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
워커 퍼시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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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말을 할 때 적확한 단어 대신 그 근처를 맴도는 부정확한 단어를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도, 틀렸다고 교정을 받을 때도 있다. 할머니처럼 나중에 나도 치매가 오려나 무서운데, 치매예방을 위해 고스톱을 열심히 쳐야하나 싶다. 


 이런 버릇이 망상을 할 때엔 적잖이 도움이 되는데,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이 들러붙어 재미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주는 탓이다. 양 극단은 서로 닮았다는 것을 나는 내 말실수에서 느낀다.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읽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사람의 망막은 중심보다 가장자리가 더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별을 볼때엔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살짝 비껴 바라보아야 한다고. 금성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나치게 집중해서, 지나치게 똑바로 지켜보면 사라지는 법이라고. 아마도 진리나 깨달음을 향해 가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였을텐데, 어릴 때 읽은 그 구절은 내 마음에 또렷하게 남았다. 다만 나는 그저 비껴간 단어를 말하고 별을 잘 보는 어른이 되었다. 


 어릴적 읽은 포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던 건 수년 전 재야의 볼링고수 친구와 볼링을 치던 때이다. 곧잘 스트라이크를 치는 친구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중앙을 노리는게 아닌 그 살짝 옆을 노리는게 포인트라고 했다. 스트라이크를 노리고 한 가운데를 힘껏 치면 양 끝의 핀이 남아 다음 차례에 둘 중 하나만을 노려야 한다고. 어쨌든 공에 스핀을 줄 수 있어야 하기에 그리 도움되는 조언은 아니었지만, 생각 없어 보이던 친구놈이 포와 비슷한 말을 한다 싶어 다시 새삼 다시 보였다. 한평생 양 극단의 단어 사이를 오가는 여행자처럼, 중앙을 비껴치며 살아온 내 인생에 다시금 응원을 주는군. 물론 친구는 몰랐을 테지만.


 연말에 우연히 워커 퍼시의 <영화광>을 읽고 감동받아 결국 이런 글을 쓴다. 정말 별 내용 없이 30살이 된 주인공이 1주일 동안 일상을 때우는 이야기인데, 무엇보다 제목이 영화광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이야기는 손톱의 때만큼만 나온다는 점도 훌륭한 비껴감 포인트!.. 장난이고, 난 결국 이런 시시껄렁함을 사랑하는 족속인가보다. 내 단어처럼 방황하는 일상.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아닌 그저 주위를 맴도는 이야기. 일상성에 잠겼다 떠오르는 자맥질에 삶의 깊은 행복과 슬픔이 담겨있다.


 결국 올해 그렇게 살았다. 금성의 언저리를 바라보며, 단지 별을 많이 보는 사람이 되어서. 단어의 언저리를 가늠하며 더듬어가는 사람들을 포옹하며. 선의의 오해를 마음가짐으로 말에 귀기울여주는 따수움에 고마움을 느끼며. 교정보다 웃음이 선행하는 마음 씀씀이. 미끄러지는 단어의 가장자리를 함께 헤매며 살아온 해의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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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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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는 것이 나름 우리들의 작은 전통(?)이다. 원태가 안 해본 보드게임을 하나 들고오라고 해서 보드게임이 꽂혀진 창가의 책장을 살펴보았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우리 집은 북향이라 해가 들지 않는다. 다만 하루 중 딱 한 번 빛이 집으로 들어올 때가 있는데 바로 해가 질 때다. 창가에 있는 책장으로 빛이 사선으로 얼마간 비쳤다 사라진다.


 책과 보드게임의 색이 미세하게 바랬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 때였다. 하루중 30분 남짓 비치는 석양에도 꾸준히 색은 바래고 있었구나.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편은 아닌지라 슬프진 않았다. 다만 영속하는 상실을 조용히 감각했다. 가만히 멈춰있는 것들도 조용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이별하고 있다.


 연휴에는 책을 4권 읽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는 레즈비언 친구에게 읽고 알려주기 위해, 그리고 클레어 키건의 소설 2권. 들고온 책은 이 3권이었지만 너무 빨리 읽는 바람에 동네 서점으로 가서 앤드루 포터의 새 단편집을 사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레이먼드 카버를 떠올리게 하는 앤드루 포터는 상실을 표현하는 재능이 참 탁월하다. 포터의 소설에는 나도 모르게 지나온 것들, 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진 것들이 담겨있다.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상실을, 어느날 문득 무언가 달라졌다는 감각을 그려낸다. 그게 무엇이었지는 결국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멈춰 선 사람들을 조용히 응시한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모두 정지해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삶은 흐른다는 점이 비극이자 작은 위안이다. 이미 지나쳐버린, 그리고 가물거리는 빈 곳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결국 그 주위를 담담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앤드루 포터는 잘 알고 있다.


