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인간, 그들을 보는 시


이번에 북인더갭에서 새로운 책을 출간했다. 제목은 '차브' 생면부지의 단어다. 경제학에 젬병인 탓에 불가피하게 인터넷을 검색하며 찾았다.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잉여인간'이다. 한국일보의 박주희 기자의 차브에 대한 설명이다. 

차브(chavs)는 영국에서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하는 신조어다. 영국사회에서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차브를 공격하는 법’ ‘차브를 마주치지 않는 루트가 담긴 여행상품’ 등 이들에 대한 비아냥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주류인사들은 차브를 ‘복지 식객’이라며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렇다고 차브가 불한당이거나 세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식충이는 아니다. 청소부, 슈퍼마켓 계산원, 패스트푸드 점원 등 평범한 노동자다. 그럼에도 이들은 “더러운 돼지” 취급을 받는다.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과 웨인 루니, 가수 셰릴 콜도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브라고 놀림 받는다. 이 단어는 2008년 옥스퍼드 사전에 정식 등재됐다.


중산층의 모멸대상인 차브, 그러나 그들은 어엿한 생존을 위한 노동을 지불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그러나 풍성할 수 없는 수입으로 삶을 겨우 '지탱'한다. 이 책에서 두 소녀의 실종 사건을 다루면서, 결국 두 소녀의 실종은 현상금을 노린 자작금임을 밝혀지면서 차브 계층에 대한 모욕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영국 시민들은 소녀의 부모를 비도덕적인 존재로 비아냥 거리며 '너희들은 어쩔 수 없다'라고 단정 짓는다. 현재 영국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들은 왜 차브가 되었는가? 먼저 잉여인간부터 들여다 보자. 잉여인간은 1958년 소설을 통해 생겨난 말이지만, 우습게도 <말죽거리 잔혹사>에 등장한다. 성정을 엉망으로 받아로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말한다. 

"너 대학 안가면 뭔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잉여(剩餘)는 사전적으로 쓰고난 나머지란 말이며, 사회적으로 있을 필요가 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를 뜻하다. 예를 들어 노숙자, 거지, 깡패, 저능아, 천민계층 등을 뜻한다. 차브를 번역하면 '잉여인간' 쯤 될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차브, 즉 잉여인간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저자는 정부와 언론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1980년 탈산업화 과정에서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 들고 소수가 이익을 독식하는 금융산업을 육성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된다. 노동은 존재의 가치로 인정하지 않고 경제적 효율로 보는 순간 노동과 돈을 치환시킨다. 노동계급의 소멸이 일어나고 비정규적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이 때 언론은 삶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의지로 몰아간다. 결국 가난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차브의 등장이 과연 개인의 문제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장하준은 그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동일한 일을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수십만원을 벌고, 어떤 나라에서는 고작 몇 달러에 머무는 현상을 찾아낸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에 10달러 이상 벌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게으른 탓인가? 그들이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장하준은 뉴델리의 버스기사와 스웨덴의 버스 기사 수입을 비교해 스웨덴이 뉴델리 버스보다 50이상 수입이 높다. 50배 이상 운전을 잘해서일까? 아니다. '보호주의 덕택'이다. 만약 스웨덴 버스 기사가 뉴델리 버스 기사와 함께 지원서를 낸다면 사장은 누구를 선택할까? 운전을 50배 잘하는 스웨덴 버스기사를 선택할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차브를 만드는 것은 저자의 주장처럼 개인의 능력차가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리 일해도 부자가 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적 구조와 법 때문이다.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도 어느새 '알바'와 시급제 노동자가 급속하게 많아졌다. 심지어 노동회사에서 기업에 파견하는 파견 노동자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형태다. 실제 현장 직원들과 동일한 시간에 출퇴근하고 동일한 작업을 해도 수입도 반도 안되는 경우가 많다. 작년 7월 10일 한겨레 신문에서는 바로 이점을 들면서 실제적으로 삼성이 모든것을 간섭하면서도 사고가 일어나거나 노동문제가 일어나면 파견된 노동자이기에 삼성 소관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다.(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595214.html


