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래트럴(collateral)의 사전적 의미는 1. 평행한, 부차적인, 부수적인, 2, 방계(傍系)의 3, 담보로 한 이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는 3번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싶다.

택시에 탄 한 살인청부업자에게 그날 밤의 생사가 '저당잡힌' 택시기사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고, 거꾸로 청부업자의 입장에서는 그날밤의 일처리의 성공여부가 택시기사에게 달려있다는 면에서 그의 삶이 '저당잡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더 크게는 로스엔젤레스에서 탐크루즈의 말마따나 "LA 지하철에서 사람이 하나 죽었다고 눈 하나 깜빡할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LA의 거리를 바쁘게 걸어다니는 모든 이들의 삶은 이미 '저당잡혀' 있는건지도 모른다.

영화는 다소 지루하다. 액션영화, 헐리우드 영화로서의 어떤 긴박감이나 빠른 진행을 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 영화를 평범한 할리우드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겉으로는 할리우드 영화로 치장을 하고, 정작 영화의 속은 비주류에 가깝다.

이 영화는 심야영업을 하는 택시기사와 살인청부업자의 하루밤의 이야기다. 600달러의 돈을 주며 택시를 하루 대여하자는 청부업자 빈센트에게 맥스는 멋모르고 그리하겠노라 허락한다. 그러나 사건은 이제 벌어진다. 빈센트가 잠시 친구를 만나러 나갔는데 건물 3층에서 웬 시체 하나가 떨어진다. 빈센트가 죽인 것이다. 놀래자빠지는 맥스를 추스리고 이들은 서서히 목적지에 도달한다.

빈센트는 말한다.
"LA 지하철에서 사람 하나가 죽었다고 눈 하나 깜빡할 사람 없다"
그는 모든 것이 순리이고 우주의 이치라며 자신이 이들 몇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저 세계 60억의 인구중 몇명 죽은 것 뿐이다. 그에게 도덕심은 없는가?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빈센트의 이 말은 되풀이되며 스스로를 결박한다. LA지하철에서 죽은 이름모를 시체로 방치된 채 말이다. 빈센트는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을 상실한 냉정한 인간이기 보다는 삭막하고 각박한 냉혹한 도시사회에서 살아가기 철저히 적응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소외 현상을 다루었다고 보면, 인간성의 상실을 다루었다고 보면 이 영화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한 것일까? 영화가 끝난 뒤 조용히 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그다지 재미는 없다. 하지만 탐크루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또다른 연기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도 뭔가 '생각할 꺼리'를 찾고픈 사람이라면 추천한다. 단지 흥미를 원한다면 이 영화는 당신의 선택에서 벗어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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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이 영화는 나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와있었다. 영혼의 무게를 잰다니... 참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에서 실제로 사람이 죽는 상황에서 저울에 대고 몸무게를 재리라는 생각을 한건 아니었다. 단지 영혼의 무게를 잰다는 것이 굉장히 깊이있고 철학적인 주제라고 생각했다. 물론 애초 이 영화에서 흥미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난 이미 이전에 이탈리아 대표적인 좌파감독이라 불리던 난니 모레띠의 <아들의 방>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화에서도 감독은 필름 속의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매우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려냈었다. <21그램>은 그런 영화이다.

 하지만 <21그램>은 죽은 자의 영혼의 무게를 재기보다는 심장병에 걸려 죽어가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무게', 과거에 코카인을 하는 등 약물중독자였으나 건축가 남편을 만나 행복한 삶을 살던 여자에게 닥친 가족의 죽음, 그녀의 '복수심의 무게', 전과자의 삶을 살다 종교를 통해 구원을 받고자하는 남자가 교통사고로 한 남자와 두 딸을 죽게한 뒤의 '죄의 무게'를 재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미 죽은 자의 영혼의 무게가 아닌, 살아있는 자의 영혼의 무게를 말이다.

 본래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과학자들의 실험에서 따온 듯 하다. 미국의 윌리엄 맥드갈 교수는 죽는 자의 사진을 찍은 결과 흰 뭔가가 몸에서 빠져나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영혼이라 생각하고 무게를 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병원의 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죽음 직전의 환자들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데 성공했다. 우선 종이한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계량기를 만들고, 여기에 곧 죽게 될 환자를 눕힌 뒤 바늘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 결과 환자가 죽는 순간 바늘이 내려가 약 28그램 이상의 체중이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죽는 순간 몸무게가 갑자기 줄어든 점에 착안하여 영혼의 무게를 달아봤지요. 그랬더니 사람에 따라 조금식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따져보니 영혼의 무게는 약 7g정도 나가더군요"

 결국 그의 말은 사람이 죽는 순간 땀이나 오줌같은 수분과 폐에 들어있는 공기가 몸밖으로 빠져나가는데 그것들을 모두 합하면 줄어드는 몸무게 28그램 중 21그램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따라서 나머지 7그램은 당연히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은 21그램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실험대로라면 7그램이라고 해야하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매우 아웃사이더적인 영화다.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 절대 흥미를 추구하는 관객들이 보기에는 아까운 영화다.