 이번 설의 보드게임 모임은 승률이 좋았다. 1등을 여러번 했다. 아마도 게임 잘하는 재우가 오질 않은 탓일지도.. 재우는 결혼을 준비한다며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했다. 태윤이는 자랑을, 원태는 인생네컷에 미쳐있는 사람처럼 집안이 여자친구와 찍은 인생네컷이다. 가만히 서있는데도 많은 것을 지나쳐온 느낌이 든다. 꺼져가는 불씨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나, 100미터 전력질주 달리기나 숨가쁜건 매한가지 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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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4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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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스타벅스 신촌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닉네임을 정해야 했다. 아버지의 이름 마지막 글자 ‘휴(休)’자를 따서 Hugh를 적어냈더니, 점장님이 발음하기 힘들다고 바꾸라고 했었더랬다. 그 때 처음 아버지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는 6남매를 낳고 마지막으로 막내인 아버지를 낳으면서 이젠 정말 쉬고싶으셨을까. ‘이름이 천해야 오래 산다카이!’ 할아버지 말씀에 놀고 먹으라며 천한 이름을 붙이고싶으셨을지도. 몇 년 전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당신의 휴식은 충분히 천하지 못했구나 되내었다.


 사촌형이 술을 마시다가 나에게 심장 관리를 잘 하라고 했다. 큰아버지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우리가족들은 대대로 안좋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몇년 전 사귀던 애인이 내 가슴을 베고 자다가 심장소리가 이상하다고 했다. 백신의 부작용인 듯 했지만 괜히 불안하여 애플워치의 긴급 연락망에 애인 전화번호를 연결해놓았었다. 혼자 자다가 심장이 멈추면 이 사람에게 전화 해주렴. 백신 효과가 사라지자 증상도 같이 사라져서 잊어버리고 몇 년을 보냈는데 저번주부터 갑자기 다시 심장박동이 건너뛴다. 이번엔 애플워치 긴급 연락망에 적힌 옛애인의 전화번호를 아차 싶어 지웠다. 그날은 밝고(晶) 넓다(浩)는 내 이름에서 천한 부분을 고민하며 잠들었다.


 이상하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이번 주말엔 모옌의 개구리를 읽었다. 친한 형에게 빌려 읽었던 모옌의 중단편들이 너무 재밌었던 터라 장편을 읽어보자 싶어서 사놓았었는데, 한참 뒤에야.


 개구리는 중국에서 70년대부터 시작된 계획생육 정책이란 배경 속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한 고모를 중심으로 여러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계획생육 정책이란 산아제한 정책의 중국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은 이것을 엄격하게 추진했던 터라 국민을 대상으로 정관수술과 루프수술은 물론, 도망친 임신부들까지 잡아와 임신중단 수술까지 강제로 시행했다. 소설은 이런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천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몸부림이다. 자신이 살기위해, 아내와 남편을 살리기 위해, 또 자식을 살리기위해 말도 안되는 일들을 한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이 계획생육까지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일들이 중국에서 정말 실제로 일어난 탓에 마치 마술적 리얼리즘같은 실제 이야기들에 홀려 미친듯한 흡입력으로 마지막까지 읽었다. 살면서 이렇게 빠져들어 읽은 소설은 아마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모옌은 고모가 실제로 산부인과 의사였고, 오래 전부터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 마음 먹었다고 적혀있다. 다만 정부의 계획생육 정책을 비판해야 했기에 망설였는데, 결국 계획생육을 배경으로 한 인간들의 이야기로 방향을 정한 뒤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소설 개구리는 고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각본가 커더우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형식적으로 굉장히 특이한데, 고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지들이 이어진 뒤 마지막으로 결국 완성하게된 ‘개구리’라는 연극 극본으로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재미 만으로도 끝내주게 몰입시키지만, 나는 마지막에 현실을 재현한 연극의 각본을 넣은 이 형식이 그 무엇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인생이 나에게 큰 슬픔을 안겨다줄때 난 내가 슬픔을 연기하고 있다는 감각을 한 적이 있다. 마치 오래전 보았던 한 장면을 재현하는 느낌.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수군대는 친척들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천함을 찾아 헤맸다. 어쩌면 연극이란, 예술이란 이런 슬픔을 놓아두는 곳이려나 싶다. 삶을 재현한다는 것은 예술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 불완전한 재현 속에는 결국 하지 못했던 말들, 얼굴에 뱉지 못하고 삼켰던 침들, 혹은 참지 못했던 헛구역질들이 담겨진다. 이 연극이 사실이냐 아니냐, 혹은 얼만큼 사실이냐는 질문만큼 우스운 것은 없다. 다만 나는 훌륭한 배우가 아니었을 뿐.