대형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직접 일했던 아줌마는 하루 8시간을 일해도 100만원도 안되는 수입에 질렸다면서 두 달만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수고한 노동에 비해 수입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대형마트가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입은 수억에 달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진짜 노동자는 착취 당하고 있는 것이다. 차브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생존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보수언론은 그들을 무능하고 게으론 존재, 복지비용이나 탐하는 존재로 낙인찍고 있다. 이러한 낙인 배후에는 구조적 착취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복지비용을 더욱 줄여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은 배분함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를 만들어 내고, 강화 시킨다. 출판사의 소개문을 그대로 옮겨 보자.


잘 알려진 대로 영국은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섬유, 탄광, 자동차 등 한때 잘나가는 제조업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대처가 집권하면서 거대한 탈산업화가 시작되었고, 영국은 금융과 정보, 엔터테인먼트 같은 비제조업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처는 노동조합을 강하게 탄압했고, 광부노조를 힘으로 굴복시킴으로써 노조가 더이상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90년대 집권한 신노동당은 더이상 노동계급의 당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노동 유연성을 강조했고 누구든 실력만 있으면 중간계급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대처 시대의 산업 구조조정으로 이미 좋은 일자리는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으며 그에 따른 결과는 참혹했다. 한때 존경받는 지역사회의 일원이자 안정된 소비층을 형성했던 노동계급은 사라지고 대형 할인마트 판매원, 콜센터 직원,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 경호원, 간병인, 중소 자영업자 같은 저숙련 일자리들이 주류를 차지했다. 이들 신 직업군은 바로 오늘날 끊임없이 경멸당하는 차브의 직업군과 일치한다. 


흔히 정치인들은 노동계급 개개인의 게으름과 열망없음이 차브 같은 부류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결정적인 원인은 다수 노동계급을 먹여살리는 산업들을 구조조정하고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금융 같은 산업에 올인한 정부가 제공한 것이다. 게다가 차브를 식객으로 몰아붙이는 언론인들과 정치인들은 하층민 사회를 경험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국 총리 제임스 캐머런 같은 부류는 대부분 사립학교 출신에다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와 부모의 재력과 연줄 덕분에 무급 인턴으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난 40년간 노조와 산업에 전쟁을 선포하고 소득세와 법인세를 낮춤으로써 부자들에게 돈을 퍼주었으며, 서민들의 세금(부가가치세 같은)은 올리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한바 상층의 부가 아래로 떨어진다는 ‘낙수 효과’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차브'는 곧 '낙인'이며, 라벨링 효과를 부른다. 차브라는 용어를 통해 그들을 차브라는 단어로 정의함으로 단어 안에 가운다. 그들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역겨워한다. 이곳에 또다른 배제와 차별이 존재한다. 낙인은 결국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며, 그들은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편견에 빠지게 된다. 차브 곧 잉여인간의 탄생은 가진 자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부당하고 비열한 계급구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교회, 가나안 성도에게 묻다!


가나안성도? 웬 뜬금 없는 말인가? 하수상하여 뜻을 물으니 거꾸로 읽으란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성도가 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하나는 '교회를 안가도 성도인가?'라는 질문과, 안나가는 성도를 통해 교회 밖 성도라는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다. 그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의 두 번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1세기에 맞는 시대적 요청이자 변화라고만 치부하게에 왠지 불안하고 어색하다. 교회 밖에도 성도, 즉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 안의 성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직설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면, 굳이 교회를 다니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의존적 신앙을 가진 교회 안 성도들에게 치명적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과장하면, 헌금, 봉사, 예배 참석 등을 하지 않아도 구원 얻을 수 있으며,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탓에 교회가 곧 국가였던 중세나 봉건사회는 안나가 성도의 출현은 불가능했고,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더 이상 가나안 성도를 배타적 시각으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종교적 관용의 시대에, 가나안 성도는 탈권위, 탈근대라는 사회적 현상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제 문제를 조금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탈교회 현상이 두드러지는 현상은 한국이라는 나라에만 일어나는 유일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  3세기 교부였던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곧 구원이라는 획일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고,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가 정하는 교회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교회 밖은 곧 성경 밖이고, 이단들을 의미했다. 3세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논쟁으로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교회는 분열되고 시끄러웠다. 이단에 대한 과감하고도 단호한 주장을 감행한 키프리아누스는 결국 다른 주교들로부터 파문의 위협을 받았고, 너무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키프리아누스의 과격함은 당시 일어났던 핍박으로 인한 배교의 문제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가나안성도와는 사뭇 다른 예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앞으로 일어날 교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적 선언이었다.


