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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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때가 있다"면서 아이들이 휴학하거나 대학 가는 것을 미루는 일을 못 견뎌 하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그때의 '때'란 바로 '자기가 하고 싶을 때'가 아닐까? 국가 고시 시대에서 말하는 '머리가 굳기 전의 때'는 아닐 것이다. 졸업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시대는 지났고, 24세에 대학을 졸업해야 하는 때도 지났다. 사실은 평생을 배워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무기력의 시대, 불안과 혼돈의 21세기에 기성 세대가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시키는 대로 살고 싶어하는 수동적 인간' 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인간'을 양산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강조하건대 이 시대에 맞는 '배움의 때'란 바로 '무엇인가 하고 싶은 때'이다. 그때를 놓쳐 버리면 아이들은 배움의 재미를 잃게 되고 평생 배움의 즐거움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벌써 통찰력 있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네 꿈을 미루지 마"라며 조언을 주고 받는다. 이때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다. -48-49쪽

이인규 교사의 글을 빌리면 학급 붕괴 양상의 원인은 상당히 분명해진다. 1. 교사와 학생 간의 세대차, 기존 학교 체제에 더 이상 적응할 수 없는 학생들의 감수성 등으로 사제간 의사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2.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유용성을 상실하여 교사들은 가르칠 맛을 잃고 학생들은 배울 의욕이 없다. 3. 여전히 학교에서 교사들이 해야 하는 일이 많지만 그것은 교육적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4.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에서 벗어나기만을 희망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60쪽

이 두 세대는 정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판이하게 다르다. 정보와 지식이 과소했던 시대를 산 구세대들에게 책이 있고, 정보가 있는 학교는 ㄱ도 '생명줄'이었으며, 책은 사두기만 해도 뿌듯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정보 홍수 속에 사는 신세대에게 학교는 뒤처진 정보를 가르치는 후진 곳이다. 새로운 지식이면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먹으려 했던 구세대에 비해 신세대들은 정보 홍수에 휘말려 들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정보 앞에서 몸을 사리며 취사 선택력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무조건 고등 교육만 받으면 대우를 받고 취직이 보장되던 시대를 살았던 구세대가 공교육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갖는 데 비해 졸업장이 취업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를 사는 신세대는 학교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86쪽

건강한 문화를 가진 사회란 개인이 구조로부터 소외당하지 않는 체제, 도구적 합리성이 일상성을 지배하지 않는 체제, 구성원들의 감수성과 상상력과 분석력이 현실을 바꾸어 가는 데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체제이다. 한국의 미래 교육은 당장 문화 산업 역군을 배출해야 하는 급박함을 안고 있으면서 동시에 심하게 식민화된 일상성을 회복해낼 문화적 주체들을 배출해야 한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기술력과 자본력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 힘을 관리해낼 수 있는 문화적 주체들을 길러 내야 한다는 것이다. -121쪽

이제 더 이상 학생을 배움의 시기에 있는 '어른 이전의 존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 어른이 살던 시절에는 배우는 나이가 정해져있었고, 교육 기회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학교는 학생을 유인하기 위해 광고를 해야 하는 서비스 업종이 되었고,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평생 교육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른들이 직장인이면서 학생이듯이, 학생들 역시 학생이면서 소비자이며, 때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노동자이며, 자기 발언의 권리를 가진 문화적 주체로서 확실한 자기 위치를 갖는 것이다. -134쪽

"우리는 인류대 합격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선배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절대 정숙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모의 수능 점수 향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학습의 지표로 삼는다. 적당한 학습지와 믿을 만한 과외로 사탐과 과탐을 외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어문계열 지망의 꿈을 계발하고 우리의 방학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밤샘의 힘과 침묵의 정신을 기른다. 자기 반의 이익을 앞세우며 위선과 이유 없는 반항을 묵인하고 불신과 비난이 어색하지 않는 사제 관계의 전통을 이어받아 공감대 없고 타성에 젖은 수업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내신과 수학 능력을 바탕으로 학교가 발전하며 학교의 융성이 곧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육성회비와 등록금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학교의 운명을 좌우하는 막강한 배후로서의 학부모 정신을 드높인다. -149-150쪽

(이어서)

'반A고'(경쟁하는 학교 이름) 정신에 투철한 '愛석차 愛통계'가 우리의 삶의 길이며 대명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배에 물려줄 영광된 고합격률 대명의 앞날을 내다보며, 이기심과 욕심을 지닌 근면한 학생으로서, 전교생의 '죽어지낸 3년을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합격률을 창조하자. (3학년 7반 허은영. '대명'이라는 학교 이름은 가명)

(1996년 고3학생이 국민교육헌장을 풍자해 쓴 글) -150쪽

경제주의 사회에서 부모 자식 관계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져 왔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돈을 버느라 바빴던 부모들은 부모 노릇을 자녀의 학비를 대고 피아노를 사주고 생일 파티를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능력은 자녀가 원하는 것을 소비할 수 있게 자금을 대는 능력에 비례하게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계속 부모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한다. 충분히 돈을 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적개심과 충분히 돈을 줄 수 있는 경우에는 존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괴로워한다. 자녀들은 지금까지 "공부만 잘해 달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부모를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지금 그 공부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속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마음 깊이 원망과 적개심을 품고 있다. 청소년들은 지금 사회에게도, 학교에게도, 부모에게도 전혀 기대를 하고 있지 않다. 어떤 면에선 그 동안 지속된 경제 성장은 문제가 표현화되는 것을 돈으로 막아 왔다. 살고자 하는 동기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은 아이들은 돈 쓰는 재미로 나름대로 견뎠던 것이다. -156-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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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품절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암기하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입니다.

