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사바나 소년한길 동화 34
명창순 지음, 백남원 그림 / 한길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동화는 어렵다. 어른들이 읽는 소설류보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는 더 어렵다. 최근 동화를 읽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마지못해 책장을 넘겨보지만 쉽게 읽히면서도 동화 속의 글 한줄 한줄이 그냥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들도 나중에 나이를 먹고 원숙해지면 동화를 써볼까 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화라는 장르는 함부로 손댈 것이 아니구나 싶다.

 <안녕 사바나>라는 동화는, 명창순이라는 - 그다지 알려진 작가는 아닌듯 하다 - 공주대 대학원에서 독서치료를 전공하고,  제 1회 건국대학교 창작동화상을 수상한 작가의 첫 작품이다. 또한 건국대학교 창작동화상 수상을 안겨준 작품이 이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이 동화를 쓰는 것일까? 동화작가로 이름을 내는 사람들 보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소설가도 한번에 알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닥 화려한 경력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삶을 편안하게 아름답게 순수하게 살면 동화를 쓸 수 있을까?

  <안녕 사바나>에서 사바나는 사바나 원숭이라는 종에서 따온 말이지만, 동물원을 탈출한 한 어린원숭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마땅히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원숭이에게 동화 속 남우는 '사바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안녕 사바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와 둘이 사는 남우는 동물원을 탈출한 어린 원숭이 사바나의 마음을 이해한다. 원래 사바나 원숭이는 아프리카에서 서식하는데 그곳에 어미를 두고 홀로 외딴 나라인 한국으로, 그것도 동물원으로 오게되면서 얼마나 슬펐을까. 어머니가 안계신 남우는  사바나를 이해한다. 그리고 사바나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어머니는 살아계시지만 남우는 어머니와 떨어져 살고 있고, 원숭이 사바나도 그러하다. 원숭이가 동물원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남우는 "왜 원숭이가 탈출했을까?" 를 생각한다. 나중에 남우가  원숭이를 발견하고는 동물원에 데려가지 않고 자신의 집에 숨겨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님과 이별을 겪었고, 나중에 엄마와 다시 만났다. 보고싶지만 보고싶다 말하지 못하는 남우의 마음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남우에게 먼저 엄마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 보고 싶니?" 라는 말에 남우는 눈물이 글썽. 이별과 만남 속에서 남우는 한층 성장하게 된다.

  정서가 메말라서인지 그닥 감동은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잘 짜여진 한편의 드라마였다. 마음 여린 아이들이 본다면 눈물 뚝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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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기다렸다.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현 한국 영화판을 홀로 독주하고 있는 <친절한 금자씨> 아니 월마나 친절하길래 사람들이 그리도 좋아한댜? 모두들 보는 친절한 금자씨. 나두 그녀를 만나러 갔다.

 지나치게 광고가 부풀려진 탓인가, 너무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불어넣었던 탓일까. 내가 본 <친절한 금자씨>는 예전의 박찬욱 감독의 복수 2부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보다는 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쎄 작품성 면에서는 결코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나치게 이영애 위주의, 이영애를 위한, 이영애에 의한, 이영애의 영화였다는 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은 이영애의 연기력이 탁월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가 지나치게 이영애 한명에게만 집중되고 있었다. 조금 시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영화에 출연한 한국영화계의 대가들, 송강호, 강혜정, 신하균, 김부선, 최민식, 오달수, 유지태 등의 화려한 스타들이 모두 "이영애 밑으로 집합!" 이 되어버렸다. 오야붕 이영애와 꼬봉 그들이 빚어낸 영화는 오야붕만 왕이 되고, 꼬봉들은 그야말로 조무래기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 어찌보면 스타 꼬봉들이 화면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라져가는 것 또한 영화를 보는 또다른 재미이긴 하다만 그래도 너무했다. 한밤중 차안에서 이영애를 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송강호와 신하균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한 1초 출연한 유지태는 또 어떠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잘 드러나지 않는 김부선과 강혜정은 또 어떠한가.