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로마의 멸망은 곧 교회의 기회였다. 로마의 멸망으로 치안과 문화적 공백이 일어나자 교회는 그 공백을 메꾸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회는 교회가 권력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쌓게 된다. 중세는 국가 위의 교회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현재 미국에서 대통령 선언시에 성경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은 중세적 영향이다. 국가는 나라 아래 있고, 교회가 국가의 수장을 결정하는 권력을 쥐게 된다. 카놋사의 굴욕은 국가의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첨예화된 다툼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교회로부터 나가려했고, 결국 영국의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통해 국가 위에 군림하던 교회는 국가 안에, 또는 국가 아래 내려앉는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탈교회화의 현상 중 하나였고 시민정신의 도래, 근대적 정신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시민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지도 구분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 당시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바로 재세례파다. 철저한 자유와 독립을 주장한 재세례파는 부모의 권위를 거부하여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국가의 교회 통치를 또한 거절한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이들은 결국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핍박을 받아야 했고, 시대의 선지자로서의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종교개혁 초기에 루터와 칼빈을 추종하던 재세례파는 개혁자들과 등을 지게 되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지 못한 개혁가들로 인해 핍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기회의 땅이 주어진다. 바로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아메리카로의 이주이다. 미국의 독립은 곧 교회의 독립이며, 관용과 자유의 땅으로서의 자치권을 부여 받게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교회는 시대적 요청에 응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카톨릭에서 교단 중심의 교회인 장로교단이 부흥하게 되고, 현재는 장로교단은 축소되고, 더욱 개교화된 회중교회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오순절교회의 출현과 회중교회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백을 메꾸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조직을 갖추게 된다. 결국 교회는 더욱 탈권위적 현상으로 인해 개교회화, 개인화가 일어난다. 조지 마스던은 그의 책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칼빈주의는, 미국 건국 운동의 기원을 이룬 17세기의 청교도에서, 그리고 대각성 운동 이후 회중주의로부터 분리한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침례교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침례교는 교회를, 회심을 체험한 개개인들의 자발적 협의체로 보는, 개인주의적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중앙 집권화에 대한 반대와, 칼빈주의적 신조주의는 제한을 받는다."(조지 마스던, p235)

 

 

거두절미하고, 가나안 성도는 탈권위적 시대의 산물이며, 교회는 이제 그 사실은 엄연한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중세적-봉건적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권위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 마치 자신들이 키프리아누스나 되는 것처럼 교회 밖 성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하며, 저주하기까지 한다. 이런 극렬한 반응은 무례한 기독교로의 귀결로 이어진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기독교는 가나안 성도는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가?를 묻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만을 트집 잡아 무례하게 정죄한다


2012년 김진호는 그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들을 재구성한다. 그는 1부에서 한국 교신교회의 과거를 추억하며 '시민 K, 교회에 나가다'를 탐색한다. 2부에서는 한국 개신교회의 오늘을 살피면서 '시민k, 교회를 나가다'를 풀어 간다. 그는 1부에서 '반공주의'와 한국교회의 은밀한 결탁을 추적한다. 현재 한국의 원로? 들은 대부분 월남자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미움과 적의가 있다.