현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입니다

빈틈 없는 논리가 아니라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

사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식은

엄격히 구분짓는 잣대가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이해입니다

말하는 쪽의 입이 아니라
듣는 쪽의 귀입니다

책 속의 깨알같은 글씨가 아니라
책을 쥔 손에 맺힌 작은 땀방울입니다

머리를 높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게 하는 것입니다 -12-13쪽

"나는 미국 영웅들의 얼굴을 조각했다.
그리고 한 인디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자신들에게도 영웅이 있음을 알아달라고.
1948년, 나의 첫 망치질이 시작됐다.
1998년, 성난 말의 얼굴상이 완성되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우리에겐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코자크 지올코브스키)-23쪽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한 영광은 아무 쓸모가 없다." (무하마드 알리)-147쪽

"매맞는 여성은 사실상 남성의 노예상태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상태에서 여성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완전히 박탈된다. 상습적으로 반복된느 남성에 의한 구타와 학대를 도저히 개선할 수 없는 조건하에서 여성은 육체적 고통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갖는 존엄과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다. 살해만 되지 않았을 뿐 피살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조국)-167쪽

"술 마시되 취하지 말고
사랑을 하되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훔치되 부자들의 것만 건드려라" (판초 비아)-235쪽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호치민)-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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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1-0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아프님 너무 빠르다!!

turnleft 2008-01-09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선물이 이 책이었다는게 드러나는군요 므흣

마늘빵 2008-01-0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 아 이 책은 순식간에 읽게 되더라고요. 읽은 시간이 '순식간'은 아니었지만, 손에서 떼지 않고 끝까지 다 봤어요. 눈물 찔끔 떨구면서 분노하면서.
턴레프트님 / ^^
 
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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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기본 특징이 바로 저투자, 저성장, 고용 불안이에요. 예컨대 고용이 불안하니까 노동자(소비자)들은 돈이 생겨도 쓸 수가 없습니다. 모아둬야 하니까요. 또 기업들의 투자가 줄어든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의 특징인 적대적 M&A(인수합병) 때문입니다. 기업들은 적대적 M&A로 경영권이 불안해지니까 수익금으로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사주나 사들이는 거죠. 때문에 어느 나라나 신자유주의 체제로 들어가면 성장률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우리도 이제 그런 체제로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장하준)-16쪽

그런 점에서 박세일 의원의 주장, 즉 386 정치인들이 '반시장, 반민주, 반민족' 세력이라는 견해는 옳지 않습니다. 먼저 반시장에 관해 말한다면, 저는 경제 개발에 관한 한 박정희가 성공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시장 주도형이 아닌 국가 주도형 경제 개발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시장주의 덕분에 경제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386 정치인들이 박정희의 경제 개발 방식을 줄곧 공격해 온 점을 감안하면 그분들의 입장은 친시장이지 반시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반민주에 대해 말한다면, 박정희 세력은 경제 개발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을 엄청나게 탄압한 반민주 세력이었습니다. 이런 박정희 식 정치 체제를 반대하는 386 정치인들이 반민주 세력일 리는 없겠죠. 셋째로 반민족에 대해 말한다면 386 정치인들이 박정희 시대의 한국 경제를 식민지로 간주했던 인식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박정희 체제는 경제 문제와 관련 오히려 종속당하지 않기 위해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표방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정승일)-46-47쪽

<이코노미스트> 유의 시장주의자들은 후진국들도 개방하고 자유화해야 경제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남미가 좋은 사례입니다. 개방하고 자유화하다가 수출 주도형 공업화에 실패하게 된 거니까요. 자동차 같은 산업의 경우 남미 국가들 중 자력으로 생산해서 수출할 역량을 갖춘 나라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정승일) -66쪽

그에 비해 한국은 1970-1980년대 내내 개방은커녕 엄격한 수입규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니 벤츠나 도요타 자동차가 아무리 좋으면 뭐해요. 우리나라에 들여오지를 못하는데... . 이런 식으로 국내 시장을 보호하면서 수출 주도형 공업화를 추진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적 기업들을 키워 내는 데 성공한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국적 기업들이 경쟁력을 얻고 난 이후엔 마음껏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고요. (정승일) -67쪽

이종태 : 과연 국가 폭력의 시대였군요.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에게만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셈이고요. 그러나 그 폭력이 결국 자본을 통제하는 산업 정책의 한 수단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한국 경제를 고도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왠지 씁쓸하군요.

장하준 : 그래서 박정희 체제의 특징을 첫째,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둘째, 자유주의도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박정희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또 박정희가 자본을 통제해서 자본가들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을 보면 '사적 소유권과 시장을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고요. 그러니까 박정희가 경제 발전에 성공한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아니었기 때문'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제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나라를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핀란드의 경험을 연구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고요. -81-82쪽

그 과정에서 재벌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에요. 시장주의(자유주의)를 들여오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1990년대 중반 자유기업원 등을 만들어 미국 공화당 극우파들의 극단적 개인주의나 수입하고, 주주 자본주의 이론 들여오고 그랬거든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거죠. 자유주의를 수입해서 '정부는 기업에 간섭하지 말라'고 해놓고 보니, 그 논리대로 하면 그룹의 전체 주식 중 극소수만 보유했을 뿐인데도 그룹 전체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재벌 가문이야말로 대다수 주주들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있는 셈이었거든요. 참여연대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기업 주인이냐?'하고 물었을 때 재벌 가문들이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사실 그 때문입니다. 이런 걸 자승자박이라고 하겠죠. (장하준)-83쪽

각주

한국의 시장(개혁)주의자들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시장은 가격 변동을 통해 기업, 가계 등 각 경제 주체들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신과 같은 기구이다. 예컨대 정부가 인위적인 개입만 하지 않는다면 시장은 기업이 이윤을 최대화할 수 있는 산업 부문에 적정한 투자를 하게 하고, 소비자들은 자신의 효용을 최대화하는 상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조절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시장의 조절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시장 실패'라고 부른다.-93쪽