  <친절한 금자씨>는 현재 개봉 4일만에 15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니 엄청난 기록이다. 이러다 한국영화계의 최고 기록을 세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되는데,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영화를 본  이들 중 다수가 <친절한 금자씨>가 지나치게 작품위주로 짜여진 나머지 흥미, 재미, 긴장감 등의 대중성을 배제하게 되었고, 이것이 내용을 보는 관객이 아닌 영화에서 재미와 흥미를 찾는 나머지 다수의 관객들의 호흥까지 불러오지는 않으리란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주변인들의 재미없다 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도 있겠지만 그것도 한정적일뿐.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지금껏 작품성과 대중성을 적절하게 혼합해 평단과 관객 모두의 인기를 받았다고 평가되지만, 이번 영화에서 대중성은 거의 없어졌다. 물론 작품 내용면에서는 논의할 부분이 많다. 복수, 정의에 대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리라 기대할 순 있겠지만 많은 관객을 확보할 것 같지는 않다.



살벌한 눈화장. 그녀는 자신이 친절해보일까봐 일부러 빨갛게 눈화장을 했다고 한다.

 * 친절함에 대해

  친절한 금자씨는 정말 친절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는 친절했다. 마지막 백선생을 땅을 파 묻으면서도 그녀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녀의 친절은 인간의 냉정함을 담고 있기도 하다. 최악의 상황에서 조차 친절을 베푸는 것은 친절이 아니라 냉정함이다. 인간의 차가움이고 독함이다. 독기를 품은 자만이 냉정함을 유지하고 친절함을 베풀 수 있다. 자기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나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능력 또한 뛰어나야 그러한 친절함이 몸에서 나올 수 있다.

  그녀는 누명을 쓰고 13년간 복역한 감옥에서조차 친절녀로 찍혔고, 그녀보다 먼저 사회에 나온 이들은 그녀의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가 없다. 철저한 자기관리능력. 그녀의 친절함은 살벌하다.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하며 그녀를 맞이하러 나온 이들을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은 유일하게 불친절한 모습이다. 그녀는 심지어 백선생을 폐교에 가둬놓고서 백선생이 죽인 아이들의 부모를 모아놓고 이야기하는 대화까지 백선생에게 들려준다. 스피커를 통해서. 아 이 살벌한 친절함. 그건 상대에게 친절이 아닌 고통이다. 친절은 베푸는 사람이 아닌 받은 사람 입장에서 '좋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일인지 이영애의 친절함은 상대에게 고통으로 다가간다.

  * 복수, 정의에 대해

  그녀는 왜 복수를 하려고 하는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채 13년간 감옥에서 썩은 나의 삶을 보상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복수를 하기 위해 누명을 씌운 백선생을 찾아가고 13년의 복수를 실행에 옮긴다. 그냥 죽이면 재미없다. 그녀는 주문제작한 총의 방아쇠를 몇차례 당겨보기도 하며 백선생에게 겁을 주고, 넥타이로 목을 졸라 질질 끌고 다니기도 하고, 총으로 아무 예고 없이 발가락을 뚫어버리기도 한다. 왼발, 오른발 둘 다. 발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이것으로 끝이냐? 절대 아니다. 그녀는 백선생이 죽인 어린아이의 부모들을 소집한다. 그리곤 차근차근 친절하게 그들에게 백선생의 범행비디오를 보여주고, 말한다.

 "경찰에 넘길까요? 아니면 지금 당장 처분하시겠어요?" 아 이 살떨리는 친절함. 살인자 처리에 있어서 선택의 길까지 열어준다. 당시 현장에는 그녀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걸 알면서도 눈감았던 형사도 자리하고 있었다. 경찰에 넘기면 그 아저씨가 데려가는거고, 아니면 자기한테 맡겨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즉결처분을 택했고, 이 사실은 스피커를 통해 '친절하게도' 백선생의 귀에 들어갔다. 아흐흐흐 흐느껴봐야 소용없다. 당신은 이제 빨리 죽는 게 최선의 결과다. 그러나 이를 어째. 그가 죽인 아이의 부모가 모두 모였으니 합치면 몇명이냐? 한 아이의 엄마는 자살했고, 아빠는 해외로 갔다. 대신 할머니가 왔다. 그렇다면 2+2+2+1 = 합이 7명이다. 7명으로부터 복수를 받아야한다.