 

"월남자 기독교도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이북신도대표회'의 중심에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가 있었다. 한국 선교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미국 북장로회가 한 목사의 든든한 후견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미국 정계의 보수, 반공주의적 인사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p72)

 

70-80 기하급수적으로 부흥한 한국교회는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물질주의에 빠지고, 한경직 목사를 위주로 한 권력에의 결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뉴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교회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우민화 정책을 추구한 한국교회는 깨어나는 시민정식을 억압한다. 탈권위적 시대에 권위적 목회를 지향한 한국교회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 침몰하기 시작한다. 장년성도에 비해 주일학교 학생수가 200%이상이었던 80년대에 비해, 현재는 고작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교인 고령화가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주일학교 학생이던 이들이 교회의 중직이 되고, 실제적인 일들을 처리하면서 당시의 추억을 되살려 주일학교를 되살리려하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교회는 더 이상 그들을 무지 속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불안해한다. 목회자들은 신처럼 떠받들던 이전의 교회는 탈권위적 사상을 현대 시민들에게는 우격다짐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90년대 이후 드러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성적 타락과 금권주의, 성장주의 등은 교인들에게 더 큰 실망과 아픔을 주었고, 결국 교회 안에 구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적 부조리에 침묵하고, 도리어 권력과 결탁하여 약자를 강제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점점 이웃 없는 종교가 되어 가고 있다. ... 시민 K는 이처럼 신이 된 자본, 자본이 된 신의 사회를 지향하는 교회를 떠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적대적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p175)

 

가나안 성도의 출몰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 교회는 배타적 강제로 가나안 성도를 부정하기를 중지해야 한다. 교회는 이제 가나안 성도에게 물어야 한다. 진지하게,

"당신은 왜 교회에 '안나가'십니까?"

가나안 성도의 출현은 분명 교회의 위기다. 그러나 토인비의 주장처럼 '도전'에 바르게 '응전'하는 것은 새로운 기회이다. 이제 그들은 인정하고, 어깨동무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곽재구의 산문 읽기


곽재구 교수의 산문집인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을 읽고 있다. 곽재구 라는 이름을 알게 된건 순전히 이 책 때문이다. 이 책보다 곽재구 교수는 <곽재구의 포구기행>이 유명하다. 이곳에 보면 장재인이란 교사 이야기가 나온다. 곽재구는 장재인에 대해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한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 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사실 이 문장은 곽재구의 것이 아닌 장재인의 유서의 첫 문장이다. 오공시절 민주화 투쟁의 삶을 살아가던 그. 그는 선생님이었다. 더 긴 이야기는 풀어 놓지 않아 그의 생애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아이들을 끔직히 사랑한 바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1990년 9월 1일 오후 두시 사십분, 영동 고속도로 상행선 육십이킬로미터 지범에서 강원여객 직행 버스가 과속으로 빗길을 질주하다 섬강교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탑승객 스물여덟 명 중 스물네 명이 사망한 대형 사고였다. 이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게 된 장재인이라는 앞서의 사내는 사고 발생 보름 만에 열여덟 페이지에 달하는 긴 유서를 남기고 이 지상을 떠났다." 204쪽


장재인은 아내를 사귀면서 <별>이라는 시를 쓴다. 아래는 별의 전문이다. 


별을 알기 전

가득함을 알았지만

별을 알고 나서

빈 마음을 알았습니다.


 

별을 알기 전

신념의 풍요를 알았지만

별을 알고 나서

풍요는 갈증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던가 별이 들어온 날

가슴은 별로 가득하였지만

그때부터 한 구석 빈 마음임을

개달았습니다.


 

별을 알기 전

고요인 줄 알았던 것이

별을 알고 나서 그것이

소용돌이 임을 알았습니다.


곽재구는 이렇게 평한다. 


