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촌수, 변화하는 인간관계 SERI 연구에세이 71
김유정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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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년이었던가. 처음 피씨통신을 했던게. 컴퓨터를 사니 유니텔 무료이용권을 줬고, 그리하여 달리 가입할 게 없었던 나는 인터넷을 하기 위해 유니텔에 가입했고 오래도록 그곳에서 노닐었다. 대학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록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철학 동호회에도 가입하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매일 같이 신기한 세상을 접했다. 그러다가 그 공간에서 떠들던 사람들과도 만나고, 따로 채팅하다가 번개란 것도 해보는 묘한 경험을 많이 했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였던거 같다. 사람을 먼저 만나고 사귀는 것보다 글을 보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호하게 된 때가. 글을 보고 만난 사람에게 실망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거 같다. 글은 그 사람을 담아낸다.

  어쨌든, 이렇게 온라인의 인연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글을 통해 호감을 갖고 있던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그렇게 두 사람이 특별한 인연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생판 아무것도 모르는 소개팅이나 미팅보다 - 미팅도 꽤나 했었다 - 글을 통해 만난 인연이 나에겐 훨씬 마음으로 다가왔다. 별 다른 글도 아니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두 남녀가 글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면서, 그 남자 마음엔 그 여자가 어느새 들어앉았다. 비단 그때 뿐만 아니라 이런 경험은 나이를 먹은 이후에 또 있었다. 단지 드러내지 않았을 뿐. (영화 속에서) 전도연과 한석규가 채팅으로 만나 사랑을 나눈게 99년이었나. 여튼 그런 식으로 인연을 맺은 이들이 한 둘은 아니었던거 같다.
 
  이 책은, 인터넷 상에서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디지탈 시대의 '관계맺음'에 대해 말한다. 시대의 변화 흐름을 잡아내고, 그 과정에서 인간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정리해본다.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메일과 이동전화의 보편적인 사용, 다시 말하면 디지털 및 모바일에 의존하여 변화하고 있는 인간관계를 파악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점차 유비쿼터스 환경으로 전환하고 있는 오늘날 인간관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예측하고 또 향후 전개방향을 전망해보려" 한다고.

  저자는 온라인상에서의 소통은 오프라인상에서보다 메세지를 착안하고 구상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반면, 같은 시간대에 의사 교환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이런 의미에서 효율적인 상호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상호 교류를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소통을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간대에 오프라인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지만 말이 오갈 뿐 의사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소통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또 온라인 상에서의 관계 맺기의 특징으로 다음 네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 서로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의견 교환이 그만큼 솔직하고, 주고받는 주제나 내용에 보다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 둘째, 참여자들은 좀더 자기중심적이 되어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주로 교류를 진행한다. 셋째, 의사 교류를 하는 데 특정 개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전개된다. 넷째, 교류 과정을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적어서 보다 평등한 참여가 보장된다."
 
  내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온라인 상에서의 관계 맺음에 있어선, 오프에서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맥이나 학벌, 상대방의 재산 정도, 얼굴이나 몸매의 미추가 거의 완벽하게 배제된다는 장점이 있다. 각자가 사진을 공개하거나 재산이나 학벌 등을 밝히거나 하지 않으면, 각자의 모든 정보는 차단된다. 물론 잡다한 자신의 일상을 떠들다보면 이런저런 정보들이 하나둘씩 노출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이 공개된다고 하더라도 위 특징에서 언급하듯 교류과정에서의 독점적 지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오프에서보다 지위나 신분 등으로부터 독립되어 관계맺음에 있어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단점도 있어서, 자기중심의 교류를 하는 경향이 있고, 관계를 심각하게 보지 않은 나머지, 상대를 깊이 배려하지 못하는 면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싫으면 안 보면 그만, 이라는 식의 '관계의 가벼움'이 널리 퍼져있달까. 저자는 인터넷 뿐 아니라 휴대전화까지 다루면서 그와 같은 가벼움을 이야기한다. "이동전화는 사람을 느슨하게 한다. 언제라도 이동전화로 연락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기 때문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약속을 정하고 나가지 않으면 상대는 마냥 기다리다 지쳐 잔뜩 화가 난 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귀찮으면 핑계를 대고 못간다 통보하면 그만이다. 약속과 관계를 가볍게 여기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관계에 목말라있고 끊임없이 관계를 갈망한다. 동시에 그들은 관계를 가벼이 여긴다. 나 역시 이러한 현대인의 특징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관계와 소통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관계와 소통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은, 따로 떨어져 우주를 부유하는 운석 조각과 같다. 내 의지에 의해서 나는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내 의지에 의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한 관계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진 것이다. 나란 인간은 내가 관계맺는 인물들에 의해 규정지어진다. 

