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크루트. 국내채용정보사이트가 아니다. 영화 제목이다.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외국 영화배우들 중 일부인 알파치노와 콜린파렐 주연의 심리스릴러. 좋아하는 배우에 좋아하는 영화장르까지 딱이다.

 영화 <리크루트>의 소재는 미국범죄영화에서 흔히 우려먹는 CIA 이다. 그러나 다른 영화가 CIA를 그저 영화에 출연하는 한 인물의 근무지 혹은 주변배경 정도로 그치는데 반해 <리크루트>에서 CIA는 좀더 깊이있게 영화 속으로 침투한다. 엄밀히 CIA훈련과정에서 벌어지는 조교와 교육생간의 관계, 교육생들간의 관계, 그리고 고도의 심리전 등 CIA는 주변배경이 아닌 영화 자체로서 써먹힌다.

  영화를 보면서도 콜린파렐이 경험하고 있는 현장이 훈련일까 실제일까 궁금해하며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반전과 반전이 거듭하고, 끝내 뭔지 모르겠다 하는 혼란을 틈타 막판 뒤집기가 진행되며 마무리짓는 영화는 비로소 영화가 끝난 뒤에야 아 그거구나 하며 꼭 붙잡고 있던 마음을 놓게 된다.

 난 이와 같은 심리스릴러가 좋다. 그냥 스릴러도 좋아하지만 거기에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스릴러라면 더더욱 좋다. 또 스릴러가 아니더라도 미묘한 심리전이 들어가 있는 법정영화도 좋아한다. 이런 영화는 가슴으로 느끼는 영화이기 보다는 관객의 머리 속에서 치밀한 싸움이 진행되며 뭘까 뭘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에 가지를 치며 추리를 하게 만든다. 영화가 지적욕구를 유발시키고 채워주는 것이다. 물론 가슴을 따뜻하게 울리는 감동적인 영화들도 매력적이지만 머리싸움을 끌어내는 스릴러도 매력이 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콜린파렐을 내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폰부스>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통해서였다. 지적인 이미지에 날렵한 체격을 지닌 그는 앞의 두 영화와 본 영화에서 모두 지능적인 역할을 맡고 소화내했다. 그 전에는 그가 출연한 수많은 영화들에서 그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스피드>와 <매트릭스>시리즈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키아누 리브스보다도 배우로서 더 매력적이다. 키아누 리브스보다 미끈하고 완벽한 역할은 아니지만 그가 영화 속에서 소화해내는 역할들은 지능적이지만 어딘가 부족한 듯한 냄새를 풍기는 약간은 어설픔이 들어있는 그런 인간이다. 물론 배우로서의 역할이 본인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특정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기 위해선 배우 본인에게 들어있는 잠재적인 요인들이 표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어설픈 지적인 남자의 이미지를 콜린파렐이 제대로 소화해냈고 나는 거기서 그의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로보나 탄탄한 시나리오로 보나 극적 사실감으로 보나 손색이 없는 영화다. 세번 봤지만 그래도 재밌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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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아톤>을 알기 전에 TV의 어느 아침 프로그램을 통해 먼저 그와 그의 어머니를 접했다. 내가 그를 본 것은 잠깐이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게 된 그동안의 사연은 정말이지 인간 승리였다. 그렇게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말아톤>은 그와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화제거리가 되었고 그 감동의 세월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영화관을 찾았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사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이 기대할 것은 실화의 내용과 감동뿐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서 대강의 줄거리는 접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줄거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실제모델 배형진, 영화 속 인물 윤초원. 그는 5살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진 20살 청년이다. 외관상 보기에는 괜찮은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초코파이와 얼룩말, 달리기를 좋아한다.

 그가 실제로 달리기를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만이 알뿐.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를 위해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을 바쳐가며 아들을 위한 삶을 살아온 엄마 경숙은 아들을 온전히 바꿔놓음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녀는 이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이에게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엄마로부터 버림받을 것이 두려운 초원은 그저 엄마가 원하는 일이면 좋단다. 결코 싫다,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달리기는 그저 엄마가 아이에게 강요한 한 가지 일에 불과했던 것일까? 엄마는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면서 나중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이에게 주입시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정말 초원이가 원했던 것도 달리기였다. 초원이는 달리기 위해 홀로 춘천까지 갔다.

