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梁明)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운동가 (최규진 2000년 집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에서 한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1919년 무렵 북경(北京)으로 가서 북경대학(北京大學) 문과에서 수학했다.


1925년 1월 북경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가입하고 잡지 『혁명』 발행에 참여했다. 1925년 8월 귀국해 조선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안광천(安光泉)의 소개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년 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위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을 결성하는데 참여했다.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고광수(高光洙)의 뒤를 이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7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직은 사퇴했지만, 7월까지 조직을 지도했다. 8월『조선일보』 해외특파원 자격으로 상해로 갔다. 10월에 귀국해 김준연(金俊淵)이 책임비서를 맡은 조선공산당에서 선전부원이 되었다. 11월 김준연 책임비서로부터 모든 사무와 후계당 조직 문제를 위임받고 김세연(金世淵) 책임비서를 선정했다.


1928년 2월의 제3차 조선공산당검거 때 상해로 망명하여 홍남표(洪南杓)가 책임비서였던 상해 야체이카의 위원이 되었다. 1928년 6월 코민테른 6차대회에 대표로 파견되어 10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코민테른 동양부 앞으로 조선공산당의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조선공산당 지부승인 취소결정을 번복해 줄 것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1929년 4월 이른바 ‘ML당’(3차 조선공산당) 간부들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당재건 방침을 협의했다. 상해 적색구원회(모플) 지부로 가서 운동자금을 마련할 것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대한 선언서 발표 등의 임무를 띠고 상해로 갔다.


북경에서 ‘엠엘파’ 기관지 『계급투쟁』을 발행하고 여기에 철악(鐵岳), 광우(光宇), 일기자(一記者) 등의 이름으로 여러 글을 실었다. 1929년 5월 길림(吉林)에서 열린 조공재조직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3월 상해에 도착한 고경흠(高景欽)과 함께 조선공산당 선전물의 근거지를 동경(東京)에 만드는 문제를 협의했다. 1931년 12월부터 1932년 8월 15일까지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32년 모스크바에서 조선 관련 글을 써서 코민테른 간행물 『민족식민지문제 자료』에 실었다. 1934년모스크바에서 외국출판사 한글 담당 직원이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강만길 · 성대경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96)

한국근현대 청년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 풀빛, 1995)

『일제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30년대반 ,일송정,1991)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한길사,1991)

한국공산주의운동사 (김준엽 · 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사회과학대사전(社會科學大辭典)』 (이석태 편,문우인서관,1948)

코민테른 6차대회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정치사상연구 (최규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엠엘파에 대하여」 (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타 문서군 495 ,목록 135,문서철 191,양명,1933)

「엠엘파의 정치적 견지의 비판」 (러시아현대사문서보관연구센타 문서군 495 ,목록 154,문서철 488,양명,1933)

現代史資料 (姜德相 · 梶村秀樹 編, みすず書房, 1972)

朝鮮獨立運動 (金正明 編, 原書房, 1967)

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B%AA%85&ridx=0&tot=18


▷ 양명[梁明,1902~?] (두산백과)

양건(梁健)·양건일(梁建一)이라고도 불리었으며, 1902년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당시에는 통영)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1919년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베이징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1925년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같은 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6년 박헌영(朴憲永)·김단야(金丹冶)·임원근(林元根)·조봉암(曺奉岩) 등이 결성한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제2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일명 ML당 검거사건) 때 중국으로 피신하였으며, 그해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인터내셔널_제3인터내셔널) 제6차 대회에 조선공산당 대표로 참석하여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승인취소를 번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같은 해 7월 제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차금봉(車今奉)의 후계자로 선임되었으며, 이후 지린성[吉林省] 지린에서 한위건(韓偉健)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썼다.


1931년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 소양교육 기관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고, 1932년 상하이[上海]에서 안형중(安炯仲)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 자금을 받았다. 1934년 모스크바의 외국문출판사 편집인이 되었으며, 1937년 6월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당)사건 관련 혐의로 검거되었다.