  디지털 기기는 관계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시켰지만, 개인을 더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개인에게 많은 선택지를 주었고, 나의 선택에 따라 나의 존재가 변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온라인을 통해 인연을 맺었지만 어느 순간 연락이 두절된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한때 자주 만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는 남남이 되어버렸고, 다시 만난다해도 어색하기만 할 것 같다. 관계는 양자 모두 서로에게 충실했을 때 유지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한쪽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혹은 무심해지면서 남남이 된다. 아쉬운 인연도 있다. 더 알고 지내고 싶지만 한쪽의 일방적인 잠적으로 인해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 사람을 마냥 탓할 수 없는 건, 디지털의 특징 때문인걸 어쩌랴. 하지만 각 개인의 노력으로 그것을 메울 수 있는 부분은 분명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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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4-1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그 사람을 담아낸다."
그런 거 같아요.. 아프락사스님.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게 단점도 많지만
끈적거리지 않아서 좋은 거 같아요.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거리 조절이 가능한 듯합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 눈 푸른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현각.무량 외 지음, 청아.류시화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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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무서운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을 종로의 대형 서점에서 목격했을 때 분명 중고생들을 향해 시험공부에 몰두하여 '수능점수 높은' 대학에 가라는 주문이나 하겠지,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아니었다. 도대체 이건 또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 대형서점 한복판에 수십권씩 자리를 깔고 탑을 쌓아놨을까, 하는 호기심에 열어봤더니 외국인 스님들의 강연을 글로 옮겨 엮은 것이었다. 내 인생의 힘겨운 시기에 나를 위로해주었던 책 <만행, 하버드에게 화계사까지>를 쓴 현각 스님을 비롯해 무량, 명행, 무심, 무진, 청고 등 한국의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외국인 스님들과 달라이 라마 등으로부터 계를 받은 외국인 스님들의 강연 내용을 번역해 옮겼다.

  책을 읽기 전에 그렇다면, 책 제목인 '공부하다 죽어라'는 두 가지 의미 중 한 가지일 것이다 라고 가정했는데, 하나는 역설적인 제목으로,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자기계발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공부하지 말라는 반대의 메세지를 품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었고, 또 하나는 여기에서 말하는 '공부'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공부'가 아닌 '수행'을 뜻할 것이다는 가정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 제목의 의미는 후자였음을 알았지만, 전자로 봐도 무방하다. 제목은 극단적이고 무섭기까지 하지만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잘 담아내고 있다.