 이 영화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인간승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 어머니라는 존재의 강한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모성애는 때로는 지나친 집착으로 내몰리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영화 속 초원의 동생 중원이와 같이 반항심이 가득해지기도 하지만 사랑이 지나치면 아이에게 지나친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줄 수도 있다. 단지 초원이는 이를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영화의 감독 정윤철은 <말아톤>이 그의 첫 장편데뷔작일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도 처음 들었다. 그의 이름을. 그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실제 인물 배형진과 함께 마라톤 클럽에 가입해 일년여동안 함께 뛰었다고 한다. 뛰면서 그의 마음을 읽으려 했고 느끼려 했다. 영화 <말아톤>의 감동적인 장면 하나하나는 온전히 그의 이러한 기나긴 노력의 산물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기는 쉽다. 왜냐면 줄거리를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화를 실화만큼이나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어렵다. 실화가 감동적인 것은 그것이 실화여서가 아니라 실화에 담긴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 3자가 그 사연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엮여내 감동을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감독은 그것을 느끼고자 실제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체험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이 영화를 통해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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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5-03-19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애들 데리고 자동차 극장 가려고 합니다~
 
이문열과 김용옥 - 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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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0월에 구입하고선 읽다 만 책이다. 2001년 12월에 입대 했다가 2004년 1월에 나왔으니 책이 출간된지는 오래되었으나 내가 이 책을 구경한 건 기껏해야 1년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기점으로해서 한겨레 신문의 칼럼연재를 중단하고,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기를 갖겠노라며 절필을 선언했지만, 당시 강준만 교수가 한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강준만 교수는 엄청난 다작가다. 그는 한국사회에 대해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책 내기를 책 읽기 하듯이 한다. 절필을 선언하기 전까지 그가 수년간 낸 책만 해도 수십권은 될 것이다. 그의 저작이 너무 많아 일일이 세는 것이 귀찮고 힘들다.

 어떤 이들은 그의 저작들의 수준을 이야기하며 다작을 하는 대신 전문성이 떨어진다고도 비판하지만 그가 써내는 책이 학술서도 아닌 사회비평서라는 점에서 일정한 깊이를 유지하면서 그만한 다작을 하기란 힘들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오히려 그의 글이 일정부분 전문성이 떨어지고 정성이 들어가지 않아 보이는 것은 글의 내용보다는 그의 문체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소설가도 아닌 이에게 무슨 '문체'냐고 할테지만 비평가들에게도 그만의 문체가 존재한다. 강준만은 매우 쉬운 구어체를 구사하면서 아주 알아듣기 쉽게 풀어써내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 직설과 풍자면에서는 진중권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쉽게 풀어쓰기 면에서는 진중권보다는 강준만이 앞선다.

 <이문열과 김용옥>이라는 책은 전권 2권으로 되어있으며, 상편은 이문열에 대해서, 하편은 김용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김용옥만을 보고 싶다면 굳이 상편을 볼 필요는 없다. 상편과 하편은 전체적으로 이어져있는 있으며, 지식폭력과 문화특권주의를 살피는데 있어 중요한 두 명을 모두 봐야하겠지만, 이문열이나 김용옥 둘 중 한명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에 대해 강준만이 어떻게 썼는가를 궁금해한다면 두 권중 한권만을 봐도 무방하다.

 강준만은 대단한 수집가다. 그가 이 책속에서 인용하는 신문기사와 각종 칼럼들은 모두 그의 수집벽에 의해 이루어진 성과다. 물론 항간에는 그를 위해 자료를 모아주는 도우미가 있다고도 하지만 자료를 모아준다고 해도 그 자료를 모두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그가 해야하는 작업이다. 그가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해 책 한권 분량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이들의 저서는 물론이고, 인터뷰와 칼럼, 비평까지도 모두 읽어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봐야한다.

 강준만은 이문열을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냥 아무런 이유없이 싫은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이문열이 싫은 이유에 대해서 엄청난 근거를 대가며 말하고 있다. 강준만의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가차없다. 아주 매몰차다. 그래서 이문열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도 화병이 나서 당분간 앓아눕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치만 이문열은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강준만을 자신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문열이 흔히 말하듯 아이가 어르신을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는 강준만의 비판을 하찮게 무시해버리고 말 것이 뻔하다.

 나는 이문열을 잘 모른다. 그 유명한 이문열의 <아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 <떨어지는 곳에는 날개가 있다> 는 물론이고 자라나는 어린이라면 인생에 한번쯤 읽을 이문열 번역의 <삼국지> 조차도 읽지 않았다. 난 황병국의 삼국지를 읽었다. 앞으로 삼국지를 추가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장정일과 황석영의 삼국지를 읽을 것이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이문열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소설가나 번역가로서의 그와 칼럼니스트(?)로서의 그를 엄연히 구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싫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텍스트를 온전히 읽어낼 자신이 없다. 그에 대한 편견이 이미 심어져있는 상태에서 그의 텍스트를 온전하게 읽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는 잘못이다. 텍스트와 저자는 엄연히 구분해야하니까.

