 높아졌고, 막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돈과 시간을 좀 더 쏟아서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직장에 안착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주변에 보여지는 작은 모습들을 묘사한 것이고,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봤을 때 '괜찮은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건 확실하다. 대기업이고 중소기업이고를 떠나서 모든 일반 기업체와 대형 마트들, 그리고 심지어는 대학과 중고등학교에까지 비정규직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현격히 늘어나고 있고, 이 시스템은 '당분간'이 아닌 '지속적'으로 저렴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똑같은 일을 시키면서 싸게 부려먹는 셈이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피 터지게 싸우는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프랜차이즈점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얼마전 대학로를 갔다왔는데 딱 하나 있던 그 영화관이 - 비싸서 잘 안가긴 했지만 - 씨지비로 바뀌어있더라. 언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관이고 슈퍼마켓이고 커피전문점이고 모든 것이 싹 다 거대자본에 의해 싹쓸이 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타벅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스타벅스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20대들은 취업을 할래도 해봐야 비정규직이고, 취업 말고 장사를 하려고 해도 망할게 뻔히 보이니 갈 곳이 없다. 20대에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건 매우 무리가 있지만, 20대가 돈을 모아 장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자본의 침투를 저지해야 한다.

  내가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건 내 문제는 아닌데 뭐, 하는 식의 사고방식, 그래도 스타벅스가 맛있는걸 어떡해, 라며 '88만원 세대 이론'의 문제의식에 동감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스타벅스와 커피빈 등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그 영향이 나에게 오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인데, 당장은 내게 피해가 없을지 몰라도 결국 나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어있다. 우석훈 씨는 이 책에서 20대의 일부분 약 5% 정도는, 소위 말하는 학벌을 갖추고 좋은 직장에 안정적으로 취업하여 재테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딴세상 이야기로 치부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온다고 말한다.

  지금의 386세대들은 당시 민주화 투쟁에 열을 올리며 오늘날의 그나마 민주적인 풍토를 조성하는데 일조했지만, 없는 학벌에 낮은 학점이어도 취업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직장을 골라 잡아 갈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그들은 대접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의 20대들이 자신들이 완성한 민주화의 틀을 깨고 있다고 여기고 있고, 따라서 20대들에게 호의적이지 못하다. 4,50대들은 어떤가 하면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쉽게 취업했고, 지금은 각 기업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양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의 20대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윗 세대들의 배려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대처 방법이다. 그래서 우석훈씨는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고 일어나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는지 모른다. 비정규직을 갖게 될, 혹은 비정규직에 있는, 혹은 그나마도 못한 젊은 실업자들은, 연대해야 한다. 적어도 같은 처지에 있는 20대가 20대를 배반하는 상황을 연출해선 안 된다. 지금 우리는 비정규직이고 실업자일지 모르지만 함께 뭉치면 살 수 있다. 안정적인 직장에 있는 5%의 다른 20대들을 제외한 나머지 95%의 20대들이 그나마 남은 괜찮은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발버둥치는건 깊은 구덩이 속에서 서로 나오겠다고 싸우다가 공멸하는 것과 같다.

  연대, 연대 외치지만 사실상 연대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이다. 기껏해야 거대자본에 저항하면서 소극적인 실천을 할 수 밖에 없다. 거대 자본에 그게 먹히느냐 하면 모든 20대들이 연대해 거부한다면 몰라도, 소수만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20대의 주머니를 털기 위한 어떤 기업의 상품을 이들이 연대해서 사주지 않으면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모두가 아닌 소수라면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우석훈씨는 강연회에서 자신이 몇가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일부러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그런 상황에 처한 20대들이 연대해서 머리싸매고 해결해야 할 숙제이지 누군가가 어떻게 하라고 지시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했다. 

  중요한건 연대다. 같은 처지에 있는 20대들이 뭉쳐서 -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라도 -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해야 한다. 거대 자본에, 또 앞선 세대들에 대해서 자신의 몫을 찾아와야한다. 매우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20대의 모습이지만 깨고 나가야 한다. 더불어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양심있는 윗 세대들이 그들이 가진 자본과 권력을 (내놓으면 더 좋겠지만) 가지고 최소한 20대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

 
p.s.

  지금까지 홍세화를 비롯하여 사회의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20대들이 책도 안 읽고 생각 없이 산다고 비판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결과적으론 그들의 말이 맞다. 책도 안 읽고 오로지 생각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에서 비롯된 재테크, 혹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토플 토익 공부, 자격득 취득에만 몰입해있다. 돈 좀 있는 집 아이들은 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시 공부에만 올인한다. 돈 없는 집 아이는 그나마 매달려봐서 안 되면 일찌감치 때려쳐야한다. 시기를 놓쳐 백수가 되지 않도록.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이제 절반만 맞다. 이들은 이들이 처한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음을 들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다. 아씨 상황이 그런걸 어떡해. 너 같으면 먹고 살 길 막막한데 고상하게 헤겔의 <정신현상학> 들고 앉아있겠냐 머리아프게. 대선을 앞둔 시점에 수능점수 상위권 학교 몇몇을 설문조사한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이 제일 높다고 한다. '이해'는 된다. 경제와 효율을 앞세우는 이명박을 지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머물 자리 하나라도 더 나오길 기대하는 듯 하다. 다 말아먹은 이명박이 정말 경제 대통령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88만원 세대의 문제의식과 지적을 토대로 그들이 스스로를 무조건 감싸고 돌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는 의식보다는 현실이 이러니 뚫고 나가자, 는 의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과 지적을 핑계로 그들이 재테크와 토익책에 더 몰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88만원 세대'는 너희들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함께' 살아나갈 길을 제시해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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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1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20대 취업 난의 책임은 지난 10년간 국정을 펼쳤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있습니다.


마늘빵 2007-12-10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어느 특정 정권에 책임을 떠넘기는건 '정치적'인 견해일 뿐이라 봅니다.

살청님 / 현실은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눈을 뜨면 현실인걸요. -_-

미즈행복 2007-12-1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대하기 전부터 연대에 대한 희망이 없는것 같아요. 연대해서 이겨본 경험이 없고, 그런걸 본 적도 없으니까요. 연대하다가 망하느니 차라리 혼자 앞가림하자는 것 같아 보이는데...
모두가 너무 경제적인 것에 올인하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경제적인 것을 무시할 수는 절대 없지만, 예전보다 더욱 경제적인 것에만 다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돈 이외에도 많은데 그건 보지 않고 돈만 보고 있는것 같아요. 전에 누군가와 얘기하다가 '안빈낙도' 를 얘기했더니 제 3자가 옆에 있다가 코웃음을 치더라고요. 돈이 좀 없어도, 브랜드 옷을 입지 않아도, 집이 좀 좁아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게 더욱 문제가 아닐까요? 피천득씨 수필에도 보면 그런 얘기가 있어요. 집이 좁아서 팔고 옮기려고 했더니 가진 돈과 맞지 않아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괜히 이런 일 벌였다고 후회하는 얘기요. 자유를 팔아버렸다고요. -결국 집값의 반은 오랜기간에 걸쳐 상환하는 조건으로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고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늘빵 2007-12-11 10:12   좋아요 0 | URL
그쵸. 경험이 없다는게 가장 큰 장벽이에요. 그러니까 다들 꺼려하는 것이고, 해봐야 뭐 되겠어, 라고 생각하는거겠죠. 지금 시대에 안빈낙도는 정말 속세에 미련이 없는 혹은 도통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안빈낙도도 돈 많은 사람들의 특권이 되어버린거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