  2003년 초겨울, 대전의 한 절에서 국내외 외국인 스님들이 모여 영어로 대중 법문을 시작했고, 그 법문은 꼬박 일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것을, 법회를 주관한 청아 스님 그리고 류시화 시인이 말을 글로 옮기고, 영어를 한글로 번역해 책으로 묶었다. 이 책은 불교 대중서라고 봐야 할 만큼 불교의 기본 이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스님들보다 외국에서 건너온 스님들의 말씀에서 이론적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마음으로 공감하기에는 거리감이 있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각 스님이나 명행, 무량, 무진 스님들의 말씀은 그보다는 인간의 삶과 연관된 철학적 메세지가 주를 이루어 한결 마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특히나 현각 스님의 법문을 읽으면서 옛날 생각이 다시 났는지 심하게 '마음이 움직이기도'(감동) 했다. 전체적으로 스님들의 메세지는, 현실에서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 돈, 명예, 권력 등으로부터 멀어져 수행을 통해 참나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집착이 있고, 결국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그러한 생각으로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고통은 생각에서 나오는데, 지금 세상에는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집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지란 다만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실체라고 믿거나, 내 생각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거나, 내 생각이 영원하며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을 때, 그것이 무지이며 그래서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데서부터 고통은 시작하지 않나 생각한다. 오로지 나만을 놓고 본다면 그 어떤 것에 대해 집착할 필요가 없는데, 나에서 나아가 남을 바라보면서, 나는 왜 쟤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고 있지, 쟤가 나보다 나은게 뭔데, 내 친구가 이번에 집을 샀는데 집값이 수천만원 올랐다더라, 구두 신상품 나왔는데 너무 이쁘다 꼭 갖고 싶다, 등등의 생각들로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교과적인 말이지만 오랜 옛날보다 지금은 고통을 주는 요소들이 너무나 곳곳에 널려있다. 한적한 시골마을이 아닌 도심지에서 살아서 그런지, 의무교육을 받은 후에 대학과 대학원에서 또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주변에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서 그런지, 내가 내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게 고통을 주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는 스님들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일까. 스님들은 진정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일까. 그들의 생각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있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계속 그런 생각들이 떠나지 않는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걸까. 스님들은 모두 외국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아니면 그곳에 온 한국의 스님들로부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정말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공부를 할수록, 사람들을 더 만날수록, 내가 집착하는 요소가 더 많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오히려 차라리 의무교육만을 받고 시골 어디 한적한 마을에 가서 마을 사람들하고나 함께 생활하면서 살아간다면 지금과 같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를 고민하고,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디엔가 매어있고, 내 몸조차 가까운 어디로도 떠날 수 없음을 안다. 감각세계를 멀리하고, 나를 버리고 나를 만난다는 것은 내겐 너무나 힘겹다. 그렇다고 스님들의 말씀이 전혀 의미없는 머나먼 세계의 말이라는, 구름 잡는 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분들의 말씀은 당연하고, 옳아보이지만, 그것에 도달하기까지는 지금의 나로선 너무나 멀리 있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수행하고 나를 닦으려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다보면 서서히 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테니까.

  불교에 관심이 있으면서 절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닌 철학으로서의 불교, 삶의 깨달음을 주는 불교로서의 불교를 접하고 싶다. 현각 스님의 책을 통해 마음이 '동(動)'했을 때, 현각 스님을 만나뵙고 싶기도 했다. 결국 아무데도 못가고 방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64년생인 그가 미국에서 숭산 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한게 1990년, 그리고 그간의 경험을 풀어 책을 쓴게 1999년이다. 우리 나이로 스물일곱의 나이에 출가를 했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그가 출가를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고민과 생각을 풀어 썼다. 그로부터 또 9년이 흘렀다. 그의 책을 접한 때가 2000년,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참나를 찾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집착하는 나를 버릴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이 책은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마음의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책도 아니다. 그런 책을 원한다면 절판된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접하기를 바란다. 푸른 눈의 외국인 스님들의 법문을 현장에서 경험했다면 조금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깊은 마음의 움직임을 주지는 못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독자에 따라 어떤 글줄을 읽다가 멈춰서서 생각에 잠길 수는 있을 것이다. 많은 스님들의 법문을 한데 모아 짧게 엮다보니 지면의 한계로 메세지가 깊이 전달되지 않은 까닭도 있을 것이고, (한국에 머무는 외국 스님들이 아닌) 외국에서 온 스님들의 불교 이론에 관한 해설이 오히려 마음보다 머리로 읽도록 했다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책이며, 이 책을 계기로 한글로 출판된 다른 스님들의 책도 읽어 감동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직 접하지 못한 무량스님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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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다 죽어라 - 눈 푸른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현각.무량 외 지음, 청아.류시화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절판