 철학자 가다머는 독자는 텍스트의 제자로서 임해야한다고 말한다. 텍스트에서 내가 원하는 부분을 얻어내고 나머지는 가지쳐 자른다면 이는 올바른 텍스트의 이해라 할 수 없다. 개인의 역사적 상황과 시대의 역사적 상황인 텍스트를 모두 반영하고 고려해야한다는 것이 가다머의 텍스트와 저자에 대한 입장이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문열의 작품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내가 강준만의 이문열 비판에 대한 저서를 읽어도 되는 걸까, 라고 속으로 질문해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된다. 읽어도 된다. 왜냐면 강준만은 이 책을 통해 이문열의 지식특권주의와 지식폭력을 비판하려는 것이지 그의 소설의 문학성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문학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문학평론가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문방송학과 교수인 강준만이 소설가인 이문열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진 않다. 나는 칼럼니스트(?)로서의 이문열은 잘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으니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강준만의 이문열 비판을 읽더라도 내가 순전히 강준만에 의해 나의 생각이 뒤바뀌거나 휘둘릴 염려는 없다. 그런점에서 내가 강준만의 생각 속으로 소속되어버릴 염려는 거두어도 좋다.

 강준만에 의하면 이문열은 지식폭력의 희생자다. 그는 초등학교를 제외하고 제대로된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으며, 독학으로 공부하고 책읽기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대단한 인물이다. 홀로 독학을 통해 그만한 지식을 갖추고 글쓰기를 통해 돈과 권력, 명예를 쥐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지식폭력의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달성된 현재의 그는 신분이 미천한 인물들을 무시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신춘문예라는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평가들과 소설가들을 그는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는다. 이는 지식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역할바꿈을 한 그의 현실이다.

 또한 그는 대단한 문화특권주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현실 정치에 대해 발언하며 이럴 때는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불리할때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강조한다. 자기 필요에 따라서 색깔을 달리하는 카멜레온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내뱉은 발언이 문제시 되면 그는 그의 소설가라는 문인의 위치로 돌아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문열이 입지전적인 대단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그는 대단한 문화권력을 지니고 문화계뿐 아니라 정치, 사회계에서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점에서도 대단한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의 발언이 문제시되는 것이고, 그가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사태 또한 문제시되는 것이다.

 강준만의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그가 조목조목 드는 근거로 보아도 타당하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은 이문열의 소설을 한권도 사보지 않은 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이문열의 매니아들이다. 그들은 이문열의 소설을 통해 이문열을 접했고, 이문열의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침묵하는 지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이문열을 다시 생각해봐야하며, 이문열의 실체를 알았다면 그의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자신을 거둬야 할 것이다.


덧붙이며...
  나는 이문열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읽을 계획이다. 다만 그것은 이문열을 알기 위해서이며 또한 책을 읽더라도 사서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책을 사서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돈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보고픈 책을 모두 사보지는 못한다. 이문열의 새 책을 구입함으로써 그의 소설 몇십만부 돌파라는 기록에 한몫 보태줄 생각은 없다. 다만 헌책방 나들이를 통해 그의 책이 발견된다면 그걸 사보도록 하겠다. 그 책들은 그의 기록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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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2-0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내기를 책읽듯이 한다. -_-b

하이드 2005-02-07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등학교때 뭔 멋이 들었었는지, 이문열 책 다 찾아 읽었었는데요, 요즘은 이문열 비판 속시원히한 책 있으면 끌리더군요. 이 책 궁금하네요.

마늘빵 2005-02-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책내기를 책읽듯 한다는건 좀 심했나요? ㅋㅋ 사실 고등학교때 책에 관심을 가진 학생이라면 아무래도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먼저 찾기 마련이죠. 전 그땐 책에 별로 그렇게 관심이 있지 않았답니다. 그때 이문열을 접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문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강준만의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더불어 이 책속에 소개된 다른 이의 이문열 비판에 대한 소개도 있어 이 책을 통해 다른 책으로 확장해나가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김승환 2006-04-12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강준만을 읽고 이문열을 읽지 않은 반면 전 강준만은 읽지 못했고 이문열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으면 엄청난 수준의 지적 과시에 의해 의식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좌절감이나 intimidation 을 느끼게끔 되있습니다. 이문열이라는 작가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지식 폭력의 의도가 그의 소설들을 통해 투영된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저도 의식없이 읽던 어린 시절에는 그의 소설의 마력과 흡입력에 매료되 그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와서는 그 영향력의 잔재에 의해 내 자신이 또 하나의 지식 폭력 가해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목격 하며 몸서리 치게 됩니다. 님의 리뷰 잘 읽었구요 이 책을 한번 읽어봐야 겠군요.
 