"별을 알기 전에는 고요인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소용돌이라는 인식의 발견은 직접 그 별과의 추억에 잠기지 않은 사람에게는 쉬 찾아올 수 없는 것이다."211쪽


70년대 80년 학번을 가진 이들이라면 오공 육공의 군화발을 잘 알 것이다. 그가 말한 별은 바로 그 당시를 상징하는 언어다. 장재인을 소설화한 조해인은 <섬강에서 하늘까지>에서 장재인과 아내의 최영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검색해 보니 없다. 



모호하다. 그가 정확하게 어떻게 살았는가 없다. 단지 지금 같은 선생이 아니었다는 것, 그가 죽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곽재구는 장재인이란 사람을 단지 그가 쓴 글 때문에 소개하는지 모르겠다. 곽재구의 글은 묘한 아련함이 있다. 


이 책은 이미 절판 되었고 다시 재판할 생각은 없는가 보다. 안타깝게 중고 가격이 1000원이다. 이런! 이런 책이 천원이라니. 


요즘은 산문에 끌린다. 이것 저것 집어 들고 읽는다. 그중에서 최고는 역시 고인이된 박완서의 산문이다. 작년에 사 두었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다시 읽는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감으로 성경 읽기
김동문 글.사진 / 포이에마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경에서 비린내가 납니다.


예수는 부활을 경험하신 자신을 보고도 비린내 나는 고기 잡으러 돌아가 버린 제자들을 만나러 갈릴리 새벽녁에 제자들을 찾아 간다. 밤이 맞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한다. 여명이 밝아오는 수간에도 제자들은 허탈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해야했다. 그 때 누군가 다가와 소리친다. 

"고기가 있소?"

"아뇨. 없습니다."

"그럼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보시오!"

"그럴까요?"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21:6)


예수는 떡과 고기를 준비해 놓고 제자들을 불렀다. 아침을 같이 먹자고. 비린내 풀풀 나는 이른 아침은 예수와 제자들은 함께 갈릴리 호수가에 앉았다. 


성경에서 비린내가 나기 시작한다. 그동안 왜 물고기에서 나오는 비린내를 맡지 못했을까? 텍스트에 천착하라는 주해가들의 이야기는 귀전에 흘리고 정제된 성경 만을 읽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똥 냄새도 맡지 못했고, 우슬초의 신맛을 맛 보지 못했다. 에서가 입고 털 옷의 촉감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고도 우리는 성경을 읽었다고 자부했다. 밋밋하고 재미 없는 성경 읽기를 때문에 성경의 맛을 잃어 버렸다. 유대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에 꿀을 발라 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우린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책은 생생한 성경 읽기를 회복 하도록 돕는다. 삶의 정황 속에서 말씀으로 살아가셨던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성경을 삶으로 읽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개념화되고 교리에 종속된 성경 읽기가 아닌 민낯의 성경을 체험해야 한다. 


김동문선교사는 한국외대에서 아랍어를 전공했고, 총신 신학대학원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을 배웠다. 이후 이집트와 요르단 등 아랍과 이슬람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한국이 아는 중동과 중동 현장에서 보고 체험한 중동이 너무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생활을 성경 읽기와 접목한다. 성경은 단순히 문자로만 읽어서는 안 된고 삶의 정황 속에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때 그 곳에서 일어났던 사람들의 소리, 냄새, 촉감 등을 상상하며 읽어야 제대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음식 냄새 못지 않게 중요한 냄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르는 기름, 즉 '향유'입니다. 그 시절 향수는 아주 귀했는데, 이는 천연 식물성 재료를 이용하여 향유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켤 때 사용하던 연료로서의 기름 냄새도 일상에서 맡을 수 있는 대표적인 냄새이지요. .. 질이 좋지 않는 기름을 사용하여 불을 밝힐 때는 그을음과 격한 냄새가 같이 납니다." 61쪽



아직 등잔을 밝힐 때 기억이 난다. 기름에 따라 냄새가 달랐고, 빛의 색도 달랐다. 너무 어려 무슨 기름을 사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할머니는 그 등불 아래서 항상 바느질을 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하여 중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등잔에서 빛만 생각하고,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 참 이상하다. 하여튼 이 책은 우리가 간과하고 놓치기 쉬운 성경 속 정황들을 찾도로 도와 준다. 성경을 연구하는 목회자나 신학생, 교사들과 성경을 재미있게 읽고 픈 교인들에게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동체로 산다는 것
크리스틴 폴 지음, 권영주.박지은 옮김 / 죠이선교회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동체는 경작되는 것이다. 