신자유주의 혹은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저투자 현상이 발생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시장이 너무 잘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투자한 기업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기미가 보인다면 바로 그 돈을 빼낼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신자유주의 혹은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이니까요. (장하준) -94쪽

각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금융 세계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극단적으로 추구된다. 그 결과 돈이 이 산업에서 저 산업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신속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금융 자산 계급, 즉 금리 생활자들의 이익이 가장 잘 보장된다. 따라서 이 체제 아래에서는 국제적 금융 자산가 계급, 특히 선진국의 금융 자산가 계급이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되어 있다. 외환 위기 이후의 IMF 와 김대중 정부의 사장 개혁 과정에서 한국의 자본시장은 완전히 대외적으로 개방되었고 재벌 개혁과 금융 개혁, 노동 개혁, 공기업 민영화 등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이제 한국에도 재벌, 즉 산업 자본을 대체하여 금융 자산가 계급의 경제지배가 본격화되고 있는데, 주주 자본주의가 그러한 현상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변호사, 회계사 등 금융 자산가 계급을 지원하는 직업군의 지배 계층화 역시 금융 자산가 자본주의 현상의 일환이다.
-95쪽

(위에 이어서) 한편 19세기 말 이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수탈한 전 세계의 부를 금융적 방식으로 취득했던 영국의 금리 생활자 혹은 금융 자산가 계급이 유지하고자 했던 자유주의 국제는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이 되어 무너졌다. 그와 관련 케인즈는 자유주의 경제학과 경제 정책, 그리고 그 배경으로서의 금융 자산가 자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또 레닌 역시 제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와 그 토대인 금융 자산가 계급의 전일적 지배에서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보였다.-95쪽

외환 위기 이후 시장주의의 이름으로 재벌에 대한 공격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재벌 자체가 비시장주의적으로 조직된 기업 집단이니까 시장을 무기로 재벌을 통제하려고 한 거죠. 그러나 그 결과는 외국의 더 큰 자본들이 한국 재벌들을 통제하게 된 겁니다. 그런 만큼 아무리 재벌이 밉다고 해도 시장 근본주의를 용인해서는 안 되겠죠. (장하준)-118쪽

미국에서 주주 자본주의와 소액 주주 운동이 강화된 게 1980년대부터인데, 그 이후 기업의 배당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재미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처음에는 전문 경영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소액 주주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보면 미국 최고 경영자들의 봉급이 엄청나게 올랐다는 겁니다. 1950년대엔 종업원 평균 임금과 사장의 봉급 차이가 30배 정도였는데, 요즘엔 500배, 계산 방법에 따라서는 1000배까지 나오는 식이죠. 결국 주주들과 경영자들이 짜고 노동자를 벗겨 먹는 식으로 굴러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장하준) -134쪽

각주

로우-로드, 하이-로드는 각각 나름대로의 내용을 가진 기업 및 국민 경제의 발전 전략이다. 전자인 로우-로드에서 기업 및 국민 경제는 저임금, 노동 시장의 수량적 유연화 등을 통해 비숙련 노동자로 하여금 저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고, 국제 시장에서는 저가격으로 승부한다.

그에 반해 하이-로드에서 기업 및 국민 경제는 고용 안정과 노사 신뢰에 기반해 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숙련 기술을 익혀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하기를 기대한다. 일반적으로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은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거두는 가장 신속하고 확실한 방법은 노동자들을 줄여서 인건비를 삭감하는 것이다. 때문에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은 로우-로드 전략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 한국에 수용되고 있는 노사 관계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에 해당된다. 그에 반해 노사 화합과 노동자의 숙련 축적을 중시하는 하이-로드는 독일과 일본의 발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147쪽

현재 정부나 자본은 중국이 값싼 임금으로 우리나라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임금 인상 투쟁이 말이 되느냐는 식인데, 그게 어떤 총제적, 국민경제적 비전을 가지고 이야기되는 것 같지가 않아요. 저기서 '2만 달러 시대로 가자'고 하던 분들이 여기서는 노동 시장 유연성이니 어쩌니 하면서 비정규직 늘리고 중국의 저임금이나 강조하니 말이에요. 국민의 일부만 2만 달러로 가고, 나머지는 2000달러로 가자는 말인지...

경우에 따라서는 선진국을 좇아가자는 게 아니라 중국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 하자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해요. 왜, 재벌과 보수 언론들이 하향 평준화란 단어를 참 좋아하잖습니까? '노동 운동 세력이 강해지면 하향 평준화 현상이 일어난다'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지금 실제로 하향 평준화를 주장하는 것은 재벌과 보수 언론들인 셈이에요. (장하준)-148-149쪽

한국의 경우 일본보다는 약하지만 기업별 노조 체계가 존재했고, 1997년까지 대기업 같은 사업장에서는 종신 고용에 대한 일종의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어요. 최근 영국의 로버 자동차와 한국의 현대 자동차를 비교했는데, 현대차의 로봇 도입률이 훨씬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현대 자동차의 경우 아무리 노사 관계가 대립적이라 할지라도 50-60대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암묵적 약속 같은게 있기 때문에 로봇 도입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적었다는거죠. 또 로봇을 도입할 때도 로봇 때문에 일거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회사 측에서 전직 훈련을 시킨 뒤 다른 라인에 배치해줬습니다. 영국과는 달랐던 거죠.