  그들의 복수는 함무라비 법전의 정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물론 방법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강도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겠다. 각자 피가 튈것을 염려해 비닐을 뒤집어 쓰고 칼을 들고, 도끼를 들고 각자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다. 무서운 사람들. 복수의 칼을 갈며 순서가 되면 교실로 들어가 복수를 실행에 옮긴다. 퍽퍽 칼이 꽂힌다. 도끼가 꽂힌다. 피를 흘린다. 잔뜩. 흥건히. 고통스러워하는 백선생. 어쩔 수 없소. 왜 그랬소. 사람을 잘못 건드렸네. 모든 이들이 복수를 직접 실행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겁에 질려있으면서도 곧잘 실행에 옮긴다. 마지막 할머니. 오. 할머니 비닐도 안쓰고 홀로 뚜벅뚜벅 온전히 걸어들어가 홀로 온전히 걸어나온다. 뚜벅뚜벅. 화면은 이동. 어이쿠. 죽었구나. 백선생. 백선생의 목에는 칼도 도끼도 아닌 가위가 꽂혀있다. 다 끝났는가? 아니다. 이영애의 복수가 남았다. 금자씨. 그녀는 백선생의 무덤(?)에서 그의 머리에 총을 쏜다. 팡. 팡. 두방.

  소름끼치는 복수혈전은 이영애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아이가 저자에게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당했고, 나는 저자에게 복수를 가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부모들은 아이의 복수 앞에 잔인했다. 백선생이 죽은 뒤 비닐에 흥건히 고여있는 피를 빼내기 위해 협심하여 비닐을 살짝 들었을 때 나는 어느때보다 그들의 잔인함을 느꼈다. 살인범의 잔인함을 초월한 보통인의 잔인함. 그 잔인함에는 차이가 없었다. 누구나 다 그만큼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만이 우리의 뇌리에 들어온다.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이다. 금자는 백선생의 몫을 백선생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그녀의 정의를 실현했다. 그녀의 복수를 실현했다. 여기서 정의는 곧 복수가 된다. 내가 손해본 만큼 상대에게 돌려준다. 이익과 손해는 이제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여기서 정의는 실현됐다.

 

사족

이 한편의 영화 속에는 이영애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 그중에 난 고딩 이영애가 가장 맘에 든다. 껄렁껄렁한 옷차림, 하지만 뭔가 단정해뵈는 모습. 전화를 걸어 말한다. "하하핫 선생~님~ 나 임신했어요. 임신했다고요. 임.신. 아니~ 임.신" 이라고 전화 속 상대방 교생이었던 백선생에게 말하는 그녀의 말투. 아직도 기억난다. 언제 또 이영애의 고딩모습을 볼 수 있으랴. 나이 30대 중반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고딩의 모습이 가능하다니. 놀랍다. 이영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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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5-08-03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그야말로 엑기스 오브 스포일러 ! ㅋㅋㅋ
이영애 고딩 모습 조금은 어색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수용되던 -_ ㅠ
놀랍도다 -_ ㅠ

줄리 2005-08-03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친절하시게 친절한 금자씨를 소개해 주셨네요^^ 보게 되면 내용이 아주 잘 들어올것 같네요~

마늘빵 2005-08-0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 ^^ 그쵸. 고딩모습. 날라리 고딩인데 왜 이뻐보이는거죠? 귀엽구. ㅋㅋ
줄리님 / ^^ 앗 저때문에 중요내용을 머리속에 담아가시는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릴케 현상 2005-08-0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저런 분석이야 가능하겠지만-_-저로서는 한 가지밖에 생각이 안 나요 '잼없다'
어쨌든 아프락사스님 정리 잘 하시네요^^