 

위로는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신영복 교수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한 말이다. 이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히게 하는 문장이 한 두 곳이 아니라 그냥 넘어갈 법도 한데 도무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었다. 독서는 이런 맛에 하는 것이다. 울림이 있는 문장은 평범함 속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김훈도 지난달(201410)에 있었던 나는 왜 쓰는가?’의 강연에서 중간 중간에 강한 문장을 갖다놔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거기에 의지해서 십여 줄이 나간다. 이러한 문장은 목마른 사막 속에서 만나는 오아시스다. 목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공동체는 없을까? 함께 비를 맞고,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뉴밀레니엄 시대가 되면서 한국교회는 처절할 만큼 곤두박질치고 있다. 잘나가던 대형교회 목사들이 성추행과 폭행, 공금횡령 등의 온갖 비리에 얽히면서 영적 세계가 탁해져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 같이 방황하고 있으며, 목자들은 자기 배만 불리고 있다. 안락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현대교회 교인들에게 더 이상 헌신과 충성은 눈 씻고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지금 피상적 만남과 관계로 인해 아름다운 공동체가 요구되고 있다. 가슴 설레게 하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상처 받고 다른 교회를 떠돌아다니는 교인들을 무작정 비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영적 호흡이 끊어져 숨이 막혀 죽어가는 공동체는 더 이상 변화의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완전한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절대적 평가를 믿고 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거나 찾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가? 현대교회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했고, 해야 할 질문들이다. 우리의 고민들을 조금 덜어줄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크리스틴 폴의 <공동체로 산다는 것>이 그 주인공이다.

 

저자는 공동체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탐색하면서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네 가지의 원리를 소개한다. 하나는 감사’, 두 번째는 약속’, 세 번째는 진실’, 마지막 네 번째는 손 대접이다. 네 축을 중심으로 공동체는 움직여진다.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나에게는 약속 지키기와 진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중에 어기는 약속들은 서로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친밀성을 파괴한다. 예를 들어보자. 내일 오전 열시에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아무런 연락도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약속 어김은 자신에 대한 배신이며, 상대방에 대한 무례이다. 하나님은 언약(言約, 약속)의 하나님이시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에 근거하여 순종하는 이들이다. 공동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은 거대한 위협이 아니라 사소한 약속을 깨뜨리는 무례함이다.

 


약속의 의미를 좀 더 확장시켜 보자. 그 공동체에 매주 토요일 저녁 6시에 모임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몇 몇의 불성실한 일원들 때문에 전체 공동체가 맥이 빠지고 낙담하게 된다면 이것 또한 큰 문제다. 공동체는 나만의 유일함으로 영위되지 않는다. 서로의 희생과 양보, 헌신을 통해 더욱 강화되고 친밀함은 높아지는 법이다. 초대교회가 강력한 힘을 발휘 했던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내가 아닌 서로를 위해 존재했고, 함께 했기 때문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고, 고난 없이 영광 없다. 공동체도 마찬 가지다. 사랑은 반드시 희생의 대가가 필요하며, 신뢰는 상대방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아름다운 정원은 정원사의 땀과 노력이 필요하듯 아름다운 공동체 역시 사람들의 헌신과 수고가 필요하다. 갈 길이 멀다. 몇 문장으로 공동체를 논하기는 버겁다. 그러나 방향은 잡은 것 같다. 공동체는 경작(耕作) 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