살아 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해 깨달음을 이루라. -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 -5쪽

삶에 더 깊이 들어가고, 진정 열심히 시도하고,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것은 변화한다. 삶의 한순간도 멈춤이 없이 흐르며, 어떤 것도 변화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생멸하는 이 모든 것 뒤에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만 한다. 각각의 순간을 깊이 있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 안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 안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 그것이 곧 수행의 길이다. (청아, 류시화) -10쪽

모든 것은 변화한다. 이 육신도 세상에 왔지만 세상으로부터 사라질 것이다. 고통은 그 변화를 막으려고 하는 데서 온다. 우리가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무상한 것이다.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이 무지이고, 고통의 원인이다. 하지만 생멸하는 이 모든 것 뒤에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파란 하늘에는 구름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온갖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 뒤에 항상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현각)-11쪽

"사실 무지란 이 세상이 무상하다고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은 무상하다.'라고 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사물과 돈, 권력, 명예, 명성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뿐 아니라, 나아가 여러분 자신의 생각으로 만든 세상까지도 영원히 곁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이 숭산 스님께서 실제로 의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무상한 것입니다. 모든 생각, 모든 견해, 모든 느낌, 모든 조건, 그리고 모든 관념들은 본질적으로 다만 무상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이 곧 무지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견해, 나의 정체성, 그 모든 것이 무상합니다. 그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것이 곧 무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현각)-19-20쪽

고통은 생각에서 나오는데, 지금 세상에는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집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지란 다만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실체라고 믿거나, 내 생각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거나, 내 생각이 영원하며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을 때, 그것이 무지이며 그래서 그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각)-25쪽

생과 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매 순간 깨어 있고, 매 순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간단한 진리이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인간 상황이다. 우리는 단지 이 몸, 이 무상한 수레, 어느 날엔가는 우주로 돌아가게 될 이 렌터카를 만족시키기 위해 생을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잠에서 깨어나 '참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이 렌터카를 우주에게 돌려줄 때가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때는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죽을 때는 죽을 뿐이다. (명행)-45쪽

삶에서 몇 번이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베풀었습니까? 일생에 몇 번이나 아무 주저함 없이 주었습니까? 비록 타인에게 베푼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 네게 무언가를 주었어.'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아니면 어떤 자선 단체에 베풀면서 '난 그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어. 난 그들에게 많은 음식을 주었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된 베풂이 아닙니다.

참된 베풂의 의미는 거기에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으며, 또한 베푸는 물건마저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생에 과연 몇 번이나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엇인가 돌아올 것이라는 어떤 생각도 갖지 않고 진정으로 베풀까요? 매우 드물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상으로 무엇인가를 기대합니다. (중략)

실제로 이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난 다음엥는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가, 또는 지니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는 "아! 그건 내가 준 시계다! 저건 내가 선물한 차야! 네가 내 차를 아직도 운전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구나." 하고 말합니다. (명행)-66-67쪽

"자신을 돕는 일과 남을 돕는 일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원효)-69쪽

"내려놓으라! 그대의 의견, 그대의 조건, 그대의 상황을 모두 내려놓으라! 지금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순간순간 행하라! 그대의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역할을 따르라." (숭산)-73쪽

늘 더 갖기를 원하고 더 좋은 거을 원한다면, 언제나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왜인가? 더 갖기를 원하고 더 좋은 것을 원하는 마음은 그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갖고 싶어서 밖을 기웃거리는 마음은 불안한 마음, 혼란스러운 마음이다. 반면에 내면에 만족이 있는 마음은, 마음이 모든 것을 지니고 있음을 아는 마음은 언제나 평화롭다. 이런 마음 상태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든 집착할 것이 없음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다. (텐진 위용) -77쪽