이문열과 김용옥 - 상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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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정치경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권력과 금력에 있어서 우위를 누리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문화 분야의 종사자들이 정치경제 분야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권리는 누리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정서를 '문화특권주의'라 한다."(머리말)-5-6쪽

"'지식폭력'은 삶의 실질과는 무관하거나 큰 관계가 없는 현학적 지식 또는 제도적 지식 자격증으로 그걸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 고통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게 만드는 '상징적 폭력'을 의미한다."(머리말)-6쪽

"주고받는 계도 속에 명랑사회 이룩된다" -19쪽

"어떤 작품도 그것을 산출시킨 현실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더구나 한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을 생성시킨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37쪽

"어떻게 해서든 이데올로기화 시켜 자신이 그 수호의 전위를 자처함으로써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지키고 더 키우고자 하는 이문열의 무서운 욕망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83쪽

"공인된 절차? 나는 정말이지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신하는 게 너무 싫다. 학력과 학벌이라는 '공인된 절차'로 인해 서러움을 겪은 사람이라면 절대 '공인된 절차'를 앞장서서 역설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며 알맹이와 내실을 따져야 한다는 주장을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195쪽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처럼 문학에도 담합, 파벌, 섹트가 좌우합니다. 거기에 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또 어떤 중심주의가 존재합니다. 서울중심주의, 무슨 대학교 중심주의 같은, 문제는 중심을 하나만 설정한다는 거죠. 다원적으로 설정하고 가치를 상대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론적인 중심에 들어가야 될 것 같은 느낌. 그 다음에 또 획일성, 베스트셀러 하나를 보면서도 느끼는데, 10위 안에 들지 못하면 흐름이 없다가 10위 안에 들면 사람들이 막 사는 거죠."
(<민족예술>지 2001년 4월호 문학평론가 방민호의 말)-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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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지성인이다
헨리 지루 지음, 이경숙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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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민주적 공공영역으로 바꾸기 위한 첫번째 과제는 교육자들을 위해 공적 언어, 바로 비판의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다. 비판의 언어는 교사와 학생이 집단 투쟁과 사회 정의를 위해 공적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허용하는 언어이다. ...중략... 언어는 '바깥에 있는' 사회적 실재를 반영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실제로'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피터 맥라렌, '지루를 읽기 위하여') -26쪽

"정치적 중립을 가장하여 난해한 지식이나 전문 지식을 휘두르는 행위에 맞서 교사가 사회적으로 변혁적인 실천을 심사숙고하는 변혁적 지성인이 된다면, 교사가 기존 진리체제들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피터 맥라렌, '지루를 읽기 위하여')-27쪽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정치, 윤리적 실천이며, 사회,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구성물이라고 본다. 교육은 결코 교실로만 제한될 수 없다. 의미의 생산과 구성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의도적 시도가 있는 때라면 언제라도 그곳엔 교육이 연루되어 있고, 어떻게 그리고 어떤 지식과 사회정체성이 특정 사회관계 속에서 생산되는가 하는 문제에도 교육은 연루되어 있다. 교육은 가르치는 실천이기도 하려니와 가르치는 활동이 옹호하는 문화정치에 대한 인식과도 관련 있다." (피터 맥라렌, '지루를 읽기 위하여')-30쪽

"학교문화는 지배계급 출신의 학생들에게는 용기를 북돋우고 특권을 주면서, 피재배집단의 역사, 경험, 꿈은 배제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 아이들을 기죽인다. 학교가 무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전통교육자들에 반대해서, 진보교육자들은 국가가 선별적 수상, 자격증 정책, 합법적 권력 따위를 통해 교육실천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도록 손을 쓴다는 점을 면밀히 보여준다." ('서문')-38쪽

"권력은 신비화나 왜곡만 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진짜 위험성은 권력이 진리와 적극적 관계를 맺는 것, 즉 권력이 만들어내는 진리의 효과이다."(샤론 웰치)-46쪽

"문화자본 개념은 학교가 제도로 만들어놓은 특정한 방식의 말하기, 활동, 감동, 옷 입기, 사회화를 표상한다. 학교는 교육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지배사회의 문화를 배우고 사회에 존재하는 계층, 계급 간의 차이를 학생들이 경험하는 장이기도 하다."-57쪽