 개구리속 고모는 흙인형을 빚으며, 출산시킨 9800명의 아이와 유산시킨 2800명의 아이를 재현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재현한다. 그리고 작가 모옌도 고모의 이야기를 소설로 재현한다. 이 반복 속에서 아마 인간은 조금씩 치유될 것이라 믿는다.


 역사는 대체 왜 배우는거야? 라고 누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글쎄 왜일까. 흑인이나 게이가 차별받는 이유를 생물학적으로 열등해서라고 설명할 순 없으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서 결국 시원한 대답은 하지 못했던 기억이지만, 이런 역사 소설을 읽게되면 다시 그 질문이 떠오른다. 아마도 더 좋은 이야기로 세상을 해석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세상을 이야기로 이해한다.


 이제 잠들어서 눈을 뜨면 다시 한 주가 시작된다. 어제를 재현하며 오늘 또 내일을 살아간다. 어제를 재현한 오늘에는 어떤 진심들이 담길지. 반복해서 들었다 내리는 체육관의 무거운 쇳덩이는 점점 더 가벼워질지. 내 하루는 얼마나 치유될지. 불가해한 내 심장은 아마도 미처 꿈틀대지 못한 어제의 박동을 뒤늦게 재현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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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1 - 50주년 기념 특별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6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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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 캐치-22에 대해 처음 읽은 건 워커 퍼시의 소설 ‘영화광’의 역자 후기에서였다. 역자분이 말하길 당시 전미도서상 최종 결선에 3작품이 올라갔는데, 워커퍼시의 '영화광'과 샐린저의 '프래니와 주이', 그리고 마지막이 조지프 핼러의 '캐치-22' 였다고 한다. 그 두 작품을 제치고 수상을 했으니 영화광이 얼마나 대단한 소설인가! 에 대한 내용이었고, 내 기억에 캐치-22는 ‘그만큼 대단한 소설’ 정도로 기억되고 지나갔다.


 그리고 한 달쯤 후에 우연히 캐치-22라는 제목을 다시 듣게 되었는데, 바로 넷플릭스 드라마 비프의 마지막화에서다. 에이미는 허리에 22라는 숫자를 문신했는데, 대니가 그 의미를 묻자 캐치-22라는 소설에서 따왔다고 대답한다.


“그거 알아? 조지프 핼러의 캐치-22는 원래 캐치-18이었는데, 편집자가 지맘대로 숫자를 바꾼거야”


편집자는 도대체 왜 18을 22로 바꾼 것일까? 대니의 그 대사가 이상하게 내 호기심을 자극해 바로 소설을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이별하고 드라마 비프의 엔딩을 보며 과몰입 하기도 했거니와, 궁금해서 캐치-18을 구글에 검색 했더니 온통 캐치티니핑 18화 리뷰만 나와서 그 전모를 당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편집자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내 마음대로 숫자를 바꾼 적이 있다. 이전 회사에서 예절교육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만든 적이 있었는데, 다 큰 성인에게 정말 이런 것이 필요한가 싶었지만 사람들이 매일 게시판에서 욕을 하고, 언젠가부턴 조식으로 나오는 이즈니 버터를 도둑이 다 쓸어가는등 회사가 비프의 대니와 에이미로 가득했던 탓이다. 그 중엔 주차 문제로 하도 싸움을 하니 주차장 사용 에티켓을 교육하는 편이 있었는데, 케릭터가 24번 자리에 차를 주차하는 장면을 만들어야했다. 아트워크를 전달받은 나는 내 마음대로 숫자를 42로 고쳤다. 아무래도 42야말로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니까.


 아무도 신경 안 쓸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애니메이션을 본 아트워크 디자이너분이 나에게 와서는 왜 24를 42로 고쳤냐고 물어봤다. 디자이너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좀 웃긴 일이다. 아마도 주말동안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인간은 대체 왜 24라는 숫자를 굳이 뒤집어서 수정했을까? 42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길래?’


 알고보니 디자이너분의 생일이 2월 4일이라 그 숫자를 선택한 것이었고, 그래서 숫자가 바뀐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고 한다. 작업물에 자기 이야기를 숨겨놓다니, 당신도 나처럼 꽤 음습한 사람이었군. 난 어떤 소설에서 나온 유머라고 솔직히 대답은 못하고 ‘그냥 이유없이 바꿨다’라고 얼버무렸다. 인간이란 사소한 것들에도 의미를 집어넣는다. 다만 의미와 무의미는 이렇게 쉽게 뒤집힌다.