출처 :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79315


▷ (거제방송, 거제신문) 거제출신 독립운동가 양명 선생 (양일운 기자, 2007. 8. 16.) http://www.geoj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58


위 기사를 비롯한 양일운 기자의 '양명 바로알기' 시리즈 (기사 26건) http://www.geojenews.co.kr/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25&view_type=sm


▷ (거제시민뉴스) 양명(梁明)…비운의 독립운동가 “이국만리에서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겠다.” (2015. 4. 3.) http://www.geojesim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91


▷ (거제타임즈) [(발굴) 거제항일운동가를 찾아서] 양명, 문학인에서 혁명가로 (2003. 7. 7.) http://www.geoje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6


▶ 조원숙 (박상수 집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1906년(광무 10)∼미상.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부친은 조석구(趙錫龜)이고, 오빠는 조두원(趙斗元)이며, 여동생은 조옥화(趙玉花)이다. 남편은 양명(梁明)이다.


1924년 5월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발기인으로 가담하고 집행위원이 되어 사회주의사상 전파와 동지 규합 등에 힘썼다.


1925년 1월 화요회(火曜會)‧북풍회(北風會)의 영향을 받아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바로 풀려났다.


1927년 중앙여자청년동맹 상무위원 겸 서무부원‧근우회(槿友會) 집행위원‧강원도청년연맹 순회강연대원‧근우회 주최 재만(在滿)동포정음악대회 준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공산당 당원이 되어 1928년 2월까지 근우회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인 1945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海州)에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개최되자 참석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06_2_0025989


▷ (주간경향) [현대사 아리랑]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원숙 (813호, 2009. 2. 24.)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9351


▷ (설악신문) [설악의 근현대 인물사 1-14] 사회주의 여성운동주도 양양출신 조원숙 (2006. 12. 26.) http://soraknews.co.kr/renewal/kims7/bbs.php?table=news&query=view&uid=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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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했던 홍성사람들
이번영 지음 / 글을읽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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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홍성지방 근현대사. 그 중에서도 인물사, 또 대중운동사. 역사학 전공자의 서술이 아니다 보니 비록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 세대가 저물어 버리기 전에, 이와 같은 지역사, 주제사가 시급히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안,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든 무엇이든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끊임없이 기록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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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나왔네 하야시 아키코 시리즈
하야시 아키코 지음 / 한림출판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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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기 좋은 책. 아기가 관심있게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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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 간의 단절은 전 세계적인 경향이지만, 일본은 이제 끝장이 아닐까 싶은 지점까지 와 있는 것 같다. 서양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아직 영화화되기도 하고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최근에도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었다. 서구에는 이렇듯 모녀가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통의 문화, 규범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의 일본에는 그것이 없다."


  미즈무라 미나에의 서정적 서사는 패전 후 일본사회의 궤적을 기록하면서 그 과정에서 사라져간 것들을 애도하고 있다. 열두 살 때 뉴욕 주재원으로 발령 난 아버지를 따라 전 식구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20년간 미국에 살면서 오히려 일본과 일본어, 일본문학에 대한 향수와 동경을 키운다. 미나에의 작품이 발표되는 족족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 상대화의 경험에서 오는 균형과 원근감각 덕분일 것이다.

  


  1990년에 발표한 『속 명암』은 나쓰메 소세키가 미완으로 남긴 유작 『명암』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연장하여 완성시킨 소설이다. 충격을 불러일으킨 이 데뷔작으로 미나에는 예술선장 신인상(芸術選奨新人賞)을 수상하였다. 일본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사토 야스마사(佐藤泰正, 1917~2015)는 자신의 1994년 『国文学』기고 논문에서 미나에를 소세키의 계승자로 인정한 바 있다(논문 원문을 다음 페이지 http://dl.ndl.go.jp/info:ndljp/pid/6059878?tocOpened=1에서 검색하였는데 아직 찾지 못하였다).



  참고로 사토 야스마사는 2013년까지 글들을 묶은 12권짜리 저작집을 비롯하여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그 중에는 나쓰메 소세키에 관한 글도 다수 있다(위 이름의 하이퍼링크와 아래를 참조).



