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과 수다의 미학
올 초(2014)에 구입해 읽은 세셀 앤드류스의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에 보면 여자들의 잡담이 가지는 힘을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한다. 유치찬란한 표지 때문인지 적지 않은 거부감을 가진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순전히 독서모임에서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했는데, 전혀 시대감각이 없는 표지 덕택에 좋은 책 한 권 못 읽을 뻔 했다. 출판사는 이러한 무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탁월한 책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유치찬란한 표지 말이다.
"행복" 이 단어는 이 책의 중요한 주제이자 화두다. 첫장에서 행복은 타인에게서 오며, 둘째장에서는 '함께'할때 행복이 온다고 말한다. 함께를 깨드리는 주범은 '불평등'이다.
불평등은 행복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다. 우리는 나보다 권력이 많고 부유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비통함과 시기심, 적대감을 더 많이 느낀다.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1장에서 말했듯 타인에게서 온다. 어떤 방법으로, 함께 즉 공동체를 통해 온다. 공동체는 '나'를 보는 거울로서의 '너'와의 만남이며, '나와 너'가 포용과 관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우리'다. 서로를 인정하되 나를 잃어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은 평등한 대화가 존재할 때 가능하다.
우리는 공동체가 왜 중요하진 알아야 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는 많다. 공동체는 행복의 기본적 욕구인 타인과의 관계를 충족 시킨다. 공동체 활동을 통해 우리는 행복감과 안정감, 소속감을 더많이 느낄 수 있다. 공공선에 대한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다. 또한 공동체를 통해 타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공익의 중요성도 인식하게 된다.
부동산과 남편, 자녀들의 이야기만 뺀다면 여자들의 모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서로의 마음이 질펀하게 널리는 곳, 은밀한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친밀함과 신실함이 가능한 곳, 바로 그곳은 여자들의 공동체이다.
문제는 이러한 여자들의 모임이 항상 정부나 남자들의 경계의 대상이었다. 때론 방정 맞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쓸데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한다는 모함도 받았다. 특히 여자들의 대화는 가정으로까지 이어져 남편들의 싸움이 되기도 했다. 부정적 생각과 편견은 여자들의 모임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사회적 강제와 탄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바로 책 읽는 여자
<엄마의 책방>은 네 명의 여성 저자들의 '수다 모음집'이다. 김성리의 프롤로그에서 엄마에대해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진주조개는 오랜 시간을 상처와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영롱한 진주를 생산해낸다. 진주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진주조개가 겪었던 고통의 체험은 보이지 않고, 보석으로서의 진주만 보인다. 엄마란 바로 이 진주조개와 같다.
참 맞는 말이다. 영롱함만 보이고,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를 대하는 위험한 관점이다. 엄마는 외롭다. 엄마는 화가난다. 엄마는 자유를 원한다. 엄마는 '책을 읽고 싶다.' 한 권 한 권 질근질근 씹어가면 책을 풀어낸다. 모두 여자 이야기다. 그곳에서 잃어버린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아 간다.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그림 해설집이다. 오로지 독서하는 여자들의 그림만 모았다. 엄마가 책을 읽는다. 하녀가 책을 엿본다. 후궁이 소설을 읽는다. 남편이 본다. 주인이 본다. 왕이 본다. 독서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그릇된 정신을 갖게 될 것이고, 남편보다 똑똑하면 남편을 쥐고 흔들 수도 있고, 주인에게 대항할 수 있다. 아내들의 지적질은 순전히 독서에서 올 수도 있다. 모름지기 여자는 적당히 어리석고 순진해야 한다. 책은 그것을 방해한다.
플루타르코스의 <수다에 관하여>는 기원후 50년에서 120년까지 그리스에서 살았던 실제 인물이다. 그가 수다에 관하여 말한다. 고전이니 꼭 기억했다가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전형적인 일본 작가인 사이토 다키시의 <잡담이 능력이다>는 대화법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불필요해 보이는 잡담이 진짜 대화법임을 소개한다.
엄기호의 <단속사회>에 보면 '질문하면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화상담원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질문이 차단되어있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듣는 것이며, 온갖 욕설과 비판, 비아냥과 성희롱까지 다 받아 내야 한다. 말할 권리는 없고 듣는 의무만 존재한다. 이러한 일방적 대화구조는 우울증을 앓는다.
'고객'이라는 사람들이 전화로 폭언을 내뱉거나 성희롱하더라도 상담원들은 먼저 전화를 끊으면 안 된다. 그 '고객'에게 항의하거나 질문할 권리도 없다.
대화가 차단된 사회는 병이 든 것이다. 일방적 강요만 요구하는 조직은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상부의 지시만을 따라야하고, 고객의 감정 배설처로만 사용된다면 더이상 존재의미는 없다. 그는 1장 제목을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로 정했다. 근래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소통이 없다. 학교도, 교회도, 부녀회도 일방적이다. 강요만 있고, 설득과 대화는 없다.
정치 공동체의 핵심은 '말하는' 데 있다. 즉 정치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 서로 토론하고 경합하면서, '공론'을 형성해 가는 것이다.
민주주의 핵심은 평등이다. 모두가 한 표이다. 이것은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주도권을 쥐고 일방적이지 않아야 한다. 평등한 시간, 평등한 발언권이 보장될 때 진전하 대화가 가능하다. 우리의 일상이 행복한 이유는 바로 평등한 대화를 곳곳에서 누리기 때문이다. 평등한 대화는 친구만 가능하다. 부자간의 갈등 원인 대화의 부족이 아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잔소리' 때문이다. 수다는 권위를 버리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행복이다.