그런데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정부와 재벌, 언론이 합헤해서 '고비용, 저효율 경제 타도하자'며 노동자들을 대폭 해고해버렸잖아요? 당시 현대차도 그랬습니다. 30%인가 잘랐지요. 바로 그때 완전히 믿음이 깨졌다는 거에요. ...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겠어요. 회사 경영 상태가 안 좋아지면 잘릴 수 있으니 근무하는 동안에 파업 많이해서 노후 보장 대책을 마련해 놓자는 식이 된 거죠. (정승일) -151-152쪽

'메이드 인 코리아' 인 삼성 제품은 사지만 '메이드 인 말레이시아' 인 소니 제품은 사지 않아요. 우리나라도 2만 달러 시대로 가려면 이런 일본의 경험에서 미리 배워야 합니다. 물론 일부 사양 산업이 중국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게 대안은 아니라는 거죠. 지금 당장 급하다고 모두 중국으로 몰리면 이후 한국의 산업은 어떻게 되겠어요? 국내 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해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인지도를 높여야 합니다. 싼 가격으로 경쟁할 것이 아니라 '메이드 인 코리아'의 한국 제품이 '메이드 인 차이나'의 일본 제품보다 비싸도 더 잘 팔리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승일) -157쪽

아주 재미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스웨덴이 의외로 외국 기업들에게 인기를 끄는 나라거든요. '의외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있는데, 이 스웨덴이란 국가가, 우리나라 보수층의 논리를 빌면, 기업하기 어렵게 만드는 '빨갱이 나라'란 말입니다. 임금 높죠, 노동조합 강하죠, 행정부는 사회민주당에 장악되어 누진세로 따지면 소득의 60%까지 긁어 갈 정도로 부자들을 괴롭히는 식이니까요. 이런 나라니까 외국 자본이 안 들어갈 것 같죠? 아닙니다. 외국 자본들이 기꺼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것도 악착같이.

그렇다면 외국 자본들이 스웨덴의 시장을 보고 이러는걸까요? 아닙니다. 스웨덴은 시장 규모가 작은 나라에요. 인구가 남한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잖아요. 외국 자본이 노리는 것은 스웨덴의 우수한 사회보장 제도와 무료로 제공되는 기술 훈련 시스템, 그에 따라 숙련된 현장 노동자들과 대학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 그리고 노동 조합 전국 조직과 경영자 전국 조직 같에 유지되는 산업 평화라는 겁니다. (정승일)
-162-163쪽

따라서 영국에서 우리가 정말 얻어야 할 교훈은, 공기업 민영화를 했더니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얻으려 할 뿐 설비 투자는 기피하는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더라는 거예요. 하지만 공기업이 뭡니까? 시민들의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서비스, 즉 교통, 에너지, 물, 통신 등을 책임지는 업체 아닙니까? 때문에 공기업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공공성이고요. 그런데 이 공기업들이 민영화되어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주주 자본주의 원리에 매몰되면서 공공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서민층이고요. (장하준) -167쪽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의 기본 정신과 통하는 거예요. 단기주의! 그냥 우선 쉬운 것을 하는 거죠 축산업 규제 풀어 주면 고기를 싸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후엔 결국 광우병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공기업인 철도 산업을 민영화한 뒤에 투자를 안하고 수익률 높인건 좋았는데, 10년쯤 지나니까 열차 사고가 빈발하잖아요. 이렇게 단기 수익 올리려고 노조 탄압하고 해외에서 저임금 노동자 수입하다 보면 당장엔 기업이 살아날 것 같은데, 장기적으로 업그레이드를 못하게 됩니다. 결국 망하는 거죠. (장하준) -171쪽

성공회 대학에서 노조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도 주주 자본주의의 논리를 지지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하도 답답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최소한 여러분들은 주주 자본주의적인 논리를 지지하면 안 됩니다. 주주들이 기업을 통해 돈을 신속하게 많이 벌기 위해 가장 먼저 손대는 대상이 노동자들입니다. 어떻게 노동 운동가들이 주주 자본주의를 지지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긍정하시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주주 자본주의적 논리를 통해 재벌과 싸우는 것을 독립 운동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오산입니다. (장하준) -177쪽

그리고 한국 기업과 외국 자본은 인원 배치에 대한 개념 자체에서부터 달라요. 우리나라 백화점이나 큰 빌딩에 가 보면 주차장 입구에 발권기가 있잖아요. 그 옆에 사람이 서 있습니다. 젊은 여성이 서서 뽑아 줘요. 사실 발권기는 그 젊은 여성을 해고하려고 만든 기계인데, 그 기계와 젊은 여성이 함께 서 있는 거에요. 이건 아주 희한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어요. 후진국의 경우엔 주차장 입구에 사람만 서서 주차권을 나눠주고, 선진국에서는 기계만 설치해 두죠. 기계와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가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어떤 중간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겁니다. 소버린 같은 외국 자본 입장에서 볼 때 이 젊은 여성의 인건비는 낭비거든요. 이런 외국자본들이 들어와서, 특히 우리나라의 서비스 업계 같은 곳은 아직 개방이 덜 되어 있으니까, 인원 정리에 들어가면 실업률이 현재 수준에서 그치지는 않을 겁니다. 삽시간에 10-15%를 넘어갈 수도 있어요. (장하준) -178-179쪽

'국가의 역할' 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까지 왜곡 되어 있는 겁니다. 결국 '정부는 무조건 나쁜 것'이란 인식이 개혁, 보수, 진보 세력 모두에게 깊숙이 박혀 버린 셈이죠. 그 경우 기업들이 마음껏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모든 게 잘 된다'는 식인데, 그거 정말 무식한 소리예요. 그렇게 시장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준다면 정부라는 게 왜 필요합니까? 그냥 무정부로 살아야죠. (장하준)-187쪽