  알라딘에는 구분되어 있지 않은데, 다음 책들을 쓴 사토 야스마사는 다른 인물로 교육심리학자이다(1929~).



  미즈무라 미나에가 1995년에 발표한 『사소설 from left to right』는 가로쓰기로 이루어진 데다, 일본어 번역이 붙지 않은 영어가 전체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이중언어(biligual) 소설이다. 1996년 노마 문예상(野間文芸新人賞)을 수상하였다.



  대망의 『본격소설』은 2002년에 발표된 미나에의 세 번째 소설이다. 2002년 최고의 소설로 꼽히며 2003년 당당히 요미우리 문학상(読売文学賞)을 거머쥐었다(역대 수상작 목록은 다음 링크 https://en.wikipedia.org/wiki/Yomiuri_Prize 참조).



  Susan Chira (아래 책을 쓴 사람이다)가 쓴 다음 뉴욕타임즈 서평도 참고할 만하다. 서양인들에게는 『본격소설』이 얼마나 더 재미있었을까 싶다. http://www.nytimes.com/2013/12/15/books/review/a-true-novel-by-minae-mizumura.html 



  2008년작인 『영어 세기의 일본어 몰락(日本語が亡びるとき—英語の世紀の中で)』으로 2009년에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수상하였고, 2012년 『어머니의 유산-신간소설(母の遺産ー新聞小説)』(이번에도 장르명이 소설의 제목이 되었다)로 오사라기 지로상(大佛次郎賞)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다.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책들이 있다. 『필담』은 쓰지 구니오와 1996년 4월 7일부터 1997년 7월 27일까지 아사히신문에 연재한 왕복 서간을 정리한 책이다. 역시 김춘미 교수께서 잘 옮겨주셨다.



  미즈무라 미나에의 홈페이지가 영어와 일본어로 제공되고 있다.

  http://mizumuraminae.com/eng/

  http://mizumuraminae.com/index.html


  국내에서 출간된 논문이 많지 않으나,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한국어번역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인영 박사께서 글을 여럿 쓰셨다.


  오미정, "미즈무라 미나에의 『私小說 from left to right』 내러티브 분석 : 추방(Exile)과 탈출(Exodus)의 경계", 비교일본학, 통권 제31호 (2014), 127-149

  정인영, "일본현대소설에 나타난 메타픽션과 리얼리티 - 미즈무라 미나에(水村美苗) 『본격소설(本格小說)』론(論)", 세계문학비교연구, 통권 제52호 (2015), 141-163

  정인영, "미즈무라 미나에(水村美苗) 『私小説 from left to right』論 - 자전소설, 기억, 정체성", 일본연구, 통권 제69호 (2016), 109-128

  정인영, "미즈무라 "미나에(水村美苗) 『본격소설』 論 - 서양고전의 현대적·일본적 ‘다시쓰기’ -", 일본학연구, 통권 제49호 (2016), 199-219


  정인영 박사는 무라카미 하루키 번역에 관하여도 글을 여러 편 내셨는데, 흥미롭게도 다음과 같은 책들을 번역하셨다.



  소설가 김영하도 팟캐스트에서 『본격소설』을 다룬 적이 있다(링크 참조).


  한편 김춘미 교수는 대표적인 일본문학 번역가이다. 『김동인 연구』, 『21세기 일본문학 연구』, 『번역과 일본문학』 등을 쓰고, 『번역은 내 운명』을 함께 쓰고,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야마 겐지, 다니자키 준이치로, 다자이 오사무 등의 작품을 옮겼다.


 


  한국음악학회 회장을 지냈던 김춘미 소장과는 다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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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소설 - 하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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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소설‘적 전통과 이를 대비하기 위한 개념으로 창안된 서구의 ‘본격소설‘적 요소가 절묘하게 혼화되어, 일본 특유의 타나토스가 대단히 서정적으로 그려졌다. 상권보다 훨씬 빨리 읽히고, 『폭풍의 언덕』은 거의 의식되지 않는다. 애정어린 역자 후기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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