죽음의 순간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살아 있는 동안 키워 온 자비, 사랑, 만족, 마음의 평화 같은 긍정적인 것들이다. 이것들만이 죽음의 순간에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즐거움의 순간, 즐거움의 기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고통의 씨앗이 담겨 있다. 또한 인간 존재는 단순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자비는 우리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자비는 생명 가진 존재들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무지를 제거하려는 염원이다. (게셰 툽텐 룬둡)-115쪽

인간은 언제나 희망, 욕망, 혹은 바람을 지닌 채 계속 앞으로만 달려간다. 이것이 인간 삶의 방식이다. 언제나 달려가지만 최종적인 만족이란 없다. 좌절과 고뇌만이 있을 뿐이다. 소원이나 욕망을 이루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욕망은 이미 조금 더 앞서 간다.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며, 이런 악순환은 계속된다. 그때 늘 불만족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든 즐거움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파나 완사)-140쪽

"그 누구도 위대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고구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천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따라 고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된다." (붓다)-155쪽

고통의 원인은 마음속 집착과 갈망이다. 감각적 쾌락은 중독성이 있으며, 즐겁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그곳으로 가게 된다. 자꾸만 그곳으로 간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이다. 금방 끝나 버리는 그 경험들로부터 쾌락을 얻기 위해 습관과 중독성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즐거울지라도, 실제로는 훨씬 깊은 불만족을 불러일으킨다.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다른 길이 없다면, 우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이런 것들에 의존하게 되고 그것에 걸려들게 된다. (아잔 지틴드리야)-171쪽

보석을 물속에 떨어뜨리면 정신없이 물속에 들어가 그것을 찾으려 할 것이며, 배가 고프다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하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신경 쓰지 말자. 보석을 되찾으면 그만이고, 찾지 못한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 나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보석을 포기하는 그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계속해서 잃어버린 보석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단지 고통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 (아잔 차) -204쪽

자유의 상태에 머문다 해도, 그 상태에 아무리 오랫동안 머물더라도, 결국 고통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떤 상태, 어떤 장소, 어느 순간에도 중단하지 말고 순간순간 명상하라. 일상의 작은 나를 따르지 말고, 단지 행동하라. 매 순간 앉아 있든 서 있든, 걷든 누워 있든, 말하든 침묵하든, 그 어떤 상태, 어떤 장소에서도 중단하지 말고 명상하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역시 분명해질 것이다. 그때 우리의 삶이 곧 우리의 수행이 된다. (무심)-205쪽

이 세상의 어떤 기쁨이든지 다른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이 세상의 어떤 고통이든지 모두 자기 자신만 행복해지려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티베트 잠언) -234쪽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왜 하필이면 나이지?' 하고 불평하지 말라.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친구가 마침내 도착한 것처럼. 지난날 내가 쌓은 업이 현재의 나를 이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다. 이 업은 생의 시작부터 우리와 함께 해오고 있으며, 전생들로부터 계속되고 있다. 불행한 상황이나 환경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스스로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면, 타인을 소중히 하라. 바른 원인을 만들라. (텐진 데키)-235쪽

존재의 본성은 다름 아닌 고통입니다. 물론 이곳에 존재하는 한, 공통된 망상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아플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 곁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좋든 나쁘든 제가 쌓은 업의 결과를 경험해야 합니다. 고통을 중단하려는 굳은 의지를 키워 나가면서 존재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그런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고통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자만심을 없애 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만심이란 과거사의 재발생이기 때문입니다. 자만심이란 특히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나는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며, 남보다 나은 사람이며, 훨씬 중요한 존재다.'라고 하는 감정입니다. 흔히 자만삼이란 부풀려진 에고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있는 에고는 매우 나쁜 것으로,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과 같습니다. 티베트 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246-247쪽

(이어서)

"당신에게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풍선이 있는데, 거기에 어떤 액체를 부으면 풍선 표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풍선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만심을 갖는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큰 장애이다. 우쭐대면, 귀 기울여 들을 수 없다." -247쪽