제 이야기는 한국 경제가 노동자들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시기에 왔다는 겁니다. 한국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개방되면서 엄청난 외부 충격을 감당하고 있는 사회이고, 기업들도 세계적으로 움직이면서 국제 시장 변화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거죠.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기왕 이런 시대가 와 버렸으니, 이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려면 복지 국가 시스템을 건설하는 것이 한국 경제의 발전에도 이롭다는 겁니다. 제가 만나본 기업가들 중에서도 생각이 있는 분들은 마음대로 해고를 못하는 것보다 노조가 작업장에서 전환 배치를 저지하는 것에 더 불만이 크더군요. 이른바 노동 경제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수량적인 유연성이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 유연성이 문제라는 거죠. ... 사실 한국에서 수량적 유연성은 더 이상 높아질 수도 없습니다. 선진국 중에 국민의 50% 이상이 임시직인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수량적 유연성을 높여 해결하려는 길은 이미 끝났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오히려 비정규직을 줄여야 할 겁니다. (장하준)
-214쪽

각주

스웨덴은 사회적 타협에 이르기 전인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데다, 1920년대에는 노동자 1인당 파업 일수가 세계 1위였을 정도로 노사 갈등이 치열했다. 그런데 노동자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1932년 이후 이 나라에 변화가 일어났다. 스웨덴 노총과 경총(SAF;경영자총연합)이 1938년 잘츠요바덴 협약을 통해 각각의 무기인 파업과 직장 폐쇄, 국유화와 소득세 인상 반대를 포기한 것이다. 그와 함께 노총과 경총은 임금 교섭을 노사 양 진영의 중앙 조직인 노총와 경총의 협의에 따라 결정하는 중앙 임금 교섭 방식을 추진하기로 했다. 대신 노총은 점차적으로 국가의 경제, 사회 정책 결정에 참여해 조세, 복지, 의료 등 각종 사회 개역 의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경총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을 통해 얻어 낸 이윤 부분에 대해서는 일정한 사회적 통제를 감수해야 했다. 임금 억제를 통해 증가된 이윤을 자본이 멋대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투자를 통해 일자리 창출 등 국민 경제에 이바지하도록 강제당한 것이다.-223-224쪽

(이어서) 결국 스웨덴 노동자들은 중앙 조직인 노총에 임금 인상 등의 결정을 맡겨 버리는 방식으로 '단결'한 셈인데, 이 또한 '단결'임에는 분명하다. 게다가 이런 '단결'은 국익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기업 이윤에 상관없이 동일 노동에는 동일 임금을 지급한다는 스웨덴의 연대임금제이다. 이 정책에 따르면 A사의 한 해 이윤이 2000억 원이고, B사의 이윤은 20억 원이라 해도, 두 회사는 자사에 근무하는 동일 노동 직종의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해야 했다. 이 정책을 통해 스웨덴은 산업 구조 조정을 촉진할 수 있었다. 충분한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회사는 임금을 감당할 수 없어 문을 닫아야 하는 관계로 산업 전체 차원에서 볼 때 '저효율 기업'의 자연스러운 퇴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대부분 수출 기업인 '고수익 기업'의 임금을 억제함으로써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는 효과도 거뒀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임금 협상 때마다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리했다.-223-224쪽

(이어서) 또 노총 입장에서는 연대임금제를 통해 저소득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림으로써 자기 조직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단결 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최대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고수익 기업' 노동자들이 '저소득 노동자와의 사회적 연대'를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했던 결과였다. 물론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소득 중 상당 부분이 연금, 가족 수당, 주택 보조금, 질병 수당 등의 형태로 국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임금은 소득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복지 제도는 이 같은 형태로 노동자의 단결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이렇듯 스웨덴 노동 운동은 분명히 국가의 일부다. 심술궂게 이야기하면, 유례없는 '어용 노조'인 셈이다. 노동자들은 복지를 얻은 대신 자주성을 잃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어용 노조'가 역설적으로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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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1-0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심심하셨군요. 밑줄긋기만 주루룩 ㅋㅋ

마늘빵 2008-01-06 20:20   좋아요 0 | URL
-_-a 음... 전에 하다 만 밑줄긋기랑 이번에 읽은 책이랑 머... :)

2008-01-06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6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
염수균 지음 / 천지 / 2001년 12월
품절


롤즈는 입헌적 민주정치 체제가 정의롭다는 전제 위에 입헌적 민주정치 체제 중에서 어떤 체제가 가장 정의로운가에 대해 고찰한다. 따라서 그의 정의론은 정의론이면서 동시에 입헌민주주의론이 되며, 그런 점에서 그의 정의론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의 정의론과는 성격이 다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특정한 정치 체제가 정의롭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체제가 정의로운가를 따지기 위해 국가의 발생과 정치 체제의 종류 등에 대해 살펴본 후 나름대로의 근거에 의해 정의로운 체제를 결정한다. -22쪽

롤즈가 기본 자유의 체계에 포함되는 자유로 생각하는 것들에는 자유주의적 전통 속에서 인정되어 왔던 자유들이 대부분 포함되지만, 소유권의 자유 중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이라든지 상속권과 같은 것들은 기본 자유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가 그것들을 기본 자유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기본 자유의 기준을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25쪽

플라톤의 논변은 사람들이 어떤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롤즈는 사람들이 어떤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행위하고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행위하지 않을 정도로 이기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이 설사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도 그 행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고 본다.-31쪽

좋은 질서를 갖는 것은 국가의 법과 제도가 실제로 정의로운가 정의롭지 않은가와 관계없이 모든 국민들이 정의롭다고 인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시민들이 사회의 법과 제도가 정의롭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어느 정도의 정의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사회가 좋은 질서의 사회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32쪽