"교사와 행정가들은 방법론 사용에 정통하고 능숙하기보다는 자신의 사회관, 학교관, 해방관을 검증하고서 교육에 임해야 한다. 교육자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가치관을 회피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직시해야한다. 그래서 사회가 개인인 자신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교육자들이 무엇을 믿는지, 학생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62쪽

"인간은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날 수도 있고, 살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나 한 가지 흠이 있다. 바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33쪽

"위대한 진실은 비판 받기를 원하지, 우상화를 원하지 않는다" (니체)-145쪽

"이론이 실천으로 녹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중략... 이론은 어느 한 사회의 '사실'과 경험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는 반대 담론으로 이루어진다. 실천과의 긴장과 갈등은 이론의 본질이며, 이론의 구조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론은 실천을 지시하지 않는다. 차라리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면 안에서 필요한 프락시스 유형을 중재하고 비판적으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주 : 지루가 프레이리의 이론에 대해 말하며...)-230쪽

"하나는 역사가 현존 제도들과 사회관계들 속에서 현존 제도와 사회관계들의 의미를 알려주는 '역사적 맥락'과 그들의 정치적 기능을 은폐하기도 하고 명시화하기도 하는 '유물'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가 역사사회적 존재인 우리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역사는 우리가 말하고, 사고하고, 옷 입고, 활동하는 방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적 형식 속에서 닻을 내린 것이며, 이런 역사가 역사적 분석의 주제가 된다." (주 :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며)-231쪽

"첫째, 교사의 활동을 순수한 도구적 용어나 교수 용어로 한정하는 대신, 지적 노동으로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둘째, 교사들이 지성인 역할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적 조건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셋째, 교사 자신이 인정하고 활용하는 교육을 토해 자신이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적 이해관계를 생산하고 합법화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 ('교사는 변혁적 지성인이다')-241쪽

"그 학문의 일원이 된다는 건 특정 질문에 답하고, 일련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한정된 영역을 연구한다는 의미이다." -271쪽

"지성인은 사상의 생산자이자 전달자라는 문자적 의미 이상이다. 지성인은 관념과 사회적 실천을 중재하고 정당화하고 생산하는 자이다. 그들은 본래 정치적 역할을 뛰어나게 잘 해낸다. 그람시는 보수적인 유기적 지식인과 진보적인 유기적 지식인을 구분했다. 보수적인 유기적 지식인은 지배계급에게 도덕적, 지적 지도력을 제공한다. 현 상태의 대행자로서 보수적인 지식인은 지배자의 권력관계를 동일시하며, 의식했든 아니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선동한다. 이런 지식인들은 지배계급에게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형태를 지지하는 근거를 부여한다."

"그람시는 진보적인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계급에게 도덕적, 지적 지도성을 부여하려 애쓴다고 주장한다. 더 구체적으로, 진보적인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계급이 정치적 각성을 높이고, 그래서 지도성을 개발하고 집단투쟁에 참여하도록 돕는 데 필요한 교육적, 정치적 기술을 부여한다."-278쪽

"변혁적 지성인 개념은 그람시의 진보적인 유기적 지성인 개념과는 다르다. 변혁적 지성인들은 그들의 사회형태를 만든 억압적 지식과 실천에 저항하는 집단이면 어떤 집단 출신이건, 어느 집단과 일하건 상관하지 않는다. 변혁적 지성인은 억압의 조건에 변혁적 비판을 가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들에게 도덕적, 교육적, 지적 지도성을 제공한다."-279쪽

"꿈은 낮에도 밤에도 찾아온다. 어떤 꿈이든 그 동기는 실현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백일몽은 밤에 꾸는 꿈과 다르다. 낮에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철저히, 의식적으로, 개인적으로 소망했던 더 나은 삶의 환경과 이미지를 상상한다. 백일몽의 개념은 밤에 꾸는 꿈처럼 억제된 표현과 그런 표현의 연상으로 돌아가는 여행이 아니다. 백일몽은 가능한 한 아무 거리낌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여행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을 재구성하는 대신, 아직은 아닌 것의 이미지를 삶과 세계에서 꿈꿔보는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311쪽

"능력별 편성은 학생들을 학교 교육에서 소외시키는 것 이상이다. 학생들의 사회적 포부나 자아존중감마저 훼손해버린다. 오크스는 사회적 서열이 밑바닥인 학생들은 학교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접한다는 각성도 없이 자신의 포부부터 낮춘다고 비판한다. 오크스의 입장은 이 지점에서 매정하게 돌변하여, 사회적 실패를 개인의 실패로 부당하게 바꿔치기하고, 그 실패가 장래에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흐려놓는다. 본질적으로 학교의 역할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즉 불평등한 사회를 수용하도록 학생들을 사회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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