"이기적이 되고 싶다면 지혜롭게 이기적이 돼라. 그대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면, 타인을 소중히 하라. 바른 원인을 만들라. 그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그대의 행복의 원인이 아님을 알라." (달라이 라마)-257쪽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변한다. 그러나 겉모습은 바뀌지만, 모든 것이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름과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같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살아 있는가? 무엇보다 삶의 방향이 명확해져야 한다. 이것은 곧 명상을 의미한다. 명상은 우리로 하여금 내면을 보게 하고, 우리의 생각 습관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갖게 한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평화와 자유를 얻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량)-265쪽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진정으로 깨어 있는 것이다. 현재에 있음을, 깨어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의 습관에 물들지 말라. 진정으로 새롭게 산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옛 생각을 끄집어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유이다. 지금 당신은 살아 있다. 자유로워질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르 놓치지 말라. (무진) -301쪽

수억 겁 동안 반복해 온 수맣은 습관들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나쁘게 한다. 첫날에 생선은 신선하지만, 생선을 며칠 동안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면 그 생선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할 것이다. 굉장히 나쁜 냄새가 날 것이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나 체험한 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이것들은 자신을 오만하게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알고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곧 마음의 수행이다. (청고)-329쪽

여러분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집이나 아파트가 아니고, 상속 재산도 아니며, 많은 액수의 현금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참성품에 대한 지식일 것입니다. 항상 자기 자신의 참성품에 귀의할 수 있는 습관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 수행하고 계신다면, 아이들에게 참성품에 대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대단히 영리합니다.

어떤 살마들은 말하기를,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가장 많이 배운다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가장 많이 배웁니다. 만일 여러분이 정말로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아이들 또한 잘 성장할 것입니다. 아이들 또한 부모의 수행을 보고 배울 것입니다. 단지 작은 배려와 몇 마디 조언으로 아이들 또한 이런 수행에 대해 배울 것입니다. -344-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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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촌수, 변화하는 인간관계 SERI 연구에세이 71
김유정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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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면대면 접촉 및 교류에 의한 인간 네트워크의 결속력에 의해 형성, 유지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온라인을 통한 관계도 이에 못지않은 친밀도를 형성할 수 있으며, 특히 높은 친밀도가 요구되는 가족, 친구, 친지 관계도 온라인 접촉(연결)과 교류를 통해 한층 더 돈독하게 유지되고 있음이 여러 연구와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것은 인터넷이, 면대면 접촉과 유사한 친밀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사회적 정보 전달과 습득에 적합한 것으로 알려진 인터넷상에서, 이용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아 표현을 하여 상호간의 긴밀한 유대감을 쌓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과 같이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직접 대면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보다, 업무상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을 통해 교류하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다. -19쪽

비동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동시적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는 사람에 비해 메시지를 착안하고 구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비동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같은 시간대에 의사 교환을 하기 위한 즉각적 반응에 대해 의무감을 갖지 못할 수 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드시 같은 시간대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동시적 기능은 양자가 각자 편리한 시간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유용하지만 제한된 시간 내에서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어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효율적인 상호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0쪽

(온라인의 특징을 언급하며) 첫째, 서로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의견 교환이 그만큼 솔직하고, 주고받는 주제나 내용에 보다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 둘째, 참여자들은 좀더 자기중심적이 되어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주로 교류를 진행한다. 셋째, 의사 교류를 하는 데 특정 개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전개된다. 넷째, 교류 과정을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적어서 보다 평등한 참여가 보장된다. -45쪽

비록 익명이지만 서로 진실로 대하는 것이 관계 유지를 위한 최선책이다. 익명 상태를, 거짓말을 해도 되는 상황으로 잘못 인식하면 안 된다. 익명 상태란, 가면 속에 실체나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체를 동원한 자아 노출이 아니라 텍스트에 의한 자아 노출인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한 텍스트가 곧 자신이 되는 것이다. -49쪽