합리적인 것은 어떤 단일한 행위자(개인이든 단체이든)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이해 관심이나 목적을 추구하는 방식에 적용된다. 그것은 또한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선택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합리성과는 달리 합당성은 단일한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 행위에 대해 적용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위해서는 합리적 태도도 필요할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할 경우에만 협력 행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 중략 ... 경우에 따라서는 협동 체계가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이해 관심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더라도 그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닫는 확신이 없는데도 그런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은 합리성이 아니다. 그런 행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합리성과는 다른 것이 요구되는데, 롤즈는 그것을 합당성에서 찾는다.-38-39쪽

롤즈의 정의관은 민주주의적 정의관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전 생애에 걸쳐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간주된 시민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협동 관계의 정의에 대한 견해이다. 그리고 그 협동 관계는 단순히 한 세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 전세대에 걸쳐서 이루어진다고 가정된다. -51쪽

롤즈는 더 나아가 인간 존재 일반이 공동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동반자로서 필요로 하며, 타인의 성공과 즐거움은 자신의 선을 위해 필요하고 상보적이 될 수 있다. ... 중략 ... 어떤 개인의 능력이 실현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실질적 협력을 통해서이며, 그들은 함께 자신들의 본질을 실현시키게 되는 셈이다. 즉 사회적 연햡의 행위 속에서만 각 개인은 완전해질 수 있다.-58쪽

롤즈는 시민들이 스스로를 자기 확증적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은 특정한 정의관 즉 자유주의적 정의관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정의관에서는 시민들이 주장할 권리의 근거가 오직 그들이 사회에서 부과한 의무에 따라 행하거나, 또는 종교적이거나 귀족적인 가치에 근거해서 정당화되는 위계적 질서 안에서 행하는 역할에만 놓여져 있다. 그것은 시민들을 그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의 자기 확증적 원천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사회에 주장할 권리는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해서가 아니라 도덕적 능력을 가진 자유로운 시민이라는데 근거한다.

... 중략 ...

사람에 따라 그런 능력에서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협력적 성원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정도만 갖고 있다면 그 이상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그리고 도덕적 능력 이외의 다른 능력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평등하다고 간주되고,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의 측면에서 평등하게 대우받는다. -63쪽

로크는 사람들의 사회적 환경과 그들의 서로서로에 대한 관계가 공정하게 이루어진 공정한 합의에 따라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롤즈는 로크의 견해를 이상적인 역사적 과정의 견해로 규정한다. 그것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의 소유가 정당하게 이루어진 정의로운 시초적 상황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 권리와 의무들을 존중하고 재산을 획득하고 양도하는 원칙들을 존중한다면, 이어지는 상황들도 또한 정의롭게 된다.
-70-71쪽

롤즈는 로크나 노직의 견해가 인정하는 원칙들에만 의존할 경우 상당한 정도의 재산이 소수 사람들의 손에 축적되어서 공정한 기회나 정치적 자유의 공정한 가치들을 손상시킬 수 있게 된다고 본다. 로크의 견해가 제시하는 자연 상태 안에 있는 개인과 단체들의 개개의 교환에 직접 적용되는 한계와 단서들만 갖고는 공정한 배경적 조건들이 유지되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사회의 기본 구조가 지속적으로 규제되지 않는다면, 초기의 정의로운 분배가 이후의 분배들에서의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교환이맂라도 그 결과는 온갖 종류의 우연과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개별 계약에 직접 적용되는 원칙만으로는 배경적 제도가 되는 기본 구조의 정의를 보존하기가 어렵다.-70-71쪽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오직 자신의 이해 관심만을 생각하는 합리적인 사람으로 가정한다. 당사자들이 공평한 사람들이라면 합의가 필요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이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롤즈는 "계약론적 입장에서는 합리적 사려의 원칙을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 구성된 욕구들의 체계에로 확장함으로써 하나의 사회 선택 이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다수성과 독특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이 합의하는 것을 정의의 기초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83쪽

차등의 원칙에 따르면, 최소 수혜자의 소득이 동일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의 소득이 어떠하든 동일한 정도로 정의롭다. 어떤 상태를 변경해서 최소 수혜자에게 더 유리할 수 있다면 그런 상태로 변화시켜야 한다. 가장 정의로운 상태는 어떤 방식으로든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경우이다. -103쪽

차등의 원칙은 불리한 처지에 있는 자의 여건을 향상시켜 주는 조건 아래에서는 천부적으로 보다 유리한 처지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행우에 의해 이익을 얻는 것을 정당하다고 간주한다. 그렇지만 보상의 원칙은 마땅하지 않은 행운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것을 어느 경우에나 부당하다고 간주한다.

... 중략 ...

롤즈는 차등의 원칙이 보상의 원칙을 온전하게 함축하고 있지는 않지만 차등의 원칙은 보상의 원칙이 요구하는 것을 상당 부분 함께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보상의 원칙은 사회가 보다 적은 천부적 자질을 가진 자와 보다 불리한 사회적 지위에 태어난 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109쪽

차등의 원칙은 최소 수혜자의 장기적 기대를 증진시킬 수 있도록 교육에 자원을 할당할 것이다. 그럴 때에만 보다 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의 행운이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것이고, 지나친 시기심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런 상태를 긍정하게 될 것이다. 롤즈는 그런 원칙에서는 결국 천부적 재능을 공동의 자산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110쪽

이하 밑줄긋기 생략. -0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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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06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본성에,
이기심과 더불어 '협동심'역시 내재되어있는 듯합니다.