 도대체 캐치-22라는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대하며 배송 온 책을 펼쳤다. 편집자는 어떤 의미를 자기 맘대로 넣었을까. 다행히 캐치-18에서 캐치-22로 바뀐 것에 대한 일화는 소설 50주년판 서문에 실려있는데, 생각보다 시시한 이유라 실망했다. 하지만 뒤이어 1000페이지짜리 이 소설을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드라마 비프가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이 광기와 부조리의 대잔치에 홀려버렸기 때문이다.


 소설은 2차대전의 미국 비행대대의 이야기다. 드라마 비프처럼 정말 온갖 미친 사람들이 다 나오는데, 아마도 주인공 요사리안은 그 중에서 가장 미쳤으면서도 가장 정상적인 인물일 것이다. 요사리안은 주어진 50번의 비행을 끝내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캐스커트 대령이 자꾸 목표 비행 횟수를 5번, 10번씩 찔끔찔끔 올리는 바람에 계속해서 횟수를 달성하지 못하고 전쟁에 머무르게 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드라마 비프에서 대니와 에이미는 모두 삶을 완성하기 위한 한 조각을 가지려 노력한다. 이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계약만 성사시키면 내 삶은 완성될 것 같은데. 우리는 모두 기대를 품고 마지막 비행을 떠나는 요사리안을 닮았다. 하지만 그 비행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캐치-22는 이런 모든 부조리와 모순의 상징이다. (Catch에는 함정, 조항, 노림수 등의 미묘한 뜻이 많은데, 소설에선 주로 조항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기를 쓰고 귀국하려는 요사리안은 이 22항으로 인해 전쟁을 그만둘 수 없다. 캐치-22가 대체 무엇인지는 여기 적을 수 없지만, 순환논리와 자기모순을 가진 부조리한 조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미친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하면 전역을 할 수 있지만, 미친 사람은 스스로 미친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정도의. 소설은 온갖 캐치-22들의 향연이다. 캐치-22를 이유로 무의미한 하루와 죽음들이 이어진다. 인간에게 이것은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예절교육 영상의 24와 42라는 숫자에도 의미를 부여하고야 마는 족속들이니까. 인간은 무의미를 견딜 수 없다.


 드라마 비프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하려고 산 캠핑화로를 반품하려 했더니, 직원이 반품 그만하라고 비꼬는 아이러니. 죽음의 순간에 만난 죽이고싶은 인간. 행복이 이뤄졌다 싶을때 다시 시작되는 고통. 이쯤 되면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의미를 향해 달려갔더니 무의미로, 사랑이 증오로, 행복이 불행으로 뒤바뀌는 순환. 인생은 모래시계같다. 모래가 다 떨어질때쯤 누가 맘대로 다시 뒤집는다는 것이 엿같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태초의 인간에 대한 신화를 하나 만들었다. 태초의 인간은 머리가 두 개, 팔다리가 각각 네 개, 심장이 두 개로 현재의 두 인간이 합쳐진 형태였다는 것이다. 남녀뿐만이 아니라 남남, 여여도 가능했다니 PC하기까지.. 어쨌든 제우스가 오만해진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두 동강 내버린 형태가 지금의 우리라고 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다.


 세상은 캐치-22로 가득 차있고, 한 사람의 삶은 비어있는 퍼즐이다. 모래시계는 끊임없이 뒤집히고, 방금 얻은 퍼즐이 내가 찾던 한 조각인지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다. 이 탐색이 언제 끝날지조차 알 수 없다. 어릴때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영혼의 반쪽을 만나는 날을 꿈꿨던 때가 있었다. 드디어 만났다고 기뻐하던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캐치-22로 모래시계가 뒤집혔지만. 그래도 때론 24가 42로 뒤집혀 답을 줄 때도 있겠지.


 소설과 드라마 모두 비슷하게 개판인 세상을 그리지만, 결국 드라마 비프의 결말에 마음이 간다. 인생은 영혼의 짝과 함께하는 2인3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다리가 부러진 에이미와 팔이 부러진 대니가 절뚝이며 걸어가는 것에 좀 더 가깝다. 22라는 숫자처럼 꼭 닮은, 비슷하게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드라마가 끝난다. 비어있는 것은 내 안의 퍼즐이 아니라 어쩌면 나와 너 사이의 공간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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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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