마늘빵 2005-08-03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그 잼없다가 '대중성없다' 죠 머.ㅋㅋㅋ 정말 지루하더라구요. 5명이서 봤는데 20살 먹은 한 여자아이는 친구한테 전화해서 "야 잼없어 잼없어 지루하고 니가 보면 진짜 잘거야" 라고 말하더라구요. ㅋㅋ
 
할머니 일공일삼 6
페터 헤르틀링 지음, 페터 크노르 그림, 박양규 옮김 / 비룡소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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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동화를 읽어본게 어언 몇년이냐? 사실 난 어렸을 때도 동화라는 걸 별로 읽어본 기억도 없다. 집 분위기가 책 읽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집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안읽었으니 중학교, 고등학교 가도 책을 안읽었고, 그저 철학이 좋아 대학 2학년에 전과를 하고나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나의 독서경력은 별로 안된다.

 <할머니> 부모님을 잃어버린 한 남자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른 젊은 친척들도 많지만 할머니는 구지 자신이 손자를 데리다 키우겠다고 하신다. 몸도 편치 않고 가진 것도 없는 할머니가 어떻게 한창 개구질 나이인 10살짜리 꼬마 남자아이를 기르겠다는건지.

 할머니는 매우 가난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아동복지원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러니 정말 말 그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이지 그 이상의 사치는 용납되지 않는다. 아파도 웬만해선 병원가서도 안되고, 집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치료를 한다. 이제 힘에 겨워 걷기도 힘들지만 택시를 타는 것은 사치다. 옷도 꿰매 입어야 하고, 비싼 옷은 엄두도 못낸다.

 이 책은 초등학교 동화 중에서 꽤 유명한가보다. 나야 잘 모르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많고 편집자 추천까지 되어있는거 보면 그러지 않을까 추측. 감동을 주기 위한 동화지만 난 감동은커녕 눈물 한 방울 찍 하지도 않는다. 감정이 메말라버린건지. 아니면 더이상 이런식의 감동은 내게 통하지 않는건지. 하지만 마음 여린 아이들이 읽기에는 충분히 감동적이다.

 동화는 짧게 짧게 여러 단편으로 짜여져있고, 각각의 장이 끝난 뒤에는 할머니만의 독백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장에서 벌어졌던 에피소드를 겪고 난 뒤에 할머니 혼자만의 생각을 담아놓은 것이다. 홀로 남은 손자를 키우며 아들내미를 생각하기도 하고, 자신에겐 며느리였고, 아이에겐 엄마였던 여자를 놓고 서로 싸우기도 하면서 왜 같은 사람을 놓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하고. 할머니의 독백은 매우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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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일공일삼 6
페터 헤르틀링 지음, 페터 크노르 그림, 박양규 옮김 / 비룡소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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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도 하지. 녀석 어미만 생각하면 왜 이렇게 화가 나지? 그렇게 못 하지도 않았는데. 그 앤 좋은 엄마였어. 단지 나와 키우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 그렇다고 애를 애지중지 돌본건 아니야. 애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일찍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었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옆에서 좀 도와줘야지. 걔도 도와 줄 건 도와 준다고 그랬어.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했지. 우린 서로 이해를 못 했던 거야. 그 앤 내 신경을 많이 건드렸어. 나도 마찬가지였겠지. 며늘아기와 너무 자주 싸운 것이 지금은 후회가 되는구먼." -33쪽