마늘빵 2008-01-06 12:19   좋아요 0 | URL
네. 그걸 본성이라고 하면 본성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협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롤즈는 입헌 민주사회에 살아가는 시민들이 '합리적'이라고 보았는데, 그 합리성은 롤즈의 장치로 인해 '합당성'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합당성'이 결국 '협동심'을 '어쩔 수 없이' 조성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정의론
존 롤즈 지음, 황경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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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체계의 제1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치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배척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36쪽

이러한 이득의 분배를 결정해줄 사회 체제를 선정하고 적절한 분배의 몫에 합의하는 데 필요한 어떤 원칙들의 체계가 요구된다. 이러한 원칙들이 바로 사회 정의의 원칙으로서, 그것은 기본적인 사회 제도 내에서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방식을 제시해주며 사회 협동체의 이득과 부담의 적절한 분배를 결정해준다.-37쪽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정당하게 각자에게 속하고 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각자의 당연한 몫은 흔히 사회 제도나 그 제도가 제시하는 적절한 기대치로부터 도출된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그도 분명히 이러한 주장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 정의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채택한 정의는 곧바로 가장 중요한 경우인 기본 구조의 정의에 적용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사상과도 아무런 대립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44-45쪽

사회의 기본 구조에 대한 정의의 원칙들이 원초적 합의의 대상이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 증진에 관심을 가진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평등한 최초의 입장에서 그들 조직체의 기본 조건을 규정하는 것으로 채택하게 될 원칙들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그후의 모든 합의를 규제하는 것으로서, 참여하게 될 사회 협동체의 종류와 설립할 정부 형태를 명시해준다. 정의의 원칙들을 이렇게 보는 방식을 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라 부르고자 한다.-45쪽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의 평등한 원초적 입장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사회계약론에 있어서의 자연 상태에 해당한다. 이 원초적 입장을 역사상에 실재했던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문화적 원시 상태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일정한 정의관에 이르게 하도록 규정된 순수한 가상적 상황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상황이 갖는 본질적 특성 중에는 아무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계층상의 위치를 모르며 누구도 자기가 어떠한 소질이나 능력, 지능, 체력 등을 천부적으로 타고났는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심지어 당사자들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특수한 심리적 성향까지도 모른다고 가정된다. 정의의 원칙들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 선택된다. -47쪽

(이어서) 그 결과 원칙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아무도 타고난 우연의 결과나 사회적 여건의 우연성으로 인해 유리하거나 불리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보장된다. 모든 이가 유사한 상황 속에 처하게 되어 아무도 자신의 특징 조건에 유리한 원칙들을 구상할 수 없는 까닭에,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한 합의나 약정의 결과가 된다. 각자가 상호 동등한 관계에 있게 되는 원초적 입장의 여건들이 주어질 경우, 도덕적 인격으로서의, 즉 자신의 목적과 정의감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합리적 존재로서의 개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최초의 상황이란 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 원초적 입장이란 적절한 최초의 원상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거기에서 도달하게 된 기본적 합의는 공정한 것이다. -47쪽

물론 어떤 사회든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자발적으로 가담하는 협동 체제란 있을 수 없다. 즉 각자는 이미 어떤 특정 사회의 특정 지위를 갖고 태어나게 되고, 이러한 지위의 성격은 그의 인생 전망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칙을 실현하는 사회는 가장 자발적인 체제에 가까이 접근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회는 공정한 여건 아래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합의하게 될 원칙들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사회의 성원들은 자발적이며, 그들이 받게 되는 책무는 스스로 부과한 것이다.-48쪽

그래서 공리의 원칙은 상호 이익을 위해 모인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적 협동체라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질서정연한 사회라는 개념 속에 내포된 호혜성의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49쪽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당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들은 원칙의 선정 절차에 있어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누구나 제안을 할 수도 있고 그것을 받아들임에 있어 이성에 따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건을 두는 목적은 도덕적 인격으로서의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을 나타내고자 함에 있다.-55쪽

사람들이 적어도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한에서 자신의 최대의 선을 성취하고 가능한 한 자기의 합리적인 목적을 실현하도록 행동하리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사회라고 해서 집단에 적용된 똑같은 원칙에 따라 움직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으며, 한 개인에게 합리적인 것이 개인들의 조직체에 대해서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의 행복이 그의 인생 경로의 여러 순간에서 경험되는 일련의 만족에 의해 이루어지듯이, 그와 똑같은 식으로 사회의 행복도 그에 속하는 많은 개인들의 욕구 체계의 충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개인의 원칙이 그 자신의 복지와 욕망의 체계를 증진시켜주는 것이듯이, 사회의 원칙도 가능한 한 집단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그 성원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전체적인 욕구 체계를 실현시켜주는 것이 된다. -60쪽

(이어서) 한 개인이 현재와 미래의 이익 및 손실을 비교하듯이 사회는 여러 개인 간의 이익과 불만을 비교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사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리의 원칙에 도달하게 되며, 어떤 사회 제도가 만족의 순수 잔여량을 극대화시켜줄 경우 그 사회는 올바르게 편성편성되었다고 할 것이다.-60쪽

옳은 제도나 행위란 쓸 만한 대안들 중에서 최대의 선[좋음]을 산출하는 것이든가 아니면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다른 제도나 행위만큼의 선[좋음]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중략...