 나는 영혼의 존재,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바가 없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철학적 성찰을 하는 내가 유독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은 이것이 당면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직전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여전히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나는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 다만 차분히 이런 것이 있구나 라고 내게 알려주는 <아들의 방>이나 <21그램>과 같은 영화들을 통해 조심스럽게 접근할 뿐이다.

 영화는 매우 남미적인 냄새가 난다. 왜 그런고하고 찾아봤더니 감독이 역시 멕시코 출신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2001년에 이미 <아모레스 페로스>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바 있다고 한다. 그리고 <21그램>을 통해 숀펜은 2003년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 전미 비평가 협회 남우주연상, 영국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기까지 했으며, 나오미 와츠도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배우 관객상, LA영화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차지하고, 베네치오 델 토로는 2003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자배우 관객상을 수상하는 등 이 영화로 출연배우들이 온갖 상을 다 휩쓸었다고 한다.

 영화는 또 한편에서는 <메멘토>같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성이 시간순으로 배열되지 않고 뒤섞여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미리 줄거리를 꿰고 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정신이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어지는거야 라고 생각하며 그 실타래를 푸는데에만 정신이 팔릴 것이다. 줄거리를 꿰고가도 영화를 보는 재미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래저래 온갖 비주류 영화들 짬뽕된 묘미를 가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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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책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고등학교 사회, 윤리 혹은 정치경제 교과서를 통해 그의 이름과 책의 제목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상당 기간이 흘러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볼테르의 <관용론>, 존 로크의 <통치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과 함께 짝짓기 시험을 대비했던 기억이 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현재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본 책과 범우사에서 나온 또다른 번역본,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범우사 번역본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으나 이전에 범우사에서 나온 다른 고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접해보고 실망감을 느꼈던지라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 게다가 범우사 번역본 보다는 서울대출판사 번역본이 판매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좀더 신뢰할 수 있을 것으로 미뤄 서울대 번역본을 읽었다.

 <에밀>을 정식으로 읽은 것이 아닌, 책세상문고판으로 1부만 번역된 책을 읽었고, 같은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은 바 있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을 접함으로써 그를 세번째 만난다.

 <사회계약론>은 본래 루소가 젊은시절부터 평생의 대작으로 꿈꾸었던 <정치경제론>에서 발췌해 내놓은 저서이다. 그는 <정치경제론>을 집필하던중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느끼고 이미 집필된 논문 중 <사회계약론>만을 따로 묶어 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루소는 책의 앞머리 '독자에게'에서 밝혀두고 있다.

 제 1장의 제 1부의 주제에서는 우리가 가장 흔히 알고 있는 루소의 명언이 나온다.

 "인간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있다"

 이후로 그는 초기사회, 강자의 권리, 노예제도, 사회계약, 주권자, 물건, 사회신분, 생산권, 법, 국민, 입법, 정부, 투표, 선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사회계약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펼쳐놓고 있다.
 
 <사회계약론>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에 따라 몇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장들이 글이 길지 않은데다 쉽게 쓰여져있어 소설읽듯 읽어도 금방 눈에 들어온다.

 1부에서는 사회계약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한다. 초기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강자와 권력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는지, 노예와 권력의 관계는 어떠한지, 사회계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에 간하여 기본적인 사안들을 다룬다. 2부에서는 주권, 법, 국민의 관계에 대해서 논한다. 주권은 전체 의사의 행사로서 양도될 수도 없고 분할될 수도 없다. 3부에서는 정부와 정부의 여러 형태, 즉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2부에서 말한 법을 집행하기 위해 정부는 필요하며, 정부의 한 형태인 민주정치는 전 국민, 혹은 절대다수의 정부이고, 귀족정치는 소수에 의한 정부, 군주정치는 한 사람에 의한 정부형태이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로마 정치사를 예로 들며, 전체의사는 때때로 잘못 인식된다 해도 결코 파괴될 수 없고 항상 절대다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한다.