사이버 공간에 참여하는 모든 이용자들은 하나의 똑같은 현상으로 인식되어 모두 동질적인 개인으로서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참여한닫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에서는 텍스트상으로 똑같은 기호와 조건을 갖는 동등한 대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이버 공간이 지각적 사실주의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이다. 지각적 사실주의는 실제로 제시되는 것에 따라 느끼기보다는 표현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판단한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에서는 텍스트에 표현된 개념적 해독에 의한 상호 간의 인식에 충실하기 때문에 가시적인 형상에 의한 전형화되고 차별적인 지각을 방지할 수 있다. -63쪽

현실 속의 각 개인은 무리를 짓거나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지만 기기에 의존하여 관계가 맺어지고 통제되므로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한다. 즉, 각자에 대한 '자급자족'의 개념이 강화된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자연히 내가 구축하는 관계망을 통해 형성된다. 그 관계망에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주도해나가는가, 또는 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는가에 따라 그 관계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관계는 개인이 형성한 관계망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다. 예컨대 관계망이 확장되었는지 혹은 축소되었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인간관계가 어떤지를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개인 중심적인 성향은 증가하고 개인 간의 연락을 위주로 하는 통신 미디어가 더 많이 출현하고 발전하여 개인 중심적인 사인주의는 더 가속될 것이다. -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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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하는 진보
지성사 / 2008년 3월
절판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17쪽

보수 진보진영이 우리 사회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므로 자신의 정치사상을 표현하고 반대 정파에 대해 비판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사상의 좌우를 떠나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국가안보나 사회질서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한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의 일환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김 의원이나 반공집회를 주도한 인사들도 자신의 정치적 기본권을 행사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최근 사태를 보면서 현재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이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 묻고 싶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지만 그들이 지키는 민주주의는 친미와 반공의 틀에 갇혀 버린 민주주의가 아닌지 의문스럽다.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보고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비웃는 것이 진정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전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일까.

친미와 반공의 틀을 벗어나려는 일체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서 무조건 빨갱이, 좌경, 친북주사파라고 낙인을 찍고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품격이 떨어지는 정치선동이다. -53-54쪽

민주화로 '입'은 자유로워졌지만 '배'를 주리는 사람, 희망을 잃은 사람이 상존한다면 민주화는 반 토막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사회 분위기는 성장, 경쟁, 효율만 숭앙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의 유령" 또는 자크 데리다가 말한 "칼 마르스크의 유령들"을 불러내거나, 정반대로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스스로 복속하는 대중에 기초해 운영되는 "대중독재"로 가는 단초를 열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를 말해야 한다. -65쪽

인권보호는 반드시 일정한 사회적 비용과 부담, 그리고 다수자의 개인적 손실이 수반된다. 이를 체득하지 않고 인권을 말하는 것은 사탕발림의 '립 서비스'일 뿐이다. 다수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불편함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된다면 그것은 결코 인권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다수자의 성찰과 관용이 요구된다. 로널드 드워킨의 표현을 빌리며, 이 점에서 우리는 인권을 "강한 의미로" 파악하고 더욱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105쪽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병역거부에 대한 신념의 진지함과 철저함이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상황에서, 국가가 병역법이라는 실정법을 이유로 무조건 이들의 신앙과 양심을 포기하라고 강제하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스럽다. 이런 '소수자 집단'의 상황을 무시하며 법률을 기계적으로 집행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앙과 양심을 존중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주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일 것이다. -120쪽

이들 국가(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이지만 다수의 지배라는 이릠하에 소수자의 양심과 신념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며, 국가존립을 위한 핵심적 사안인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소수자 집단의 양심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121쪽

(사형제에 관해) 시민을 살해한 범죄인에 대한 피해자와 사회의 분노가 범죄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본능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제도로서의 사형은 오판 시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만든다는 점, 사형을 통한 범죄억제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점, 우리 현대사에서 경험했듯이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복수로 사용되기 쉽다는 점 등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본능'의 직접적 표출은 순치되어야 한다. -135쪽