사실상 최대의 선을 도모하도록 사회가 편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하기 쉽다.-61쪽

고전적인 형식에 있어서의 공리의 원칙은 선을 욕구의 만족으로, 보다 좋게 말하면 합리적 욕구의 만족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은 그 견해의 모든 주요 핵심들과도 일치하며 그에 대한 공정한 해석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사회 협동체의 적합한 조건인가는 그 여건 아래서 개인들의 합리적인 욕구들에 대한 만족의 최대 총량을 달성해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해 정해진다. -62-63쪽

정의는 어떤 사람들의 자유의 상실이 다른 사람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을 부인한다. 상이한 개인들의 이익과 손실을 마치 그들이 한 사람인 것처럼 비교 평가하는 추론 방식은 배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에 있어서는 기본적 자유가 기정사실로 인정되며,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정치적 흥정이나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 희생될 수 없는 것이다. -65쪽

옿음의 원칙들이나 정의의 원칙들은 가치 있는 만족들의 한계를 설정하며, 무엇이 각자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가치관인가에 대한 제한을 받는다. 계획을 짜고 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사람들은 이러한 제한 조건들을 고려하게 된다. 그래서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느 우리는 사람들이 갖는 성향이나 경향성을 그 내용에 상관없이 전제하고 그것들을 만족시킬 최상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사람들의 목적 체계가 준수해야 할 한계를 밝히는 정의의 원칙드을 통해서 그들의 욕구와 포부를 제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는 옳음義이라는 개념이 좋음善이라는 개념에 선행한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69쪽

정의로운 사회 체제는 개인들이 각자의 목표를 펼쳐 나가야 할 범위를 규정하고,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목적들이 공정하게 추구될 수 있는 효용 내에서, 효용에 의해 권리와 기회의 형태 및 만족의 수단을 제공한다. 정의의 우선성이란 어떤 면에서는 정의의 위반을 요구하는 욕구는 무가치하다는 주장에 의해 설명되어진다. 일차적으로 합당한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한 이상, 그것들이 정의의 요구를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69-70쪽

숙고된 판단이란 정의감이 작용하기에 좋은 여건 아래서 이루어진 판단만을 말하며, 따라서 잘못을 저지른 데 대한 아주 평범한 핑계나 변명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판단이다. 그래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올바른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능력과 기회와 욕구를 가졌다고 (아니면 적어도 올바른 판단에 도달하지 않으려는 욕구는 없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이러한 판단을 확인하는 기준 또한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어떤 종류의 숙고된 판단을 선정해내는 기준과도 유사하다. 그래서 일단 우리가 정의감을 사고 작용을 포함하는 어떤 정신 능력이라고 간주한다면, 적합한 판단이란 숙고와 판단 일반에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진 판단이라 할 것이다. -89-90쪽

도덕철학의 잠정적인 목표에 따르면, 공정으로서의 정의란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될 원칙들과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 부합하는 원칙들이 일치하며, 따라서 이러한 원칙들은 우리의 정의감을 설명해주는 가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90) 그러나, "우리의 정의감을 기술하는 데 있어, 숙고된 판단들은 비록 유리한 조건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어떤 우연성과 왜곡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p90) "도덕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가진 도덕감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어떤 정의관을 검토하기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는 판단에 부합하는 설명이 아니라, 반성적 평형 상태 속에서 그의 판단에 부합하는 설명이다.-90쪽

정의의 두 원칙

첫째,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하여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즉 (a) 모든 사람들의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합당하게 기대되고, (b)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이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105쪽

한 체제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 이상의 보다 높은 기대치들의 정도가 과도한 경우이다. 이러한 기대치들이 감소할 경우에는 최소 수혜자의 처지가 향상되게 된다. 한 체제가 부정의한 정도는 상위 기대치들이 얼마나 과도하게 높은지, 또한 그것들이 예를 들어 공정한 기회 균등과 같은 정의의 다른 원칙들을 어느 정도 침해하고 있는지에 달려있다. -127쪽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보다 혜택받은 지위의 기여가 사회의 특정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에 두루 미칠 경우에 최소 수혜자가 이득을 보면 그 사이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득을 볼 것이라는 점이다. 나아가서 이득의 광범위한 분산이 바람직한 것은 기본 구조가 예시한, 다음과 같은 제도의 두 가지 측면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첫째로 제도는 모든 사람에 공통되는 어떤 기본적 이익을 위해 설립되며, 둘째로 그 모든 직책과 직위는 개방된다는 것이다.-131쪽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있어서는 사회란 상호의 이익을 위한 협동 체제로서 해석된다. 기본 구조란 사람들로 하여금 노력을 통해서 이익의 보다 큰 총량을 산출케하고 그러한 성과에 있어 어떤 몫을 요구할 수 있는 인정된 특정 권한을 각자에게 할당하는 행위의 개요를 규정하는 공공적인 규칙의 체계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행해야 할 것은 공공 규칙이 그의 권한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달려 있고, 그의 권한은 그가 행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결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분배는 이러한 합당한 기대치에 비추어서 사람들이 행해야 할 것에 따라 정해지는 요구들을 존중함으로써 달성된다. -134쪽

적합한 사회적 지위는 일반적인 관점을 명시하게 되고 이로부터 정의의 두 원칙이 기본 구조에 적용되어진다. 이렇게 해야 모든 사람의 이익이 고려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사람은 평등한 시민이며 모든 사람은 소득과 부의 분배에 있어서나 차등의 바탕이 되는 불변적인 자연적 특성의 영역 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정의론이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적합한 지위에 대한 어떤 선택이 필요하며 선택된 지위는 정의론의 제1원칙에 부합해야 한다. 이른바 출발점을 선정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적 우연성과 사회 여건의 효과를 완화시킨다는 생각을 수행하는 셈이 된다. 타인들의 복지에 기여하는 방식으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러한 우연성으로부터 이익을 볼 수가 없다.-150-151쪽

이하 밑줄긋기 생략.
-0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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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06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스의 원칙들이 사회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원칙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사회적 합의'가 여전히 유의미합니다.


마늘빵 2008-01-06 12:22   좋아요 0 | URL
하버마스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롤즈의 원칙들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원칙 자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롤즈의 원칙을 받아들이기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기본적으로 그의 장치들이 사회 곳곳의 영역에서 '공정함'에 기여할 수 있겠지요.

2008-03-25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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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5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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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6 0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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