 루소가 살던 시기는 18세기로 계몽주의자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몽테스키외, 디드로, 홉스, 볼테르, 로크 등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등장했던 시기이고, 이들이 함께 뭉쳐 백과전서파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루소가 디죵 아카데미의 논문현상공모에 응해 상받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출간하고,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내놓으면서 저들로부터 멀어져가게 된다. 심지어 볼테르는 그를 향해 "인간을 네 발로 기는 짐승으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한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이는 볼테르 뿐만 아니라 그와 친분관계를 맺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었고 그는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루소를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루소는 사회와 문명 자체를 비판하고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회적 질서를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모든 악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잘못 통치한 인간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크게 위안이 되고 매우 유용한 것을 알게 할 것이다"(<나르시스>의 서문)

 루소는 결국 인간을 야만의 상태로 되돌리려했다기 보다는 사회적 법의 인위적이고 예속적인 체제 가운데 자연적 법의 순수한 자유를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은 그를 오해함으로써 루소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루소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은 그의 저서를 보면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글을 쓰기 전에 타인을 비판을 의식하며 어떤 문제가 제기될까 하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은 글쟁이에게는 지나친 기대다. 대개의 비판은 글이 출간된 이후에 벌어지며 다수의 비판 속에 소외된 저자의 목소리는 이미 그들에게 묻혀버린 뒤다. 루소는 그래서 그들에게서 멀어져 자신을 옹호하는 글을 써서 내는데 그것이 <고백록>이고, 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다. 또,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자기 스스로를 위한 글을 묶어냈는데 이것이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추가 언급할 것은, 루소를 이해하기 위해서 로크의 <시민정부론> 혹은 <통치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더불어 함께 읽으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아직 <사회계약론>이외에는 본 책이 없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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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래된 영화다. 1980년에 제작되었다고 하니 이런 내가 태어난 다음해에 만들어진 영화다. 그런데 영화가 그다지 옛스럽다('촌스럽다'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사용)거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단 둘이 남게 된 소년, 소녀가 무인도에서 성장하면서 겪는 일상의 일들을 담아낸 것인데, 최근 대두되는 '근대로의 이행'에 있는 <로빈슨 크루소>와도 같은 아주 진부한 소재이면서도 볼거리(?)때문인지 지루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여기서 볼거리란, 가끔 벗기도 하고 옷을 입어도 조금만 입는 두 남녀를 지칭함)

남자는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여자는 요기를 하는 등 원초적인 남여의 역할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고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을 너무도 순진(?)하게 보여준다. 남녀가 사랑을 느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섹스를 해서 아이를 가진 여자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아파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아이가 태어난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모든 것이 이들에겐 처음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다.

굳이 보라고 추천하지는 않겠지만 옛날 영화치고는 볼만하다는 것이 내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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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포선라이즈>를 보지 않고 <비포선셋>을 봐도 무방하다.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9년전 1995년에 <비포선라이즈>를 만들때의 감독과 남녀 주연배우가 모여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스토리를 짠 것이 <비포선셋>의 기본틀이 되었다. 이들은 애써 인위적인 무엇인가를 첨부하려하기 보다는 그때의 느낌 그대로, 단지 9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를, 감정을 가지고 이어나갔다. 그래서 영화는 자연스럽다.

9년전 비엔나에서 하루밤을 함께 보낸 미국 남자 제시와 프랑스 여자 셀린느는 6개월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보자던 약속을 했지만, 셀린느의 사정으로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9년이 흐르고 제시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파리의 한 서점에서 책홍보를 하고, 셀린느의 단골서점인 이곳에서 둘은 함께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80분이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하루밤은 있었는데 이제는 80분이라니, 연인에게 너무 가혹하다. 영화는 80분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을 실제로 80분에 담아낸다.

둘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다. 사소한 수다에서부터 환경문제, 미제국주의 문제, 책이야기, 그날밤 이야기 등 이들은 너무나도 할 말이 많다. 결국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유람선을 타고 셀린느의 집까지 가게된 제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했지만 그저 그런 삶인 제시는 셀린느와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셀린느 역시 다른 남자들과 만나보곤 했지만 그날 이후의 사랑은 그녀에겐 사랑이 아니다.

한마디로 평하자면 '말만 하다 끝나는 영화'다. 정말 이 영화에는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이란 것이, 그냥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이들의 지난 9년동안의 삶과 그들이 만났던 하루동안의 일에 대한 서로의 탐색전이며, 변화된 서로의 모습을 감지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들의 '말'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각 개인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제시)
"아픔이 없다면 추억이 아름다울텐데..."(셀린느)
"그 날 밤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다 쏟아 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셀린느)
"난 지금 누가 건드리기만해도 허물어질 거 같은 마음이야"(제시)

이 영화를 보는데 있어 중점사항은 이들의 대화를 통해 나와 소통하라는 것이다. 철학자 딜타이는 '타인의 자서전'을 통해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해석학을 내놓았다. 타인이 쓴 그의 자서전을 읽음으로써 나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영화는 일종의 '타인의 자서전'이다. 영화를 통해 나의 사랑학에 대한 이해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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