공소시효는 형사정의를 실현하는 데 정의가 법적 안정성에 양보한 결과 생겨난 제도이다. 이 제도의 존재 이유는 범행 후 긴 시간이 지나 증거가 멸실되어 진실 발견이 어려워지고, 범죄인 자신도 그 기간에 형벌 같은 고통을 받았으며, 범인의 법적 사회적 안정도 존중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종료된 후 소급적으로 연장하는 법률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시민의 기대를 뒤흔드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법학계 일각에서는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의 정지,배제를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기관이 살인과 고문 등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뿌리째 부정하는 범죄를 자행하고 은폐한 행위를 처벌하는 데도 정의가 법적 안정성에 양보해야 하는가. 헌법의 기본 이념과 시민의 기본권이 국가권력으로 침해되고 조직적으로 은폐, 조작되는 특단의 사정이 있는 경우에까지 '정의'의 양보를 주장할 수는 없다. -140-141쪽

그러면 도대체 고문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먼저 고문은 국가가 특정한 집단의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예컨대 테러리스트, 좌파혁명가, 간첩, 중범죄인 등 의심을 받는 사람은 국가와 사회에 위험을 초래하는 '불순분자'로 간주된다. 그리고 불순분자들의 범죄 혐의와 위험성은 왜곡, 과장되고 이들에 대한 인권존중은 사치스러운 군더더기로 취급된다.

이들에 대한 고문과 가혹 행위는 국가안보나 진실 발견의 명분 아래 행해지며, 인간 본성에 숨겨진 야수성은 고문과 가혹 행위의 강도를 높이게 만든다. 이들이 무고한 시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불순분자들의 인권을 따지는 자는 반국가적 의도를 가진 수사의 훼방꾼이나 범죄인들의 동맹자로 취급된다. 특히 국가 지도자와 정부가 고문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을 슬그머니 방기하고, 고문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다는 악마적인 말에 귀를 기울일 때 고문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법이다.
-151-152쪽

주권자는 검찰이 '죽은 권력'을 무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이른바 '성역'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외뿔로 '살아 있는 권력'을 치받는 해치일 것을 요청한다. -185쪽

시민사회의 다양한 구성과 이념적 가치를 반영하는 인사원칙이 필요하다. 기존의 법원논리에 충실한 고위 법조 엘리트만으로 최고재판소가 구성된다면 사회분쟁은 특정한 경향에 따라 해결될 소지가 높다. 물론 고위법관 중에는 개방적 자세로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수용하며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법부의 중요한 임무가 사회 경제적 약자의 보호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소수자'의 입장을 일관되게, 전면적으로 대변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계급, 계층, 집단의 이해관계의 충돌을 법적으로 종결하는 곳이 최고재판소라고 할 때, 최고재판소의 인적 구성은 이념, 출신배경, 성별 등에서 '다양성'을 갖추어야 한다. -190-191쪽

시민의 재판참여는 재판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 법관과 검사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수 있고, '전관예우' 등의 관행이 봉쇄되어 재판 결과에 대한 시민적 신뢰가 높아져 재판의 정당성을 고양시킨다. 특정한 교육과 계층적 배경을 가진 직업법관이 재판을 독점하지 않고 일반 시민의 법의식과 법감정이 판결에 반영되면 참여시민은 재판 과정의 주체가 되어 주권의식이 높아지며, 준법의식도 고양된다. 그리고 배심재판에 참여하는 법률가들은 법률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과 논리를 사용해 재판을 진행해야 하므로, 배심재판은 현재 법조계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권위주의 문화를 불식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193-194쪽

재판참여는 민주사회에서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재판참여를 통해 시민은 사법의 주인이 될 수 있으므로 이를 회피하는 것은 주인됨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긴요한 시기이다. -194쪽

"불가능한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디며, 어느 용사도 감히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달려가고, 잡을 수 없는 별을 잡으려 하는 것이 진정한 기사의 의무, 아니 특권이다." (돈키호테)-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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