"아, 이젠 정말 다 지나간 일이야. 칼레와 난 다시 같이 사는 거야. 가만 보니까 칼레 저 녀석이 더 조심스러워졌고 생각도 깊어졌어. 이번엔 저 녀석도 되게 혼이 났을 거야.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어쨌든 저 녀석을 위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텐데. 날 위해서는 아니지만. 아무렴, 날 위해서는 아니고말고. 앞으로 내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해도 칼레를 볼 수는 있을테니, 그저 지금처럼만 살게 되기를 바래."-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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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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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실망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이전의 작품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11분> <연금술사>를 연속으로 읽었고, 얼마간의 여유를 가진 뒤 그의 신간 <오 자히르>를 접했지만, 내가 그로부터 얻은 것은 실망이다 라는 느낌뿐.   그가 좋아지려고 했는데 내게 이런 실망감을 안기다니. 마치 그가 어거지로 소설을 써낸 듯한 생각이다. 아직 새 소설을 쓸 만한 내용과 사색이 가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와 약속 때문에  혹은 돈 때문에 소설을 억지로 써낸듯한 느낌. 완성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리고 어설프다.

 가수들을 보면 기획사와 계약을 해놓고 언제까지 몇개의 음반을 내기로 한다 라고 약속을 하지 않는가? 뭐 내가 제기한 의문은 그런거다. 혹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출판계에도 그런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출판사와 약속해놓고 언제까지 소설을 완성해서 하나 내기로 한다 라는 것. 아니면 뭐 코엘료가 돈독이 올라서 그의 이전 작품들이 잘 팔리자 그 명성을 뒤에 업고 돈 좀 벌어볼라고 대충 써낸 소설일 수도 있다. 어쨌건 이유가 뭐였건 간에 난 그에게 실망했다.

 뭔가 있어보일 듯한 제목 '오 자히르' 에, 뭔가 있어보일 듯한 표지까지. 흥! 속임수였어.

 코엘료는 책의 앞 부분에서 루이스 보르헤스의 <자히르>를 언급하면서 서두를 열었다.

 "아랍어로 자히르는, 눈에 보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일단 그것과 접하게 되면 서서히 우리의 사고를 점령해나가 결국 다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어떤 사물 혹은 사람을 말한다. 그것은 신성일 수도, 광기일 수도 있다."

 아내의 원인 모를 가출, 그리고 아내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 속에서 주인공은 미하일이라는 사내를 만나고, 목소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어느새 목소리를 듣게 된다. 자히르. 그것이 왔다. 왔구나 왔어.

 자히르 라는 모티브를 삼아 코엘료는 소설 하나를 다 풀어나간다. 하지만 뭔가 많이 미흡한 느낌이다. 그다지 전작들에 비해 깊이있는 사색과 성찰을 안겨주지도 않는다. <연금술사>에서의 깊이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의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파고드는 집중력도,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자연스러움도 배어나오지 않는다. 어색함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이 많은 작가는 파울로 코엘료 자신인가보다. 고생 끝에 소설 하나로 인해 온 세계에 이름을 떨쳤고, 명성도 얻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돈도 꽤 벌었다. 젊은 시절 음악을 했었고, 연극도 했었고, 잡지를 내기도 했고, 감옥에 가기도 했다. 순례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의 경험이 소설 속의 주인공과 일치한다. 코엘료는 어쩌면 소설 속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자신이 추구하는 자히르를 찾아서.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가 사실인지 어쩐지는 모른다. 아마도 이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코엘료가 이 소설을 통해서 추구했던 것은 자기자신을 찾는 길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의 자히르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

 이 소설이 내게 안겨준 실망감으로 인해 나는 그의 나머지 다른 소설 <악마와 미스프랭>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을 계획에 대해 잠시 고려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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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5-07-3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전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만 보고 이 사람 좋아졌는데, 이 새책에 대한 평은 그리 썩 좋질 않네요...걍 <연금술사>나 한번 봐야겠어요

마늘빵 2005-08-0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책은 괜찮은가요? 그럼 또 흠...보고싶어지네.

poptrash 2005-08-01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베로니카, 11분, 연금술사만. 어쩐지 이 책은 별로 안땡기더라구요... 그래도 뭐, 돈 벌었으니 좋겠지요. 아아.

마태우스 2005-08-0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11분에서 이사람과 관계를 끊었어요... 저랑 안맞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성급한 판단이지만, 아무튼 님의 리뷰를 보니까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